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고린도전후서1)
1. 고린도 교회의 기원과 역사적 정황
고린도전후서가 특수한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 정황에 처한 고린도 교회에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다.2) 그러므로 고린도전후서에 나타나는 바울의 메세지와 의도를 올바르게 파악하려면, 우리는 먼저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설립되었으며, 바울이 무엇 때문에 고린도전후서를 썼으며, 바울이 이 편지들을 쓸 때 고린도 교회는 어떤 역사적 상황에 처해 있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바울이 이 편지들을 쓸 때의 고린도 교회의 역사적, 문화적, 사회․종교적 정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거나 재구성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며,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2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사도행전 18:1-18에 따르면, 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시인 AD 50년경 아덴을 거쳐 아가야 지역의 수도인 고린도에 왔다. 본래 고린도는 고대 헬라 제국의 여러 도시 중 하나였으나, 주전 146년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주전 44년 로마 제국의 쥴리어스 시저 황제에 의해 동서와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상업 및 무역 중심의 항구 도시로 재건되었다.3) 따라서 바울이 그 곳에 도착했을 때 고린도는 문화적으로는 강력한 헬라 철학과 종교의 영향 아래에 있었고, 행정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 있었으며, 아가야 지역의 행정상의 수도로서 총독이 거주하는 도시였으며, 그리스 지역에서 가장 크고 번창한 도시였다.4)
그러므로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마치 오늘날 우리나라 서울 사람들처럼, 자신들의 거주지와 그곳에서의 성취 등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5) 동시에 고린도는 당시 사랑과 미와 출산의 여신인 Aphrodite의 유명한 신전이 있어 종교의 이름으로 여 사제들과 순례자들과의 행음이 자행되었으며,6) 그밖에도 예언의 신으로 알려진 Apollo의 신전과 치유의 신인 Asklepion의 신전과 결혼의 여신 Hera Argae의 신전과 로마 황제 숭배를 위한 제단이 세워져 있을 만큼 각종 종교적 제사행위가 범람하고 있었다.7)
3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바울은 고린도에서 로마 황제 글라디우스가 AD 49년경에 반포했다고 보이는 유대인 추방 명령에 따라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온 로마 교회의 신자이며 장막업자인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장막 일을 하면서 1년 6개월간 복음을 전파했다.8) 바울이 고린도에 체류할 당시 그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AD 51-52년 사이에 아가야 지역의 총독으로 재임했던 것으로 보이는 갈리오 총독에게 소환된 것을 볼 때,9) 바울은 적어도 AD 51년 이전에 고린도에서 복음 전파 사역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중에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와서 바울을 도왔다(행 18:5). 바울의 복음 전파 대상은 유대인과 이방인인 헬라인들이었다(행 18:5-8).10) 선교 초기에는 유대인들의 대적과 훼방이 있었지만 바울의 선교 활동은 적지 않은 결실을 맺었다. 헬라인인 디도 유스도는 자기 집을 전도 집회소로, 즉 최초의 고린도 가정 교회로 제공했으며(행 18:7), 유대인인 회당장 그리스보의 모든 가족들이 주님을 믿었으며, 그 결과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행 18:8). 따라서 고린도 교회는, 설사 우리가 그 구성 비율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할지라도, 처음부터 유대인 및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전 1:22-24; 7:18; 9:20-22).11)
4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우리는 고전 1:26-29에 근거해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들이 대부분 사회적으로 하류층 출신(다수가 여자)이라고 추측할 수 있으나, 상류층에 속한 부유하고 지적인 사람들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전 10:27; 11:1-34).12)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창설자라는 것은 누가뿐 아니라, 바울 자신이 그의 서신에서 직접 말하고 있다(고전 3:6).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보낼 당시 고린도 교회는, 우리가 그 서신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제기된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적지 않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우리는 현존하는 고린도전후서를 통해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다고 보이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추론할 수 있다. 즉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의 사도직과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이 있었고(고전 9:1-2; 15:3-11; 고후 2:14-7:4; 11),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예수파 등 계파간의 분쟁도 있었고(고전 1:11; 3:1-9; 11:18), 지식을 자랑하는 자들이 있었으며(1:18-2:5), 성도 상호간의 소송문제도 있었고(고전6:1-11),13) 계모와 더불어 사는 자들도 있었고(고전 5:1-8), 창녀들과 더불어 성적 문란 행위를 하는 자들이 있었는가 하면(고전 5:9-13; 6:15-20), 그 반대로 부부간의 합법적인 성생활조차 반대하는 금욕주의자들도 있었고(고전 7:1-7), 불신자 배우자와의 관계 문제도 있었고(고전 7:8-17),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와 우상숭배와(고전 8; 고전 10),14) 성만찬을 오용하는 문제가 있었으며(고전 11:18-34), 예수님의 몸의 부활과 성도의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도 있었고(고전 15), 예배시의 질서에 관한 논의도 있었고(고전 11:2-16),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찬반 논의가 있었으며(고전 14: 34-36), 방언 등 영적 은사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진 자들도 있었으며(고전 12-14), 헌금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고전 16:1-3; 고후 8:1-9:15).
