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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종(로마서 6장 15절~23절)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으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例) 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1945년 8월 15일 오후였습니다. 우리 마을 교회의 목사님이 우리 할아버지를 찾아오셨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교회 장로님이었습니다. 한걸음에 달려오셔서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무조건 항복하여 우리 나라가 해방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두 분이 서로 부둥켜안고 오래도록 눈물로 하나님께 감사기도 드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미상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저는 어렸던 탓에 그 감격을 그토록 마음속 깊이 느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두 분의 그런 모습을 지켜본 느낌은 지금까지도 생생합니다.
해방되고 근 한 달여는 마을이 온통 축제분위기였습니다. 밤새 태극기를 그려서 다음날 그 태극기를 손에손에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온 거리를 뛰어다녔습니다. 날마다 환희와 감격으로 충만했었습니다.
그런 어느날,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가보고 깜짝놀랐습니다.
책상이니 의자니 하는 것들이 모조리 부숴져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자 실험실 생각부터 납디다. 실험실에는 평소 제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하던 귀한 실험기구들이 많았습니다. '실험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저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가보았습니다. 그러나 '행여나'하고 기대했던 마음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 훔쳐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예 쓸 수 없도록 박살나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저는 속으로 탄식했습니다. '이것이 자유란 말인가!'
자유는 주어졌으나 그 소중함을, 그 가치를 모르기에 그 자유를 향유할 수도, 지킬 수도 없었습니다. 거기에 얼마만큼의 귀한 가치가 지불되어야 하는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자유는 혼란이 아닙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자유해서는 안될 사람에게 자유가 주어질 때에 저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됩니다. 감옥에 들어가 있어야 할 사람이 밖에서 설치고 돌아다니니 세상이 시끄러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한테도, 남한테도 불행입니다. 자유를 가질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주어져서는 안됩니다. 자유 할 만한 사람에게만 자유가 주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자유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입니까? 자유하지 말아야 할 사람은 자유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이 의요 진리요 평화입니다. 자유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자유에는 무거운 책무가 따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자유'와 '자유인'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혹은 지적으로 자유가 주어질 수는 있습니다만 자유인이 되는 것은 그것과는 별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50여 년 가까이 줄곧 자유를 공부해왔습니다. 아직도 공부하는 중입니다. 이렇듯 자유가 주어지는 것과 자유인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자유의 의미를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셔서 에덴동산에 내셨습니다. 그리고 동산 가운데 선악과를 두시고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서 엄청난 자유를 부여받았습니다. 만물을 다스리고, 나 자신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자유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에 자유가 있습니다. 믿음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바로 피조물된 자유입니다. 세상 어디에고 절대적 자유는 없습니다. 예컨대 물고기는 마음대로 헤엄쳐 다닐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습니까?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자유가 아닌 죽음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정치․ 경제․문화의 모든 면에서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피조물 된 자유, 그 진정한 뜻을 다시 한번 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중요한 문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인간이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타락하였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하면서 환경이 바꾸어졌고 사람이 죽음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인간성 자체가 변질된 것입니다. 자유의 개념도 병리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자의 자유가 무엇입니까? 방종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자유만이 진정한 자유가 됩니다. 죄를 지어서 타락하고 급기야 죄의 노예가 된 자의 자유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한번 죄를 지으면 계속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한번의 거짓말이 회개하지 않을 때에 또 다른 거짓말을 낳지 않습니까? 죄지은 사람은 거듭 죄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형벌의식에 매입니다. 죄짓는 자의 마음에는 늘 불안이 끊이지 않습니다. 감기만 걸려도 "아이쿠, 내 죄 때문이다" 합니다.
사업이 실패해도 "이제 저주를 받는구나. 지난날 지은 죄의 대가가 오늘 돌아오는구나"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식사를 하는 잠깐동안에도 무려 여섯 대의 담배를 피웁디다. 끊임없이 불안해합니다.
