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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누가복음 12:1-5)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작품 가운데「폐문(No exit」이라고 하는 글이 있습니다. 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떤 세 사람이 문도 잠기고 거울도 없는 기괴한 방에 갇혀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마치 고문을 당하는 듯한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밀폐된 방에 갇혀 시간이 흐르다보니 원망과 불평도 늘어만 갑니다.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가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해보았지만, 그 모든 수고는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원망과 불평은 그대로 쌓여만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닫혔던 문이 갑자기 활짝 열리면서 그들에게 자유가 주어집니다. 어디로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그들 스스로가 감옥에 갇혀 있기를 소망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로 그곳에 남기를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갇혀 있을 때에는 갇혀 있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정작 닫혔던 문이 활짝 열리고 나니까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진 것입니다. 갇혀 있는 공간은 비좁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이루어지는 일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밖으로 나가면 이제 무슨 일이 있을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감옥에 갇히기를 원하게 된 것입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서 밀폐된 세계를 다시 선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원천적으로 심리적 병리현상입니다. '밀폐공포'라는 것이 있습니다. 갇힐까 염려하며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좀 넓게 살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좁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갇히고 밀폐된 다음에는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씁니다. 여기는 너무 좁다 하며 삽니다. 작은 집에 사는 사람들은 보다 넓은 집을 가져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조금이라도 '더 넓은 집, 더 큰 땅'을 원합니다. 이것이 밀폐공포에 젖어 사는 생리입니다.
그런가하면 반대로 '광장 공포'가 있습니다. '아고라포비아(agoraphobia)'라고 하는 이 공포증은 넓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가끔 외국에 나가보면, 옛날 왕들이 살던 왕궁을 누구나 관람하도록 박물관 같이 꾸며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왕궁 안에 있는 왕의 침실을 보았는데 참으로 넓습니다. 그런데 침대 위에는 지붕처럼 무엇을 비워놓아서 잠을 자는 공간을 좁게 만들었습니다. 넓으면 잠이 안 오고 불안하니까요.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들 자유니 뭐니 하며 넓게 넓게 살고자 하지만 넓어지는 것처럼 불안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더 무섭습니다. 어딘가에 내던져지는 것 같은 공포를 느끼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광장 공포'입니다.
또한 사람에게는 '동물 공포'가 있습니다. 동물이 살아남기 위해서 매사에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데, 그런 두려움을 일컬음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동물이 되는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공포증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높이 올라가는 것을 무서워하는 '고소 공포증'이 있습니다.
또 하나 뺄 수 없는 것은 '마이크로포비아(microphobia)'라고 하는, 세균에 대한 공포증입니다. 시시때때로 손을 씻고, 그릇도 깨끗하게---온갖 것들을 세균 없이 깨끗하게 하느라고 애를 씁니다. 이것 역시 공포증의 하나입니다. 대개 이런 쪽으로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 일찍 죽습니다. 자기도 괴롭고 남도 괴롭습니다. 아이들보고도 무조건 '손을 닦아라, 더럽다'하고 쉴새없이 닦달합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 뱃속에 깨끗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닐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더럽다 더럽다 말이 많습니다. 따지고 보면 더럽다는 개념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듯 결백 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균과, 더러움과, 불결함에 대한 이 같은 공포증도 큰 문제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두려움을 종합하여 생각해봅시다. 이것은 무지와 무능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실은 다 몰라서 그렇습니다.