5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이상과 같이 고린도 교회는 초대 교회 중 그 어떤 교회보다도 문제가 많고 복잡한 교회였다.15) 우리는 왜 고린도 교회 안에 이와 같은 복잡한 문제들이 야기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즉 이러한 문제들이 외부로부터 고린도 교회에 찾아 온 사람들, 예를 들어, 우리가 갈라디아 교회의 경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바울의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교회를 혼란 가운데 빠뜨린 유대주의자들 때문에 야기된 것인지, 아니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과 3장에서 교회의 분쟁 문제와 관련해 언급하는 아볼로와 베드로의 고린도 교회 방문과 그들의 가르침 때문에 야기된 것인지, 아니면 바울의 복음이 특수한 문화와 사회 환경을 갖고 있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전파되면서 바울의 복음에 대한 수용과 이해 때문에 야기된 것인지, 아니면 당시 여러 가정집 교회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보이는 고린도 교회 내의 여러 그룹 사이에서 야기된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울이 고린도전후서를 쓸 당시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안고 있었으며,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목회적 목적 의도에서 이 편지들을 썼다는 점이다.
2. 바울의 고린도 방문과 편지들
우리는 바울의 고린도 선교 방문과 고린도전후서의 작성 과정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 있다.
1)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시 고린도 방문과 선교가 있었고, 이 때에 바울 이 고린도 교회를 설립했다(행 18:1-18).
2)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설립한 후 그곳에서 적어도 1년 6개월 이상 목회 하다가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에 갔다(행 18:19-20).
3)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에 첫번째 편지를 썼다(고전 5:9,11). 이 첫번째 편지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왜냐하 면 이 편지는 현재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4) 바울은 ‘글로에의 집’ 편으로 고린도 교회가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 여러 파당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듣는다(고전 1:11; 16:17 참조).
5)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로부터(스데바나, 보드나도, 아가이고) 부부 생활, 우상 제사의 고기 문제, 예배 질서, 성령의 은사, 부활, 헌금 등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바울의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받는다(고전 7:1).
6) 디모데가 특별한 사명을 갖고 고린도로 보냄을 받는다(고전 4:17; 16:10).
7) 고린도 교회의 편지와 관련해 바울이 편지를 써서 디도 편으로 보낸다 (고후 12:18). 이것이 현존하는 고린도전서다. 이 때가 주후 54년, 혹은 55년 초였을 것이다 (고전 16:8 참조).
6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8) 그 동안 고린도에 유대인 밀사들이 도착해 고린도 교회 안에서 바울의 권위가 도전을 받는 등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다. 디모데는 이 위기를 처리하지 못하고 에베소로 돌아온다(고후 10:10; 11:23; 12:6 이하).
9) 디모데의 보고를 받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 접 고통스러운 방문을 한다(고후 2:1; 12:14; 13:1). 그러나 별다른 효 과를 거두지 못하고 상심한 채로 에베소로 돌아온다.
10) 에베소로 돌아와서 바울은 강력한 항의의 편지를 써서 고린도 교회의 위기에 대처하려 한다(고후 2:4; 7:8). 이 편지는 ‘눈물의 편지’ 혹은 ‘심각한 편지’ 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존하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이 편지가 고후 10-13장에 보존되어 있다고 본다. 이 편지를 보낸 후 바울은 디도를 만나기 위해 마게도냐로 떠난다.
11) 마게도냐에서 고린도로부터 온 디도에게서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편지 를 수용했다는 사실을 듣는다(고후 7:5-16).
12) 디도의 소식을 듣고 지금 고린도후서로 알려진 편지를 쓴다. 편지를 써 서 디도 편으로 고린도 교회에 보낸다. 이 고린도후서 중 1-9장은 먼저 썼고, 나머지는 나중에 썼을 가능성도 있다.16) 이 때는 주후 55년 가을 혹은 56년 초가 되었을 것이다.
3. 고린도전서의 구조적 분석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현안 문제와 관련해 쓴 일종의 권면적 서신으로 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수사학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17)
7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1) 1:1-3 서언(Epistolary Prescript)
2) 1:4-9 감사 및 편지를 쓰는 이유 제시(Epistolary Thanksgiving &
Exordium)
3) 1:10-17 사건 및 문제의 진술(Statement of Fact & Narratio)
4) 1:18-15:57 편지의 본론: 논증(Probatio)
(1) 1:18-4:21 첫번째 논증: 고린도 교회의 자랑, 분파 문제를 언급한 후 십자 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에도스와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를 따르는 자신의 삶(ethos)을 문제 해결을 위한 열쇠로 제시(1:22-25; 2:2; 4:16 참조 Cf. 7:7;8:13;9:1-27; 10:33-11:1; 14:18-19)
(2) 5:1-11:1 두번째 논증: 고린도 교회를 분리시키는 여러 가지 문제를 언급함
(3) 5:1-13 음행문제를 취급
(4) 6:1-11 성도의 소송문제를 취급
(5) 6:12-20 성적 부패를 언급
(6) 7:1-40 결혼 문제를 취급
(7) 8:1-13 우상 문제를 취급 1
(8) 9:1-27 자신을 올바른 자유 사용에 대한 모범으로 제시
(9) 10:1-11:1 우상 문제를 취급 2
(10) 11:2-16 예배에 있어서 여신자의 머리 스타일 문제 취급
(11) 11:17-34 주의 만찬에 있어서 질서 문제 취급
(12) 12:1-31a 영적 은사 1
(13) 12:31b-13:13 사랑, 문제 해결의 열쇠
(14) 14:1-40 영적 은사 2
5) 15:1-57 죽은 자의 부활 문제 취급
6) 15:58 결론(Peroratio)
7) 16:1-24 편지의 결언(Epistolary Closing)
4. 고린도후서의 구조적 분석
고린도후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전반부(1-9장)는 바울이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눈물의 편지’를 고린도 교인들이 수용해 반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감사와 위로를 표명하는 내용이며, 후반부 (10-13장)는 고린도 교회에 와서 바울의 사도직에 도전하고 있는 자들을 염두에 둔 바울의 강력한 자기 변호를 담고 있다.
