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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기뻐하라(2장 15절~16절)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으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합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사도 바울은 이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존재 의식과 정체감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정체를 생각할 때에 언제든지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신앙인으로서의 자기 성숙을 도모할 때에도 이 세 가지 측면에서 힘써야 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소원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장과도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내게 어떻게 행하셨는지,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기대하고 계시는지 -- 하나님의 소원, 그 깊으신 뜻, 그리고 내게 향한 경륜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소원을 꺾고 내 욕망을 아예 끊어 버리시면서까지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하십니다. 우리 나라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어려운 고난을 주셨습니다. 36년 동안 일본 사람들 밑에 있었고, 6․25전쟁도 치렀습니다. 경제 공황을 겪고, 많은 정치 파동을 겪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단련하시고 키워서 강하게 하시고, 지혜롭고 성숙하게 하시어 지금 세계의 무대에 내어놓으셨습니다. 자, 과연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 개인적으로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한뜻이 있음을 영적으로 감지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못 이루더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 그것만은 꼭 이루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여기에 맞추어 행동해야 합니다.
두 번째,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내가 얼마만큼 순전하게 살아가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에 물들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여러 모양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가치관도 변하고, 경제 의식도 변하고, 도덕도 변합니다. 모두가 변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의 말씀은 변할 수가 없고, 그의 진리는 절대로 변할 수 없는데 성도들이 얼마나 순전함을 지켰는지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세상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내가 얼마나 순수하고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 번째, 신앙적 차원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성도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봉사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를 필요로 하며 나의 도움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고 있으나 나는 저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내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물질이 필요한 사람을 물질로 도와주지 못할 때, 또한 정신적으로 필요를 느끼는 사람을 돕지 못할 때에 우리는 괴롭습니다. 어떤 때에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나 다 응할 수가 없습니다. 저도 이것 때문에 괴로울 때가 참 많습니다. 때로 예배를 마치고 현관에 나가면 누군가가 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예배드리느라고 온 정력을 다 쏟아서 이제 누구를 만나도 이야기를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도 상대방은 지금 시간이 있지 않느냐고 조르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이럴 때에는 정말 답답합니다. 물론 지금 시간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한곳에 정력을 쏟고 나면 그 다음에는 누구를 만나 이야기할 경황이 없습니다. 부득이 지금은 안 되겠다고 거절을 합니다. 그래서 대화를 청하던 분이 그냥 돌아가고 나면 또 마음이 괴롭습니다. 저 분이 섭섭해서 돌아갔을 텐데 마음에 상처나 입지 않았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의 빚을 지고 살면 항상 괴롭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그 모든 요구와 필요, 또 죽어 가는 불쌍한 심령들을 다 도와야 합니다. 이것을 생각지 못하고 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펴고 있는 손을 우리는 항상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본문은 이 세상을 '거스리는 세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의 시간관(時間觀)을 살펴봅시다. '세대'라고 하는 말은 어려운 신학용어로 소위 '아이온'이라 표현합니다. 영겁(永劫)이라고 하는데 두 영겁을 말합니다. 그 하나는 '이 세대'라고 하는 이름의 세대요, 또 하나는 '오는 세대'라고 하는 앞으로 올 세대입니다. 그런데 이 세대의 구별은 절대로 시간적인 구별이 아닙니다. '이 세대'라고 해서 1988년 8월 3일 오늘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대'라고 하는 말은 이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 이 모든 것을 '이 세대'라고 말합니다. 또 '오는 세대(this age to come)'라는 말은 오늘 이후에 오는 세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세대요, 그러면서도 현재 우리 세대 안에 들어와 있는 세대입니다. 이것을 '영언'이라고 말합니다.
