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3.9 주일 설교(요한복음 강해 57)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요한복음 14장 16-24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지난 주 설교 때 우리 교회에 성령의 바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다음 날 제게 젊은이교회 한 청년이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그 청년은 선한목자 교회에 이제 4개월 째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자기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요즘은 참 혼란스럽고 답답하고... 걱정되고... 목사님께서도 요즘 부쩍이나 많이 하시는 말씀, 성령님때문이에요.
전에 제가 출석하던 교회는 은사가 강한 교회였어요. 주위에선 이단이 아니냐는 말들도 많았지만 저는 그 교회에서 방언도 하고 그외에도 많은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직장을 이직을 하게 되어 새롭게 출석할 교회를 찾는데 그 교회와 같다면 싫은 거예요.... 그래서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를 다녀야겠다고 생각했고 많은 교회를 한 주 한 주 다니던 중 벼르고 벼르던 선한목자 교회를 오게 되었지요. ... 그런데 요즘은 예전 교회의 모습이 차차 느껴지면서... 괜히 불안하고 걱정이 앞서요. 저의 연약한 마음에선... 전의 그 교회와 같아질까 걱정이 되고... 그냥 혼란스러워요. ... 전 성령님이 마구 임하는 교회가 조금은 무서워요. 제가 정말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잘 인도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기도해 주세요. “
그 메일을 읽고 마음이 무거웠지만 의외로 담담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 드러났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옥학흠 목사의 아들이어서 더 유명해진 옥성호 집사가 최근에 쓴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책을 본 이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거기서 저자는 이 책에서 현대 방언에 대해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 방언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 안에는 성령의 기적적인 역사가 초대 교회 이후에는 그쳤다고 보는 은사 중지론과 성령의 기적적인 역사가 지금도 계속된다고 보는 은사 지속론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이 나뉘는데는 성령의 기적적인 역사를 체험했느냐, 체험했으면 어떻게 체험했느냐로 나뉘는 것을 봅니다. 은사를 체험하지 못했거나 은사를 체험해도 아주 부정적인 경험을 한 사람은 당연히 은사 중지론에 더 기울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거룩한 임재를 체험한 사람은 거의 다 은사 지속론의 입장에 섭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내게 놀라운 성령의 임재가 경험된 사람은 결코 은사 중지론으로 생각할 수가 없고,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나타나는 것이 항상 우려가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에 은사 중지론의 근거가 과연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성령의 기적적인 거룩한 임재의 역사가 교회 어느 시점에서는 중단될 것이라는 어떤 말씀도 나오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표적이 따르는데 그 표적 중 하나가 새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사도와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만 주신 약속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성경에 그 말씀을 하시지 않았거나, 명확하게 그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너희들은 이런 표적을 받겠지만 그 이후에는 필요가 없겠다.’
오늘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에 대한 약속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저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가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타나리라. 그렇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분명하게 체험으로 알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약속이 초대 교회로 끝났다.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리라”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저는 그렇게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중지론자들의 견해처럼 초대 교회 이후에 이 약속이 중단될 것이라면 왜 이 말씀을 이렇게 중요하게 하셨겠습니까?
은사 중지론자들은 성경이 기록되었기에 방언과 예언과 같은 은사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 신앙의 완전한 표준이 됩니다만, 성경의 축복과 또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은 그것으로 상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주시는 약속과 성령을 주시는 약속은 다릅니다.
사도행전 1장 4-8절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약속하셨는데, 권능에 대한 이 약속이 성경책을 가지면 또 성경을 읽기만 하면 저절로 권능을 받는 것이 될까?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은 그 자체가 중요하지만, 성령의 권능은 또 중요한 약속인 것입니다.
어떤 교인들은 신앙 생활하기 참 힘들다고 말합니다. 세상 살기도 힘든데. 그것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한 채 신앙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약속은 놀랍습니다. 신앙 생활은 감동 그 자체입니다.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을 믿으면 더 이상 목마르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더 이상 내가 구할 것도 없어집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내 속에 샘물이 있는 정도가 아니고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했습니다.
(요 7:37-38)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예수 믿으면 주위에 놀라운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롬 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겨우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동적인 약속입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체험은 말씀의 약속과는 달리 ‘좌절과 낙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남으로 생기는 영적인 혼란에 대하여 충분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주 부정적인 경험을 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경험을 하고 또 그런 소문을 들은 분도 많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께 성령의 역사가 너무나 강하게 일어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병든 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이 목사님께서 성령의 사역을 중단하셨습니다.