8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1) 1:1-2 서언(Epistolary Opening)
2) 1:3-7 감사 및 편지를 쓰는 이유 제시(Thanksgiving)
3) 1:8-2:16 사건 및 문제의 진술(Exordium)
4) 2:17 주제 제시(Propositio)
5) 3:1-13:4 논증과 반박(Confirmatio)
(1) 3:1-6:13 바울의 목회사역의 특징
(2) 6:14-7:1 권면과 책망
(3) 7:2-16 근심의 편지에 대한 변호
(4) 8-9 권면적 논증 (헌금 문제)
(5) 10-13:4 바울과 그의 반대자들과의 비교: 십자가의 신학의 적용
6) 13:5-10 결론(Peroratio)
7) 13:11-13 편지의 결언과 인사(Epistolary Closing)
5. 고린도 교회 문제의 근본 원인
위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고린도전후서는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바울의 목회적 교훈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 문제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왜 고린도 교회 안에 분쟁, 다툼, 자기 자랑, 교만, 성적 부패, 금욕주의, 세속주의 등 여러 가지 신학적, 윤리적 문제들이 일어났는가?
우리는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의 근본 원인을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오해, 다시 말해, 바울이 전한 ‘십자가의 복음’과 ‘십자가의 신학’을 헬라 문화의 배경 아래 ‘영광의 신학’으로 곡해한 데서 찾고자 한다(참조 4:8-13).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울의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를 둔 ‘이미’와 ‘아직’의 수평적이며, 시간적이며, 역동적인 종말론 및 구원론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고전 1:18-25; 2:1-2; 고후 5:14b-18),18) 고린도 교인들은-특별히 여성 교우들을 중심으로-바울의 복음과 그의 구원론을 당대 고린도 지역에 풍미하던 헬라 사상의 이데아와 현상, 영혼과 육체를 나누는 수직적이며, 정적이며, 존재론적인 이원론을 토대로 이해하려 한 데 있다는 것이다(1:18, 22-25 참조).
9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은 바울의 복음을 듣고 새 시대의 선물인 성령 체험을 했을 때(고후 1:22; 5:5), 그것이 구원의 완성이나 완전에의 도달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의 시작이며, 부분적인 것이며(고전 13:8-12),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십자가의 복음에 따른 십자가의 삶을 통해 계속적인 성장과 완성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이 세상에서 완전한 구원의 상태와 영적인 상태(pneumatikoiv, 성령의 사람들)에 도달했다고 생각해(고전 3:20; 4:8),19) 영적 은사를 자랑하고, 남용하고, 성적으로 부패하거나 금욕주의를 조장하고,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 일종의 열광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처럼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잘못된 바울의 복음 이해, 특별히 헬라 사상에 따른 잘못된 구원 이해 및 성령 이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을 볼 때, 고린도전후서에 나타난 바울의 십자가의 복음에 근거한 구원론, 종말론 및 성령의 가르침은 고린도 교회의 잘못된 구원 역사와 성령 이해를 바르게 잡아 교회를 바르게 세우려는 목회적 동기 아래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20)
6. 고린도 교회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
1) 그리스도/성령에 관한 교훈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린도전후서는 바울의 13 서신 중에서 성령과 관련해 사용되는 중요한 용어들인 ‘퓨뉴마’(pneuma), ‘퓨뉴마티코스’(pneuma-
10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tikov"), ‘카리스마’(cavrisma)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서신이다.
바울의 이름으로 쓰여진 13서신에서 ‘퓨뉴마’(pneuma)는 모두 145번 나타나는데, 이 중 108번 이상이 성령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 중 39번이 고린도전후서에(고전 27번, 고후 14번) 나타난다21) :
고린도전서
2:4, 10, 10, 11, 12, 13, 14; 3:16; 4:21; 6:11,19; 7:40; 12:3, 3, 4, 7, 8, 8, 9, 9, 11, 13, 13; 14:2, 12, 16; 15:45
고린도후서
1:22; 3:3, 6, 6, 8, 17, 17, 18; 4:13; 5:5; 6:6; 7:1; 11:4; 12:18; 13:13.
바울 서신에서 종종 성령과 관련해 사용되는 단어인 ‘퓨뉴마티코스’(pneu-
matikov")는 모두 24번 나타나는데,22) 그 중 15번이 고린도전서에 나타난다:
고린도전서
2:13, 13, 15; 3:1; 9:11; 10:3,4,4; 12:1; 14:1,37; 15:44,44,46,46.