음식조차 마음 편히 먹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것을 보면서 죄짓고 사는 것도 어지간히 힘든 일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론 단잠을 잘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죄인은 영원히 자유하지 못합니다. 언제 어디서고 불안해합니다.
그런가하면 변명죄에 빠집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에덴동산에서의 사건을 보십시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고 추궁하십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이 때 아담이 "제가 먹었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하고 뉘우쳤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랬다면 적어도 try again---- 하나님께서 한번 더 기회를 주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작 한다는 소리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입니다. 끝내 회개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와 또한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습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감히 하나님 앞에 될 법이나 한 소리입니까? 아주 뿌리깊은 죄입니다. 나의 책임을, 나의 죄를 남에게 전가하고 변명하려듭니다. 회개의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행위가 이렇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제 잘못입니다"라고 한마디 해버리면 끝날 것을 그것을 못하고 삽니다. 값싼 자존심과 명예 때문에 일생토록 어두운 그림자를 안고 살아가는 불쌍한 심령들, 회개의 자유를 잃어버린 불쌍한 노예의 모습을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루소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10대는 케이크에 매이고, 20대는 연인에 매이고, 30대는 쾌락에 매이고, 40대는 야심에 매이고, 50대는 탐욕에 매이고, 60대는 절망에 매인다." 여러분은 얼마만큼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진정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합니까?
중생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기에 이 사실을 믿는 자마다 자유할 수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사망으로부터의 자유, 저주로부터의 자유, 사단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율법과 진노로부터의 자유 ---- 이 온전한 자유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요 그리스도인의 속성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또한 이후에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자유 안의 자유인으로 은혜 가운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어려움이 따릅니다. 마르틴 루터는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전반에 걸쳐서 논리정연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도 바로 그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주의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예수를 믿고 진실하게 살려 할 때에 자칫 율법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형식주의, 외식주의, 공로주의, 자기 선, 자기 의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자기교만에 빠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요즈음도 믿는다는 사람들 가운데 형식만 남고 내용은 없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내가 남보다 더 잘 믿는 것만 같습니다. 나는 하지 않으면서 남 선한 일하는 것을 비판합니다. 그실 이런 사람은 선행을 해도 문제입니다.
이름을 나타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교회를 대표하여 공산권 선교라든가 사회사업 같은 봉사를 여러 방면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 돈으로가 아니라 모두가 여러분의 협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다보니 참으로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본인의 이름으로 하라든가 기자회견이라도 열고 시작하면 기부금이 얼마든지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라 하면 안나옵니다.
절대로 모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나의 이름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중구난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들 조금씩 협력하여 이루면 엄청난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다만, 제각기 내 이름으로 하겠다고 하여 문제입니다. 내 이름으로 예배당을 짓겠다느니, 사회주의 국가에 가서 무엇을 하겠다느니 하며 이름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가만히 보면 그리 좋은 이름도 아닙디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마음이 있습니다. 내 이름을 알아주면 열심히 봉사하고 이름 없이 하자 하면 다 도망가버리고 맙니다. 내가 언제 예수 믿었느냐는 태도입니다. 기도를 해도 나를 위함입니다. 봉사를 해도 나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어느 사이엔가 이렇게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렸습니다. 형식주의자, 외식주의자 ---- 바리새주의적인 태도가 문제입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더구나 선교는 은밀히 해야 될 일이 많습니다. 뭘 좀 합시다 하면 왜 생각도 없이 저마다 내 이름으로만 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까? 신문에 이름이 나야만 기분이 좋습니까? 율법주의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비참한 인간으로 타락하고 만 것입니다.
