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탄생은 여성 인권 보호의 전환점 02.05.20.
THE TURNING POINT FOR WOMAN by David Feddes
http://www.backtogod.net/Sermons/sermons.cfm 02.05.12. 설교 편집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요 4:27)
▶그리스, 로마 사회의 여자의 일생
어떤 여자아이는 자라서 12살 무렵이 되면, 그 아이의 아버지는 자기 딸을 부자에게 돈을 받고 팔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스스로 결혼하기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지만, 자기 의지에 상관없이
부자 집의 후처가 되곤 했다.
자기 남편 될 사람이 자기 취향에 전혀 맞지 않아도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기 딸을 팔 수 있는 법적 권리가 있었으며,
특히 값이 후할 때는 딸의 간청이 전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팔려온 여자는 그 날부터 남편의 재산(소유물)이 된다.
남편에겐 부인의 생사여탈권이 있었다. 남편은, 부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혹한 처벌을 할 수 있었고
거기에 아무런 법적 제재도 없었다. 어떤 경우에는 남편이 부인을 죽여도 괜찮았다, 남편의 소유물이니까.
여자가 아이를 낳게되면, 아이들은 전적으로 남편의 소유가 된다.
남편은 부인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도 생사여탈권을 가진다.
혹시 남편이 아이를 심하게 때려 숨지게 하더라도 아무런 법적 제재를 받지 않았다.
그 문화에서 가장은 가정에서 절대권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가장이 부인들과 자녀들을 심하게 학대하더라도 아무도 일절 간섭할 수 없는 문화였다.
만약 여자가 외간 남자와 관계를 가진다면 그것은 즉시 죽음이었다.
남편은 그런 부인을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그렇지만 똑같은 일을 남편이 행했을 때는...
전혀 무방했다.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의 신전에는 많은 창녀들이 있었다. 창녀와의 관계는 제사 의식의 일부분이었다.
남자들은 창녀를 끼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녀도, 부인은 집에 숨어 살아야 했었다.
집에 손님이 찾아와서 식사를 대접할 때에도 부인은 다른 방에서 숨어 지냈다.
부인은 남자 손님들과 식사를 같이 하거나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그리고 외출할 때는 항상 얼굴을 가려야 했다. 만약 얼굴을 가리지 않고 외출했다면
남편은 그 즉시 그녀를 이혼시킬 수 있었다.
여자가 만약 이혼을 당했다면, 그 후로는 자기가 낳은 아이들의 얼굴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자녀들은 집안의 다른 하녀들이 맡아 키웠고, 법적으로 자녀들은 전적으로 남편의 소유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집안의 모든 재산권도 남편에게 속했으므로,
어떠한 위자료도 주지 않는 이상 단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다.
남편이 죽고 난 다음에도 여자는 재산권을 전혀 상속할 수 없었다.
오직 남자들에게만 상속권이 있었다.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실상이었다.
그리고 전형적 그리스 가정도 이와 유사한 여성 경시 문화가 있었다.
당시에도 부모들은 아예 딸을 출산하는 것조차 꺼렸다.
이런 여성 비하의 문화적 환경이 더욱 여아 출산을 꺼리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자아이는 태어나는 즉시 집밖에 버려졌는데, 그 결과 얼어죽든지, 굶어죽든지,
짐승에게 밥이 되어 죽든지 했다.
당시에 남자가 여자보다 약 30퍼센트 정도 많은 인구 비율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수백만 명의 여아가 (매 세대에?) 살해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듯 당시에 여자들은 집에서 거저 가장의 ‘소유물’이거나 아니면 ‘애 낳는 존재’ 정도로만 여겨졌다.
튼튼한 아이를 많이 낳는 여자는 가치가 높았다. 그래서 한 남자가 애를 충분히 낳으면,
혹시 애 못 낳은 친구가 있으면 자기 아내를 기꺼이 빌려주었다.
여자는 ‘애 낳는 존재’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리스․로마 당시는 여자들에게는 정말 지옥과 같은 시대였다.