좀더 깊이 알면 문제가 없는데, 조금 안다는 것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을는지 모르기 때문이요, 그것을 감당할만한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두려움은 불확실성 때문에 생겨납니다. 도대체 앞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경제, 정치, 대자연, 공해…… 앞으로 또 무슨 사건이 터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알기 때문에 두렵기도 합니다. 아예 아무 생각도 못하는 멍청한 사람에게는 아무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런데 겨우 조금 아는 것, 이것이 사람의 마음속에 공포를 줍니다. 다시 말하자면 합리적 이해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당위성에 대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만듭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땅에 종자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일껏 종자를 심어놓고는 그 싹이 나지 아니할까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종자를 뿌렸는데 싹이 안 나면 어떻게 하나? 가을에 추수를 못하면 어떻게 하나?'하고 안달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무엇을 심어 놓고 나서 그 싹이 날까봐 걱정하는 것입니다. 안 날까 하는 걱정이 아니라 날까봐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합리적인 지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덕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선한 일을 하고 나서 그에 상응하는 선한 보상이 없으면 불평을 합니다. 그리고 미리 '선한 결과가 따라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각하고 무서운 것은 미래에 대한 결정적 공포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습니다. 죄지은 사람은 무사하지 못합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노출될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심판의 그날이 오면 어떡하나 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포가 더 큰 것입니다. 이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다 처리되지 못한 과거도 중요합니다마는,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결정적 공포가 우리 마음을 항상 어지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를 자세히 관찰해본 일이 있습니까? 제 친구인 어느 목사님이 교회마당 한구석에 위치한 사택에서 진돗개 한 마리를 키웠습니다. 생김도 생김이려니와 짖는 것이 무척이나 사나웠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개는 아무 사람이나 보고 다 짖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 더 요란스럽게 짖고, 어떤 사람은 바로 앞을 지나가도 짖지 않습니다. 참 영리한 놈이구나 깊었습니다. 교인들이 수없이 오고가지만 절대로 짖지 않습니다. 혹 어린아이들을 물지는 않을까 하여 염려도 했었지만 역시나 어린아이들을 보고 물기는커녕 짖지도 않는답니다. 그렇게 똑똑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람을 보면 아주 정신없이 짖어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어느 심리학자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무엇인가 안정되지 못한 사람은 그 두려운 마음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몸이 떨린다고 합니다. 그 진동이 개의 촉각에 전달되어서 개가 짖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습을 보고 짖는 것이 아니라, 촉감에 의해서 알고 짖는 것입니다. 깜깜한 밤이라 누가 누군지 구별을 못해도 그 존재는 벌써 촉감으로 전달이 된가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얘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지은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두려움으로 벌벌 떨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의 정신도, 그의 몸도 다 약해지고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두려움에 떤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병리현상이며, 또한 이것은 오늘날 일어나는 병적 사건들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두려움 뒤에는 병적 사건들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는지 몰라서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반드시 있을 일입니다. 이것에 대한 이성적 추리와 양심의 비판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벌써 자기를 심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절대로 무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반드시 있을 일과, 그것에 대한 지식과, 미리 내려진 판단이 두려움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이라든가, 노쇠한다든가, 병든다든가 하는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죄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있을 일이요, 없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사실을 사실대로 수용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북한에는 지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습니다. 제가 북녘 땅에 한번 가보니 정말 숨겨진 문제가 많더군요. 보세요. 이미 온 세계가 개방되어 무엇이든 다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북쪽 세계는 도대체 무엇을 알아야 하고 자기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북쪽 분들과 만나서 얘기할 때에, 맨 처음에 무슨 말부터 시작할까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을 꺼낸 적이 있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고, 그리고 나서 이야기하십시다." 순간 그분들의 얼굴이 굳어집니다. 그렇게 한참동안 침묵이 흐른 다음에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라고 어렵게 대답을 합니다. 여기서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얘기는 끝난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고 사세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2절)"-----그렇습니다. 그 말씀대로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습니다. 알려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언젠가는 알려져야 합니다.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백일하에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드러나면 어떡하나? 알려지면 어떡하나?' 이런 것은 다 소용없습니다. 돈을 벌면 뭐합니까? 그 돈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돈이 좋은 침대를 사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단잠을 잘 수 있도록 만들어주지는 못합니다. 돈이 좋은 약을 사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건강을 보증해주지는 못합니다. 돈으로 책을 살수는 있어도, 돈이 좋은 머리를 만들어주지는 못합니다. 때로는 돈이 많은 친구와 나를 위로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게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정한 행복은 돈이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한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언젠가는 그것이 다 알려지고 나아가 자랑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알려진다 하니까 자살하는 사람 참 많습니다. 그 동안 속으로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다는 것입니까?
오늘의 본문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대단히 중요한 심리학적 소재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을 수천 명이 따랐다, 수많은 무리가 따랐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 숫자를 '수만 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앞에 모인 사람들의 수에 대해서 언급한 것으로는 제일 많은 숫자입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1절)"----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모였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와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큰 권세 때문에 수만 명이 그 좁은 도시에 모였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사람들로 와글와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굉장한 인기 속에서 예수님과 사람들의 중간위치에 있는 제자들은 기분이 좋아져서 마치 자기들이 영광을 누리는 것인 양 신이 났습니다. 미상불 사람들은 제자들을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아주 민첩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1절)"--'인기라는 것은 좋지만 이것 때문에 행여 미치지는 말아라. 사실이 아닌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 제자는 제자이고, 죄인은 죄인이다. 너희들이 이렇게 남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선망을 받고, 칭찬을 받는다고 해서 이것이 진짜인 줄로 착각하지 말아라. 여기서 위선자가 되지 말아라'하고 일러주시는 교훈입니다.
