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갈라디아서1)
1. 갈라디아서의 중요성
사도 바울이 선교 초기에 쓴 것으로 알려진 갈라디아서는, 비록 6장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짧은 서신임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갈라디아서의 저명한 주석가 중 한 사람인 H.D. Betz가 말한 것처럼, 이 세상에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기독교 문헌 중 하나다.2) 사실상 갈라디아서는 기독교 역사의 기원과 뿌리를 밝혀 줄 수 있는 현존하는 가장 초기의 기독교 문헌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지나간 2천년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해 가장 결정적이고 큰 영향을 미친 신약성경 중의 일부다.3) 그렇기 때문에 갈라디아서는 바울 신학은 물론 기독교 정체성과 신학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출발점과 안내서로 간주될 수 있다.4)
2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자신의 사랑하는 ‘Katie von Bora’(루터의 아내 이름)라 부를 만큼 소중히 여겼으며(Luther, Werke, 40:2), 자신의 종교개혁의 신학적 원리인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근거를 갈라디아서에서 찾았다.5) 지난 1980년대부터 E.P. Sanders, J.D.G. Dunn 등을 통해 세계 신약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새로운 바울 연구’는 오늘날 또 다시 갈라디아서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6) 왜냐하면 새로운 바울 연구의 당위성 여부가 갈라디아서의 해석 여부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7)
갈라디아서는 누가, 누구에게,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목적을 위해, 무엇을, 그리고 어떠한 문학적 형식으로 쓰여졌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은 갈라디아서 연구를 시작할 때, 누구든지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들이다. 하지만 갈라디아서의 서론에 해당되는 이런 질문들과 관련해서 솔직하게 말한다면, 갈라디아서가 사도 바울에 의해 쓰여졌다는 한가지 사실 외에는 오늘 신약학계에서 완전하게 합의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시 말해서, 갈라디아서가 쓰여진 연대, 수신자들, 역사적 상황, 바울의 적대자들, 쓰여진 편지의 문학 형식, 중심적인 주제 등의 문제들은 아직도 신약학계에서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8) 그렇다면 사정이 그렇게 된 주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갈라디아서가 그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왜 이런 문제들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것일까? 그 주된 이유는 우리가, 사실상 갈라디아서가 바울에 의해 쓰여졌다는 한 가지 사실 외에는, 그 서신과 관련해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거의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 Betz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쓴 편지인 갈라디아서를 제외하고는, 갈라디아에 있었던 교회에 관한 그 어떤 자료도 남아 있지 않다. 갈라디아 교회들이 정확하게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갈라디아 교회들이 존재할 당시 그들은 어떠한 종교적, 문화적 환경을 갖고 있었는지, 혹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의 편지를 읽은 다음 어떻게 반응했는지 등에 관해 답변해 줄 수 있는 그 어떤 고고학적 발견도, 성곽의 유적도, 비문도, 비석도, 혹은 그밖에 어떤 다른 역사적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9)
3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물론 갈라디아서 연구와 관련해 갈라디아서의 전체적인 그림을 보여 줄 수 있는 이러한 문제들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그림에 대한 선이해(先理解) 없이 본문에 직접 들어가는 것은 마치 안내 지도 한 장 없이 거대하고 복잡한 서울로 직접 진입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갈라디아서 연구에서는 서론의 문제들을 길게 취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갈라디아서 연구에 긴요한 몇 가지 핵심적인 부분에 관해서만 우리의 입장만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이 부분에 대해 보다 깊은 연구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미 시중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표준적인 신약개론 책이나 성경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갈라디아서에 관한 항목들을 참고하길 바란다.10)
2. 저자 문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썼다는 것은 최근의 신약학계에서 공인된 사실이다.11) 지난 세기에 B. Bauer, C. Clemen, L. G. Rylands, J.C. O’Neill 등 몇몇 학자들이 한때 갈라디아서의 바울 저작권을 의심하긴 했으나, H. Betz가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명쾌하게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논증은 불충분하고 역사적인 근거 제시도 빈약하다.12) 무엇보다도 갈라디아서 자체가 바울의 저작권을 강력하게 옹호하고 있다. 갈라디아서가 바울 자신의 편지임을 입증해 주는 구체적인 증거들을 우리는 갈라디아서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의 서두인 1:1에 바울은 자신의 이름을 제일 먼저 기록해 자신이 편지를 보내는 당사자임을 밝히고, 결론 부분인 6:11 이하에서 자신의 친필을 첨가함으로써 이 사실을 재확인한다.
4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이뿐만이 아니다. 서두와 결론 사이의 여러 곳에서 자신만이 기록할 수 있는 개인적인 독특한 일들을 기록함으로써 이 사실을 더욱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1:13-17에서 과거에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일과 복음 전도자로서의 부르심을, 1:18-19에서 자신의 첫번째 예루살렘 방문과 베드로와 야고보와의 만남을, 2:1-10에서 자신의 두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2:11-16에서 자신이 베드로를 책망했던 일을, 4:13-16에서 자신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했던 일과 갈라디아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호의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갈라디아서에 나타나는 신학적 내용과 문체 등이 전통적으로 바울의 편지로 알려져 온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의 신학적 내용 및 문체 등과 일치하는 것은 갈라디아서가 바울이 쓴 편지임을 강력하게 시사해 준다. 따라서, Betz가 말하는 것처럼, “오늘날 신약학자들은 갈라디아서의 바울 저작권을 의심하지 않는다.”13) 그러므로 우리는 갈라디아서의 바울 저작권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14)
3. 수신자 문제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특정한 역사적 정황에 처해 있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다(1:2; 3:1). 그렇다면 바울이 누구를 대상으로 이 편지를 썼으며, 이 편지를 받은 수신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수신자들을 ‘갈라디아 교회들’(tai`" ejkklhsivai" th`" Galativa"), 또는 ‘갈라디아 사람들’(Galativai)(갈 1:2; 3:1)로, ‘형제 자매들로’(ajdelfoi)(1:11; 3:15; 4:12,
28,31; 5:11,13; 6:1,18), ‘나의 작은 자녀들’(tevkna mou)(4:19)로 부른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게바(1:18; 2:7,8,9,11,14), 야고보(1:19; 2:9,11), 요한(2:9); 바나바(2:1,9,13), 디도(2:1), 아브라함(3:6,7,8,9,16,18,29; 4:22), 하갈(4:24,25), 이삭(4:28) 등을 언급하고, 그밖에 바울의 반대자들을 가리키는 익명의 사람들을 8번 언급하지만(1:7; 3:1;4:17; 5:7,10,12; 6:12,13), 오직 갈라디아 사람들에 대해서만 2인칭 호격을 사용한다.15) 바울이 이 수신자들을 “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자들”(4:8)로,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은 자들”(3:2-5)로 말하는 것을 보아서, 우리는 이 수신자들이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단정할 수는 있다.