여기에 자유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 가운데 그리 넉넉지 못한 분이 한 분계십니다. 3년 동안 열심히 저축을 하여 몇백만 원을 모았습니다. 그 돈을 한푼도 빼지 않은 채 안과병원인 실로암병원으로 가지고 가서 원장을 만나 건네주고 앞 못보는 사람들의 개안수술 비용으로 써달라고 합니다. 원장으로서야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도대체 누구냐고, 이름 석 자라도 알려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내가 누구라고 끝내 밝히지 않습니다. 소망교회 권사라는 것만 밝히고는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원장이 제게 전화를 걸어 알려줍디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봉사를 한다고 하지만 이렇듯 깨끗한 봉사는 처음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소망교회 교인이었다면서 '목사님께서 자랑스럽게 여기시라고' 전화를 걸었다고 원장은 말합니다. 제가 그분을 위하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내 정욕, 내 이름, 내 명예 ---- 이런 것이나 열심히 챙기는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오직 예수,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깨끗하게 했던 일이 몇 가지나 있습니까? 변변치 않은 명예에 매여 저를 알아 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안됐습니다. 어쩌다 이렇듯 초라해졌는지, 한심할 때가 많습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고 성경은 누누이 말씀합니다. 무질서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본디 사랑에는 낭비성이 있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자칫 잘못하면 탕아가 되기 쉽습니다. 사랑에는 언제나 이러한 낭비성이 좀은 있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진리의 새 질서를 지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고 있습니까? 아무리 자유해도 상관없는 그러한 자유인입니까? 혹은 무엇엔가 매인 존재입니까? 방종과 무질서는 자유가 아닙니다. 또 다른 노예인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갑니다. 아버지가 돈을 주었기에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또 하나의 탕자의 마음이 되어 아들에게 재산을 주어 나갈 수 있게 했습니다. 그 재산을 다 없애서라도 새사람, 귀한 아들이 되어 다시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유는 방종과 무질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나의 나됨을 직시해야 합니다. 나의 존재의식에 진실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생각합니다.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그리고 로마서 7장에서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한편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한편으로는 의의 법을 섬긴다, 마음으로는 간절히 주의 뜻을 이루고자 하나 이룰 수가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지을 때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그는 비결을 깨닫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복종하게 하다' --헬라어로 '둘라 고고우'라는 이 말은 노예를 길들이듯이 길들인다는 뜻입니다. '나'라는 인간은 조금만 풀어줘도 비뚤어진다, 자유를 주면 잘못된다, 그러기에 쳐서 복종케 해야 할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육체의 가시도 있고 고통도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My graces is sufficient for you.'----'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는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받은 은혜에 만족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할 그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어 5장 24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조금의 여유만 있어도 게을러집니다. 조금의 자유만 주어져도 나쁜 방향으로 나갑니다. 그러한 존재이기에 나에게 고통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역경이 나를 위해서나 선교사업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나에게도 역경이 있어야 할 것입니까?
제가 잘 알고 지내는 후배 목사 가운데 이러한 분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인데 여기저기 오라는 데를 다 마다하고는 문둥병 환자들의 마을에 들어가서 고생고생하며 목회하고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물어보았습니다. "자네는 왜 다른 사람들이 다 꺼려하는 이곳에 들어와 사서 고생을 하는가?" 그는 조용히 대답합니다. "목사님은 제 과거를 모르시지요? 저는 전과자입니다. 몇 번이나 감옥을 들락거렸는데도 아직 청산이 덜 되었는지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마음이 나쁜 쪽으로 움직입니다. 이 문둥병 환자들과 함께 살아야 그러한 생각이 안 들고 무사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돈이 무제한으로 주어져도 괜찮겠습니까? 명예가 한없이 주어져도 겸손할 수 있겠습니까? 나 자신을 바로 평가해보십시다. 때로 우리는 병들기도 하고 실패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반드시 필요하기에 있는 일입니다.
내 소중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만큼의 제약이 있어야 한다는 신앙고백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다시 종이 되어야 합니다. 자유를 반납해야 합니다. 자유를 위하여 자유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인이 됩니다.
