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1)
1. 목적
로마서는 바울이 쓴 서신 중 그가 직접 개척하지 않은 교회에 보낸 유일한 편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서는 바울이 쓴 서신들 중2) 가장 긴 서신인 동시에, 그가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을 가장 잘 대변하는 중요한 서신으로 알려져 왔다.3) 또한 로마서는 Augustine, Luther, Calvin, K. Barth 같은 교회사의 주요 인물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다.4)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 때문에 로마서를 썼는가? 그가 로마서를 쓰게 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2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역사적 배경을 생각할 때,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첫째,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1:1-15), 그 자신이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고, 자신이 직접 개척하지도 않은 로마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 쓴 편지라는 점이다.
둘째, 바울 자신이 15:19-24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로마서는 바울이 한편으로는 예루살렘과 안디옥으로부터 시작해 지중해 연안의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고 이제 새로운 사역지인 스페인에 대한 선교를 계획하면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페인 선교에 대한 로마 교회의 후원을 기대하면서 쓴 편지라는 점이다.5)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3
셋째, 로마서는 바울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등 자신의 선교 지역에서 모금한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 여행을 준비하면서 쓴 편지라는 점이다(15:25-26; 행 19:21).
이처럼 로마서는 로마, 스페인, 예루살렘 등 3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는 바울이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데살로니가전서 등의 서신들을 쓴 다음인 AD 55-57년경 그의 3차 선교여행을 마칠 무렵에 고린도에서 쓴 것으로 추정된다.6) 이렇게 볼 때 로마서는 사실상 사도 바울의 생애와 선교 사역의 가장 완숙기에 또한 결정적인 전환기에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로마서를 바울의 신학적 유언(遺言)으로 보는 G. Bornkamm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로마서에서는 바울 복음의 핵심인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비롯해 바울의 여러 서신들에서 취급되는 중요한 사상들이 보다 더 자세하고 체계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통해서도 입증된다.7)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상 그 어떤 바울 서신에서 보다도 로마서에서 바울 복음 및 신학에 대한 가장 체계적이고 완숙한 교훈을 기대할 수 있다.8)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4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로마서는 현존하는 바울 서신 중에서 바울이 직접 개척하지 않은 교회에 보낸 유일한 편지다(1:10). 그러므로 로마서는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전후서와 달리 교회 안에서 제기된 특수한 문제에 관한 직접적인 답변 형식의 편지로 간주되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로마서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이 보여 주는 특수한 상황성을 결여하고 있다. 오히려 교회적 상황보다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문안과 언급들이 편지의 서두(1:1-15)와 끝 부분(15:14-
16:23)을 차지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종교 개혁자 Martin Luther는 로마서를 ‘가장 순수한 복음’이라고 불렀고,9) 그의 후계자 Philip Melanchton은 ‘기독교의 요강(要綱)’(a compendium of the Christian Religion)이라 했으며,10) Nygren은 로마서가 역사적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하고 객관적인 교리의 체계를 보여 준다고 보았다.11)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로마서를 바울의 조직적인 교리집이나 신학 논문으로보다는 오히려 순수한 편지로, 즉 바울 자신이나 로마 교회의 역사적 상황의 필요성 때문에 쓰여진 것으로 보려고 한다.12) 하지만 로마서가 우선적으로 바울 자신의 필요에 의해 쓰여진 것인지, 아니면 로마 교회의 필요성 때문에 쓰여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13) 예를 들어, C. H. Dodd,14) T. W. Manson,15) A. Nygren,16) G. Bornkamm,17) J. Jervell,18) C. E. B. Cranfield,19) J. W. Drane,20) L. A. Jervis21) 등은 로마서는 우선적으로 바울 자신의 상황적 필요성, 즉 그 자신의 예루살렘 여행, 미래의 로마 방문, 복음의 변증, 스페인 선교 등의 문제 때문에 쓰여졌다고 본다. 반면에 K. P. Donfried,22) P. S. Minear,23) J. C. Beker,24) G. P. Wiles,25) C. J. Roetzel,26) R. P. Martin,27) J. A. Ziesler28) 등은 로마서가 바울 자신의 상황적 필요성보다는 당시 로마 교회가 당면한 문제로 인한 목회적 관심 때문에 쓰여졌다고 본다.29)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5
만일 로마서가 주로 로마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쓰여졌다면, 바울이 로마서를 써서 보낼 당시 로마 교회는 어떤 문제에 직면해 있었는가? 1세기의 로마 역사가 Suetonius가 쓴 [황제들의 생애](Lives of the Caesars)에 따르면, 황제 Claudius가 AD 49년경에 “크레스투스(Chrestus)의 추종자들 때문에 야기된 계속적인 소란 때문에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했다”(Claud. 25:4)고 기록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따라 Suetonius가 말하는 ‘Chrestus’를 ‘그리스도’로 본다면,30) 우리는 AD 49년경에 이미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되어 있었으며, 이때에 적지 않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로마에 확산되고 있었던 반 유대교 운동(Anti-semitism)의 영향으로 인해 로마에서 추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31)
누가에 따르면(행 18:2),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났던 로마 교회의 신자 브리스가와 아굴라도 이때 로마에서 추방된 것 같다.32) 이것이 사실이라면 로마 교회를 형성했던 초창기의 사람들은 주로 유대인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33) 그러나 이 유대인 신자들이 로마로부터 추방된 이후에도 로마 교회는 계속해서 존속, 발전했으며, 그리고 시간이 흐름과 함께 이방인들이 유대인들보다 교회의 다수를 형성하게 된 것 같다 (롬 1:13; 11:13; 2:17; 3:9 참조).34)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6
그런데 AD 54년에 황제 Claudius가 사망하고 황제 Nero가 즉위하면서 유대인 추방명령도 취소되었기 때문에, 바울이 로마서를 쓸 무렵에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경우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롬 16:3-4), 로마를 떠났던 적지 않은 유대인 신자들이 로마로 귀환한 것 같다.35) 이것이 사실이라면, 로마 교회를 세웠던 유대인 신자들의 귀환으로 말미암아 그들과 당시 다수를 차지했던 이방인 신자들 사이에(1:13; 11:13 참조), 특별히 반 유대교 영향을 받은 이방인 신자들 사이에, 적지 않은 긴장을 초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36) 그리고 이 긴장은 율법, 할례, 유대인의 정체성과 생활방식, 이스라엘 민족의 장래 등의 문제와 관련해, 유대인 신자들 사이에는 물론 이방인 신자들 사이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긴장과 대립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37)
실제로 바울은 11장에서 이방인 신자들과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에 비유하면서, 이방인 신자들이 당시 로마 사회에 풍미하고 있던 반 유대교적 관점 아래 스스로 자긍하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으며(11:17-24), 14장에서는 유대인들의 음식 문제와 관련하여 이방인 신자들이 유대인 신자들의 생활 태도를 비판하지 말고 서로 관용으로 용납할 것을 권면하고 있으며(특히 14:1-4,10,13, 15,20; 15:7),38) 그밖에도 로마서의 여러 곳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간의 문제들에 대한 여러 가지 언급을 하고 있다(1:16; 2:9-11; 3:22,29; 9:23; 10:12).39)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예를 들어, C. Beker, F. Watson, P.S. Minear, E.P. Sanders),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주된 목적은 당시 로마 교회가 안고 있던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과의 올바른 관계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고 보고 있다.40) 실제로 바울은 서두와 결언 부분에서 자신의 로마 교회 방문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너희에게 어떤 영적 은사를 나누어주어, 너희를 강하게 만들고 싶다”(1:11); (2)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고 싶다”(1:13); (3)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1:15); (4)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16:17); (5)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16:20). 이와 같은 로마서 서두와 결언은 로마서가 로마 교회의 형편과 연결되어 있다는 강한 인상을 준다.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7
물론 이러한 주장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가 언급한 바대로, 로마서를 쓸 무렵 바울이 그 자신의 생애와 사역에 있어서 결정적인 전환점에 놓여 있었다는 것은, 로마서가 바울 자신의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해 주기 때문이다.41) 예를 들어, 바울은 로마서 11:25-28에서 웅대한 세계 선교 비젼을 제시하고 있으며, 15장에서는 자신이 이제 지중해 동반부 선교를 끝내고(15:19-23) 서반부인 스페인 선교 계획을 갖고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15:24,28). 이뿐만 아니라, 바울은 로마서 서두에서부터 자신의 사도됨과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에 대한 강한 천명을 하고 있다(1:1-17). 이러한 바울 자신의 진술은 로마서가 스페인 선교와 관련해 먼저 로마 교회에 사도된 자신과 그 동안 그가 전파해 왔던 복음을 소개하고, 또한 미래의 자기의 선교 활동과 관련해 그들의 도움을 기대하기 위해 쓰여졌으리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42)
소아시아나 로마와는 달리 스페인에는 바울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접촉점이 되었던 유대교 회당이 거의 없었다면,43) 바울의 스페인 선교와 관련해-특히 재정적, 문화적(특히 언어면)인 측면과 관련해-로마 교회의 지원은 불가결한 요소였을 것이다.44) 그리고 상당한 유대인 신자들이 로마 교회에 소속되어 있었다면, 그리고 그들이 예루살렘이나 소아시아 지역의 유대인들과 빈번한 접촉이 있었다면, 바울이 로마서를 쓰기 전에 로마 교회가 바울이 전파한 율법과 관계없는 믿음에 의한 칭의교리는 물론, 이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에 대한 유대주의자들의 심각한 반대 운동에 대해서도 이미 듣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그의 스페인 선교와 관련해 로마 교회를 방문하기 전에 자신이 그 동안 전파한 복음을 그들에게 보다 자세히 해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1:10-15). 특별히 바울의 이방 교회들이 준비한 부조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문제가 단순한 물질적인 지원 이상의 의미, 곧 헌금을 통한 이방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연합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로마 교회 방문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면,45) 어려운 상황이 예측되는 예루살렘 방문과 관련하여(참조 행 21:1-16), 그들에게 이와 같은 해명의 편지를 보내야 할 필요는 더욱 컸을 것이다. 바울이 예루살렘 방문과 관련해 로마 교회의 후원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것은 15:30-32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바울의 부탁에서 잘 드러난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해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8
J. Jervell이 지적하는 것처럼,46) 바울은 로마서를 로마 교인은 물론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 곳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자신에 대한 해명 자료로 삼으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47)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어떤 특수한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로마서를 썼다기보다, 오히려 바울 자신과 로마 교회의 역사적 정황과 관련된 신학적, 선교적, 목회적 등 다방면의 필요성 때문에 썼다고 본다.48)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9
2. 로마서의 중심 주제: ‘복음’/‘이신칭의’
로마서의 중심 주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로마서의 중심 주제를 ‘복음’/‘이신칭의’로 보고자 한다.49) 바울은 로마서 서두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받은 사도”(klhto;" ajpovstolo" ajfwrismevno" eij" eujaggevlion qeou)'임을 천명하고(1:1), 2-4절에서 이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해 말한다. 계속해서 1:15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너희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provqumon kai; uJmi'n toi'" ejn ‘Rwvmh/ eujaggelivsasqai)고 말하고, 이어서 로마서의 주제 구절로 불리우는 1:16-17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를 이 복음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다시 로마서를 마감하는 결언 부분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제사장직 책임”을 맡았다는 것과(15:16), 이 복음,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두루 전파했다”는 것과(15:19), “이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로마 교인들을 견고케 하실 것”임을 말하고 있다(16:25-26).