5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그러나 이 갈라디아 사람들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지난 100년 동안 신약학계에서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또한 이 문제에 관해 수많은 연구 논문들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일치된 해답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즉 바울이 지칭하는 ‘갈라디아 사람들’이라는 말은 바울 당대 소아시아 중북부(현재의 터어키 지역)에 거주하던 ‘갈릭’(Gallic) 주민들을 지칭하는 인종적이며 영토적인 의미인가(북부 갈라디아설: J.B. Lighfoot, J. Moffatt, W.G. Kümmel, H.D. Betz, Schlier, Oepke, Mussner, Lührmann), 아니면 바울 당대 로마의 ‘갈라디아’라는 행정구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행정적인 의미인가(남부 갈라디아설: W.M. Ramsay, E. de W. Burton, F.F. Bruce, R.N. Longenecker, C.J. Hemer, J.D.G. Dunn, Matera, Mitchel, Hansen)?16)
만일 전자가 옳다면, 우리는 사도행전에 의존해(행 16:6;18:23)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제2차 선교 여행 때 세워진 교회에 보내진 편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후자가 옳다면,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제1차 선교 여행중(행 13,14장)에 세워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교회에 보내진 편지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 저자는 16:6에서 바울이 제2차 선교 여행중에 갈라디아 땅을 다녀갔다는 말은 하지만, 그곳에서 복음을 전파하여 직접 교회를 세웠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 다만 제3차 여행중에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들을 굳게 하니라”(행 18:23)고 간략하게 언급하는데, 이 표현을 바울이 제2차 선교 여행시에 세운 교회 방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본문 그대로 그 지역에 흩어져 있는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본문의 갈라디아라는 말 역시 바울의 제1차 선교 여행지인 로마 제국의 행정상의 갈라디아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6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반면에 사도행전 저자는 13-14장에서 바울의 제1차 선교 여행중에 로마의 행정 지역인 갈라디아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 곳에서 직접 교회를 세웠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자체가 유대주의자들 때문에 교회에 혼란이 일어났던 것에 대해 말하는데, 유대인들은 북부 갈라디아보다 남부 갈라디아에 훨씬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도 남부 갈라디아설을 지지해 준다.17) 이와 덧붙여 바울이 편지를 쓸 때마다 주로 수신자들을 행정상의 거주 지역을 배경으로 부르는 점(고전 16:19; 고후 8:1; 9:2),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취급하는 핵심적인 내용이 그의 초기 사역의 내용인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 문제와 관련된 갈라디아 교인들의 신앙과 삶의 문제라는 점 등도 남부 갈라디아설을 지지해 준다고 하겠다.18)
따라서 우리는 침묵의 논증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북부 갈라디아설보다 역사적인 증거에 근거를 두는 남부 갈라디아설을 따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즉 갈라디아서의 수신자들은 사도 바울이 제1차 선교 여행시에 세운 교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갈라디아서에서 중요한 문제는 수신자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부 갈라디아설을 따르든, 아니면 북부 갈라디아설을 따르든, 그것은 갈라디아서 이해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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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울의 반대자들
어떤 면에서 갈라디아서는, Dunn이 말하는 것처럼,20) 바울 서신들뿐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논쟁적인 편지라고 할 수 있다.21) 바울은, 이례적으로 감사에 대한 언급이 생략된 간략한 인사에 이어(1:1-5), 편지의 서두에서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파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복음으로 대체시키거나 변질시키고 있는 익명의 반대자들에 대해 저주를 선언한다(1:8-9). 그리고 바울은 여러 곳에서 계속해서 이 익명의 반대자들을 언급한다. 즉 3:1에서는 이들을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하는 자로, 4:17에서는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해 좋지 않은 목적을 가진 자들로, 5:7에서는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진리를 따르지 못하게 하는 자들로, 5:10에서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혼돈케 하는 이들로, 5:12에서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불안하게 하는 자들로, 6:12에서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려는 자들로, 6:13에서는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육을 통해 자랑하도록 만들려는 자들로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바울은 갈라디아서 곳곳에서 익명의 반대자들에 관해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적지 않은 학자들은,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자신이 교회들을 개척하고 떠난 후 갈라디아를 찾아온 반대자들 때문에 제기된 위기 상황을 직시하고, 그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22)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메세지를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갈라디아 교회를 혼란하게 한 이들이-비록 그들이 갈라디아서의 주인공은 아니며, 또한 바울이 그들을 목표로 갈라디아서를 쓴 것도 아니라고 할지라도-누구이며, 그들이 무엇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를 찾아왔으며, 그들의 핵심적인 주장은 무엇이며, 갈라디아 교인들은 무슨 연고로 이들의 주장에 미혹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23)
8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파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고(1:7; 2:5), 그 복음을 주신 하나님(그리스도)의 은혜를 망각하게 하고, 이 은혜의 복음을 전파한 바울의 사도성을 훼손시키고, 교회를 혼란케 하고(1:1,6-12), 교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고, 교회 안에 분쟁과 분리와 다툼을 일으키고 있는(5:15,20,26; 6:12-13) 이 익명의 ‘반대자들’(1:7; 5:10,12‘ 6:12-13)은 과연 누구인가?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는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는 바울 자신이 갈라디아서에서 이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에게는 갈라디아서 외에는 이들에 관한 독립된 자료나 그들 자신의 문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갈라디아서 자체의 구조나 분문 분석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들의 정체성과 주장을 재구성해야 한다. 이런 점에 있어서 Barclay가 제안하는 것처럼 소위 ‘거울-독법’(Mirror-Reading)이-비록 그 자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어느 정도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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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갈라디아서의 문학적 구조를 취급하면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신앙과 삶의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을 시정하기 위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낸 권면적이고 목회적인 편지다.25) 문제는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가 갈라디아 교회에 찾아 온 바울의 반대자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혼란하게 하고 교회 안에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반대자들의 주장을 논박하고, 그들의 주장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밝힘으로써,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거짓된 주장에서 떠나 바울 자신의 가르침에 굳게 서도록 하기 위해 쓴 논쟁적-권면적 편지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바울 당대의 헬라-로마 사회에서 논쟁적-권면적 편지 양식에서 많이 활용되는 수사학적인 방법 중 하나는 논쟁의 상대방이 사용하는 주장 방법과 그들의 주장의 내용을 사용해 상대방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논쟁적-권면적인 편지에서는 자연히 논쟁을 하는 당사자의 두 주장이 날카로운 대조를 이룰 수밖에 없다. 실제로 갈라디아서는, 바울 서신 중 그 어떤 서신에서보다도, 바울 자신의 주장과 그가 반대하는 주장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갈라디아 교회의 신자들이 더 이상 반대자들의 주장에 미혹되지 않고 바울이 전파한 복음의 진리에 굳게 서도록 하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이와 같은 날카로운 대조를 통해 반대자들의 주장의 허점과 잘못된 점을 들추어낸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의 복음/(반대자들의)다른 복음(1:6-10); 믿음에 의한 의/율법의 행위에 의한 의(2:15-16; 3:1-14); 그리스도 안에서의 양자됨의 자유 상태/율법과 세상의 초등 원리의 지배 아래 있는 노예 상태(3:23-4:31); 성령/육(5:13-6:10); 그리스도/할례(5:1-12; 6:12-16) 등의 날카로운 대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자체의 분석을 통해서 반대자들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정당한 방법으로 인정될 수 있다.26)
10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어떤 사람들은27) 이 반대자들을, 구약 창세기 17:9-14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할례 언약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아,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축복을 상속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처럼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갈라디아 교회 내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본다. 그러나 대부분의 바울 연구가들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1) 반대자들에게 3인칭 호격을 사용해 2인칭 호격을 사용하는 갈라디아 교인들과 엄격하게 구분하는 점(1:7-9; 3:1; 4:17; 5:7,12; 6:12-13), 2) 자신의 유대적 배경을 부각시켜 유대적 관점에서 유대인의 핵심적인 문제인 할례와 율법을 논쟁의 주제로 삼고 있는 점(3-4장), 3)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에 직접 들어가기 전에 예루살렘에서의 회합(2:1-10)과 안디옥사건(2:11-21)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관계 문제를 취급하는 점 등을 들어, 이들 반대자들을 갈라디아 교회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유대인들로 본다.28)
그렇다면 이들 유대인들은 어떤 자들인가? 이들은 무엇 때문에 바울이 설립한 갈라디아 교회를 찾아갔는가? 갈라디아서 본문에 대한 수사학적인 분석에 의존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이들이 복음의 이름을 가진 것-바울이 볼 때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일지라도-을 전파한 것을 보아서, 이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둘째, 이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유대인들의 민족적, 종교적, 사회적 신분의 표지들인 할례와 율법을 지키도록 강요하고, 아브라함의 경우를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고, 또한 예루살렘을 강조한 것을 보아서,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와 관련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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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이들이 이방인인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들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동등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 곧 일찌기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에 대한 믿음에 더하여 유대인처럼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한 것을 보아서,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율법과 할례 등 유대 민족의 종교적, 민족적, 사회적 정체성의 보루들을 기독교 신앙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고수하고 전파하려고 힘쓰는 자들이었다(참고 사도행전 15장). 많은 신학자들이 이들을 ‘유대주의자’(Judaizers)로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29)
하지만 바울이 볼 때, 이와 같은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은 바울이 전파한 복음은 물론 그 자신의 복음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반 복음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은 결국, 이방인 신자들이 유대인과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 있어서,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축복을 누리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새 시대를 여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 시대의 유산인 율법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필요 조건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리스도의 자리를 율법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30)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의 거짓된 주장에 미혹되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제기되는 논쟁의 이슈를 초대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정면 대립에서 야기된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초대 기독교 안에서 제기된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관계 문제,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교회 안에서 제기한 기독교와 유대교의 연속성 문제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다시 말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제기하는 핵심적인 문제 중의 하나가 흔히 주장되어 온 것처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분 없이 누구든지 그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순간부터 그는 유대교로부터 완전히 떠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저들의 민족적, 종교적, 사회적 정체성인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고, 유대적 절기와 음식법을 지키는 것을 직접 문제 삼지 않는다. 흔히 간주되어 왔던 것처럼,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유대인의 정체성을 배격하는 반 유대교 운동(Anti-Judaism)을 직접적으로 제창하지 않는다.31) 물론 이것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유대교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울은 그 어떤 서신에서보다도 갈라디아서에서 유대교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다. 그러나 이 서신에서 바울이 직접 문제 삼는 것은, 유대주의자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종말론적인 구속 사건 이후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삶을 누리는 데 있어서 필수 조건이 될 수 없는 할례나 율법을 강요하고 있는 점이다.
