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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거룩한 것과 진주(마 7:6)

by 【고동엽】 2023.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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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것과 진주(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 본문은 간단하지만 그 의미가 매우 깊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난해한 구절로써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간간이 우리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음식으로 비유한다면 단단한 것으로 오래 씹어야만 맛이 나는 음식과 같습니다. 성경을 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어느 책에선가 "생선을 먹는 방법과 같다"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어 공감이 갔습니다. 생선을 먹을 때는 먼저, 살이 많은 부분부터 살살 빼어먹고 다음 뼈에 붙어있는 살을 발려서 먹다가 나중에는 뼈를 다시 한번 구워서 부숴 먹으면 칼슘까지 잘 섭취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말씀 중에는 처음부터 쉽게 이해되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또는 두 번 세 번 읽어야 이해되는 것이 있고, 또 어떤 말씀은 아무래도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면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 않았음을 알고 기다려야 합니다. 단번에 성경 모두를 이해하겠다고 무리하게 달려들면 목에 걸려 체할 염려가 있습니다. 또는 불합리하다고 한 구절을 물고 늘어지면 그것 때문에 시험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해되는 부분부터 차근차근히 읽고 서두르지 말 것입니다.

본문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7 : 6)는 말씀으로 난해한 내용입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몇 가지 알아야 할 사항들이 있습니다. 내용을 잘 읽어보면 복음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와의 사이를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한 것""진주"는 비유로써 복음을 뜻하며, 개나 돼지는 복음을 받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할 때에 사람을 분별해서 개나 돼지 같은 사람에게는 전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성경의 또다른 곳에서는 예수께서 씨뿌리는 비유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릴 때에 길가에도 뿌리고 돌밭에도 뿌리고 가시밭에도 뿌리며 옥토에도 뿌렸다고 했습니다. 또한 예레미야에 보면, 듣든지 안 듣든지 간에 복음은 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본문에서는 사람을 차별하는 듯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분명히 복음을 들을 자가 따로 있다는 예정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그의 예정론에서 전도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를 우리들로서는 누가 택함 받은 자인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전도해서 결국은 택한 백성을 위한 전도라고 극단적으로 말했습니다. 아무튼 본문은 예정론을 뒷받침하는 인상을 주는 내용으로, 들을 자가 따로 있고 듣지 않을 자도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돼지이고 개란 말입니까? 원래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말고,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는 말은 유대사람들의 격언으로 예수께서 그대로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 내용을 유대사람들의 협소한 민족주의 개념에 의해서 해석하면, 유대사람들은 양이요, 그 외 이방 사람들을 개라는 것입니다. 즉 율법을 개 같은 이방 사람들에게는 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유대사람들이 이방 사람들을 개라고 하는 데는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어쨌든 이방 사람들을 멸시하여 개같이 천시하는 협소한 민족주의의 개념이 기독교에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유대사람들의 기독교인들은 생각하기를, 이방인들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사람으로 개종하여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고 유대의 경건한 풍속을 그대로 다 지키고서야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도할 때도 제일 골치 아픈 것이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바울이 전도하는 곳마다 유대사람들이 물고 늘어지기를 이방인들이 그대로 예수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드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등, 유대인으로 둔갑해야 믿을 수 있고 구원받는다고 고집을 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이 문제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이방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때에, 일단 유대사람이 된 후에라야 예수를 믿느냐 아니면 이방사람 그대로 믿어도 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아주 격렬하게 논란을 벌이다가 다음 몇 가지의 결론에 도달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까다로운 조건으로 괴롭힐 것이 아니라 다만 우상에게 바쳐서 더러워진 것을 먹지 말고,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고,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라는 것만 지키고 그리고서는 편안하게 믿으라는 결론입니다. 바울이 전도함에 있어서 원수 같은 사람들이 바로 유대주의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본문을 순수 기독교적 입장에서 해석한 것을 보면, 믿는 사람은 양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개와 돼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개나 돼지로 보는 차별대우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을 이렇게 방탕한 동물로 보는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천년 전의 이방 종교의 교리는 도덕적 타락이 그들의 기본 교리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타락을 교리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이아나 같은 신전에는 창녀가 삼천이나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종교사를 보더라도 몇 가지의 종교를 제외하고서는 많은 종교들이 인간을 타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하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개나 돼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적 협소한 의미로 본문을 풀이하기로는 성찬식을 중심으로 해서 설명합니다. 성찬식에서 거룩한 떡을 나눌 때에 거룩한 자에게만 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세례 받지 못한 사람들이나 이방 사람, 그리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떡을 주지 말라는 것으로 성찬의 순결을 강조하다 보니 이 말씀을 인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설교가는 이 말씀을 들어 설명하기를,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할 때에, 개와 돼지 같은 마음은 다 제거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참여하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진주""거룩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진주와 거룩한 것은 복음입니다. 마태복음 15:21 이하에 보면 가나안 여자가 예수께 나아와 자기 딸이 마귀에게 시달리고 있으니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야 할 귀한 복음을 이방 여자에게 전할 수 없다는 뜻으로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안 여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 그렇긴합니다만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다시 간청할 때에 주님은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칭찬하시며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여기서 개나 돼지를 우리의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옛날 히브리 사람들이 개돼지를 어떻게 생각했으며 율법에서 어떻게 보았느냐, 즉 성경적 개념 내지는 히브리 사람들의 문화적 개념으로 돌아가서 이해해야 합니다. 특히 상징적인 것은 상징을 말했을 그 당시의 문화권에서 이해해야 올바른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개와 돼지는 가축 가운데서 우선 더러운 것이고 거룩하지 못한 것의 대표이기 때문에 먹어서도 안 되고 제물로는 더욱 안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개와 돼지는 먹지 않습니다. 이 두 동물에 대해서는 철저히 타부화했습니다. 그래서 개나 돼지를 판돈은 헌금도 할 수 없었습니다. 신명기 23 : 18에 보면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하나님께 가져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개 같은 자"라고 번역을 했습니다만 개를 팔아서 얻은 소득이라는 말입니다. 이토록 철저히 금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문맥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개에 대한 개념을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개를 아주 음란한 동물로 보았습니다. 동물들은 대개가 음란한데 특히 개를 그렇게 본 것은 눈에 자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을 개 같은 음란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음란의 상징으로 봤고 둘째는 개를 싸움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개들은 서로 만나면 으르렁거리고 짖어대므로, 쉽게 화를 내고 잘 싸우는 사람을 '개처럼 싸운다' 또는 '개 같은 사람이다'라고 비유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 앞에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맹서하고서는 똑같은 죄를 반복하는 사람을 개와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는 감기 등으로 음식을 토하게 되면 그대로 다시 주워 먹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같은 죄를 반복하는 사람들을 개의 그런 속성과 같다 하여 개같이 보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유대사람들이 개를 들어서 말하고자 하는 그 개념을 알았습니다.