부언하자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종말론적인 사건을 통해 도래한 새로운 시대에는, 옛 시대에 있었던 율법과 할례와 성전에 근거를 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철폐되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 없이 다같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삶을 누리게 된다는 이 이신칭의 사상이 로마서 서두와 결언 부분을 장식하고 있다.50) 사실상 이 복음의 진리는 이미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에서도 바울의 핵심적인 사상으로 전개되고 있다.51)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10
바울은 그가 선교의 초창기부터 일관되게 전파해 왔던 이 복음의 진리가 자신의 미래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로마 교회에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사도됨과 자신의 복음을 대변할 뿐 아니라,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당면한 로마 교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열쇠가 되리라고 확신한 것 같다. 더 나아가 이 이신칭의의 복음이 예루살렘에 있는 동족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근거가 되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이것은, 대다수의 주석가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로마서의 주제 구절로 알려져 있는 로마서 1:16-17을 위시한 로마서의 전개 과정을 고려해 볼 때 부정하기 어렵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바울은 로마서 1:16-17에서 먼저 로마서의 중심 주제를 천명하고, 그 다음 1:18 이하에서 이 주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가는 방식을 취한다. 다시 말해, 바울은 1:16-17의 주제 구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52) 곧 인간은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고(신분), 그 믿음으로 살아간다는(삶) 복음의 진리를 천명하고,53) 그 다음 1:18-3:20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이 복음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강조한다. 3:21-4장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다같이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구체적인 내용을, 그리고 구조적으로 볼 때 로마서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5-8장에서는 이신칭의의 실제, 즉 유대인과 이방인의 인종적 장벽을 초월해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가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혹은 육) 아닌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자유/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9-11장에서는 ‘이신칭의’의 구원 역사적 전망, 이른바 율법 아래 계속 머물려고 하는 유대인의 현재와 미래는 물론 유대인의 거울을 통해 이방인 신자들의 신분과 삶에 대한 재조명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12-15장에서는 이신칭의의 구체적인 적용과 실천인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54) 그렇다면 로마서의 중심 주제 구절이 말하는 이신칭의 복음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11
최근의 바울 연구에서 가장 심각하게 토론되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바울의 이신칭의 메시지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종교 개혁자 M. Luther 이후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은 이신칭의를 로마서는 물론 바울 신학 전체의 중심 주제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금세기에 와서 W. Wrede, A. Schweitzer, K. Stendahl을 위시한 몇몇 학자들은 이신칭의 교리를 바울 신학의 중심에서 이동시켜 바울의 이방선교 현장에서 발달된 일종의 논쟁교리(the Kampfeslehre)라고 주장하고 있다.55) Schweitzer는 이신칭의 교리가 로마서 1-4장에서만 나타나는 반면, 중심부에 해당되는 5-8장에는 오히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강조되는 것을 근거로 삼아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로마서의 중심적인 주제로 간주한다. 또한 E.P. Sanders는 로마서는 종교 개혁자들의 주장처럼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주제로 삼기보다는, 오히려 이방인들이 어떻게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 참여할 수 있는가를 주제로 삼고 있다고 보고 ‘그리스도에의 참여’(Participation in Christ)를 로마서의 중심적인 주제로 본다.56)
그러나 우리는, 설사 이신칭의 교리가 바울 신학의 중심이나 바울의 복음을 나타내는 유일한 길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이신칭의를 이해하지 않고는 바울 신학의 중심도, 바울 복음의 진수도 알 수 없다고 믿는다.57) 이신칭의의 메시지가 특별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중심 주제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또한 그런 점에서 바울 자신과 그의 독자들의 특수한 역사적 정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는 이신칭의 교리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만 한정되어 있는 특수한 메시지이거나, 특수한 역사적 정황의 산물인 것처럼 속단해서는 안 된다.58) 이신칭의 메시지는 고린도전후서와 빌립보서 및 에베소서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고후 5:11-21; 빌 3:2-11; 엡 2:8-9). 일찍이 J.G. Machen이 그의 책 [바울 종교의 기원]59) 에서, Wrede가 Schweitzer와 함께 바울의 이신칭의의 교리를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참여 신학과 이방인 선교현장에서 나온 일종의 부수적인 논쟁 교리(the Kampfeslehre)로 간주하는 것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내린 다음과 같은 결론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보아야 한다:
이방인 선교가 바울로 하여금 이신칭의의 교리에 전념하도록 한 실제적인 이유는 아니다. 오히려 사실은 그 반대이다. 바울은 이방선교 때문에 이신칭의 교리에 전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는 이신칭의 교리 때문에 이방인 선교에 전념하게 되었다.60)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12
사실상 바울에게 있어서 이신칭의 교리는, 그의 선교 현장에서 유대주의자들과의 갈등으로부터 이방인 신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지위의 합법성을 마련하기 위해서, 혹은 유대주의자들을 대적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 교리는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부터 갖게 된 것이다.61) 그리고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구원하고자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소명을 받았기 때문에 이방 선교에 매진하게 되었던 것이다.62) 따라서 이신칭의 교리는 바울 복음의 핵심인 동시에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 대한 그의 복음전파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신칭의 교리와 바울의 이방 선교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기 하지만, 이방선교가 이신칭의 교리를 낳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신칭의 교리가 그의 이방 선교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63) 여기서 우리는 바울에게 있어서 이신칭의의 메시지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로마서의 주제 구절로 간주되는 로마서 1:16-17에 대한 주석학적인 고찰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13
(provqumon kai; uJmi'n toi'" ejn ‘Rwvmh/ eujaggelivsasqai)(15)
uj ga;r ejpaiscuvnomai to; eujaggevlion,
duvnami" ga;r qeou' ejstin eij" swthrivan
panti; tw'/ pisteuvonti,
’Ioudaivw/ te prw'ton kai; ‘ vEllhni(16)
dikaiosuvnh ga;r qeou' ejn aujtw'/ ajpokaluvptetai
ejk pivstew" eij" pivstin,
kaqw;" gevgraptai, ‘O de; divkaio" ejk pivstew" zhvsetai(17).
(나는 로마에 있는 여러분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염원합니다)(15)
왜냐하면 나는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믿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16)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기까지 복음 안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부터 살리라 함과 같습니다(17).
