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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하나되게 하는 길(2장 1절~4절)

by 【고동엽】 2023.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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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게 하는 길(2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립보교회는 사도행전 1611절 이하에 나타난 대로 바울이 세운 교회입니다. 그가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 들어갔는데 안식일에 예배할 회당이 없어 조용한 강가로 나가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유대의 풍습에 따라 사는 유대인들이 강가에 나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자주(紫紬) 장사하는 루디아를 만나 전도하게 되고, 루디아가 마음 문을 열어 예수님을 영접하고 또 자기 집을 열어 예배 처소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생활이 넉넉했던 루디아의 집이 선교 본부가 되고 빌립보교회가 출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빌립보교회는 한마디로 말하면 여성 주도적인 교회입니다.

루디아라는 한 여성으로 시작된 교회인 만큼 아마도 여자가 전체를 지배했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옥에 갇혔다 하면 다른 교회에서는 '또 갇혔나 보다' 생각하고 기도만 했지만 빌립보교회는 여성적인 교회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소문을 듣자 '얼마나 춥고 배고플까, 얼마나 불편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위문금을 모읍니다. 그것을 저희 목사에게 주어 한 겨우내 바울을 잘 돌보아 달라고 로마로 보냅니다. 이렇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여성적인 빌립보교회의 장점입니다. 그런가 하면 단점도 있습니다. 이것은 여성들의 결정적 약점, 바로 질투입니다. 사랑과 질투는 종이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빌립보교회 안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인 사이에 알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사를 경쟁적으로 하고 질투하고 시샘하다 보니 그만 교회가 화목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어야 하겠는데 그렇지 못하니 바울의 마음에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직접 대놓고 '왜 싸웠느냐, 하나되어라'하고 윽박지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은근하게 하나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힘의 역학 관계를 알고 있겠지만 힘은 언제나 직선상에서 작동하는 것이요 하나될 때에 강하게 역사 합니다. 그래서 unity, harmony, cooperation 이 세 가지가 힘의 원리가 됩니다. 힘이 있으려면 먼저 하나되어야 합니다(unity). 그런 다음에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harmony).

하나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지 않습니까? 젊은이와 기성 세대가 다르지 않습니까? 다르지만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cooperation). 이렇게 각자가 가진 특성들이 하나의 뜻을 위하여 서로 협력할 때 힘은 강하게 작용합니다.

이와 반대로 분열이 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협력하지 않는다면 각자가 가진 바 능력도 발휘할 수 없고 개인과 단체의 능력도 다 무효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한 대를 만들기 위해 2만개의 부속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2만 개가 모여서 하나의 자동차가 됩니다. 자동차 한 대가 제대로 되려면 그 부속품 하나 하나가 전부 제구실을 하여야 합니다. 어느 하나라도 말썽을 부리면 안 됩니다. 언젠가 제 차가 길에서 갑자기 서 버렸습니다. 아무리 해도 힘이 나지 않아 열어 보았더니 포인트 옆의 나사 하나가 풀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한 바퀴 돌려주니까 차가 다시 앞으로 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나사 하나만 풀려도 차 전체가 힘을 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타이어는 타이어대로, 핸들은 핸들대로, 머플러는 머플러대로 중요합니다. 어느 것 하나도 빼 놓고 달릴 수 없습니다. 2만 개의 부속이 똑같이 협력을 해야 조화를 이루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본래가 하나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입니다. 누구나 10개월만에 나오고, 그 나올 때의 모습이 똑같습니다.

세상 떠날 때에도 같습니다. 죽은 후 들어가는 관의 크기나 값에 차이가있을지는 모르나 죽은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결국 시작도 하나요, 끝도하나입니다. 겉으로 볼 때에는 다른 것 같아도 속에 들어가 보면 행복도똑같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작은 것 하나를 놓고 부부가 서로 나누어 먹을 때 더 맛이 있습니다.