바울의 서신에서 종종 성령의 은사와 관련해 사용되는 단어인 ‘카리스마’(cavrisma)는 모두 16번 나타나는데, 그 중 8번이 고린도전후서에 나타난다:
고린도전서
1:7; 7:7; 12:4,9,28,30,31
11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고린도후서
1:11
이상과 같은 간략한 데이터의 분석은 고린도전후서에 나타난 바울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물론 바울의 성령에 관한 가르침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고린도전후서에 대한 검토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더 나아가, 바울의 성령론 연구가인 G. D. Fee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의 근저에는 성령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자리잡고 있으며, 바로 이것을 시정하는 것이 바울이 고린도전후서를 쓰게 된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였다.23) 그렇다면 고린도전후서의 성령에 관한 우리의 검토는 성령론이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 한국 교회의 현 시점에서24)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보기에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들의 성령 이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고린도 교인들이 지혜와 은사를 자랑한 점, 교회 내의 분파들, 미래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부인, 극단적인 성적 방종 및 이와 반대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 교회와 가정의 무질서가 야기된 것 등 모두가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된 성령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6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성적 부패 문제를 언급하면서 성령론의 관점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에 접근한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성적인 범죄에 빠지는 것은 바로 성령의 전인 그들의 몸을 더럽히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성령에 대해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25)
그렇다면 바울은 성령에 대한 어떤 가르침을 통해 그들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처방책을 제시하는가? 바울은 고린도전후서 그 어느 곳에서도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 성령과 은사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과 은사를 받은 것을 칭찬하고, 계속해서 성령의 은사들을 사모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과 성령의 은사들을 받지 않았거나, 혹은 그것을 사모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왜 그들에게 성령과 성령의 은사들을 주셨는지, 성령과 성령 은사들의 주요 기능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주어진 성령과 은사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바울이 고린도전후서에서 성령과 은사 문제들을 거듭해서 다루는 것은 바로 이것을 깨우쳐 주기 위함이다.
12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2) 문제 해결의 열쇠로서의 십자가-성령-사랑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과 은사 문제를 취급한다. 그리고 13장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랑에 관해 말한다. 그리고 다시 14장에서 성령의 은사 문제를 말한다. 다시 말해, 바울은 히브리 문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ABA' 교차대구법을 활용해 성령과 은사 문제를 취급하는 12장과 14장 가운데 사랑장을 둠으로써 성령과 은사는 사랑을 위해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성령과 은사는 반드시 사랑과 함께 활용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26) 이것은 12장의 끝 절인 31절과 14장의 첫 절에 잘 나타나 있다. 즉 12장 31절 상반절에서 바울은 12장을 요약해 “너희는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31절 하반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가장 좋은 길을 보여 주리라”는 말을 통해 13장에서 말할 사랑이야말로 성령의 은사를 활용하는 최선의 길임을 암시하고 있다.27) 그런 다음 13장에서 사랑의 문제를 길게 취급한다. 그리고 다시 성령과 은사 문제를 취급하는 14장 첫 절에서 13장을 다시 요약해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말한 다음, 바로 이어 “신령한 것 즉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바울은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 12장 13장 14장의 순서를 “성령의 은사-사랑-성령의 은사”의 순서인 ABA'라는 교차대구법 형식을 취하는 것은 물론, 사랑을 취급하는 13장에서도 “성령의 은사-사랑-성령의 은사” 등 의도적으로 ABA'의 교차대구법 형태로 만들어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즉 바울은 13:1-3에서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해 “내가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내가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비밀과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산을 옮길 만한 엄청난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한다. 성령의 은사는 반드시 사랑과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13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그 후 13:4-7에서 사랑을 15번이나 문장의 주어로 삼아 사랑의 특성을 길게 설명한다. 그리고 나서 13:8-13에서 다시 사랑과 성령의 은사를 비교하면서 예언, 방언, 지식 등 모든 성령의 은사는 이 세상에서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것인 반면에 사랑은 영원히 존속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방언, 예언, 능력, 지식 등은 고린도 교회의 성장과 교회 일치는커녕 오히려 갈등과 분리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지만, 반면에 사랑은 교회의 갈등과 분리를 해소하고 성숙과 성장을 촉진시키기 때문이다.28)
만약 고린도 교회의 모든 문제가 성령과 은사 문제와 연결되어 있고, 바울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로 사랑장(13장)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고린도전서에서 가장 중요한 장은 13장이며, 또한 13장 중에서도 사랑의 특성을 말하는 4-7절이야말로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황금 구절(gold passage)이라고 말할 수 있다.29)
지금까지 우리는 모두 16장으로 되어 있는 고린도전서 중 먼저 12-14장을 살펴본 후, 관심의 초점을 12장과 14장 사이에 있는 사랑장(13장)으로, 그리고 또 다시 사랑의 특성을 말하는 13:4-7에까지 좁혔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파악하려면, 우리는 좀더 나아가야 한다. 사랑의 특성을 말하는 13:4-7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자. 이 구절 역시 ABA'의 교차대구법 형태로 되어 있다.30) 즉 바울은 13:4 상반절에서 긍정형 문장을 사용해 사랑의 두 가지 특성인 오래 참음과 온유함에 대해 말한다. 그런 다음 13:4 하반절부터 6절 상반절 사이에서 부정형 문장을 사용해 사랑의 8가지 특성, 곧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그 후 13:6 하반절에서부터 7절에서 다시 긍정형 문장으로 돌아가 사랑의 5가지 특성에 대해-“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딘다”-말한다. 바울이 15가지의 사랑의 특성을 말하면서 “긍정-부정-긍정” 식의 ABA' 교차대구법을 사용하는 것은 의도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관심을 처음에는 13장에로, 그 다음에는 13장 4-7절에로, 그리고 또 다시 4-7절 중 4절 하반절에서 6절 상반절에 기술된 사랑의 8가지 부정적인 특성에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 8개의 부정형 특성을 통해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피게 하고 있다.
