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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일하라(데살로니가전서 4장 9절~12절)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한국 교회가 자랑하는 고(故)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 하던 평양 산정현교회에서는 8․15해방 후에 주 목사님의 유가족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궁리하다가, 많은 토지를 사 드리고 소작을 주게 하여서 그 소득으로 평안하게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조처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 목사님의 사모님이 이것을 극구 거절했습니다. 사모님이 거절할 때에 한 말을 옮겨놓은 글이 있기에 여기 그대로 소개합니다.
"물건에 의지하면 신앙이 적어지기 때문에 안됩니다. 남편을 팔아먹는 아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안됩니다. 제 아비를 팔아서 크는 자식은 병신처럼 될 것이니 자력으로 일어서도록 길러주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남에게 의지하는 일은 불가(不可) 합니다." 사모님은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자녀들을 키웠습니다. 생모가 아닌 계모였는데도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3D 기피현상'이라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Dirty, Difficult, Dangerous'--더러운 것은 만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려운 일은 서로가 기피하려고 합니다. 위험한 일은 안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국내에도 실업자가 많은데, 만부득이 외국사람들 수만 명을 데려다가 이런 일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상입니다.
여러분, 특별히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 가진, 노동에 대한 큰 오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축복을 무 노동, 안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은 복 받지 못한 사람이요, 아무 일도 안 하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다, 자고로 복이란 무 노동, 무사고, 안일이다--축복 개념이 잘못 됐습니다. 둘째로 기도 응답을 노동 없는 평안을 주는 마술적 능력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기도하는 제목이 '일 안 하게 해주세요, 편하게 해주세요, 무사하게 해주세요, 아무 일도 없게 해주세요……' 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을 기도 응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노동 없는 평안, 무사고, 안일…… 이렇게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노동의 결과만 축복으로 알고, 노동 자체를 복으로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일이란 그 일의 결과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일 그 자체, 이을 해나가는 과정도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처 그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행복의 요소가 네 가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상식입니다. 첫째로, 건강입니다. 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려보아도 건강이 제일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면 복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건강에 기초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뭐니뭐니해도 건강이 행복 제1조입니다.
두 번째로,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할 일이 없으면 쓸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할 일이 없다는 것처럼 비참한 일은 없습니다. 또한 소망이 있어야 됩니다. 항상 미래적인, 영원한 미래를 지향하는 소망에 넘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목숨을 바칠 만큼 사랑하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언제든, 무슨 일을 하든 '위하여' 일합니다. 그를 위하여 생명을 바쳐도 좋다 할만큼 열렬히 사랑하는 '그'가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농부에게는 가을에 추수하는 것만이 복이 아닙니다.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그 때만을 생각하고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봄날에 종달새 소리를 들으면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고 신나는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가하면 한참 일하고 나서 먹는 점심밥, 그것 참 기막히게 맛있습니다. 하루에 다섯 끼를 먹어도 술술 소화가 잘됩니다. 소화제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일 안 하는 사람들은 이 꿀맛을 모릅니다. 이게 바로 행복인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한 끼만 먹고도 소화가 안돼서 '꾸르륵꾸르륵' 소리를 내고 앉았습니다. 이런 사람과는 얘기가 안됩니다. 일을 안 하니까 소화가 안되지요. 도대체 우리 나라처럼 소화제가 많이 팔리는 나라는 없습니다. 어느 나라에든 소화제 광고는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만 있어요. 왜냐하면 '무 노동'이니까요. 배불리 먹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소화가 될 리 없지요. 물론 입맛이 없는 것도 당연합니다. 여러분, 일의 결과만이 복이 아닙니다. 일 자체가 복이요, 일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입니다. 이것이 행복임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에게 노동을 주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리라, 이름을 지으라,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성서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네가 다 이름을 지어라, 생의 존재 의미를 만들어라,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라 하심입니다. 우리는 일하는 것을 마치 죄의 대가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죄 짓기 전에도 일했습니다.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자 분들이 아기를 낳을 때에 무진 고생을 하니까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어휴, 하와 할머니는 왜 선악과를 따먹어 가지고 이 고생을 시키나." 하지만 생산 자체는 죄 짓기 전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다만 거기에 고통과 아픔이 가해졌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어쨌든 에덴동산에서부터, 죄짓기 전에도 사람은 일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죄 때문에 일이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복되다'할 때의 복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수고 없이 먹는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 않고 거둔다는 말씀이 아니요, 심고 거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주시는 과정은 노동과 수고를 통해서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고 없이 내 손에 가져도 그게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를 모르니 내 것이 아니요, 그 뜻을 모르니 내 것이 아니요, 그것을 사용할 줄 모르니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되, 우리의 수고를 통해서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향유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되, 어디서 돈 보따리를 덜렁 떨어뜨려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땀과 수고를 통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점을 꼭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데살로니가교회는 여러 교회 중에서도 특별히 모범적이고 열심히 믿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데 너무 급박하게, 너무 열렬하게, 전적으로 주님의 재림만을 기다리는 그런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일은 안하고 흰옷을 입고 조용히 앉아서 주님만 기다립니다.