깊은 면에서 볼 때 행복의 질량은 똑같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서로 하나됨을 인정해야 합니다. 같다고 인정할 때에라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됨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마디로 이것은 죄와 불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되지 못한 원인이중요합니다. 하나되자는 것, 그것만 가지고 하나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 하나됩시다, 우리 절대 헤어지지 맙시다 -- 이런 소리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됩시다 할 때 생각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대부(代父)라는 영화를 보면 깡패 두목들이 모여 하나되기 위한 예식을 치릅니다. 이것은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가 두 손을 성경책 위에 얹고 하나되기로 서약하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깡패 두목들이 즉석에서 손가락을 툭툭 잘라 그 피를 컵 하나에 모아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서 돌아가면서 한 모금씩 마십니다. 하나되는 예식 치고 이만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서로의 피를 마셨으니 우리는 이제 피로 맺어진 몸이다, 앞으로 우리끼리는 절대 싸우지 말고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합니다. 그러나 웬걸, 며칠 후 시시한 일로 싸워서 다 죽이고 두 사람만 남게 됩니다. 결국 하나된다는 것은 의로울 때에만 가능하고 선한 일 할 때에만 되어지는 것이지 악한방법, 악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이 영화는 말해줍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절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는데 이런 마음과 사랑과 뜻의 내적 일치가 필요한 것입니다. 형식적인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같은 침상에 누워서 다른 꿈꾸는 거야 어찌 막을 수 있습니까? 딴 남자 꿈꾸고 딴 여자 꿈꾸는 것을 무엇으로 막겠습니까? 같은 지붕 아내 산다고 해서 하나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나가 되는 것입니까? 먼저 하나되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야 하나되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네 가지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기 자랑 때문에 하나되지 못합니다. 자기 자랑은 곧 불신앙이요, 불신앙은 교만으로 통합니다. 교만한 때는 바로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순간입니다. 교만이 있으면 마음속으로부터 분열이 생깁니다. 그래서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역사를 보면 인간이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4)"고 단결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어가 혼잡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랑이 있는 곳에는 분열이 생깁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귈 때에도 자꾸 자기만 잘났다고 이야기하는 사람한테는 왠지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오직 겸손만이 하나되는 비결입니다.

둘째, 자기 우월감 때문에 하나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특권 의식이요 쉬운 말로 자기가 잘났다는 생각입니다. 혹시 아이들이 밖에서 놀다가 싸우고 울며 들어올 때 그 어머니가 너나 그 아이나 똑같이 잘못했다고 해야지 '너는 그 아이보다 낫다, 너는 남과 다르다'고 가르치면 교육적으로 크게 문제됩니다. 자녀를 대할 때나 나를 대할 때나 항상 남과 똑같다는 생각이 바로 민주화의 기본이 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장로, 권사, 집사가 무슨 특권층인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 교인이 "목사님, 제가 그 교회에서 집사까지는 땄어요"하고 당연하게 말합니다. 집사가 무슨 계급인 줄 알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아마 조금 있다가 그 분은 권사를 '따야겠다'고 생각하겠지요.

