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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연구 총정리〓/바울 서신

바울은 누구인가?

by 【고동엽】 2023. 1. 22.

제1장

바울은 누구인가?

 

바울은 누구인가?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든지 바울에 대해 얼마간의 지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 바울은 예수님 다음으로 많이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바울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했으며, 그의 핵심적인 메시지와 신학/사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바울은 어떤 사람인가? 그의 출생과 삶과 죽음은 어떠했는가? 그가 출생하고 활동했던 주후 1세기의 헬라-로마 사회는 어떠했으며, 그의 혈통과 신앙과 사상의 뿌리였던 유대교는 어떤 상황에 있었는가? 그의 가정과 교육 배경은 어떠한가? 그의 전 삶을 이끌어간 핵심적인 사상은 무엇인가? 왜 그는 어릴 때 그의 고향 다소를 떠나 예루살렘의 가말리엘 문하에 들어가서 철저한 바리새인 랍비 교육을 받았는가?(행 22:2-3; 26:3-10; 빌 3:5-8) 왜 그는 초대 기독교 신자들을 그렇게 핍박했는가?(행 9:1-9; 갈 1:13-14; 고전 15:5) 그가 바리새인으로서 초대 기독교인 신자들을 극렬하게 핍박했을 때 그는 어떤 신앙을 갖고 있었는가?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극렬한 기독교 박해자가 아닌 열렬한 기독교 복음 전파자로 살아가게 했는가?(행 9:19-30; 갈 1:13-21) 왜 그는 그 자신이 유대인이면서 유대교를 비판했으며, 결국 유대교를 떠났는가?(빌 3:4-9) 왜 그는 안디옥, 에베소, 데살로니가, 빌립보, 고린도 등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지역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행 13-21장), 이들 교회에 편지를 보냈는가? 왜 그는 선교 사역 기간 중에 적대자들을 만나게 되었는가? 이 적대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이방인인가, 아니면 유대인인가? 왜 그는 자신이 세운 교회들로부터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모았으며, 왜 그 헌금을 갖고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직접 방문했는가?(롬 15:22-28; 행 21장) 왜 그는 로마 교회 방문을 그토록 원했으며, 왜 온갖 핍박을 감수해 가면서 아시아와 유럽과 나아가서 당시 땅 끝이라고 불렸던 스페인에까지 복음을 전하려 했는가?(롬 15:28) 그는 과연 우리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사도요, 복음 전도자요, 목회자요, 선교사요, 교육가요, 신학자요, 문필가인가? 그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는 과연 예수님의 참된 제자인가? 아니면, 어떤 학자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임의로 해석하거나 예수님과는 다른 교훈을 가르쳤는가?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의도하지 않았던 기독교를 창설했는가?

 

 

1.바울에 관한 역사적 자료

 

과거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그에 관한 역사적 자료의 양과 신임성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아무리 잘 알려져 있었다 할지라도, 그에 대하여 믿을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남아 있지 않는 한, 우리는 그에 대하여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바울에 관한 믿을 만한 역사적 자료는 무엇인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예수님은 단 한편의 글도 남기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믿을 만한 역사적 자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적어도 30년이 지나서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 사복음서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과 달리 바울은 주후 40년에서 60년 사이의 그의 목회와 선교 활동을 통해 세워진 교회들에게 보낸 여러 통의 편지들을 남기고 있다. 또한 누가복음서의 저자인 누가가 쓴 사도행전 역시 믿을 만한 자료로 볼 수 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오순절의 성령 강림 이후 사도들의 복음 전파와 교회의 확장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내용의 반 이상이 바울의 선교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행 13-28장). 그런 점에서 우리는 바울에 대하여는 상당히 신뢰할 만한 역사적 자료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바울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고 있다. 학자들마다 바울에 대하여 의견이 다른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바울이 많은 사람들에게 다르게 보일 만큼 천(千)의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에 관한 역사적 자료의 규정과 그 신임성과 해석에 있어서 제각기 의견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자료 사용에 있어서 의견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상 바울에 관해 우리가 믿을 만한 역사적 자료는 주후 40년대에서 60년대 사이에 바울이 기록했다고 간주되는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 등 13서신과, 누가가 쓴 사도행전 외에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성경의 자료를 제외하고는 바울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주후 1세기의 그 어떤 역사적 자료도 갖고 있지 않은 셈이다. 그의 가정과 가계를 밝혀 줄 수 있는 족보나 호적등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교육 배경을 보여 줄 수 있는 생활기록표나 성적표도 갖고 있지 않다. 더욱이 그의 선교일지나 일기는 물론 그가 개척하고 목회한 교회의 당회록도 없으며, 심지어 그의 무덤에 세워졌을지 모르는 비석조차 남아 있지 않다. 주후 2세기와 3세기에 걸쳐 쓰여진 바울행전, 라오디게아서신, 세네카와 바울의 교환 서신, 바울의 제자 디도의 서신, 바울의 순교, 바울과 베드로의 행전 등이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이 대부분 정경의 어떤 부분이나 교회 전설 등을 헬라-로마의 소설 양식에 맞추어 쓴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바울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일을 했으며, 그의 사상과 신학이 어떠한가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서신들을 얼마나 믿을 만한 역사적 자료로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이들 자료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해석하고 종합하는지에 달려 있다.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특별히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보수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바울에 대한 견해가 현격하게 다른 주된 이유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들의 역사적 신임성에 대한 그들의 견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복음적이며 보수주의적인 입장에 서 있는 학자들은 누가가 쓴 사도행전을 사실에 충실한 역사적 자료로 받아들이고,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신약 성경의 13서신도 바울에 의해 쓰여졌다고 믿는다. 반면에, 대다수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사도 행전의 역사성을 대단히 낮게 평가할 뿐 아니라, 바울의 13서신 중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등 일곱 개의 서신만을 진정한 바울의 서신으로, 그리고 이 서신들만을 바울과 관련해 믿을 수 있는 일차적이고 역사적인 문헌으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자료 문제부터 서로 차이가 있으니, 바울에 대한 견해도 많은 점에서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오늘날 바울을 보다 더 자세히 알고자 하거나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역사적 자료 문제와 관련해 자신이 어느 입장에 서서 시작할 것인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우리의 바울 연구는, 근본적으로 복음주의적이며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따른다. 우리는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13서신이 진정한 바울의 서신들이며, 누가가 쓴 사도행전이 역사적 신임성을 갖고 있다는 확신 아래 시작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우리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증명의 부담은 바울의 13서신들을 신뢰할 수 있는 바울의 서신으로, 누가의 사도행전을 역사적 신임성을 갖는 문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의 13서신이 모두 바울의 진정한 서신이 아니라는 것과 누가의 사도행전이 역사적 신임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나 절대적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가 바울이 쓴 13서신과 누가가 쓴 사도행전의 역사적 신임성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것이 곧 바울 연구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때로 우리는 바울의 서신들간의 차이점, 바울의 서신들과 사도행전 사이의 차이점, 그리고 심지어는 사도행전 내에서의 차이점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율법 문제와 관련해 바울이 갈라디아서보다도 로마서에서 더 긍정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또한 갈라디아서 2장 1-10에 기록된 바울의 예루살렘 공의회 방문은 바울 서신에서는 바울의 두번째 예루살렘 방문으로 소개되는 반면에, 누가가 쓴 사도행전 15장에서는 그의 세번째 예루살렘 방문으로 되어 있다-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의 두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11장의 바울의 부조헌금 전달 방문이다. 또한 사도행전에는 바울의 다메섹 사건에 대한 서술이 세번에 걸쳐 나타나는데(9장, 22장, 26장), 이들 세번의 방문 사건들이 모든 면에서 정확하게 동일하지는 않다.

우리가 바울 서신들 사이에, 바울 서신들과 사도행전 사이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사도행전 내부에서 때로 만나게 되는 차이점들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를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비록 바울 서신들과 사도행전이 역사적 신임성을 갖고는 있을지라도-상기시켜 준다. 엄밀한 의미에서 바울의 모든 서신들은 도서관이나 연구실에서 순전히 객관적인 역사를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여 직접 개척했거나 자신과 깊은 관계가 있는 개인이나 교회에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쓰여진 목회적이고 상황적인 서신들이다. 이 점에서 누가의 사도행전도 예외가 아니다. 설령 사도행전이 초대 교회의 역사서로 분류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사도행전이 오늘 우리 시대의 역사-과학적인 방법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누가 자신의 신학적, 목회적, 변증적, 선교적인 관점에서 쓰여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의 서신들과 누가가 쓴 사도행전을 통해 바울의 생애와 그의 신학을 재구성하기 위해 바울의 서신들과 사도행전에 대한 통시적(diachronic)이고 공시적(synchronic)인 양면적 접근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아무리 우리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연구 방법을 동원할지라도, 연구의 대상에 대한 신뢰의 정도가 우리의 연구 자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바울의 가정과 교육 배경

 

바울의 출생과 그의 부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역사적 자료는 사실상 전무(全無)하다. 다만 우리는 사도행전 21:39과 22:3에 근거해 바울은 팔레스틴 유대 본토가 아니라 길리기아 지역에 위치한 대학 교육 도시인 다소에서 다소성의 시민으로, 그리고 사도행전 22:25과 28절에 근거해 그가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자로 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빌립보서 3:5, 고린도후서 11:22, 로마서 11:1, 사도행전 23:6 등에 근거해 바울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 베냐민 지파의 후손이며, 바리새인인 뼈대 있는 유대인 이민자 가정(디아스포라)에서 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유대 이름인 사울과 로마 이름인 바울을 갖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유대인인 바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다소성은 물론 당시 유대인으로서는 좀처럼 얻기 어려운 로마 시민권을 얻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바울이 선교하면서 천막 기술자로 일했던 점에 비추어(행 18:3; 고전 4:12; 고후 11:27), 바울의 집안이 다소에서 천막을 생산하는 중소기업가였으며, 바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다소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에 천막을 공급하는 등 로마 제국에 공헌해 시민권을 얻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어쨌든 바울이 출생할 때부터 다소와 로마의 시민권자였다는 것과, 그 집안이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이민자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예루살렘에 유학을 보내어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공부하게 했다는 점을 보아, 바울의 집안이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부유하고 뼈대 있는 유대인 가정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의 출생 연대를 확실하게 밝혀 줄 자료는 없지만, 그가 주후 30년대 초반에 이미 스데반을 위시하여 초대 기독교인을 핍박하는 데 앞장 설만큼 당시 유대 바리새파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부각된 점을 감안해 볼 때, 당시 바울의 나이는 적어도 25살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주전 4-6년경에 출생한 것으로 보이는 예수님보다 8-9년 뒤인 주후 4-5년경에 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사도행전 22:3에 나오는 바울의 말,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예루살렘)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엄한 교훈을 받았고”에 근거해 바울의 유아 시절에 그의 가정이 이미 예루살렘으로 이주했으며, 따라서 바울은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성장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 서신에 나타난 여러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다른 견해를 제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6:4에서 바울이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말하는 점, 바울이 헬라어를 모국어처럼 완벽하게 사용하고 수사학과 헬라적 문체를 자유롭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 그가 다메섹 사건 후 고향인 길리기아에 가서 7, 8년간 선교 사역을 했다는 점(갈 1:21-24절 참조), 그가 3차에 걸쳐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주로 헬라어를 사용하는 도시들을 중심으로 선교했다는 점, 특별히 그의 서신에 나타난 구약 인용이 대부분 희랍어 성경인 70인역(LXX)에서 왔다는 점, 바울 자신이 자기를 가리켜 ‘다소 사람’으로 부르는 점, 본격적인 율법 공부가 만 12살부터 시작한다는 점 등을 감안해 볼 때, 바울의 가정이 그의 유아 시절에 예루살렘으로 이주했으며, 따라서 바울은 유아 시절부터 예루살렘에서 자랐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바울이 만 12살까지 다소에 있으면서 헬라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헬라의 초등 교육과 중등교육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바울이 다소에 있는 동안에는 유대적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바울 자신이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자신이 유대인들의 모국어인 아람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임을 주장하고 있고, 실제로 그가 예루살렘 성에서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모국어인 아람어로 말한 것과(행 22:2), 바울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집안까지도 당대 유대교 보존에 가장 앞장 선 바리새파라고 한 것 등(행 23:6)은, 바울의 부모가 바울이 다소에 있을 때부터 가정이나 회당에서 유대인들의 모국어인 아람어를 사용하도록 했으며, 율법 등을 철저하게 가르쳐 이교도 헬라 문화의 아들이 아닌 유대교의 정통파 바리새인의 아들로 성장하게 했음을 보여 준다. 물론 바울이 본격적인 율법과 바리새인 교육을 받은 것은 12살 이후 예루살렘에 유학 가서 가말리엘 문하에 있을 때였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갈라디아서 1:14에 나오는 바울의 말,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는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생 중에서 성적이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으며, 누구보다도 율법에 정통하고 유대 민족의 정체성과 종교와 문화를 보존하고 전파하는 데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음을 말해 준다.

바울은 젊었을 때 이미 결혼해 가정을 가졌었는가? 바울이 본격적인 선교 사역을 하면서 독신으로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고전 7:7-8 참조), 이것은 바울이 예수님처럼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가? 우리 중 그 누구도 바울의 결혼 여부에 관해 절대적인 확신을 갖기는 어렵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 준수에 힘쓰는 바리새인 집안에서 출생했으며, 독처(獨妻)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율법(창 2:18) 역시 필수적 의무사항으로 알고 지켰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고린도전서 7장, 에베소서 5장 등에 나타나는 것처럼 바울이 부부생활을 잘 알고 있다고 하는 점 등을 미루어 보건대, 바울이 평생 독신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때 결혼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바울 자신이 자기의 자녀들에 대해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는 것을 보아 그가 한때 결혼은 했으나 일찍이 아내와 사별했거나, 아니면 빌립보서 3:8의 언급처럼,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직업과 유산은 물론 여전히 바리새파 집안으로 남아 있고자 하는 부모를 포함해 가정까지 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3. 바울이 초대 기독교인을 핍박한 이유

 

왜 바울은 초대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을 섰는가? 누가는 사도행전 7:58(참조 22:20)에서 유대인들에게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증거하고, 그 대신 유대교의 중심인 율법과 성전을 비판했던 스데반이 순교할 당시 바울을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켜 주는 청년”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9장에 가서는 바울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자로 소개하고 있다. 누가에 따르면, 바울은 집에 숨어 있는 기독교인들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으며(행 8:3), 회당에서 그들을 때렸으며(행 22:19), 심지어 그들을 죽이기까지 했다(행 22:4; 26:10; 9:1). 바울이 초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을 섰다는 사실은 바울의 서신 여러 곳에서도 증언되고 있다(고전 15:9; 갈 1:13-14).

바울은 무슨 이유로 초대 기독교 신자들, 특별히 스데반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헬라계 유대인 신자들을 박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가?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그 자신이 동년배 중 누구보다도 조상들의 유전, 말하자면 유대 종교의 핵심인 율법에 대한 지나친 ‘열심’(zhlwthv")을 갖고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갈 1:13; 빌 3:5-6). 즉 과거에 자신의 율법에 대한 지나친 열심과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행했던 핍박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 자신이 사용했던 ‘열심’이란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열심’은 바울 자신이 한때 갈릴리를 중심으로 유대 독립을 위해 일어났던 열심당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일찍이 민수기 25:1-18에서 제사장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하나님에 대한 열심 때문에 이방 여인과 부정한 행위를 하는 이스라엘 남자를 창으로 찔러 죽인 것과 맛디아 형제들이 유대인으로서 유대적 신앙을 저버리고 헬라 제국에 동조하는 배교자 동족들을 쳐서 죽인 그런 종교적인 열심을 뜻한다(참조, 시 106:31; 제 1 마카비서 2:21, 26, 54; 제 2 마카비서 6:13; 제 4 마카비서 18:12). 말하자면 사도행전 22:3에 나타나는 것처럼, 바울은 유대 종교에 대한 열심, 곧 바리새인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 이스라엘 민족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메시야에 대한 신앙, 율법 준수가 유대인의 정체성의 보존은 물론 의(義)에 이를 수 있는 수단이라는 율법주의적 신앙,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며, 이방인은 죄인이라는 선민신앙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 유대 종교(특히 성전, 율법)와 신앙에 도전하는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강한 증오감을 갖고 있었고, 이로 인해 만일 필요하다면 그들을 죽여서라도 자신의 유대 종교와 신앙을 고수하려고 했던 것이다. 바울은 특별히 그가 바리새인으로 있었을 때, 빌립보서 3:5-9에 나타나는 것처럼, 율법에 대한 자신의 열심이 크면 클수록,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그런 행위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쌓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이 같은 바울의 종교적 열심은 그로 하여금 유대 종교 안에 일어난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를 박멸하는 데까지 이른다. 갈라디아서 1:13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잔해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잔해하다’(ejpovrqoun)라는 말이다. 이 말은 갈라디아서 1:22과 사도행전 9:21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사실상 이 말은 강하고 거센 폭력을 동반하는 잔악한 행동을 가리킨다. 특별히 이 말이 ‘핍박하다’(ejdivwkon)라는 말과 함께 헬라어 원문상으로 행동의 계속성을 강조하는 미완료 과거시제로 사용되는 것은, 바울의 교회 핍박이 일시적이 아니고 교회가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누가는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이외의 신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고 보도한다(행 8:1).