다음, 돼지는 우선 먹고 놀기만 하는 동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잡아먹히는 것 외에는 아무런 용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늘 더러운 곳에서 생활하므로 개처럼 더러운 것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쓸모 없고 구제 불능한 존재를 가르킬 때 개와 돼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령 사무엘상 17 : 4 이하에 보면, 다윗이 전쟁터에 나갈 때 막대기를 들고 나아가니 골리앗 대장이 말하기를 "막대기는 왜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개란 말이냐?"라고 응수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개란 아주 얕잡아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사무엘하 16:9 에서는 다윗왕을 저주하는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본 아비새가 격분하여 "이 죽은 개만도 못한 놈이 무엄하게도 임금님을 욕하는데 그냥 내버려두십니까?"라고 다윗왕에게 아룁니다. 즉 아무 가치 없는 사람임을 강조하는 뜻에서 죽은 개만도 못한 놈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 말씀이 뜻하는 바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기는 전하되 경험적으로 인정해야 할 일은, 아무리 전해도 믿지 않을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 23 : 9 에서는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찌니 이는 그가 너의 지혜로운 말을 업신여길 것임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복음을 누구에게나 전하기는 하지만 역시 개나 돼지같은 마음을 가진 자는 복음을 복음으로 듣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부도덕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부도덕한 자리, 즉 한창 싸우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말입니다. 한 개인에게도 성결한 때가 있고 더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때에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까? 아무리 간악한 사람일지라도 늙고 병들어서 누워있게 되면 지난날의 세월을 후회하며 양같이 순할 때가 오게 됩니다. 바로 이 때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만일 감정이 격동하여 누구에게나 시비를 붙이고 싶은 상태의 사람에게 예수를 믿자고 전한다면 이것은 복음을 욕되게 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이고 개에게 거룩한 것을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성난 개에게 진주를 던지면 물어뜯는 일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은 아주 겸손하고 빈 마음의 상태에서 전하고 받아야 합니다.