저는 교회 건축을 할 때 '장로는 건축 헌금을 많이 해라, 집사는 그 다음으로 많이 해라, 평신도는 안해도 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장로라고 특별히 더할 것도 없고 집사여서 더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평신도는 자기가 이 교회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헌금의 책임을 다해야 할 줄 압니다. 이 직분 때문에 헌금을 더한다는 것이 벌써 잘못된 생각입니다. 교회에는 특별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평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마다 내 I.Q.가 더 높다, 내 지식이 더 많다, 내 돈이 더 많다고 자랑들을 늘어놓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소위 귀족을 만듭니다. 사회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양반이 별 것 아니요 부자가 곧 양반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자기 부자 됨을 본질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너와 나는 족보가 다르다고 하기 시작한 것이 소위 양반, 상놈의 구별입니다. 본래 양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양반이 얼마나 됩니까? 돈주고 이럭저럭 산 것입니다. 이것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고정관념화해서 '나는 양반이요, 너는 상놈이다'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또 본문 3절에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다툼은 경쟁심이요, 상대적 평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나와의 절대 평가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내가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절대 평가가 중요한 것이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지 아닌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아무도 사람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좀더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면 우리 주위에 이혼하는 가정도 있고 파괴된 가정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이 집이 어떻고, 저 집이 어떻다고 하지만 참으로 말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그 처지가 되어 보아야 합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이혼했겠습니까? 우리가 남의 문제를 쉽게 평가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바리새교인보다 막달라 마리아가 더 의인이요, 바리새교인보다 세리가 더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런고로 외적으로 나타난 형식적인 의에 대해 자기가 더 낫다든가 자랑을 하든가 하면 안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경쟁심으로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경쟁심을 갖게 되면 자기 상실에 빠집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다 보면 어느새 자기 진실을 잃어버리고 승부욕에 지나치다 보면 자기 과장에 빠지게 됩니다. 한번 거짓말을 시작하면 없고도 있는 척, 모르고도 아는 척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예수 심리학이라는 책을 보면 예수님께는 전혀 승부욕이 없었습니다. 남을 이겨 보겠다던가 남보다 나아지겠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생각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국민학교 때부터 시험점수로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경쟁심을 불러 일으켜서 정서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경쟁으로 뿐만 아니라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허영은 진실을 잃게 하고 자기 존재를 완전히 상실하게 합니다. 남들이 나를 뭐라고 하나, 다른 사람의 평가에 따라 사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남이 나를 잘 대해 주면 기분이 좋고 아니면 기분이 언짢은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3절 후반부에서 사도 바울이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오직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한번 깊이 생각해봅시다. 아이들이 말을 안 들을 때 어머니는 무심코 "용케 네 아버지를 닮았다."합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면 그 아버지는 "너 엄마가 공부를 못했다더니 네가 그렇구나." 합니다. 아이들이 이 말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잘못한 일이 있거나 공부를 못했을 때 부모가 야단을 치면 속으로 '다 유전이에요, 유전.'할 것입니다. 흔히 부부들이 아이들이 잘한 것은 자기를 닮아서 그렇고 못난 것은 상대방 닮아서 그렇다고 하는 못된 말버릇이 있는데 이것은 당장 고쳐야 합니다. 이것은 목회자로서의 명령입니다. 이제부터는 말을 180도로 돌려서 해야 합니다. "아버지 닮아서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구나" "엄마를 닮아서 그렇게 착하구나"라고 얘기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달만 이렇게 말하면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1년만 실천하면 그 집은 천국이 됩니다. 저는 이 원리를 헤어지기로 작정한 부부들에게 권해서 다시 살게 한 적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장로님은 의사로서 한평생을 덕있게 살았습니다. 그 분은 말끝마다 "나는 성질이 못되어서 복 받을 만하지 못한데 이만큼 복을 받고 사는 것은 우리집사람 때문인 것 같아요. 우리집사람 성품이 좋고 덕이 높아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가 봐요" 합니다. 얼마나 값진 이야기입니까? 나는 복받을 만하지 못한데 아내 때문에 내가 복받아 살고, 나는 시원찮은 사람인데 내 남편 때문에 이런 복을 받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한번도 이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면 큰일입니다. 속으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는 말을 해야 합니다. 본인에게,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 때 그 가정에 무슨 싸움이 있겠습니까? 상대방을 치켜세우면서 싸우는 것 보았습니까? 그런 상황에서는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보다 각각 남을 낫게 여길 때에 직장도 가정도 하나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반대로 되어 자기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한은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젊은 세대와 자녀를 대하여 "나는 부족한데 너희들은 참 훌륭하다"고 말하고, 또 자녀들은 "나는 부족한데 부모님은 참 훌륭하다"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만 있다면 둘이 모여도 하나요 열이 모여도 하나요 만 명이 모여도 하나될 수 있습니다.