그렇다면 바울이 그토록 초대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그는 초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을 섰는가? 왜 그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조상들의 전승에 대한 강한 열심을 갖게 되었는가? 바울이 초대 기독교인들 핍박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그가 누구 못지않게 초대 기독교인들과 그들의 신앙에 관해 상당한 이해가 있었고, 또한 그것을 전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가 모르고서 그런 행동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1:23에서 바울 자신이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보아, 바울이 초대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대해 몰랐다고 보기는 힘들다. 적어도 그는 초대 기독교회의 핵심적인 메시지(케류그마), 곧 십자가에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그가 죽음에서 다시 부활했다는 것과, 그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은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과, 이제 성전이나 율법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인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초대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모두 거짓된 것으로, 또한 그 자신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유대교에 심히 위협적인 것으로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특별히 스데반을 중심으로 한 헬라계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유대 민족의 신앙과 생활의 중심이던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에 도전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누구보다도 강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파멸을 예고했을 때, 당시 유대의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이 이것을 예수님을 처형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삼았던 것처럼(막 14:58; 마 26:51; 요 2:19), 주로 신앙적 동기 때문에 외지에 살다가 본토에 돌아온 헬라계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유대 종교 보존에 힘쓰는 바리새파 출신인 바울에게, 성전과 율법을 비판하고 나사렛 예수를 좇는 스데반을 중심으로 한 헬라계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은 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바울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이미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미혹하고 유대교를 위협했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처형한 나사렛 예수를 유대 민족이 기다리는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주님으로 고백하고 전파하는 것을 볼 때, 더더욱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잘 알고 있는 신명기 21:22의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에 근거할 때, 당시 십자가 처형을 받은 예수는 단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에 불과한데, 당시 기독교 신자들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오히려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 전파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성모독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후일 그는 그 자신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았다”(갈 3:13)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전에 그가 생각했던 나사렛 예수는 백성들을 거짓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선생이요, 결국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한 청년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나사렛 예수를 추종하는 초대 기독교인들 역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자로 확신하고 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 설 수 있었던 것이다.

 

 

4. 다메섹 사건: 바울의 회심과 소명

 

초대 기독교 공동체를 말살하려 했던 바울이 어떻게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확장시키는 데 앞장을 서는 사도가 되었는가? 사도행전 9장에 따르면,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를 매우 핍박했고, 그것도 모자라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약 230km나 떨어진 다메섹으로 피신한 기독교인들까지 붙잡아 오기 위해서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 그 곳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모든 삶과 사고와 사상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킨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가 그토록 저주했던 거짓된 메시야이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고 생각했던 그 나사렛 예수가, 이제 오히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찬란한 빛 가운데서 바울에게 직접 나타났기 때문이다(고전 15:8; Cf. 행 9:3-5; 26:16-18). 단순히 심리적 환상 가운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일찍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경우처럼 가시적으로 바울에게 직접 나타나신 것이다. 특별히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서 다메섹에서 자신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설명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보이셨다’(w[fqh)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사실을 설명하면서 사용했던 단어(고전 15:5, 7)와 일치한다. 바울은 이처럼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을 부활하신 예수를 친히 본 제자들과 동일한 경험의 소유자로 나타내고 있다(고전 15:5-12).

우리는, 고린도전서 9:1에서도 바울이 주님을 직접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사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초기 기독교에 대한 격렬한 핍박자인 그가 기독교복음의 열렬한 전파자로 바뀐 사실을 설명하기 어렵다. 바울은 오히려 자신이 한때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스스로를 메시야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자처하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고 생각해 핍박했던 그 예수를 오히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에게 그의 아들로 계시하셨다”(갈 1:16)고 증언하고 있다. 자신이 핍박했던 그 나사렛 예수가 이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구약 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되어 왔던 ‘메시야’로,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모든 이방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할 ‘종말론적인 구원자’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시는 ‘주님’으로 그에게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온 세상에 나타내실 결정적인 구원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그에게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 순간 자신이 지금까지 핍박했던 기독교인들과 그들의 메시지가 옳았으며, 반면에 자신이 신뢰해 왔던 유대교 바리새파 신앙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우주적인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는 단순히 로마 제국의 속박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메시야가 아니라, 율법의 저주와 죽음과 사탄의 세력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 그들을 대신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대속자, 구원자, 고난의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자신과 자기 동족에게 배척과 걸림돌이 되어 왔던 나사렛 예수와 그를 믿고 따르는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이 오히려 이제는 그 자신과 모든 유대 민족을 구원하고 새롭게 하는 근원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곧 율법에 의한 의/구원을 추구하는 자신의 바리새파 신학이 산산이 부서지고 그 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구원을 추구하는 십자가의 신학이 그 자신의 전 존재를 이끌어 가는 중심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빌 3:7-9; 고후 4:6).

다메섹 사건을 통해 참된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율법이 저주의 상징으로 규정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이 그동안 유대교에서 주장해 온 것처럼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죄 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대속적 죽음이며,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세우신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깨닫게 되었다(고전 15:3-5).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바울은 비로소 죄의 권세 앞에서 인간을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 줄 수 없는 율법의 무능력 및 인간의 절망적 상황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예수님을 통한 새로운 은총과 의와 구원의 길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의해 지금까지 유대인과 이방인을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나누었던 율법의 분리 기능이 사실상 끝났고(롬 10:4) 따라서 구원 문제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롬 3:27-28).

또한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 갖게 되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율법과 육(肉)을 그 중심으로 삼고 있는 옛 세계가 심판을 받고, 또한 그의 부활과 함께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고후 5:17; 갈 6:1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두지 않으시며,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임은 물론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롬 3:26-30; 4:16-24; 10:12; 갈 3:28). 그는 일찍이 철저한 바리새파 신학자로서 죽은 자의 부활과 이방인도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되는 새 시대의 도래를 믿고 있었다. 또한 그는 죽은 자의 부활과 새 시대의 도래는 현 시대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미래에 나타날 일, 곧 현재의 역사가 끝나는 마지막 때에 주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4Q246; Sirach 4:10; 4 Ezra 7:28-9; 13:3,37,52; 14:9).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가 부활하신 몸으로 그에게 직접 나타났을 때, 즉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것으로 생각한 그 종말론적인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일어난 것을 보았을 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 세상’이 ‘오는 세상’으로 바뀌게 되며, 옛 세계 안에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다메섹 사건에서 바울은 또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갈 1:15-16; 고전 9:1; 15:8-10; 행 9:15; 22:10; 26:16-

18). 마치 이사야와 예레미야 선지자처럼(사 42:7; 49:1,6; 렘 1:5), 그는 다메섹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인에게 전파하는 소명을 받은 것이다. 이전에 그가 그토록 거부했던 그 복음, 곧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모든 불경건한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은혜로운 소식을 이제 자신의 입으로 전파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구태여 사도행전의 증언에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더라도(행 26:11-18), 바울 자신이 갈라디아서 1:16 하반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자신에게 계시하신 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파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로마서 1:1,5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구별되고 은혜와 사도직을 받았다고 한 것(역시, 살전 2:4; 고전 1:17) 등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울에게 나타남과 동시에 새로운 사명이 그에게 주어졌을 때, 지난날의 율법에 대한 그의 강한 열심이 이제는 복음에 대한 열심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가 추구했던 ‘율법의 행위에 의한 의’가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의’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지난날 자신이 추구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실로 다메섹 사건은 바울에게 있어서 놀라운 체험인 동시에 전혀 다른 가치를 얻게 된 계기였다(빌 3:6). 지난날 그가 행한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이 크면 클수록 그의 변화와 회심은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그는 복음의 핍박자가 아닌 전파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왜냐하면 복음의 원수였던 그를 부르시고 오히려 복음의 옹호자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진정한 복음의 실제를 알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5. 다메섹 사건 후 선교 여행 전까지

 

바울의 다메섹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 연대를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도행전 저자가 바울의 다메섹 사건을 초대 교회 역사 초기에 두고 있으며, 바울 자신도 그의 서신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동시에 자신에게도 보이셨다고 고백하는 것을 볼 때(고전 15:3-8), 다메섹 사건이 AD 30년 4월에 있었던 예수님의 부활과 시간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이 다메섹 사건 3년 후를 가리키는 갈라디아서 1:18과, 그로부터 다시 14년 후를 말하는 갈라디아서 2:1의 예루살렘 공의회에 근거해, 다메섹 사건 연대를 AD 32년 전후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일 여러 학자들의 주장처럼, 바울의 회심과 소명이 주후 32년경 이루어졌다면, 또한, 사도행전 13장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바울의 제1차 선교 여행이 주후 46년경에 시작되었다면, 약 14년 동안 바울은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 이 문제에 관해 바울은 갈라디아서 1:17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후 3년만에 내가 게바(베드로)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일을 유할새 … 그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 십사년 후에 내가 (안디옥으로부터)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 갔노니.”

갈라디아서 1:17-2:10에서 바울은 친히 자신의 초기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거기서 다메섹 사건이 있은 후, 즉시 아라비아와 다메섹에 가서 3년을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후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를 만났으며, 자기 고향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역도 방문했고,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에서 14년간 목회를 한 후, 14년째 되는 해에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가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들을 만났다고 말한다. 사도행전 9-12장은 이 문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즉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직후 잠시 소경이 되어 다메섹에 내려갔으며, 그 곳에서 아나니아의 도움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으며(행 9:8-22), 그러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바나바의 도움으로 사도들을 만났다. 그런 다음 바울은 자신의 고향 다소로 갔다(9:23-30).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에 따르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로 파송받은 바나바가 다소에 가서 바울을 자신과 함께 안디옥 교회의 동사목회자로 초청했으며(11:25-26), 바나바와 바울은 본격적인 해외 선교 여행을 떠날 때까지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했다. 만일 이것이 바울이 다메섹 사건 후 본격적인 선교 여행을 하기 전까지의 그의 생애의 주요 궤적이라면, 우리는 바울이 아라비아와 다메섹에 거주하는 3년 동안, 그리고 안디옥 교회에 목회자로 초청받기 전까지 그의 고향 다소에 머문 동안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 목회하면서 무엇을 했는지에 관한 의문을 갖게 된다. 사실상 이 14년이라는 기간은 바울의 제3차에 걸친 선교 여행 및 로마 체류 기간과 맞먹는 긴 기간이며, 바울의 신학 형성에 대단히 중요한 기간으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 동안의 바울의 사역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메섹 사건 이후 바울은 아라비아와 다메섹에서 3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 어떤 주석가들은 바울이 다메섹 사건 직후 아라비아로 간 것은 그에게 있어서 다메섹 사건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그 곳에 가서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물론 아라비아에 가서 바울이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보냈을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겠지만, 바울이 그 일을 목적으로 아라비아로 갔다고 보기는 힘들다. 갈라디아서 본문은 다메섹 사건 후 바울이 광야가 아니라 아라비아로 갔다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이 그 곳에 간 것은 다메섹에서 받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이에 대해 두 가지 근거를 들 수 있다. 첫째, 바울은 고린도후서 11:32에서 자신이 당시 아라비아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나비티아 왕국 아레다 왕(BC 9-AD 40)의 박해를 받았던 것을 언급하는데, 만일 그가 아라비아에 가서 조용히 기도와 묵상이나 했더라면, 그는 그런 박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다메섹에서 박해를 받았다는 것은 바울이 그 곳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둘째, 사도행전 9:22은 바울이 다메섹 사건 직후부터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임을 열심히 전파했다고 말하는데, 그가 다메섹에서 그렇게 했다면 인접한 지역인 아라비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바울이 다메섹과 아라비아에서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은 그가 그후 고향 다소에 가서도 복음을 전파했던 것을 생각나게 한다. 갈라디아 1:21 이하에 나오는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는 바울의 증언과 사도행전 11:25-26에 기록된 바나바가 바울을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된 안디옥 교회 목회자로 초청하기 위해 다소로 찾아갔던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바울이 이미 다소에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음을 전제하게 한다. 그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유대 지역에 그와 같은 소문도 나지 않았을 것이고, 바나바가 다소까지 바울을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본격적인 선교 여행을 떠날 때까지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한 기간이 얼마인지, 또한 그 곳에서 목회하는 동안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사도행전 11:25-30에 근거해 우리는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열심히 무리들을 가르쳐 주위의 사람들이 이들을 유대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 부를 만큼 기독 교회의 정체성을 확립시켰고, 교회를 크게 성장시켰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와는 달리 이방인 신자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 이미 이방인 선교 사역을 활발히 하고 있는 바울을 안디옥 교회의 동사 목회자로 초청한 것 같다. 어쨌든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 옴으로써 안디옥 교회가 내적으로, 외적으로 크게 부흥했음은, 주후 43년경 예루살렘 지역에 큰 흉년이 들어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웠을 때 안디옥 교회가 부조 헌금을 모아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한 것과(행 11:28-30; 12:25),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최초의 해외 선교사로 파송한 일과(행 13:1-3), 모세의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가르치는 유대주의 교사들이 안디옥 교회에 찾아 왔을 때 이를 거부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나바와 바울을 예루살렘에 파송한 일(행 15:15:1-29; 갈 2:1-10) 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모름지기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다메섹 사건을 통해서 깨닫게 된 복음을 목회 현장을 통해 더욱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감화 아래 구약성경으로부터 자신의 신학도 더욱 체계화시키는 기회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6. 바울의 선교 여행

 

바울 자신은 그의 서신에서 자신의 선교 여행에 관해 자세히 기술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누가가 쓴 사도행전은 전체의 반 이상이 되는 13장부터 마지막 장인 28장까지 전폭적으로 사도 바울에 관해, 특별히 그의 3차에 걸친 아시아와 유럽 지역의 선교 여행과 로마 방문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바울은 왜 선교 여행을 떠났는가? 누가는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의 선교 여행이 성령의 지시에 의해 시작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즉 성령께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도록 지시하신 것이다. 이미 다메섹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아라비아와 다소 지역에서 10년 이상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했던 바울이기에 그가 목회했던 안디옥 교회에 이방인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했음이 분명하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9:16 이하에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하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또한 로마서 1:14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증언하는 것을 볼 때, 바울은 다메섹 사건을 통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은 직후부터 모든 사람들, 특별히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파하는 것을 자신의 피할 수 없는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다메섹 사건 이후 그는 바로 이 복음 전파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교회의 핍박자였던 자신을 은혜 가운데서 부르셨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다메섹 사건 직후부터 복음 전파에 힘썼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고 보는 것은 충분한 개연성을 지닌다. 이제 10년 가까운 선교 경험과, 4-5년간의 안디옥 교회 목회를 통해 바울의 복음 이해와 신학이 보다 성숙해졌을 때, 주님은 성령을 통해 안디옥 교회 지도자를 감동시켜 바울을 바나바와 함께 해외 선교사로 파송하도록 한 것 같다. 이때가 Riesner의 주장처럼, 주후 46년경이었을 것이다.

1) 제1차 선교 여행

사도 행전의 저자 누가에 따르면, 바울 일행은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 실루기아에 내려가서 거기서 배타고 약 155km 거리에 있는 구브로 섬으로 갔다. 구브로 섬에 가서 살라미와 구브로 지역의 수도인 바보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주로 그 곳에 있는 유대인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그 때 그 곳의 총독 서기오 바울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다(행 13:4-12). 그런 다음 바보에서 배타고 현재의 터어키 남쪽에 있는 버가로 갔고, 버가에서 다시 비시디아 안디옥에 가서 안식일 회당에 참석한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관심을 갖고 회당에 찾아온 이방인들(이들을 누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파했다(행 13:14-41).

