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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얼굴(사도행전 7장 54절~60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하여 많은 화가들이 성만찬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마도 성만찬의 그림만큼 여러 사람이 여러 모양으로 그린 그림이 다시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많은 화가들 중 어떤 화가 한 사람은 이런 일화를 남겼습니다. 성만찬의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이 화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델을 구하려고 길거리로, 공원으로 여러 날을 헤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교회에 갔는데 마침 성가대원 중 한 청년이 어찌나 경건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찬양을 하는지 '아마 예수님의 얼굴은 저 청년을 닮았을 것이다'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에게 부탁하여, 며칠 동안 그를 모델로 하여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이 화가는 사업 관계로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후 그는 다시 그 그림을 완성하기 위하여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나가는데, 다시 걱정이 생겼습니다. 가룟 유다의 모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는 가룟 유다를 닮은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어느 도시에 이르러 술집이 많은 골목에 들어섰을 때, 웬 청년이 술에 취하여 지나가는데 보아하니 꼭 가룟 유다를 닮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화가는 그에게 "내가 당신의 얼굴을 좀 그리고 싶은데 좀 도와주시겠어요?"하고 부탁했고, 청년은 "그러지요"하고 응낙했습니다. 화가는 그 청년을 모델로 가룟 유다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술에서 깨어난 청년이 묻습니다. "왜 내 얼굴을 그리는 거죠?" "이 일이 막중한 일이니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군요." 화가는 솔직히 이야기합니다. "실은 내가 가룟 유다의 모델을 찾던 중에 당신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청년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소리내어 울면서 말합니다. "몇 년 전에 당신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린 적이 있지요? 그 때, 예수님의 모델이 바로 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형편없이 타락하고 보니 이제는 가룟 유다의 모델이 되고 말았군요."
얼굴은 마음의 창문입니다. 그 마음에 은혜가 있을 때에 예수님을 닮은 얼굴이 될 수도 있고, 그 마음이 약해지고 타락하고 썩어버릴 때에 가룟 유다의 얼굴처럼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만찬의 그림을 그린 사람들 중 누구도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아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닙니다. 한결같이 "아마도 이런 분이 아닐까?"하고 상상해서 그린 것입니다. 본인이나 보는 사람이나, 그 마음의 모습 그대로 얼굴에 나타납니다.
의학적으로, 사람의 피부는 4년마다 바뀐다고 합니다. 여성들이 예쁘게 보이려고 열심히 화장을 합니다마는, 사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을 바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미가 중요합니다. 병이 들면 아무리 얼굴에 무엇을 바른다 해도 별로 신통치 않습니다. 마음에 기쁨과 은혜와 빛이 있어야 얼굴에도 빛이 나는 것입니다. 마음은 썩어 가는데 어찌 그 얼굴을 빛나게 할 수 있습니까? 마음의 모양대로 얼굴의 모양도 변합니다. 몇 년 동안 울고 찌푸리고 한숨쉬고 사는 것이라면 피부도 얼굴 모습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자, 누가 천사를 보았습니까? 천사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은 얼굴은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야곱이 에서와 줄곧 원수로 지내다가 20년만에 다시 만나게 됩니다(창 33:3). 에서는 400인을 거느리고 야곱을 마중 나옵니다. 그러나 야곱은 형님이 자기를 죽이러 오는지 살리러 오는지를 알 수 없어서, 얍복강변에서 밤이 새도록 천사와 씨름합니다. 기도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에서는 야곱을 원수가 아닌 형과 동생의 관계로 반갑게 맞아줍니다. 서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바로 그 순간에 야곱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창 33:10)"--생각해 보세요. 에서라는 이름은 '붉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그는 털이 많은 사람입니다. 얼굴이 붉은데다 털도 많았으니 그실 얼마나 험상궂은 얼굴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이 보는 형님의 모습은 마치 하나님의 얼굴과도 같아 보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인 양 볼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야곱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스데반이 공회 앞에 섰다고 말씀합니다. 이 공회는 사실상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집행권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로마의 속국이기 때문에 사형은 집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형을 결정할 수는 있습니다. 바로 이 공회가 예수를 사형에 처하고 빌라도의 힘을 빌어 십자가에 못박도록 음모한 그 공회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스데반이 그 자리에 서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바로 그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정면 대결입니다. 이제 살아남기란 불가능합니다. 스데반에게 정죄를 당하는 공회원들이 살기 등등한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독기에 찬 시선으로 스데반을 노려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살벌한 장소에 서 있는 스데반의 얼굴이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부러운 이야기입니까? 흔히 우리는 세상이 험하다, 괴롭다, 원수가 많다, 외롭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공회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그런 살벌한 관계에 사는 사람이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스데반의 얼굴은 시종여일(始終如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합니다.
