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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집 그릇들(디모데후서 2:19-21)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우리는 앞장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적 가치를 질그릇에 비유한 사도 바울의 말씀을 생각한 바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는 조금 다른 차원이 기능적인 면에서의 그릇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질그릇으로 설명하고 그 인간의 기능, 곧 어떻게 쓰여지나 하는 것을 그릇을 통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공통적으로 생각할 것은 그 그릇은 나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이 그릇이 우리의 그릇이 아니요, 어디까지나 주님의 그릇이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그릇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릇의 가치는 그 쓰여짐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자기의 존재 가치가 어떤 것인가를 모르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어떤 국민학교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은 후 두고 두고 기억하며 아쉬워할 때가 있습니다. 국민학교 선생님이라면 참으로 귀한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잘 가르쳐 키워놓으면 그 속에서 온갖 훌륭한 인물들이 다 나오는 것이고 보면, 사실은 대통령도 부럽지가 않는 것이 국민학교 선생님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중 계속 말을 듣지 않자 한숨을 쉬면서 하는 말이 "이 녀석들아 공부 열심히 해라.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나 같이 된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선생님의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선생님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인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공부 안 하면 나 같이 된다! 일 얼마나 기가 차고도 한심한 이야기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돈이 많으면 귀하신 몸입니까? 지위가 높으면 귀하신 몸입니까? 우리는 지난날 자유당 시절의 유행했던 "귀하신 몸"이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지위가 높다하여 그 아들에게까지 붙여졌던 귀하신 몸! 그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귀하신 몸이 되는 데에는 심지어 그 사람의 지식이나 명예 따위도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 사람의 속사람 됨이요, 그리고 그가 어디에 쓰여지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머리가 좋은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좋은 머리를 나쁜데 쓴다면, 그처럼 잘못된 인간은 없는 것입니다. 이에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없는 교육이란 약빠른 악마를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여러분들께서 자녀들에게 신앙을 넣어주지 못한 채 공부만 하게 한다면, 언젠가는 그 자녀로 인해 가슴을 치며 탄식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을 맞게 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알고 신앙적인 양심과 인격이 선 다음에 지식도 있고 명예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근본적인 것이바로 서지 못한 상태라면, 결국 그 사람의 인격은 마귀에 의해서 조종되고 쓰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 가치는 내가 누구의 손에 의하여 쓰여지느냐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나를 필요로 하는 자를 찾아야 하고,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하는 자를 위하여 전적으로 쓰여져야 하며, 또한 그렇게 쓰여짐을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억지로 하는 것은 고통뿐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일을 하는 것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수고하는 것이라면, 기쁘게 할 수 있어야지 "어쩌다 이 팔자가 되었나!"하고 짜증스레 하였다면 그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무슨 일을 하든지 아주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가끔 저에게 건강의 비결이 무엇이냐며 물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이면 저는 "무슨 일을 하든지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된다."고 말해 줍니다.