로마서 전체의 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 1:16-17은 서론(1:1-15)(exordium)과 문제의 진술(1:18-3:20)(narratio) 사이에 있으면서 하나의 전환점을 형성한다.64) 동시에 16-17절은 3:21-31에서 제시되는 논제(propositio)의 예비 진술 역할을 한다. 로마서 1:16-17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바울의 논증의 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이다. 즉 15절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자하는 열의를 천명했다. 이와 관련하여 16a절에서 바울은 이유 접속사 ga;r을 사용하여 그 열의를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실과 연결시킨다(참조 갈 1:10-11; 고전 9:16). 서두에 있는 강조형 부정 Οὐ는 한편으로 강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볼 때, 바울은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65) 사실상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는 바울 당대 사회에서 복음이 부끄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66) 고린도전서 1:18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 곧 복음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수 있다고 말하며, 역시 고린도전서 1:23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곧 바울의 복음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67)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나 헬라인들 앞에서 이 복음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고백한다.68) 그 이유는 1:1이 말하는 것처럼, 그는 이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갈 1:15-16), 또한 1:5이 보여 주는 것처럼, 그는 이 복음의 내용과 선포의 대상이 되는 그리스도로부터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직분을 받았기 때문이다(롬 15:16,19; 갈 1:1).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14
16b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구체적인 근거를 역시 이유접속사 ga;r을 사용해 복음은 그 복음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곧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임을 밝힌다.69) 동시에 그는 이 복음이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이긴 하지만 이 복음이 가져다 주는 구원을 받게 되는 자들은, 어디까지나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 없이 복음을 믿는 자들임을 밝힌다. 다시 말해, 복음 그 자체가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이 능력은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오직 믿는 자들에게 역사한다는 것이다.70) 여기서 바울은 구원을 믿음과 강하게 연결시킴으로써(역시 3:22; 4:11; 10:4,11),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공로나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요, 선물임을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여하한 공로주의나 율법주의도 배격한다.71)
바울이 복음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복음의 기원과 출처가, 시편 기자의 “나의 구원의 능력이신 하나님”(시 140:7)이라는 고백처럼, 하나님 자신일 뿐만 아니라, 복음을 통해 복음의 내용인 그리스도(1:4)가 전파될 때마다 그 복음과 함께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하시기 때문이다.72) 구약에서 하나님은 애급 땅에 포로되어 있던,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왕의 권세 아래 사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의 능력으로 구원하심으로써 그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나타내 보이셨다(출 9:16; 시편 77:14-15). 바울은 ‘능력’이란 말을 때로 복음의 말씀과 일치시키기도 하고(고전 2:4-5; 4:19,20; 살전 1:5), 때로는 성령과 일치시키기도 한다(롬 15:13,19; 고전 2:1-5; 고후 4:7; 롬 8:11; 고전 6:14).73) 복음이 구원의 능력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신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믿음의 대상이 무엇인지에 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문장의 주어인 복음, 곧 복음의 내용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인종과 사회적 신분과 남녀의 차별이 없는 ‘모든 자들’이다(참조 롬 3:22; 4:11; 10:4,11; 갈 3:28). 바울은 바로 이어서 이 모든 자들을 유대인과 헬라인(이방인)과 연결시킴으로써, 구원을 얻는 길에 있어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등의 차별이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74) 다시 말해, 이방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자처하는 유대인들조차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에 도달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고, 또한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75) 바울이 로마서 9-11장에서 자세히 논술하는 것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한다. 하지만 바울은 유대인이 이방인들과는 다른 방식을 통해 구원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76)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15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믿음이 비록 복음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인 응답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복음과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아무리 믿음을 강조할지라도, 우리의 믿음은 복음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결코 인간의 공로가 아니다. 믿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그리스도)이 우리에게 선포될 때, 그리고 그 복음이 우리에게 인격적 응답을 요구할 때,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인 응답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믿음은, Cranfield가 잘 지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선포되는 복음을 통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회복시키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참된 자유의 표현이다.77) 궁극적인 면에서 우리가 믿음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물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울이 복음을 추상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 자체가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복음과 그리스도가 나누어질 수 없고, 또한 그리스도와 성령이 나뉘어질 수 없기 때문에, 복음 자체가 성령과 더불어 그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을 불러일으키고(롬 10:17; 고전 4:15; 빌 1:29), 새 창조의 사역을 가져오는 것이다(고후 4:6).
바울에 따르면, 복음을 통한 구원은 구약 시대부터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약속되었던(참조 사 12:2; 25:9; 46:13; 52:7.10) 종말론적인 구원이다.78) 그렇다면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복음이 무엇 때문에 그리고 어떤 근거에서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 종말론적인 구원을 가져다 주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바로 17절에 나타나는 세번째 이유접속사 ga;r과 함께 제시된다. “왜냐하면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기까지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바울은 복음 안에 나타난 이 하나님의 의를 하박국 2:4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과 일치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 안에 나타난 이신칭의 교리는 구약 약속의 종말론적인 성취임을 밝힌다(참조 갈 3:8). 바울이 유대의 종말론적인 단어 중 하나인 ‘아포칼룹테타이’(ajpokaluvptetai)를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16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유대 종말 사상에서는 역사의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물론 언약 밖에 있었던 이방인들까지 구원하시리라는 사상이 편만해 있었다(4QFlor., 4Q246; 4 Ezra 7:28-29; 9:7-8; 13:32,37,52; 14:9; Pirke Avot 3:16; T. Simeon 7:13; T; Levi 18:2,9; T. Zeblum 9:8; T. Naphatali 8:1,3). 앞에서 언급한 대로,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종말에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실 분으로 기대되었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의 사역에 대한 종말론적인 복음이다. 따라서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구원 사건에 대한 선포다.
이제 우리는 로마서 1:16-17뿐만 아니라 로마서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롬 3:5,21,22,25,26; 10:3,3)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79)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우리는 문법적, 그리고 언어적 연구를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 자신의 용법이다. 우리는 바울을 구약이나 당대에 사용되는 언어의 의미에 묶여 있던 사람으로 볼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바울이 어떤 언어를 독창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문학가이며 신학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17
우리는 ‘하나님’과 ‘의’와의 속격 관계를 ‘주격 속격’으로 볼 수도 있고, ‘목적 속격’으로 볼 수도 있고, 또한 ‘설명 속격’으로 볼 수도 있다. 주격 속격은 이 의가 그 기원과 특성과 내용을 하나님에게 두고 있음을, 목적 속격은 이 의와 관련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그리고 설명적 속격은 이 의가 사실상 하나님 자신을 대변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는, 대다수의 학자들의 의견을 따라, 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격 속격 관계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한다.80)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의를-종교개혁자 Luther를 위시한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Nygren, Ridderbos, G. Klein, Cranfield, Ladd, Seifrid)이 주장해 온 것처럼-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로운 상태, 즉 우리가 그 분 앞에서 의로운 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하신 우리의 상태”(a status given by God)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최근에 Käsemann을 위시해 적지 않은 학자들(Müller, Kertlege, Ziesler, Beker, Becker, Moo, N.T. Wright)이 주장하는 것처럼-하나님의 의가 하나님께서 단순히 죄인인 우리를 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죄인인 우리를 의로운 신분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구원 행위”(the saving action of God)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약속에 대한 언약적 신실성”(the faithfulness of God to his promise of salvation)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Cranfield는 로마서 10:3, 빌립보서 3:9, 고린도전서 1:30, 고린도후서 5:21에 근거해,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우리의 의로운 상태, 즉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인 우리에게 전가된 법정적 의를 가리킨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는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기까지”라는 말과, 하박국의 인용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고 본다.81)
반면에 Käsemann은 ‘하나님의 의’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법적으로 선언하신 의로운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은, 그 의를 수여자인 하나님과 분리시켜 인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고 보고, 그 의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종말론적인 창조적 능력과 행위로 보려고 한다.82) 더욱이 Käsemann에게 있어서 이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묵시적 사건으로서 인간은 물론 전 우주적 전환과 회복을 포함한다.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18
우리는 ‘의’를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로 보려는 Cranfield의 견해는 사실상 이 ‘의’를 한정하는 ‘하나님의’라는 말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으며, 반면에 이 ‘의’를 지나치게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위나 능력으로만 보려는 Käsemann의 견해는 바로 이 의가 인간의 책임적인 응답과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믿음으로부터”라는 말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고 본다.83) 따라서 우리는 바울에게 있어서 의는 역동적인 의로서 양면을 동시에 다 갖고 있다고 본다.84) 즉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창조적인 구속행위이기 때문에, 그 속에 이미 새로운 창조적 생명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85) 말하자면 칭의 안에 이미 성화가, 성화 안에 이미 칭의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 1:17에서 하나님의 의를 그가 이미 16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라고 표현했던 복음과 직접 연결시키는 것은-즉 복음 안에서, 복음을 통해, 종말론적으로 나타나는 의에 대해 말하는 것은-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정적인 의미를 지닌 하나님의 선물로만 보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86)
이뿐만이 아니다. 바울이 ‘의’라는 명사뿐만 아니라 종종 ‘의롭게 하다’라는 현재 동사를 사용하는 것과, 로마서 1:16-17의 내용과 병행하는 3:21-27에서 의가 하나님 자신의 의롭게 하는 행위 자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87) 더구나 로마서에서 바울이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는 헬라적 사고의 전망이 아니라 오히려 양자의 구별을 초월하는 히브리적 전망에 서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더욱 확실해진다.88) 사실상 바울은 고린도전서 1:30에서 복음의 내용이 되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의는 물론 성화와 구속이 되셨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통해 의에 참여하는 자는 동시에 성화와 구속에 참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역시 고전 6:11).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의 전반부만의 주제가 아니라(1-8장), 이스라엘 민족의 궁극적인 회복(9-11장)과 신자의 전 삶의 영역의 회복(12-15장)을 말하는 후반부 전체의 주제임이 분명해진다.89) 다시 말하자면,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창조, 타락, 구속 전반과 관련되어 있는 포괄적인 주제다.90) 이것은 1:17 하반절의 인용문을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바울의 하박국 2:4의 인용을 보면, 엄밀한 의미에서 바울은 “의인은 그 자신의 신실성 때문에 살리라”(ה וֹת וּמ קי )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성경 MT 본문도, 또한 “의인은 나의(하나님의) 신실성 때문에 살리라”(oJ de; divkaio" ejk pivstewv" mou zhvsetai)라는 뜻을 가진 LXX 본문도 따르지 않는다. 여기서 바울의 구약 인용에 관해 자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 바울이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나타내기 위해 종종 구약의 본문을 임의로 바꾸고 있음을 감안할 때, 우리는 그가 MT의 3인칭 대명사나 LXX의 1인칭 대명사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바울은 이 의의 종말론적이고 그리스도론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두 인칭을 생략하고 있는 것 같다.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19
바울은 여기서 구약성경을 인용해 이신칭의의 복음이 이미 구약에서 약속되었던 것임을 분명히 한다. 다시 말해, 구약 시대에는 율법을 통한 의의 길만 있었다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한 의의 길이 보충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의의 길은 오직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뿐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3:21에서 하나님의 의가 율법과(참고 출 34:6 이하) 선지자들에게(참고 사 43:25; 45:7 이하)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또한 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역사를 소개함으로써, 이 점을 분명히 밝힌다(역시 갈 3:6-12절).