이 목사님의 기도로 앉은뱅이였던 한 사람이 기적적으로 일어서는 역사가 있었는데, 얼마 뒤에 그가 춤바람이 난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그가 차라리 앉은뱅이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탄식을 하시고는 성령의 치유 사역에 대하여 심각하게 회의하시다가 더 이상 은사 사역을 중단하였습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때 미성숙하게 반응하고 보이는 현상에만 집착하는 미혹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행하는 사역자가 타락하는 일도 있습니다.
(마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가복음 6장 7-13절, 누가복음 10장 17절을 보면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버린 가룟유다도 예수님을 팔기 전까지는 전도를 나가면 귀신을 쫓아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적이 일어난다고 몰려다녀서는 안될 것입니다.
저도 최근 우리 교회에서 일어나는 영적 역사가 영적 혼란을 일으키는 미혹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간 이 일에 대하여 주님께 더 묻고 확인할 특별 기도 기간을 가졌습니다. 마음이 더무나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기도만 하면 말할 수 없는 애통함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왜 이리 애통한가? 아직 내게 온전치 못한 1%가 남아 있기 때문인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순간,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이 저를 쳤습니다. ‘왜 나를 의심하느냐? 네가 정말 걱정할 것, 진정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지 모르느냐?’ 성령께서는 제가 정말 걱정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것을 오늘 설교에서 말씀하게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영적 혼란이 일어나는 것보다 더 걱정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메마른 교회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생 때 교회사를 공부하는 중 부흥시대의 역사를 읽어 내려가다가, 부흥이 일어나던 당시에는 예배 중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눈물과 감격, 치유, 회심이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그 때 책을 읽으면서 ‘나도 이런 예배를 한번 드려 보았으면!’ 하는 갈망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그런 예배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1995년에 미국에 부흥하는 교회 탐방을 갔을 때 일정 중 한 때는 성령의 역사로 크게 부흥하였으나 지금은 부흥이 사라진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들어간 순간 느낀 것은 부흥하는 교회와 공기 조차 다름을 느꼈습니다. 저는 예배당 의자에 앉아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부흥하는 교회’에서 사역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가 정상입니다. 간증이 풍성하고 놀라운 일이 항상 넘치는 교회, 주님이 함께 하시면 마땅히 그리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어떤 간증이 있었습니까? 주님이 행하신 어떤 일들이 여러분에게 있었습니까?
정말 무서운 미혹은 아무런 역사도 나타나지 않고 그저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다고 믿는 것입니다. 아무런 간증도 없이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미성숙한 반응도 일어납니다. 역사하시는 주님 보다 보이는 현상에 현혹되는 이들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런 미성숙한 반응은 성령의 역사에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설교자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잘한다 못한다, 사람의 외모나 학력, 언변에만 반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미성숙한 반응은 찬양 사역자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세상 재물과 성공에 미혹되어 영생을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부자 청년은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재물이 많음으로 근심하고 돌아갔습니다.
누가복음 14장 15절부터 보면 천국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이 그 초청을 거부합니다.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장가드는 일 때문입니다.
그러한 일들이 죄가 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영생에 대한 하나님의 초청에 즉각 복종할 수 없었다면 지옥에 떨어지는 무서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적 부도덕이나 마약이나 술 취했거나 범죄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 말씀에 즉각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2장 4-5절에서 에베소 교회에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요한계시록 3장 14절부터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라오디게아교회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 맨 마지막에 나오는 교회로 주님이 재림하시기 바로 직전에 현대 교회를 상징한다고 해석됩니다. 지식은 너무너무 많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많고 신학에 대한 지식도 많고 이제는 교회 조직도 잘 갖추어져 있고 예배당 건물도 좋고 모든 점이 세련되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 부족하다면 미지근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무엇을 걱정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미지근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부족함이 없고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주님에게는 큰 근심거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두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사람들에게 그저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주님께서 정말 안타까워하시는 것에 대해서 무감각해져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지금 교회가 영적으로 무감감해져 있고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비정상이고, 성경에 나오는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정상이라고 여기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걱정이 되는 분들은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일어날지 모르는 영적인 혼란에 대한 걱정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 생각 때문에 그런 걱정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요? 혹시 교회와 성도들이 영적으로 잠든 상태에 있기를 원하는 마귀의 속임수는 아닐까요? 기도해 보고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성경에는 나와 있으나 우리는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성경대로 경험하는 것은 이상한 일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옳은 것입니까? 지금 우리가 영적 혼란을 걱정해야 합니까? 영적 침체를 우려해야 합니까? 