보십시오. 세상에 위선자처럼 불행한 사람이 없습니다. 가령 여러분이 본래 아무것도 모르고 별것도 아닌 사람인데, 약간의 재주를 가지고 있다가 어쩌다 우연한 기회에 그것이 발휘되었다고 합시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처음으로 천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에는 "아니오, 저는 천재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자꾸만 "당신은 천재입니다. 천재예요"하고 말하면 정말 내가 천재인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보고 천재라 하는데, 비록 나 자신이 천재가 아닌 것을 안다고 해도 '천재'라는 말을 그대로 접수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얼마동안 착각하며 지내다가 누군가가 자기보고 "무식한 놈"이라고 한마디하면 죽자살자 싸우려 들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존경해도 나의 나됨은 내가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의 본문말씀을 통하여 '절대로 위선에 빠지지 말아라.
자기 의에 빠지지 말아라. 바리새주의에 빠지지 말아라. 형식주의에 빠지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라고 가르쳐주시고 계십니다.
사실 수만 명이 모여 옹위할 때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시험에 빠지는 멍청한 사람은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제자들을 향해서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온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런 것은 절대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라 말씀하십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있는 것은 있는 대로, 없는 것은 없는 대로, 죄인은 죄인대로 어차피 다 드러날 것인데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진 두려움은 아주 별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허세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두려움은 많습니다. 가만히 보면, 젊었을 적 예쁜 얼굴이 세월이 흘러 조금 늙어지니까 그것을 안타까워하고 싫어합니다. 주름살 하나 생긴 것 가지고 울고불고 합니다. 이런 두려움은 넌센스입니다. 늙을 때가 되었으니까 늙는 것이고, 죽을 때가 되었으니 죽는 것입니다.
이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에게는 유독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떨어지지 않을까? '하며 언제나 노심초사하였습니다.
자기의 체면과 인기, 이런 것들이 혹시라도 소멸되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공포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위선으로 가장한다고 해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위선은 위선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은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3절)"라고 말씀합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습니다. 항상 광명한 데서 노출된 자기 모습으로 사는 것이 진실입니다. 남이야 보든 말든, 남이야 뭐라고 평가하든 그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드러낸 것같이, 벌거벗은 것 같이 자기 진실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경제적인 손실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흔히들 사업하는 사람들을 보면 '사업이 잘될까 안될까, 회사가 부도라도 나면 어떡하나'하는 두려움이 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를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해서 울고불고 기도하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성공했을 때에 자신이 저지른 부정을, 출세를 했을 때에 자신이 죄지은 것을 괴로워하며 밤을 새우는 사람은 만나보기 어렵습니다. 시험에 불합격한 것 때문에 우는 사람은 있지만, 부정입학한 것 때문에 우는 사람은 일찍부터 보지 못했습니다. 재수가 좋아서 이렇게 성공한 것처럼, 크게 된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심은 대로 거두리라"하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부정입학 한 사람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어찌하여 심은 대로 거둔다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까? 어찌하여 이것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지옥을 두려워할 줄은 모릅니다. 그실 죽음 자체가 두려운 것은 아닙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믿거나 말거나 간에 무서운 것은 지옥입니다. 여러분, 현재의 일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사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미래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문제입니다. 영원한 세계,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이라는 말을 히브리사람들은 '이르아'라 하고, 헬라 사람들은 '포보스'라 합니다. 이 말의 개념들을 살펴보면, 두려움은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사악한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의심과 불신의 산물이요, 절망과 포악함의 상징입니다.
이런 감정들을 통틀어서 두려움이라고 표현하는 것인데, '공포'라는 개념으로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경외'입니다. 경외감을 담은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건'이라고도 합니다. 믿음과 신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랑이 있음으로 조심스럽고 두려움이 생길 때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두려움을 경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사악한 공포감은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두려움은 우리로 진실과 거룩함과 사랑을 이루게 합니다.