얼굴은 마음의 얼굴입니다. 천사의 마음을 가졌기에 천사의 얼굴이 되었고, 천사의 사랑을 가졌기에 천사의 얼굴로 나타났다 함입니다.
또한 성경은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55절)"라고 증거합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무엇입니까? '충만'이라는 말은 누가의 전용어로서, 주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잉태를 중심으로 마리아와 엘리사벳 같은 분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장면을 '충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성령 충만'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목사가 된 저의 제자 가운데 유독히 '충만'에 대해서 강조하는 분이 있습니다. 능력 충만, 불로 충만, 또 무슨 충만…… 늘상 '충만'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저와 만났을 때에 "목사님, 도대체 '충만'이 무슨 뜻입니까?"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되물었습니다. "아니, 충만은 자네 특기인데 왜 나에게 묻나?"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저는 이런 의심이 들었습니다. 성령은 인격이십니다.
그러니까, 계시면 계시고 안 계시면 안 계시는 것이지, 성령을 많이 받고 적게 받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께 성령론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아십시다. '충만'이라는 단어가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장면을 '충만'이라고 말씀했는가, 그 개념이 문제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확실하게 가르쳐줍니다. 성령 충만이란, 핍박자나 원수 앞에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습입니다. 바로 그것을 가리켜 성경은 '충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어느 골방에 틀어박힌 사람, 또는 이상한 소리로 말하는 사람을 '충만'이라고 말씀한 일은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우리네 문화적인 상황에서 하나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신들린다' '신이 내렸다' '신 접했다'는 등의 개념, 즉 접신(接神)이나 강신(降神)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받는다는 것도 신들리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접신 이나 강신 된다는 사람들을 볼 것 같으면, 제정신은 없어지고 무아지경에 들어가 쓰러지기도 하고 헛소리도 합니다. 성령 받는 것을 이런 강신적인 정경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제정신이 없어지고 헛소리를 해야 '충만'인 줄로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더 바로 알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더 온전히 기억하고, 더 깊이 깨닫고, 원수들 앞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담대히 복음을 증거 하는 모습, 그리고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은 모습인 그 때를 가리켜 '충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생각하지 맙시다. 바로 이것이 충만이요, 그리스도인의 인격의 결정인 것입니다. 스데반의 그 모습 그대로가 충만인 것입니다.
스데반은 충만한 가운데 인자를 보았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만일 그가 주님을 뵙지 않고 자기의 동료(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를 향해 이를 갈며 독기 서리고 악의에 찬 눈빛으로 돌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면 그의 충만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얼굴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사십니까? 사람은 연속해서 보는 것대로, 어느덧 그것과 자신이 identity--동일시되어 버립니다. 더러운 것을 계속 보면 나도 모르게 내 마음도 내 손도 더러워집니다.
