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엡1:1~2
◑에베소서 서론
▲에베소서는 <교회의 영적 설계도>
하나님의 역사로 예배당이 5년 전에 아름답게 완공되었습니다.
예배당이 완공되어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기도할 때,
진정한 성전 건축은 (예배당이 완공 된 후) 지금부터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진정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한 성전이 되는 것’
이라고 하나님이 내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즘 국내외 여러 곳에서, 예배당 건물이 참 아름답게 건축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전은, 건물이 아닙니다.
모든 교인들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건물 속에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 속에 거하십니다.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말씀하였습니다.
예배당을 완공하면서부터.. 주님은 에베소서를 강해할 마음을 제게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서는 영광스런 교회, 예수님이 주인되시는 교회의 설계도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 성전 설계도는 따로 있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영적인 설계도는 에베소서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우들과 함께 에베소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도 서로 배우고, 교회를 세워가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결심했었는데,
그 일을, 5년이 지나서 지금 비로소, 에베소서 강해를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초라한 교회에, <교회/성도의 영광>을 가르치는 에베소서
성지순례 때 에베소에 가보면
지금 남아있는 유적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 도시였는가.. 느낄 수 있습니다.
상공업이 발달한 항구 도시인데,
상공업의 발달로 아데미(다이아나)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 등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많았고,
사람들은 풍요로우면서도 퇴폐와 향락에 젖어 살았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큰 도시였지만,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변변한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든든한 목회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신학교도 없었으니까요.
성도들 모두가 새 신자들이었고,
조금이라도 먼저 믿은 사람들이 교회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같이 모이는 교회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분열될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 때 바울은 감옥(행28장의 로마1차감금)에 갇혀있었는데,
소아시아 곳곳에 세워진 연약한 교회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바울에게, 성령님께서 <교회/성도에게 주어진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바울은 너무나 감격하였고, 그래서 쓴 편지가 에베소서인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이 이렇게 놀라운 것인가?
-성도가 된다는 것/교회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인가?
▲영광, 풍성, 충만... 에베소서의 주제어들
여러분, 눈으로 보기에 초라하고 작아 보이는 것에 속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작아 보여도
그 성도됨과 교회의 영광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감격이 얼마나 컸는지
그것을 에베소 교회에다 써서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에베소서를 받아본 에베소 교회 교인들은
얼마나 큰 위로와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교회가 이런 것이구나!’
초대교회가 다 그렇겠지만..
그들은 사실 마음에 낙심도 되고, 두려움도 많았을 텐데
그들은 에베소서를 읽으면서.. 말할 수 없는 힘과 용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6장 밖에 되지 않지만
-그 안에 ‘영광’이란 단어가 8번,
-‘풍성’이란 단어가 5번,
-‘충만’이란 단어가 7번이나 나옵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과 당시 초대교회는
이 ‘영광, 풍성, 충만’이 가득 담긴 편지를 읽고..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에베소서를 읽어가는 동안 우리의 신앙이 회복되고
교회를 향한 사랑이 새로워지고, 교회에 대한 소망의 눈을 뜨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교회를 향한 우리의 마음이 많이 무너져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 교회의 영광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위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에베소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교회의 영광을 다시 한 번 보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에 대한 기도가 회복되고
교회에 대한 비전과 소망이 다시 일어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삶
▲예수를 믿고도, 은혜와 평강이 없는 이유
오늘 첫 번째 말씀으로 붙잡기 원하는 것은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하신 사도 바울의 축복입니다. 1:2
우리가 모두 이 말씀에 “아멘!”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정말 필요한 것이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은혜와 평강 그 자체이기에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누구나 은혜와 평강이 넘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도 은혜와 평강은커녕
사람에 대한 불평과 원망과 미움, 인색해지고
나만 손해 본 것 같고, 먹고 사는 일에 대한 두려움, 염려,
좌절, 죽고 싶은 마음, 열등감, 초조함, 우울함 등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 답을 본문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삶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1:1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라면서
이 복을 빌어주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이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in Christ Jesus
만약에 여러분이 내가 예수를 믿기는 하는데,
은혜와 평강이 있지 않고, 마음이 너무 메마르고,
사람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가득하고,
먹고 사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과 염려만 많다면.. 문제는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라는 표현은
바울 서신에 164회나 등장하는 표현으로서, 바울 신앙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표현을 <옥중서신>에서 유독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지금 몸은 감옥에 있지만,
그 영혼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가슴 벅찬 감격, 은혜와 평강을 누렸습니다.