집에 있던 먹을 것은 다 먹어버리고, 좀 여유 있게 집에 가서는 "이제 곧 주님 오실 테니까 그것도 마저 먹읍시다"합니다. 이렇게 돌아가며 일만 만드는 사람들이 데살로니가교회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 후서 두 편지를 통하여 사로 바울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렇게 정적인 것이 아니다. 일하며, 활동하며, 전도하며 그렇게 기다려야 할 것이지, 그저 앉아서 무 노동과 안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지금 데살로니가교회에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신앙을 빙자한다 해도 안일은 죄요, 무 수고(無手苦)주의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헬라철학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헬라의 추상적인 철학 때문에 육체노동을 천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유대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노동을 신성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우리네 사상의 흐름을 연구해보면, 뭐 긴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교의 염세주의와 유교의 선비 사상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무노동주의를 지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은 천한 사람이요, 가만히 앉아서 신선처럼 시나 읊고 바둑이나 두고 있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산수화니 풍경화니 하는 그림들을 보면, 대개 산아래 앉아서 바둑을 두는 등의 신선놀음을 그렸습니다. 그림 속의 사람들 모습을 가만히 보세요. 곧 죽게 생기지 않았습디까? 여러분, 그것은 신선놀음이 아닙니다. 일하는 것이 없고, 하나같이 먹고 노는 것만 좋아하는, 이런 사상으로 바꾸어졌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어느덧 육체노동을 천시하는 그런 사상이 우리의 문화가 되고, 우리의 철학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아주 강한 표현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조용히 일하라, 자기 일을 하라, 손으로 일하라.' "종용(從容)하여(11절)"---'조용히 일하라'는 의미의 이 말은 헬라 원문으로는 '헤쉬카제인'이라고 합니다. 따로이 누가복음 14장 4절에서는 '잠잠하다'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시끄럽지 않고, 복잡하지 않고, 안정되고 침착한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하는 데에 있어 원망하지 말아라, 불평하지 말아라, 돌아서서 중얼중얼 투덜대며 일하지 말아라, 조용히 일하라, 짜증내지 말고 일하라 함입니다. 정신의학자 칼 융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서두름은 마귀의 것이 아니다. 서두름, 바로 그것이 마귀 자신이다." 우리가 서두르고 짜증내는 것이 마귀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 것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인생의 모든 문제는, 사람이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앉아 있기를 거부하는 데서부터 일어난다"라고 말했습니다. 깊은 뜻이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방에 있으면 방에 앉은 대로, 직장에서는 직장대로, 일터에서는 일터대로, 그 자리에 자기가 앉아 있는 것을 불평스럽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불평스러워서 자꾸 뛰쳐나가려 하고, 내가 처한 처지 외에 다른 것을 사모하고…… 바로 이런 마음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가정, 그 가정이라는 곳에서 하루종일 있든 며칠을 있든 짜증스럽지 않아야 됩니다. 그런데 자기 집을 잘 마련해놓고도 거기에 한 시간도 못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 답답해서 못 견뎌합니다. 뛰쳐나가려고 합니다. 그가 어디로 갈 것 같습니까? 공부하는 학생이 공부하는 마음에 젖어 있지 못하고 자꾸 어디론가 떠나려고 하는 마음만 생긴다면, 이것이 어디까지 갈 것 같습니까? 결국은 조용해야 됩니다. 자기가 처한 처지, 자기에게 부과된 일을 잘 수용해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수용하고, 사명적으로 수용하고, 은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결혼했습니까? 어떤 남자와 살든 어떤 여자와 살든, 그와의 사이에서 조용히 일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그저 못마땅해 가지고, 내 남편(아내)은 세상에서 제일 못났고, 남의 남편(아내)만 좋아 보이는데 있습니다. 그가 바로 병통입니다. 