요즈음 참 놀라운 것이 있습디다. 서울 어느 곳의 큰 찻집에 가보니 인공폭포를 만들어서 손님에게 물소리를 들려줍니다. 가만히 보니, 여기에는 상당한 철학이 있습니다. 닭한테 음악을 들려주면 알을 많이 낳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즈를 들려주면 흥분해서 알을 많이 못 낳고, 클래식을 들려주어야 알을 많이 낳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클래식보다 더 좋은 것이 물소리라고 합니다. 젖소한테 물소리를 들려주면 평소보다 우유가 많이 나온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듣는 대로'입니다. 이상한 음악만 자주 들으면 이상한 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평화로운 것, 웃음, 아름다운 것, 선한 것을 보면 그 본 바대로 마음에 영상이 생깁니다. 그런고로 적어도 잠자리에 들 때에는 쓸데없는 것을 보지 말고, 성경을 보고 거룩한 생각을 하기 바랍니다. 모택동은 "공산주의자는 꿈을 꾸어도 공산주의 꿈을 꾸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들 방식대로 자아비판을 해야겠지요. 이를 바꾸어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믿는 사람은 허탄한 꿈을 꾸었으면 그것도 회개해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살았기에 그런 허망한 꿈을 꿉니까? 보는 대로 듣는 대로 꿈도 꾸게 되고, 내 마음에도 그런 그림이 그려지는 것입니다. 원수를 보면 나도 원수가 되고, 악한 사람을 보면 나도 악해지고, 나쁜 사람을 미워하면 내가 남을 더 미워하는 나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우리의 시선은 위로 올려야 되겠습니다. 세상의 살기 등등한 위선자나 권력자들을 쳐다보면 그 동안에 어느덧 나도 같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곧 인자를 보았다고 합니다. 신약을 보면 '인자'라는 말이 100번 쯤 나오는데,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전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 중 누구도 감히 예수님을 향해 '인자'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오직 단 한 번의 예외, 그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하기 직전에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절)"라는 굉장한 말을 한 것입니다. "인자"--이는 성육신 하신 자, 고난 당하신 자, 부활하신 자, 특별히 심판주요 종말론적인 계시자를 말함입니다. 스데반은 인자를 볼 수 있었으며 인자를 보았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위를 쳐다보아야 합니다. 쳐다보는 그것대로 닮게 됩니다.
우리 교회 교인인 어느 부부의 일입니다. 남편과 아내, 둘 다 외국 유학도 한 상당한 지식인임에도, 서로 감정적으로 팽팽히 맞섭니다. 부부싸움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마침내는 어린 자식이 둘인데도 이혼을 합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회사 일로 외국에 6개월 간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혼 수속은 6개월 뒤로 미루어졌습니다. 남편이 떠난 후에 아내는 곰곰이 생각합니다. 남편이 이혼하자고 할 때, 자존심 때문에 당장에 응낙은 했지만 정작 남편이 곁에 없고 보니 적이 허전합니다. 그래서 술도 먹어보고, 춤도 추어보고, 별 짓을 다합니다. 그러다가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꾸준히 나오면서 점차 마음에 큰 위로를 받았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드디어 남편이 돌아오는 날, 그는 차를 가지고 김포공항에 마중을 나갔습니다. 비록 헤어지기로 합의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남편이니 남편 대접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남편은 아내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 많이 달라졌다." "달라지긴 뭐가 달라져? 그 사람이 그 사람이지…… 아니, 좀 달라지기는 했지. 교회에 나가서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거든." "그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확실히 많이 달라졌다. 나도 교회에 나갈 마음이 생기는데? 이혼은 잠깐 보류해두자, 우리." 결국 두 부부는 함께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아느냐, 무엇을 기억했느냐, 그런 것은 몰라도 괜찮습니다. 교회에 들락날락하다보면 무언가 좀 달라질 것입니다. 보는 대로 듣는 대로 변화가 옵니다. 스데반이 인자를 쳐다보는 순간,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로 되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는 용서하는 마음으로 있었습니다. 용서하는 얼굴이 천사의 얼굴입니다. 용서의 시선으로 자기를 죽이는 자를 불쌍히 여길 때에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로 바꾸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스데반도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과 비슷한 것 같으나 그실 틀린 말입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절)." 용서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뜻을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인용해보겠습니다. 그는 마지막 유언에서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딤후 4:16)"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게도 잘못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스데반은 하나님 앞에 '저들의 죄를 내가 대신 지겠습니다'라고 기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이렇게 악하고 돌을 던지게까지 된 것은 내 방법이 잘못 되어서, 저들의 감정을 건드려서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이 허물을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세요'합니다. 이 얼마나 귀한 기도입니까? 여러분, 내게는 책임이 없고 저쪽에만 책임이 있다고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스데반은 지금 돌에 맞아 죽어가지만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세요'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에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모든 책임을 내가 지고 용서하는 그 순간에 천사의 얼굴이 될 수 있었습니다.