▶여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다
당시에 전파된 기독교는 여성관과 결혼관에 대해 전혀 색다른 관점을 사람들에게 전파했다.
크리스천들은 여자 유아를 살해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을 사랑으로 양육했다.
그들은 남자가 첩을 두는 것을 반대했다. 일부일처제를 강조했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했으면 이혼하지 않고 평생을 서로에게 성실하게faithful 살 것을 가르쳤다.
가장은 권위자이기보다는,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임을 가르쳤다.
가장은 처자식을 마음대로 처분하기보다는, 부인을 사랑하고,
자녀들이 낙망하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우는 격려자로 살 것을 계몽했다.
크리스천들은 여학생도 남학생과 똑같이 교육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당시의 지성인이었던 셀서스Celsus는 이런 크리스천들의 태도에 심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기독교가 (천한)여성들에게 많은 관심을 끌자, 그런 분위기 때문에 기독교를 되려 조롱했다.
셀서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여성들에게 관심을 끄는 종교는 보나마나 나쁜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런 비난 속에서도 교회는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는 사상을 계속 계몽해 나갔으며,
이런 사상은 여자들뿐만 아니라 결국은 남자들에게도 유익이 된다고 강조했다.
한 남자가 한 여자와 한 평생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많은 여자와 난잡한 관계를 가지며 사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한 것임을 가르쳤다.
부인도 집에서 죽은 듯이 억눌려서 아무 소리도 못하고 꾹 참고 지내는 것보다,
자기의 지성과 은사를 살려서 경건하게 살 때 그것이 남편에게 더 큰 기쁨을 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크리스천 부인들이 단정하게 자기 은사를 살려 용기 있게 가정 일을 수행하자,
그것은 불신자들에게 동경이 된 나머지 질투와 적개심까지 불러일으켰다;
“크리스천 여자들은 달라!” (존경과 동시에 경멸이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로마제국이 기독교화 된 것은 여성인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한다.
과거 거의 1천년 가까이 지속되어온 가장의 부인과 자녀들에 대한 절대 권한(소위 patria potestas)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무려 1천년을 지속되어온, 아무도 깨기 못했던 전통이 말이다.
남편들은 함부로 부인과 자녀들을 죽이지 못하게 제재를 받게 되었고,
부인도 재산권과 자녀양육권을 남편과 나누어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로마제국이 점점 기독교화 되어가면서 여성의 결혼권에 대해서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여자아이들의 강제 조혼 풍속이 점점 사라졌고,
여성의 결혼 연령이 정신적으로 성숙될 때까지 그만큼 늦추어졌다.
남편도 아버지가 골라주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 여성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커졌다.
물론 아버지가 좋은 남자를 중매해 주기도 하지만,
어쨌든 최종 결정권은 결혼할 여성 자신의 고유 권리로 인식되어져 갔다.
어떤 역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여성 자신이 배우자를 직접 선택하는 문화가 대중의 호응을 얻으면서
널리 확산되어 나가게 된 것은, 당시에 기독교의 확산과 더불어 였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예수의 탄생은 여성 (인권) 역사의 분기점이었다”고 했다.
"The birth of Jesus was the turning point in the history of woman"★
이런 여성 학대 문화는 고대 로마뿐만 아니다. 심지어는 오늘날까지,
기독교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일수록 어린 여자아이들은 돈을 받고 팔려나간다.
아이는 너무 어려서 아버지의 결정에 굳세게 반대하지 못한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아직도 여자들은 바깥에 나갈 때는 얼굴을 베일로 가려야 하며,
학교에도 보내지 않는다. 최근에 보도된 아프간에서 탈레반의 여성 경시 풍조는 세상을 경악케 했지만,
사실 불과 수 십 년 전만 해도 세상의 여러 나라에서도 아프간 탈레반과 같은 여성 천시 문화가 성행했다.
지금 세상이 이만큼 변화된 것도 모두 예수님 덕이며, 성경의 가르침이 세상에 널리 전파된 덕분이었다.