또, 자식을 놓아보아도 내 자식이 제일 좋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 자식은 세상에서 제일 못났고, 남의 자식만 잘나 보여서, 앉기만 하면 남의 자식 칭찬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개는 어떻고, 아무개는 잘났고…… 이 말을 듣고 자라는 아이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내게 주어진 자녀가 가장 소중하다고 부모가 얘기하고, 그 말을 들을 때에 그 아이가 긍지를 가지고 자랄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어디서부터 빗나가는 것 같습니까? 그런고로 조용히 일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즐거운 일을 해야 됩니다.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은 먹지 말고, 뭐든지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사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하고 싶지 않은데, 정말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즐겁다고 생각하십시오." 여러분,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즐길 것입니다. 내가 마주 대한 밥상 위의 음식이 맛있게 생각되는 것은, 맛있게 먹을 줄 알고 감사함으로 먹을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철학입니다. 어떤 일이 주어지든지 즐거운 마음으로 즐기는 것입니다. 이런 철학이 필요합니다. 조용히 일하라---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감사함으로 받는 그런 자세를 말씀함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은 "자기 일을 하고(11절)"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일을 하라--내가 내 일을 안 하면 다른 사람이 대신하게 됩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내 일을 할 것입니다. 내가 내 일을 해서 내가 내 것을 먹지 않으면, 내가 남의 것을 먹게 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 3장 12절은 "자기 양식을 먹으라"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양식을 먹으라---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일해서 내 양식을 먹어야 됩니다. 먹기는 먹으면서 일을 안 하면 그것이 바로 도둑입니다. 남의 양식을 먹으니까, 남이 땀흘린 것을 내가 먹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마는, 종종 우리는 '나이 많은 어른들을 잘 모셔야겠다, 그것은 사회적인 책임이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 얘기했지, 근본적인 문제를 잊어버렸습니다. 젊었을 때에 허투루 쓰지 말고 절약할 것이요, 젊었을 때에 노후대책을 마련해야 됩니다.
그 때에 방종하지 말고, 방탕하지 말고, 절약해서 잘 모았다가, 나이 많이든 다음에 그 자기 것을 먹어야지요.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이 많이 들어서 남에게 구제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남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구제가 따로 없어요. 신세지지 않으면 그것이 구제입니다. 그런데 나이 들어 초라하게 되어서, 남이 불쌍하게 여기고 누구인가 도와줘야 되는 그런 사람들을 가만히 보세요. 젊었을 때에 제멋대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구제의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피치 못할 현실임은 인정합니다마는, 좀더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 약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국의 경우에는, 나이 들어 양로원에 들어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양로원이라고 해서, 남이 만들어놓은 양로원에 거저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돈을 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얘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내 양식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양식 내가 못 먹으면, 남의 양식을 먹게 되니까 도둑이지요. 더욱이 사회를 향해서 사랑이 어떻고, 뭐가 어떻고…… 그런 소리 할 것이 아닙니다. 젊었을 때, 여유 있을 때, 힘있을 때에 정신차리세요. 그 때에는 되는대로 살아놓고 마지막에 와서 이제 무슨 얘기를 하는 것입니까? 노후대책,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각자의 것입니다. 자기 양식을 먹으라---이 얼마나 중요한 얘기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노동해서, 내가 수고해서, 내 양식을 내가 먹는 그 철학이 분명해져야 합니다.