오늘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4절)"------무엇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실패를 두려워하지도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특별히 체면이 손상된다거나 혹은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범죄와 위선과 외식입니다. 죄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죄보다 더 중요한 것, 죄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죄는 교만의 죄입니다. 두려워할 줄을 모르는 죄, 이것은 완전히 끝입니다. 그런고로 교만과 위선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순교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그리스도인임을 끝까지 굽히지 않은 이유로 순교 당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형을 언도하는 재판장이 "저 놈을 당장 화형에 처하라"고 엄히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사람이 이렇게 조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사람을 화형에 처하면 예수 이름으로 순교 당한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유배를 보내라. 평생 섬에서 외로이 살다가 죽도록 해주지." "그러면 오히려 기도할 시간이 많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놈을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라." "그렇게 하면 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매를 맞았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저놈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단 말이냐?" 옆에서 조언하던 사람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돈을 많이 주어서 석방시켜보십시오. 향락을 즐기게 해보십시오. 자연 타락할 것입니다. 저놈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오로지 죄밖에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흔히들 죄를 무서워할 줄 모르고 실패와 질병만을 무서워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불 신앙과 교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교만해질까, 혹시라도 바리새주의에 빠질까 하는 두려움이 무엇보다도 앞서야 합니다. 여러분, 사건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두려워해야 할 자를 두려워하세요. 운명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운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미래를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루마니아의 공산치하에서 기독교가 많은 박해를 받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 범브란트라고 하는 유명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옥중에서 그토록 고생을 많이 하면서도 성경을 꾸준히 읽었습니다. 찬찬히 말씀을 읽어가면서 묵상을 하고 있는데, 유독 "두려워하지 말라" 하는 구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문득 어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성경에 몇 마디나 나오는지 한번 세어보자'하고 목사님은 그 구절이 나올 때마다 따로이 표시를 하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랬더니 공교롭게도 그 말씀이 성경에 365회 언급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세요.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세요. 사건을 무서워하지 마세요. 오로지 하나님만을 무서워하세요.
종교개혁자 존 낙스의 무덤에는 이런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뿐, 결코 인간의 얼굴을 두려워하는 일이 없는 자가 여기 잠들다.' 얼마나 멋있는 비명입니까?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다른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아니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 : 10)." 여러분,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세요. 하나님 아닌 다른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바로 거기에 진정한 신앙적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누가복음 12:1-5)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작품 가운데「폐문(No exit」이라고 하는 글이 있습니다. 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떤 세 사람이 문도 잠기고 거울도 없는 기괴한 방에 갇혀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마치 고문을 당하는 듯한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밀폐된 방에 갇혀 시간이 흐르다보니 원망과 불평도 늘어만 갑니다.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가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해보았지만, 그 모든 수고는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원망과 불평은 그대로 쌓여만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닫혔던 문이 갑자기 활짝 열리면서 그들에게 자유가 주어집니다. 어디로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그들 스스로가 감옥에 갇혀 있기를 소망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로 그곳에 남기를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갇혀 있을 때에는 갇혀 있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정작 닫혔던 문이 활짝 열리고 나니까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진 것입니다. 갇혀 있는 공간은 비좁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이루어지는 일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밖으로 나가면 이제 무슨 일이 있을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감옥에 갇히기를 원하게 된 것입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서 밀폐된 세계를 다시 선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원천적으로 심리적 병리현상입니다. '밀폐공포'라는 것이 있습니다. 갇힐까 염려하며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좀 넓게 살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좁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갇히고 밀폐된 다음에는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씁니다. 여기는 너무 좁다 하며 삽니다. 작은 집에 사는 사람들은 보다 넓은 집을 가져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조금이라도 '더 넓은 집, 더 큰 땅'을 원합니다. 이것이 밀폐공포에 젖어 사는 생리입니다.
그런가하면 반대로 '광장 공포'가 있습니다. '아고라포비아(agoraphobia)'라고 하는 이 공포증은 넓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가끔 외국에 나가보면, 옛날 왕들이 살던 왕궁을 누구나 관람하도록 박물관 같이 꾸며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왕궁 안에 있는 왕의 침실을 보았는데 참으로 넓습니다. 그런데 침대 위에는 지붕처럼 무엇을 비워놓아서 잠을 자는 공간을 좁게 만들었습니다. 넓으면 잠이 안 오고 불안하니까요.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들 자유니 뭐니 하며 넓게 넓게 살고자 하지만 넓어지는 것처럼 불안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더 무섭습니다. 어딘가에 내던져지는 것 같은 공포를 느끼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광장 공포'입니다.