14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우리는 고린도전후서를 통해 이 8개의 단어들이 낯설지 않음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전후서 여러 곳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들을 언급하면서 이 단어들을 여러 차례 사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8개의 부정형 문장을 긍정형으로 바꾼다면, 바로 그것이 당시의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를 대변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투기하고, 자랑하고, 교만하고, 무례하고, 자신의 유익을 취하고, 성내고, 악한 것을 생각하고, 불의를 기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그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3:4 하반절에서부터 6절 상반절까지 바울이 부정형 문장을 통해 제시하는 8가지 사랑의 특성을 반영하는 모델은 누구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8가지 부정형의 반대가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를 보여 준다면, 그런 상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8가지 사랑의 특성을 보여 주는 모델은 과연 누구이겠는가?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3:4 하반절에서 6절 상반절에서 말하는 사랑은 바로 십자가의 신학과 삶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 사랑의 참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사랑의 특성이 헬라의 윤리학에서 가져온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반대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특성을 말할 때 한결같이 정관사와 함께 아가페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사랑이 일반적인 사랑이 아닌 특수한 사랑,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과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보여 준 사랑임을 말해 준다.31) 그런 점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신학과 십자가의 삶의 전형과 패러다임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Richard B. Hays 박사가 그의 최근 저서, The Moral Vision of the New Testament. A Contemporary Introduction to New Testament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정당하다고 본다: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상에서의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순종의 모범이 되는, 사랑에 바탕한 자기 희생적 순종의 행위다.”32)
15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그러므로 십자가의 삶은 바로 십자가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사랑을 알고 이 사랑을 실천하려고 힘쓰는 자였다.33) 신자에게 있어서 성령의 주된 사역은 바로 이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데 있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진정한 영성의 표지, 곧 성숙한 신앙인의 표지는 고린도 교회들이 자랑하는 방언, 예언, 능력, 지식 등이 아니라, 오히려 고린도 교인들이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하는 십자가의 삶, 곧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34) 다시 말해, 도덕성이 결여된 영성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이 시작되는 전절(12:31)을 “내가 여러분들에게 ‘가장 좋은 길’(e[ti kaq j uJperbolh;n oJdo;n)35) 을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시작한 다음에, 13장을 “이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을 것인데 이들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13:13)로 종결하고, 이어서14:1에서 다시 “사랑을 구하라”(Diwvkete th;n ajgavphn)라고 당부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성령을 받은 성령의 사람들이며, 방언, 지식, 예언 등 성령의 은사를 누구보다도 많이 가진 사람들임을 자랑했지만, 바울이 볼 때 그들은 성령의 주된 사역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 곧 사랑의 삶을 사는 데 실패하고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 “아직도 젖을 먹어야 할 어린 아이”(3:1-3)라고 부르는 것이다.36) 이런 이유로 바울은 14:1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구하기 전에 먼저 사랑을 구하라고 권면한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사실상 고린도전서 전체를 사랑의 당부로 시작해 사랑의 당부로 마무리한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간곡한 사랑의 명령인 “형제 자매들이여,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10)는 권면으로 시작하고, 역시 사랑의 명령인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16:14)는 말로 종결한다. 이처럼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령 이해에 대한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 사랑을 말하고, 이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과 연결시켰다. 그렇다면 이 문제가 고린도전후서의 또 다른 중요한 내용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2:1-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린도 사람들에게 전도하려 갔을 때, 나는 아름다운 말과 고상한 지혜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전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성령의 능력은 아름다운 말과 지혜에 있지 않고 오히려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실을 전할 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다. 내가 너희들에게 전한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7-10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나에게는 말 못하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이것을 없애달라고 세번이나 주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다. 내 능력은 오히려 너의 약한 것, 곧 너가 가진 가시를 통해 더 온전하게 된다’는 답변을 주셨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해 내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은 내 강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약함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나의 삶의 자세는 그리스도를 위해 내 약함과 핍박과 환난과 궁핍함을 기뻐하는 십자가의 삶이다.”
16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의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이며,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말하는가? 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의 삶은 십자가의 삶이며,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의 약한 것들을 통해 나타난다고 말하는가? 바울이 고린도전후서를 쓸 당시 고린도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들은 다음과 같았다고 볼 수 있다:
(1) 어떻게 남보다 더 똑똑하고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는가? 남보다 더 어 떻게 말을 잘할 수 있는가? 그래서 고린도에서는 수사학, 즉 일종의 웅 변술이 발달했으며, 그것이 모든 교육의 핵심이 되었다. 어떻게 말로 상 대방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는지가 고린도 사람들의 커다란 관심사가 되었다.
(2) 어떻게 남보다 더 출세할 수 있겠는가? 고린도 사람들은 권력과 명예를 추구했고,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3) 어떻게 남보다 더 잘 살 수 있겠는가? 고린도에서는 돈이 있으면 무엇이 든지 할 수 있다는 사상이 팽배했고, 부를 통해 신분 상승을 꾀하는 풍 조가 있었다.
(4) 어떻게 남보다 더 용감한 자가 될 수 있는가? 고린도 사람들은 용기, 힘, 모험심 등을 자랑했다.
(5) 어떻게 자유로운 자가 될 수 있는가? 특별히 노예들, 여인들 가운데서 돈, 연줄을 통해서 자유를 회복하고자 했다. 여인들은 신전에 헌신함으 로써, 즉 신전 여인이 됨으로써, 남자들 우위에서는 자유로운 여인이 되 고자 했다.