성서신학자 로버트 카프는 사도 바울의 직업관을 네 가지로 요약해서 말했습니다. 네 가지 모두 영어의 'A'자로 시작합니다. 첫째로, Attitude--노동에 대한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Availability--유효성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유효하게 쓰임 받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Acting--행동적인 것이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Accountability--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내가 해야 할 일과 나의 책임이 따로 있습니다. 이것을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책임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이 마지막으로 주는 교훈은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11절)"입니다. 손으로 일하라---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가만히 보세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 노동자입니다. 목자입니다.
모세도 목자요, 다윗 왕도 원래 목자입니다. 엘리사는 소를 모는 농사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0세까지 목수이셨습니다. 바울도 천막을 치는 업을 가진 하나의 노동자입니다. 자, 성경에 나오는 귀한 인물들이 노동자 출신이라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여러분, 일해야 합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보고서에 의하면, 사람은 놀고 있을 때에 체력이 더 많이 소모됩니다. 뿐만 아니라, 일을 안하고 놀고 있으면 병균에 대한 신체의 저항력이 평소의 4분의 1로 저하됩니다. 그러니까 노는 사람들이 오는 감기 가는 감기에 다 걸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놀고 있으니까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몸조리한답시고 그저 따뜻하게만 생활하니까 그럴 수밖에요. 추웠다 더웠다 해야 건강해지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의 몸이란, 놀게 되면 점점 약해지고 약해져서 마지막에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건강을 지킬 수가 없어요.
움직여야 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건강이란 부지런한 자의 것입니다. 사실은 힘도 일에서 얻는 것입니다. 힘이 있어서 일하기보다 일해서 힘을 얻는 것입니다. 육체도 그렇지만 특별히 정신도 그렇습니다. 정신도 계속 공부를 해야 합니다. 책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이 많은 어른들을 보면 전부 옛날 얘기만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근자(近者)에는 머리에 입력된 게 아무 것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밤낮 옛날 얘기만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보고, 듣고, 배우고, 토론하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는 하지 않고 옛날 얘기만 하고 앉았으니까 발전이 없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는 책상에서 얻는 게 아닙니다. 부딪쳐야 됩니다. 오늘날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방면을 살펴보면, 학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깜짝 놀라거나 '처음 있는 일입니다'라며 궁색한 변명만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아니, 이것 하나 예상을 못했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건에 부딪쳐야 비로소 알거든요. 공부해 가지고는 알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지혜가 따로 없습니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 지혜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자동차를 직접 몰고 다닙니다마는, 요새는 새 차를 타니까 영 재미가 없습니다. 어쨌든, 차에 대해서는 제가 많이 아는 편인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오래 전에 고물 차를 마련해서 탔는데, 잘 달리다가 도중에 그만 덜컥 서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균 하루에 다섯 번입니다. 이것 하나 고치면 되겠구나 하고 고쳐놓으면 이번에는 다른 것이 고장납니다. 그래서 그것을 고쳐놓으면 또 다른 것이 고장나고…… 그렇게 끌고 다니다보니 차에 관해서는 도사가 됐습니다. 여러분, 사건에 자꾸 부닥쳐서, 그것을 극복하고 이기면서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어디 공짜로 주어지던가요? 능력도, 지혜도, 힘도, 건강도 노동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냥 앉아서 얻어지리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잘못된 생각입니다. 생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질병도 가난도 아닙니다. 권태입니다. 권태가 문제입니다. 오래 살지 못해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짧은 생마저도 권태로워서 문제이지요. 이것이 바로 노동하지 않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상하게도, 정신병원에 가보면 남자보다 여자가 많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여자 중에도 자녀가 다섯 이상인 환자는 없답니다. 도시락 싸느라고 바빠서 못 옵니다. 독신이라든가 자녀가 하나라든가 하는 사람들이 정신병원에 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한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바빠야 하느냐---인생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물을 겨를이 없을 만큼 바빠야 합니다. 그러면 건강합니다. 우리 나라처럼 시중에 두통 약이 많은 나라는 없습니다. 여러분, 일해서 해결해야 될 것입니다. 이게 어디 두통 약으로 해결해야 될 문제입니까? 그러니까 만 가지 병이 다 오는 것이지요.