여담으로 한 가지 첨부하고 싶은 것은 친목회나 유흥장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일입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므로 경건한 자세로 경건한 분위기에서 불러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흥을 돋구기 위해서 술좌석에서 찬송을 부르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노는 장소에서는 그 분위기에 맞는 노래를 불러야지 찬송을 불러서는 분위기도 어색하고 찬송은 찬송대로 이지러집니다.

또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전도하는 방법의 문제입니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해야 합니다. 즉 거룩한 방법으로 거룩한 상태에서 거룩한 자에게 전해야 한단 말입니다. 가끔 산업전도 하시는 분들이 노동자들에게 전도하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고충을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회처럼 담배 한 대 권하고 막걸리 한 잔 나누면서 이야기하면 금방 친숙해져 전도하기가 쉬운데, 맨 입으로 하자니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선한 방법으로 선한 목적을 이루도록 명심해야 합니다.

끝으로 개나 돼지에게 거룩하고 진귀한 것을 주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 개나 돼지들은 귀한 것이 무엇이며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마음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는 본의 아니게 복음이 짓밟히게 되어 복음에 욕이 돌아갑니다. 나아가서는 전하는 사람까지 해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진주는 진주로 보관되고 거룩한 것은 거룩한 것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진리를 바로 전해서 복음에 욕이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늘 힘써야 하겠습니다.  

거룩한 것과 진주(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 본문은 간단하지만 그 의미가 매우 깊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난해한 구절로써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간간이 우리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음식으로 비유한다면 단단한 것으로 오래 씹어야만 맛이 나는 음식과 같습니다. 성경을 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어느 책에선가 "생선을 먹는 방법과 같다"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어 공감이 갔습니다. 생선을 먹을 때는 먼저, 살이 많은 부분부터 살살 빼어먹고 다음 뼈에 붙어있는 살을 발려서 먹다가 나중에는 뼈를 다시 한번 구워서 부숴 먹으면 칼슘까지 잘 섭취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말씀 중에는 처음부터 쉽게 이해되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또는 두 번 세 번 읽어야 이해되는 것이 있고, 또 어떤 말씀은 아무래도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면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 않았음을 알고 기다려야 합니다. 단번에 성경 모두를 이해하겠다고 무리하게 달려들면 목에 걸려 체할 염려가 있습니다. 또는 불합리하다고 한 구절을 물고 늘어지면 그것 때문에 시험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해되는 부분부터 차근차근히 읽고 서두르지 말 것입니다.