이 '영원'이 현재 우리 세계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시간을 이렇게 두 세대로 나누는데, 본문의 '거스리는 세대'란 바로 '이 세대'를 뜻하며, 이 세상과 모든 여건을 말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두 가지 말로 아주 간결하게 묘사합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가 그것입니다. 이 '어그러진다'는 말은 비뚤어지고 구부러졌다는 뜻이요, 원문그대로 깊이 연구해 보면 갈퀴 같다는 말입니다. 갈퀴는 낚시바늘처럼 구부러져 있어서 아무 데나 잘 걸립니다. 저기 가도 걸리고, 여기 가도 걸리고……이 세상이 바로 그 갈퀴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 '거스린다'는 말은 역행한다는 뜻인데, 이것도 원문을 깊이 살펴보면 유혹되고 곡해한다는 뜻이요 순수하게 받아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이 세상이 나를 순수하게 받아 줍니까? 내 말을 진실하게 믿어 줍니까? 내가 가난하다고 하면 그 가난을 믿어 줍니까? 이 세상은 내게 대하여 공평하지 않고 거스리는 세대입니다. 모든 것이 바르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순수하게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언젠가 여자들이 머리 빗는 것을 보니 내려 빗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빗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이 바로 오늘의 세대와 같다, 곱게 내려 빗지 왜 거꾸로 빗느냐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거꾸로 되는 것이 많습니다. 바로 쭉 뻗지 못하고 갈퀴처럼 구부러졌습니다. 마음들이 모두 구부러졌습니다. 우리가 대화하는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것 참 좋겠습니다"하면 될 터인데 "좋겠다!"가 무엇입니까? 또 아이들더러 어디 좀 다녀오라고 심부름을 시킬 때에 "예"하면 좋겠는데 "가요, 가"하니 이것들이 전부 갈퀴 같은 것이 아닙니까? 마음들이 왜 평안하지 못하고 그렇게 콕콕 찌르는지 정말 갈퀴 같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세대 속의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바울은 이것을 다시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 흠이 없어야 합니다. 헬라어로는 '아멤프토이', 곧 비판받을 것이나 지탄받을 것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나 자신을 향해서나 그리스도를 향해서 아무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인은 탈세(脫稅)를 했다던가 병역 의무를 저버렸다던가, 혹은 무슨 법을 어겼다던가 하는 따위의 떳떳치 못한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세대, 이 세상을 살면서 행여 그런 지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는 사람들일수록 오히려 세상 법을 잘 지켜야 하는데, 이것은 온전한 신사 숙녀의 도를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둘째, 순전해야 합니다. 이 말은 '아케라이오이' 인데 사도 바울이 자주 쓰는 용어입니다. 섞이지 않았다, 또는 간음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우유에 물을 타면 그 우유는 순수하지 못합니다. 물을 타서 멀겋게 된 포도주도 순수하지 못합니다. 우리 신앙 생활의 동기, 생활 사상, 의도 같은 것들이 깨끗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 순수하지 못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 믿는 마음이 순수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마음도 순수하고 티가 없어야 합니다. 만일 동기가 복잡하면 그 신앙에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기 자신을 순결하게 지켜나가고 그 순수성을 보전해야 합니다.
셋째, 그리하여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라고 합니다. 15절에는 '흠없다'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똑같은 뜻으로 번역되었으나, 헬라 원문으로 보면 서로 뜻이 다릅니다. 나중에 나오는 '흠 없는 자려'에서 '흠 없다'의 헬라어는 '아모마' 입니다. 이 말은 아주 허물이 없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부끄러움 없는 사람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는 주관적으로야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하고 평을 받을 수도 있고,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그 때에는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지그것은 정말 수수께끼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비록 세상에 살아도 자기 자신과 세상 안에서 순수하고, 그리스도 앞에서 흠 없는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소원입니다.