12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바울의 관점에서 볼 때, 유대주의자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유대인들의 삶의 정체성의 한 부분에 불과한 할례나 율법의 규례들을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삶을 누리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율법과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선포한 복음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요, 이러한 복음을 전파한 자신을 거짓된 복음 전파자로 만드는 것이요, 더 나아가서 이와 같은 바울의 복음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의 오심까지 무효화시키는 것이었다(2:21).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일어난 상황을 단순히 갈라디아 교회뿐 아니라 초대 기독교 안에서 자신의 복음과 사도직과 선교의 사활과 연결되는 중차대한 문제로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유대주의자들은 무엇 때문에 할례나 율법의 행위들을 바울의 이방인 교회 신자들에게까지 강요했는가? 무엇 때문에 이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와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바울의 복음을 거부하고, 유대교의 유산을 이방인 기독교 안에서까지 유지시키려고 노력했는가? 이들 유대주의자들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이후로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어 왔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 이후에도 할례와 율법의 행위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들이 된다고 믿었던 ‘율법주의자들’이었는가, 아니면 단순히 유대 민족의 우월한 선민의식과 정체성을 끝까지 고수하려는 ‘민족주의자들’이었는가?
13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1977년 E.P. Sanders는 그의 저서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에서 예수님 당대의 유대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어 왔던 것처럼, 율법의 행위나 인간의 공로를 수단으로 의와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율법주의’가 아니라(not getting in), 오히려 이미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주어지고 약속된 의와 구원과 축복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but staying in), 즉 은총에 합당한 응답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힘쓰는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라고 주장했다.32) 이 문제는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신약학계에서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이 문제를 자세하게 토론할 수는 없다.33) 다만 여기서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은, 우리가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를 ‘언약적 신율주의’로 보든, 아니면 ‘율법주의’로 보든,34)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 및 율법의 행위들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이들을 일종의 율법주의자들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해서라는 ‘이신칭의’ 교리를 거듭 강조하면서 할례와 율법을 의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으로부터(예를 들어, 갈 2:16), 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할례를 양립할 수 없는 관계로 거듭해서 제시하는 것으로부터(예를 들어, 6:12-14), 또는 이들이 전한 복음을 복음이 될 수 없는 것으로 단정하는 것으로부터(1:6-9), 또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과 병행하는 육을 따르지 말고 그리스도와 병행하는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 것을 권면하는 것으로부터(5-6장), 또는 육적인 요소를 자랑하는 자들을 향해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공로적 행위를 철저히 거부하는 것으로부터(6:13-14), 우리는 바울의 반대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더하여 할례와 율법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유대인들과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삶을 누리는-또한 의와 구원에 이르는-필수적인 조건으로 제시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그와 같은 주장을 하지 않았다면, 바울 역시 그와 같은 강한 반대의 주장을 할 리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4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만일 이들 유대주의자들이 실제로 바울의 선교지인 갈라디아까지 찾아와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와 같은 주장을 했다면,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그들 자신에 대한 자기 인식으로부터 분리시키기는 어렵다. 그들이 그와 같은 주장을 했다면, 그들 역시 할례와 율법을 여전히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삶을 결정하는 보루로, 그리고 의와 구원에 이르는 필수적인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들이, 그들의 신앙과 삶의 보루가 되는 당대 팔레스틴 유대교가 그와 같은 주장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 임의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와 같은 주장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배후에 있는 당대 팔레스틴 유대교가 구원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완전히 배제하는 ‘율법주의’만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구원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는 뜻도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의 중요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 문제에 있어서, 또한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삶을 누리는 데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필요하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그들은 구원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에 곁들여 인간의 선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함께 여전히 할례와 율법의 행위가 요청된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결코 그와 같은 요구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만일 그들이 할례와 율법에 구원의 의미를 부여 하지 않았다면, 바울도 그들에게 저주를 선언할 만큼 반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그들을 그토록 반대한 주된 이유는 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에다 다른 무엇을 더함으로써 그의 복음을 사실상 복음 아닌 것으로 변질시키려 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의와 구원의 필수적이고 완전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할례와 율법 등 인간적인 행위들을 추가함으로써 결국 구원을 하나님과 인간의 합작품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35) 사실상 Sanders가 말하는 ‘언약적 신율주의’도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율법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인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최근에 Laato가 Sanders가 말하는 ‘언약적 신율주의’ 안에도 이미 율법주의(legalism)가 들어 있다고 말한 것은 정당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36)
15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모름지기 이와 같은 종교 사상을 갖고 있었던 바울의 반대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율법이나 할례와 상관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유대인들과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구약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 할례를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제시하신 것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요, 할례와 율법에 근거를 둔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 민족의 독특성을 무효화시키는 것이요, 유대 민족의 메시야로 오셔서 친히 할례와 율법을 준수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왜곡시키는 것이요, 율법을 지키기 위해 주어진 성령을 모욕하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모독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바울의 메시지와 그의 선교 사역은, 유대인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에 의해 유대교 안에서 시작된 예수 운동을 이 운동의 뿌리인 유대교와 단절시키는 것이요, 바울의 이방 교회를 모든 교회의 어머니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단절시키는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써 유대교는 물론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독교 운동 자체를 훼손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바울은 참된 사도일 수가 없었고, 그가 전파하는 복음도 참된 복음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시정해야 했고, 바울의 잘못된 가르침 위에 세워진 갈라디아 교회들을 바르게 가르쳐서 다시 세워야만 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자연히 갈라디아서에서 제기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적 주장’과 Sanders가 문헌조사를 통해 밝힌 예수와 바울 당대의 ‘언약적 신율주의’와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Sanders는 예수와 바울 당대의 광범위한 유대 문헌 조사를 통해,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의와 구원에 도달하기 위해서 할례와 율법을 지키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이미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주어진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약속된 축복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할례와 율법을 지키는 ‘언약적 신율주의’라는 점을 강하게 주장했다.
만일 주후 1세기의 유대교가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언약적 신율주의’였다는 Sanders의 주장이 정당하다면, 우리는 이제 바울이 왜 유대주의자들을 비판했으며, 결국 그들의 배후에 있는 자신의 선조들의 종교인 유대교와 결별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몇 가지 답변을 모색해 보아야 한다.
하나의 답변은, Räisänen의 주장처럼,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반대자들을 율법주의자들로 규정한 것은, 그들이 실제로 율법주의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율법주의자들인 것처럼, 혹은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율법주의적인 종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율법주의적인 종교인 것처럼 왜곡했던 것이거나, 아니면 유대주의자들이나 유대교에 대한 바울의 비판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규정이라기보다 단순한 수사학적 표현이었다고 보는 것이다.37)
또 하나의 답변은, Sanders 자신이 주장하는 것처럼, 바울이 율법과 유대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실제적으로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수단으로 삼는 율법주의였기 때문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다메섹 사건을 통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극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유대교의 문제를 의식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해결을 발견하고-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유대교를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38) Sanders 자신의 유명한 말로 요약한다면, “바울의 유대교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은 단순히 유대교가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39) 로 보는 것이다.