결혼이 무엇입니까? 결혼은 한 사람에게 매이는 것입니다. 흔히들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고 말합니다마는 정말로 그런 것일까요? 한 여자를 사랑하고 한 남자를 사랑하고 그 안에서 자유 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결혼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보면 그릇된 의미의 자유부인들이 참 많습니다. 가정을 지키고 자녀들을 키우는 것이 불만스러운 것입니다. 그 좁은 공간이 답답해서 뛰쳐나가는 주부들이 자유부인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답답하다고 생각하는 거기서 무한한 자유를 향유할 수 있을 때에 그가 진정 자유한 사람입니다. 뛰쳐나가 보니 어떻습니까? 자유합니까? 더 큰 고통과 속박에 얽매이는 것은 아닙니까? 결혼은 가정이라는 자유로운 세계에 사는 것이요 한 사람 사랑하는 것을 무한한 자유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절대로 속박이 아닙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자유요 사랑이 없을 때에 속박입니다. 우리가 받은 자유를 완전히 반납해버릴 때에 참 자유를 누리는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구약 신학자 부르거만(Bruggerman)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은 'Who I am?' 이라고 정의될 것이 아니라 'Whose I am?'이라고 정의되어야 한다." '내가 누구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의 것이냐' '내가 누구를 위한 존재냐'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과거의 우리는 분명 죄를 섬기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를 섬기고 삽니다. 어제의 우리는 죄짓는 자유를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의를 행하는 자유를 누리고 삽니다. 여러분은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내 남편은 목사였다」라는 제목의 책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책의 저자인 피터 마샬 부인(Mrs. Peter Marshall)을 제가 만나보았습니다. 제목이 지적하는 '내 남편' 피터 마샬은 미 상원의 전속 목사였습니다. 그가 상원 개원 때에 드렸던 기도문 가운데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주여, 자유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권리가 아니라 옳은 일을 기쁘게 하는 기회라는 것을 알게 해주시옵소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 함입니다. 자유는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주의는 이데올로기에 매이고 자본주의는 경쟁과 욕심에 매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환경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섬길 때, 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진리가 그를 자유케 할 때, 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성령이 역사할 때, 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참사랑과 감사와 기쁨과 감격, 그 안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를 얻는 자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유의 종(로마서 6장 15절~23절)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으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例) 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1945년 8월 15일 오후였습니다. 우리 마을 교회의 목사님이 우리 할아버지를 찾아오셨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교회 장로님이었습니다. 한걸음에 달려오셔서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무조건 항복하여 우리 나라가 해방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두 분이 서로 부둥켜안고 오래도록 눈물로 하나님께 감사기도 드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미상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저는 어렸던 탓에 그 감격을 그토록 마음속 깊이 느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두 분의 그런 모습을 지켜본 느낌은 지금까지도 생생합니다.
해방되고 근 한 달여는 마을이 온통 축제분위기였습니다. 밤새 태극기를 그려서 다음날 그 태극기를 손에손에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온 거리를 뛰어다녔습니다. 날마다 환희와 감격으로 충만했었습니다.
그런 어느날,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가보고 깜짝놀랐습니다.
책상이니 의자니 하는 것들이 모조리 부숴져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자 실험실 생각부터 납디다. 실험실에는 평소 제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하던 귀한 실험기구들이 많았습니다. '실험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저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가보았습니다. 그러나 '행여나'하고 기대했던 마음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 훔쳐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예 쓸 수 없도록 박살나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저는 속으로 탄식했습니다. '이것이 자유란 말인가!'