다음은 좀더 적극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이것은 첫째, 생명의 말씀 즉 메시지 있는 생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딜가나 벙어리 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할 때에도 될 수 있으면 어느 말끝에라도 전도를 하고, 친구를 사귀며 전도하고, 시장에 나가서도 전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든지 메시지와 전도가 있는 생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 증인의 생을 살아야 합니다. 증인은 말 없이도 증거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빛들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빛은 말이 없어도 길을 환하게 비춰 줍니다. 어두운 사람의 마음에 지혜를 줍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헬라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어느 날 장님이 등불을 켜 들고 밤길을 갑니다. 자신은 비록 빛을 못 보지만 다른 사람이라도 이 빛을 보고 내게 부딪치지 말라고 불을 켜들고 갑니다. 그런데 한참 가다가 어떤 사람과 "딱"하고 부딪혔습니다. 장님은 화가 났습니다. "너는 눈도 없느냐? 나는 소경이라 앞을 못 보지만 너는 이 등불도 보지 못하느냐"하고 야단입니다. 그러자 부딪친 사람이 손으로 등불을 더듬어 만져 보고는 "자네 등불은 이미 꺼진 지가 오래됐네"하더랍니다. 내가 들을 들고 있지만 불이 꺼진 줄 모르고 들고 다닙니다. 꺼진 것을 모르고 사니까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빛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회에서든 직장에서든 어디든지 분명히 빛과 같은 것이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직장이라면 그 직장이 환히 밝아져야 합니다. 믿는 사람 하나가 어느 가정에 들어가면 그 가정이 환하게 밝아져야 합니다. 꺼진 등불을 들고 다니는 것 같은 어리석은 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친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상입니다. 메시지 있는 생을 살아야 하고, 빛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온유하고 성실하고, 그 선행이 많은 사람들을 밝은 길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88올림픽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서울시에서 해외 관광객들을 위한 숙박 시설을 점검해 보니 호텔이 모자라서 부득이 민박을 시켜야 합니다. 2천 세대가 필요하므로 광고를 냈는데, 자기 집에 민박시키겠다고 신청해 오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올림픽 선교위원회에 부탁하여 광고를 냈더니 너도나도 신청하여 금방 해결되었습니다. 교인이 아니고야 누가 그 일을 선뜻 맡겠습니까? 또 온 세계에서 다 모여드니까 인종도 갖가지일 텐데 전부가 백인만 원하고 흑인은 싫다고 합니다. 잘 믿든 못 믿든 그리스도인만이 이들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선행이 하찮은 것 같아도 신앙이 아니고는 참 선행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을 통해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지향하는 이상이고 성숙입니다.
다음 구절을 봅시다.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함이라." 사도 바울은 자기의 생을 언제나 경주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운동선수로 생각합니다. 빌립보는 헬라의 아덴과 가깝고 그 곳에서 올림픽을 했기 때문에 곳곳에 운동경기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16절 상반부의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들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4절에서도 운동경기자가 최선을 다하고 총력을 경주하는 것으로 복음 전달자의 자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운동선수는 한 순간을 위하여 평생을 절제하고 또 법도를 지켜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잘 알기에 그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라고 또 한번 자기 삶을 경주자에 비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나이 많아 자신의 일생을 회고합니다. 세상 끝날 때가 되어 마지막 골인점에 와 있음을 압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가 골인할 때에 주님께서 내게 면류관을 주실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내게 면류관을 주실 때에 그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받을 상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전도해서 믿게 된 사람, 내가 가르쳐서 믿게 된 그리스도인들, 이들이 바로 내가 면류관을 얻게 되는 기준입니다. 내가 구제를 많이 했다고, 또 큰 자선사업을 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도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빌립보 교인들이 믿음 생활을 잘 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빛이 되고 말씀이 되면 바로 그것이 '나의 수고가 되고 그리스도의 날에 나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돈을 많이 번 것입니까? 세상에서 잘 산 것입니까? 자녀를 많이 낳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결국은 내가 전도해서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 그들만이 나의 자랑이요 훈장과도같이 내가 받을 상이 될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자기의 가장 큰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사람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관제(灌祭)는 '스펜도마이'-쏟아 붓는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피를 쏟아 부어도 기뻐하리라 - 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입니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한테는 피곤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엇을 기뻐하고 있습니까?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과 봉사를 기뻐하고 있습니다. 한 영혼이 예수님을 믿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내가 전도한다고 됩니까? 믿음은 하나님께로서 오는 선물입니다.