16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또 하나의 답변은, Dunn이 주장하는 것처럼,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유대교나 율법 자체가 아니라 다만 바울 당대 유대 민족의 정체성 역할을 하는 율법, 할례, 유대 음식법 등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을 해치는 사회적 기능에 대해 비판했다고 보는 것이다.40) 다시 말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를 믿음에 의한 의와 대립시킬 때, 그것은 실제적으로 유대주의자들이 율법의 행위를 의와 구원의 수단으로 삼은 율법주의자나 공로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의 정체성에 불과한 또한 지금까지 유대인들의 민족적 우월성과 자랑의 근거가 되어 왔던 것에 불과한 율법의 행위들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들을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을 해치는 장애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답변은, 홍인규의 주장처럼,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자신의 반대자들을 율법주의자들로, 또한 당대의 유대교를 율법주의적 종교로 규정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바울을 잘못 이해하여 바울의 반대자들을 율법주의자들로, 바울 당대의 유대교를 율법주의적 종교로 규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41)
비록 이런 답변들 모두가 부분적으로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이들 중 어느 하나에 대해서도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할 수 없다. 우리는, Barrett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들이 주후 1세기의 유대교와 율법을 바울 자신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42) 그리고,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Laato는 Sanders의 문헌 조사를 재검토한 후,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언약적 신율주의였다는 점에 관해서는 동의했지만, 이 언약적 신율주의 안에는 구원 문제와 관련해 이미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은총에 덧붙여 필연적으로 추가되어야 한다는 율법주의가 공존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Laato의 이런 지적은 사실 우리가 이미 수년 전부터 Sanders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제기한 바 있었다.43) 따라서 우리는 갈라디아서에 나타나는 바울의 율법 비판을 바울이 자기 당대의 유대교나 율법을 오해했다거나 혹은 단순히 수사학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미 말한 것처럼, 우리는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반대자들을 율법주의자들로 규정한 전통적인 견해는 바울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한 것이라고 본다. 결국 여기서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의 정체성 문제가 결정적인 이슈로 떠오른다.
17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우리는 Sanders의 주장에 반대해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를 ‘율법주의적 종교’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Sanders의 주장대로 ‘언약적 신율주의’로 보아야 하는가? 우리는 주후 1세기 유대교를 새로운 바울 전망의 연구가들이 주장하는 ‘언약적 신율주의’로든 혹은 전통적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율법주의’로든 어느 한쪽으로 획일화시키는 것에 반대한다. 사실상 우리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기 전에 이 용어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의 규정도 필요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주전 3세기부터 주후 1세기까지의 현존하는 여러 유대 문헌들에 대한 최근의 검토는, 주후 1세기 유대교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 따라서 어느 한 계층의 문헌 조사를 통해 언약적 신율주의나 혹은 율법주의적 특성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을 확대해 바울과 예수 당대의 유대교가 전체적으로 ‘율법주의’ 혹은 ‘언약적 신율주의’였다고 규정할 수는 없다.44)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기독교 안에서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 교회 등 여러 교파들과 신학적 특색을 가진 교회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과 예수 당대의 유대교 안에도 강조점을 달리하는 여러 종파와 운동들이 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기독교 안의 이와 같은 다양성을 외면하고 기독교의 정체성을 획일화시킬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바울 당대의 유대교에 대해서도 ‘언약적 신율주의’ 혹은 ‘율법주의’라는 말을 획일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Sanders 자신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45) [제4 에스라]와 같은 문헌은 당대의 유대교가 언약적 신율주의보다 오히려 율법의 행위에 의한 의와 구원을 주장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지역이나 계층 혹은 종파의 사람들은 언약적 신율주의가 아닌 율법주의를 유대교의 주된 특색으로 신봉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때 철저한 율법 신봉자이며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적어도 그의 반대자들을 가리켜 율법주의자들로 규정했다면, 우리가 나중에 바울의 다른 본문들(가령, 로마서 9: 32-10:4, 빌립보서 3:4-9)을 검토할 때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우리는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부분적이나마 율법주의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중 그 누가 감히 한때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유대교에 심취해 있었고, 누구보다도 뛰어난 유대교 학자였던 바울 자신보다 바울 당대의 유대교를 더 정확하게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제 우리는 두 가지 극단을 동시에 피해야 할 것이다. 첫째는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율법주의가 아닌 언약적 신율주의라는 전제 아래서 갈라디아서를 위시하여 바울의 모든 서신들을 새롭게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둘째는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율법과 할례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토대로 바울 당대의 모든 유대교를 구원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을 전적으로 외면하는 율법주의적 종교로 규정한 후 바울이 유대교를 정면적으로 거부했다고 추론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주후 1세기의 비기독교적 유대 문헌들이 복음서와 바울 서신의 연구에 매우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복음서나 바울 서신 해석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본다. 바울 서신은 어디까지나 먼저 바울 서신 그 자체로 해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갈라디아서는 우선적으로 갈라디아서 그 자체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갈라디아 교회에 찾아온 바울의 반대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모든 사도들이나 신자들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하는 자들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이나 갈라디아서 2장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바울과 이들 사이에 복음에 대한 근본적인 불일치가 있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46) 오히려 우리는, 마치 유대교 안에 언약적 신율주의자들과 함께 율법주의자들이 있었던 것과 같이, 예루살렘 교회 안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의와 구원을 위한 충분한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자들과 함께 할례와 율법을 의와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신봉하는 자들이 있었을 것이며, 바로 그들이 바울의 반대자들에 해당된다고 본다. 물론 이들이 유대교 안의 율법주의자들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새롭게 검토해 볼 문제다.
18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만일 지금까지 말해 온 것이 사실이라면, 갈라디아 교인들은 어째서 이와 같은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에 미혹되었던 것일까? 바울은 갈라디아서 1:6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쫒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고 말하는데, 왜 갈라디아 교인들은-비록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바울이 전한 복음을 떠나 유대주의자들이 전한 다른 복음을 쫒게 되었던 것일까? 바울은 갈라디아서 3:3에서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어떻게 육체로 마치려 하느냐?”(역시 5:16; 6:8 참조), 또한 4:9 이하에서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고 말하는데, 왜 갈라디아 교인들은 초등 학문으로 되돌아가 유대인들의 절기를 지키려고 했던 것일까? 바울은 다시 갈라디아서 5:3 이하에서 이들을 가리켜 ‘할례를 받는 자,’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자들’이라고 말하는데, 왜 이들은 할례를 받고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했던 것일까?
갈라디아서를 성령에 대한 일종의 변증서로 보려고 하는 주석가 Betz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에 미혹되었던 주된 이유가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일어난 ‘육’의 문제, 곧 도덕적 무질서에 있었다고 가정한다. Betz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갈라디아 교인들은 처음에 바울의 복음을 통해, 곧 복음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을 통해, 자신들이 이 세상의 초등 원리에 대한 예속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통해 우상 숭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당대의 커다란 사회적 장벽이었던 인종과 신분과 남녀의 장벽까지 해소되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갈 3:28 참조). 즉 그들은 복음을 통해 열광주의적인 기쁨을 누리게 되었고, 당대 사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인 장벽이 제거되어 자유의 물결이 넘치는 이상적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들 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초기의 뜨거움은 점차 소멸되고 그들은 복음과 성령을 통해 자기들에게 주어진 그 자유로 인해 발생한 새로운 문제-육의 문제인 무질서와 도덕적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 육의 문제를 바울이 전해 준 자유의 복음과 그 복음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을 통해 해결하지 못하고 고심하고 있었다. 바로 이 때에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도착했고, 그들은 바울이 해결할 수 없었던 그 문제를 율법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어 유대인의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무질서를 율법을 수단으로 삼아 극복함으로써 구원의 높은 단계에 도달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Betz에 따르면, 갈라디아 교회의 핵심적인 문제는 할례 문제가 아니고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논증하려고 하는 핵심적인 문제도 육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율법이 아닌 성령을 제시하는 것이었다.47)