셋째, 자기 집착 때문에 하나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자기 주관이라는 탈속에 갇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 4절에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 보라'고 말합니다. 자기 일도 물론 성실히 해야겠지만 남의 처지도 좀 생각해 봅시다. 저는 기성 세대와 젊은이들 사이에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을 참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즘 반공 문제를 놓고 젊은이들과 이해가 달라서 기성 세대가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기성 세대는 공산주의를 피부로 경험했기 때문에 이론을 배우지 않아도 그 실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 세대는 경험이 없으니까 이론적인 지식이 필요한데 불행하게도 그 이론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 눈앞에서 공산당에게 총살을 당했습니다. 또 저 자신도 공산당들에게 매를 맞고 감옥에도 가고 광산에도 끌려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죽으나 사나 반공입니다. 이것은 피부로 느낀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 반공 사상을 젊은이들이 자연히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경험한 것이 없는데 알아질 수가 있습니까? 공산주의자들의 말만 들으면 친공(親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우리같이 깨달으려면 625 사변이 한번 더 터져야 한다는 이야기밖에 안 됩니다. 이거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625 때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과 어찌 625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625를 체험하지 못한 세대가 철없는 말을 하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어찌 그들만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갑니다. 대학 입시공부 하는 청소년들,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또 늦게 들어오는 남편도 그렇습니다. 외과 의사인 어느 장로님은 매일 밤 11, 12시가 되어야 집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하루종일 수술하느라고 피를 만지고 나면 집에 들어갈 마음이 없고 들어가서 잘못하면 부부싸움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구를 불러내어 저녁도 함께 먹고 당구나 탁구를 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 늦게 들어갑니다. 그러면 부인은 남편이 매일 밤늦게 들어온다고 불평을 합니다. 여러분, 처지를 바꿔 놓고 보면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가 됩니다. 자기 주관적인 고정 관념에 딱 매여 있는 것을 터널 뷰우(tunnel view)라고 합니다. 굴속에서 보면 바깥 세상으로 통하는 저 쪽 끝에 작은 구멍이 있습니다. 굴속에서 볼 수 있는 하늘이란 바로 그 구멍만큼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이 그렇게 작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자기 아는 것이 전부라고 고집부리는 사람은 하나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이되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과 같아지려고 할 때 하나될 수 있습니다.

넷째, 사도 바울은 하나됨의 비결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하는 말씀으로 표현합니다. 너희들이 다투기 전에 내 처지를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아버지 앞에서 형제 싸움을 못합니다.

옛날 에서도 야곱이 미웠지만 아버지가 살아 계신 동안은 죽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는데 빌립보 교인들이 서로 싸워서야 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사람이 서로 싸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생각하는 사람이 서로 헐뜯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되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기쁨도 크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찌 다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싸울 수 없고 십자가 앞에서 서로 시비할 수 없습니다. 이상 네 가지로 사도 바울은 하나되는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통틀어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돌아갈 때에 비로소 하나됨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되게 하는 길(2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립보교회는 사도행전 1611절 이하에 나타난 대로 바울이 세운 교회입니다. 그가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 들어갔는데 안식일에 예배할 회당이 없어 조용한 강가로 나가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유대의 풍습에 따라 사는 유대인들이 강가에 나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자주(紫紬) 장사하는 루디아를 만나 전도하게 되고, 루디아가 마음 문을 열어 예수님을 영접하고 또 자기 집을 열어 예배 처소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생활이 넉넉했던 루디아의 집이 선교 본부가 되고 빌립보교회가 출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빌립보교회는 한마디로 말하면 여성 주도적인 교회입니다.

루디아라는 한 여성으로 시작된 교회인 만큼 아마도 여자가 전체를 지배했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옥에 갇혔다 하면 다른 교회에서는 '또 갇혔나 보다' 생각하고 기도만 했지만 빌립보교회는 여성적인 교회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소문을 듣자 '얼마나 춥고 배고플까, 얼마나 불편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위문금을 모읍니다. 그것을 저희 목사에게 주어 한 겨우내 바울을 잘 돌보아 달라고 로마로 보냅니다. 이렇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여성적인 빌립보교회의 장점입니다. 그런가 하면 단점도 있습니다. 이것은 여성들의 결정적 약점, 바로 질투입니다. 사랑과 질투는 종이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빌립보교회 안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인 사이에 알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사를 경쟁적으로 하고 질투하고 시샘하다 보니 그만 교회가 화목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어야 하겠는데 그렇지 못하니 바울의 마음에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직접 대놓고 '왜 싸웠느냐, 하나되어라'하고 윽박지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은근하게 하나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힘의 역학 관계를 알고 있겠지만 힘은 언제나 직선상에서 작동하는 것이요 하나될 때에 강하게 역사 합니다. 그래서 unity, harmony, cooperation 이 세 가지가 힘의 원리가 됩니다. 힘이 있으려면 먼저 하나되어야 합니다(unity). 그런 다음에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harmony).