전도는 내가 하지만 믿고 안 믿고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입니다.
이번에 시카고에서 열린 선교대회에서 인도와 아프리카 선교사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한 선교사는 5년 간 전도해서 2명을 믿게 했고, 또 다른 선교사는 한 사람도 얻지 못했으며, 또 한 선교사는 6년 간 전도해서 어린 고아들을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고아를 키우는 선교사는 그 아이들을 키워서 예수님 믿게 할 작정이라고 한답니다. 자신이 아무리 전도해도 되지 않기에 이 아이들을 키워서 그들로 전도하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 예수 믿기가 이토록 힘이 듭니다. 그래서 바울은 한 사람이 예수 믿어 믿음이 생길 때에 가장 기뻐하고 또 그들의 믿음이 자라서 봉사하려고 나설 때에 기뻐합니다. 금년 여름 우리 교회 청년부와 대학부 140명이 불볕더위 속에서 농촌 봉사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봉사하러 간다니까 그 어머니들이 가장 좋아합니다. 낳아 주고 공부시켜주고 먹이고 입힐 수는 있어도 믿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자라면서 믿음을 가지고 또 봉사까지 하겠다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요한삼서 3절을 봅시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나이 많은 사도요한이 그가 전도해서 믿는 자녀들의 믿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자기의 기쁨을 이처럼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기쁨에 충만하고, 이 기쁨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 믿음과 봉사에서 오는 기쁨에 자기 목숨을 걸고, 내 피를 쏟아 붓는 관제를 드릴지라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가치관과 행복관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희생 더하기 기쁨입니다. 희생이 없이는 사랑이 아니요, 희생은 있으나 고통이 따른다면 그 또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희생하면서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생명을 거는 종말론 적인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18절)"고 말합니다. 기쁨은 기쁨을 전달합니다. 다른 것은 없더라도 기뻐하는 것만 가지고도 봉사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늘 기뻐하며 남에게도 "나와 함께 기뻐합시다"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할 때에 다른 사람도 나와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기뻐하는 그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기뻐하라(2장 15절~16절)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으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합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사도 바울은 이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존재 의식과 정체감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정체를 생각할 때에 언제든지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신앙인으로서의 자기 성숙을 도모할 때에도 이 세 가지 측면에서 힘써야 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소원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장과도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내게 어떻게 행하셨는지,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기대하고 계시는지 -- 하나님의 소원, 그 깊으신 뜻, 그리고 내게 향한 경륜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소원을 꺾고 내 욕망을 아예 끊어 버리시면서까지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하십니다. 우리 나라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어려운 고난을 주셨습니다. 36년 동안 일본 사람들 밑에 있었고, 6․25전쟁도 치렀습니다. 경제 공황을 겪고, 많은 정치 파동을 겪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단련하시고 키워서 강하게 하시고, 지혜롭고 성숙하게 하시어 지금 세계의 무대에 내어놓으셨습니다. 자, 과연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 개인적으로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한뜻이 있음을 영적으로 감지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못 이루더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 그것만은 꼭 이루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여기에 맞추어 행동해야 합니다.