구원에 몇 가지의 절대 조건이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또하나, 남을 용서해야 합니다. 선행과 구제와 전도는 우리가 다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절대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용서는 우리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며 또 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남을 용서하지 않는데 하나님께로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화해--이것은 하나님 앞에 가는 절대 조건입니다. 혹 누구와의 사이에 맺힌 것이 있습니까? 숨넘어가기 직전에라도 모두 화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뵐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용서해야 합니다. 깨끗하게 용서해주는 것보다 세상에서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언제나 용서하는 자가 보다 큰 자이며 높은 자입니다. 그리고 더 큰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깨끗한 마음으로 남을 용서해야만 천사의 얼굴을 가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데반은 자기의 운명을 하나님께 깨끗이 맡겨버렸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59절)"--바로 이 기도가 그를 천사의 얼굴로 만들었습니다.
일전에 제 친구 되는 어느 미국인 목사와 함께 그의 자동차를 탔었습니다. 차에 오른 그는 안전벨트를 매고는 잠깐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도 내용이 궁금해서 지금 무어라고 기도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했다는 것입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미리 하나님께 영혼을 맡기는 기도를 한 것이랍니다. 여러분, 그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기도는 아침기도요, 저녁기도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저녁기도문에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는 귀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이 기도를 하셨습니다마는 그것은 순간적 기도가 아니라 일생동안 하시던 저녁기도입니다. 우리도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하나님, 모든 것을 다 용서합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내 모든 것을 깨끗이 전적으로 위탁하는 자세, 이보다 귀중한 일은 없습니다. 더는 필요 없는 걱정을 하지 맙시다. 더는 근심에 싸인 채 시간만 보내는 낭비적인 사람이 되지 맙시다. 그리스도인은 '오늘이 내 마지막날이니 진실하게 살자'가 아니라 '어제는 죽었고, 오늘을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나는 벌써 죽어버리고 덤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자,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입니다. 영이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완전히 위탁하는 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든 이틀을 살든,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천사의 얼굴을 가진 사람은 불평이 없습니다. 어차피 잠시 있다가 가는 세상,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생을 해도 실패를 해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지 마귀의 자녀로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죽느냐 사느냐, 복이냐 저주냐, 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전부가 축복입니다. 축복 말고는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앉아 계신 것이 아니고 서 계셨다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어서서 손을 벌리시고 '스데반아 어서 올라오너라'하시는 모습을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얼굴을 찌푸리겠습니까?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이 험하다, 손해를 보았다,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문제는 내 앞에 그리스도가 보이느냐 안보이느냐, 땅을 보느냐 위를 보느냐입니다. 인자--내가 평생 사랑하던 그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서 손을 들고 나를 기다리시는, 그 모습만 쳐다보고 있다면 무슨 원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향해서 한숨을 쉬겠습니까?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은 그래서 천사의 얼굴입니다.
천사의 얼굴, 이것은 단순한 얼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말없는 말을 들을 줄 알고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특징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기에 더는 말을 잇지 못했으나, 그 얼굴은 결국 위대한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바로 옆에 서 있던 사울을 예수님의 포로 되게 한 것입니다. 많은 성서신학자들은 한결같이 스데반의 죽음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죄인이 어떻게 저런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을 수 있을까--큰 충격을 받고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라고들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위대한 그리스도인을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울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인 스데반을 만났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천사의 얼굴, 이것은 위대한 능력입니다.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원수를 친구로 만듭니다. 핍박자를 위대한 사도로 만듭니다. 여러분, 이 어려운 세대를 살아가면서 혹 '이 세대 때문에, 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하지 마세요. 하늘을 우러러 그리스도를 보십시다.