그것을 에베소 교인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에베소에 살고 있지만,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서울이나 성남에 살고 있지만, 또한 ‘예수님 안에’ 사는 자입니다.
그러면 은혜와 평강이 넘치게 됩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혹시 내가 감옥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은혜와 평강이 내 마음에 넘칩니다.
▲만약 우리가 은혜와 평강을 누리지 못하다면,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원인을 정확하게 알아야 됩니다.
겉으로 돈 문제 때문에 걱정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예수 안에’ 있지 않기 때문 입니다.
겉으로는 질병으로 죽을 까봐 두렵지만..
속으로는 ‘예수 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지 않으니까...
내 마음이 메마르고, 원망, 불평, 두려움이 많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예수 안에 있으면... 돈이 없어도, 질병이 심해도... 평안합니다.
그 속에서 그런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그러므로 마음이 지치고 메말라졌을 때, 원망하고 낙심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무엇 보다 먼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열심히 살지만..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여러분이 다 열심히 살지 않습니까?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열심히 삽니다.
때때로는 설움도 받으면서, 어떤 때는 눈물도 쏟으면서,
때때로는 마음에 상처도 받으면서도.. 열심히 삽니다.
그런데도 은혜와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삽니다.
오히려 마음은 더 메말라지고, 자꾸 시험거리가 생기고,
불평과 원망, 두려움 속에 사는 이유,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성령에 의하여 살지 않고,
이 세상 신에 의하여 완전히 눈이 멀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주님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도 은혜와 평강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나는 편안한 집에 살면서도..
은혜와 평강을 모르고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 신에 의하여 눈이 완전히 가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도 ‘세상의 영에 붙잡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고후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가난의 영’ 안에 사는 사람들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예수님이 은혜와 평강의 주님이라면, 이 세상 신은 ‘가난의 영’입니다.
‘가난의 영’은.. 만족할 줄 모르고, 항상 부족하다는.. 항상 모자란다는 정신입니다.
심지어는 많은 성도들까지도, 여전히 ‘가난의 영’의 지배를 받고 살고 있는데요...
▲‘가난’과 ‘빈곤의 영’은 다릅니다.
‘가난’은.. 실제로 가난한 것입니다.
‘빈곤의 영’은.. 물질을 충분히 가져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는 마음입니다.
많이 가지고/적게 가지고가 상관이 없습니다.
‘빈곤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많이 가지고도 정말 가난하게 삽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늘 가난하다고 느낍니다.
부자들이 많이 사는 어느 동네에, 장애인 학교가 설립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주민들이 피켓을 들고, 현수막을 내걸고, 데모를 하였습니다.
이유는 집값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유하게 살면서도.. ‘빈곤의 영’에 사로잡힌 행태이지요.
그 사람들은 더 가지지 못할까봐, 있는 것이 없어질까 봐 두려운 마음인 것입니다.
그것이 빈곤의 영입니다. 빈곤의 영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완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빈곤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부자라도 가난하게 삽니다.
▲예수 안에 거하면.. ‘빈곤의 영’에 지배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질병과 가난에서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총체적인 구원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예수를 믿고도 영혼이 구원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가난에서는 벗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 지금도 그런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내가 예수는 믿었지만 여전히 나는 가난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빈곤의 영’에 눌려 있으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 충분히 많이 소유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나의 좋으신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분이 내 아버지이십니다.