여러분! 하나에서 열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건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들려 하나님의 일에 쓰여진다는 것은 최고의 즐거움이요, 교회를 위하여 봉사한다는 것은 최고의 영광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생의 가치와 의미가 있고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집에 있는 그릇'이라고 하는 자기 존재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어야 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큰집이란 교회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교회는 어떤 개교회를 뜻하기보다는 큰 의미에서의 우주적인 하나님의 교회를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큰 교회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음인데, 이를 다르게 표현하여 '그릇'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 소유의 사람들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속받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가치가 있다 없다라며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 주심으로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구속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그만큼 소중한 값어치가 있음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켜 오늘 본문에서는 그릇으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그릇됨을 전제함에 있어서 먼저 '주인의 것'임을 인식해야 된다는 사실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것이라고 할 때에 주의할 것은 모든 것이 주인의 것이 된다는 것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노예 제도가 있던 당시에 어떤 한 노예가 있다면 그 노예는 몸만 주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그의 재능, 건강, 마음, 기분 그가 벌어온 돈, 심지어는 결혼을 해서 얻게 된 자녀까지도 모두 주인의 것이 되는 것을 봅니다. 마찬가지로 그릇에 대한 바른 개념은 모든 것이 주인의 것일 뿐 나의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여러분 자신의 것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젊음도 재주도 가진 바의 물질도, 그 아름다운 목소리와 예술성도 모두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중 어느 것도 나의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만을 위하여 쓰여져야 합니다. 주인의 것은 주인의 필요에 따라 쓰여지는 것입니다. 주인 앞에서 내 마음대로 필요하고 안하고를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자랄 때에 보면 제가 생각하기에는 별 필요할 것 같지가 않아서 아버님께 "이것 그냥 버리시지요?"하고 말씀 드리면 "놓아두면 다 쓸데가 있다."라고 하시면서 기어이 나무막대기 하나라도 챙겨 보관을 해 두시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니 그렇찮아도 5대째 살아온 낡은 집의 구석구석에는 별별 구질구질한 물건들이 다 들어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어떤 것은 몇 십년이 되었다는 것인데 그러면서도 하시는 말씀 역시"그냥 두면 다 쓸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귀찮아 내어버리겠다고 하지만은 살림을 꾸려 가는 어른들에게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주인이 보기에는 필요한 것이요, 필요해서 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하지 않는 자를 이 땅에 두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참으로 쓸모가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에게는 꼭 필요한자이기에 오늘 나를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내 자신을 필요 하는 가치가 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필요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가치는 상대적 가치가 아닌 절대적 가치로서 나의 어떠한 조건에도 상관없이 그가 나를 사랑하시기에 나를 필요로 하는 절대적 사랑의 필요에 의한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이야기가 바로 그 점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아 나간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하며 그 재산을 다 허비한 다음 굶주린 거지가 되어 돌아올 때, 그에게 무슨 체면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이제는 아들이 아닌 품꾼으로 있겠다며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품꾼은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일도 관록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냥 먹고 놀던 사람이 마음먹고 땅이라도 파겠다며 덤벼들어 보지만 5분만 파고 나면 손에 물집이 잡히고 마는 것이란 말입니다. 땅을 파더라도 땅을 파던 자가 팔 수 있고, 물건 하나를 들어도 들어본 사람이 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탕자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겠다고 품꾼으로 있겠다는 것입니까? 사실 그로서는 아들노릇 하기가 쉬운 것이지, 양반의 종노릇 하기는 더 힘든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만큼 이 탕자는 자기가 자기를 생각할 때에는 아무 데도 쓸모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상대적 가치로 볼 때에는 전혀 쓸모가 없는 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볼 때에는 내 아들! 그것도 죽었다가 돌아온 사랑하는 내 아들이란 말입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일을 할 수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으며, 기술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단지 그가 필요로 되어진 것은 아버지께서 너는 나의 둘째 아들로서 필요하다고 하셨기 때문에 필요해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배운 바가 있다고 필요해지는 것도 아니요, 능력이 있다고 필요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면 나는 필요한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으로 생각할 문제는 주어진 기능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여 큰집에는 금 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등 여러 종류의 그릇이 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 있어서도 금 그릇과 같은 사람, 은그릇과 같은 사람, 그리고 나무그릇, 질그릇과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금 그릇은 값은 비싸겠지만 쓰는 일이 거의 없이 그저 누가 가져갈까 봐서 항상 어딘가 모르게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나무그릇이나 질그릇 같은 것은 매일같이 쓰여집니다.
사실을 두고 생각해 보면, 주인의 손에서 많이 쓰여지는 그릇이 좋은 그릇이지 귀하다고 한쪽 구석에 세워만 두는 그릇이 진정 그렇게 중요한 그릇이겠습니까?