이곳에서 바울이 전파한 핵심적인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모세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시겠다고 약속한 그 메시야이며, 그럼에도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십자가에 처형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주님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온 세상의 구원자가 되셨다. 이어서 바울은 누구든지 율법과 관계없이 예수님을 믿으면 주께서 이루신 그 의를 우리가 덧입게 되어 구원에 이른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설교했다. 이것은 바울 신학의 핵심적인 교리인 이신칭의가,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바울의 이방 선교를 통해 발달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선교 여행 전에 확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다시 말해서 바울 신학의 핵심인 이신칭의 메시지는 이방 선교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이신칭의 교리가 바울로 하여금 이방 선교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두번째 안식일에 온 성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13:44), 이 때에 그 곳에 사는 유대인들이 바울의 선교 사역을 반대하게 되어 바울은 이방인 선교에 더 주력하게 되었다(13:45-51). 그 후 바울 일행은 안디옥을 떠나 이고니온으로 가서 그 곳에 있는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여기에서도 유대인들의 저항을 받았다(14:1-6). 그래서 바울 일행은 다시 그 곳을 떠나 루스드라와 더베 등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14:6-18).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 곳까지 찾아와서 바울을 돌로 쳐서 성밖에 내던졌다. 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이와 같은 심한 박해를 받았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더베에서 복음을 전해 많은 제자를 삼았으며(14:19-21), 그런 다음 복음을 전했던 지역들, 곧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쳐 교회들을 돌아보고 첫 출발지였던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다.

바울의 첫 선교 여행지와 관련해 역사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바울이 이들 지역에 세운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냈는가 하는 문제다. 물론 바울의 서신 가운데 이들 교회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여 보낸 편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적지 않은 학자들은 바울의 초기 서신 중의 하나인 갈라디아서를 바울이 제1차 선교 여행시에 세운 이들 교회에 보낸 편지로 본다. 왜냐하면 바울 당시 이들 지역이 로마 행정 구역상으로 갈라디아 지역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바울이 일반적으로 교회를 호칭할 때 로마 행정구역상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감안할 때(고전 16:19), 이와 같은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더구나 갈라디아서의 중심 주제 중의 하나가 바울이 첫 선교 여행시에 전파했던 이신칭의 메시지이며,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반대자들이 유대주의자들임을 감안할 때, 갈라디아서를 바울의 첫 선교 여행 때 세워진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로 보는 것은 타당성을 지닌다.

 

2) 제2차 선교 여행

바울의 제2차 선교 여행은 주후 48/49년경에 개최된 것으로 보이는 예루살렘 공의회와 안디옥 사건 직후에 이루어졌다. 나중에 우리가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바울이 안디옥 교회와 그의 1차 선교 여행지에서 전파한 이신칭의의 교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지만(갈 2:1-10; 행 15:7-11), 안디옥 사건을 통해 베드로와 바나바는 이신칭의 교리에 배치되는 행동을 했다(갈 2:11-15). 그래서 바울의 제2차 선교 여행은 바나바의 동행 없이 바울 단독으로 이루어졌다.

바울은 마가 대신 실라를 선교 조력자로 삼은 후 안디옥을 떠나 먼저 자신이 안디옥 교회에 부름 받기 전에 복음을 전파했던 자신의 고향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역에 가서 그 곳에 세운 교회들을 돌보았다. 그런 다음 제1차 선교 여행시에 복음을 전파했던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등 여러 지역을 방문해 교회들을 돌보고, 복음을 전파하고,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부탁한 규례를 가르쳐 준수하게 했다(행 16:1-5). 그런 다음 바울은 소아시아 북쪽 지역에 가서 계속 복음을 전파하려 했으나, 성령께서 아시아보다 유럽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파할 것을 지시했다(행 16:6-10). 그래서 바울은 실라와 그리고 루스드라에서 새로운 조력자로 선택된 디모데와 함께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유럽의 관문인 빌립보 성에 들어갔다. 빌립보 성에서 바울은 자주 장수 루디아 가정과, 귀신들린 여자와, 그리고 옥에 갇힌 바울 일행을 지켰던 간수 가정에 복음을 전했다. 아마도 이들이 빌립보 교회의 모체가 되었을 것이다.

빌립보를 떠나 바울은 로마의 대로를 따라 빌립보로부터 약 150km떨어진 데살로니가로 갔고, 거기 있는 유대인 회당에서 3주 동안 복음을 전했는데, 유대인 회당에 참여했던 많은 이방인들, 특별히 그 지역의 귀부인들이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곳에서도 유대인들은 바울을 대적했다(17:1-9). 그래서 바울은 베뢰아로 가서 그 곳에 있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전파한 복음을 받아들였다(17:10-12).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 곳까지 찾아와서 바울을 반대했기 때문에 바울은 헬라의 고도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갔다(17:16-18:1).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그 곳에서 로마 교회의 신자이며, 바울처럼 천막업을 하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가정에 머물면서 1년 6개월 동안 복음을 전파하고 고린도 교회를 설립했다. 고린도에서 복음 전파 사역을 하는 동안 적지 않은 유대인들의 도전을 받았으나 바울은 좌절하지 않았다(18:2-17). 그후 바울은 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에베소로 건너왔고, 다시 에베소에서 배편을 이용하여 가이사랴와 예루살렘을 거쳐, 선교 출발지였던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3) 제3차 선교여행

바울은 얼마 동안 안디옥에서 머물었다가 다시 그의 1차 선교지인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을 돌보기 위해서 세번째 선교 여행을 떠났다. 바울은 먼저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잠시 둘러 본 후 그가 2차 선교 여행시 염두에 두었던 에베소로 갔다. 에베소에서 바울은 일찍이 세례 요한을 따랐던 12제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으며(19:1-7), 그 곳에 있는 유대인 회당과 두란노 서원을 중심으로 2년 동안 복음을 전파하고 많은 이적을 행했다. 그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였으나, 아데미 신전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사람이 백성들을 충동하여 바울을 반대하고 도전했다(19:23-41).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 지역에 가서 그 곳에 세운 교회들을 돌보면서 석달을 체류했다. 그런 다음 바울은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드로아에 왔고, 밀레노에 가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잠깐 만난 다음, 배편을 이용해 두로로 가서 2년 동안 그 곳에서 머물었다. 그런 다음 가이사랴를 거쳐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많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갔다(20:1-21:17).

 

4) 죄수로서 로마 압송과 로마에서 바울의 활동

예루살렘에 와서 바울은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을 만나 그들에게 그 동안의 선교 보고를 했다(행 21:15-19).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에 체류하는 동안 그 곳에 사는 유대인들의 강한 도전을 받게 되었으며, 마침내 대제사장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고소를 받아 당시 로마 총독 벨렉스에 의해 2년 동안 가이사랴에서 감옥생활을 했다(21:20-24:27). 벨렉스의 뒤를 이어 베스도가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이 다시 바울을 고소했다(25:1-2). 그래서 바울은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특별한 잘못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석방하려 했으나,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로서 자신의 문제를 로마 황제에게 직접 호소했기 때문에, 바울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배편으로 로마로 압송되었다(25:3-27:1).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는 동안 유라굴라라는 큰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되는 등 죽음의 위험을 당하기도 했으나, 마침내 로마에 도착했다(27:2-28:16). 사도행전 저자 누가에 따르면, 바울은 로마에 도착한 후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행동에 제재를 받지 않고 2년 동안 유대인들과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담대하게 전파했다(28:17-31).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에 거주한 지 2년 후에는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전혀 기록하지 않고, 바울 자신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그 후 바울은 자유로운 몸이 되어, 그가 로마서에서 언급한 대로(롬 1:11-15; 15:14-32), 스페인에 가서 잠시 복음을 전했고(I Clem. 5:5-7), 그런 다음 로마에서 유대인들의 모함으로 다시 체포되어 주후 63/64년경 네로 황제 때에 순교했다(Eusebius, Church History 2.22). 그는 참으로 디모데후서 4:7에서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다메섹 사건 이후 오직 성령을 따라 그리스도만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자신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자”라고 할 수 있다.

 

 

 

 

 

 

 

 

 

 

 

 

 

 

 

 

 

 

 

 

제2장

바울과 예루살렘 공의회

그리고 안디옥 사건

 

 

 

 

 

 

1.바울과 예루살렘 공의회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그의 회심 사건 후 3년 뒤 게바(시몬 베드로)를 만나기 위한 그의 첫번째 예루살렘 방문에 관해서는 짤막하게 언급하는 반면(1:18-20), 그의 두번째 예루살렘 방문(2:1-10)에 관해서는 길고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자신의 첫번째 예루살렘 방문과 관련해 바울은 자기가 왜 게바를 방문했는지, 왜 베드로와 함께 15일 동안 있었는지, 그리고 서로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두번째 예루살렘 방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1) 그것은 계시에 의해 이루어졌다(2:1); (2)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전파했던 그 복음을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제시했다(2:2); (3) 거짓 형제들이 바울과 함께 있던 디도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바울은 그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2:3-5); (4)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이방인을 위한 바울의 복음에 대하여 그 어떤 것도 첨부하지 않았다(2:6-8); (5) 야고보, 베드로, 요한은 바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 곧 이방인을 위한 바울의 복음과 그의 사도직을 인정했다(2:9); (6) 그들은 다만 바울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줄 것을 부탁했는데, 이것은 이미 바울이 그 동안도 힘써 행해 왔던 것이다(2:10).

왜 바울은 그의 첫번째 예루살렘 방문과는 달리 두번째 방문에 대해 자세하게 말하는 것일까? 갈라디아서 2장에 나타나는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과 관련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방문이 사도행전 15장에 나타나는 바울의 예루살렘 공의회 방문과 동일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C. K. Barrett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 문제는 사실상 “바울의 모든 서신들 가운데서, 아마도 전 신약성경 가운데서,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역사적 문제 중의 하나”다. 핵심적인 문제는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과 관련해, 누가의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기록과 바울의 갈라디아서에 나타나 있는 기록과의 관계 문제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두 번의 예루살렘 방문만을 언급하고 있다. 즉 그의 회심/소명 후 3년 뒤에 있었던 첫번째 방문과(1:18-20), 14년 뒤에 있었던 두번째 방문(2:1-10)이다. 하지만 누가의 사도행전은 적어도 바울이 예루살렘을 다섯 번이나 방문했음을 보여 준다: (1)회심/소명 직후 방문(9:26-30); (2) 부조금을 전달하기 위한 기근 방문(11:27-30); (3) 예루살렘 회의 방문(15:1-30); (4) 성급한 방문(18:22); (5) 모금 헌금 전달 방문(21:15-17).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바울의 두번째 예루살렘(2:1-10)을 사도행전에서 두번째로 나타나는 바울의 기근 방문(11:25-30)과 동일시한다.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갈라디아서 2장에 있는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을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 방문과 동일시한다. 우리는 다음의 사실과 관련해 후자의 입장을 선호한다. 누가에 따르면, 사도행전 11:27-30에 나오는 바울의 기근 방문은 기근 방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11장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그 어떤 회합도 가졌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로부터 받은 부조금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아니라 장로들에게 전달하도록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만을 말할 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갈라디아서 2:1-10은 사도행전 11장에서 말하는 부조금 전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갈라디아서 2:1-10의 내용을 사도행전 11:27-30의 내용과 동일시하려는 이론은 잘못된 전제 위에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갈라디아서 1, 2장에서 바울이 자신의 모든 예루살렘 방문을 수록했으며, 따라서 사도행전 11:27-30의 방문도 생략할 수 없었다는 전제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목적과 문학적 장르가 누가의 사도행전과 다르다는 점과, 따라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자신의 부조 방문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바로 예루살렘 공의회 방문을 말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갈라디아서 2:1-10의 내용과 사도행전 15장의 내용 사이에, 즉 바울의 방문 목적, 안디옥 교회의 상황, 문제가 되는 이슈, 바울과 예루살렘 지도자들 사이의 합의 등에 관해 많은 유사점이 있기 때문에 양자를 다른 사건으로 보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 2:1-10에서 소개되는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의 주요 기능은 무엇인가? 이 문단의 첫 부분인 2:1-2에서 바울은 그가 예루살렘을 두번째 방문한 동기(계시에 대한 응답)와 목적(이방인들에게 전파한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복음 제시)을 밝힌다. 두번째 부분인 2:3-5에서는, 그가 디도에게 할례를 받도록 요구한 거짓된 형제들을 복음의 진리 때문에 어떻게 저항했는가를 말한다. 마지막 셋째 부분인 2:6-10에서는 그의 방문의 결과를 설명한다. 즉 예루살렘 교회는 자신의 복음을 변경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마치 베드로가 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사명을 맡은 것처럼, 바울이 이방인을 위해 부름 받은 사도라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말한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그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소환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받은 계시에 순종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의 신학자 James Dunn이 지적한 바와 같이, 계시 때문에 예루살렘 여행을 하게 되었다는 바울의 주장은 그의 방문이 예루살렘 모(母)교회로부터 소환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배제한다. ‘계시에 따라’(kata; ajpokavluyin)라는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그것이 사적이든, 공적이든, 일종의 성령의 특별한 사역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은 크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바울이 여기서 자신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하게 응답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에게도 충실하게 응답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의 인도하심과 관련해, 갈라디아서 3:1-4에 나타난 것처럼, 그리스도와 성령을 따라 사는 바울과 그렇지 않은 갈라디아인의 삶의 모습과의 좋은 대조를 보여 준다. 바울은 자신이 계시를 따랐다고 강조함으로써 진정한 복음, 곧 자신이 선포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속히 떠나 다른 복음(율법 중심)을 따르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더 나아가서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자신이 전한 복음에 순종하도록 자신을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2:5 참조)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갔을 때,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전파했던 그 복음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특별히 야고보, 베드로, 요한에게 제시했다. 그러나 2:2에 나타나는 “나는 내가 지금 이방인들 가운데 전파하고 있는 그 복음을 저들에게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저들 지도자들에게 그렇게 했는데, 그것은 내가 달려왔거나, 혹은 지금 내가 달리는 것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는 바울의 진술은 그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않았음을 말해 주고 있다.

갈라디아서에는 바울이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받은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의 타당성을 의심했음을 보여 주는 그 어떤 암시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이것의 신적(神的) 기원을 확신하고 있다.(1:1, 11-12) 바울은 사람의 시인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1:10) 그렇다면, 왜 바울은 자신의 복음을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제시했는가? 바울이 그렇게 한 주된 목적은, 그리스도의 한 복음에 근거해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과의 하나됨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상관없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 필요하며, 하나의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의 하나님의 백성만이 있을 뿐이었다.(참조 1:23) 만일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 복음의 신적 기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방인들에 대한 그의 선교는 극한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물론 이것이 바울이 지역 교회들 사이의 차이점이나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차이점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바울은 양자 사이의 차이점을 인정하면서도(참조 1:2,22; 2:7-10, 15),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됨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3:26-29; 6:15-16; 고전 12:13) 실로 하나됨은 그의 회심시에 그에게 계시되었던 묵시적 복음의 핵심적인 열쇠다. 즉 바울의 복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분없이 새로운 창조,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한 백성을 선포하고 가져오는 묵시적 복음이었다. 그는 바로 이 계시에 충실하게 응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고, 이 묵시적 복음에 대한 믿음이 가져올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 그의 복음을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자발적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분리주의자가 아니며, 그의 복음도 분파를 조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오히려, 우리가 곧 살펴 볼 안디옥 사건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베드로가 교회의 하나됨에 거스르는 행위를 했던 안디옥 사건은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유를 밝혀 준다.

바울이 그의 복음을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제시했을 때, 그들은 바울이 제시한 복음(율법으로부터의 자유)에 아무 것도 더하지 않았다. 그들은 디도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디도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하나의 복음에 근거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이 확립되었다. 물론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짓 형제들이 있었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일시라도 복종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이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는 진리를 계속 유지했다. 바울은 초지일관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동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참된 모델로 제시했다. 심지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인 야고보, 베드로, 요한도 바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 즉 이방인들에 대한 바울의 복음과 사도직을 인정하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신청했다(2:7-9).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바울의 복음을 인정하고 이방인들에 대한 그의 선교를 인정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동등하며 모두 죄악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바울의 복음을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갈라디아에 찾아 온 그의 반대자들은 바울의 선교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인정마저 깨뜨리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그의 두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자세하게 말하고 있는가? 바울이 그의 두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설명할 때 사용한 많은 중요한 용어들, 이를테면, ‘할례’(2:3), ‘예루살렘’(2:1), ‘복음’(2:2,7), ‘강요’(2:3), ‘거짓 형제들’(2:4), ‘예속’(2:4), ‘자유’(2:4), ‘복음의 진리’(2:5), ‘은혜’(2:9), ‘이방인’(2:2,8,9), ‘할례자들’(2:7,8,9) 등은 3장 이하에서 갈라디아 교회 문제를 지적할 때도 반복해 사용된다. 이것은 바울이 예루살렘 방문에서 취했던 행동과 갈라디아 교인들의 행동을 서로 대조시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예루살렘에서 복음의 진리에 입각한 그의 모범적인 행동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왜 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고 복음의 진리에 서야 하는가를 상기시켜 준다.