이 모든 것은 당시 헬라 종교, 문화, 사상의 슬로건인 “영원한 것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지혜, 용기, 부, 명예, 자유, 힘 등은 숭상되고, 그 대신 겸손, 양보, 희생, 고통, 사랑 등은 배척되어 약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헬라 사상에서는 십자가의 복음, 성육신 등의 교리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되었다(고전 1:18).
17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고린도 교회의 근본 문제는 기독교 신앙을 당시의 헬라 문화 및 종교의 이상과 혼합시킨 것이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헬라 문화와 종교의 이상을 추구하는 도구로 삼았던 것 같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앙을 세상적 이상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다시 말해, 기독교를 지혜를 얻고, 부와 명성을 얻고, 자유를 쟁취하고, 신분의 변신을 추구하고, 힘을 얻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와 같은 고린도 교회의 잘못된 신앙과 삶을 해결하기 위해 고린도전후서에서 거듭 십자가의 복음과 십자가의 삶을 강조하면서 기독교가 추구하는 이상은 헬라 문화와 종교가 추구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즉 바울은 헬라 문화에서는 지혜, 용기, 명예, 출세, 자유, 부, 강함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추구되지만, 기독교가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세상에서 무시하고 배척하고 거부하는 겸손, 양보, 가난, 희생, 사랑 등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바울은 고린도전후서를 통해 기독교의 복음은 인간의 지혜와 자랑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십자가의 복음이며, 따라서 기독교인의 이상도 부, 용기, 출세, 명예, 자유 등이 아니라, 남을 더 보다 더 존경하고, 양보하고, 겸손하고, 희생하고, 사랑하는 십자가의 삶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던 것이다.37)
18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사실상 이와 같은 바울의 메시지는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천명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 10:45)는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1) 고린도전후서에 관한 중요한 주석들은 다음과 같다: C.K. Barrett,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BNTC; London: Black, 1968);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BNTC; London: Black, 1973); H.D. Betz, 2 Corinthians 8 and 9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1985); F.F. Bruce, 1 and 2 Corinthians (NCB; London: Oliphants, 1971); R. Bultmann, Der zweite Brief an die Korinther (KEK; Göttingen: Vandenhoeck, 1976); The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 (Minneapolis: Augsburg, 1985); H. Conzelmann, 1 Corinthians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1975); E. Fascher, Der Erste Brief des Paulus an die Korinther 1-7 (THKNT; Berlin: Evangelische, 1975); G.D.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87); V.P. Furnish, 2 Corinthians (AB 32A; New York: Doubleday, 1984); J. Héring, The First Epistle of Saint Paul to the Corinthians (London: Epworth, 1962); The Second Epistle of Saint Paul to the Corinthians (London: Epworth, 1967); P.E. Hughes, Paul's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61); J.J. Klauk, 1 KorintherBrief (Wuzburg: Echter, 1984); H. Lietzmann, An Die Korinther I/II (HNT 9; Tübingen: Mohr, 1949); R.P. Martin, 2 Corinthians (WBC 40; Waco: Word, 1986); J. Moffatt, The First Epistle of Paul to the Corinthians (MNTC; New York: Harper & Row, 1938); A Plummer, Second Epistle of St. Paul to the Corinthians (ICC; Edinburgh: Clark, 1915); W. Schrage, Der erste Brief an die Korinther (EKK 7, 2vols.; Zürich: Neukirchener, 1991, 1995); M.E. Thrall, 2 Corinthians 1-7 (ICC; Edinburgh: Clark, 1994); H.D. Wendland, Die Briefs an die Korinther (NTD 7; Göttingen: Vandenhoeck, 1964); H. Windisch, Der zweite Korintherbrief (KEK; Göttingen: Vandenhoeck, 1924); C. Wolff, Der erste Brief des Paulus an die Korinther 8-16 (THKNT; Berlin: Evangelische, 1982), Paul Barnett,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Grand Rapids: Eerdmans, 1997)
2) H.D. Betz, “Corinthians,” ABD 1, 1139; John Barclay, “Thessalonica and Corinth: Social Contrasts in Pauline Christianity,” JSNT 47 (1992) 49-74.
3) Strabo, Geography, 8.6.20; Ben Witherington III, Conflict & Community in Corinth.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on 1 and 2 Corinthians (Grand Rapids: Eerdmans, 1995), 8-11. 그런 이유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에서 천막 장사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See R. F. Hock, The Social Context of Paul's Ministry (Philadelphia: Fortress, 1980), 20ff.
4) Cf. D. Engels, Roman Corinth: An Alternative Model for the Classical Cit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1990); J. Murphy-O'Connor, “Corinth,” ABD 1, 1134-39. 당시 고린도 인구는 약 7-8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산된다.
5) Ben Witherrington III, Conflict & Community in Corinth, 8.
6) 로마의 역사가 Strabo, Geography, 8.6.20에 따르면, 고린도의 Aphrodite 신전에는 약 1천 명의 창녀들(sacred prostitutes)이 있었다. 자세한 것은 Ben Witherington III, Conflict & Com-
munity in Corinth, 13을 보라.
7) J. K. Chow, Patron Age and Power: A Study of Social Networks in Corinth (Sheffield: JSOT Press, 1992), 57ff.