그 말은, 내 모든 것을 책임지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내 마음에.. 가난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가 사라지게 되고,
‘나는 부족함이 없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 '믿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손에 무엇이 쥐어져야 나는 가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쥐어져야 되지요? 끝이 없습니다.
아무리 가져도, 절대 가난을 못 벗어납니다.
▲가난의 저주에서 회복은, 단순히 풍족하게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우리 모두가 다 가난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습니다.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진짜로 거하면, 그래서 ‘빈곤의 영’이 내게서 떠나면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위하여 드릴 수 있고,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하여 구제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 풍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딤전6:7-10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잠11:24~26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구제가 좋아졌습니까? 도와주는 것이 너무 기쁩니까? 그러면 구원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믿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구제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도와주는 것이 그렇게 기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니까요.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는 더 주십니다.
혹시 이 세상에서 안 주시면, 더 좋습니다.
저 천국에서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이 되갚아 주실 것입니다.
“나 먹고 살기도 힘든데...”
이런 분은 ‘빈곤의 영’에 일시적/장기적인 지배를 받고 있는 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일시적/장기적으로 멀어진 분입니다.
다윗은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였습니다.
가난의 영이 떠난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복을 많이 받았습니까?
그 당시 다윗은 어려운 광야에서 살았던 때입니다.
그런데도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마치는 말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긋지긋하게 ‘빈곤의 영’에 속고 삽니다.
‘나도 부족해. 나도 없어. 아직도 만족할 수 없어!’
그러니까 은혜와 평강은 꿈도 못 꾸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내 마음을 은혜와 평강으로 채우시는 주님이신데,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지 못하고, 이 세상의 영, 가난의 영을 붙잡혀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제는 영적인 분별을 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고/범사에 감사하고/늘 기도하는 것이.. 가난의 영이 떠난 증거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원망 불평, 두려움과 염려가 있으면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지 말고, 영을 분별해야 합니다.
내 안에 ‘빈곤의 영, 두려움의 영, 미움의 영, 우울한 영이 역사하는구나!’
하고 깨달았으면..
고민하고 갈등하지 말고, 즉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하십시오.
그리고 ‘풍성, 충만, 영광'이라는... 교회/성도의 영광을 회복하십시다.
에베소서를 쓴 사도바울의 소원이... 우리 삶에서 이루어지게 하십시다.
우리가 간절히 말씀 읽고 기도해서 성령의 감동이 임할 때..
이것이 내 삶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 더 읽으실 분 ........................................
▲2008년도 호주 코스타에 갔다가 권오승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서울 법대 교수, 전 공정거래위원장이셨고 주님의교회 장로이신데
이번에「법으로 사랑하라」라는 책을 출판하셨습니다.
그때 코스타에서 장로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또 그 분의 책을 보면서, 도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모든 국민들이 선진국이 되는데 관심이 많은데,
선진국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서 혼란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선진국을 국민소득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2만 불 소득은 되어야 선진국이지!’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왜 그 경계선상에서(2만불 아래 위로 왔다갔다) 머물게 하시면서
더 이상 선진국 반열에 세우지 못하시는가요?
소득 수준으로 선진국이냐/아니냐.. 하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법을 연구하다가 선진국을 연구해 보니.. 선진국은 나누어주는 나라더라는 것입니다.
나누어 주는 나라가 강한 나라, 복된 나라, 선진국입니다.
나누어 주려 하다 보면.. 우리가 커지고 성숙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분은 유학생들에게 호소하였습니다.
유학 후 국내에 돌아오려고 하지 말고, 미국 유럽으로 가려 하지 말고,
아시아 아프리카로 눈을 돌리면 얼마든지 길이 있다고...
대우 받고 즐기러 가지 말고 섬기러, 도와주러 가라고...
‘가진 지식, 경험, 기술을 가지고 도와주러 가라!
이것이 하나님께 우리 민족이 축복받는 길이다.
국가 경쟁력이 커지고 선진국 되는 길이다.’ 이렇게 주장하신 것입니다.
'◑명인 명설교편◑ > 유기성목사 명설교(199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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