두 번째,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내가 얼마만큼 순전하게 살아가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에 물들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여러 모양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가치관도 변하고, 경제 의식도 변하고, 도덕도 변합니다. 모두가 변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의 말씀은 변할 수가 없고, 그의 진리는 절대로 변할 수 없는데 성도들이 얼마나 순전함을 지켰는지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세상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내가 얼마나 순수하고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 번째, 신앙적 차원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성도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봉사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를 필요로 하며 나의 도움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고 있으나 나는 저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내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물질이 필요한 사람을 물질로 도와주지 못할 때, 또한 정신적으로 필요를 느끼는 사람을 돕지 못할 때에 우리는 괴롭습니다. 어떤 때에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나 다 응할 수가 없습니다. 저도 이것 때문에 괴로울 때가 참 많습니다. 때로 예배를 마치고 현관에 나가면 누군가가 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예배드리느라고 온 정력을 다 쏟아서 이제 누구를 만나도 이야기를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도 상대방은 지금 시간이 있지 않느냐고 조르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이럴 때에는 정말 답답합니다. 물론 지금 시간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한곳에 정력을 쏟고 나면 그 다음에는 누구를 만나 이야기할 경황이 없습니다. 부득이 지금은 안 되겠다고 거절을 합니다. 그래서 대화를 청하던 분이 그냥 돌아가고 나면 또 마음이 괴롭습니다. 저 분이 섭섭해서 돌아갔을 텐데 마음에 상처나 입지 않았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의 빚을 지고 살면 항상 괴롭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그 모든 요구와 필요, 또 죽어 가는 불쌍한 심령들을 다 도와야 합니다. 이것을 생각지 못하고 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펴고 있는 손을 우리는 항상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본문은 이 세상을 '거스리는 세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의 시간관(時間觀)을 살펴봅시다. '세대'라고 하는 말은 어려운 신학용어로 소위 '아이온'이라 표현합니다. 영겁(永劫)이라고 하는데 두 영겁을 말합니다. 그 하나는 '이 세대'라고 하는 이름의 세대요, 또 하나는 '오는 세대'라고 하는 앞으로 올 세대입니다. 그런데 이 세대의 구별은 절대로 시간적인 구별이 아닙니다. '이 세대'라고 해서 1988년 8월 3일 오늘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대'라고 하는 말은 이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 이 모든 것을 '이 세대'라고 말합니다. 또 '오는 세대(this age to come)'라는 말은 오늘 이후에 오는 세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세대요, 그러면서도 현재 우리 세대 안에 들어와 있는 세대입니다. 이것을 '영언'이라고 말합니다.
이 '영원'이 현재 우리 세계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시간을 이렇게 두 세대로 나누는데, 본문의 '거스리는 세대'란 바로 '이 세대'를 뜻하며, 이 세상과 모든 여건을 말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두 가지 말로 아주 간결하게 묘사합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가 그것입니다. 이 '어그러진다'는 말은 비뚤어지고 구부러졌다는 뜻이요, 원문그대로 깊이 연구해 보면 갈퀴 같다는 말입니다. 갈퀴는 낚시바늘처럼 구부러져 있어서 아무 데나 잘 걸립니다. 저기 가도 걸리고, 여기 가도 걸리고……이 세상이 바로 그 갈퀴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 '거스린다'는 말은 역행한다는 뜻인데, 이것도 원문을 깊이 살펴보면 유혹되고 곡해한다는 뜻이요 순수하게 받아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이 세상이 나를 순수하게 받아 줍니까? 내 말을 진실하게 믿어 줍니까? 내가 가난하다고 하면 그 가난을 믿어 줍니까? 이 세상은 내게 대하여 공평하지 않고 거스리는 세대입니다. 모든 것이 바르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순수하게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언젠가 여자들이 머리 빗는 것을 보니 내려 빗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빗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이 바로 오늘의 세대와 같다, 곱게 내려 빗지 왜 거꾸로 빗느냐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거꾸로 되는 것이 많습니다. 바로 쭉 뻗지 못하고 갈퀴처럼 구부러졌습니다. 마음들이 모두 구부러졌습니다. 우리가 대화하는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것 참 좋겠습니다"하면 될 터인데 "좋겠다!"가 무엇입니까? 또 아이들더러 어디 좀 다녀오라고 심부름을 시킬 때에 "예"하면 좋겠는데 "가요, 가"하니 이것들이 전부 갈퀴 같은 것이 아닙니까? 마음들이 왜 평안하지 못하고 그렇게 콕콕 찌르는지 정말 갈퀴 같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세대 속의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바울은 이것을 다시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 흠이 없어야 합니다. 헬라어로는 '아멤프토이', 곧 비판받을 것이나 지탄받을 것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나 자신을 향해서나 그리스도를 향해서 아무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인은 탈세(脫稅)를 했다던가 병역 의무를 저버렸다던가, 혹은 무슨 법을 어겼다던가 하는 따위의 떳떳치 못한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세대, 이 세상을 살면서 행여 그런 지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는 사람들일수록 오히려 세상 법을 잘 지켜야 하는데, 이것은 온전한 신사 숙녀의 도를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둘째, 순전해야 합니다. 이 말은 '아케라이오이' 인데 사도 바울이 자주 쓰는 용어입니다. 섞이지 않았다, 또는 간음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우유에 물을 타면 그 우유는 순수하지 못합니다. 물을 타서 멀겋게 된 포도주도 순수하지 못합니다. 우리 신앙 생활의 동기, 생활 사상, 의도 같은 것들이 깨끗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 순수하지 못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 믿는 마음이 순수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마음도 순수하고 티가 없어야 합니다. 만일 동기가 복잡하면 그 신앙에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기 자신을 순결하게 지켜나가고 그 순수성을 보전해야 합니다.