8) 로마 역사가 Suetonius(Claud. 25.4)는 가리쿨라 황제(AD 37-41)의 뒤를 이은 글라우디오 황제(AD 41-54)가 Chrestus로 인해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 사이에 혼란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되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만일 Chrestus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Christus의 오기(誤記)라면, 우리는 적어도 40년대에 이미 기독교 복음이 로마 지역에 전파되어 그곳에 교회가 설립되었으리라는 것과, 누가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났을 때 그들의 회심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을 보아서, 그들이 바울을 만나기 전에 이미 로마 교회의 신자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학자들(가령, Murphy-O'Connor, St. Paul's Corinth: Texts and Archaeology, 1983, 129-52; Lüdemann, Das frühe Christentum nach den Traditionen der Apostelge-
schichte, 1987, 202-12)은 글라우디오 황제의 추방 명령이 그의 취임 직후인 AD 41년에 있었다고 추론하고 있으나, 대다수의 학자들은 AD 49년에 추방명령이 있었다고 본다. Cf. 최갑종, “바울과 성령: 로마서를 중심으로 하여,” [성령과 율법]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63-64; I.H. Marshall, Acts (Grand Rapids: Eerdmans, 1980), 293. 아마도 바울은 아굴라 집에 유하면서 장막 일을 통해 자비량 선교 사역을 한 것 같다. Ronald F. Hock, The Social Context of Paul's Ministry. Tentmaking and Apostleship (Philadelphia: Fortress, 1980), 50-65를 보라.
9) 우리는 그리스 델피(Delphi)에서 발견된 석문을 통해 갈리오(Lucius Junius Gallio)가 글라디 우스 황제 취임 12년째인 AD 51년 7월에 아가야 지역 총독으로 취임한 것을 알 수 있다. 델피 비문에 관해서는 J. Murphy-O'Connor, St. Paul's Corinth (Wilmington, 1983), 141-52; E. Ferguson, Backgrounds of Early Christianity, 2nd ed. (Grand Rapids: Eerdmans, 1993), 549-550을 보라. 고린도에 사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불법적인 종교를 퍼뜨리고 있다고 총독 갈리오에게 바울을 고소했지만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을 알지 못한 총독은 당시 유대인 들의 종교적인 분쟁에 개입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고소 내용을 기각했다.
10) 바울이 고린도에서 선교 사역을 할 때 그곳에는 이미 적지 않은 유대인 공동체가 조직되어 있었다(Philo, Leg. ad. Gaium, 281f).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글라디우스 황제가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을 추방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로마로부터 고린도로 이주해 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11) Donald Guthrie, New Testament Introduction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90), 432. 우리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수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당시 교회들이 모두 가정 교회들이었으며(고전 16:19절 참조), 한 가정에 모일 수 있는 최대 숫자가 50명 내외였을 것으로 볼 때,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이 그렇게 많았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만일 고린도 교회가 3,4개의 가정 교회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전체 교인 수는 150명 정도였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S. M. Pogoloff, Logos and Sophia: The Rhetorical Situation of First Corinthians (Atlanta: Scholars, 1992), 237ff; Murphy-O'Connor, St. Paul's Corinth을 참조하라.
12) W. Meeks, The First Urban Christians: The Social World of the Apostle Paul (New Haven: Yale University, 1983), 70ff; A.J. Malherbe, Social Aspects of Early Christi-
anity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29ff. 고린도 교회의 인종적 다양성은 물론 교인들의 사회, 경제, 문화적 배경의 다양성과 신분상의 차이점들이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어떤 다른 교회보다 복잡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안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See M. Y. MacDonald, The Pauline Churches: A Socio-Historical Study of Institutionalisation in the Pauline and Deutero-Pauline Writing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40; 룩 존슨 (Luke T. Johnson), 채천석 옮김 [최신 신약개론]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8), 377; 윤철원, “바울의 선교에 등장하는 상류계층,” [신약성서의 경제 윤리], 신약 논단 제4권, 한국신약학회 편집 (서울: 한돌사, 1998), 207-236.
13) D. Dinkler, “Zum Problem der Ethik bei Paulus: Rechtsnahme und Rechtsversicht, 1 Kor. 6,1-11,” ZThK (1952) 167-200; R.H. Fuller, “First Corinthians 6:1-11-An Exegetical Paper,” Ex Auditu 2 (1986) 96-104; J.D.M. Derrett, “Judgement and 1 Corinthians 6,” NTS 37 (1991) 22-36; A.J. Mitchell, “Rich and Poor in the Courts of Corinth: Litigiousness and Status in 1 Corinthians 6.1-11,” NTS 39 (1993) 562-586; Bruce W. Winter, “Civil Litigation in Secular Corinth and the Church. The Forensic Background to 1 Corinthians 6.1-8,” in Understanding Paul's Ethics, ed. Brian S. Rosner (Grand Rapids: Eerdmans, 1995), 85-103.
14) 이 문제에 대한 배경에 관해 Gerd Theissen, “The Strong and the Weak in Corinth. A Socialogical Analysis of a Theological Quarrel,” in Understanding Paul's Ethics, 107-128을 보라.
15) 고린도 교회가 복잡하고 문제가 많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우리가 바울의 어느 서신보다도 고린도전후서를 자세히 살펴 보아야 할 이유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와 이 교회에 주는 바울의 메시지는 후대 교회에 대한 좋은 거울과 지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6) R. Martin, 2 Corinthians (Waco: Word Books, 1986), xxxiv.