어떤 비서구권 여성이 이렇게 말했다;
“크리스천들이 보는 성경은 아무래도 여성이 쓴 것 같아요!
왜냐하면 성경은 여성에 대해 매우 친절하게 언급하고 있어요.
우리 선생(타종교 창시자)들은 여자들에게 주로 금지조항들만 가르쳐요.”
물론 성경은 여성이 쓴 것이 아니다. 여성을 남성과 똑같이 동등하게 창조하신 주님이 쓰신 것이다.
예수님이 대속하신 십자가 보혈의 공로는 남성과 똑같이 여성에게도 적용되며,
예수님은 당연히 여성도 사랑으로 돌보신다.
오늘날 일부 극단적 페미니스트(여권 운동가)들이, 기독교가 여성을 억압한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인류 역사상 기독교만큼 여성과 가족의 가치를 드높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여성의 친구
예수님은 유대 민족으로 태어나셨다. 하나님은 유대 민족에게 특별히 율법을 주셨는데,
그것은 간음을 금지하고 있다. 그 간음금지 조항은 많은 여성들과 자녀들의 권익을 보호해 주었다.
이렇게 율법은 부인은 존귀하며, 조강지처는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임을 가르쳤다.
그런 여성 권익 신장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시 율법을 믿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여전히 여성 경시 풍조가 있었다.
한 율법사(랍비)의 글에는 “여자에게 율법을 가르치기보다는 차라리 율법을 불태워버리는 것이 낫다”고
했다. 또한 딸들에게도 율법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들에게도 율법을 가르치셨다. 나사로의 집에 가셔서,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아서
그 가르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었고, 도리어 일만 열심히 했던 마르다보다 칭찬 받았다.
이에 마르다는 이의를 제기하며 마리아가 자기처럼 부엌일을 돕도록 예수님께서 명하시기를 요청했지만,
예수님은 마리아의 선택(말씀과 율법을 배우는 일)이 더 옳은 것임을 가르치셨다(눅 10:38-42).
이와 같은 예수님의 처신은 당시 유대 풍습과 전통에 상당히 혁신적이셨다.
또 다른 율법사는 “남자가 길에서 여성과 대화하는 것은 자신에게 해롭다”고 했다(Aboth 1:5).
길에서 여자에게 인사하는 것조차 꺼려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관념들을 물리치셨다.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말을 건네셨다. 그러니 여인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에 갔다가 돌아와서 이 장면을 목격했던 제자들도 깜짝 놀랐다
(개역성경엔 “이상히 여겼다” 요 4:27).
그러나 제자들은 “어찌하여 여자와 말씀을 나누십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과거에도 예수님은 자주 여성들과 대화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신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예수님이 여성들을 대하실 때는 어떤 정욕을 가지고 대하진 않으셨다.
당연히 여성들의 외모나 날씬한 몸매에 따라 차별적으로 대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간음은 죄요 잘못된 것이다”고 가르치셨다.
정욕lust역시, 비록 간음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음의 간음으로 인정하셨다.
또한 남자가 여자를 함부로 이혼해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것도 간음이라고 엄격히 규정하셨다.
예수님은 여자를 존중히 대하셨다. 여자도 역시 남자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바 되었으므로,
여성들도 당연히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중되어져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
그래서 다른 율법사들이 여성들을 가르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여성들을 가르치시고 그들과 대화하기를 꺼려하지 않으셨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여성들을 사역의 동역자로 사용하셨다.
그래서 꽤 많은 여성들은 이런 예수님의 호의에 감동해서,
물질 및 다른 도움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기꺼이 도왔다;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눅 8:3)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인류 역사’에 여성 인권에 대한 ‘전환점’turning point이 되실 뿐만 아니라,
여성 각 개인의 우여곡절 ‘인생 역사’에도 ‘전환점’이 되셨다.
어떤 여인은 심한 질병으로부터 치유 받았고, 어떤 이는 귀신의 괴롭힘으로부터 자유함 받았고, 어
떤 여인은 음란과 저질적인 삶으로부터 ‘전환’되어 거룩하고 온전한 여인으로 극적으로 변화받았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인류 역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개인 역사적으로도, 여성의 삶에 일대 전환점이 되신다.