저는 미국의 은행에서 우리와는 다른 견해와 그에 따르는 대우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은행장의 말에 의하면, 그 은행의 여러 직원들 중에서 저기 맨 앞에 앉은 아가씨가 가장 많은 보수를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가씨는 소위 텔러(teller)라고 하여 맨 앞에 앉아서 금전 출납을 하는 계원입니다. 그런데 이 아가씨가 가장 많은 보수를 받는 이유는 일을 가장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저 만큼 뒤에 앉아서 편안히 도장이나 찍어주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그 보다는 맨 앞에 앉아서 많은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 가장 많은 보수를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은 인기도 좋아야 하고 말도 잘하며 외모도 아름다워야 된다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은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가씨는 돈을 내어 주면서도 꼭 한 마디씩 무엇인가 애교 있는 말을 하여 상대방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은행장의 말을 듣고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기에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많이 쓰여지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잘 쓰여지는가 할 때 일단 소위 말하는 귀하신 몸은 잘 쓰여지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그릇됨을 살펴볼 때, 각양 각색의 그릇이 다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의 아이큐가 180인가 하면, 어떤 사람은 150, 또는 어떤 사람은 80, 90 등 그 지적 능력이 각각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람, 병든 사람, 키가 작은 사람, 큰 사람, 성격이 급한 사람, 느린 사람 등등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인간 사회는 이와 같이 다양한 사람들을 고루 고루 필요로 합니다. 가끔 큰 회의 같은데서 보면,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말을 많이 하는 사람도 있고 성격이 급한 사람도 있습니다. 대개 보면 말을 하는 사람이 계속하는지라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을 향해 "자기 혼자 다 한다."며 불평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만은 제가 생각해 본 결과 몇 사람이 그렇게 열심히 말을 하지 않으면 회의가 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시간이 끝나고 나면 그렇게 말한 사람들을 향해서 "내 말까지 다 해 주어서 고맙습니다."하고 꼭 한마디 인사를 하고는 합니다. 우선 듣고 앉았기에는 아예 언권에 대한 전매특허라도 받은 것 같지만 결국은 그 몇 사람들이 말을 함으로써 자꾸 듣다보면 안건이 점점 분명해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놓고 보더라도 베드로처럼 성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마와 같이 의심이 많은 사람 등 그 외모나 성격, 재능이 모두 다릅니다. 주인에게 있어서는 이 모두가 다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성공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놓일 자리에 놓이면 성공인 것입니다. 따라서 한없이 출세만 바라보는 사람처럼 바보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내게 주신 바가 무엇인가를 아는데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놓여 그 일을 즐기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것을 가리켜 신학에서는 효과적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내가 그 자리에 있도록 나를 그렇게 이 땅에 보내신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질그릇이냐? 은그릇이냐 하는 나의 그릇됨의 성격을 분명히 알고 그 일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그릇을 부러워할 것도 없고 나의 질그릇 됨을 나무랄 것도 없습니다. 오직 나됨의 위치와 그 기능을 생각하면서 그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시편 84:10에 보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반드시 장관이 되고, 교수가 되어야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문지기는 문지기대로 있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2:22 말씀에 보면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 몸의 지체 중에 약하게 보이는 부분이 더 소중하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중에도 약한 존재가 더 중요하게 쓰여지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나의 나됨, 내게 주어진 기능을 분명히 알고, 그 길을 가야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주신 말씀의 결론을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자하는 중요한 문제는 금 그릇이냐? 은그릇이냐? 혹은 나무그릇이냐? 질그릇이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릇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필요한 한 가지 조건이 있으니 그것은 곧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하므로 귀히 쓰는 그릇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의 부엌 생활에서도 쉽게경 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갑작스럽게 부엌에 들어가서 필요한 그릇을 쓰고자 할 때 어느 그릇을 쓰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비록 아무리 좋은 그릇이 있다하더라도 더러워진 그릇은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깨끗하게 씻어서 준비해 놓은 그릇을 선뜻 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 본문 말씀 마지막 부문을 보면 "예비함이 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릇은 항상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깨끗한 그릇이 쓰여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쓰여지는 깨끗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의 보혈로 깨끗해져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렇게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하고 있노라면 언제든지 주님의 손에 들려서 소중하게 쓰여질 것입니다. 심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가 복수심이요, 두 번째는 야심이며, 세 번째는 질투심, 네 번째는 욕심, 그리고 다섯 번째는 교만이라고 합니다. 실로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왜 더러워지는 것이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모두 이상 다섯 가지의 이유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이것들을 깨끗이 씻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수를 갚겠다는 복수심 대신에 사랑해야 하며, 야심 대신에 자기분수를 알아야 하고, 질투하는 마음 대신에 온유하며, 욕심 대신에 나누고 베풀며, 교만 대신에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리하여 깨끗한 그릇이 되기만 하면 언제든지 주님의 손에 들리어 쓰여지는 것입니다.