원수를 사랑의 눈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보십시다. 그리고 내 생명과 내 앞에 있는 모든 것을 깨끗이 주님 앞에 위탁해버립시다. 그렇게 주님을 뵐 때에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이 천사의 얼굴로, 내 말이 주님의 말씀으로, 내 발걸음이 성도의 발걸음으로 바꾸어질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나를 향해 일어서실 것입니다. 스데반을 통하여 역사 하신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역사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개를 쓰다듬으며 "내가 너를 미워한다"고 웃으면서 말하면 그래도 좋다고 꼬리를 칩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꽥 소리를 지르면 사정없이 덤벼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한다느니 미워한다느니 하는 말이 문제가 안됩니다. 어떤 얼굴로 보았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말을 줄이세요. 무엇을 말했느냐가 아니라 얼굴빛이 문제입니다. 천사의 얼굴빛이 있어야 그에 따른 감화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말을 하든 안 하든, 어떻게 말을 했든, 우리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반사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름지기 이러한 그리스도인, 천사의 얼굴을 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천사의 얼굴(사도행전 7장 54절~60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하여 많은 화가들이 성만찬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마도 성만찬의 그림만큼 여러 사람이 여러 모양으로 그린 그림이 다시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많은 화가들 중 어떤 화가 한 사람은 이런 일화를 남겼습니다. 성만찬의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이 화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델을 구하려고 길거리로, 공원으로 여러 날을 헤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교회에 갔는데 마침 성가대원 중 한 청년이 어찌나 경건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찬양을 하는지 '아마 예수님의 얼굴은 저 청년을 닮았을 것이다'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에게 부탁하여, 며칠 동안 그를 모델로 하여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이 화가는 사업 관계로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후 그는 다시 그 그림을 완성하기 위하여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나가는데, 다시 걱정이 생겼습니다. 가룟 유다의 모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는 가룟 유다를 닮은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어느 도시에 이르러 술집이 많은 골목에 들어섰을 때, 웬 청년이 술에 취하여 지나가는데 보아하니 꼭 가룟 유다를 닮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화가는 그에게 "내가 당신의 얼굴을 좀 그리고 싶은데 좀 도와주시겠어요?"하고 부탁했고, 청년은 "그러지요"하고 응낙했습니다. 화가는 그 청년을 모델로 가룟 유다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술에서 깨어난 청년이 묻습니다. "왜 내 얼굴을 그리는 거죠?" "이 일이 막중한 일이니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군요." 화가는 솔직히 이야기합니다. "실은 내가 가룟 유다의 모델을 찾던 중에 당신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청년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소리내어 울면서 말합니다. "몇 년 전에 당신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린 적이 있지요? 그 때, 예수님의 모델이 바로 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형편없이 타락하고 보니 이제는 가룟 유다의 모델이 되고 말았군요."
얼굴은 마음의 창문입니다. 그 마음에 은혜가 있을 때에 예수님을 닮은 얼굴이 될 수도 있고, 그 마음이 약해지고 타락하고 썩어버릴 때에 가룟 유다의 얼굴처럼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만찬의 그림을 그린 사람들 중 누구도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아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닙니다. 한결같이 "아마도 이런 분이 아닐까?"하고 상상해서 그린 것입니다. 본인이나 보는 사람이나, 그 마음의 모습 그대로 얼굴에 나타납니다.
의학적으로, 사람의 피부는 4년마다 바뀐다고 합니다. 여성들이 예쁘게 보이려고 열심히 화장을 합니다마는, 사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을 바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미가 중요합니다. 병이 들면 아무리 얼굴에 무엇을 바른다 해도 별로 신통치 않습니다. 마음에 기쁨과 은혜와 빛이 있어야 얼굴에도 빛이 나는 것입니다. 마음은 썩어 가는데 어찌 그 얼굴을 빛나게 할 수 있습니까? 마음의 모양대로 얼굴의 모양도 변합니다. 몇 년 동안 울고 찌푸리고 한숨쉬고 사는 것이라면 피부도 얼굴 모습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자, 누가 천사를 보았습니까? 천사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은 얼굴은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야곱이 에서와 줄곧 원수로 지내다가 20년만에 다시 만나게 됩니다(창 33:3). 에서는 400인을 거느리고 야곱을 마중 나옵니다. 그러나 야곱은 형님이 자기를 죽이러 오는지 살리러 오는지를 알 수 없어서, 얍복강변에서 밤이 새도록 천사와 씨름합니다. 기도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에서는 야곱을 원수가 아닌 형과 동생의 관계로 반갑게 맞아줍니다. 서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바로 그 순간에 야곱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창 33:10)"--생각해 보세요. 에서라는 이름은 '붉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그는 털이 많은 사람입니다. 얼굴이 붉은데다 털도 많았으니 그실 얼마나 험상궂은 얼굴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이 보는 형님의 모습은 마치 하나님의 얼굴과도 같아 보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인 양 볼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야곱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스데반이 공회 앞에 섰다고 말씀합니다. 이 공회는 사실상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집행권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로마의 속국이기 때문에 사형은 집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형을 결정할 수는 있습니다. 바로 이 공회가 예수를 사형에 처하고 빌라도의 힘을 빌어 십자가에 못박도록 음모한 그 공회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스데반이 그 자리에 서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바로 그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정면 대결입니다. 이제 살아남기란 불가능합니다. 스데반에게 정죄를 당하는 공회원들이 살기 등등한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독기에 찬 시선으로 스데반을 노려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살벌한 장소에 서 있는 스데반의 얼굴이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부러운 이야기입니까? 흔히 우리는 세상이 험하다, 괴롭다, 원수가 많다, 외롭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공회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그런 살벌한 관계에 사는 사람이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스데반의 얼굴은 시종여일(始終如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합니다.