당시의 유대 사회는 여성이 법정에서 “증인”으로서 증언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여성을 사람의 수에 치지도 않았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으로 나타내 보이신 사람은 다름아닌 여성(막달라 마리아)이었다.
위대한 예수님의 부활의 첫 번째 “증인”으로서 여성을 택하신 것이다.
여인은 부활의 증인의 사명에 얼마나 충실했던지, 예수님보다 먼저,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우스개 소리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먼저 나타나신 것은 여성들의 입소문이
남자들보다 빠르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당연히 우스개 소린데 그것이 여성을 비하함이 아니라 특징으로 이해바람)
*기독교가 여성을 존중하는 근거;
①여성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 남성과 똑같이. 곧 하나님처럼 소중한 존재다.
②여성도 예수 피로 죄 씻음 받고 성령으로 세례받는다, 남성과 똑같이.
③여성도 예수님과 바울의 사역에 동역자로 쓰임받았다, 남성과 똑같이.
④초대교회는 여성도 똑같이 성찬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고전 11:17-34).
물론 여성들도 똑같이 교회에서 세례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초대교회에 여성들은 기독교의 전파에 큰 몫을 감당했다.
초대교회는 대부분 가정교회 형식으로 모였었다.
가정교회는 경건한 부인들의 내조가 특히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 부인들은 경건한 행실과 본으로써 전도에 열심이었다.
물론 사도와 지도자들이 설교로 섬겼고, 여성들은 기도와 예언으로 섬겼다(빌립 집사의 딸들도 예언했다).
또한 크리스천 여성들은 낙태나 유아 살해를 금하고, 경건한 자녀들을 많이 낳아 양육함으로써
역시 (생물학적으로도) 교회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
성도들이 여아를 내어버리지 않고 경건하게 잘 양육하자, 여아를 내어버리는 불신자들보다
경건한 인구가 더욱 빠르게 증가되어졌다. 그 죽을 뻔했던 여아들이 훌륭한 어머니가 되어
다시 훌륭한 자녀들을 낳아 키움으로써 초대교회는 더욱 튼튼하고 왕성하게 부흥되어져 갔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교회를 개척 할 때일수록 경건한 여자들과 더불어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초대교회처럼.)
▶과부의 보호자 예수님
예수님은 과부를 학대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엄히 꾸짖으셨다(막 12:40).
또한 초대교회의 야고보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 경건이라고 가르쳤다(약 1:27).
그러나 비기독교적인 문화에서는 과부는 종종 정말 불쌍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어떤 종교는 고의적으로 (남편이 죽을 때) 부인(과부)을 함께 죽이는 의식을 행한다. 힌
두의 사티(suttee 남편 화장때 부인도 같이 화장) 풍습에 의하면,
소녀는 보통 5-6세의 어린 나이 때 늙은 남자의 아내로 팔려온다.
그래서 집에서 심부름도 하면서 양육을 받는다.
그런데 몇 년 후에 남편이 늙어서 죽거나 갑자기 횡사하면
십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과부로 전락하는데, 이 때 남편의 장례식 때 함께 화장을 은근히 강요당한다.
그 이유는, ①남편의 가족(시댁식구)들이 어린 과부의 남은 평생 생계를 책임지기 싫다는 경제적 계산과,
②혹시 과부가 수절하지 못하고 부정한 일을 저지를까 (특히 가족간에) 하는 그릇된 윤리적 염려와,
③또한 ‘사티’로 분신하고 나면, 다음 세대에 보다 월등한 신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잘못된 종교(윤회) 사상이 겹쳐서 수많은 소녀 과부들이 남편과 함께 분신 화장의 길을 택했다.
윌리엄 캐리 같은 선교사는 인도의 잘못된 ‘사티’ 풍습에 대항해서 싸웠고,
그 결과 정부를 설득해서 그 악습에 대한 법적 제재를 가하는데 성공했다.