하나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지 않습니까? 젊은이와 기성 세대가 다르지 않습니까? 다르지만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cooperation). 이렇게 각자가 가진 특성들이 하나의 뜻을 위하여 서로 협력할 때 힘은 강하게 작용합니다.

이와 반대로 분열이 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협력하지 않는다면 각자가 가진 바 능력도 발휘할 수 없고 개인과 단체의 능력도 다 무효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한 대를 만들기 위해 2만개의 부속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2만 개가 모여서 하나의 자동차가 됩니다. 자동차 한 대가 제대로 되려면 그 부속품 하나 하나가 전부 제구실을 하여야 합니다. 어느 하나라도 말썽을 부리면 안 됩니다. 언젠가 제 차가 길에서 갑자기 서 버렸습니다. 아무리 해도 힘이 나지 않아 열어 보았더니 포인트 옆의 나사 하나가 풀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한 바퀴 돌려주니까 차가 다시 앞으로 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나사 하나만 풀려도 차 전체가 힘을 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타이어는 타이어대로, 핸들은 핸들대로, 머플러는 머플러대로 중요합니다. 어느 것 하나도 빼 놓고 달릴 수 없습니다. 2만 개의 부속이 똑같이 협력을 해야 조화를 이루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본래가 하나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입니다. 누구나 10개월만에 나오고, 그 나올 때의 모습이 똑같습니다.

세상 떠날 때에도 같습니다. 죽은 후 들어가는 관의 크기나 값에 차이가있을지는 모르나 죽은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결국 시작도 하나요, 끝도하나입니다. 겉으로 볼 때에는 다른 것 같아도 속에 들어가 보면 행복도똑같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작은 것 하나를 놓고 부부가 서로 나누어 먹을 때 더 맛이 있습니다.

깊은 면에서 볼 때 행복의 질량은 똑같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서로 하나됨을 인정해야 합니다. 같다고 인정할 때에라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됨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마디로 이것은 죄와 불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되지 못한 원인이중요합니다. 하나되자는 것, 그것만 가지고 하나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 하나됩시다, 우리 절대 헤어지지 맙시다 -- 이런 소리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됩시다 할 때 생각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대부(代父)라는 영화를 보면 깡패 두목들이 모여 하나되기 위한 예식을 치릅니다. 이것은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가 두 손을 성경책 위에 얹고 하나되기로 서약하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깡패 두목들이 즉석에서 손가락을 툭툭 잘라 그 피를 컵 하나에 모아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서 돌아가면서 한 모금씩 마십니다. 하나되는 예식 치고 이만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서로의 피를 마셨으니 우리는 이제 피로 맺어진 몸이다, 앞으로 우리끼리는 절대 싸우지 말고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합니다. 그러나 웬걸, 며칠 후 시시한 일로 싸워서 다 죽이고 두 사람만 남게 됩니다. 결국 하나된다는 것은 의로울 때에만 가능하고 선한 일 할 때에만 되어지는 것이지 악한방법, 악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이 영화는 말해줍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절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는데 이런 마음과 사랑과 뜻의 내적 일치가 필요한 것입니다. 형식적인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같은 침상에 누워서 다른 꿈꾸는 거야 어찌 막을 수 있습니까? 딴 남자 꿈꾸고 딴 여자 꿈꾸는 것을 무엇으로 막겠습니까? 같은 지붕 아내 산다고 해서 하나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나가 되는 것입니까? 먼저 하나되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야 하나되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네 가지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기 자랑 때문에 하나되지 못합니다. 자기 자랑은 곧 불신앙이요, 불신앙은 교만으로 통합니다. 교만한 때는 바로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순간입니다. 교만이 있으면 마음속으로부터 분열이 생깁니다. 그래서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역사를 보면 인간이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4)"고 단결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어가 혼잡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랑이 있는 곳에는 분열이 생깁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귈 때에도 자꾸 자기만 잘났다고 이야기하는 사람한테는 왠지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오직 겸손만이 하나되는 비결입니다.