또 다른 견해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사회적 정황으로부터 그 문제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이미 J.M.G. Barclay를 위시하여 몇몇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48)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인 것으로 인하여 기존의 소속 공동체로부터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소속 공동체로부터의 단절은 가족, 친척, 친구, 이웃으로부터의 단절과 소외를 포함했다. 다수 공동체로부터 단절된 이 소수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그들의 사회적 소외와 분리를 채워줄 수 있는 다른 다수의 공동체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갈라디아 교회에 찾아 온 유대주의자들과 그들이 소속한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이와 같은 사회적 소외감을 해소시켜 줄 대안으로 간주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19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우리는 위의 두 가지 제안이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며, 또한 실제적으로 그런 요인이 작용할 수 있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된 결정적인 이유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3:3이 갈라다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된 이유를 밝혀 주는 중요한 구절 중 하나라고 본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알지 못했거나, 혹은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데 있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을 통해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복음을 통해서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리고 복음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을 체험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바울을 천사나 그리스도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자유와 동시에 십자가의 삶을 요구한다는 것과, 성령은 열광주의적인 기쁨과 카리스마를 제공할 뿐 아니라 그들의 전 삶을 사랑과 봉사의 삶으로 바꿀 것을 요구한다는 것과, 바울이 전한 이신칭의 복음은 ‘이미’뿐만 아니라 ‘아직’의 완성을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것임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 요약하자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에게 가져다 주는 신분과 삶의 변화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별히 그들은 그들의 신분과 삶이 성령으로 시작할 뿐 아니라 성령에 의해 완성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안디옥 사건에서 베드로가 그가 알고 받아들인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동하지 않았던 것처럼,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살지 못했다. 그들은 성령을 받기는 했으나 그 성령을 따라 바르게 살지 못했다. 갈라디아서 3:3에서 바울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들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성령이 아닌 육체로, 즉 유대주의자들이 요구하는 할례와 율법의 도움으로 완성에 이르려 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안디옥 사건에 나타난 베드로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 보여 줌으로써 그들 자신의 문제를 살펴보게 했고, 두 가지 길 중 어떤 길을 따라야 할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즉시 완전한 신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자”(5:5)이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 5-6장의 권면 부분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거듭 옛 세계의 요소인 육의 길을 버리고 새 시대의 주인공인 성령의 길, 곧 성령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계속해서 성령으로 살아야 할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49)
20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5. 갈라디아서의 중심 주제
그렇다면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미 우리가 앞에서 여러 번 강조한 바와 같이, 비록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와 바울의 반대자들의 문제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지라도,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그의 반대자들을 겨냥해서 그들을 공격하거나 혹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쓰여진 것은 아니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는 소위 유대주의자들이 찾아오기 전에 이미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복음에 대한 이해와 성령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서 3:3에서 지적한 대로 그들은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으로 완성하려고 했고” 그 결과 바울이 갈라디아서 1:6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바울의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으로 옮겨가려고 했다. 이와 같은 갈라디아 교회 문제의 근저에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부터 갖고 있었던 이원론적인 헬라 철학과 종교 사상이 놓여 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복음과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복음과 성령을 따르는 삶을 촉구하는 것이다.50)
21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 특주
왜 우리는 갈라디아서의 중심 주제를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을 따르는 삶으로 보아야 하는가? 갈라디아서의 주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전통적인 입장과 적지 않은 거리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왜 우리가 이와 같은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1999년도 [목회와 신학] 1월호 부록 [그 말씀]에 실린 설명을 특주 형식으로 여기에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전통적으로 많은 주석가들과 학자들은 갈라디아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자신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복음,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루신 구원 사건을 통해, 할례나 모세의 율법 준수와 관계없이, 인종(유대인과 이방인), 신분(종과 주인), 성(남자와 여자)의 차별 없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구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갈라디아 교회들이 구성되었다. 그런 다음 바울은 떠났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을 떠난 다음 예루살렘 교회 출신의 유대인 신자들(이하,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찾아와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보다는 열등한 자이며, 그가 전한 복음도 불완전한 복음이라고 하면서,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을 훼손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과는 다른 복음을 전했다(갈 1:7; 2:3-4; 3:1; 5:7-12; 6:12-13; 참고 행 15:1). 그들이 제시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인 신자들과 동등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보충해서 언약 백성들의 신분과 삶의 표지인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비로소 유대인 신자들처럼 참된 구원의 공동체, 곧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란 신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자신들의 구원과 신분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여, 유대주의자들이 요구한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22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갈라디아 교회들 안에서 제기된 근본 문제를 이와 같이 신분의 문제로 보는 자들은 또한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이러한 신분의 문제로부터 찾으려한다. 이들은 갈라디아서를, 바울 사도가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갈라디아 교회 안에 제기된 신분에 관련된 문제를 듣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급히 쓴 편지로 본다. 이들이 볼 때, 갈라디아 교회 안에 제기된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고, 바로 바울 자신의 사도직과 그의 복음의 사활이 걸려 있는 중대한 문제였고, 그의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존폐가 달려 있는 문제였다. 왜냐하면, 만일 할례와 모세의 율법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신분을 결정하는 구원과 의의 수단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고, 성령의 선물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될 것이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거짓 사도가 될 것이고, 자신의 과거, 현재는 물론 미래의 모든 이방인 선교 사역도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회 문제를 신분의 문제, 일반적인 구원론 문제로 보는 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를 갈라디아서에 대한 전통적인 3등분의 구조분석, 즉 1-2장의 ‘바울의 자서전’, 3-4장의 ‘복음과 율법의 대조’, 5-6장의 ‘윤리적 권면’에서 찾고, 이러한 관점에서 갈라디아서 전체를 이해하려 한다. 이들은 갈라디아서 1-2장에 나타난 바울의 자서전의 주요 기능은,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와서 바울의 사도직과 그의 복음을 훼손했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된 주장에 대항해 자신의 신적 사도성과 신적 복음을 변증하는 데 있다고 본다.
이들은 갈라디아서의 중심부를 차지하면서 복음과 율법 문제를 취급하는 3-4장을 갈라디아서의 핵심 부분으로 보면서, 갈라디아 교회의 근본 문제가 신분의 문제이며, 따라서 갈라디아서의 중심적인 메시지도 신분의 문제와 관련된 구원 문제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삼는다. 즉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대신 모세의 율법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결정적인 조건으로 제시했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3-4장에서 이들의 주장에 반대해,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신분/구원 문제를 결정하는 수단임을 강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윤리적인 권면을 담고 있는 5-6장은, 3-4장의 내용과는 다르다는 점을 들어, 갈라디아서의 필수적인 부분이라기보다도 일종의 부록으로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갈라디아서 3-4장에서 사실상 갈라디아 교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적인 주장을 다 제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갈라디아 5-6장은 이들에게 있어서 갈라디아 교회의 근본 문제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도, 그리고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도, 별다른 중요성을 지니지 못한다.
23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갈라디아서에 관해 지금까지 대다수의 주석가들과 학자들이 생각해 온 이와 같은 주장들은 과연 정당한가? 과연 갈라디아 교회의 근본 문제는 신분의 문제이며, 따라서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도 신분 문제와 관련된 구원론 교리인가?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한 사람의 신분을 결정한다는 이신칭의의 교리가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인가? 갈라디아서에 대한 3등분의 구조 분석과 그 기능 할당은 정당한가? 1-2장에 나타난 바울의 자서전의 주요 기능은 과연 바울의 사도성과 복음의 신적 기원을 옹호하는 변증적인 것인가? 갈라디아서 3-4장이 과연 갈라디아 교회의 근본 문제를, 다시 말해,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결정할 수 있는 중심 부분인가? 반면에 갈라디아서 5-6장은 과연 부록에 해당하며, 따라서 갈라디아 교회 문제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또한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는가? 갈라디아서 3-4장과 5-6장의 구별처럼, 신분과 삶, 믿음과 행위, 그리고 신학과 윤리는 과연 서로 분리될 수밖에 없는가?
우리는 수년 동안 갈라디아서를 연구해 오면서 전통적인 갈라디아서의 구조 분석 및 이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갈라디아서 이해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결국 확신을 갖고 전통적인 입장을 떠나게 되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에 대한 원문 강독을 하면서, 다음 몇 가지 이유로,갈라디아서에 대한 전통적인 3등분의 구조 분석에 회의를 갖게 되고, 갈라디아서에 대한 새로운 2등분의 구조 분석을 생각하게 되었다.
첫째, 갈라디아서는 편지를 보내는 바울 자신에 관해 말하는 1-2장의 ‘I’(바울) 부분과,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 관해 말하는 3-6장의 ‘You’(갈라디아 교인들) 부분의 뚜렷한 대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갈라디아서 5-6장의 핵심적인 단어인 ‘성령’이 이미 3-4장에 등장해(3:2,3,5,14; 4:6,29) 3-4장에 나타난 바울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결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갈라디아서의 5-6장의 전체 메시지를 이끌어 가는 ‘성령’과 ‘육’의 대조가 이미 3장의 서두(3:3)와 4장의 마지막(4:29)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24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넷째, 갈라디아서 3-4장의 핵심 단어 중 하나인 ‘율법’이 여전히 5-6장에도(5:3,4,14,18,23; 6:2,13) 나타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3-4장과 5-6장의 중요 단어들과 중요 사상들이 상호 교차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우리의 확인은, 마침내 3-4장과 5-6장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밀접하게 통일되어 있다는 새로운 생각을 갖게 했고, ‘I’/‘You’의 2등분 구조 분석에 보다 큰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바울이 왜 갈라디아서를 이와 같은 ‘I’와 ‘You’의 2등분의 구조로 제시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 당대의 고대 헬라-로마 수사학이나 서신들 가운데 이와 같은 ‘I’, ‘You’의 2등분의 구조가 나타나는가를 조사하게 되었다.