본문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7 : 6)는 말씀으로 난해한 내용입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몇 가지 알아야 할 사항들이 있습니다. 내용을 잘 읽어보면 복음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와의 사이를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한 것""진주"는 비유로써 복음을 뜻하며, 개나 돼지는 복음을 받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할 때에 사람을 분별해서 개나 돼지 같은 사람에게는 전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성경의 또다른 곳에서는 예수께서 씨뿌리는 비유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릴 때에 길가에도 뿌리고 돌밭에도 뿌리고 가시밭에도 뿌리며 옥토에도 뿌렸다고 했습니다. 또한 예레미야에 보면, 듣든지 안 듣든지 간에 복음은 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본문에서는 사람을 차별하는 듯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분명히 복음을 들을 자가 따로 있다는 예정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그의 예정론에서 전도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를 우리들로서는 누가 택함 받은 자인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전도해서 결국은 택한 백성을 위한 전도라고 극단적으로 말했습니다. 아무튼 본문은 예정론을 뒷받침하는 인상을 주는 내용으로, 들을 자가 따로 있고 듣지 않을 자도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돼지이고 개란 말입니까? 원래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말고,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는 말은 유대사람들의 격언으로 예수께서 그대로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 내용을 유대사람들의 협소한 민족주의 개념에 의해서 해석하면, 유대사람들은 양이요, 그 외 이방 사람들을 개라는 것입니다. 즉 율법을 개 같은 이방 사람들에게는 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유대사람들이 이방 사람들을 개라고 하는 데는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어쨌든 이방 사람들을 멸시하여 개같이 천시하는 협소한 민족주의의 개념이 기독교에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유대사람들의 기독교인들은 생각하기를, 이방인들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사람으로 개종하여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고 유대의 경건한 풍속을 그대로 다 지키고서야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도할 때도 제일 골치 아픈 것이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바울이 전도하는 곳마다 유대사람들이 물고 늘어지기를 이방인들이 그대로 예수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드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등, 유대인으로 둔갑해야 믿을 수 있고 구원받는다고 고집을 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이 문제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이방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때에, 일단 유대사람이 된 후에라야 예수를 믿느냐 아니면 이방사람 그대로 믿어도 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아주 격렬하게 논란을 벌이다가 다음 몇 가지의 결론에 도달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까다로운 조건으로 괴롭힐 것이 아니라 다만 우상에게 바쳐서 더러워진 것을 먹지 말고,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고,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라는 것만 지키고 그리고서는 편안하게 믿으라는 결론입니다. 바울이 전도함에 있어서 원수 같은 사람들이 바로 유대주의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본문을 순수 기독교적 입장에서 해석한 것을 보면, 믿는 사람은 양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개와 돼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개나 돼지로 보는 차별대우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을 이렇게 방탕한 동물로 보는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천년 전의 이방 종교의 교리는 도덕적 타락이 그들의 기본 교리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타락을 교리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이아나 같은 신전에는 창녀가 삼천이나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종교사를 보더라도 몇 가지의 종교를 제외하고서는 많은 종교들이 인간을 타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하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개나 돼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적 협소한 의미로 본문을 풀이하기로는 성찬식을 중심으로 해서 설명합니다. 성찬식에서 거룩한 떡을 나눌 때에 거룩한 자에게만 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세례 받지 못한 사람들이나 이방 사람, 그리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떡을 주지 말라는 것으로 성찬의 순결을 강조하다 보니 이 말씀을 인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설교가는 이 말씀을 들어 설명하기를,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할 때에, 개와 돼지 같은 마음은 다 제거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참여하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진주""거룩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진주와 거룩한 것은 복음입니다. 마태복음 15:21 이하에 보면 가나안 여자가 예수께 나아와 자기 딸이 마귀에게 시달리고 있으니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야 할 귀한 복음을 이방 여자에게 전할 수 없다는 뜻으로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안 여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 그렇긴합니다만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다시 간청할 때에 주님은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칭찬하시며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여기서 개나 돼지를 우리의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옛날 히브리 사람들이 개돼지를 어떻게 생각했으며 율법에서 어떻게 보았느냐, 즉 성경적 개념 내지는 히브리 사람들의 문화적 개념으로 돌아가서 이해해야 합니다. 특히 상징적인 것은 상징을 말했을 그 당시의 문화권에서 이해해야 올바른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개와 돼지는 가축 가운데서 우선 더러운 것이고 거룩하지 못한 것의 대표이기 때문에 먹어서도 안 되고 제물로는 더욱 안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개와 돼지는 먹지 않습니다. 이 두 동물에 대해서는 철저히 타부화했습니다. 그래서 개나 돼지를 판돈은 헌금도 할 수 없었습니다. 신명기 23 : 18에 보면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하나님께 가져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개 같은 자"라고 번역을 했습니다만 개를 팔아서 얻은 소득이라는 말입니다. 이토록 철저히 금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문맥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개에 대한 개념을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개를 아주 음란한 동물로 보았습니다. 동물들은 대개가 음란한데 특히 개를 그렇게 본 것은 눈에 자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을 개 같은 음란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음란의 상징으로 봤고 둘째는 개를 싸움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개들은 서로 만나면 으르렁거리고 짖어대므로, 쉽게 화를 내고 잘 싸우는 사람을 '개처럼 싸운다' 또는 '개 같은 사람이다'라고 비유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 앞에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맹서하고서는 똑같은 죄를 반복하는 사람을 개와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는 감기 등으로 음식을 토하게 되면 그대로 다시 주워 먹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같은 죄를 반복하는 사람들을 개의 그런 속성과 같다 하여 개같이 보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유대사람들이 개를 들어서 말하고자 하는 그 개념을 알았습니다.