이 구절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믿음으로’(ejk pivstewv")를 주어인 명사 ‘의인’(oJ divkaio")에 연결시킬 것인가(RSV, TEV, NEV), 아니면 동사 ‘살리라’(zhvsetai)에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KJV, NASV, NIV). Cranfield는 ‘믿음으로’라는 말을 동사보다도 명사에 연결시켜서 바울이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이 살리라는 것이라고, 즉 이신칭의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라고 본다.91) 하지만 바울이 ‘믿음으로’라는 말을 명사뿐만 아니라 동사에까지 같이 연결시켜 사용했을 가능성도 매우 크다.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은 또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의’가 새로운 신분과 새로운 삶을 함께 함축하는 종말론적 구원의 의미를 가졌다고 본다면, ‘믿음으로’가 양자와 다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슨 이유로 그의 초기 서신(예를 들어, 갈라디아서)에서는 물론 로마서에서까지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혹은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삶을 결정한다는 이신칭의를 계속해서 강조해야 했던 것일까? 다시 말해, 이신칭의를 그 주된 내용으로 삼는 바울 복음의 역사적 정황(Sitz im Leben)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바울이 활동했던 주후 40-60년 사이의 초대 교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깊이 고려해야 한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초대 기독교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성에서 오는 기독교 신자들의 정체성(identity)과 삶(behaviour)의 문제, 즉 누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E.P. Sanders의 표현을 빌리자면, ‘getting in’과 ‘staying in’의 문제였다.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20
예수님을 포함해 그의 모든 제자들, 그리고 바울을 비롯한 대부분의 초기 기독교 복음 전도자들과 신자들은 유대인이었다. 또한 그들은 유대인과 동일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동일한 성경을 사용했다. 따라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하나의 독립된 종교로서가 아니라 유대교 내부의 메시야적 운동으로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처음부터 기독교 신자들은 유대인들이 거짓된 메시야로 알고 십자가에 처형했던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었으므로 유대교인들과 구별될 수밖에 없었다.92) 게다가 40년대에 이르러 예수 운동은 이미 인종과 경계선을 뛰어넘어 이방인들에게까지 확산되기 시작했다.93) 따라서 기독교는 출발 때부터 자연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교인들과의 관계, 그리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 문제를 중요한 이슈로 다루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94)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바벨론 포로 귀환 후인 제2 성전 시대부터 모세의 율법은 약속된 메시야와 종말론적인 성령이 오실 때까지 모든 유대인들의 신분과 삶을 좌우하는 원리로 받아들여졌다.95)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과 성령 체험을 통해 예수님이 바로 종말에 오실 그 메시야라는 것, 약속된 종말론적인 성령이 이미 오셨다는 것, 그리고 일찍이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새로운 시대(렘 31:31-35; 겔 37:26-27; 요엘 2:28-29)가 예수님과 성령을 통해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참조 고후 3:7-18). 그후 그는 새로운 종말시대에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령만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 없이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삶을 좌우한다는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고 이 진리를 계속해서 전파했다. 그리고 이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인 이방인 신자들이 계속해서 기독교회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96)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21
그러나 우리가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와 갈라디아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옛 시대의 잔재인 유대인의 특권과 모세의 율법을 고수하려는 예루살렘 교회 출신의 유대인 순회 전도단들은 바울의 선교와 교회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저항 세력으로 등장했다.97) 이들은 예수 운동을 유대교 안의 운동으로만 생각했고, 따라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도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유대인이 되지 않는 한 유대인 신자들과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바울이 볼 때 이 유대주의자들은 새 시대의 선물인 성령의 의미를 약화시키는 것은 물론, 옛 시대의 모든 율법의 요구를 성취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무효화시킴으로써 복음을 복음 아닌 것으로 변질시키는 자들이었다(참조 갈 1:6-7; 2:18-20; 3:1-14). 따라서 바울은 한편으로는 이러한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로부터 그의 교회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서신들을 통해서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새 시대의 선물로 주어진 성령을 소유하는 것만이 새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삶을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던 것이다.98)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22
물론 우리는 바울이 직접 설립하지 않은 로마 교회에 유대주의자들의 영향이 어느 정도 미쳤는지, 그리고 로마 교회의 초창기 교인이었던 유대인 신자들을 통해 들어왔을 것으로 보이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당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비유대인 신자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해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로마서에 이신칭의의 복음이 그 어느 서신에서보다도 체계적으로 제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율법 및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문제가 로마서 전체를 통해 중요한 이슈로 계속해서 거론되고 있음을 볼 때,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과의 관계 문제가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 로마 교회의 당면한 실제적인 문제였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99)
바로 이와 같은 바울 자신과 로마 교회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하여 바울은 자신의 복음과 사역을 대변할 수 있는 로마서를 자신의 방문에 앞서 로마 교회에게 보냄으로써, 한편으로는 그들로 하여금 바울 복음의 진수를 접하게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복음의 진리를 통해 유대인 신자들에게는 유대주의자들의 영향을, 이방인 신자들에게는 신앙적 교만과 자부심을 각각 배제시켜 로마 제국의 수도에 위치해 있는 로마 교회가 굳게 서게 되기를 소망했던 것이다(롬 1:10-15 참조). 따라서 우리가 로마서에 나타나는 바울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올바르게 붙잡기 위해서는 로마서가 갖고 있는 이와 같은 역사적, 신학적, 사회적 배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로마서의 구조
로마서의 기록 목적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통일되어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로마서의 문학적 구조 문제에 대해서도 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다.10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바울의 다른 서신과 마찬가지로, 로마서가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며 그 나름의 분명한 문학적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로마서는 어떠한 문학적 구조를 갖고 있는가? 로마서는, 고린도전후서처럼, 바울이 로마 교회로부터 어떤 문제들에 대한 답을 구하는 편지를 받았거나, 혹은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현안 문제를 인편을 통해서 듣고, 거기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으로 보낸 편지가 아니다. 더구나 로마서는 바울 서신 중 자신이 개척하지 않은 교회에 보낸 유일한 편지이기도 하다.101) 이것은 로마서가 고린도전후서와 달리 훨씬 더 독자적이고 체계적인 문학적 구조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아마도 바울은 로마서를 쓸 때 분명한 목적과 주제를 갖고 있었을 것이며,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어떤 문학적 구조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102)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23
그렇다면 바울은 어떤 문학적 구조를 갖고 로마서를 썼는가? R. Bultmann은 로마서를 고대 헬라 시대의 철학 학파 중 하나였던 Cynic-Stoic 철학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비난 논쟁법인 ‘diatribe’의 특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 논쟁법은 가상적 대화, 논쟁, 수사학적 질문, 특별히 상대방의 논증을 반대하기 위해 “mh; gevnoito”(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라는 구문을 즐겨 사용하는 것이 주된 특징이었다. 따라서 Bultmann은 로마서를 일종의 논쟁적 서신으로 규정했다.103) 그러나 로마서가 부분적으로 Diatribe의 특성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를 들어 2:1-3:8), 로마서 전체의 문학적 특성을 Diatribe로 규정할 수는 없다.
Bengel의 수사학에 의한 로마서의 구조 분석 이후, 수사학에 의한 로마서의 구조 분석이 가장 최근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Bengel은 로마서를 exordium(1:1-15), propositio(1:16-17), tractatio(1:18-11:36), paraclesis(12:1-15:13), conclusio(15:14-16:27) 등으로 5등분했다.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24
1) G. Kennedy의 로마서 구조 분석
로마서를 일종의 시위적/교훈적 연설문(an epideictic speech)으로 보는 G. Kennedy는 그의 Rhetorical Criticism(152-156)에서 로마서의 수사학적 구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Address) and Proem (1:1-15)
2) Proposition (1:16-17)
3) Headings: Doctrinal Message and Refutation of
Objections(1:18-11:36)
(1) 1:18-2:16 Narration on the Power of God for
Damnation
(2) 2:17-4:25 The Situation of the Jew
(3) 5:1-6:23 The Situation of the Gentile
(4) 7:1-25 Address to Jews on the Nature of Faith
(5) 8:1-39 (The Life in Spirit) without Separation from
Christ
(6) 9:1-11:36 Address to Gentiles on the Situation of the
Jews
4) Pastoral Headings: Application of the Doctrine Developed in the Doctrinal Headings (12:1-15:13)
5) Epilogue (15:14-33)
6) Postscript and Letter Closure (16:1-23)
2) R. Jewett의 로마서 구조 분석
로마서를 외교적 편지(an ambassadorial letter)로 보는 R. Jewett는 그의 논문 “Following the Argument of Romans”104) 에서 Kennedy와는 다른 구조 분석을 제시한다: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25
1) Exordium (1:1-12)
2) Narratio (1:13-15)
3) Propositio (1:16-17)
4) Probatio (1:18-15:13)
(1) Confirmatio (1:18-4:25)
(2) Exornatio (5:1-8:39)
(3) Comparatio (9:1-11:36)
(4) Exortatio (12:1-15:13)
5) Peroratio (15:14-16:27)105)
3) H. Boers의 로마서 구조 분석
로마서의 구조 분석에 화법 분석법을 도입한 Hendrikus Boers는 로마서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본다106) :
1) Prescript (1:1-7)
2) Thanksgiving (1:8-17)
3) Main argument (1:18-11:36)
1) Faith as the means of justifying Jews as well as gentiles (1:18-4:25)
2) Transition (5:1-11)
3) The New life in Christ (5:12-8:39)
4) The Problem of the disbelief of Israel (9:1-11:36)
4) Admonition (12:1-15:21)
5) Postscript (15:22-27)
4) 우리의 로마서 구조 분석
우리는 로마서는 갈라디아서의 경우처럼 바울이 서신 양식과 수사학 양식을 활용했다고 보면서 로마서의 문학적 구조를 다음과 같이 보고자 한다.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26
1) 서언과 문안 인사 (1:1-15)
(1) 서언 (1:1-7)
(2) 감사 (8-15)
2) 주제 제시 (1:16-17)
3) 이신칭의 복음 제시(1:18-8:39): 믿음(그리스도/성령)에 의한 의의 신분과 삶
(1) 복음의 필요성 (1:18-3:20)
① 이방인의 경우 (1:18-32)
② 유대인의 경우 (2:1-3:8)
③ 결론 (3:9-20)
(2) 이신칭의 복음 제시 (3:21-8:39)
① 복음의 근거 (3:21-31)
② 복음에 의한 새로운 신분 (4:1-5:21)
a.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 (6:1-23)
b. 율법의 권세로부터 자유 (7:1-25)
c. 성령 안에서의 삶 (8:1-39)
4) 이신칭의 복음과 이스라엘 민족 (9:1-11:36)
(1) 하나님의 약속과 이스라엘 민족의 비참 (9:1-29)
(2)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역사의 정점인 그리스도 (9:30-10:21)
(3) 하나님의 신실성 (11:1-36)
5) 이신칭의 복음의 구체적인 적용과 실례 (12:1-15:13)
(1) 교훈의 근거 (12:1-2)
(2) 첫번째 원리: 지혜롭게 생각하라 (12:3-16)
(3) 두번째 원리: 선으로 악을 이기라 (12:17-13:7)
(4) 세번째 원리: 사랑으로 율법을 성취하라 (13:8-10)
(5) 네번째 원리: 그리스도를 입으라 (13:11-14)
(6) 원리의 적용 (14:1-15:13)
6) 결언 (15:14-33)
7) 후기 (16:1-23)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의 로마서 구조 분석은 로마서의 중심 주제가 이신칭의의 복음이며, 이 이신칭의의 복음이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삶을 포괄하고 있으며, 그리고 이 이신칭의의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똑같이 필요하다는 로마서의 중심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로마서의 주제 구절인 1:16-17이 로마서 구조 분석의 열쇠가 된다고 본다.107)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27
4. 바울과 이스라엘의 미래: 로마서 9-11장
율법 문제와 함께 최근의 바울학계에서 심각하게 제기된 문제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의 장래에 대한 바울의 견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이 문제는 로마서 9-11장의 해석 문제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이신칭의의 복음’으로 생각했다.108) 구원과 관련해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분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의 길 이외에는 없다고 생각해 왔다. 바울이 로마서 9-11장에서 자기 동족들을 생각하면서 가슴 아파했던 주된 이유도, 유대인 동족들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마련해 주신 이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율법을 통한 유대 민족적인 자기 의를 추구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이해해 왔다.