다행히 지금은 이런 풍습이 사라졌다. 화장은 있지만, 부인이 함께 화장되진 않는다.
이와 비슷한 과부 동행 매장 풍습(순장殉葬)은 비단 인도뿐만 아니라, 미국 인디언, 뉴질랜드 마오리 족,
아프리카 일부 지역, 스칸디나비아, 핀랜드, 그리고 고대 중국 등 전세계에 걸쳐 시행되던 악습이었다.
성경은 과부를 철저히 옹호한다. 성경은 모두 88회에 걸쳐 과부에 대해 가르치는데,
과부를 해롭게 하면 하나님이 복수자가 되어 주신다고 한다(시 68:5등).
그래서 초대교회는 물론이고, 폴리캅 같은 교부들도 과부를 돌보는데 헌신적이었다.
이방 종교는 과부가 전남편을 따라 죽을 것을 가르치지만,
성경은 젊은 과부는 다시 재혼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성도의 친척 중에 과부가 있으면, 그들을 돌아보고 구제할 것을 명한다.
만약 돌봐줄 친척이 없는 과부면, 교회가 그들을 돌볼 것을 명하셨다.
이렇게 교회가 책임지는 과부들은, 늘 도움을 받는 불쌍한 거지 신세가 아니라,
기도와 경건으로 교회를 섬기는 능동적인 일꾼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가 과부들을 돕고,
도움을 받은 과부들이 다시 교회를 도왔던 것이다.
그들은, 환난 당한 자들을 돕고 모든 선한 일에 헌신함으로써, 다시 교회를 도왔다. (딤전 5:10, NIV)
♠구제의 원리
우리는 여기서 <구제의 원리>를 배운다; 거저 구제 받는 대상이 거지 의식이나
수치심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명예dignity를 존중해 주어야 하는데,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또한 다른 환난 당한 자들을 축복하고 도울 수 있는 길을 열어줌으로써
그들의 명예가 존중되어지도록 유도해야 한다.
도움을 정성껏 받은 사람은, 기꺼이 타인을 정성껏 돕는 사람이 된다.★
남편이 별세하고 자녀들마저 없거나 아니면 다 장성해서 떠나버려서
완전히 혼자된 과부 - 세상에서 참 불쌍하고 무시당하기 딱 알맞은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의 가치는 그의 “가족관계”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의 “하나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 성경은 남편을 섬기고 자녀를 기르는 어머니를 존중하지만,
혼자된 경건한 과부 역시 존중한다. 오늘날 많은 혼자된 과부single woman들도
하나님과의 경건한 관계 속에서 교회에서 존경을 받으며
귀한 일꾼이 될 수 있는 길을 성경은 열어놓고 있다, 특히 딤전 5장에서.
▶현대 극단 여성 운동과 차이점
예수님이 여성을 위해 일하셨지만 그것은, 여성의 여성적 면feminine을 약화시키시고
반대로 남성적인 면masculine으로 향상시키는 방식(현대 극단적 여성운동)은 아니었다.
모든 분야에서 여성을 남성과의 대결-경쟁구도로 가져가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여성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의 여성적 특징들을 존중하셨다.
또한 여성이 여성적인 은사로 일하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남성들이 여성을 존중하고 가정에서 부인을 잘 돌보도록 가르치셨다.
그래서 교회는 원리적으로 남성과 여성은 동등(가치에 있어)하며, 기혼자와 싱글single 역시 동등하다.
싱글이라고 해서 기혼자에게 뒤지는 차별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
과거에 일하신 예수님은 오늘날도 동일하게 일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과 기독교가 들어간 사회와 나라에서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존중하며,
성차별의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
싱글(과부, 미혼 독신 포함 넓은 의미)들도 마찬가지다.
싱글이라고 해서 남편있는 부부보다 차별해서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그래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오늘도 선교지에서 복음전파․영혼구원 사업과 더불어, 자칫 무시당하기 쉬운
여성들의 가치가 존중되는, 기독교회의 헌신을 통해, 역사가 계속되어지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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