얼굴은 마음의 얼굴입니다. 천사의 마음을 가졌기에 천사의 얼굴이 되었고, 천사의 사랑을 가졌기에 천사의 얼굴로 나타났다 함입니다.
또한 성경은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55절)"라고 증거합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무엇입니까? '충만'이라는 말은 누가의 전용어로서, 주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잉태를 중심으로 마리아와 엘리사벳 같은 분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장면을 '충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성령 충만'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목사가 된 저의 제자 가운데 유독히 '충만'에 대해서 강조하는 분이 있습니다. 능력 충만, 불로 충만, 또 무슨 충만…… 늘상 '충만'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저와 만났을 때에 "목사님, 도대체 '충만'이 무슨 뜻입니까?"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되물었습니다. "아니, 충만은 자네 특기인데 왜 나에게 묻나?"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저는 이런 의심이 들었습니다. 성령은 인격이십니다.
그러니까, 계시면 계시고 안 계시면 안 계시는 것이지, 성령을 많이 받고 적게 받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께 성령론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아십시다. '충만'이라는 단어가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장면을 '충만'이라고 말씀했는가, 그 개념이 문제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확실하게 가르쳐줍니다. 성령 충만이란, 핍박자나 원수 앞에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습입니다. 바로 그것을 가리켜 성경은 '충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어느 골방에 틀어박힌 사람, 또는 이상한 소리로 말하는 사람을 '충만'이라고 말씀한 일은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우리네 문화적인 상황에서 하나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신들린다' '신이 내렸다' '신 접했다'는 등의 개념, 즉 접신(接神)이나 강신(降神)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받는다는 것도 신들리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접신 이나 강신 된다는 사람들을 볼 것 같으면, 제정신은 없어지고 무아지경에 들어가 쓰러지기도 하고 헛소리도 합니다. 성령 받는 것을 이런 강신적인 정경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제정신이 없어지고 헛소리를 해야 '충만'인 줄로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더 바로 알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더 온전히 기억하고, 더 깊이 깨닫고, 원수들 앞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담대히 복음을 증거 하는 모습, 그리고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은 모습인 그 때를 가리켜 '충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생각하지 맙시다. 바로 이것이 충만이요, 그리스도인의 인격의 결정인 것입니다. 스데반의 그 모습 그대로가 충만인 것입니다.
스데반은 충만한 가운데 인자를 보았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만일 그가 주님을 뵙지 않고 자기의 동료(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를 향해 이를 갈며 독기 서리고 악의에 찬 눈빛으로 돌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면 그의 충만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얼굴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사십니까? 사람은 연속해서 보는 것대로, 어느덧 그것과 자신이 identity--동일시되어 버립니다. 더러운 것을 계속 보면 나도 모르게 내 마음도 내 손도 더러워집니다.