 

 

 

 

2. 안디옥 사건: 바울과 베드로

 

갈라디아서 2:11-21에 보면,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사도(바울)가 사도(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한 사건이 언급되어 있다. 소위 안디옥 사건으로 불리워지는 이 사건은, G. M. G. Barclay가 지적한 바와 같이, 갈라디아와 초대 교회의 이슈는 물론 바울의 삶과 그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바울은 안디옥 사건을 갈라디아서 1,2장에 있는 자신의 자서전적 이야기의 절정에 두면서, 바울이 확고히 잡고있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와 그 다음 장들에서 전개될 메시지를 미리 내다보게 한다. 우선 안디옥 사건은 바울의 자서전의 기록 목적을 선명하게 밝혀 준다.

안디옥 사건에 나타난 바울의 행동과 베드로의 행동 사이의 대조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바울의 이해와 응답(복음을 따르는 삶)을 대변하고 있다. 바울은 이 안디옥 사건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복음의 진리 편에 서 있는 자신의 행동을 따를 것을 주장한다. 주석가 F. J. Matera의 말을 빌린다면, “안디옥 사건은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두 종류의 행동, 곧 베드로와 바울의 행동 사이의 날카로운 대조를 보여 준다. 베드로는 외부적 압력으로 인해 복음의 진리와 일치하지 못한 행동을 한 반면, 바울은 외부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동했다. 따라서 그들 스스로 이와 유사한 압력을 받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제 베드로의 행동을 따를 것인지, 바울의 행동을 따를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안디옥 사건에 대한 역사적인 재구성 문제는 신약학계에서 최근까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갈라디아서 2:2-10에 있는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이 사도행전 15장에 있는 예루살렘 공의회 방문과 동일한 것이라면, 안디옥 사건은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공의회 후에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안디옥 사건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제시된다: 1) 사건 자체에 대한 바울의 서술 단위(2:11-14a), 2) 사건과 관련된 바울의 스피치(설교적 교훈) 단위(2:14b-21). 전자는 사건 자체의 개요를 말하고, 후자는 사건의 의미와 적용에 관해 말한다.

 

1) 안디옥 사건의 개요(2:11-14a)

안디옥 사건의 주된 이슈는 무엇인가? 왜 베드로는 안디옥에 왔으며, 왜 처음에는 이방인과 거리낌없이 음식을 먹다가 나중에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 자신을 이방인으로부터 분리시켰는가? 바울은 무엇 때문에 면전에서 베드로를 책망했는가? 갈라디아서 2:11-14에 나타난 안디옥 사건의 개요는 바울 편의 설명만으로 기록된 것이다. 그것은 베드로, 바나바, 혹은 야고보로부터 온 사람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안디옥 사건의 개요는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 자신의 서신적/수사학적 목적과 다른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건 자체에 대한 보도는 두 절, 곧 2:12-13에 제한되어 있다. 나머지 부분은 바울의 개인적 사건 해석을 보여 준다.

베드로는 실제로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처럼 살도록 강요했는가? 그는 사람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복음에 반대했는가? 야고보의 사람들은 실제로 안디옥에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마치 후일 바울의 반대자들이 갈라디아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모세의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했는가? 바울은 베드로로 하여금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따르게 한 야고보의 사람들을 반대하지 않았는가? 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베드로를 주된 공격의 타깃으로 삼고 있는가? 갈라디아서 2:12-13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답변을 제공하지 않는다. 본문을 거울 삼아 역사적 정황을 재구성하는 소위 ‘거울독법’(Mirror-Reading)도 안디옥 사건의 역사적 정황을 재구성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안디옥 사건의 내용은 바울 자신의 수사학적 목적을 완전히 걸러내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2:12은 베드로가 식탁 교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을 명백히 지적하는데, 본문은 그가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처럼 살도록 강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야고보로부터 온 할례자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2:12). C. C. Hill이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는 ‘야고보의 사람들’이 안디옥에 찾아온 것은 이방인 신자들의 행동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들의 행동 때문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야고보가 베드로에게 자기 사람들을 보낸 이유는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 신자들이 음식과 정결에 관한 유대인들의 규례를 저버리는 위험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바리새파에 가까운 자라는 평판을 받고 있던 야고보의 입장에서 볼 때, 베드로의 행동은 너무 자유분방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자기 사람들을 베드로에게 보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 것 같다: “당신은 우리가 예루살렘에서 이러한 일에 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오.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처럼 생활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유대인들이 이방인처럼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 것은 아니었소.”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한 목적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처음에 그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 신자들과의 식탁 교제에 참여한 것은 사뭇 놀랄만한 일이다. 안디옥에 있는 바울과 이방인 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베드로의 행동은 복음의 진리를 생활화하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놓인 사회-종교적 장벽을 무너뜨리는 위험스러운 것이었다(갈 3:28). 그렇지만,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베드로의 행동은 유대인들의 특징적인 사회-민족적이고, 종교적인 정체성과 삶의 스타일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대다수의 유대인 신자들은, 비록 그들이 메시야 예수 운동에는 동참했을지라도, 여전히 충실한 유대인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 운동을 유대교로부터 독립된 또 다른 종교가 아니라 유대교 내의 하나의 메시야적 개혁운동으로 간주했다.

James Dunn은 주후 1세기 중엽의 사회-정치적 상황이 예수 운동에 참여한 유대인들에게 스스로 충성된 유대인임을 보이도록 하는 외부적인 압력이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정황을 고려해 본다면, 베드로에 대한 야고보의 메시지나 야고보에 대한 베드로의 응답은 충분히 이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바울의 관점에서 볼 때, 베드로의 행동은 바울의 복음과 사도직은 물론, 바울의 복음에 그 토대를 두고 있던 이방인 신자들의 새로운 정체성과 삶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것을 보았기 때문에, 베드로를 면전에서 반대하고, 그를 공개적으로 책망했던 것이다. 심지어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을 “스스로 책망받을 일 한 것”(2:11), “위선적인 것”(2:13),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은 일을 한 것”(2:14), “이방인 신자들을 억지로 유대인의 삶을 살도록 강요한 것”(2:14b)으로 규정한다.

E. P. Sanders의 주장처럼, 우리는 베드로에 대한 바울의 과격한 반응에 대해 “상황을 지나치게 흑백으로 만드는 극단적인 행위가 아닌가?”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베드로의 행동을 베드로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님에 유념해야 한다. 오히려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그 자신의 이해와 이방인 신자들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비록 베드로와 야고보가 실제로 이방인 신자들이 유대인처럼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베드로가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음식 먹는 것을 거부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여전히 사회-종교적 구분이 존속하고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 주었다. 베드로는 그 자신의 표리부동(表裏不同)한 행동으로 인해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이 모세의 율법과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주장을 무효화시켰다.

바울의 관점에서 볼 때, 베드로의 행동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복음의 진리, 즉 바울과 베드로를 포함한 사도들이 예루살렘 회의에서 합의했던 바로 그것을(2:7-9)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베드로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이방인 신자들은 물론 자신이 친히 예루살렘 회의에서 바울과 더불어 확증한 그 이신칭의의 복음을 무시했다. 그는 야고보의 메시지에 부응했으며, 할례자들을 두려워해 자신을 이방인 신자들로부터 분리시켰다. 그러자 바나바를 포함해 다른 유대인들도 베드로의 위선적인 행동에 동참했다(2:12-13). 베드로, 다른 유대인들, 그리고 바나바는 다같이 이방인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유대인이 되지 않는 한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2:14).

사실상 베드로는 이방인들에 대한 바울의 복음, 곧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사람들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베드로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폐기되었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인종적, 사회적, 종교적 장벽을 다시 구축한 셈이 되었다. 그는 인간적인 권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복음의 진리에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역행하는 행동을 했다. 그리하여 베드로의 행동 때문에, 복음의 진리 위에 세워진 안디옥 교회의 하나됨이 무너지고 말았다. Koptak의 말을 빌린다면, “신적인 의지보다 인간적인 의지의 선택은 지금까지 유지되었던 하나됨을 무너뜨린다. 안디옥 사건에 대한 바울의 해석에서 볼 때, 할례로부터 자유로운 그 복음 안에서만 하나됨이 유지된다. 이 복음이 한번 타협이 되면, 갈라디아 교인들을 포함한 이방인들에게는, 그들이 할례를 받지 않는 한, 하나님 안에 자신들의 자리는 없다는 인식을 주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갈라디아서에 안디옥 사건을 수록했던 것일까? 우리가 보기에 바울의 의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안디옥 사건 자체를 상세하게 설명하거나 베드로의 위치를 깍아내리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바울의 주된 목적은,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베드로의 경우에서처럼,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밝혀 준다. 베드로가 처음에 안디옥에 왔을 때, 그는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규칙적으로 식탁을 함께 함으로써 복음의 진리에 입각한 새로운 삶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예루살렘 회의의 합의 사항을 모범적으로 실천한 것이었다. 그러나 야고보로부터 온 사람들이 안디옥에 와서 베드로에게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을 때, 베드로는 지금까지의 생활 방식을 바꾸었으며, 그 결과 그는 복음의 진리를 외면하고 말았다. 베드로는 결국 하나님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선택했다.

베드로는 누구든지 자신의 믿음을 그 자신의 삶으로부터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복음의 진리에 의해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된 자는 마땅히 그 복음의 진리를 따라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베드로의 경우처럼, 갈라디아 교인들도 철저하게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사는 데 실패했다. 그들도 바울이 전파한 복음의 진리에 의해 새로운 신분을 지니게 되었고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3:2-5; 5:26), 그 복음의 진리에 합당한 새로운 삶을 성령 안에서 계속해서 살지는 못했다. 베드로는 유대적 삶의 방식을 따름으로써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부정적인 모델이 되었다. 반면에 바울 자신은 철저하게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았기 때문에 긍정적인 모델이 되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안디옥에서 베드로의 행동을 따르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복음의 진리 편에 서서 베드로를 면전에서 반대하고, 그의 위선적인 행동을 공개적으로 책망했다. A. B. Du Toit가 지적한 것처럼, 바울의 영웅적인 역할은 안디옥 사건에서 그 절정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2) 베드로에 대한 바울의 스피치(2:15-21)

이 단원은 바울의 자서전의 결론에 해당된다. 이 결론 부분에서 바울은 안디옥에 있는 베드로나 베드로와 함께 한 자들은 물론 그 밖의 청중들과 갈라디아 교인들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바울의 모든 서신 가운데서 바울의 삶과 그의 복음 이해를 이해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이 단원은 둘로 나뉘어진다: (1) 바울이 주로 자신과 베드로를 포함시키는 복수 일인칭 주어(‘우리’)를 사용해 복음의 진리, 곧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2:15-17; (2) 바울이 베드로를 배제시키고 자신만을 강조하는 단수 일인칭 주어(‘나’)를 사용하여 이신칭의의 진리에 대한 적용, 곧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의 삶을 말하는 2:18-21.

바울은 베드로와 자신을 포함하는 2:15-17의 ‘우리’ 부분에서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주어지는 신자의 새로운 신분에 대해 진술한다. 바울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베드로가 하나님 앞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동등하게 세우는 이 복음의 진리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이 진리를 알았고 또한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 문제에 관해 바울과 일치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안디옥을 방문한 유대인들을 두려워해 율법의 행위를 쫓음으로써 복음에 반대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 대명사를 주어로 삼아 인종과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만이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2:15-16). 율법의 행위는 물론 율법 그 자체도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처음부터 의의 수단으로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3:11,2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유일한 의의 수단이자 구원의 수단이다.

바울은 2:18-21의 ‘나’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기반을 둔 자신의 행동에 관해 말한다. 바울이 베드로와 자신을 포함시키는 복수 일인칭 대명사 ‘우리’에서 단수 일인칭 대명사 ‘나’로 전환하는 것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즉 베드로는 이신칭의의 복음에 대해서 바울과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우리’를 사용하고 있는 이유), 바울과 달리 그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살지 못했던 것이다(‘나’를 사용하는 이유). 이 ‘나’ 부분에서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지 않고 오히려 옛 유대적 삶의 스타일로 돌아간 베드로와는 달리, 자신은 율법에 대해, 곧 유대교의 이전 삶에 대해 죽었으며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하여 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사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Gordon Fee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에 의해 내 안에 사신다”는 말의 단축어다. Fee의 지적은 바울 서신의 다른 구절에서도,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과 성령 안에서의 삶을 일치시키고 있는 로마서 8:9-10에서도, 지지를 받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에 의해 자기 백성 가운데 사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갈라디아서 안에 있는 다른 구절도 이러한 해석을 지지해 준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4:5-6은 하나님은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는 자들을 구속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신분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아들의 영을 저들의 마음 속에 보내어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게 하셨다고 말한다. 5:24-25에서 바울은 ‘육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과 ‘성령에 의한 삶’을 서로 나란히 둔다. 비록 바울이 2:20에서 성령에 관한 언급을 하지는 않지만,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로운 삶은 성령의 능력의 결과라고 확신했다.

따라서 저자는 안디옥 사건의 개요에 이어 나오는 바울의 스피치 문단의 가장 중요한 두 주제를 1) ‘우리’ 스피치 문단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한 ‘새로운 신분’과 2) ‘나’ 스피치 문단에서 말하는 성령에 의한 ‘새로운 삶’이라고 본다. 안디옥 사건은 결국 이 두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베드로는 유대교적 삶의 방식에 돌아감으로써 사실상 자신도 모르게 율법의 행위에 근거하는 옛 신분과 옛 삶으로 되돌아간 반면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신분과 성령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삶을 유지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 스피치 문단을 갈라디아서에 포함시켰는가? ‘나’

(‘I’) 부분(1-2장)의 결론에 나타나는 바울의 스피치 문단의 두 주제가 ‘여러분’(‘You’) 부분(3-6장) 전체를 통해 계속해서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의도적으로 ‘나’ 부분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안디옥 사건과 그의 스피치 문단을 ‘나’ 부분의 결론인 동시에 ‘여러분’ 부분의 전주곡으로 제시하는 것 같다. 바울의 관점에서 볼 때, 갈라디아 교인들의 문제는 바로 안디옥 사건에 제시되고 있는 문제, 즉 신분에 합당한 삶이다. 우리가 안디옥 사건에 나타나는 베드로를 바울이 주장한 복음의 진리, 곧 이신칭의의 복음 그 자체를 거부하는 배교자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 그 자체를 말할 때는 의도적으로 베드로를 포함시키는 ‘우리’를 계속해서 사용함으로써 복음의 진리에 관해서는 자신과 베드로 사이에 합의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동등하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신분의 문제에 있어서는 바울과 베드로 사이에 서로 합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복음의 진리를 성령 안에서 삶을 통해 드러내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삶을 말할 때는 의도적으로 베드로를 배제하는 ‘나’ 형식을 사용한다.