17) Margaret M. Mitchell, Paul and the Rhetoric of Reconciliation. An Exegetical Investigation of the Language and Composition of 1 Corinthians, 184-186; Ben Witherington III, Conflict & Community in Corinth.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on 1 and 2 Corinthians, 71-77.
18)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타락하고 범죄한 옛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론 적인 심판을 보았으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오순절의 성령 강림의 사건에서 하나님께서 일 찍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셨던 새 창조가 현 세계 안에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으며, 또한 약속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사건을 통해서 새 창조의 궁극적 인 완성을 내다보았다. 바울의 종말론적인 구조에 관해서는 Geerhardus Vos, The Pauline Eschatology(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2), 1-41; Herman Ridderbos, Paul. An Outline of His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75), 44-90.
19) Beverly R. Gaventa, “Mother's Milk and Ministry in 1 Corinthians 3,” in Theology & Ethics in Paul and His Interpreters: Essays in Honor of Victor Paul Furnish, ed. Eugene H. Lovering, Jr. Jerry L. Sumney (Nashville: Abingdon, 1996), 101-113, 103,
20) Fee, The Holy Spirit in the Letters of Paul, 83.
21) 이 구분은 Gordon D.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The Holy Spirit in the Letters of Paul (Peabody: Hendrickson, 1994), 4-24를 따른 것이다. Cf. D.P. Francis, “The Holy Spirit: A Statistical Inquiry,” ExpT 96(1985), 136-137.
22) 신약 전체적으로 보면 바울 서신 외에는 베드로전서에서만 2번(2:5,5) 나타난다.
23)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83: “At issue throughout the letter, therefore, in most of its various parts, is a basic conflict over what it means to be people of the Spirit.”
24) 한국 교회의 성령론에 관한 우리의 견해는 다음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최갑종, “바울과 성령,” [바울 연구 1] (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2), 117-166; [예수, 교회, 성령] (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2); [성령과 율법] (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4), 21-184; “신약의 성령론은 윤리 중심적이다,” [바울 연구 2] (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7), 361-405.
25) Cf. T. Holtz, “The Question of the Content of Paul's Instructions,” in Understanding of Paul's Ethics, ed. B.S. Rosner (Grand Rapids: Eerdmans, 1995), 55.
26) M. M. Mitchell, Paul and the Rhetoric of Reconciliation (Westminster: John Knox, 1991), 165.
27) L. Lambrecht, “The Most Eminent Way. A Study of 1 Corinthians 13,” in Pauline Studies (Leuven: Leuven University Press, 1994), 84.
28) Ben Witherington III, Conflict & Community in Corinth, 265.
29) J. Weiss, Der erste Korintherbrief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25), 311.
30) 바울의 사랑에 대한 정의 (4-7절)은, Lambrecht, “The Most Eminent Way (1 Cor 13),” 90-91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긍정(4a)(A), 부정(4b-6)(B), 긍정(7)(A') 등 교차대구법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31) Margaret M. Mitchell, Paul and the Rhetoric of Reconciliation, 166-171.
32) Hays, The Moral Vision of the New Testament. A Contemporary Introduction to New Testament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6), 27.
33) C. A. Holladay, “1 Corinthians 13: Paul as Apostolic Paradigm,” in Greek, Romans and Christians, ed. D. L. Balch, E. Ferguson, and W. A. Meeks (Minneapolis: Fortress, 1990), 80-98.
34) Ben Witherington III, Conflict & Community in Corinth, 268: “For Paul the essence of true spirituality is self-sacrificial love, not gifts, knowledge, or miraculous power.”
35) 바울은 사랑을 가장 좋은 은사로 간주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모는 은사를 사용하는 안내와 규범이요, 그리스도를 위한 ‘가장 좋은 삶의 길’(e[ti kaq j uJperbolh;n oJdo;n)임을 강조한다. 여기 e[ti kaq j uJperbolh;n oJdo;n는 비교급으로보다 최상급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은사는 사람에 따라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이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36) Frank J. Matera, New Testament Ethics. The legacies of Jesus and Paul (Westminster: John Knox, 1996), 153.
37)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십자가의 복음과 십자가의 삶에 관한 메시지는 오늘의 한국 교회에도 절실한 메시지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위기는 고린도 교회의 위기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의 위기는 교회가 세상적 이상과 방법을 추구한 데 있었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는 기독교 신앙을 세상적인 이상인 부, 명예, 출세, 건강, 지혜, 자유를 얻는 수단으로 간주한다. 교회에 나오면 출세한다, 사업에 성공한다, 돈 잘 번다, 건강해진다, 공부 잘하게 된다는 식의 주장들을 높아져 가지만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기독교적 문화와 이상의 추구는 소멸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남보다 더 똑똑해야 한다, 출세해야 한다, 강해야 한다, 공부를 잘해야 한다,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 돈 많고 출세한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세상적 이상을 쟁취하는 자들이 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남보다 성적이 뒤떨어지거나, 학교에서 매맞고 오거나 하면, 배가 아프고 분이 난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기독교의 이상인 겸손, 양보, 희생, 사랑 등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 자신이 그것을 우리의 삶의 이상으로 삼아 생활화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자신과 한국 교회의 위기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을 말하면서도 참으로 무엇이 십자가의 복음인지, 무엇이 십자가의 삶인지 바로 알지 못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한국 교회의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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