고전 문헌을 검토하는 중에 우리는 고대 헬라-로마 사회에서 상대방을 가장 효과적으로 권면하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연설가나 편지를 쓰는 사람이 가능한 한 상대방으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자신의 ‘에도스’(성품 혹은 인격)를 먼저 제시해야 하고, 그런 다음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페도스’(열정 혹은 정서)를 제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아리스토텔레스, Rhetoric, 1.ii, 3-5; Quitilian, Oratoria, IV.1.7).51)
이와 함께 우리는 갈라디아서 1-2장의 주요 기능을,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의 신적 기원을 옹호하는 변증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삶(에도스)을 갈라디아 교인들이 본받아야 할 패러다임과 모델로 제시하는 것으로 보는 새로운 연구들을 접하게 되었다.52) 갈라디아서 1-2장의 기능에 관한 새로운 연구와 고대 헬라-로마의 수사학과 서신들에 대한 검토는 우리로 하여금 고전 수사학과 서신 양식이 바울 당대 교육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I’와 ‘You’, ‘에도스’와 ‘페도스’의 구조가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알려졌을 것이며, 따라서 바울은 의도적이건 의도적이 아니건, 갈라디아 교인들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I’(바울의 ‘에도스’)와 ‘You’(갈라디아 교인들의 ‘페도스’)의 2등분 구조로 쓰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53)
25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갈라디아서의 구조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함께 우리는 갈라디아서의 주요 부분에 대한 주석적 작업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먼저 ‘I’ 부분의 마지막에 있으면서 사실상 이 부분의 결론과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안디옥 사건(2:11-21)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적지 않은 학자들이 안디옥 사건의 핵심을 신분의 문제로, 그리고 여기서 제시되는 바울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이신칭의로 보고 있다.54) 그러나 안디옥 사건의 본문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우리에게, 안디옥 사건의 핵심이,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 신자들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간주하지 않은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베드로 자신이 믿고 고백하고 가르치는, 그리고 바울과 예루살렘에서 합의했던 그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동하지 않은 삶의 문제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일어나 자리를 떠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다는 복음의 진리에 역행하는 위선적인 행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이방인 신자들로 하여금 억지로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도록 했기 때문이었다(2:13-14).
흔히 주석가들은 갈라디아서 2:16의 이신칭의 본문을 안디옥 사건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물론 갈라디아서 전체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가리키는 본문으로 삼으려고 하는데,55) 이것은 갈라디아서 2:15-21의 본문이 베드로와 바울을 함께 묶는 15-17절의 ‘우리’ 본문과 베드로를 배제하고 바울 자신의 삶의 자세를 강조하는 18-21절의 ‘나’ 본문으로 구분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못한 데 기인한다. 이신칭의를 말할 때 바울은 베드로를 포함시키는 ‘우리’를 주어로 삼음으로써 이신칭의 문제, 곧 신분의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일치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2:15-17). 그런데 이신칭의에 따른 자신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말할 때 바울은 의도적으로 베드로를 배제하는 1인칭을 사용하여 베드로의 실패가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였음을 강조한다(2:18-20).
26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앞서 확인한 바대로, 만일 갈라디아서 1-2장의 주요 기능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바울 자신의 ‘에도스’를 갈라디아 교인들의 ‘페도스’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모델과 패러다임으로 제시하는 것이라면, 1-2장의 절정 부분인 안디옥 사건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다시 말해, 안디옥 사건을 서술하는 주된 목적은 베드로의 잘못된 행위를 부각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바울과 베드로의 대조적인 삶을 통해,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이며,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모범적으로 보여 주는 데 있다.56) 안디옥 사건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안디옥 사건을 단순히 1-2장의 결론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3-6장의 ‘You’ 부분의 주요 내용을 미리 보게 하는 서곡이요, 거울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안디옥 사건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신분의 문제와 연결된 ‘이신칭의’가 아니라, 오히려 성령을 통해서 내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라고 한다면, 결국 3-6장의 핵심적인 메시지도 동일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둘러 갈라디아서 3-6장의 부분에 대한 주석적 작업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갈라디아서의 중심부이며,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와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간주되어 온 3-4장에 대한 주석적 작업을 통해 확인하게 된 것은, 비록 갈라디아서 3-4장이 한 사람의 신분을 결정하는 것은 율법이 아닌 믿음임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 초점은 어떻게 한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는가, 또한 어떻게 이방인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는 것이다. 오히려 3-4장에서 거듭 강조되고 있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은 유대주의자들이 요구한 율법의 행위 없이 바울의 복음을 통해서 이미 의롭게 되었고, 이미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으며, 이미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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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비록 갈라디아 3-4장에서 신분 문제가 거론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신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라디아 교인들이, 마치 안디옥에서 베드로의 경우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자신의 새로운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기 있기 때문에 이를 시정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3:1 이하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가리켜 ‘어리석은 사람들’라고 부르면서 너희가 성령으로 새로운 신분을 얻었으면서도 성령으로 자신들의 삶을 성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육으로 마치려고 하느냐(3:3) 하는 질문에서, 그리고 3-4장을 성령을 따라 난 자유한 자와 육을 따라 난 종에 대한 대조로 종결하는 것에서도(4:29-30) 확인되었다. 갈라디아서 3-4장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우리에게, 결국 갈라디아서 3-4장은 갈라디아서의 중심부도 또는 5-6장과 분리된 독립 부분도 아니며, 오히려 5-6장을 준비하는 부분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우리는 3-4장에 이어 바로 5-6장에 대한 주석에 들어갔다. 5-6장에 대한 주석은, 5-6장과 3-4장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지만, 5-6장이 3-4장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3-4장이 5-6장을 위해 있으며, 이런 점에서 5-6장은 갈라디아서의 결론과 절정 부분에 해당하며, 따라서 갈라디아 교회의 근본 문제도,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도 신분 문제가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6. 기록 연대 문제
갈라디아서의 연대 문제는 전통적으로 갈라디아서의 수신자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즉 북부 갈라디아설 주창자들은, 갈라디아서 4:13의 ‘처음에’(to; provteron)라는 말에 근거하여, 바울은 적어도 두 번 이상 갈라디아 지역을 방문했으며, 이 두번째 방문은 사도행전 18:23에 나타나는 바울의 두번째 갈라디아 지역 방문과 동일하기 때문에, 갈라디아서는 적어도 사도행전 15장에 있는 예루살렘 공의회(AD 49/50)와 사도행전 18장에 언급된 바울의 고린도 지역 선교(AD51-52) 후인 주후 53년경에 썼다고 본다.57) 반면에 대부분의 남부 갈라디아설 주창자들은 이미 바울이 제1차 선교 여행시에 갈라디아 교회를 갈 때와 올 때 두 번에 걸쳐 방문했다고 보고 있으며, 또한 갈라디아서 1:18에 나타나는 바울의 첫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사도행전 9: 26-30에 있는 바울의 첫번째 예루살렘 방문과 동일시하고, 갈라디아서 2:1 이하에 나타나는 바울의 두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사도행전 11:27-30/12:25에 언급되어 있는 바울의 부조 방문과 동일시하여, 갈라디아서는 주후 49/50년경에 개최된 것으로 보이는 예루살렘 공의회 직전인 주후 49/48년경에 쓰여졌다고 본다. 따라서 북부 갈라디아설 주창자들에 따르면, 갈라디아서는 데살로니가전서가 기록된 후에 쓰여졌다고 볼 수 있는 반면에, 남부 갈라디아설에 따르면 갈라디아서는 사실상 바울의 가장 이른 편지가 된다.