갈라디아에서 바울의 반대자들은, 마치 안디옥에서 야고보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유대적 삶의 방식을 따를 것을 요구한 것처럼,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유대적 삶의 방식, 즉 율법의 행위를 따를 것을 요구했다. 그러므로 안디옥 사건의 위기와 갈라디아 교회 위기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안디옥 사건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일종의 거울이 되어 베드로의 행동을 통해서 자신들의 문제를 보게 한다. 그러므로 안디옥에서 바울이 베드로와 안디옥 교인들에게 한 스피치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도 권면의 역할을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Betz는 2:15-21을 서신 전체의 논제 부분(propositio)으로 본다: “갈라디아서 2:15-21은 형식과 기능과 요구에 있어서 논제에 해당한다. 내러티브(narratio)의 마지막 부분에 배치됨으로써(2:11-14), 그것은 내러티브의 내용을 요약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러티브의 부분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논증(probatio) 부분(3-4장)에서 논의될 내용을 예시한다.” 홍인규도 그의 갈라디아서 연구에서 2:14b-21b을 3:1-4:31의 논증 부분과 5:1-6:10의 권면 부분에 대한 서론적인 요약으로 본다. 심지어 그는 ‘우리’ 스피치 부분(2:14b-17b)과 ‘나’ 스피치 부분(2:18-21b)의 두 주제가 그 다음 장에서 계속해서 등장해 아래와 같이 서신 전체를 형성해 간다고 본다:

 

게바에 대한 바울의 스피치(2:14b-21)

A) 2:14b-17b: 이신칭의

B) 2:18-21b: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삶

논증 부분(3:1-4:31)

A') 3:1-14: 이신칭의

B') 3:23-4:7; 4:21-31: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됨

권면 부분(5:1-6:10)

A") 5:1-12: 할례는 칭의와 무관하다

B") 5:13-6:10: 성령에 의한 삶

 

바울이 의도적으로 그의 서신을 이렇게 구성했는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2:15-21의 문단이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준비하는 수사학적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간파하는 것이다. 만일 안디옥 사건이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문제를 보게 하는 거울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안디옥 사건에 뒤따라 나오는 바울의 스피치 부분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을 가리켜 주는 권면적 역할을 한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스피치 부분을 의도적으로 ‘우리’ 부분과 ‘나’ 부분으로 나누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 부분의 주제인 이신칭의의 복음에 근거를 둔 신분의 문제와 ‘나’ 부분의 주제인 이신칭의의 복음에 근거를 둔 삶의 문제가 ‘You’부분(3-6장) 전체에 걸쳐 반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디옥 사건에서 바울이 거듭 강조하는 것은, 신분과 삶은 서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실패는 그의 행동이 그리스도에 대한 그 자신의 믿음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 점이다. 바울과 달리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자신의 옛 유대적 신분과 삶에 대해서는 죽고 새로운 신분에 합당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베드로는 신학과 윤리, 신분과 삶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울이 볼 때, 갈라디아 교인들은 베드로의 행동을 답습하고 있다. 베드로가 자신의 행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무너뜨린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처럼, 갈라디아 교인들은 자기들이 다시 율법의 요구 아래로 돌아가려는 것은 바울에게 받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스리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 바울이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삶에 선행하여 옛 자아의 죽음을 요구한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이에 대한 모범으로 제시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소. 그래서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있소. 물론 지금 나는 육체 가운데 살고는 있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대신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그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 가운데서 살고 있소”(2:20). 이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바울은 자신의 삶이 그가 선포하는 복음과 일치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베드로의 행동에 의해 대변되는 삶의 방식과 바울 자신의 복음적인 삶의 방식 중 어떤 것을 택할 것인지 묻고 있다. 우리가 바울의 신학 부분을 다루기 전에 바울의 삶과 신학의 연결고리가 되는 안디옥 사건을 자세히 살펴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제3장

바울과 유대교

 

 

 

 

 

 

 

사람은 누구든지 특정한 사회와 문화 안에서 출생해 그 사회와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갈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회와 문화를 창조적으로 변천 발전시키면서 사는 역사적 존재다. 이 점에 있어서는 바울도 예외가 아니다. 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주후 1세기에 출생했고, 주후 1세기 동안 활동했으며, 주후 1세기에 사망했다. 그는 주후 1세기 초엽 헬라-로마의 교육 도시 다소에서 바리새파 유대인 가정에서 다소와 로마의 시민권자로 출생했다. 그 후 약 12살까지 다소에서 살다가 예루살렘으로 유학 가서 바리새파 유대 랍비 교육을 받았으며,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가 되어 기독교 운동을 박해하는 데 앞장 섰다. 그러다가 나이 30세가 될 무렵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기독교 박해자에서 기독교 복음 전파자로 완전히 변화되었다. 그런 다음 그는 소아시아, 유럽 등 헬라-로마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으며, 그의 나이 60세가 되는 주후 64년경 네로 황제에 의해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역사적 문맥에서 볼 때, 바울은 주후 1세기라는 정치, 종교, 문화 등 제반 영역의 극심한 격변기와 혼란기에 출생하여 활동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로마 제국이 약 250년간 동유럽과 중동지역을 통치했던 헬라 제국을 멸망시키고 유럽과 중동 지역의 새로운 패권자로 등장해 유대 팔레스틴 등 중동 지역을 통치하던 때였다. 종교-문화적으로는 헬라-로마의 이교도의 종교 및 문화가 유대인들의 삶이며 문화이자 종교였던 유대교에 침투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저항이 점점 고조되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기에 바울은 유대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 이교도 문화와 종교에 맞서서 순수한 유대교 보존에 앞장 서고 있는 정통 바리새파 랍비 교육을 받았다. 한편 그가 랍비 교육을 마치고 유대 사회의 정치 종교 지도자로 나설 무렵은, 나사렛 출신 예수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 운동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확산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역사적 존재로서의 바울의 생애, 사역, 메시지, 동족들과의 관계, 이방인 선교, 유대교와 분리된 그의 이방인 교회, 로마에서의 순교 등을 알려면, 그가 어릴 때부터 영향을 받고 또한 영향을 주었던, 그가 만나고 부딪히고 저항했던, 그의 삶의 세계, 특별히 그의 종교적, 사상적 고향이었던, 그러면서 그가 유대인으로서 평생동안 씨름하고 부딪혔던 유대교를 알아야 할 것이다.

 

 

1. 유대교의 기원

 

구약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열 두 아들이 이스라엘 민족 형성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과 모세의 출애굽 사건이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적인 공동체로서 출범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궁극적인 면에서 볼 때 주후 1세기 예수 당대의 유대인과 유대교의 근원을 이스라엘 민족의 근원과 일치시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주후 1세기 유대인들은 대부분 아브라함을 그들의 민족적, 신앙적 아버지로 생각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민족적 번성과 약속의 땅의 성취를 기대하고 있었다(창 12-15). 또한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된 할례를(창 17장) 그들의 신분의 결정적인 표지로 삼았으며, 모세의 출애굽 사건을 역사의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의 모형으로 생각했다. 또한 모세에게 주어진 시내산 언약인 토라를 선택받은 백성의 근거이자 거룩한 삶을 유지하는-그것을 지키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와 심판을 자초하는-기준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다수의 유대 역사가들과 기독교 신학자들은 예수 당대의 팔레스틴 유대 민족과 유대교의 기원을,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과 구분해, 주전 6세기에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한 유대인들로 보고 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은 본래 야곱의 열두 아들로부터 유래된 열두 지파로 형성되었으나, 솔로몬 왕 사후에 남북(南北)으로 나뉘어졌다가, 북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 제국에 의해, 남 유다는 주전 586/7년에 바벨론 제국에 의해 각각 멸망함으로써 열두 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사실상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종교적 관점에서 유대교의 근원은 출애굽 사건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사에서 제2의 출애굽 사건으로 간주되는 주후 6세기 초엽의 바벨론으로부터 유대인들의 귀환으로 보는 것이 정당할 것 같다. 주후 586/7년에 남쪽의 유대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했을 때 그 지역에 거주하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붙잡혀 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주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고, 일부는 이집트로 피신했으며, 서민 대중인 ‘그 땅의 사람들’(암 하아렛츠)은 팔레스틴 땅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지도자 없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민족적, 종교적인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곧 주위의 여러 민족들과 혼합되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색을 점차 잃어버렸고,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회복하겠다는 꿈도 지니지 못했다. 반면에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은 포로기 동안 저들의 포로 생활이 바로 자신들의 선조와 자신들의 하나님께 대한 범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을 새롭게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했다(제 2 바룩서 85:3).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언젠가는 시온의 고국 땅에 돌아가서 파괴당한 성전을 새로 짓고, 모세의 율법을 중심으로 하나님만을 섬기는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공동체를 회복하려는 꿈을 키워갔다. 그러던 중 주전 538년 고레스 왕에 의해 바벨론이 멸망하고 페르시아 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왕과 그의 후계자들은 포로로 있던 유대인들을 그들의 고국 땅인 팔레스틴으로 보내주었는데 그 귀환은 몇 차례에 걸쳐 시행되었다(역대하 36:22-23; 에스라 1:

1-2:64; 7:1-8:36). 이 바벨론 귀환과 귀환자들의 정착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예수아, 스룹바벨, 에스라, 그리고 느헤미야였다. 예수아와 스룹바벨은 첫번째 귀환자들을 팔레스틴으로 인도해 주전 515년에 솔로몬 성전 파괴 이후 처음으로 성전을 재건했으며, 에스라와 느혜미야는 두번째 귀환자들을 팔레스틴으로 인도해 귀환자들의 신앙과 생활을 지도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본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은 서민들이 아니라 대부분 종교적-민족적 의식을 가진 귀족과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한 사람들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그 곳에서 정착해 살던 모든 유대인들이 아니라, 그들 중에서도 특별히 종교적, 민족적 의식을 강하게 가진 엘리트 그룹의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바빌론으로부터 팔레스틴까지는 1천 여 km에 달했으며 여러 사막지대를 통과해야 했다. 사실상 비행기, 기차 등 현대적인 교통 수단이 없던 고대 사회에서 이 거리를 도보로 여행한다는 것은 가히 생명을 내어놓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우리가 에스라와 느헤미아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귀환자들은 고국 땅에 돌아왔을 때 자신들만이 참된 이스라엘 민족의 후예들로, 즉 선지자들이 말한 ‘그 남아있는 자들’로 생각했다. 반면에 그들은 ‘그 땅의 사람들’을 불결한 자로, 혼합종교주의자들로 규정하고, 그들이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러한 점들을 통해 우리는 귀환자들의 종교적, 민족적인 배타성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예수님과 바울 당대 유대 민족 공동체는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대가 멸망한 후 본토에 흩어져 살고 있던 그 땅의 거주민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일찌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자들과 그들의 후예들이 바벨론으로부터 팔레스틴 땅에 돌아옴으로써 형성된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귀환자들의 대표적인 지도자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였다. 에스라는 귀환자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이제 오직 율법을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귀환자들의 영적, 종교적인 개혁을 주도했다. 그리하여 세계 역사에 있어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전 민족적으로 율법을 배우고 생활화하도록 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사에 야훼 하나님 신앙을 확고하게 뿌리 내리게 하는 역할을 했다. 느헤미야는 귀환자들이 그 땅의 사람들이나 외국인들과 결혼해 순수한 유대 민족의 혈통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민족적, 사회적 개혁을 주도해 유대인 단일 민족의 뿌리를 내리게 했으며, 한편으로는 성전 제사제도가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제도화해 예루살렘 성전이 유대인 민족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잡게 했다. 바로 이와 같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종교적, 민족적, 사회적 개혁운동을 통해서, 성전과 율법과 혈통과 땅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 유일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이 새로운 민족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유대교가 유대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유대 민족과 종교역사에 있어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유대 민족과 유대교(Judaism)의 창시자 혹은 부(父)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유대교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종교나 철학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유대교는 바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 운동에 의해 형성된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정체성(identity)이요, 신앙과 삶의 길이요, 이방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분하고 지키는 시금석이요, 자기 표현이요, 또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분의 표지였다. 그러므로 에스라와 느헤미야 이후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와 유대교를 분리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스라엘 민족을 떠난다는 것은 바로 유대교를 떠나는 것이요, 유대교를 떠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떠나는 것이었다. 이와 반대로 유대교에 가입하는 것은 바로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아에 의해 유대교의 뿌리가 내려졌다고 해서 그들 이후의 유대교 역사가 순탄한 길을 걸어왔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에스라, 느헤미야 이후 예수와 바울 시대까지 약 50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의 역사는 여러 가지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격변기를 거치면서 투쟁, 갈등, 타협, 불안, 좌절, 기대 등으로 점철되었다. 사실상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민족의 선구자들은, 우리가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파괴된 솔로몬의 성전을 새로 짓고(515 B.C.), 잊혀졌던 모세의 율법을 회복시키고, 그 땅의 백성들과의 혼혈 결혼을 금지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동질성을 회복시킴으로써, 이스라엘 민족들로 하여금 찬란했던 다윗 왕국을 재건하려는 강한 기대를 품게 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채워지지 않았고, 오히려 수백 년에 걸쳐서 계속 주위의 강대국으로부터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경제적인 지배와 간섭과 영향을 받아야 했다. 즉 귀환자들이 세운 유대인 공동체는 약 200년 동안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를 받아야 했고(538-332 B.C.), 주전 332년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헬라 군대에 의해 멸망하면서부터는 약 200년 동안 헬라 제국의 통치를 받아야 했다(332-167 B.C.). 이스라엘은 주전 301년부터 주전 198년까지는 알레산더의 뒤를 이어 이집트 제국의 통치자가 된 Ptolemy 왕가의 지배를 받았으며, 주전 198-167년까지는 시리아 지역의 통치자인 Seleucids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그 후 이 유대인 공동체는 약 100년 동안 헬라 제국 세력과 싸워 하스모니안 왕가를 세운 마카비 형제들과 그들의 후예들에 의해 부분적인 독립 국가 형태를 유지했으나, 주전 63년부터 다시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와해되어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된 주후 70년까지 또다시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와 같은 격변기를 겪어오면서 유대인들은 외부의 세계로부터 자신들의 정체성과 삶의 표지인 유대교를 지키기 위해서, 특별히 헬라 문화(Hellenism)로부터 유대교의 핵심인 성전과 토라(율법)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과 타협과 투쟁 가운데서 주후 1세기 유대교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상과 종파와 운동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2. 주후 1세기 유대교의 다양성

 

Sanders는 1992년에 출판한 그의 책 Judaism. Practice and Belief: 63 BCE-

66CE에서 Josephus와 Philo의 글, 사해문서, 미쉬나, 벤시라, 구약가경들과 고고학 자료 같은 현존하는 많은 고대 유대 문헌들에 의존해 예수와 바울 이전 시대의 유대 사회를 대변할 수 있는 표준적인 유대교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저명한 유대교 학자 랍비 Neusner가 지적하는 것처럼, 고대의 다양한 유대교 문헌이나 자료로부터 공통분모를 뽑아 획일적이고 표준적인 유대교를 구성하는 것은 자료를 연구자의 도식에 끌어들이는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 그렇게 함으로써 각 문헌의 본래 의도와 그 문헌을 배출한 저자나 공동체의 특수한 역사적 정황을 무시하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예수 당대의 유대 사회 전체를 대변하는 획일적이고 표준적인 유대교를 찾는 Sanders의 작업은 실제로 주후 1세기에 있었던 유대교를 복원하기보다는 역사에 실재하지 않았던 추상적인 유대교를 재구성하는 위험에 빠지기 쉽다.

오늘날 여러 유대교 문헌학자들이 공감하는 바이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주후 70년 이후의 유대교는 바리새파 중심의 획일적이고 표준적인 유대교(Rabbinic Judaism)로 재형성되었으나, 주후 70년 이전의 예수와 바울 당대의 팔레스틴 유대교(Palestinian Judaism)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센파, 헤롯파, 열심당 등 여러 가지 종파와 운동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따라서 그만큼 대단히 다이나믹하고 다원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보다 구체적으로 다시 살펴보겠지만, 유대교 안에서 일어난 이 다양한 종파와 운동들이 기본적인 공통점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유대교의 핵심을 이루는 다음과 같은 주장들, 이를테면, 유일신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것, 아브라함을 통해 그의 후손들이 거대한 민족을 형성하게 되리라는 것,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하리라는 약속이 주어졌다는 것, 할례가 언약된 백성의 신분상의 표지로 주어졌다는 것,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신분과 거룩한 삶을 유지시키기 위해 율법이 주어졌으며,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죄를 위하여 제사제도가 주어졌다는 것, 제사 제도의 유지를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졌다는 것,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세계의 정치, 문화의 영향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신들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오직 율법과 성전을 중심으로 야훼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궁극적인 회복과 언약의 성취를 위해 메시야가 나타나리라는 것 등에 대해 일치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곧 이어 살펴보겠지만, 당시의 유대교는 각 종파와 운동의 성격에 따라 유대교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이런 요소들에 대한 강조점과 적용에 있어서는 서로간에 적지 않은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1)바리새인들(The Pharisees)

우리가 신약성경과 유대교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 당대의 바리새파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특징과 주된 강조점을 율법에 두고 있다. 주로 율법을 연구하는 서기관들이나 예루살렘 성전 제사에서 소외된 저급의 제사장들과 율법을 따라 살기를 다짐하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이 바리새파 운동을 주도했다. Josephus는 주후 1세기에 활동했던 바리새인들의 숫자를 약 6천 명으로 추산하는데(고대사 13.298; 18.20; 17.42), 이 숫자가 과연 예수 당대의 바리새인 숫자를 대변하는지, 아니면 Josephus 자신의 시대에 있었던 바리새인 숫자를 대변하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우리의 복음서에는 바리새파는 안식일 법, 손씻는 정결법, 음식법, 이혼법 등과 관련해 기록된 율법과 구전(할라카)으로 내려오는 랍비들의 율법 해석 전통에 근거해 사사건건 예수님의 교훈과 사역에 도전하는 사람들로 언급되어 있다. 또한 예수님 자신도 바리새인들을 외식과 형식에 빠진 자들로 비판하고 있다(막 7:1-23; 마 15:1-20; 막 2:23-3:6; 마 12:1-13; 눅 6:1-11; 마 9:3-12; 막 10:2-4; 마 23). 그러나 정작 바리새파가 언제,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예수 당대에 이것이 하나의 종파인지 아니면 하나의 종교적-사회적인 운동인지 정확하게 규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바리새파가 주전 160년경 마카비 형제들이 헬라 제국으로부터 유대의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인 독립 운동을 주도할 때 이 마카비 가문을 열렬히 지지하고 후원했던 ‘하쉬딤’(‘하쉬딤’은 헬라 제국이 유대를 정복해 종교적, 문화적으로 헬라화하려 할 때 헬라 제국에 야합하는 유대인들에 맞서서 유대교의 뿌리인 율법과 성전제사를 고수하는 운동을 일으킨 경건한 무리들을 지칭한다)의 후예들이라는 점에 공감한다. 따라서 우리는 바리새파가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이방 문화인 헬레니즘에 대항하여 유대교의 정신과 생활을 지키려는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운동으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이 점은 ‘바리새’라는 이름 자체가 히브리어로 ‘분리된 자’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파루쉼’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과, 마카비 형제들이 헬라 제국 세력을 축출한 후 헬라 제국의 통치를 모방하여 왕권(정치, 군사권)은 물론 대제사장직까지 계승하려고 할 때, 자신들이 누려왔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대제사장 사독 가문에 소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 사독 가문인 마카비 형제들의 대제사장 계승을 지지했던 사두개파와는 대조적으로, 율법의 정신과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 비 대제사장 계열인 마카비 형제들의 대제사장직 계승을 단호하게 반대한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유대고대사 13.171).