다음, 돼지는 우선 먹고 놀기만 하는 동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잡아먹히는 것 외에는 아무런 용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늘 더러운 곳에서 생활하므로 개처럼 더러운 것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쓸모 없고 구제 불능한 존재를 가르킬 때 개와 돼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령 사무엘상 17 : 4 이하에 보면, 다윗이 전쟁터에 나갈 때 막대기를 들고 나아가니 골리앗 대장이 말하기를 "막대기는 왜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개란 말이냐?"라고 응수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개란 아주 얕잡아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사무엘하 16:9 에서는 다윗왕을 저주하는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본 아비새가 격분하여 "이 죽은 개만도 못한 놈이 무엄하게도 임금님을 욕하는데 그냥 내버려두십니까?"라고 다윗왕에게 아룁니다. 즉 아무 가치 없는 사람임을 강조하는 뜻에서 죽은 개만도 못한 놈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 말씀이 뜻하는 바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기는 전하되 경험적으로 인정해야 할 일은, 아무리 전해도 믿지 않을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 23 : 9 에서는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찌니 이는 그가 너의 지혜로운 말을 업신여길 것임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복음을 누구에게나 전하기는 하지만 역시 개나 돼지같은 마음을 가진 자는 복음을 복음으로 듣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부도덕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부도덕한 자리, 즉 한창 싸우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말입니다. 한 개인에게도 성결한 때가 있고 더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때에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까? 아무리 간악한 사람일지라도 늙고 병들어서 누워있게 되면 지난날의 세월을 후회하며 양같이 순할 때가 오게 됩니다. 바로 이 때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만일 감정이 격동하여 누구에게나 시비를 붙이고 싶은 상태의 사람에게 예수를 믿자고 전한다면 이것은 복음을 욕되게 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이고 개에게 거룩한 것을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성난 개에게 진주를 던지면 물어뜯는 일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은 아주 겸손하고 빈 마음의 상태에서 전하고 받아야 합니다.

여담으로 한 가지 첨부하고 싶은 것은 친목회나 유흥장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일입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므로 경건한 자세로 경건한 분위기에서 불러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흥을 돋구기 위해서 술좌석에서 찬송을 부르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노는 장소에서는 그 분위기에 맞는 노래를 불러야지 찬송을 불러서는 분위기도 어색하고 찬송은 찬송대로 이지러집니다.

또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전도하는 방법의 문제입니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해야 합니다. 즉 거룩한 방법으로 거룩한 상태에서 거룩한 자에게 전해야 한단 말입니다. 가끔 산업전도 하시는 분들이 노동자들에게 전도하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고충을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회처럼 담배 한 대 권하고 막걸리 한 잔 나누면서 이야기하면 금방 친숙해져 전도하기가 쉬운데, 맨 입으로 하자니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선한 방법으로 선한 목적을 이루도록 명심해야 합니다.

끝으로 개나 돼지에게 거룩하고 진귀한 것을 주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 개나 돼지들은 귀한 것이 무엇이며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마음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는 본의 아니게 복음이 짓밟히게 되어 복음에 욕이 돌아갑니다. 나아가서는 전하는 사람까지 해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진주는 진주로 보관되고 거룩한 것은 거룩한 것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진리를 바로 전해서 복음에 욕이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늘 힘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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