주인은 재주 좋은 사람을 반가와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사람, 충성된 사람을 좋아합니다. 따라서 쓰여지는 사람은 결코 재주 많은 사람이 아니라 충성된 사람, 그리고 겸손한 사람이 쓰여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들, 즉 진실이나 믿음, 충성, 겸손, 같은 것은 저 멀리 밀쳐내어 놓고 우선 능력이나 지위, 소유등에 관심을 모으고 있으니 잘못된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결코 그런 기준에 의해서 쓰여지지를 않습니다. 그릇이 쓰여지는 조건은 모든 것에 앞서 깨끗해야 합니다. 얼마 전 우리들은 농약이 묻은 봉지에 싸여진 과자를 먹은 어린 아이들이 생명을 잃고 죽어간 안타까운 사실을 보도를 통해 들은 바 있습니다. 결국 이 사건도 그릇이 깨끗하지 못해서 일어난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그릇이 깨끗하지 못하고 무엇인가 묻어 있으면, 그로 인해 소위 혼합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알고 보면 혼합주의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그릇은 언제나 깨끗하여야 합니다. 비록 지식이나 능력은 없다하더라도 깨끗한 그릇만 되어준다면, 언제이고 주인의 손에 들리워서 이미 그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대로 쓰여질 것입니다.
이 깨끗한 그릇이란 진실과 충성과 감사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에 반하여 원망과 불평, 짜증스러운 마음과 욕심 등으로 더러워진 그릇은 쓰여질수가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에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큰 집 그릇들(디모데후서 2:19-21)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우리는 앞장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적 가치를 질그릇에 비유한 사도 바울의 말씀을 생각한 바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는 조금 다른 차원이 기능적인 면에서의 그릇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질그릇으로 설명하고 그 인간의 기능, 곧 어떻게 쓰여지나 하는 것을 그릇을 통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공통적으로 생각할 것은 그 그릇은 나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이 그릇이 우리의 그릇이 아니요, 어디까지나 주님의 그릇이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그릇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릇의 가치는 그 쓰여짐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자기의 존재 가치가 어떤 것인가를 모르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어떤 국민학교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은 후 두고 두고 기억하며 아쉬워할 때가 있습니다. 국민학교 선생님이라면 참으로 귀한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잘 가르쳐 키워놓으면 그 속에서 온갖 훌륭한 인물들이 다 나오는 것이고 보면, 사실은 대통령도 부럽지가 않는 것이 국민학교 선생님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중 계속 말을 듣지 않자 한숨을 쉬면서 하는 말이 "이 녀석들아 공부 열심히 해라.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나 같이 된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선생님의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선생님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인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공부 안 하면 나 같이 된다! 일 얼마나 기가 차고도 한심한 이야기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돈이 많으면 귀하신 몸입니까? 지위가 높으면 귀하신 몸입니까? 우리는 지난날 자유당 시절의 유행했던 "귀하신 몸"이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지위가 높다하여 그 아들에게까지 붙여졌던 귀하신 몸! 그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귀하신 몸이 되는 데에는 심지어 그 사람의 지식이나 명예 따위도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 사람의 속사람 됨이요, 그리고 그가 어디에 쓰여지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머리가 좋은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좋은 머리를 나쁜데 쓴다면, 그처럼 잘못된 인간은 없는 것입니다. 이에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없는 교육이란 약빠른 악마를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여러분들께서 자녀들에게 신앙을 넣어주지 못한 채 공부만 하게 한다면, 언젠가는 그 자녀로 인해 가슴을 치며 탄식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을 맞게 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알고 신앙적인 양심과 인격이 선 다음에 지식도 있고 명예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근본적인 것이바로 서지 못한 상태라면, 결국 그 사람의 인격은 마귀에 의해서 조종되고 쓰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 가치는 내가 누구의 손에 의하여 쓰여지느냐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나를 필요로 하는 자를 찾아야 하고,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하는 자를 위하여 전적으로 쓰여져야 하며, 또한 그렇게 쓰여짐을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억지로 하는 것은 고통뿐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일을 하는 것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수고하는 것이라면, 기쁘게 할 수 있어야지 "어쩌다 이 팔자가 되었나!"하고 짜증스레 하였다면 그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무슨 일을 하든지 아주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가끔 저에게 건강의 비결이 무엇이냐며 물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이면 저는 "무슨 일을 하든지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된다."고 말해 줍니다.