그런데 최근에 이와 같은 전통적인 견해에 반대하는 새로운 주장이 John Gager, Lloyd Gaston, Franz Mussner, Krister Stendahl, Paul Buren 등 몇몇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들은 소위 ‘두 언약 신학’(two-covenant theolo-
gy),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의 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위해 새롭게 마련하신 길이며, 반면에 유대인들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율법을 통한 길을 마련해 두셨다는 것이다.109)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바울이 로마서 10:18부터 11장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취급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들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여부를 따라 판단하시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그들의 신실성 여부를 따라 판단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길을 유대인들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하며,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길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서로 다른 길을 주셨기 때문이다.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28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 9-11장에서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의 장래 문제와 관련해 고심해 오다가 11:26-27에서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리라는 것을 내다보았다는 것을 인정한다.110)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바울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율법에 의한 길을 통해 민족적으로 회복된다고 주장한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우리는 로마서 9-11장이 로마서의 부록이 아니라, 로마서의 참된 한 부분에 속하며, 따라서 우리는 그 부분을 로마서의 전체 주제와 구분해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111)
Sanders가 지적하는 것처럼, 바울은 분명히 자신의 주제를 제시하는 로마서 1:16에서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라”고 하면서 복음을 통한 길 외에 유대인을 위한 특별한 구원의 길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112) 바울이 바로 이어 17절에서 하박국 2:4을 인용하는 것은 이 믿음에 의한 길이 구약에서부터 본래 하나님께서 세우신 약속의 성취임을 보여 준다. 그런 다음 3:21-27에 가서 이신칭의의 근거와 방법을 다루고, 또한 이신칭의의 메시지를 적용하는 3:28-29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고 말하면서, 이신칭의의 길만이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과 하나됨을 위해 동일하게 세우신 길임을 밝힌다. 그런 다음 바울은 이스라엘 문제를 다루는 10:11-13에서 다시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면서 믿음의 길만이 이방인이나 유대인에게 있어서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거듭 확인한다. 즉 바울의 복음은 흔히 생각하듯이 유대인들과는 관계없이 이방인들만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방인은 물론 유대인을 위한 복음이라는 것이다.113) 그러나 분명히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으며(11:1), 비록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스라엘이 완악하게 되어 있으나, 결국 이방인 신자를 포함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11:25-26).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29
C. Beker 교수가 잘 지적하는 것처럼, 유대인의 구원 문제와 이방인의 구원 문제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114)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 및 그의 은혜로우심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에 의존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율법에 대한 그들의 순종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들이 율법에 불순종하여 언약 백성의 신분을 상실하고 율법이 가져오는 저주 아래에 처해 있을 때,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의 길을 마련하신 것도 결국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그의 신실하심과 은혜 때문이었다. 바울이 로마서 9-11장에서 어느 곳에서보다도 많은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115)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로우심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도 유지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이방인의 구원 문제도 궁극적으로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신실하심과 은혜로우심이 동시에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신실하심과 은혜로우심의 표징이 된다는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에게도 그리스도를 통한 그의 신실하심과 은혜로우심을 나타내셨다면, 참 감람나무에 속한 이스라엘에게도 결국 자신의 신실하심과 은혜로우심을 나타내시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116)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로우심이 궁극적으로 보존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11:29-32에 제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느니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그렇다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로우심의 절정인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바울은 11: 25에서 그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 계시를 가르칠 때 종종 사용하는 ‘비밀’(to; musthvrion)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이런 구원이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의 구원이 이루어진 다음에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민족의 회복 역시 시온에서 오는 ‘구원자’에 의해 이루어질 것을 말한다. 여러 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여기서 말하는 구원자가 그리스도를 일컫는 것이라면,117) 그것은 결국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해서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이루어질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유대인들은 예수의 재림이 임박해서 민족적으로 회개할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당신의 신실하심과 은혜로우심을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온 이스라엘’(pa`" jIsrah;l)이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로우심이 궁극적으로 승리하고 보존될 것이다.118)
제6장 로마서의 배경과 목적 30
결국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완성은 필연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119) 그가 로마서에서 거듭 유대인에게 주어진 복음의 우선권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울은 이 놀라운 사실을 바라보고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라고 경탄하고 있다. 이처럼 바울의 복음, 곧 그의 이신칭의의 메세지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로움에 근원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궁극적인 회복과 하나됨을 포함하고 있다.
1) 로마서에 관한 중요한 주석들은 다음과 같다: C.K. Barrett, The Epistle to the Romans (BNTC/HNTC; New York: Harper & Row, 1975, 1991); K. Barth, The Epistle to the Romans (New York: Oxford University, 1933); M. Black, Romans (NCB; Grand Rapids: Eerdmans, 1989); F.F. Bruce, 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TNTC; Grand Rapids: Eerdmans, 1963); C.E.B. Cranfield, The Epistle to the Romans (ICC, 2vols.; Edinburgh: Clark, 1975, 1979); C.H. Dodd, The Epistle to the Romans (MNTC; London: Hodder & Stoughton, 1932); J.D.G. Dunn, Romans (WBC 38, 2vols.; Dallas: Word, 1988); J.A. Fitzmyer, Romans (AB 33; New York: Doubleday, 1993); E. Käsemann, An die Römer (HNT 8a; Tübingen: Mohr, 1973)=Commentary on Romans (Grand Rapids: Eerdmans, 1980); O. Kus, Der Römerbrief (3 vols.; Regensburg: Pustet, 1957, 1978); E.J. Leenhardt, The Epistle to the Romans (London: Worls, 1961); H. Lietzmann, An die Römer (HNT 8; Tübingen: Mohr, 1971); O. Michel, Der Brief an die Römer (KEK; Göttingen: Vandenhoeck, 1955, 1978); D.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96); L. Morris, The Epistle to the Romans (Grand Rapids: Eerdmans, 1988); J. Murray, The Epistle to the Romans (NICNT, 2vols.; Grand Rapids: Eerdmans, 1959, 1965); A. Nygren, Commentary on Romans (London: SCM, 1952); W. Sanday and A.C. Headlam, The Epistle to the Romans (ICC; Edinburgh: Clark, 1895, 1902); H. Schlier, Der Römerbrief (HTKNT 6; Freburg: Herder, 1977); W. Schmithals, Der Römerbrief (Gütersloh: Gütersloher, 1988); P. Stuhlmacher, Der Brief an die Römer (NTD 6; Göttingen: Vandenhoeck, 1989)=Paul's Letter to the Romans (Louisville: John Knox, 1994); U. Wilckens, Der Brief an die Römer (EKK 6, 3 vols.; Zürich: Neukirchener, 1978, 1982); T. Zahn, Der Brief des Paulus an die Römer (RNT; Regensburg: Pustet, 1985); J. Ziesler, Paul's Letter to the Romans (London: SCM, 1989); Douglas Moo, Thye Epistle to the Rom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96).
2) 물론 로마서도, 바울의 여러 다른 서신의 경우에서처럼, 바울이 직접 쓰지는 않고, 더디오가 대신 썼다고 볼 수 있다(롬 16:22).
3) C.D. Myers, “Romans,” The Anchor Bible Dictionary 5, ed. D.N. Freedmann (New York: Doubleday, 1992), 817. 보다 자세한 논의는 L. Ann Jervis, The Purpose of Romans: A Comparative Letter Structure Investigation, JSNTS 55 (Sheffield: JSOT Press, 1991); M.A. Seifrid, Justification By Faith: The Origin and Developmenmt of a Central Pauline Theme (Leiden: E.J. Brill, 1992)를 참조하라.
4) C.E.B. Cranfield, 문전섭, 이영재 역, [로마서 1] (서울: 로고스, 1994), 81-96을 보라.