자유는 주어졌으나 그 소중함을, 그 가치를 모르기에 그 자유를 향유할 수도, 지킬 수도 없었습니다. 거기에 얼마만큼의 귀한 가치가 지불되어야 하는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자유는 혼란이 아닙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자유해서는 안될 사람에게 자유가 주어질 때에 저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됩니다. 감옥에 들어가 있어야 할 사람이 밖에서 설치고 돌아다니니 세상이 시끄러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한테도, 남한테도 불행입니다. 자유를 가질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주어져서는 안됩니다. 자유 할 만한 사람에게만 자유가 주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자유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입니까? 자유하지 말아야 할 사람은 자유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이 의요 진리요 평화입니다. 자유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자유에는 무거운 책무가 따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자유'와 '자유인'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혹은 지적으로 자유가 주어질 수는 있습니다만 자유인이 되는 것은 그것과는 별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50여 년 가까이 줄곧 자유를 공부해왔습니다. 아직도 공부하는 중입니다. 이렇듯 자유가 주어지는 것과 자유인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자유의 의미를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셔서 에덴동산에 내셨습니다. 그리고 동산 가운데 선악과를 두시고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서 엄청난 자유를 부여받았습니다. 만물을 다스리고, 나 자신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자유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에 자유가 있습니다. 믿음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바로 피조물된 자유입니다. 세상 어디에고 절대적 자유는 없습니다. 예컨대 물고기는 마음대로 헤엄쳐 다닐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습니까?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자유가 아닌 죽음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정치․ 경제․문화의 모든 면에서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피조물 된 자유, 그 진정한 뜻을 다시 한번 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중요한 문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인간이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타락하였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하면서 환경이 바꾸어졌고 사람이 죽음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인간성 자체가 변질된 것입니다. 자유의 개념도 병리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자의 자유가 무엇입니까? 방종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자유만이 진정한 자유가 됩니다. 죄를 지어서 타락하고 급기야 죄의 노예가 된 자의 자유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한번 죄를 지으면 계속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한번의 거짓말이 회개하지 않을 때에 또 다른 거짓말을 낳지 않습니까? 죄지은 사람은 거듭 죄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형벌의식에 매입니다. 죄짓는 자의 마음에는 늘 불안이 끊이지 않습니다. 감기만 걸려도 "아이쿠, 내 죄 때문이다" 합니다.
사업이 실패해도 "이제 저주를 받는구나. 지난날 지은 죄의 대가가 오늘 돌아오는구나"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식사를 하는 잠깐동안에도 무려 여섯 대의 담배를 피웁디다. 끊임없이 불안해합니다.
음식조차 마음 편히 먹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것을 보면서 죄짓고 사는 것도 어지간히 힘든 일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론 단잠을 잘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죄인은 영원히 자유하지 못합니다. 언제 어디서고 불안해합니다.
그런가하면 변명죄에 빠집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에덴동산에서의 사건을 보십시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고 추궁하십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이 때 아담이 "제가 먹었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하고 뉘우쳤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랬다면 적어도 try again---- 하나님께서 한번 더 기회를 주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작 한다는 소리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입니다. 끝내 회개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와 또한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습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감히 하나님 앞에 될 법이나 한 소리입니까? 아주 뿌리깊은 죄입니다. 나의 책임을, 나의 죄를 남에게 전가하고 변명하려듭니다. 회개의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행위가 이렇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제 잘못입니다"라고 한마디 해버리면 끝날 것을 그것을 못하고 삽니다. 값싼 자존심과 명예 때문에 일생토록 어두운 그림자를 안고 살아가는 불쌍한 심령들, 회개의 자유를 잃어버린 불쌍한 노예의 모습을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루소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10대는 케이크에 매이고, 20대는 연인에 매이고, 30대는 쾌락에 매이고, 40대는 야심에 매이고, 50대는 탐욕에 매이고, 60대는 절망에 매인다." 여러분은 얼마만큼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진정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합니까?
중생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기에 이 사실을 믿는 자마다 자유할 수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사망으로부터의 자유, 저주로부터의 자유, 사단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율법과 진노로부터의 자유 ---- 이 온전한 자유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요 그리스도인의 속성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또한 이후에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자유 안의 자유인으로 은혜 가운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어려움이 따릅니다. 마르틴 루터는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전반에 걸쳐서 논리정연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도 바로 그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주의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예수를 믿고 진실하게 살려 할 때에 자칫 율법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형식주의, 외식주의, 공로주의, 자기 선, 자기 의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자기교만에 빠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요즈음도 믿는다는 사람들 가운데 형식만 남고 내용은 없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내가 남보다 더 잘 믿는 것만 같습니다. 나는 하지 않으면서 남 선한 일하는 것을 비판합니다. 그실 이런 사람은 선행을 해도 문제입니다.