우리가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지난 금요 기도회 때,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파수꾼으로 선 김미옥전도사님께서 보건복지부에 근무하는 집사님으로부터 받은 우리나라의 기가 막힌 형편에 대하여 전하여 주어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어떤 형편에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살은 매일 38명 연 1만명씩, 연 200만 명 임신에 150만 명 낙태, 성매매 세계 1위, 음란사이트 세계 2위, 성범죄율 OECD 국가 중 1위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잇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으로 이 엄청난 영적 세력을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도무지 그런 힘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18세기 영국을 극심한 부패와 타락에서 건져낸 것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부흥이었습니다. 19세기 미국을 부패와 타락에서 건져낸 것은 역시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나타난 대각성이라고 하는 부흥이었습니다. 그 때 은혜를 받고 성령을 체험한 수많은 청년과 대학생들이 세계로 선교사가 나갔고 우리나라에도 왔습니다. 우리나라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할 수 없이 좌절과 탄식 속에 있었던 1907년에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부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런 부흥이 일어나 도시가 소생하고, 민족이 부흥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이런 정도 역사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계획하신 일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성령의 역사로만 우리 민족이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백성의 생각이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되어집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때 미혹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영적 미혹보다는 영적인 각성이 더욱 뚜렷하게 일어납니다.
가장 분명한 변화는 지금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입니다. “아, 하나님이 정말 계시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용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경험합니다. 마음 속에서부터 넘치는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달라집니다.
15년 전 친구 목사가 교회 부흥회를 인도하였을 때, 제 설교에 대하여 평을 해 준 것을 잊지 못합니다. 친구 목사는 불에 대하여 비유했습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불이라고 글자를 크게 써서 보여주며 불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고 실제로 종이에 불을 붙여 보여주면서 불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는데, 그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설교는 불을 글자로 써서 설명하는 식의 설교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진단에 제게 얼마나 유익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목사도 성령을 체험하지 못하고는 설교는 지식을 전하는 도구이지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말씀을 읽으면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말씀이 살아 역사하게 됩니다.
성령을 체험하면 깨닫지 못하던 죄를 인식하고, 끊지 못하던 죄를 회개합니다.
주님과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전도의 결실이 생깁니다.
육신의 치유가 일어납니다. 용서하지 못하던 사람을 용서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지난 금요일 치유 기도회에 뚜렷이 치유의 역사 간증이 있었습니다. 고침을 받은 간증이 놀랍게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귀는 틀림없이 그 일을 중단시키려고 훼방하겠지만 성령의 역사는 앞으로도 놀랍게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이 약속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가끔 이런 사람을 만납니다. “당신은 하나님 봤습니까? 내게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틀림없이 절대 보여줄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하는 말인데, 그런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물론이지요. 저(우리)를 보시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알 것입니다. 저를 보시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저(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도무지 보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려는 계획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약속인 것입니다.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터튤리안(Tertullian) 교부의 글에 보면 초대 교인들은 종종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때 "당신들은 그리스도인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 일이 있습니까?" 라는 말로 전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교회에 왔다가는 예수님의 생명,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는 성도들을 보고 감동받아 "이제 예수님을 알 것 같아요. 당신들이 보여주는 사랑을 보니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슴깊이 깨달아지는군요!" 라고 말하며 회개하고 거듭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16절)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저는 전에는 이 본문에 대하여 설교할 때 약간 주저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만 전했습니다. “성령이 나타나리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보리라.” 는 말씀에 대하여 분명한 체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말씀대로 지금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하고 설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약속이 나에게도 일어날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으면 누구에게나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정말 관심해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22절에 보니 유다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여기서 영적으로 혼란스럽지 않게 되는 기준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성령충만하기를 원하시는 이유가 지금도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관심이 어떤 기사나 이적이 아니어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이 그런 역사를 행하는 사역자가 아니어야 합니다.
(21절)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영적 분별의 기준은 더욱 예수님만 드러나는가? 입니다.
복음이 드러나는가?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가? 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으로 결론을 내리면 그렇게 됩니다.
십자가 복음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 때로는 두렵지만 언제나 성령 하나님을 체험으로 알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성령님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이 약속은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이 시간 우리와 함께 하심을 분명히 알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말씀대로 살 수 있는 힘입니다. 우리 심령 안에 부흥이 일어나고 교회 안에 부흥이 일어나고 이 민족 안에 이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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