5) 바울 당대 스페인은 이미 로마 제국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으며, 문명 세계의 끝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스페인 선교 계획을 갖고 있는 사실로부터 그가 사도행전 1:8에 나타나 있는 주님의 분부대로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웅대한 선교적 비젼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김세윤, “사도 바울의 큰 비젼,” [예수와 바울] (서울: 참말사, 1993), 387-398을 보라.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2년 동안 그곳에서 복음을 전파했다는 기록만 남기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후 스페인 선교를 했는지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그러나 바울 사후 약 30년 뒤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지는 1 Clement 5:7에 바울이 스페인에 갔다는 언급이 있는 것을 보아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후 2년 뒤에 그가 잠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 무렵 스페인에 다녀온 것으로 보인다. Cf. H.W. Tajra, The Martyrdom of St. Paul. Historical and Judical Context. Traditions and Legends (Tübingen: Mohr, 1994), 199-200.
6) Myers, ABD 5, 817; G. Bornkamm, “The Letter to the Romans as Paul's Last Will and Testament,” in Romans Debate, Revised and Expended Edition, 16; J. A. Fitzmyer, Romans; AB 33 (New York: Doubleday, 1993), 85-8. F.F. Bruce, Paul: Apostle of the Heart Set Free (Grand Rapids: Eerdmans, 1977), 475에서 AD 57년을 가장 타당성 있는 연대로 본다. 역시 D.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 (Grand Rapids: Eerdmans, 1996), 2. 바울의 연대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Rainer Riesner, Paul's Early Period. Chronology, Mission Strategy,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7), 3-32을 보라. 바울이 로마서를 고린도에서 썼다면, 당시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배편으로 약 7-8일 정도 걸렸다고 볼 때, 로마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훨씬 이전에 로마 교회에 전달되었을 것이다.
7) G. Bornkamm, “The Letter to the Romans as Paul's Last Will and Testament,” The Romans Debate, ed. K.P. Donfried (Minneapolis: Augsburg, 1977), 17-31. 물론 이 말이, H. Hübner, Law in Paul's Thouht (Edinburgh: T. & T. Clark, 1984) 등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율법을 포함하여 바울의 복음 이해가 선교 초기의 미성숙한 상태에서 점차적으로 성숙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바울이 그의 제1차 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그의 신학이 이미 성숙되어 있었다고 본다. 이것은 로마서가 바울 서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소위 ‘정경 중의 정경’(Canon in Canon)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8) G. Klein, “Paul's Purpose in Writing the Epistle to the Romans,” in The Romans Debate: Revised and Expanded Edition, ed. Donfried (Peabody: Hendrickson, 1991), 29-43.
9) Luther, “Preface to the Epistle to the Romans” (1522).
10) Melanchton on Christian Doctrine, trans. & ed. C.L. Manschreck (New York: Oxford, 1965), xIviii.
11) A. Nygren, Commentary on Romans (Philadelphia: Muhlenberg, 1949), 4-9.
12) L. Ann Jervis, The Purpose of Romans: A Comparative Letter Structure Investigation, JSNTS 55 (Sheffield: JSOT Press, 1991), 16-68; Karl P. Donfried, ed. The Romans Debate. Revised and Expended Edition (Peabody: Hendrickson, 1991), lxix-lxx; Douglas J.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 (Grand Rapids: Eerdmans, 1996), 1.
13) 김세윤,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 [예수와 바울] (서울: 참말사, 1993): 399-412; A.J.M. Wedderburn, “Purpose and Occasion of Romans Again,” in The Romans Debate (1991), 195-202; P. Rampe, “The Roman Christians of Romans 16,” in The Romans Debate (1991), 216-30를 보라.
14) C.H. Dodd, 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London: Hodder & Stoughton, 1932), xxv.
15) T.W. Manson, “To the Romans-and Others,” The Roman Debate, ed. K.P. Donfield (Minneapolis: Augsburg, 1977), 1-15. Manson은 로마서가 단순히 로마에 있는 교인들만을 위해 쓰여진 편지로 보지 않는다. 그는 1-15장은 로마 교인들을 위해 쓰여졌고, 16장에 덧붙여져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내졌다고 본다. 그러나 로마서 16장을 로마서 전체와 분리시킬 필요는 없다. 로마서 16장에 언급된 사람들이 바울이 자신을 로마 교회에 소개하고 그들의 협조를 얻는 데 있어서 매우 필요한 사람들임을 고려할 때, 16장은 처음부터 로마서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Moo도 그의 최근 로마서 주석에서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는 오늘날 헬라어 본문과 번역본에 제시되어 있는 것처럼 16장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16) Nygren, Commentary on Romans, 4-9.
17) Bornkamm, “The Letter to the Romans as Paul's Last Will and Testament,” 17-31.
18) Jervell, “The Letter to Jerusalem,” The Romans Debate, 61-74.
19) C.E.B. Cranfield, The Epistle to the Romans (2 vols.; Edinburgh: T. & T. Clark, 1975, 1979) [국제 비평주석 로마서 1], 72-73.
20) Drane, “Why Did Paul Write Romans?” Pauline Studies: Essays Presented to F.F. Bruce on his 70th Birthday, ed. D.A. Hagner and M.J. Harris (Exeter: Paternoster, 1980), 208-27.
21) Jervis, The Purpose of Romans, 158-164.
22) Donfried, “False Presuppositions in the Study of Romans,” The Romans Debate, 120-148.
23) Minear, The Obedience of Faith (London: SCM, 1971), 8-17.
24) Beker, “Paul's Theology: Consistent or Inconsistent?” NTS 34 (1988) 364-377.
25) Wiles, Paul's Intercessory Pray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3), 74-76.
26) Roetzel, The Letters of Paul: Conversations in Context (Atlanta: John Knox, 1975), 59.
27) Martin, Reconciliation: A Study of Paul's Theology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1981), 127-28.
28) Ziesler, Paul's Letter to the Romans (London: SCM, 1989), 15f.
29) 우리는 바울이 한번도 방문하지도 않은 로마 교회의 상황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알게 되었는가 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16장에 소개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감안하여 볼 때, 바울은 브리스길라 가족을 위시한 여러 사람들을 통해 로마 교회에 대한 자세한 소식을 듣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문제에 관한 보다 더 자세한 논의는 K.P. Donfried, ed., The Roman Debate; Jervis, The Purpose of Romans, 11-85; Myers, “Romans”, ABD 5, 819-820을 보라.
30) H.J. Leon, Jews of Ancient Rome, 25ff; F.F. Bruce, “Christianity Under Claudius,” BJRL 44 (1961/62) 309-326; Paul Apostle of the Free Spirit, 379ff; J.W. Drane, “Why Did Paul Write Romans?” Pauline Studies, ed. D.A. Hagner and M.J. Harris (Exeter: Paternoster, 1980), 216-217.
31)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를 쓸 무렵 로마에 있는 시민들 사이에 이미 주전 1세기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반 유대교 운동이 상당히 확산되어 있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로마 시민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던 이와 같은 반 유대교 운동이 로마 교회의 이방인 신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우리는 배제할 수 없다. 이 문제에 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Wolfgang Wiefel, “The Jewish Community in Ancient Rome and the Origins of Roman Christianity,” in The Romans Debate, 85-101; Hans Conzelmann, Gentiles, Jews, Christians. Polemics and Apologetics in the Greco-Roman Era (Minneapolis: Fortress, 1992), 45-134을 보라.
32) 우리는 사도행전이나 고린도전후서 등 그 어떤 바울의 서신에서도 바울이 로마에서 온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바울이 이들을 만나기 전에 이미 이들은 로마 교회의 신자였다고 볼 수 있다. F.F. Bruce, “The Romans Debate-Continued,” in The Romans Debate, 179.
33) W. Wiefel, “The Jewish Community in Ancient Rome and the Origin of Roman Christianity,” The Romans Debate, 100-119. 로마 가톨릭 교회는 로마 교회를 베드로가 설립했다고 보고, 그를 제1대 교황으로 삼고 있으나, 이것은 역사적 근거가 희박한 잘못된 주장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무렵 베드로가 로마 교회에 있었다면 그가 이 사실을 자신의 편지 가운데 언급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우리가 로마 교회의 기원에 관해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바울 당대 로마에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있었고, 이들이 종종 예살렘을 방문했다고 볼 때, 오순절 성령강림 기간 동안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로마 출신의 순례자들이(행 2:10-11) 로마에 돌아가서 회당 중심의 로마 교회를 설립했을 가능성이 크다.
34) James D.G. Dunn, Romans 1-8 (WBC 38A; Dallas: Word Books, 1988), liii.
35) Cf. Douglas Moo, Romans 1-8 (Chicago: Moody Press, 1991), 10f.; Crafton, “Rhetoric and the Purpose of Romans,” 323-324.
36) Myers, “Romans,” ABD 5, 820f.; Bruce, “The Romans Debate-Continued,” 180.
37) A.J.M. Wedderburn, The Reasons for Romans (Minneapolis: Fortress, 1991), 50ff.
38) 로마서 14장에 있는 ‘약한 자’와 ‘강한 자’가 누구를 지칭하느냐에 관해 적지 않은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필자는 약한 자는 유대인 신자들을, 강한 자는 이방인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Mark D. Nanos, “Who were the ‘Weak' and the ‘Strong' in Rome?” in The Mystery of Romans (Minneapolis: Fortress, 1996), 85-165.
39) J. Marcus, “The Circumcision and the Uncircumcision in Rome,” NTS 35 (1989) 67-81; R.J. Karris, “Romans 14:1-15:13 and the Occasion of Romans,” The Romans Debate, 75-99; Jeffrey A. Crafton, “Rhetoric and the Purpose of Romans,” NovT 32 (1990), 321-322.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그 자신이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던 로마 교회의 상황에 대하여 어떻게 자세히 알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바울의 3차례에 걸친 선교 여행을 통해 적지 않은 로마 신자들을 만났거나, 아니면 자신이 설립한 교회 교인들 가운데서 로마로 이주했거나 여행을 한 교인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가정도 이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K.H. Rengstorf, “Paulus und die älteste römische Christenheit,” SE 2, ed. F.L. Cross (Berlin: Akademie, 1964), 447-64을 보라.