또한 사람에게는 '동물 공포'가 있습니다. 동물이 살아남기 위해서 매사에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데, 그런 두려움을 일컬음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동물이 되는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공포증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높이 올라가는 것을 무서워하는 '고소 공포증'이 있습니다.
또 하나 뺄 수 없는 것은 '마이크로포비아(microphobia)'라고 하는, 세균에 대한 공포증입니다. 시시때때로 손을 씻고, 그릇도 깨끗하게---온갖 것들을 세균 없이 깨끗하게 하느라고 애를 씁니다. 이것 역시 공포증의 하나입니다. 대개 이런 쪽으로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 일찍 죽습니다. 자기도 괴롭고 남도 괴롭습니다. 아이들보고도 무조건 '손을 닦아라, 더럽다'하고 쉴새없이 닦달합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 뱃속에 깨끗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닐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더럽다 더럽다 말이 많습니다. 따지고 보면 더럽다는 개념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듯 결백 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균과, 더러움과, 불결함에 대한 이 같은 공포증도 큰 문제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두려움을 종합하여 생각해봅시다. 이것은 무지와 무능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실은 다 몰라서 그렇습니다.
좀더 깊이 알면 문제가 없는데, 조금 안다는 것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을는지 모르기 때문이요, 그것을 감당할만한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두려움은 불확실성 때문에 생겨납니다. 도대체 앞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경제, 정치, 대자연, 공해…… 앞으로 또 무슨 사건이 터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알기 때문에 두렵기도 합니다. 아예 아무 생각도 못하는 멍청한 사람에게는 아무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런데 겨우 조금 아는 것, 이것이 사람의 마음속에 공포를 줍니다. 다시 말하자면 합리적 이해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당위성에 대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만듭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땅에 종자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일껏 종자를 심어놓고는 그 싹이 나지 아니할까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종자를 뿌렸는데 싹이 안 나면 어떻게 하나? 가을에 추수를 못하면 어떻게 하나?'하고 안달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무엇을 심어 놓고 나서 그 싹이 날까봐 걱정하는 것입니다. 안 날까 하는 걱정이 아니라 날까봐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합리적인 지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덕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선한 일을 하고 나서 그에 상응하는 선한 보상이 없으면 불평을 합니다. 그리고 미리 '선한 결과가 따라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각하고 무서운 것은 미래에 대한 결정적 공포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습니다. 죄지은 사람은 무사하지 못합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노출될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심판의 그날이 오면 어떡하나 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포가 더 큰 것입니다. 이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다 처리되지 못한 과거도 중요합니다마는,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결정적 공포가 우리 마음을 항상 어지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를 자세히 관찰해본 일이 있습니까? 제 친구인 어느 목사님이 교회마당 한구석에 위치한 사택에서 진돗개 한 마리를 키웠습니다. 생김도 생김이려니와 짖는 것이 무척이나 사나웠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개는 아무 사람이나 보고 다 짖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 더 요란스럽게 짖고, 어떤 사람은 바로 앞을 지나가도 짖지 않습니다. 참 영리한 놈이구나 깊었습니다. 교인들이 수없이 오고가지만 절대로 짖지 않습니다. 혹 어린아이들을 물지는 않을까 하여 염려도 했었지만 역시나 어린아이들을 보고 물기는커녕 짖지도 않는답니다. 그렇게 똑똑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람을 보면 아주 정신없이 짖어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어느 심리학자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무엇인가 안정되지 못한 사람은 그 두려운 마음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몸이 떨린다고 합니다. 그 진동이 개의 촉각에 전달되어서 개가 짖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습을 보고 짖는 것이 아니라, 촉감에 의해서 알고 짖는 것입니다. 깜깜한 밤이라 누가 누군지 구별을 못해도 그 존재는 벌써 촉감으로 전달이 된가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얘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지은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두려움으로 벌벌 떨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의 정신도, 그의 몸도 다 약해지고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두려움에 떤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병리현상이며, 또한 이것은 오늘날 일어나는 병적 사건들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두려움 뒤에는 병적 사건들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는지 몰라서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반드시 있을 일입니다. 이것에 대한 이성적 추리와 양심의 비판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벌써 자기를 심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절대로 무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반드시 있을 일과, 그것에 대한 지식과, 미리 내려진 판단이 두려움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이라든가, 노쇠한다든가, 병든다든가 하는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죄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있을 일이요, 없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사실을 사실대로 수용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북한에는 지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습니다. 