28 제2부 바울과 그의 서신
우리는 수신자 문제와 관련해서는 남부 갈라디아설에 서 있지만, 연대 문제와 관련해서는 북부, 남부 그 어느 입장도 따르지 않고, 최근에 H. Ridderbos, J.D.G. Dunn과 G.W. Hansen이 주장하는 제3의 입장을 따르고자 한다.58) 왜냐하면 우리는 갈라디아서 2:1 이하에 나타나는 바울의 두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사도행전 11장의 부조 방문이 아니라 사도행전 15장의 바울의 예루살렘 공의회 방문과 동일시해야 하며, 2:11 이하에 나타나는 안디옥 사건은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갈라디아서의 연대는 예루살렘 공의회 직후, 곧 바울의 데살로니가전서와 고린도전서 연대 사이인 주후 50년이나 51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썼던 장소는 고린도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59)
1) 갈라디아서에 대한 중요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J.A. Allan, 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Galatians (TBC. London: SCM, 1951); J. Becker, Der Brief an die Galater (Göttingen: Vandenhoeck, 1990); H.D. Betz, Galatians: A Commentary on Paul's Letter to the Churches in Galatia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1979); J. Bligh, Galtians: A Discussion of St. Paul's Epistle (London, St. Paul, 1969); Udo Borse, Der Brief an die Galater (RNT. Regensburg: Pustet, 1984); F.F. Bruce,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NIGTC. Grand Rapids: Eerdmans, 1982); Ede W. Burton,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ICC. Edinburgh: T. & T. Clark, 1921); R.A. Cole, Galatians (Tyndale NTC. Leicester: IVP, 1989); C.B. Cousar, Galatians (Interpretation. Atlanta: John knox, 1982); G.S. Duncan, The Epistle of Paul to the Galatians (London, 1934); J.D.G. Dun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BNTC. Peabody: Hendrickson, 1993); R.Y.K. Fung,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88); D. Guthrie, Galatians (NCB.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1973); G.W. Hansen, Galatians. (Downers Grove: IVP, 1994); W. Hendrikse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New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Baker, 1969); R.N. Longenecker, Galatians (WBC. Dallas: Word Books, 1990; D. Lührmann,, Galatians. (Minneapolis: Fortress, 1992); J.G. Machen, Machen's Notes on Galatians, ed. J. H. Skilton. (Nutley, NJ: Presbyterian & Reformed. 1977) J. L. Martyn, Galatians (New York : Doubleday, 1998); F. Mussner, Der Galaterbrief (HTKNT 9; Freiburg, Basel, 1974); Neil, W. The Letter of Paul to the Galatians. Cambridge Bible Commenta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7); A. Oepke, Der Brief des Paulus an die Galater. 3rd ed., ed. J. Rohde. (THKNT. Berlin: Evangelische Verlagsanstalt, 1973); R.N. Ridderbos, The Epistle of Paul to the Churches of Galatia. Tr. H. Zylstra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53); J. Rohde, Der Brief des Paulus an die Galater (Berlin: Evangelische, 1989); H. Schlier, Der Brief an die Galater. Göttingen: Vandenhoeck, 4th ed. 1965); J. Ziesler,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London: Epworth Press, 1992). 그밖에 갈라디아서에 대한 논문들과 단행본들은 최갑종, [바울연구 2], 407-437에 수록된 단행본들과 논문들을 참조하라.
2) Betz, “In Defense of the Spirit: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as a Document of Early Christian Apologetics,” in Aspects of Religious Propaganda in Judaism and Early Christianity, ed. Elisabeth Schüssler Fiorenza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76) 99-114.
3) 기독교회에 미친 갈라디아서의 영향력에 관해서 R.N. Longenecker, Galatians (WBC 41, Dallas: Word Books, 1990), xliii-lii; Betz, “Galatians,” ABD 2, 873-874를 참고하라.
4) James Dunn, The Theology of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xiii를 보라. 최근에 무게 있는 갈라디아서 주석을 쓴 R.N. Longenecker는 그의 주석 Galatians (WBC; Dallas: Word Books, 1990)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1) 바울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2) 바울의 연대기를 확립하는 데 있어서, (3) 초기 시도 시대 역사의 과정을 추적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4) 신약 성경의 많은 비평적, 정경적 이슈들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잣대를 제공한다. 아마도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여러 서신 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졌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신약 성경 전체에 걸쳐 있는 신앙고백적 요소를 떠나서 말한다면, 갈라디아서는 신약성경에 쓰여진 모든 것들의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울과 그밖에 전 신약성경을 올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갈라디아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xIi).
5) 루터와 갈라디아서의 자세한 관계에 대해서는 Richard N. Longenecker, Galatians (Dallas: Word Books, 1990), Iiii-Iiv를 보라. 루터는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그의 생애 초기(1519년)에 갈라디아서 주석을 썼고, 생애 후기(1538)에 다시 그것을 수정 보완했다. 그러므로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은 그의 사상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루터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만큼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오늘의 바울 연구가들 중에는 Luther를 비판하는 자들이 적지 않지만, 그들이 Luther만큼 바울을 이해하고 있는지는 의문시된다.
6) Dunn, “The New Perspective on Paul,” BJRL 65 (1982-83) 95-122를 보라.
7) Cf. 홍인규, The Law in Galatians (JSNT Suppl. 81; Sheffield: JSOT Press, 1993), 1-15.
8) 특별히 E.P. Sanders, 김진영 옮김, [바울, 율법, 유대인]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5); 홍인규, The Law in Galatians (JSNT Suppl.; Sheffield: JSOT Press, 1993); James D.G. Dunn, The Theology of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Frank Thielman, Paul & the Law (Downers Grove: IVP, 1994); Hendrikus Boers, The Justification of the Gentiles. Paul's Letters to the Galatians and Romans (Peabody: Hendrickson, 1994)를 보라.
9) Betz, “Spirit, Fredom, and Law. Paul's Message to the Galatian Churches,” SEA 39 (1974), 145.
10) 특별히 다음의 책들을 참조하라. Donald Guthrie, New Testament Introduction (London: IVP, 1965,1970), 450-471; Werner G. Kümmel,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Nashville: Abingdon Press, 1975), 294-304; Richard N. Longenecker, Galatians, WBC (Dallas: Word Books, 1990)에 있는 “Introduction,” H.D. Betz, “Galatians,” The Anchor Bible Dictionary, Volume 2, 872-875; James D.G. Dunn, “Introductio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Peabody: Hendrickson, 1993), 1-20; G.W. Hansen, “Intoduction,” Galatians (London: IVP, 1994),. 113-28.
11) Cf. Kümmel,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rev. ed., tr. H.C. Kee(Nashville: Abingdon, 1975), 304f; Longenecker, Galatians, lviii-lix.
12) Betz, Galatian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9), 1.
13) Betz, Galatians, 1.
14) James Dun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Peabody: Hendrickson, 1993), 2-4.
15) 단 하나의 예외는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안디옥 사건에서 베드로를 두고 한번 2인칭을 사용할 뿐이다(2:14-16).
16) 두 이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Betz, Galatians, 1-5; Bruce, “Galatian Problem. 2. North or South?” BJRL 52 (1970) 243-66; Galatians, 3-18; Longenecker, Galatians, lxiii-lxxii를 보라.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로마 황제 Augustus가 주전 25년 갈라디아의 옛 영토(북부 갈라디아)를 점령하고 그런 다음 남부 지역까지(남부 갈라디아) 합쳐 갈라디아라 불렀다. 참조, Robert K. Sherk, “Roman Galatia: The Governors from 25 BC to AD 114,” in Aufstieg und Niedergang der römischen Welt II.7.2, ed. Hildegard Temporini (Berlin: de Gruyter, 1980) 955-963; J.M. Scott, Paul and Nations: The Old Testament and Jewish background of Paul's Mission to the nations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Destination of Galatians (Tübingen: Mohr, 1995), 186-187.
17) H. Ridderbos, “Galatians,” ISBE 2 (Grand Rapids: Eerdmans, 1982), 380.
18) 이 문제에 대한 보다 자세한 토론은 F.F. Bruce, “Galatian Problems. 2. North or South Galatians?” BJRL 52 (1969-70), 243-66; Longenecker, Galatians, Ixi-Ixxii; C. Hemer, The Book of Acts in the Setting of Hellenistic History (Ind.: Eisenbrauns, 1990), 227-307을 참조하라.
19) Matera, Galatians, 20; Dunn, The Theology of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7.
20) Dunn, The Theology of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p. 1: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is one of the fiercest and most polemical writings in the Bible.”
21) 물론 우리가 Dunn에 동조하여 갈라디아서를 전체적으로 “논쟁적” 서신으로만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우리가 갈라디아서의 문학적 분석을 할 때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갈라디아서는 전체적으로 볼 때 일종의 권면적 서신이다. 논쟁적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논쟁을 위한 논쟁이 아니라 오히려 권면을 위한 기반으로서의 논쟁이다. R.G. Hall, “The Rhetorical Outline for Galatians. A Reconsideration,” JBL 106/2 (1987) 277-87을 보라.
22) 예를 들어, Dunn, The Theology of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7.