40) 예를 들어, Sanders, Paul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66: “The single most important theme of Romans is equality of Jew and Gentile” (“로마서의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주제는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과의 동등성 문제이다.”) 우리는, 비록 로마서가 주로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과의 관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로마 교회가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주장에는 동의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 로마서의 독자들을 이들만으로 한정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불신 이방인들과 일반 유대인들도 염두에 두고 썼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1) Crafton, “Rhetoric and the Purpose of Romans,” 326.
42) Robert Jewett, “Romans as an Ambasssadorial Letter,” Interpretation 36 (1982), 5-20.
43) W.P. Bowers, “Jewish Communities in Spain in the Time of Paul the Apostle,” JTS 26 (1975), 395-402.
44) Mikhail Rostovtzeff, Social and Economic History of the Roman Empire, 2nd ed. rev. by P.M. Fraser, 198ff; Crafton, “Rhetoric and the Purpose of Romans,” 326-327.
45) 바울이 다른 사람을 통해 부조 헌금을 예루살렘에 보내고, 자신은 직접 로마나 스페인으로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20:3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 방문이 그 자신에게 대단히 위험스러운 것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그 여행을 감행한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방문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자세한 문제는 Ben F. Meyer, The Early Christians: Their World Mission and Self-Discovery (Wilmington: Michael Glazier, 1986), 183f; David J. Bosch, Transforming Mission. Paradigm Shifts in Theology of Mission (New York: Orbis Books, 1996), 145-147; 김판임, “바울의 자비량 선교와 모금 운동에 나타난 경제 윤리,” 「신약성서의 경제 윤리」, [신약논단] 제4권, 신약학회편집 (서울: 한말사, 1998), 253-261을 보라.
46) Jacob Jervell, “The Letter to Jerusalem,” The Romans Debate, 61-74; Keith F. Nickle, The Collection: A Study in Paul's Strategy (Naperville: Alec R. Allenson, 1966), 100-43.
47) 이 점과 관련해, J. Jervell, “The Letter to Jerusalem,” in The Romans Debate, 53-64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로마서의 실제적인 수신자로 간주하고 있다. 바울의 로마서 저술 문제와 관련하여 이밖에 다른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G. Klein, “Paul's Purpose in Writing the Epistle to the Romans,” in The Romans Debate, 29-43은 바울이 로마서를 쓴 주요 목적은 로마에 있는 교회의 사도적 기반을 세우려는 데 있었다고 보고 있다. Klein에 따르면, 로마에 있는 신자들은 교회 구성에 필수적인 사도적 기반이 결여되어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기독교 교회에 근간이 되는 핵심적인 복음 진리를 제시함으로써 로마 교회의 사도적 기반을 확고히 하려고 했다. Klein은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바울이 로마에 있는 신자들을 가르켜 ‘교회’로 부르고 있지 않은 점을 예로 든다. 그러나 빌립보서, 골로세서, 에베소서에도 ‘교회’라는 호칭이 생략되어 있는 것을 볼 때, Klein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더구나 사도적 기반이 없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약하다.
48) A.J.M. Wedderburn, The Reasons for Romans (Edinburgh: T & T Clark, 1991); M.A. Seifrid, Justification By Faith: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a Central Pauline Theme (Leiden: E.J. Brill, 1992), 185; Crafton, “Rhetoric and the Purpose of Romans,” 327-328; 김세윤,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 409-410.
49) 물론 우리가 “복음=이신칭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은 이신칭의보다 큰 개념이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이신칭의와 분리시킬 수는 없다. 이신칭의가 곧 복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복음은 곧 이신칭의라고 말할 수 있다.
50) Stuhlmacher, “The Theme of Romans,” ABR 36 (1988) 33-44: M.A. Seirfrid, Justification by Faith: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a Central Pauline Theme, NovTS 68 (Leiden: Brill, 1992).
51) Cf. H. Ridderbos, Paul: An Outline of His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75), 159-181; Sanders, Paul, 68.
52) 바울이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부르는 데에는(역시 고전 1:18, 24),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인격과 사역을 그 내용으로 삼는 복음으로부터(롬 1:2-4,9), 그의 성령을 통해, 창조적인 구원의 역사를 일으켜 간다는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이 복음(예수 그리스도)의 들음에서 출발하며 (롬 10:17), 성령은 이 복음을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에(고전 2:5; 고후 4:4-6,13; 살전 1:5),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사실상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따라서 나중에 보다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과 믿음, 믿음과 성령의 역사는, 마치 그리스도와 성령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로마서의 주제 구절에서 드러나는 복음(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불가분리의 관계는 로마서의 구조적 전개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즉 바울은 1:16-17의 주제를 3-4장에서는 율법의 행위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의 반위관계를 통해서, 그리고 5-8장에서는 율법의 사역 (육)과 성령의 사역과의 반위관계를 통해서 해명하고 있다. Cf. Cranfield, The Epistle to the Romans 2 (Edinburgh: T. & T. Clark, 1985), 841; E. Schweizer, “pneuma,” TDNT VI, 425-426.
53) 많은 학자들이 로마서 1:16-17을 로마서의 주제 구절로 보는 데는 동의하지만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내용 중 어떤 것을 로마서의 주제 사상으로 보느냐에 관해서는 의견이 서로 다르다. John Murray, C.K. Barrett, E. Käsemann, C.E.B. Cranfield, D. Moo 등은 ‘하나님의 의’를 중심 사상으로 보려고 하지만, N.A. Dahl, T. Hoppe 등은 ‘구원’을, 그리고 E.P. Sanders, W. Schmithals 등은 16절 하반절에 있는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그 다음에 헬라인에게로”라는 구절에 근거해 ‘이방인들의 하나님의 백성에로의 가입’과 ‘이스라엘의 계속성’을 중심 사상으로 보려고 한다.
54) Moo, Romans 1-8, 27-28; Charles D. Myers, “Chiastic Inversion in the Argument of Romans 3-8,” NovT 35 (1993), 30-47; J.C. Beker, “The Faithfulness of God and the Priority of Israel in Paul's Letter to the Romans,” HTR 79 (1986), 10-16.
55) Wrede, Paul (London: Philip Green, 1907), 122-37; Schweitzer,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London: A & C Black, 1931), 205-26; K. Stendahl, Paul Among Jews and Gentiles, 130-132.
56)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Philadelphia: Fortress, 1977), 434-42. 보다 자세한 논의는 최갑종, “바울 신학의 접근 방법론과 중심 문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류호준 편집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7), 370-388을 보라.
57) Seifrid, Justification By Faith, 255-270.
58) P. Stuhlmacher, “The Theme of Romans,” in The Romans Debate, 337: “바울에 따르면, 이신칭의의 복음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을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메시지가 아니다. 오히려 이 복음은 ‘믿는 모든 자들에게’ 종말론적인 구원을 가져다 주는 유일한 구원 계시다. 실로 로마서 1:16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의 복음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제시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의 백성들에게 메시야를 통한 구원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이 복음은 ‘또한 헬라인들(이방인들)에게’ 제시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이방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그 구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전망에서 볼 때, 오직 하나의 구원의 길과, 오직 하나의 복음만이 있을 뿐이다. 이 하나의 복음의 핵심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다.”
59) Machen, The Origin of Paul's Religion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21).
60) Machen, op. cit., 278f.
61) 김세윤, [바울 복음의 기원] (서울: 엠마오, 1994), 444-475.
62) Cf. T.L. Donaldson, “Israelite, Convert, Apostle to the Gentiles: The Origin of Paul's Gentile Mission,” in The Road from Damascus. The Impact of Paul's Conversion on His Life, Thought, and Ministry, ed. Richard N. Longenecker (Grand Rapids: Eerdmans, 1997), 62-84.
63) C.K. Barrett, “Paul and the Introspective Conscience,” in The Bible, the Reformation and the Church. Essays in Honor of James Atkinson, ed. by W.P. Stephens, JSNTS 105 (Sheffield: JSOT Press, 1995), 48: “No more for Paul than for Luther was justification an instrument for validating the line of missionary work that he had adopted. No that it was unrelated to the mission to the Gentiles. The doctrine and the mission ran side by side, each supporting and each deepening the other.”; Seifrid, Justification by Faith, 210: “It is clear that when Paul introduces his theological arguments with this theme in Romans, it is not because he is polemically engaged with adversaries. Rather, it is because he regarded a forensic justification by faith as integral to his Gospel.”
64) Marty L. Reid, “Rhetorical Analysis of Romans 1:1-5:21) with attention given to the Rhetorical Function of 5:1-21,” Perspectives in Religious Studies 19/3 (1992), 265; A.T. Lincoln, “From Wrath to Justification: Tradition, Gospel and Audience in the Theology of Romans 1:18-4:25,” in SBL 1993 Seminar Papers, 194-226.
65) Cf. C.K. Barrett, “I am not ashamed of the Gospel,” in Foi et salut selon S. Paul, AnBib 42 (Rome: Pontical Institute, 1970), 19-41; D. Moo, Romans, 65.
66) W. Schmithals, Der Römerbrief als historisches Problem, StNT 9 (Gütersloh: Gerd Mohr, 1975), 91-93.
67) K. Grayston, “‘Not ashamed of the Gospel,’ Romans 1,16a and the Structure of the Epistle,” SE 1, Part 1 (1964), 569-73.
68) O. Michel, Der Brief an die Römer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78), 86; C.K. Barrett, A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 (New York: Harper & Row, 1957), 27; P. Stuhlmacher, “The Theme of Romans,” ABR 36 (1988), 34.
69) Dahl (Studies, 82), Hoppe (Die Idee der Heilsgeschichte, 26-27) 등은 1:16-17의 중심 사상은 ‘구원’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구원은 이 구절의 핵심적인 단어인 복음의 결과이다.