요즈음 참 놀라운 것이 있습디다. 서울 어느 곳의 큰 찻집에 가보니 인공폭포를 만들어서 손님에게 물소리를 들려줍니다. 가만히 보니, 여기에는 상당한 철학이 있습니다. 닭한테 음악을 들려주면 알을 많이 낳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즈를 들려주면 흥분해서 알을 많이 못 낳고, 클래식을 들려주어야 알을 많이 낳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클래식보다 더 좋은 것이 물소리라고 합니다. 젖소한테 물소리를 들려주면 평소보다 우유가 많이 나온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듣는 대로'입니다. 이상한 음악만 자주 들으면 이상한 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평화로운 것, 웃음, 아름다운 것, 선한 것을 보면 그 본 바대로 마음에 영상이 생깁니다. 그런고로 적어도 잠자리에 들 때에는 쓸데없는 것을 보지 말고, 성경을 보고 거룩한 생각을 하기 바랍니다. 모택동은 "공산주의자는 꿈을 꾸어도 공산주의 꿈을 꾸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들 방식대로 자아비판을 해야겠지요. 이를 바꾸어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믿는 사람은 허탄한 꿈을 꾸었으면 그것도 회개해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살았기에 그런 허망한 꿈을 꿉니까? 보는 대로 듣는 대로 꿈도 꾸게 되고, 내 마음에도 그런 그림이 그려지는 것입니다. 원수를 보면 나도 원수가 되고, 악한 사람을 보면 나도 악해지고, 나쁜 사람을 미워하면 내가 남을 더 미워하는 나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우리의 시선은 위로 올려야 되겠습니다. 세상의 살기 등등한 위선자나 권력자들을 쳐다보면 그 동안에 어느덧 나도 같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곧 인자를 보았다고 합니다. 신약을 보면 '인자'라는 말이 100번 쯤 나오는데,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전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 중 누구도 감히 예수님을 향해 '인자'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오직 단 한 번의 예외, 그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하기 직전에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절)"라는 굉장한 말을 한 것입니다. "인자"--이는 성육신 하신 자, 고난 당하신 자, 부활하신 자, 특별히 심판주요 종말론적인 계시자를 말함입니다. 스데반은 인자를 볼 수 있었으며 인자를 보았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위를 쳐다보아야 합니다. 쳐다보는 그것대로 닮게 됩니다.
우리 교회 교인인 어느 부부의 일입니다. 남편과 아내, 둘 다 외국 유학도 한 상당한 지식인임에도, 서로 감정적으로 팽팽히 맞섭니다. 부부싸움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마침내는 어린 자식이 둘인데도 이혼을 합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회사 일로 외국에 6개월 간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혼 수속은 6개월 뒤로 미루어졌습니다. 남편이 떠난 후에 아내는 곰곰이 생각합니다. 남편이 이혼하자고 할 때, 자존심 때문에 당장에 응낙은 했지만 정작 남편이 곁에 없고 보니 적이 허전합니다. 그래서 술도 먹어보고, 춤도 추어보고, 별 짓을 다합니다. 그러다가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꾸준히 나오면서 점차 마음에 큰 위로를 받았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드디어 남편이 돌아오는 날, 그는 차를 가지고 김포공항에 마중을 나갔습니다. 비록 헤어지기로 합의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남편이니 남편 대접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남편은 아내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 많이 달라졌다." "달라지긴 뭐가 달라져? 그 사람이 그 사람이지…… 아니, 좀 달라지기는 했지. 교회에 나가서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거든." "그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확실히 많이 달라졌다. 나도 교회에 나갈 마음이 생기는데? 이혼은 잠깐 보류해두자, 우리." 결국 두 부부는 함께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아느냐, 무엇을 기억했느냐, 그런 것은 몰라도 괜찮습니다. 교회에 들락날락하다보면 무언가 좀 달라질 것입니다. 보는 대로 듣는 대로 변화가 옵니다. 스데반이 인자를 쳐다보는 순간,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로 되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는 용서하는 마음으로 있었습니다. 용서하는 얼굴이 천사의 얼굴입니다. 용서의 시선으로 자기를 죽이는 자를 불쌍히 여길 때에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로 바꾸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스데반도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과 비슷한 것 같으나 그실 틀린 말입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절)." 용서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뜻을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인용해보겠습니다. 그는 마지막 유언에서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딤후 4:16)"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게도 잘못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스데반은 하나님 앞에 '저들의 죄를 내가 대신 지겠습니다'라고 기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이렇게 악하고 돌을 던지게까지 된 것은 내 방법이 잘못 되어서, 저들의 감정을 건드려서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이 허물을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세요'합니다. 이 얼마나 귀한 기도입니까? 여러분, 내게는 책임이 없고 저쪽에만 책임이 있다고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스데반은 지금 돌에 맞아 죽어가지만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세요'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에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모든 책임을 내가 지고 용서하는 그 순간에 천사의 얼굴이 될 수 있었습니다.