제가 북녘 땅에 한번 가보니 정말 숨겨진 문제가 많더군요. 보세요. 이미 온 세계가 개방되어 무엇이든 다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북쪽 세계는 도대체 무엇을 알아야 하고 자기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북쪽 분들과 만나서 얘기할 때에, 맨 처음에 무슨 말부터 시작할까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을 꺼낸 적이 있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고, 그리고 나서 이야기하십시다." 순간 그분들의 얼굴이 굳어집니다. 그렇게 한참동안 침묵이 흐른 다음에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라고 어렵게 대답을 합니다. 여기서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얘기는 끝난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고 사세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2절)"-----그렇습니다. 그 말씀대로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습니다. 알려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언젠가는 알려져야 합니다.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백일하에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드러나면 어떡하나? 알려지면 어떡하나?' 이런 것은 다 소용없습니다. 돈을 벌면 뭐합니까? 그 돈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돈이 좋은 침대를 사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단잠을 잘 수 있도록 만들어주지는 못합니다. 돈이 좋은 약을 사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건강을 보증해주지는 못합니다. 돈으로 책을 살수는 있어도, 돈이 좋은 머리를 만들어주지는 못합니다. 때로는 돈이 많은 친구와 나를 위로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게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정한 행복은 돈이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한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언젠가는 그것이 다 알려지고 나아가 자랑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알려진다 하니까 자살하는 사람 참 많습니다. 그 동안 속으로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다는 것입니까?
오늘의 본문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대단히 중요한 심리학적 소재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을 수천 명이 따랐다, 수많은 무리가 따랐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 숫자를 '수만 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앞에 모인 사람들의 수에 대해서 언급한 것으로는 제일 많은 숫자입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1절)"----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모였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와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큰 권세 때문에 수만 명이 그 좁은 도시에 모였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사람들로 와글와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굉장한 인기 속에서 예수님과 사람들의 중간위치에 있는 제자들은 기분이 좋아져서 마치 자기들이 영광을 누리는 것인 양 신이 났습니다. 미상불 사람들은 제자들을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아주 민첩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1절)"--'인기라는 것은 좋지만 이것 때문에 행여 미치지는 말아라. 사실이 아닌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 제자는 제자이고, 죄인은 죄인이다. 너희들이 이렇게 남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선망을 받고, 칭찬을 받는다고 해서 이것이 진짜인 줄로 착각하지 말아라. 여기서 위선자가 되지 말아라'하고 일러주시는 교훈입니다.
보십시오. 세상에 위선자처럼 불행한 사람이 없습니다. 가령 여러분이 본래 아무것도 모르고 별것도 아닌 사람인데, 약간의 재주를 가지고 있다가 어쩌다 우연한 기회에 그것이 발휘되었다고 합시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처음으로 천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에는 "아니오, 저는 천재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자꾸만 "당신은 천재입니다. 천재예요"하고 말하면 정말 내가 천재인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보고 천재라 하는데, 비록 나 자신이 천재가 아닌 것을 안다고 해도 '천재'라는 말을 그대로 접수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얼마동안 착각하며 지내다가 누군가가 자기보고 "무식한 놈"이라고 한마디하면 죽자살자 싸우려 들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존경해도 나의 나됨은 내가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의 본문말씀을 통하여 '절대로 위선에 빠지지 말아라.
자기 의에 빠지지 말아라. 바리새주의에 빠지지 말아라. 형식주의에 빠지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라고 가르쳐주시고 계십니다.
사실 수만 명이 모여 옹위할 때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시험에 빠지는 멍청한 사람은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제자들을 향해서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온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런 것은 절대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라 말씀하십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있는 것은 있는 대로, 없는 것은 없는 대로, 죄인은 죄인대로 어차피 다 드러날 것인데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진 두려움은 아주 별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허세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두려움은 많습니다. 가만히 보면, 젊었을 적 예쁜 얼굴이 세월이 흘러 조금 늙어지니까 그것을 안타까워하고 싫어합니다. 주름살 하나 생긴 것 가지고 울고불고 합니다. 이런 두려움은 넌센스입니다. 늙을 때가 되었으니까 늙는 것이고, 죽을 때가 되었으니 죽는 것입니다.
이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에게는 유독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떨어지지 않을까? '하며 언제나 노심초사하였습니다.