둘째, 자기 우월감 때문에 하나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특권 의식이요 쉬운 말로 자기가 잘났다는 생각입니다. 혹시 아이들이 밖에서 놀다가 싸우고 울며 들어올 때 그 어머니가 너나 그 아이나 똑같이 잘못했다고 해야지 '너는 그 아이보다 낫다, 너는 남과 다르다'고 가르치면 교육적으로 크게 문제됩니다. 자녀를 대할 때나 나를 대할 때나 항상 남과 똑같다는 생각이 바로 민주화의 기본이 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장로, 권사, 집사가 무슨 특권층인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 교인이 "목사님, 제가 그 교회에서 집사까지는 땄어요"하고 당연하게 말합니다. 집사가 무슨 계급인 줄 알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아마 조금 있다가 그 분은 권사를 '따야겠다'고 생각하겠지요.

저는 교회 건축을 할 때 '장로는 건축 헌금을 많이 해라, 집사는 그 다음으로 많이 해라, 평신도는 안해도 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장로라고 특별히 더할 것도 없고 집사여서 더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평신도는 자기가 이 교회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헌금의 책임을 다해야 할 줄 압니다. 이 직분 때문에 헌금을 더한다는 것이 벌써 잘못된 생각입니다. 교회에는 특별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평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마다 내 I.Q.가 더 높다, 내 지식이 더 많다, 내 돈이 더 많다고 자랑들을 늘어놓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소위 귀족을 만듭니다. 사회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양반이 별 것 아니요 부자가 곧 양반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자기 부자 됨을 본질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너와 나는 족보가 다르다고 하기 시작한 것이 소위 양반, 상놈의 구별입니다. 본래 양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양반이 얼마나 됩니까? 돈주고 이럭저럭 산 것입니다. 이것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고정관념화해서 '나는 양반이요, 너는 상놈이다'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또 본문 3절에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다툼은 경쟁심이요, 상대적 평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나와의 절대 평가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내가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절대 평가가 중요한 것이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지 아닌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아무도 사람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좀더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면 우리 주위에 이혼하는 가정도 있고 파괴된 가정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이 집이 어떻고, 저 집이 어떻다고 하지만 참으로 말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그 처지가 되어 보아야 합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이혼했겠습니까? 우리가 남의 문제를 쉽게 평가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바리새교인보다 막달라 마리아가 더 의인이요, 바리새교인보다 세리가 더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런고로 외적으로 나타난 형식적인 의에 대해 자기가 더 낫다든가 자랑을 하든가 하면 안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경쟁심으로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경쟁심을 갖게 되면 자기 상실에 빠집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다 보면 어느새 자기 진실을 잃어버리고 승부욕에 지나치다 보면 자기 과장에 빠지게 됩니다. 한번 거짓말을 시작하면 없고도 있는 척, 모르고도 아는 척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예수 심리학이라는 책을 보면 예수님께는 전혀 승부욕이 없었습니다. 남을 이겨 보겠다던가 남보다 나아지겠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생각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국민학교 때부터 시험점수로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경쟁심을 불러 일으켜서 정서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경쟁으로 뿐만 아니라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허영은 진실을 잃게 하고 자기 존재를 완전히 상실하게 합니다. 남들이 나를 뭐라고 하나, 다른 사람의 평가에 따라 사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남이 나를 잘 대해 주면 기분이 좋고 아니면 기분이 언짢은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3절 후반부에서 사도 바울이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오직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한번 깊이 생각해봅시다. 아이들이 말을 안 들을 때 어머니는 무심코 "용케 네 아버지를 닮았다."합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면 그 아버지는 "너 엄마가 공부를 못했다더니 네가 그렇구나." 합니다. 아이들이 이 말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잘못한 일이 있거나 공부를 못했을 때 부모가 야단을 치면 속으로 '다 유전이에요, 유전.'할 것입니다. 흔히 부부들이 아이들이 잘한 것은 자기를 닮아서 그렇고 못난 것은 상대방 닮아서 그렇다고 하는 못된 말버릇이 있는데 이것은 당장 고쳐야 합니다. 이것은 목회자로서의 명령입니다. 이제부터는 말을 180도로 돌려서 해야 합니다. "아버지 닮아서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구나" "엄마를 닮아서 그렇게 착하구나"라고 얘기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달만 이렇게 말하면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1년만 실천하면 그 집은 천국이 됩니다. 저는 이 원리를 헤어지기로 작정한 부부들에게 권해서 다시 살게 한 적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장로님은 의사로서 한평생을 덕있게 살았습니다. 그 분은 말끝마다 "나는 성질이 못되어서 복 받을 만하지 못한데 이만큼 복을 받고 사는 것은 우리집사람 때문인 것 같아요. 우리집사람 성품이 좋고 덕이 높아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가 봐요" 합니다. 얼마나 값진 이야기입니까? 나는 복받을 만하지 못한데 아내 때문에 내가 복받아 살고, 나는 시원찮은 사람인데 내 남편 때문에 이런 복을 받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한번도 이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면 큰일입니다. 속으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는 말을 해야 합니다. 본인에게,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 때 그 가정에 무슨 싸움이 있겠습니까? 상대방을 치켜세우면서 싸우는 것 보았습니까? 그런 상황에서는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보다 각각 남을 낫게 여길 때에 직장도 가정도 하나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반대로 되어 자기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한은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젊은 세대와 자녀를 대하여 "나는 부족한데 너희들은 참 훌륭하다"고 말하고, 또 자녀들은 "나는 부족한데 부모님은 참 훌륭하다"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만 있다면 둘이 모여도 하나요 열이 모여도 하나요 만 명이 모여도 하나될 수 있습니다.