셋째, 그리하여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라고 합니다. 15절에는 '흠없다'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똑같은 뜻으로 번역되었으나, 헬라 원문으로 보면 서로 뜻이 다릅니다. 나중에 나오는 '흠 없는 자려'에서 '흠 없다'의 헬라어는 '아모마' 입니다. 이 말은 아주 허물이 없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부끄러움 없는 사람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는 주관적으로야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하고 평을 받을 수도 있고,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그 때에는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지그것은 정말 수수께끼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비록 세상에 살아도 자기 자신과 세상 안에서 순수하고, 그리스도 앞에서 흠 없는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소원입니다.
다음은 좀더 적극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이것은 첫째, 생명의 말씀 즉 메시지 있는 생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딜가나 벙어리 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할 때에도 될 수 있으면 어느 말끝에라도 전도를 하고, 친구를 사귀며 전도하고, 시장에 나가서도 전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든지 메시지와 전도가 있는 생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 증인의 생을 살아야 합니다. 증인은 말 없이도 증거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빛들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빛은 말이 없어도 길을 환하게 비춰 줍니다. 어두운 사람의 마음에 지혜를 줍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헬라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어느 날 장님이 등불을 켜 들고 밤길을 갑니다. 자신은 비록 빛을 못 보지만 다른 사람이라도 이 빛을 보고 내게 부딪치지 말라고 불을 켜들고 갑니다. 그런데 한참 가다가 어떤 사람과 "딱"하고 부딪혔습니다. 장님은 화가 났습니다. "너는 눈도 없느냐? 나는 소경이라 앞을 못 보지만 너는 이 등불도 보지 못하느냐"하고 야단입니다. 그러자 부딪친 사람이 손으로 등불을 더듬어 만져 보고는 "자네 등불은 이미 꺼진 지가 오래됐네"하더랍니다. 내가 들을 들고 있지만 불이 꺼진 줄 모르고 들고 다닙니다. 꺼진 것을 모르고 사니까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빛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회에서든 직장에서든 어디든지 분명히 빛과 같은 것이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직장이라면 그 직장이 환히 밝아져야 합니다. 믿는 사람 하나가 어느 가정에 들어가면 그 가정이 환하게 밝아져야 합니다. 꺼진 등불을 들고 다니는 것 같은 어리석은 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친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상입니다. 메시지 있는 생을 살아야 하고, 빛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온유하고 성실하고, 그 선행이 많은 사람들을 밝은 길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88올림픽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서울시에서 해외 관광객들을 위한 숙박 시설을 점검해 보니 호텔이 모자라서 부득이 민박을 시켜야 합니다. 2천 세대가 필요하므로 광고를 냈는데, 자기 집에 민박시키겠다고 신청해 오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올림픽 선교위원회에 부탁하여 광고를 냈더니 너도나도 신청하여 금방 해결되었습니다. 교인이 아니고야 누가 그 일을 선뜻 맡겠습니까? 또 온 세계에서 다 모여드니까 인종도 갖가지일 텐데 전부가 백인만 원하고 흑인은 싫다고 합니다. 잘 믿든 못 믿든 그리스도인만이 이들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선행이 하찮은 것 같아도 신앙이 아니고는 참 선행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을 통해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지향하는 이상이고 성숙입니다.