여러분! 하나에서 열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건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들려 하나님의 일에 쓰여진다는 것은 최고의 즐거움이요, 교회를 위하여 봉사한다는 것은 최고의 영광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생의 가치와 의미가 있고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집에 있는 그릇'이라고 하는 자기 존재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어야 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큰집이란 교회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교회는 어떤 개교회를 뜻하기보다는 큰 의미에서의 우주적인 하나님의 교회를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큰 교회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음인데, 이를 다르게 표현하여 '그릇'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 소유의 사람들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속받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가치가 있다 없다라며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 주심으로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구속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그만큼 소중한 값어치가 있음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켜 오늘 본문에서는 그릇으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그릇됨을 전제함에 있어서 먼저 '주인의 것'임을 인식해야 된다는 사실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것이라고 할 때에 주의할 것은 모든 것이 주인의 것이 된다는 것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노예 제도가 있던 당시에 어떤 한 노예가 있다면 그 노예는 몸만 주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그의 재능, 건강, 마음, 기분 그가 벌어온 돈, 심지어는 결혼을 해서 얻게 된 자녀까지도 모두 주인의 것이 되는 것을 봅니다. 마찬가지로 그릇에 대한 바른 개념은 모든 것이 주인의 것일 뿐 나의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여러분 자신의 것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젊음도 재주도 가진 바의 물질도, 그 아름다운 목소리와 예술성도 모두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중 어느 것도 나의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만을 위하여 쓰여져야 합니다. 주인의 것은 주인의 필요에 따라 쓰여지는 것입니다. 주인 앞에서 내 마음대로 필요하고 안하고를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자랄 때에 보면 제가 생각하기에는 별 필요할 것 같지가 않아서 아버님께 "이것 그냥 버리시지요?"하고 말씀 드리면 "놓아두면 다 쓸데가 있다."라고 하시면서 기어이 나무막대기 하나라도 챙겨 보관을 해 두시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니 그렇찮아도 5대째 살아온 낡은 집의 구석구석에는 별별 구질구질한 물건들이 다 들어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어떤 것은 몇 십년이 되었다는 것인데 그러면서도 하시는 말씀 역시"그냥 두면 다 쓸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귀찮아 내어버리겠다고 하지만은 살림을 꾸려 가는 어른들에게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주인이 보기에는 필요한 것이요, 필요해서 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하지 않는 자를 이 땅에 두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참으로 쓸모가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에게는 꼭 필요한자이기에 오늘 나를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내 자신을 필요 하는 가치가 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필요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가치는 상대적 가치가 아닌 절대적 가치로서 나의 어떠한 조건에도 상관없이 그가 나를 사랑하시기에 나를 필요로 하는 절대적 사랑의 필요에 의한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이야기가 바로 그 점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아 나간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하며 그 재산을 다 허비한 다음 굶주린 거지가 되어 돌아올 때, 그에게 무슨 체면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이제는 아들이 아닌 품꾼으로 있겠다며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품꾼은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일도 관록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냥 먹고 놀던 사람이 마음먹고 땅이라도 파겠다며 덤벼들어 보지만 5분만 파고 나면 손에 물집이 잡히고 마는 것이란 말입니다. 땅을 파더라도 땅을 파던 자가 팔 수 있고, 물건 하나를 들어도 들어본 사람이 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탕자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겠다고 품꾼으로 있겠다는 것입니까? 