셋째, 자기 집착 때문에 하나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자기 주관이라는 탈속에 갇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 4절에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 보라'고 말합니다. 자기 일도 물론 성실히 해야겠지만 남의 처지도 좀 생각해 봅시다. 저는 기성 세대와 젊은이들 사이에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을 참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즘 반공 문제를 놓고 젊은이들과 이해가 달라서 기성 세대가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기성 세대는 공산주의를 피부로 경험했기 때문에 이론을 배우지 않아도 그 실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 세대는 경험이 없으니까 이론적인 지식이 필요한데 불행하게도 그 이론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 눈앞에서 공산당에게 총살을 당했습니다. 또 저 자신도 공산당들에게 매를 맞고 감옥에도 가고 광산에도 끌려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죽으나 사나 반공입니다. 이것은 피부로 느낀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 반공 사상을 젊은이들이 자연히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경험한 것이 없는데 알아질 수가 있습니까? 공산주의자들의 말만 들으면 친공(親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우리같이 깨달으려면 625 사변이 한번 더 터져야 한다는 이야기밖에 안 됩니다. 이거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625 때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과 어찌 625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625를 체험하지 못한 세대가 철없는 말을 하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어찌 그들만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갑니다. 대학 입시공부 하는 청소년들,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또 늦게 들어오는 남편도 그렇습니다. 외과 의사인 어느 장로님은 매일 밤 11, 12시가 되어야 집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하루종일 수술하느라고 피를 만지고 나면 집에 들어갈 마음이 없고 들어가서 잘못하면 부부싸움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구를 불러내어 저녁도 함께 먹고 당구나 탁구를 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 늦게 들어갑니다. 그러면 부인은 남편이 매일 밤늦게 들어온다고 불평을 합니다. 여러분, 처지를 바꿔 놓고 보면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가 됩니다. 자기 주관적인 고정 관념에 딱 매여 있는 것을 터널 뷰우(tunnel view)라고 합니다. 굴속에서 보면 바깥 세상으로 통하는 저 쪽 끝에 작은 구멍이 있습니다. 굴속에서 볼 수 있는 하늘이란 바로 그 구멍만큼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이 그렇게 작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자기 아는 것이 전부라고 고집부리는 사람은 하나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이되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과 같아지려고 할 때 하나될 수 있습니다.

넷째, 사도 바울은 하나됨의 비결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하는 말씀으로 표현합니다. 너희들이 다투기 전에 내 처지를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아버지 앞에서 형제 싸움을 못합니다.

옛날 에서도 야곱이 미웠지만 아버지가 살아 계신 동안은 죽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는데 빌립보 교인들이 서로 싸워서야 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사람이 서로 싸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생각하는 사람이 서로 헐뜯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되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기쁨도 크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찌 다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싸울 수 없고 십자가 앞에서 서로 시비할 수 없습니다. 이상 네 가지로 사도 바울은 하나되는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통틀어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돌아갈 때에 비로소 하나됨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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