23) Cf. Dunn, The Theology of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xv: “To hear Paul in his historical context is to recognize more clearly not only why he says what he says, but also what it is actually is saying in the letter.”
24) Cf. J.M.G. Barclay, “Mirror-Reading a Polemical Letter. Galatians as a Test Case,” JSNT 31 (1987) 73-93. 이 논문은 역시 S.E. Porter & C.A. Evans가 편집한 The Pauline Writings (Sheffield: Academic Press, 1995), 247-267에 재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인용은 후자에 수록된 페이지를 따른다. Barclay는 ‘거울-독법’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Hence the necessity for one of the most difficult and delicate of all New Testament critical methods: we must use the text which answers the opponents as a mirror in which we can see reflected the people and arguments under attack. Like most New Testament methods, such mirror-reading is both essential and extremely problematic(247-248).”
25) 최갑종,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삶: 갈라디아서 5-6장에 대한 주해와 적용,” [그 말씀] (1999/1), 54-71.
26) 그렇다면 갈라디아서 그 자체의 분석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바울의 반대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27) 예를 들어, J. Munck, Paul and the Salvation of Mankind (Richmond: John Knox, 1959), 130-4; L. Gaston, Paul and the Torah (Vancouver: University of British Columvia Press, 1987), 29-30.
28) 예를 들어, Ridderbos, Kümmel. Bruce, Longenecker, Sanders, Dunn, 김세윤, 홍인규 등.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반대자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토론을 위해서는 Hong, The Law in Galatians, 116-120; Gab Jong Choi, “A Study of the Role of the Spirit in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67-70.
29) Cf. H. Ridderbos, “Galatians,” ISBE 2, 381.; Longenecker, Galatians, pp. xcv; Barrett, Paul, 22-33; J.L. Martyn, “A Law-Observant Mission to Gentiles: The Background of Galatians,” SJT 38 (1985), 307-24.
30) J. Becker, Paul: Apostle to the Gentiles (Louisville: Westminster Press, 1993), 292f.
31) J.S. Silker, Disinheriting the Jews: Abraham in Early Christian Controversy (Louisville: John Knox, 1991), 28-50.
32)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7), 236, 422-423; 역시 Sanders, Judaism: Practice and Belief 63 BCE-66CE (London: SCM Press, 1992, 262-78.
33) 자세한 토론을 위해서는 최갑종, “바울과 유대교,” [바울 연구 2], 76-101을 보라.
34)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최갑종, “예수의 세계: 주후 1세기의 유대교,” [나사렛 예수] (서울: 기독교문서 선교회, 1996), 47-90을 보라.
35) 이 문제는 최근에 Timo Laato가 그의 책, Paul and Judaism. An Anthropological Approach (Atlanta: Scholars, 1995)에서 예수와 바울 당대 유대인들의 구원관 문제를 자세히 다루면서, Sanders는 바울 당대 유대인들이 구원 문제와 관련해 하나님의 은총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강조했지만, 그러나 그와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었던 그들의 자유의지에서 기인한 율법에 대한 순종의 행위를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36) Laato는 그의 책, Paul and Judaism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인간학적인 전제들로부터 볼 때, 유대교의 구원관과 바울의 구원관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전자에서는 구원은 단지 하나님의 은총만으로 되지는 않는다. 유대인들이 그의 선행을 통해 협력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후자편에서는 구원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총만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선행까지도 하나님의 행위로부터 나오는 것이다(213f).”
37) Paul and the Law, 266-267; Jesus, Paul and Torah, 188-189.
38)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475-97; Judaism, 509-10.
39) “This is what Paul finds wrong in Judaism: it is not Christianity.”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552.
40) Jesus, Paul and the Law, 186-88; 역시 F. Watson, Paul, Judaism and the Gentiles: A Sociological Approach, 62-72.
41) 홍인규, “Does Paul Misrepresent the Jewish Law? Law and Covenant in Gal. 3:1-14,” NovT 36 (1994), 164-182.
42) Barrett, Paul, 78.
43) 최갑종, “바울과 율법,” [바울 연구 1] (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2), 55-68; “홍인규교수의 The Law in Galatians에 대한 요약과 평가,” [성령과 율법] (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4), 287-298.
44) Sanders의 주후 1세기의 유대교의 재구성(reconstruction)에 관해서는 적지 않은 유대인 학자들까지도 Sanders의 유대교 재구성이 지나치게 획일적이고 인위적임을 지적하고 있다. E.P. Sanders의 Judaism(1992)에 대한 다음의 서평 논문을 보라: Jacob Neusner, JSJ 24/2(1993), 317-322; S. Stern, JJS VLII (1993), 307-310; L.L. Grabbe, JTS 44/2(1993), 643-644.
45)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409-418.
46) 물론 이 말이 바울과 베드로를 위시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사이에 복음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같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 2:11-21에 있는 안디옥 사건을 취급하면서 자세하게 다룬 바 있지만, 베드로는 이신칭의의 복음이 그의 신분은 물론 그의 삶 전체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안디옥 교회에서 유대주의자들을 두려워하여 이신칭의의 복음에 일치하지 않는 위선적인 행위를 했고 그 때문에 바울로부터 책망을 받았다.
47) Betz, Galatians, 8-9, 28; “In Defense of the Spirit,” 105-7; “Spirit, Freedom, and Law. Paul's Message to the Galatian Churches,” 145-160.
48) Barclay, Obeying the Truth: A Study of Paul's Ethics in Galatians (Edinburgh: T. & T. Clark, 1988), 68-72.
49) Cf. G.E. Ladd, “The Holy Spirit in Galatians,” in Current Issues in Biblical and Patristic Interpretation in Honor of M.C. Tenney, ed. G.F. Hawthorne (Grand Rapids: Eerdmans, 1975), 211-216; W. Russell, “The Apostle Paul's Redemptive-
Historical Argumentation in Galatians 5:13-26,” WTJ 57 (1995), 333-57.
50) 그밖에 갈라디아서 중심 주제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본서에서 별도로 취급하고 있는 “바울과 교회: 갈라디아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를 참고하라.
51) 자세한 문제는 Stanley K. Stowers, Letter Writing in Greco-Roman Antiquity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1986), 58-96.
52) 예를 들어, G. Lyons, Pauline Autobiography. Toward a New Understanding, SBLDS 73 (Atlanta: Scholars Press, 1985), 124-164; R.B. Gaventa, “Galatians 1 and 2 Autobiography as Paradigm,” NovT 28 (1986) 309-326; B.J. Dodd, “Christ's Slave. People Pleasers and Galatians 1.10,” NTS 42 (1996) 90-104; G.W. Hansen, “A Paradigm of the Apocalypse: The Gospel in the Light of Epistolary Analysis,” in Gospel in Paul. Studies on Corinthians, Galatians and Romans for Richard N. Longenecker, ed. L.A. Jervis and P. Richardson, JSNTSS 108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4), 194-211.
53) 갈라디아서의 구조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최갑종, “갈라디아서의 구조에서 본 중심 주제,” [기독신학저널] 제1권 제1집 (1998), 67-106을 보라.
54) 예를 들어, 이한수, “안디옥 사건과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 [바울신학연구] (서울: 총신대학교 출판부, 1993), 99-149.
55) James D.G. Dunn, “The Incident at Antioch (Gal. 2:11-18),” in Jesus, Paul and the Law (Louisville: Westminster, 1990), 129-182; John M.G. Barclay, “The Antioch Episode and Justification of Faith,” in Obeying the Truth (Edinburgh: T. & T. Clark, 1988), 76-83; Peter J. Tomson, “The Antioch Incident,” in Paul and the Jewish Law (Minneapolis: Fortress, 1990), 222-230; P.C. Böttger, “Paulus und Petrus in Antiochien: Zum Verständnis von Galater 2.11-21,” NTS 37 (1991) 77-100; Sabbas Agourides, “Peter and Paul in Antioch (Galatians 2,11-21),” in The Truth of the Gospel (Galatians 1:1-4:11) (Rome: Benedictina, 1993), 59-90.
56) 안디옥 사건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1998년 11월 18일 총신대학교 신대원 총학회에서 발표된 논문인 “바울의 교회론과 21세기 한국 교회의 전망: 갈라디아 교회를 중심으로”에 자세하게 소개된 바 있다.
57) Betz, Galatians, 9-12.
58) Ridderbos, “Galatians,” ISBE 2, 382f.; Dunn, The Theology of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1993, 12-17; G.W. Hansen Galatians, 1994, 17-22.
59) Dunn, The Theology of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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