사실 그로서는 아들노릇 하기가 쉬운 것이지, 양반의 종노릇 하기는 더 힘든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만큼 이 탕자는 자기가 자기를 생각할 때에는 아무 데도 쓸모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상대적 가치로 볼 때에는 전혀 쓸모가 없는 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볼 때에는 내 아들! 그것도 죽었다가 돌아온 사랑하는 내 아들이란 말입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일을 할 수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으며, 기술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단지 그가 필요로 되어진 것은 아버지께서 너는 나의 둘째 아들로서 필요하다고 하셨기 때문에 필요해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배운 바가 있다고 필요해지는 것도 아니요, 능력이 있다고 필요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면 나는 필요한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으로 생각할 문제는 주어진 기능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여 큰집에는 금 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등 여러 종류의 그릇이 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 있어서도 금 그릇과 같은 사람, 은그릇과 같은 사람, 그리고 나무그릇, 질그릇과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금 그릇은 값은 비싸겠지만 쓰는 일이 거의 없이 그저 누가 가져갈까 봐서 항상 어딘가 모르게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나무그릇이나 질그릇 같은 것은 매일같이 쓰여집니다.
사실을 두고 생각해 보면, 주인의 손에서 많이 쓰여지는 그릇이 좋은 그릇이지 귀하다고 한쪽 구석에 세워만 두는 그릇이 진정 그렇게 중요한 그릇이겠습니까?
저는 미국의 은행에서 우리와는 다른 견해와 그에 따르는 대우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은행장의 말에 의하면, 그 은행의 여러 직원들 중에서 저기 맨 앞에 앉은 아가씨가 가장 많은 보수를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가씨는 소위 텔러(teller)라고 하여 맨 앞에 앉아서 금전 출납을 하는 계원입니다. 그런데 이 아가씨가 가장 많은 보수를 받는 이유는 일을 가장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저 만큼 뒤에 앉아서 편안히 도장이나 찍어주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그 보다는 맨 앞에 앉아서 많은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 가장 많은 보수를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은 인기도 좋아야 하고 말도 잘하며 외모도 아름다워야 된다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은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가씨는 돈을 내어 주면서도 꼭 한 마디씩 무엇인가 애교 있는 말을 하여 상대방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은행장의 말을 듣고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기에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많이 쓰여지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잘 쓰여지는가 할 때 일단 소위 말하는 귀하신 몸은 잘 쓰여지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그릇됨을 살펴볼 때, 각양 각색의 그릇이 다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의 아이큐가 180인가 하면, 어떤 사람은 150, 또는 어떤 사람은 80, 90 등 그 지적 능력이 각각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람, 병든 사람, 키가 작은 사람, 큰 사람, 성격이 급한 사람, 느린 사람 등등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인간 사회는 이와 같이 다양한 사람들을 고루 고루 필요로 합니다. 가끔 큰 회의 같은데서 보면,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말을 많이 하는 사람도 있고 성격이 급한 사람도 있습니다. 대개 보면 말을 하는 사람이 계속하는지라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을 향해 "자기 혼자 다 한다."며 불평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만은 제가 생각해 본 결과 몇 사람이 그렇게 열심히 말을 하지 않으면 회의가 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시간이 끝나고 나면 그렇게 말한 사람들을 향해서 "내 말까지 다 해 주어서 고맙습니다."하고 꼭 한마디 인사를 하고는 합니다. 우선 듣고 앉았기에는 아예 언권에 대한 전매특허라도 받은 것 같지만 결국은 그 몇 사람들이 말을 함으로써 자꾸 듣다보면 안건이 점점 분명해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놓고 보더라도 베드로처럼 성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마와 같이 의심이 많은 사람 등 그 외모나 성격, 재능이 모두 다릅니다. 주인에게 있어서는 이 모두가 다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성공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놓일 자리에 놓이면 성공인 것입니다. 따라서 한없이 출세만 바라보는 사람처럼 바보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내게 주신 바가 무엇인가를 아는데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놓여 그 일을 즐기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것을 가리켜 신학에서는 효과적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내가 그 자리에 있도록 나를 그렇게 이 땅에 보내신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질그릇이냐? 