이름을 나타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교회를 대표하여 공산권 선교라든가 사회사업 같은 봉사를 여러 방면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 돈으로가 아니라 모두가 여러분의 협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다보니 참으로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본인의 이름으로 하라든가 기자회견이라도 열고 시작하면 기부금이 얼마든지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라 하면 안나옵니다.
절대로 모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나의 이름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중구난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들 조금씩 협력하여 이루면 엄청난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다만, 제각기 내 이름으로 하겠다고 하여 문제입니다. 내 이름으로 예배당을 짓겠다느니, 사회주의 국가에 가서 무엇을 하겠다느니 하며 이름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가만히 보면 그리 좋은 이름도 아닙디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마음이 있습니다. 내 이름을 알아주면 열심히 봉사하고 이름 없이 하자 하면 다 도망가버리고 맙니다. 내가 언제 예수 믿었느냐는 태도입니다. 기도를 해도 나를 위함입니다. 봉사를 해도 나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어느 사이엔가 이렇게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렸습니다. 형식주의자, 외식주의자 ---- 바리새주의적인 태도가 문제입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더구나 선교는 은밀히 해야 될 일이 많습니다. 뭘 좀 합시다 하면 왜 생각도 없이 저마다 내 이름으로만 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까? 신문에 이름이 나야만 기분이 좋습니까? 율법주의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비참한 인간으로 타락하고 만 것입니다.
여기에 자유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 가운데 그리 넉넉지 못한 분이 한 분계십니다. 3년 동안 열심히 저축을 하여 몇백만 원을 모았습니다. 그 돈을 한푼도 빼지 않은 채 안과병원인 실로암병원으로 가지고 가서 원장을 만나 건네주고 앞 못보는 사람들의 개안수술 비용으로 써달라고 합니다. 원장으로서야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도대체 누구냐고, 이름 석 자라도 알려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내가 누구라고 끝내 밝히지 않습니다. 소망교회 권사라는 것만 밝히고는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원장이 제게 전화를 걸어 알려줍디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봉사를 한다고 하지만 이렇듯 깨끗한 봉사는 처음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소망교회 교인이었다면서 '목사님께서 자랑스럽게 여기시라고' 전화를 걸었다고 원장은 말합니다. 제가 그분을 위하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내 정욕, 내 이름, 내 명예 ---- 이런 것이나 열심히 챙기는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오직 예수,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깨끗하게 했던 일이 몇 가지나 있습니까? 변변치 않은 명예에 매여 저를 알아 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안됐습니다. 어쩌다 이렇듯 초라해졌는지, 한심할 때가 많습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고 성경은 누누이 말씀합니다. 무질서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본디 사랑에는 낭비성이 있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자칫 잘못하면 탕아가 되기 쉽습니다. 사랑에는 언제나 이러한 낭비성이 좀은 있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진리의 새 질서를 지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고 있습니까? 아무리 자유해도 상관없는 그러한 자유인입니까? 혹은 무엇엔가 매인 존재입니까? 방종과 무질서는 자유가 아닙니다. 또 다른 노예인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갑니다. 아버지가 돈을 주었기에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또 하나의 탕자의 마음이 되어 아들에게 재산을 주어 나갈 수 있게 했습니다. 그 재산을 다 없애서라도 새사람, 귀한 아들이 되어 다시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유는 방종과 무질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나의 나됨을 직시해야 합니다. 나의 존재의식에 진실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생각합니다.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그리고 로마서 7장에서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한편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한편으로는 의의 법을 섬긴다, 마음으로는 간절히 주의 뜻을 이루고자 하나 이룰 수가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지을 때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그는 비결을 깨닫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복종하게 하다' --헬라어로 '둘라 고고우'라는 이 말은 노예를 길들이듯이 길들인다는 뜻입니다. '나'라는 인간은 조금만 풀어줘도 비뚤어진다, 자유를 주면 잘못된다, 그러기에 쳐서 복종케 해야 할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육체의 가시도 있고 고통도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My graces is sufficient for you.'----'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는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받은 은혜에 만족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할 그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어 5장 24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조금의 여유만 있어도 게을러집니다. 조금의 자유만 주어져도 나쁜 방향으로 나갑니다. 그러한 존재이기에 나에게 고통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역경이 나를 위해서나 선교사업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나에게도 역경이 있어야 할 것입니까?