물론 바리새파를 열렬히 지지한 살로메의 집권 기간중에는(76-67 B.C.) 바리새파가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전 37년 혈통적으로 본래 이두메 족속으로 있다가 유대인으로 귀화한 헤롯이 로마 제국의 힘을 빌어 하스모니안 왕가를 축출하고 새로운 헤롯 왕가를 세워 유대를 통치하면서부터 바리새파는 로마 제국이나 헤롯 왕가를 지지하는 것을 포기하는 등 정치적인 간여를 배제했다. 그 대신 바리새파는, 뛰어난 바리새파사람이었던 바울의 증언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빌 3:5; 행 22:3; 26:5), 랍비 힐렐과 샴마이의 영향 아래 율법을 전 유대인들의 모든 의식과 삶의 영역에까지 확대시키려고 힘쓰는 종교-사회적인 운동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예수님과 바울 시대에 이 바리새파 운동이 당대의 유대교 안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했느냐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Sanders는 바리새파가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를 주도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하지만 예수 당대에 이미 바리새파 운동의 거점이 되었던 회당제도가 널리 보급되어 있었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바울 당대에 백성들의 신앙과 생활을 지도하면서 일반 대중들의 지지를 얻을 만큼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유대고대사, 13.10.6; 16.2),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파괴 후 바리새파가 유대교 재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마침내 그들이 표준적이고 규범적인 유대교를 형성한 점 등을 고려할 때, 우리는 바리새파 운동이 예수와 바울 당대 유대교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복음서와 사도행전 및 바울서신 등(막 7:3; 마 15; 갈 1:13-14; 빌 3:5)은 물론 유대 역사가 Josephus까지도, 바리새파가 율법과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랍비들의 전승들을 모든 유대인들에게 확산시키려고 힘썼으며, 사두개파와는 달리 대중적인 신앙인 부활과 천사와 영의 존재와 메시야의 도래를 신봉했으며(유대전쟁사 2권 163; 유대고대사 17권 2.4; 18권 14), 하나님의 전능성과 동시에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했으며, 주후 30년대부터 팔레스틴에 서서히 대두하기 시작한 유대 민족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간여했으며, 그리고 마침내 주후 60년대부터는 열심당과 힘을 합쳐 유대 독립 전쟁에 앞장 섰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바리새파가 주후 1세기 유대교 안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는 강력한 암시를 던져 주는 것이다.

 

2)사두개인들(The Sadducees)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 이후 유대인들은 성전과 토라(율법) 중심의 사람들이 되었다. 사실상 성전과 토라는 그후 헬라-로마 제국시기 동안 유대인들의 신분의 표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2마카비서와 Josephus의 [유대고대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제2마카비 1.10; 4.44; 11.27; 고대사 13.166, 169), 성전 제사와 유지 및 율법의 합법적인 해석을 맡은 자로 자처했던 대제사장 사독 가문과 그 후예들이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 사회에서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인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사두개’(Sadducee)라는 말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이 이름이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역대상 1:28-

45; 5:30-41; 에스겔 44:15)을 계승하고자 하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대제사장 사독 가문의 후손들은 에스라와 느혜미야시대 이후부터 대대로 대제사장직을 계승하면서 사실상 유대인 공동체를 이끌어 왔다(벤 시라 50.18-21). 그러다가 마카비 형제들이 헬라 제국으로부터 유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여 하스모니안 왕가를 세우자마자 본래 사독 계열만이 계승할 수 있는 대제사장을 계승하려고 했다. 이런 와중에서 사독의 후예들은 세 부류로 나뉘어졌다. 한 부류는 하스모니안 왕가와 타협해 대제사장직을 양보하고 그 대신 성전 유지 및 제사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려 했던 사람들이었고, 한 부류는 끝까지 하스모니안 왕가와의 타협을 거부하다가 핍박을 피해 지지자들과 함께 쿰란 지역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고, 나머지 한 부류는 이집트로 이주하여 그 곳에 새로운 성전을 세웠던 사람들이었다.

사두개파는 이들 부류 중 첫번째에 해당된다. 사두개파는 비록 숫자적으로는 소수였지만 하스모니안 왕가가 왕권과 대제사장직권을 공유하는 것에 찬성함으로써 하스모니안 왕가의 후원 아래 유대 정치, 종교, 경제 등 제반 영역의 지배층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시대의 조류에 적응하고 타협했다. 즉 유대가 헬라 제국의 영향권에 있을 때는 성전 제사가 방해를 받지 않는 한 유대의 헬레니즘화를 거부하지 않아 ‘변절자’, ‘배반자’로 불리기도 했다(마카비상 1:15). 그 후 하스모니안 왕가가 유대를 지배하자마자 오히려 그들의 강력한 옹호자로 변신했으며, 다시 로마 제국의 후원으로 헤롯 왕가가 하스모니안 왕가를 대신하자 그들은 즉시 로마 제국과 헤롯 왕가를 옹호하는 입장에 섰다. 그리하여 주후 66년 후반부터 열심당을 중심으로 로마 제국에 대한 대대적인 저항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사두개파는 열심당과 바리새파와 일반 민중의 주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주후 70년에 그들의 마지막 보루였던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파괴되자 사두개파는 유대인 역사에 있어서 완전히 와해되어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요약해서 정리한다면, 바리새파는 주로 율법에서 유대교의 정체성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는 반면, 사두개파는 예루살렘 성전 제사 및 유지에서 유대교의 정체성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는 달리 오직 모세의 기록된 율법만을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랍비들의 구전을 백성들에게 지키게 하는 것을 거부했다. 심지어 그들은 육체적 부활 사상까지 모세의 율법에 의해 입증되지 않는다고 해서 거부했다(막 12:18 이하; 눅 20:34-36; 행 23:8; 유대고대사 13:137, 297).

 

3) 에센파(The Essenes)

에센파는 Philo, Josephus, Hippolytus의 문헌들을 통해 단편적으로 알려지긴 했으나, 신약성경에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동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947년부터 약 10여 년에 걸쳐 팔레스틴 사해 서북쪽에 위치한 쿰란 동굴에서 엄청난 양의 고대문헌들(구약성경사본, 외경, 위경, 성경주석, 탈굼, 공동체 생활 규범서 등)이 발굴되고, 이 문헌들을 남긴 사람들이 주전 2세기부터 주후 67년까지 쿰란 지역에 살았던 에센파 무리였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부터 유대교와 신구약학계에서 커다란 주목을 받게 되었다.

에센파의 기원을 정확하게 규정하기는 쉽지 않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에센파가 바리새파처럼 하쉬딤의 무리들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하스모니안 왕가를 세운 마카비 형제들이 왕권과 함께 사독 가문이 계승해 왔던 대제사장직권도 공유하려 할 때 그것을 반대한 하쉬딤의 일부가 바리새파가 되었다. 바리새파는 비록 하스모니안 왕가를 반대하긴 했으나 하스모니안 왕가가 관할하는 예루살렘 성전 제사를 결코 떠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쉬딤의 다른 일부는 대제사장직을 이어받을 수 없는 비 사독 계열인 하스모니안 왕가가 관할하는 예루살렘 성전 제사 자체를 거부하고 나섰다. 따라서 하스모니안 왕가와 이들의 대립은 불가피했다. 결국 이들은 하스모니안의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 쿰란 지역에 이주해 에센파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결성한 것으로 보인다. Josephus는 예수 당대의 에센파 무리들을 4천 명으로 추산하는데(유대고대사 18.20), 이것이 사실이라면 에센파의 무리들이 모두 쿰란에 살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은 당시 약 400명 정도만이 쿰란에 거주했으리라는 결론을 내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쿰란에는 에센파의 핵심적인 무리들이 거주했고, 그 밖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위시해 여러 촌락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발굴된 쿰란 문헌에 근거해(하박국 주석, IQpHab 8.9-13.4; 감사 찬송, IQH 5: 23-25; 다메섹 언약, CD 1.1-2.1), 에센파라는 공동체의 결성을 주도한 사람은 하스모니안 가문의 사악한 대제사장(시몬?)을 반대한 ‘의의 선생’(the Teacher of Righteousness)으로 본다. 쿰란 문헌에 따르면, 에센파는 자신들은 역사의 마지막에 사는 ‘남은 자들’이며,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대심판으로부터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아 새 시대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다는 신앙을 갖고 있었다(CD 1.4-5; 사 11:20-23; 슥 8:6,11-12).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은총과 부르심에 의해 언약 속으로 들어온 언약의 백성으로 여기고 스스로를 ‘빛의 아들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언약의 백성으로서 언약 백성에 합당한 계율을 평생 동안 공부하고 준수하는 것을 언약 백성의 신분 유지에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 외의 사람들을 ‘어두움의 아들’로 간주했으며, 사악한 제사장들에 의해 유지되는 예루살렘 성전 제사도 불결한 것으로 생각해 제사 참여를 거부했다(IQpHap 10.9). 그 대신 그들은 공동체 중심의 기도생활, 예배, 성결의식, 율법공부, 거룩한 식사 등을 통해(공동체 규칙서 IQS 6.3,8), 메시야의 출현과 새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을 기대했다(증언 4QTest, IQS 9.9-11; 전쟁규범서 IQM). 에센파는 유대인으로서 그들의 공동체 조직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엄격한 심사와 동시에 까다로운 생활 규범을 부과함으로써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쏟았다.(IQS 6.13-23) 예를 들어, 가입자들은 사유재산을 공동체에 헌납해야 하고, 철저한 금욕생활을 해야 하며, 공동체 밖의 사람들로부터 선물을 받거나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가입자들의 신앙과 생활 태도를 해마다 엄격히 심사해 등급이 주어졌으며, 적어도 3년 이상이 되어야 정식으로 공동체 회원이 되었고, 여자들은 제외되었다.(IQS 5.23-5) 그들은 공동체를 창설한 ‘의의 선생’만을 참으로 권위 있는 율법의 해석자로 믿었다.

에센파와 관련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어떤 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례 요한이나 공적 사역 이전의 예수님이 에센파에 소속되어 있었거나 혹은 에센파와 어떤 교류를 갖고 있었느냐 하는 문제다.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쿰란 문헌의 발견은 복음서와 초대 기독교 형성에 관한 연구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쿰란 문헌에 나타나는 메시야 사상, 묵시 사상, 선택된 공동체 사상, 의의 선생을 중심한 철저히 구별된 생활, 선과 악, 빛과 어두움의 이원론 등이 여러 면에서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사상 및 규범과 유사한 면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특히 세례 요한의 사역지가 쿰란 공동체의 주거지와 매우 가깝다는 사실, 새 시대를 대비한 요한의 회개의 세례가 쿰란 공동체의 청결의식과 유사한 점, 세례 요한이 메시야의 길을 개척하고, 그의 메세지가 임박한 새 시대를 대비한 종말론적인 메세지라는 점 등은 세례 요한과 쿰란 공동체의 어떤 관련성을 유추하게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적지 않은 부분이 쿰란 공동체의 제자 규범서의 내용과 유사하다는 점(예를 들어, 마 5:3/ IQH 5.22) 등도 예수님과 쿰란 공동체의 어떤 관계성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우리가 세례 요한과 쿰란 공동체, 그리고 예수님과 쿰란 공동체 사이의 어떤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해서,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이 한때 쿰란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었다거나 혹은 직접적인 교류를 가졌다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 사이에는 유사점 못지 않게 상당한 차이점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쿰란 공동체는 안식일과 정결법을 바리새파보다도 더 엄격하게 준수했다. 즉 바리새파는 안식일의 여행 거리를 1km로 제한했는데, 쿰란 공동체는 500m 이내로 제한했다. 또한 바리새파는 정결을 위해 손과 발을 씻었지만 쿰란 공동체는 매일 두 번씩 목욕을 했고, 이에 반해 세례 요한은 그의 세례를 단순한 정결의식이 아닌 “죄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눅 3:3),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는 세례”(마 3:6-7)로 간주해 단 한번 실시했으며,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도 고치고 자유롭게 여행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요한이나 예수님 혹은 바울이, 비록 쿰란 공동체와 직접 관련은 없다고 할지라도, 간접적으로나마 쿰란 공동체의 사상과 생활 규범, 그들의 성경 해석 등에 대해 들었거나 알았을 가능성, 혹은 James H. Charlesworth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 자신이 그의 사역 기간 동안에 에센파의 무리들을 만났을 가능성은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4) 열심당(The Zealots)

유대 역사가 Josephus가 그의 [유대고대사] 18.23에서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센파에 이어 ‘제4의 철학’이라고 불렀던 열심당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주후 67년에서 주후 70년까지 있었던 유대인들의 로마 제국에 대한 독립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무리들이다. 하지만 열심당을 단순히 유대의 독립을 위해 싸운 정치적, 군사적 운동이나 세력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우리는, Hengel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열심당을 근본적으로 주후 1세기의 팔레스틴 유대 사회에서 일어난 종교-사회적인 운동으로 보는 것이 더 온당하다. Josephus 자신이 인정하는 것처럼, 열심당은 오직 이스라엘의 야훼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참된 주권자이시며, 그 분만이 성지(聖地)의 참된 주인이시기 때문에, 이교도 국가에 협조하거나 타협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며, 참된 유대인임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원리 위에서 출발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주후 1세기 유대 팔레스틴 땅은 이교도인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이교문화인 헬레니즘이 유대교의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교의 근본 정신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참된 군주(君主)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며, 그분만이 이스라엘을 통치하실 수 있으며, 그들이 사는 땅은 하나님께서 영구적으로 그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다. 그러므로 열심당의 무리들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위해, 필요하다면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그들의 땅에서 이교도의 세력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왕권을 회복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볼 때 열심당은 유대교의 정체성의 근거를 바리새파처럼 율법으로 보거나, 사두개파처럼 예루살렘 성전으로 본 것이 아니라, 이교도의 세력으로부터 약속된 성지(聖地)를 회복하는 것에 둔 것이 분명하다.

이 열심당은 자신들의 행동의 전형(典型)을, 일찍이 모세 시대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열심 때문에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미디안의 여자와 음행한 시므리를 창으로 찔려 죽인 사건과(민수기 25:1-15), 주전 167년경 하스모니안 왕가의 창설자인 제사장 맛디아가 그들의 선조들이 물려 준 유대교(특히 율법)를 보존하려는 열심 때문에 헬라 제국의 왕 안디옥커스 4세가 강요하는 이교도의 신들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고, 헬라 제국과 타협하는 자신의 동족과 왕의 신하를 살해한 후 유대 독립전쟁을 일으켰던 사건에 둔다(제1마카비서 2:19-28). 학자들은 Josephus에 의존하여, 갈릴리 출신의 유다(행 5:37)를 예수 당대의 열심당 운동을 일으킨 핵심 인물로 간주한다. 유다는 주후 6년경에 있었던 쿠레니우스가 세금 확보를 위해 실시한 유대인의 호적조사를 유대인들을 노예로 전략시키기 위한 음모로 간주하고, 동족들로 하여금 민족적인 자유를 위하여 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촉구했기 때문이다(유대고대사, 18.4).