70) 바울은 분사 구절 ‘믿는 자’(tw'/ pisteuvonti)의 목적어를 생략하고 있지만, 구문상으로 볼 때 분사절의 목적어는 ‘복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Seifrid, Justification by Faith, 212; Moo, Romans, 67.
71) Moo, Romans, 68f.
72) 우리는 여기서 복음,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7-18에서 ‘복음’, 곧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 다음, 1:23-24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2:1-5에서는 이 복음을 성령과 능력과 병행시킨다. 따라서 바울은 복음과 그리스도와 성령을 서로 분리시키지 않는다.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73) P.J. Gräbe, “Dunami" (in the Sense of Power) as a Pneumatological Concept in the Main Pauline Lettyers,” Biblische Zeitschrift 36/2 (1992), 226-235.
74)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우월성도, 유대인들에 대한 이방인 신자들의 우월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75) Stuhlmacher, “The Theme of Romans,” 36: “From Paul's perspective, therefore, there is only one way of salvation and only one single Gospel.”
76) Moo, Romans 1-8, 63-64.
77) Cranfield, Romans 1, 90.
78) H. Ridderbos, Paul, 47; A. Oepke, TDNT III, 583; Cranfield, Romans 1, 89.
79) ‘하나님의 의’에 관한 최근의 논의에 대한 요약을 M.L. Soards, “The Righteousness of God in the Writings of the Apostle Paul,” BTB 15 (1985), 104-109; A.E. McGrath, Iustitia Dei: A History of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2 vol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P.T. O'Brien, “Justification in Paul and Some Crucial Issues of the Last Two Decades,” in Right with God: Justification in the Bible and the World, ed. D.A. Carson (Grand Rapids: Baker, 1992), 70-78에서 찾아볼 수 있다.
80) Cf. N.T. Wright, “On Becoming the Righteousness of God. 2 Corinthians 5:21,” in Pauline Theology 2, ed. by David M. Hay (Minneapolis: Fortress, 1993), 201-202.
81) Cranfield, Romans 1, 91-98.
82) Käsemann, “`The Righteousness of God' in Paul,” in New Testament Questions of Today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9), 168-182; Romans, 23-30.
83) Douglas A. Campbell, “Romans 1:17-A Crux Interpretum for The PISTIS CRISTOU Debate,” JBL 113/2 (1994), 265-285에서 로마서 1:17에 나오는 “믿음으로부터”(ejk pistew")라는 말을 그리스도의 신실성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력하게 옹호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1:16에서 믿음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인간의 책임적인 응답의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84) Moo, Romans, 74f.
85) P. Stuhlmacher, “The Theme of Romans,” 338: “아담의 범죄로 인해 아담과 이브가 낙원으로부터 추방된 이후, 유대인이든, 이방이든,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무죄한 창조 때에 주어진 그 원래의 영광과 의를 상실했다(롬 3:23). 이제 그 어떤 죄인도 그 자신의 힘으로나, 혹은 모세 율법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낙원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하나님만이 영생에 필요한 의를, 그가 예수의 속죄적 죽음의 희생을 근거해 마련하신 의를 통해 주실 수 있다. 하나님은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죄인들을 위한 속죄의 길을 마련하셨기 때문에, 이 속죄의 결과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믿는 모든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의의 양식인 선물로 주실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믿는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이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 3:25 이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아들의 희생을 통해 나타내신 의의 결과요 열매다. 하나님 자신은 의로우시고, 또한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자를 의롭게 하신다(롬 3:26)”.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의’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칭의 사건의 양면을 드러낸다. 즉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그 자신의 은혜로우신 행위이며, 동시에 죄인에게 주어지는 의의 양식으로 표현되는 신적 행위의 종국적인 결과이다.”
86) Douglas A. Campbell, “Romans 1:17-A Crux Interpretum for The PISTIS CRISTOU Debate,” JBL 113/2 (1994), 272.
87)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G. Klein, “Righteousness in the NT,” IDBSupp., 750-752; M.T. Brauch, “God's Righteousness in recent German Discussion,” in E.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7), 523-43; J.A.T. Ziesler, The Meaning of Righteousness in Paul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2), 217-30을 보라.
88) J.D.G. Dunn, Romans 1-8, 41.
89) Stuhlmacher, “The Theme of Romans,” 440.
90) Cf. P. Stuhlmacher, “The Theme of Romans,” 341: “the righteousness of God is the entire redemptive activity of God in Christ from creation to redemption.”
91) Cranfield, Romans 1, 101-102.
92)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에도 베드로와 요한을 위시한 사도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포기하지 않고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다고 볼 수는 있지만,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주 기능인 성전 제사에 참여했다고 볼 수는 없다.
93) G. Theissen, Sociology of Early Palestinian Christianity (Philadelphia: Fortress, 1978).
94) J.D.G. Dunn, “The Incident of Antioch,” Jesus, Paul and the Law (Louisville: Westminster, 1990), 129-182; P.J. Tomson, Paul and the Jewish Law (Minneapolis: Fortress, 1990), 55-90.
95) 최갑종, “바울과 율법,” [바울 연구 1]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2,1993), 55-75; 홍인규, The Law in Galatians, JSNTS 81 (Sheffield: JSOT Press, 1993), 122-188; E.P. Sanders, Judaism. Practice & Belief 63BCE-66CE (London: SCM, 1992), 190-240.
96) 최갑종, [바울연구 2], 39-43.
97) 최갑종,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안디옥 교회,” [바울 연구 1], 29-54; 이한수, “바울의 회심과 이방인 선교,” [바울 신학 연구]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3), 9-40.
98) Gab Jong Choi, “Living by the Spirit: A Study of the Role of the Spirit in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Ph.D. diss., The University of Denver & the Iliff School of Theology, 1998, 65-105.
99) M.A. Seifrid, Justification By Faith,. 187-210; Sanders, Paul, 65-66.
100) The Romans Debate (1991)에 수록되어 있는 다음의 논문을 보라: W. Wuellner, “Paul's Rhetoric of Argumentation in Romans” (128-146); R. Jewett, “Following the Argument of Romans” (265-277); D.E. Aune, “Romans as A Logos Protreptikos” (278-296).
101) David E. Aune, “Romans as a Logos Protrepitikos,” in The Romans Debate, 289: “Romans is the most distinctive of the letters of paul. It is the only genuine letter of Paul addressed to Christian groups(i.e., several house-churches) in an urban area which he himself had neither visited nor founded.”
102) Moo, Romans, 14.
103) S.K. Stowers, The Diatribe and Paul's Letter to the Romans, SBLDS 57 (Chico: Scholars Press, 1981)는 Diatribe의 주된 기능은 논쟁적이라기보다 교훈과 명료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104) Jewett, “Following the Argument of Romans,” in The Romans Debate, 265-277.
105) Jewett는 15-16장을 로마서의 절정(climax, or high point)으로 보고 있다.
106) Boers, “A Macro-Structure for Romans,” in The Justification of the Gentiles. Paul's Letters to the Galatians (Peabody: Henfrickson, 1994), 77-142.
107) 그밖에 로마서의 구조 분석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Neil Elliott, The Rhetoric of Romans. Argumentative Constraint and Strategy and Paul's Dialogue with Judaism, JSNTS 45 (Sheffield: JSOT Press, 1990)을 보라.
108) P. Stuhlmacher, “The Theme of Romans,” 333-345.
109) Gager, The Origins of Anti-Semitism (New York: Oxford Press, 1983); Rethinking Paul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Gaston, Paul and Torah; Mussner, Tractate on the Jew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4); Stendahl, Paul Among the Jews and Gentile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6); van Buren, A Theology of the Jewish-Christian Reality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8).
110) Boers, The Justification of the Gentiles, 137-139.
111) D.J. Harrington, “Paul and Judaism,” BR April (1993), 52.
112) Cf. Sanders, Paul, the Law, and the Jewish People, 172: “The crucial point is that Paul applied the entrance requirement ‘faith in Jesus Christ’ to Jews as well as to Gentiles.”
113) Cf. D.A. Hagner, “Paul and Judaism,” BBR 3 (1993), 123: “Paul, in my opinion, knows of no salvation not even for Israel-apart from the cross of Jesus.”
114) Beker, “The Faithfulness of God and the Priority of Israel in Paul's Letter to the Romans,” HTR 79 (1986), 10-16.
115) 이 점은 Bruce Chilton and Jacob Neusner, “Theory of the Social Entity. Who and What is ‘Israel' in the Judaism of Paul?” in Judaism in the New Testament, 62-72에 잘 지적되고 있다.
116) Beker, “Faithfulness of God,” 14: “If it could be argued that God has rejected the peple of the election, Israel, and that therefore God's promises to Israel have become null and void, how are the Gentiles to trust the confirmation of these to them through God's righteousness in Christ? Could it not be said in that case that there is arbitrariness on God's part (Rom 9:14) and that God is not to be rrusted-even the God who justifies us in Christ? In other words, the gospel cannot have any authentic validaity or legitimation apart from the people of Israel because the theological issue of God's faithfulness (Rom 3:3) and righteousness determines the truth of the gospel.”
117) Sanders, Paul, the Law and the Jewish People, 194.
118) 어떤 학자들은(Wright, Climax, 259-51; M. Getty, “Paul and the Salavation of Israel,” CBQ 50, 456-69)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온 이스라엘’을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를 가르킨다고 보고 있으며, 또 어떤 학자들은(J. Lambrecht, “Israel's Future according to Romans 9-11. An Exegetical and Hermeneutical Approach,” in Pauline Studies, 46-54) 유대인 신자들의 남은 무리들로 본다. 그러나 대다수의 학자들은(Dunn, Romans, 681; Sanders, Paul, the Law, 196; Nanos, The Mystery of Romans, 256-257) 마지막 때에 민족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119) Mark D. Nanos, “Paul's Two-step pattern and the Restoration of all Israel,” in The Mystery of Romans. The Jewish Context of Paul's Letter (Minneapolis: Fortress, 1996), 239-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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