제가 잘 알고 지내는 후배 목사 가운데 이러한 분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인데 여기저기 오라는 데를 다 마다하고는 문둥병 환자들의 마을에 들어가서 고생고생하며 목회하고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물어보았습니다. "자네는 왜 다른 사람들이 다 꺼려하는 이곳에 들어와 사서 고생을 하는가?" 그는 조용히 대답합니다. "목사님은 제 과거를 모르시지요? 저는 전과자입니다. 몇 번이나 감옥을 들락거렸는데도 아직 청산이 덜 되었는지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마음이 나쁜 쪽으로 움직입니다. 이 문둥병 환자들과 함께 살아야 그러한 생각이 안 들고 무사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돈이 무제한으로 주어져도 괜찮겠습니까? 명예가 한없이 주어져도 겸손할 수 있겠습니까? 나 자신을 바로 평가해보십시다. 때로 우리는 병들기도 하고 실패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반드시 필요하기에 있는 일입니다.
내 소중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만큼의 제약이 있어야 한다는 신앙고백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다시 종이 되어야 합니다. 자유를 반납해야 합니다. 자유를 위하여 자유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인이 됩니다.
결혼이 무엇입니까? 결혼은 한 사람에게 매이는 것입니다. 흔히들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고 말합니다마는 정말로 그런 것일까요? 한 여자를 사랑하고 한 남자를 사랑하고 그 안에서 자유 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결혼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보면 그릇된 의미의 자유부인들이 참 많습니다. 가정을 지키고 자녀들을 키우는 것이 불만스러운 것입니다. 그 좁은 공간이 답답해서 뛰쳐나가는 주부들이 자유부인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답답하다고 생각하는 거기서 무한한 자유를 향유할 수 있을 때에 그가 진정 자유한 사람입니다. 뛰쳐나가 보니 어떻습니까? 자유합니까? 더 큰 고통과 속박에 얽매이는 것은 아닙니까? 결혼은 가정이라는 자유로운 세계에 사는 것이요 한 사람 사랑하는 것을 무한한 자유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절대로 속박이 아닙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자유요 사랑이 없을 때에 속박입니다. 우리가 받은 자유를 완전히 반납해버릴 때에 참 자유를 누리는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구약 신학자 부르거만(Bruggerman)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은 'Who I am?' 이라고 정의될 것이 아니라 'Whose I am?'이라고 정의되어야 한다." '내가 누구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의 것이냐' '내가 누구를 위한 존재냐'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과거의 우리는 분명 죄를 섬기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를 섬기고 삽니다. 어제의 우리는 죄짓는 자유를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의를 행하는 자유를 누리고 삽니다. 여러분은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내 남편은 목사였다」라는 제목의 책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책의 저자인 피터 마샬 부인(Mrs. Peter Marshall)을 제가 만나보았습니다. 제목이 지적하는 '내 남편' 피터 마샬은 미 상원의 전속 목사였습니다. 그가 상원 개원 때에 드렸던 기도문 가운데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주여, 자유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권리가 아니라 옳은 일을 기쁘게 하는 기회라는 것을 알게 해주시옵소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 함입니다. 자유는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주의는 이데올로기에 매이고 자본주의는 경쟁과 욕심에 매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환경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섬길 때, 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진리가 그를 자유케 할 때, 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성령이 역사할 때, 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참사랑과 감사와 기쁨과 감격, 그 안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를 얻는 자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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