다음 구절을 봅시다.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함이라." 사도 바울은 자기의 생을 언제나 경주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운동선수로 생각합니다. 빌립보는 헬라의 아덴과 가깝고 그 곳에서 올림픽을 했기 때문에 곳곳에 운동경기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16절 상반부의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들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4절에서도 운동경기자가 최선을 다하고 총력을 경주하는 것으로 복음 전달자의 자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운동선수는 한 순간을 위하여 평생을 절제하고 또 법도를 지켜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잘 알기에 그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라고 또 한번 자기 삶을 경주자에 비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나이 많아 자신의 일생을 회고합니다. 세상 끝날 때가 되어 마지막 골인점에 와 있음을 압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가 골인할 때에 주님께서 내게 면류관을 주실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내게 면류관을 주실 때에 그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받을 상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전도해서 믿게 된 사람, 내가 가르쳐서 믿게 된 그리스도인들, 이들이 바로 내가 면류관을 얻게 되는 기준입니다. 내가 구제를 많이 했다고, 또 큰 자선사업을 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도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빌립보 교인들이 믿음 생활을 잘 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빛이 되고 말씀이 되면 바로 그것이 '나의 수고가 되고 그리스도의 날에 나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돈을 많이 번 것입니까? 세상에서 잘 산 것입니까? 자녀를 많이 낳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결국은 내가 전도해서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 그들만이 나의 자랑이요 훈장과도같이 내가 받을 상이 될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자기의 가장 큰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사람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관제(灌祭)는 '스펜도마이'-쏟아 붓는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피를 쏟아 부어도 기뻐하리라 - 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입니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한테는 피곤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엇을 기뻐하고 있습니까?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과 봉사를 기뻐하고 있습니다. 한 영혼이 예수님을 믿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내가 전도한다고 됩니까? 믿음은 하나님께로서 오는 선물입니다.
전도는 내가 하지만 믿고 안 믿고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입니다.
이번에 시카고에서 열린 선교대회에서 인도와 아프리카 선교사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한 선교사는 5년 간 전도해서 2명을 믿게 했고, 또 다른 선교사는 한 사람도 얻지 못했으며, 또 한 선교사는 6년 간 전도해서 어린 고아들을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고아를 키우는 선교사는 그 아이들을 키워서 예수님 믿게 할 작정이라고 한답니다. 자신이 아무리 전도해도 되지 않기에 이 아이들을 키워서 그들로 전도하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 예수 믿기가 이토록 힘이 듭니다. 그래서 바울은 한 사람이 예수 믿어 믿음이 생길 때에 가장 기뻐하고 또 그들의 믿음이 자라서 봉사하려고 나설 때에 기뻐합니다. 금년 여름 우리 교회 청년부와 대학부 140명이 불볕더위 속에서 농촌 봉사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봉사하러 간다니까 그 어머니들이 가장 좋아합니다. 낳아 주고 공부시켜주고 먹이고 입힐 수는 있어도 믿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자라면서 믿음을 가지고 또 봉사까지 하겠다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요한삼서 3절을 봅시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나이 많은 사도요한이 그가 전도해서 믿는 자녀들의 믿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자기의 기쁨을 이처럼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기쁨에 충만하고, 이 기쁨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 믿음과 봉사에서 오는 기쁨에 자기 목숨을 걸고, 내 피를 쏟아 붓는 관제를 드릴지라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가치관과 행복관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희생 더하기 기쁨입니다. 희생이 없이는 사랑이 아니요, 희생은 있으나 고통이 따른다면 그 또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희생하면서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생명을 거는 종말론 적인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18절)"고 말합니다. 기쁨은 기쁨을 전달합니다. 다른 것은 없더라도 기뻐하는 것만 가지고도 봉사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늘 기뻐하며 남에게도 "나와 함께 기뻐합시다"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할 때에 다른 사람도 나와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기뻐하는 그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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