자기의 체면과 인기, 이런 것들이 혹시라도 소멸되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공포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위선으로 가장한다고 해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위선은 위선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은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3절)"라고 말씀합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습니다. 항상 광명한 데서 노출된 자기 모습으로 사는 것이 진실입니다. 남이야 보든 말든, 남이야 뭐라고 평가하든 그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드러낸 것같이, 벌거벗은 것 같이 자기 진실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경제적인 손실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흔히들 사업하는 사람들을 보면 '사업이 잘될까 안될까, 회사가 부도라도 나면 어떡하나'하는 두려움이 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를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해서 울고불고 기도하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성공했을 때에 자신이 저지른 부정을, 출세를 했을 때에 자신이 죄지은 것을 괴로워하며 밤을 새우는 사람은 만나보기 어렵습니다. 시험에 불합격한 것 때문에 우는 사람은 있지만, 부정입학한 것 때문에 우는 사람은 일찍부터 보지 못했습니다. 재수가 좋아서 이렇게 성공한 것처럼, 크게 된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심은 대로 거두리라"하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부정입학 한 사람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어찌하여 심은 대로 거둔다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까? 어찌하여 이것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지옥을 두려워할 줄은 모릅니다. 그실 죽음 자체가 두려운 것은 아닙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믿거나 말거나 간에 무서운 것은 지옥입니다. 여러분, 현재의 일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사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미래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문제입니다. 영원한 세계,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이라는 말을 히브리사람들은 '이르아'라 하고, 헬라 사람들은 '포보스'라 합니다. 이 말의 개념들을 살펴보면, 두려움은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사악한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의심과 불신의 산물이요, 절망과 포악함의 상징입니다.
이런 감정들을 통틀어서 두려움이라고 표현하는 것인데, '공포'라는 개념으로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경외'입니다. 경외감을 담은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건'이라고도 합니다. 믿음과 신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랑이 있음으로 조심스럽고 두려움이 생길 때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두려움을 경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사악한 공포감은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두려움은 우리로 진실과 거룩함과 사랑을 이루게 합니다.
오늘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4절)"------무엇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실패를 두려워하지도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특별히 체면이 손상된다거나 혹은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범죄와 위선과 외식입니다. 죄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죄보다 더 중요한 것, 죄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죄는 교만의 죄입니다. 두려워할 줄을 모르는 죄, 이것은 완전히 끝입니다. 그런고로 교만과 위선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순교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그리스도인임을 끝까지 굽히지 않은 이유로 순교 당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형을 언도하는 재판장이 "저 놈을 당장 화형에 처하라"고 엄히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사람이 이렇게 조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사람을 화형에 처하면 예수 이름으로 순교 당한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유배를 보내라. 평생 섬에서 외로이 살다가 죽도록 해주지." "그러면 오히려 기도할 시간이 많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놈을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라." "그렇게 하면 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매를 맞았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저놈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단 말이냐?" 옆에서 조언하던 사람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돈을 많이 주어서 석방시켜보십시오. 향락을 즐기게 해보십시오. 자연 타락할 것입니다. 저놈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오로지 죄밖에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흔히들 죄를 무서워할 줄 모르고 실패와 질병만을 무서워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불 신앙과 교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교만해질까, 혹시라도 바리새주의에 빠질까 하는 두려움이 무엇보다도 앞서야 합니다. 여러분, 사건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두려워해야 할 자를 두려워하세요. 운명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운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미래를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루마니아의 공산치하에서 기독교가 많은 박해를 받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 범브란트라고 하는 유명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옥중에서 그토록 고생을 많이 하면서도 성경을 꾸준히 읽었습니다. 찬찬히 말씀을 읽어가면서 묵상을 하고 있는데, 유독 "두려워하지 말라" 하는 구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문득 어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성경에 몇 마디나 나오는지 한번 세어보자'하고 목사님은 그 구절이 나올 때마다 따로이 표시를 하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랬더니 공교롭게도 그 말씀이 성경에 365회 언급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세요.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세요. 사건을 무서워하지 마세요. 오로지 하나님만을 무서워하세요.
종교개혁자 존 낙스의 무덤에는 이런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뿐, 결코 인간의 얼굴을 두려워하는 일이 없는 자가 여기 잠들다.' 얼마나 멋있는 비명입니까?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다른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아니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 : 10)." 여러분,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세요. 하나님 아닌 다른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바로 거기에 진정한 신앙적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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