실제로 유다의 가문을 살펴보면, 그의 부친 에즈키아스는 헤롯의 통치를 반대했고, 그의 형제 시몬과 야곱은 티베리우스 황제 때 반 로마 제국 활동을 하다가 십자가형을 받았으며, 주후 66년부터 전 팔레스틴 땅에서 일어났던 유대 독립전쟁의 주도적 인물인 므나헴과 엘리에젤 벤 자일도 유다의 후손들이었다(유대전쟁사, 2:433-4; 445-9). 이들은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것을 약속된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립하는 성전, 말하자면 시온의 자유와 구속을 가져 오게 하는 선한 싸움으로 간주하고, 이 일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 주후 66년부터 열심당을 주축으로 일어난 유대 독립전쟁 때 유대인 대중은 물론 바리새파와 에센파까지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주된 이유도 이 운동이 근본적으로 유대교를 보존하려는 종교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열심당과 관련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S. G. F. Brandon이 그의 책 [예수와 열심당]에서 주장한 것처럼, 과연 역사의 예수가 열심당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느냐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갈릴리에서 성장하고 활동했던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일어난 이 열심당과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 있는가? 더구나 열심당의 동기가 단순히 정치적, 군사적인 것이 아니고, 바리새파 유대인인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행 22:3; 갈 1:14),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열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갈릴리 출신의 유대인인 예수님이 이 열심당 운동을 외면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열심당의 당원이었고(막 3:18; 눅 6:15),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성전 청결도 바로 열심당의 구호인 하나님에 대한 열심에서 나온 것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막 11:15 이하)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헤롯당원들은 비판했지만, 단 한번도 열심당에 대해서는 비판을 제기한 적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열심당의 궁극적인 목표인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대하지 않았는가?(마 19:28; 눅 22:28; 24:21; 행 1:6) 더 나아가 예수님 자신은 결국 유대인의 왕으로서 로마 제국에 반역한 자로 십자가의 처형을 당한 것이 아닌가?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는, 갈릴리 출신의 예수님께서 자기 당대 갈릴리 지역에서 일어난 열심당 운동을 아는 것과 예수님 자신이 열심당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임을 지적하고 싶다. 열심당은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일차적으로 이교도인 로마 제국으로부터 약속된 땅의 회복과 자유에 두었으며, 이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위해 필요하다면 군사적 폭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열심당 운동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노력에 의해 성취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사상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 쟁취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았다. 만일 실제로 예수님이 유대인 대중들의 이상인 민족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동족들의 배척을 받았겠는가? 유월절 절기 동안에 있었던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이 로마 제국에 아부하는 부패한 지도층에 대항하는 혁명적 행위였다면, 왜 그 당시 예수가 즉각적으로 성전 경찰대나 로마 군대에 체포되지 않았으며, 왜 그가 십자가에서 처형될 때 그의 제자들은 같은 형벌을 받지 않았겠는가? 사실상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수 운동을 열심당의 운동과 일치시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3. 유대인들의 신앙과 생활

 

우리는 예수님과 바울 당대에 팔레스틴 땅에 살던 모든 유대인들이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센파, 혹은 열심당 중 그 어느 하나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당시 팔레스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유대인 중산층, 서민들, 유대교 개종자들, 사마리아 사람들, 노예들, 로마 주둔군, 외국인들은 그 어느 유대 종파나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틴 유대 민족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유대인 대중들은, Sanders가 지적하는 것처럼, 유대교 안에서 유대교의 기본적인 신앙과 생활을 준수하려고 힘썼다. 그렇다고 한다면 당시의 유대교를 사실상 유지시켰던 이들 유대인 대중들의 기본적인 신앙과 생활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들의 신분과 삶을 유지시켰는가?

 

1) 기본적인 심볼

예수님과 바울 당대 팔레스틴 땅의 모든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그들의 신분과 삶을 좌우하는 핵심적인 유대교 심볼은 ‘성전’, ‘땅’, ‘토라(율법)’ 그리고 ‘혈통’이었다.

 

(1) 성전(Temple)

예수님과 바울 당대에 예루살렘 성전은 좋든 싫든 모든 유대인들의 의식과 삶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바리새파 운동에 의해 지방 회당과 율법을 공부하는 회당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지만, 그것들은 결코 예루살렘 성전의 위치를 대신하거나 대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성전은 바로 이스라엘의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주하시고, 통치하시는 장소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이 성전을 통해서, 곧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희생제사, 예배, 축제 등을 통해서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은총이 그의 언약 백성에게 주어지고, 사죄를 통한 언약 백성의 신분의 회복과 성결이 유지되고, 언약적 약속이 유지된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12살 이상의 유대인 남자들은 적어도 1년에 3차례 예루살렘 성전 제사나 절기 행사에 참여할 의무를 지니고 있는 반면에, 불결한 자로 간주되는 비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구내의 이방인의 뜰 이상을 넘어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규정했다(유대고대사 15권 11.5; 유대전쟁사 6:2,4).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센터 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종교는 물론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전 분야의 중심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전 영역을 좌우하는 센터였다. 성전을 책임 맡은 대제사장은 종교적 수장인 동시에 또한 로마 제국의 감독하에서 유대 민족의 정치와 경제를 좌우하는 중요한 인물이기도 했다. 당시 성전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대제사장 가문과 제사장들이 권력과 부를 동시에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성전 문제와 관련해 유대인들의 불만은 당대의 예루살렘 성전(BC 20-AD 63)이 혈통적으로 비 유대인인 헤롯 왕에 의해 재건되었다는 사실이었다(유대고대사 15.380-425).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이미 구약의 역대기,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이 가르쳐 주는 것처럼, 첫 성전을 건축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정당한 계승자, 말하자면, 다윗 가문에서 일어나는 참된 왕만이 성전을 회복하고 건축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비록 예수님 당대에 있어서 소수의 에센파를 제외하고는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제사와 절기 행사에 참여하긴 했지만, 그들은 헤롯이 건축한 성전은 영구적이 아니며, 새 시대가 도래하게 될 때, 곧 메시야가 나타날 때 그에 의해 새로운 성전의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의 통치 기간 동안 예루살렘 성전을 유대교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심볼로 여겼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2) 땅(The Land)

고대 사회에서나 현대 사회에서나 할 것 없이 땅은 한 민족, 한 국가를 구성하고 유지시키는 결정적인 요소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땅은 그 어떤 민족에게서보다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 당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거주하는 팔레스틴 땅은 바로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의 땅(聖地)이요, 하나님께서 일찍이 그들의 국부(國父) 아브라함을 통해 자자손손 대대로 소유할 수 있도록 주신 약속의 땅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을 위시해 그 어떤 이교도 국가도 그 땅을 소유하거나 다스릴 권리를 갖고 있다고 보지 않았다. 랍비 문헌에 따르면, 이방인들에게 집과 밭을 세놓는 것도 금지되었다(mA.Z. 1:8; bA. Z. 21a). 당시 팔레스틴 땅 대부분은 로마 제국의 관할하에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언젠가는 이교도 세력으로부터 그 땅을 회복하리라고 굳게 믿었다. 이미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열심당은 땅의 회복을 위해 싸우는 것을 성전(聖戰)으로, 그리고 그 싸움에서 생명을 잃는 것을 순교로 간주하고 있었다.

땅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땅은 떡과 포도주를 내고, 양과 염소가 풀을 뜯고, 감람유와 무화과가 소출되는 장소였고, 야훼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는 통로였고, 메시야가 도래할 장소였고, 새 시대의 중심지였다. 땅은 언제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에덴, 야훼의 가든, 참된 언약 백성의 홈(home)이었다. 그런데 예수 당시 그 땅은 황폐해지고 있었다. 이교도인 로마 제국이 그 땅을 통치하면서 땅의 소산을 수탈하고 있었고, 정작 땅의 소유자인 언약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의 부담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땅에 온갖 이교도의 문화와 그 유산들, 이를테면, 경기장, 학교, 이교도 사원, 군사 요새, 로마 제국을 위한 관청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이교도 세력으로부터 그 땅의 참된 회복, 곧 그 땅의 원래 주인이신 야훼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그 땅의 중심지였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는 그 땅을 거룩하게 하는 지성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겔 40-8 참조). 동시에 예루살렘은 그 땅을 이교도 문화로부터 보호하는 마지막 보루였다.

(3) 토라(Torah, 율법)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예수님과 바울 당대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토라, 곧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신적인 것으로 모든 유대인들의 신앙과 신분과 삶을 좌우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민족의 패망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불순종함에 있었다는 자각과 함께 율법을 지키고, 공부하고, 보존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예수님과 바울 당대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율법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최근의 신약학계는 예수님과 바울 당대의 유대교 안에서 토라가 지녔던 위치와 의미에 대한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 전통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과 바울 당대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의와 구원과 생명을 얻는 수단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주후 1세기의 유대교는 사실상 ‘율법주의’(legalism)에 빠져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1977년 Sanders가 예수 당대 유대교는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삼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언약 백성의 신분과 삶을 유지하기 위한 언약 백성들의 언약적 의무 규정으로 보는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였다는 주장을 제기하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과 바울 당대 유대인들의 율법관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게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주장은 이것이다. 예수님과 바울 당대의 유대교를 획일적인 유대교로 볼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과 바울 당대의 율법 역시 모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획일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예수님과 바울 당대 모든 유대인들의 율법관이 전통적인 주장인 ‘율법주의’든 새로운 주장인 ‘언약적 신율주의’든 어느 하나에 의해 획일화되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한편으로 구약과 적지 않은 유대교 문헌들은 율법이 언약 백성의 신분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강조하고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 복음서와 바울 서신들은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주의에 빠져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복음서와 바울 서신이 예수와 바울 당대에 율법주의가 현존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한 예수 당대의 모든 유대인들이 모두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바울 당대 유대인들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되던 모세 오경 자체가 율법주의가 아닌 언약적 신율주의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출애굽기는 시내산 율법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사건을 통해 구원하셔서 언약 백성으로 삼으신 후 그 신분과 삶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출 2:24-20:17).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켰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주셨던 그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은총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것이다. 따라서 선행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이요, 은총이다. 율법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과 은총에 대한 언약 백성의 마땅한 의무사항으로 주어진 것이다.

구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언약 백성에게 마땅한 성전제사 의식과 땅의 유지와 약속을 다 포함하고 있다. 성전 제사는 마땅히 의식적 율법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에 규정한 대로 약속된 땅을 우상과 불결로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의 백성으로서 누구든지 율법에 따라 거룩한 신분과 삶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만일 누구든지 율법에 따라 그 자신의 신분과 삶을 계속 유지하지 않으면 그는 사실상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단절된다.

이처럼 토라에 대한 구약 자체의 가르침은 율법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는 예수 당대 유대교를 획일적으로 율법주의로 단정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복음서와 바울 서신, 그리고 제 4 에스라서 등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와 바울 당대의 어떤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적 주장을 했고, 또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나 바울과 논쟁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가르치지 않은 이와 같은 율법주의가 언제 어디서부터 나타나게 되었는가?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에스라-느헤미야 이후 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 강대국의 통치를 받는 동안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그와 같은 상황은 그들의 선조와 그들 자신이 율법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의 개입과 더불어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 성전과 땅의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지는 새시대의 도래를 기대하는 종말론 사상이 강하게 대두했다. 셋째, 이와 같은 종말론적인 사상의 대두와 함께 일부 유대인들 가운데, 특별히 율법의 준수를 유대교의 핵심적인 표지로 삼는 바리새파 유대인들 중에는 율법주의적 사고를 지닌 자들이 있었고, 이들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주후 1세기의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적 사고와 행동을 했다.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만일 우리 중에 누가 주후 1세기로 돌아가서 당대의 유대인들에게 “당신은 왜 율법을 지키려고 힘씁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대다수의 유대인들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언약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누구도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기 위하여 율법을 지킵니다”라고 대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그들에게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약속된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누리고 있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대로, 주후 1세기 유대인들은-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에도 불구하고-여전히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은 로마 제국의 관할하에 있고 온갖 이교도 문화에 오염되어 있었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도 혈통적으로 볼 때 순수한 유대인이 아닌 헤롯 왕가와 로마 군대의 관할 아래 있었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언약을 통해 약속된 의와 구원과 생명을 아직 누리지 못했고, 하나님의 나라도 아직 실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개입을 기다리고, 언약의 축복이 실현될 그 날을 기다리고, 자신들에게 의와 구원과 영생과 축복이 주어질 그 날을 기다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즉, 우리가 랍비들의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mKid. 1:10; mAb. 4:22; mMak. 3:16), 주후 1세기 유대인들 중에는 율법을 지키는 것과 아직 실현되지 않은 언약의 축복과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에 참여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율법 준수에 이와 같은 구원론적인 동기를 부여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있어서 율법의 행위는 그 순간 언약 백성의 마땅한 의무나 책임적인 응답 이상의 것이 되고 만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율법의 행위는 아직 그에게 주어지지 않은 축복과 의와 구원에 도달하거나 참여하는 수단이나 조건이 되고 만다. 그렇게 할 때 그의 율법 준수는 일종의 율법주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것을 랍비들이 율법의 명령을 613개로 나누고 그 중 365개를 부정적인 명령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과, 율법을 준수한 자에게는 오는 시대에서 누리게 될 축복을 약속하고, 반면에 율법을 어기는 자에게는 심판을 선언하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심지어 오늘 우리 기독교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원리적으로 볼 때 십일조 생활, 기도 생활, 주일 성수, 구제 등을 포함하여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위는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이나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신분과 구원과 축복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신자의 감사의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오늘 우리 교회 안에는 신자의 행위를 구원과 축복과 은혜를 받기 위한 수단과 조건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우리가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인들이 처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인 상황을 생각한다면, 특히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미래지향적 종말관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는 그들의 율법주의적 경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성령의 오심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이 이미 성취되었고 의와 구원과 축복이 이미 주어졌고, 새로운 종말이 이미 도래했음을 믿고 선포하는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율법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 역사 자체를 거부하는 심각한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4) 혈통(Racial Identity)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유대교의 뿌리가 형성된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부터 유대인의 순수한 혈통 보존은 유대교의 핵심적인 요소였다. 순수한 혈통을 가진 가문만이 참된 이스라엘에 속했다.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한 유대인들이 그들의 공동체를 구성하면서 그 땅의 사람들인 사마리아 사람들을 철저히 배격하고, 심지어 결혼한 사람들까지 돌려보내도록 한 것도 순수한 유대인의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혈통 보존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자신들의 특수한 신분과 삶을 유지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들은 혼혈 결혼 그 자체가 우상숭배를 위시해 이교도의 문화를 받아들이거나 타협하는 것으로 결국 그들의 특수한 신분과 삶을 포기하거나 더럽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혈통을 더럽히는 것은 바로 유대교의 핵심적인 요소인 율법을 어기는 것이요, 성전과 땅을 더럽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가 다음의 중간시대 문헌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순수한 혈통 보존은 모든 유대인들의 의무사항으로 요구되었다:

 

너희는 온갖 종류의 불의한 것들로부터 멀리하고 오직 주님의 법이 규정하는 의에 충실하라; 그렇게 할 때 너희 백성(혈통)이 영원토록 안전하게 지켜질 것이다(단 계약서 6.10).

 

너희 영광을 다른 사람들에게, 혹은 너희의 특권을 외국인들에게 주지 말라. 복되도다. 우리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임을 알기 때문이다(바룩서 4:23).

 

유대인들은 세상에 대하여 선한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 사람들과는 분명히 구분이 되어야 한다(아리스트레스의 편지 중에서).

 

물론 예수님과 바울 당대 이전부터 이방인이라도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유대교의 핵심적인 신앙과 생활을 유지하는 자들은 유대교 신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혈통적으로 순수한 유대인 가문에서 출생해서 언약 백성의 표지인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자만이 참된 언약 백성으로 인정되었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예루살렘 성전 문에 비 유대인이 이방인의 뜰을 넘어서 성전에 들어오면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를 붙여 둔 것도 이와 같은 유대인의 순수한 혈통 보존과 관련된 것이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족보(마 1장, 눅 4장)와 사도 바울이 자신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며, 베냐민 지파임을 내세운 것도(빌 3:5) 이와 무관하지 않다. 유대인들의 순수한 혈통 보존 노력은 단지 예수님과 바울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혈통 보존은 그후의 시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의 정체성의 핵심적 근거로 여겨지고 있다.

 

2) 신앙과 실천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도신경에 나타나는 기본적인 신앙, 곧 창조주 하나님,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승천, 재림, 그리고 성령과 성도의 교통, 사죄, 부활, 영생 등을 믿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은 규칙적인 성경 읽기와 공부, 기도 생활, 십일조 헌금, 주일 및 각종 절기 예배 참석, 전도, 구제 등을 기본적인 신앙 생활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바울 당대의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신앙과 생활은 무엇이었는가?