구원에 몇 가지의 절대 조건이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또하나, 남을 용서해야 합니다. 선행과 구제와 전도는 우리가 다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절대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용서는 우리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며 또 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남을 용서하지 않는데 하나님께로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화해--이것은 하나님 앞에 가는 절대 조건입니다. 혹 누구와의 사이에 맺힌 것이 있습니까? 숨넘어가기 직전에라도 모두 화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뵐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용서해야 합니다. 깨끗하게 용서해주는 것보다 세상에서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언제나 용서하는 자가 보다 큰 자이며 높은 자입니다. 그리고 더 큰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깨끗한 마음으로 남을 용서해야만 천사의 얼굴을 가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데반은 자기의 운명을 하나님께 깨끗이 맡겨버렸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59절)"--바로 이 기도가 그를 천사의 얼굴로 만들었습니다.
일전에 제 친구 되는 어느 미국인 목사와 함께 그의 자동차를 탔었습니다. 차에 오른 그는 안전벨트를 매고는 잠깐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도 내용이 궁금해서 지금 무어라고 기도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했다는 것입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미리 하나님께 영혼을 맡기는 기도를 한 것이랍니다. 여러분, 그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기도는 아침기도요, 저녁기도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저녁기도문에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는 귀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이 기도를 하셨습니다마는 그것은 순간적 기도가 아니라 일생동안 하시던 저녁기도입니다. 우리도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하나님, 모든 것을 다 용서합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내 모든 것을 깨끗이 전적으로 위탁하는 자세, 이보다 귀중한 일은 없습니다. 더는 필요 없는 걱정을 하지 맙시다. 더는 근심에 싸인 채 시간만 보내는 낭비적인 사람이 되지 맙시다. 그리스도인은 '오늘이 내 마지막날이니 진실하게 살자'가 아니라 '어제는 죽었고, 오늘을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나는 벌써 죽어버리고 덤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자,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입니다. 영이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완전히 위탁하는 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든 이틀을 살든,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천사의 얼굴을 가진 사람은 불평이 없습니다. 어차피 잠시 있다가 가는 세상,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생을 해도 실패를 해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지 마귀의 자녀로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죽느냐 사느냐, 복이냐 저주냐, 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전부가 축복입니다. 축복 말고는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앉아 계신 것이 아니고 서 계셨다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어서서 손을 벌리시고 '스데반아 어서 올라오너라'하시는 모습을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얼굴을 찌푸리겠습니까?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이 험하다, 손해를 보았다,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문제는 내 앞에 그리스도가 보이느냐 안보이느냐, 땅을 보느냐 위를 보느냐입니다. 인자--내가 평생 사랑하던 그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서 손을 들고 나를 기다리시는, 그 모습만 쳐다보고 있다면 무슨 원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향해서 한숨을 쉬겠습니까?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은 그래서 천사의 얼굴입니다.
천사의 얼굴, 이것은 단순한 얼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말없는 말을 들을 줄 알고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특징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기에 더는 말을 잇지 못했으나, 그 얼굴은 결국 위대한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바로 옆에 서 있던 사울을 예수님의 포로 되게 한 것입니다. 많은 성서신학자들은 한결같이 스데반의 죽음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죄인이 어떻게 저런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을 수 있을까--큰 충격을 받고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라고들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위대한 그리스도인을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울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인 스데반을 만났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천사의 얼굴, 이것은 위대한 능력입니다.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원수를 친구로 만듭니다. 핍박자를 위대한 사도로 만듭니다. 여러분, 이 어려운 세대를 살아가면서 혹 '이 세대 때문에, 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하지 마세요. 하늘을 우러러 그리스도를 보십시다.
원수를 사랑의 눈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보십시다. 그리고 내 생명과 내 앞에 있는 모든 것을 깨끗이 주님 앞에 위탁해버립시다. 그렇게 주님을 뵐 때에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이 천사의 얼굴로, 내 말이 주님의 말씀으로, 내 발걸음이 성도의 발걸음으로 바꾸어질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나를 향해 일어서실 것입니다. 스데반을 통하여 역사 하신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역사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개를 쓰다듬으며 "내가 너를 미워한다"고 웃으면서 말하면 그래도 좋다고 꼬리를 칩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꽥 소리를 지르면 사정없이 덤벼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한다느니 미워한다느니 하는 말이 문제가 안됩니다. 어떤 얼굴로 보았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말을 줄이세요. 무엇을 말했느냐가 아니라 얼굴빛이 문제입니다. 천사의 얼굴빛이 있어야 그에 따른 감화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말을 하든 안 하든, 어떻게 말을 했든, 우리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반사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름지기 이러한 그리스도인, 천사의 얼굴을 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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