은그릇이냐 하는 나의 그릇됨의 성격을 분명히 알고 그 일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그릇을 부러워할 것도 없고 나의 질그릇 됨을 나무랄 것도 없습니다. 오직 나됨의 위치와 그 기능을 생각하면서 그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시편 84:10에 보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반드시 장관이 되고, 교수가 되어야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문지기는 문지기대로 있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2:22 말씀에 보면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 몸의 지체 중에 약하게 보이는 부분이 더 소중하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중에도 약한 존재가 더 중요하게 쓰여지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나의 나됨, 내게 주어진 기능을 분명히 알고, 그 길을 가야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주신 말씀의 결론을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자하는 중요한 문제는 금 그릇이냐? 은그릇이냐? 혹은 나무그릇이냐? 질그릇이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릇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필요한 한 가지 조건이 있으니 그것은 곧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하므로 귀히 쓰는 그릇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의 부엌 생활에서도 쉽게경 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갑작스럽게 부엌에 들어가서 필요한 그릇을 쓰고자 할 때 어느 그릇을 쓰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비록 아무리 좋은 그릇이 있다하더라도 더러워진 그릇은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깨끗하게 씻어서 준비해 놓은 그릇을 선뜻 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 본문 말씀 마지막 부문을 보면 "예비함이 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릇은 항상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깨끗한 그릇이 쓰여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쓰여지는 깨끗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의 보혈로 깨끗해져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렇게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하고 있노라면 언제든지 주님의 손에 들려서 소중하게 쓰여질 것입니다. 심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가 복수심이요, 두 번째는 야심이며, 세 번째는 질투심, 네 번째는 욕심, 그리고 다섯 번째는 교만이라고 합니다. 실로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왜 더러워지는 것이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모두 이상 다섯 가지의 이유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이것들을 깨끗이 씻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수를 갚겠다는 복수심 대신에 사랑해야 하며, 야심 대신에 자기분수를 알아야 하고, 질투하는 마음 대신에 온유하며, 욕심 대신에 나누고 베풀며, 교만 대신에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리하여 깨끗한 그릇이 되기만 하면 언제든지 주님의 손에 들리어 쓰여지는 것입니다.
주인은 재주 좋은 사람을 반가와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사람, 충성된 사람을 좋아합니다. 따라서 쓰여지는 사람은 결코 재주 많은 사람이 아니라 충성된 사람, 그리고 겸손한 사람이 쓰여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들, 즉 진실이나 믿음, 충성, 겸손, 같은 것은 저 멀리 밀쳐내어 놓고 우선 능력이나 지위, 소유등에 관심을 모으고 있으니 잘못된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결코 그런 기준에 의해서 쓰여지지를 않습니다. 그릇이 쓰여지는 조건은 모든 것에 앞서 깨끗해야 합니다. 얼마 전 우리들은 농약이 묻은 봉지에 싸여진 과자를 먹은 어린 아이들이 생명을 잃고 죽어간 안타까운 사실을 보도를 통해 들은 바 있습니다. 결국 이 사건도 그릇이 깨끗하지 못해서 일어난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그릇이 깨끗하지 못하고 무엇인가 묻어 있으면, 그로 인해 소위 혼합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알고 보면 혼합주의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그릇은 언제나 깨끗하여야 합니다. 비록 지식이나 능력은 없다하더라도 깨끗한 그릇만 되어준다면, 언제이고 주인의 손에 들리워서 이미 그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대로 쓰여질 것입니다.
이 깨끗한 그릇이란 진실과 충성과 감사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에 반하여 원망과 불평, 짜증스러운 마음과 욕심 등으로 더러워진 그릇은 쓰여질수가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에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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