 

(1) 유일신 야훼 하나님

예수 당대의 유대인들은 누구라도-그가 바리새인이든, 사두개인이든, 에센파이든, 열심당원이든 관계없이-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친히 다스리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유일신 야훼 하나님을 믿었다. 야훼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며 오직 그 분만이 이스라엘의 신앙의 대상이며, 그 밖의 모든 신들은 거짓된 신이라는 것은 모든 유대인들의 신앙의 제1원리였다. 이것은 유대인 남자라면 누구든지 12살부터 매일 한차례 이상씩 암송해야만 하는 쉐마가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선언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모든 유대인들이 이교주의를 배격하는 것도, 즉 이교도의 문화와 신들에 대한 경배를 철저히 배격하는 것도 그것이 유대교의 핵심인 유일신 신앙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2) 언약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선택하시고 그들과 언약 관계를 맺으셨다는 것은 유일신 사상과 더불어 유대교 신앙의 핵심을 이룬다. 물론 이 언약의 기초는 일찍이 하나님께서 족장들에 주신 약속들(창 12,15,17,22장 등)이다. 이 약속은 특별히 아브라함의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것과,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온 세상이 복을 누리게 되리라는 것,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땅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 언약의 현실적 표현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후 그들과 맺으신 시내산 언약인 토라다.

예수님과 바울 당대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토라는 바로 언약의 문서였으며, 여기에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 언약 백성의 삶의 원리, 언약에 신실한 자들에 대한 축복과 언약을 파기한 자들의 속죄 방법 및 그들에 대한 저주와 심판이 나타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유대인들은 현재 자신들이 처한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모든 상황을 언약적 관점에서 이해했다. 즉 국가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있고,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을 위시하여 이교도 문화가 성지를 더럽히고 있는 그들의 모든 상황은 자신들과 선조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불성실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언약에 대한 성실성의 회복이야말로 모든 유대인들의 지대한 관심사였다. 바리새인들이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려 하고 열심당원들이 성지의 회복을 위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3) 토라(율법) 공부와 실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토라는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다. 토라는 언약 백성의 의무와 책임, 그리고 그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자들에 대한 축복의 약속 및 그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저주와 심판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의 행위인 동시에 언약 백성으로서의 그들의 삶의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시편 구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종일 그것을 묵상하나이다.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명세하고 굳게 정했나이다(시편 119:97-106).

 

따라서 예수님과 바울 당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공부하는 것과 성전에 머무는 것은 동일한 예배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이 단순한 공부의 대상일 뿐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제사장이나 바리새파 서기관들 중에는, 우리가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서 발견하는 것처럼(마 23; 롬 2장), 율법을 배우고 가르치기는 하지만 실제로 율법을 실천하지 않은 자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열심히 율법(기록된 율법은 물론 기록되지 않은 장로들의 전승된 구전 율법까지)을 지키려고 했다. 그들은 율법을 따라 할례를 거행하고,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수전절 등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행되는 축제 행사와 희생제사에 참여하고, 안식일을 준수하고, 음식에 대한 규례 및 성결법을 지켰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 준수 자체가 언약 백성의 신분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요, 이방인들로부터 유대인들을 구분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4) 기도

예수 당대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공부와 실천과 함께 중요한 것은 규칙적인 기도생활이었다. 대다수의 경건한 유대인들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할 만큼 신실한 기도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저들에게 주어진 처지와 형편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기도했고, 또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리라는 기대를 가졌었다. 우리는 이 점을 쿰란 공동체의 문헌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나의 비탄한 날에 내가 야훼를 부를 것이요,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정녕 응답하실 것이다”(4Q381 24.7-8). 예수의 출생 직전에 쓰여진 것으로 간주되는 [솔로몬의 시편]은 “주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는도다”(6:5)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형식에 매이지 않고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위하여 주기도문처럼 여러 가지 형태의 기도문을 만들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12살 이상의 모든 유대인들이 매일 아침과 저녁에 규칙적으로 암송해야 했던 ‘쉐마’였다(m.Ber 2.3). 주후 90년경에 활동했던 랍비 엘리에저 힐카누스는 이것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해 주고 있다: “불신앙적인 야만인이 누구인가? 그는 곧 아침저녁으로 쉐마를 암송하지 않는 자가 아닌가?”

‘쉐마’와 함께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고정된 기도문은 ‘데필라’다. 엄밀한 의미에서 쉐마는 유대인들이 아침저녁으로 암송하는 일종의 신앙고백문이라고 볼 수 있는 반면에, ‘데필라’는 이름 그대로 유대인들이 아침, 오후, 그리고 저녁으로 하루에 3번씩 규칙적으로 암송하는 중요한 기도문이었다.

유대인 사회에 언제부터 하루에 3번씩 고정적으로 기도하는 관습이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데필라와 같은 고정된 기도문이 언제부터 생기게 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문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편 55:17에 보면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라고 되어 있고, 다니엘서 6:10에 보면 다니엘이 규칙적으로 하루에 3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을 감안해 보면, 유대인 사회에는 아침, 오후, 저녁 등 하루에 3번씩 기도하는 관습도 상당히 일찍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대 유대 문헌 ‘미쉬나 베라코트’(Mishah Berakot)에 지적되어 있는 것처럼, 예수보다 몇 십 년 앞서 활동한 유명한 유대 랍비 힐렐(Hillel) 학파와 샴마이(Shammai) 학파 사이에서 기도문인 데필라의 조문을 놓고 심한 논쟁을 벌였던 사실 등을 볼 때, 예수님 시대 이전부터 어느 정도 고정된 형태를 갖춘 데필라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데필라 기도문을 흔히 ‘세모네 예스레’(Shemoneth Esreh) 혹은 ‘18복 기도문’(the 18 Benedictons)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이 데필라가 본래 6복 기도문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주후 90년경 가말리엘 2세 때 기존의 기도문에 배교자들에게 대항하는 12복이 더해져서 모두 18복으로 고정되어 편집되었기 때문이다. 12복이 더해지기 이전의 정확한 데필라 본문을 회복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지적한 대로, 예수님보다 조금 일찍이 활동한 랍비 힐렐과 샴마이 학파 사이에 기존의 데필라 여섯 번 본문의 주제를 놓고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는 기록을 볼 때, 그때까지 완전히 고정된 하나의 통일된 데필라 본문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혹은 형식이 약간 다른 몇 개의 데필라 본문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고대 유대 문헌들을 참고해 볼 때 예수 시대에 와서는 어느 정도 고정된 형식을 갖춘 데필라가 유대인 사회에서의 공적인 안식일 회당 예배나 사적인 개인 기도시간에 사용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저명한 유대 문헌학자 달만(G. Dalmann)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데필라 기도문의 제1복 본문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오! 주는 복되시도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하늘과 땅의 주재자이시며 지존자이신 하나님,

우리의 방패가 되시고 우리 조상들의 방패가 되신 하나님.

오! 주는 복되시도다.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신 하나님.

 

이상에서 살펴본 ‘쉐마’와 ‘데필라’ 이외에도 ‘거룩한 기도문’이라고 불리워지는 ‘카듸쉬’가 일찍부터 안식일 회당 예배시에 공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 ‘카듸쉬’는 회당예배시 설교가 끝난 다음 거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함께 암송하는 공동 기도문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이한 점은 이 카듸쉬 기도문이 주기도문의 전반부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달만과 예레마이어스(Jeremias)에 따르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카듸쉬 기도문 본문은 다음과 같다:

 

주께서 뜻을 따라 창조하신 세계에서,

주의 위대한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고,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며,

주의 나라가 당신의 생전에, 당신의 날 동안, 모든 이스라엘

집이 살아 있는 동안에,

빠르게, 속히 임하시며,

주의 위대한 이름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아멘.

 

3)유대교 문헌들

(1) 바벨론 유수부터 예루살렘 귀환 사이의 비정경적 유대 문헌

①수산나

다니엘 3장과 6장에 근거를 둔 박해와 회복에 관한 이야기. 여인 수산나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 때문에 사형에 처해졌으나 오히려 하나님께서 보내신 다니엘에 의해 구출되고, 그녀에 대한 모든 거짓된 모함이 들추어지고, 의로운 자로 확인된다는 이야기

②벨과 드라곤

다니엘 1-6장의 이야기를 기초로 하여 우상 숭배를 거부한 다니엘과 우상 숭배자들을 서로 대조시켜 결국 다니엘이 승리한다는 이야기

③아즈리아의 기도와 세 청년의 노래

다니엘 3:23-24에 나타나는 아즈리아(아벳느고)의 신앙고백적인 기도와 세 청년의 감사의 찬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즈리아의 기도는 전통적인 구약의 언약신학에 근거를 둔 민족의 죄에 대한 고백이며, 찬송은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④토빗

토빗서는 남자 주인공인 토빗과 여자 주인공 사라의 핍박과 회복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은 시련과 고난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⑤예레미야 서신

이 편지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름으로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보내진 편지로 우상 숭배에 빠지지 말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 헬라 제국의 영향 아래 있었던 유대인들을 배경으로 한 문헌

①제1에녹서

본래 주전 3세기경 아람어로 쓰여졌는데 나중에 헬라어로 번역된 것으로 추정. 사해 문서에도 부분적으로 담겨 있다.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핵심적인 내용은 에녹이 하늘나라를 구경하면서 천사장 우리엘과 나누는 대화임. 제1에녹서의 비유의 책(37-41)에서는 메시야가 ‘인자’와 ‘선택된 자’로 불리우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제1에녹서에는 사탄과 성령의 주 사이의 전쟁을 포함하여 강한 종말론적 특징도 갖고 있다.

②시락서(시락의 아들 예수의 지혜서로 불리워짐)

주전 2세기 초 예루살렘에서 활동했던 전문적인 서기관 엘이에잘 벤 시락의 아들 예수아 벤이 수집한 책으로 헬레니즘에 맞서서 모세의 율법, 토라에 충실한 것을 촉구하는 내용. 특별히 저자는 토라와 지혜를 일치시킨다.

③희락서

창세기 1장에서부터 출애굽기 12장까지의 내용을 주석적으로 설명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신앙을 갖도록 한다. 특별히 안식일 준수를 포함해 율법을 엄격하게 지킬 것을 강조하고, 음행, 우상 숭배, 피를 먹는 것을 죄악시한다. 쿰란 문헌에서도 인용되는 것을 보아 주전 168년경의 것으로 추론된다.

④모세의 계약서 (일명 “모세의 승천”)

이 책은 일종의 모세의 유언집으로 신명기 31-34장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3) 하스모니안 왕가 시대를 배경으로 나타난 문헌

①유딧서

아수로의 왕 Nebuchadnezzar의 장군 Holofernes가 유대인 마을 점령했을 때 유대인들을 구하려는 애국적 노력을 기울인 유딧이라는 여인의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 그녀의 믿음, 기도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특별히 율법에 대한 열렬한 충성을 강조하고 있다.

②바룩서

예레미야의 서기인 바룩의 이름으로 나타난 책으로, 바벨론 포로와 귀환의 공통적인 주제인 예루살렘 멸망과 회복 이야기, 기도, 지혜시, 시온시 등을 포함하고 있다. 주전 150-6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③제1마카비서

주전 100년경에 하스모니안 왕가를 지지하는 예루살렘의 어떤 유대인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마카비 가문이 헬라 제국으로부터 유대를 회복해 하스모니안 왕가를 세워 가는 이야기가 주 내용이다. 연대적으로는 주전 175년 예루살렘 성전을 훼손하고 유대 민족과 종교를 말살하려 시도했던 Antiochus IV Epiphanes와 주전 135년 시몬의 죽음까지의 주요 사건들을 설명하고 있다.

④제2마카비서

주전 180-161년까지의 유대 민족에 관한 역사를 담고 있다. 제1마카비서가 주로 마카비 형제들의 활동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것에 비해, 제2마카비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과 성전을 돌보시며, 경건한 순교자들에게 어떻게 보상하시는가에 관해 말한다.

⑤쿰람 문헌

1947년부터 약 10년간에 걸쳐서 팔레스틴 사해 서북쪽에 발견된 쿰란 문헌은 유대교는 물론 기독교의 배경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쿰란 문헌은 주전 2세기 중엽부터 주후 68년 로마 군대의 침입을 받기 전까지 쿰란 지역에 살고 있던 에센파 무리들이 남긴 도서관의 문헌으로 간주되고 있다. 수많은 쿰란 문헌 중 특별히 다음의 문헌들이 관심을 끌고 있다.

▸다메섹 문헌(CD): 쿰란 공동체의 역사와 그들의 생활에 관한 실천적 명 령을 담고 있다. 특별히 안식일 준수에 대한 법규는 바리새인의 규칙보다 더 엄격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박국 주석(IQpHab): 쿰란 공동체의 창설자인 의의 선생의 이름으로 제시된 하박국 주석. 특별히 로마 제국에 대한 비판과 사악한 제사장에 대한 공격들이 담겨 있다.

▸시편 주석(4QpPs): 시편 37편과 45편에 대한 주석

▸나훔 주석(4QpNah): 구약 나훔서에 대한 주석

▸이사야 주석(4QpIsa): 구약 이사야서에 대한 주석

▸공동체의 규칙(IQS): 다른 말로 “권징 규범”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쿰 란 공동체의 조직과 훈련 등에 관한 총체적 규범서로 간주된다.

▸감사 찬송 문집(IQH): 모든 찬송은 “오 주여, 나는 당신께 감사하나이 다”로 시작하며, 환난 가운데서도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찬송하고 감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많은 감사 찬송 가사들이 쿰란 공 동체의 창시자인 의의 선생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사야의 순교

▸제1에녹서 92-105

▸전쟁 문서(IQM)

▸코펠 문서(3Q15 혹은 3QTreasure): 일종의 보물지도와 같은 것으로 숨 겨 놓은 보물의 목록이 포함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에 숨겨 놓은 성전 보물의 목록으로 보기도 한 다.

▸성전 문서(11QTemple): 쿰란 문헌 중에서 가장 긴 문헌으로 주 내용은 율법이다. 특별히 종말론적인 성전 회복 사상이 관심을 끌고 있다.

▸할라킥 편지(4QMMT): 쿰란 공동체의 일원이 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 에 사는 지도자에게 보내는 편지이며, 쿰란 공동체의 제사장적 원조를 강 조하고 있다.

▸4QFlorilegium: 메시야 사상이 강조되고 있다.

▸4Q246: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가 동일 인물로 제시된다.

 

(4) 에집트에 거주했던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나타난 문헌

①시빌린 묵시록

우상 숭배와 부도덕에 관한 책망적인 예언을 담고 있으며, 로마 제국에 대한 강한 적대감과 종말사상이 강조되어 있다.

②아리스테아스의 편지

Ptolemy II Philadelpus 시절 아리스테아스(Aristeas)가 자신의 형제 필로크레테스에게 보낸 편지. LXX역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③제3마카비서

포톨레미 IV 필로파톨과 안티오커스 3세 사이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유대인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④솔로몬의 지혜

지혜 추구와 의로운 삶에 대한 이야기. 헬라 철학과 히브리적 지혜를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보여 주고 있다. 특히 강한 종말론적 사상과 함께 바울의 중요한 사상인 연대 사상을 담고 있다. 아마도 바울이 솔로몬의 지혜 문헌에 익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⑤제2에녹서

의인 에녹의 승천에 관한 이야기(창 5:21-32)와 함께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5) 로마 제국과 헤롯 왕가 시대에 나타난 문헌

①솔로몬의 시편

다윗의 아들이 메시야로 등장할 것이라는 메시야 사상 및 종말 사상이 강하게 나타나며, 동시에 의롭게 살아야 할 인간의 책임이 강조되고 있다.

②모세의 유언

다니엘 7장에 대한 설명과 함께 박해 가운데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격려를 담고 있다.

③제1에녹서 37-71(일명 에녹의 비유)

메시야 사상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④제4마카비서

할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충성 등을 통해 유대인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또한 강한 헬라 철학의 영향도 나타난다.

⑤열두 족장들에게 관한 유언서

야곱이 그의 12 아들과 그들의 후손에 관해 말한 예언을 담고 있다 문학적 장르상 요한복음 13-17장에 있는 예수님의 고별 설교, 사도행전 20장에 있는 바울의 에베소 장로들에 대한 유언적 설교, 디모데후서, 베드로후서 등과 유사하다. 동시에 메시야 사상도 나타난다.

⑥모세의 묵시록

아담의 죽음과 그 결과에 관한 이야기

⑦아담과 이브의 삶

⑧요셉과 아스넷

요셉과 그의 아내 아스넷의 개종에 관한 이야기

⑨제2바룩서

예루살렘 함락과 회복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말하고 있다.

⑩제4에스라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강조를 담고 있는 이야기.

⑪아브라함의 묵시

창세기 15-18장을 배경으로 아브라함에 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

⑫제3바룩서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함락과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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