발명왕 에디슨은 식사시간을 놓쳐가면서, 어떤 때에는 18시간씩 연구실에 들어앉아 연구에 열중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평생 일을 많이 했지만 그가 남긴 기록은 이렇습니다. "나는 한 번도 일한 적은 없다. 모든 것을 즐겼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즐겼고 하고 있는 일에 미쳐 있었기 때문에 노동한 기억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을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일을 축복으로, 일을 행복으로, 일을 은혜로 받아들일 때,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건강도, 지혜도, 은혜도, 새로운 능력도, 더 큰 은혜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
조용히 일하라(데살로니가전서 4장 9절~12절)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한국 교회가 자랑하는 고(故)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 하던 평양 산정현교회에서는 8․15해방 후에 주 목사님의 유가족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궁리하다가, 많은 토지를 사 드리고 소작을 주게 하여서 그 소득으로 평안하게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조처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 목사님의 사모님이 이것을 극구 거절했습니다. 사모님이 거절할 때에 한 말을 옮겨놓은 글이 있기에 여기 그대로 소개합니다.
"물건에 의지하면 신앙이 적어지기 때문에 안됩니다. 남편을 팔아먹는 아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안됩니다. 제 아비를 팔아서 크는 자식은 병신처럼 될 것이니 자력으로 일어서도록 길러주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남에게 의지하는 일은 불가(不可) 합니다." 사모님은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자녀들을 키웠습니다. 생모가 아닌 계모였는데도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3D 기피현상'이라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Dirty, Difficult, Dangerous'--더러운 것은 만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려운 일은 서로가 기피하려고 합니다. 위험한 일은 안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국내에도 실업자가 많은데, 만부득이 외국사람들 수만 명을 데려다가 이런 일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상입니다.
여러분, 특별히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 가진, 노동에 대한 큰 오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축복을 무 노동, 안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은 복 받지 못한 사람이요, 아무 일도 안 하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다, 자고로 복이란 무 노동, 무사고, 안일이다--축복 개념이 잘못 됐습니다. 둘째로 기도 응답을 노동 없는 평안을 주는 마술적 능력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기도하는 제목이 '일 안 하게 해주세요, 편하게 해주세요, 무사하게 해주세요, 아무 일도 없게 해주세요……' 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을 기도 응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노동 없는 평안, 무사고, 안일…… 이렇게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노동의 결과만 축복으로 알고, 노동 자체를 복으로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일이란 그 일의 결과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일 그 자체, 이을 해나가는 과정도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처 그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행복의 요소가 네 가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상식입니다. 첫째로, 건강입니다. 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려보아도 건강이 제일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면 복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건강에 기초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뭐니뭐니해도 건강이 행복 제1조입니다.
두 번째로,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할 일이 없으면 쓸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할 일이 없다는 것처럼 비참한 일은 없습니다. 또한 소망이 있어야 됩니다. 항상 미래적인, 영원한 미래를 지향하는 소망에 넘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목숨을 바칠 만큼 사랑하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언제든, 무슨 일을 하든 '위하여' 일합니다. 그를 위하여 생명을 바쳐도 좋다 할만큼 열렬히 사랑하는 '그'가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농부에게는 가을에 추수하는 것만이 복이 아닙니다.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그 때만을 생각하고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봄날에 종달새 소리를 들으면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고 신나는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가하면 한참 일하고 나서 먹는 점심밥, 그것 참 기막히게 맛있습니다. 하루에 다섯 끼를 먹어도 술술 소화가 잘됩니다. 소화제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일 안 하는 사람들은 이 꿀맛을 모릅니다. 이게 바로 행복인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한 끼만 먹고도 소화가 안돼서 '꾸르륵꾸르륵' 소리를 내고 앉았습니다. 이런 사람과는 얘기가 안됩니다. 일을 안 하니까 소화가 안되지요. 도대체 우리 나라처럼 소화제가 많이 팔리는 나라는 없습니다. 어느 나라에든 소화제 광고는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만 있어요. 왜냐하면 '무 노동'이니까요. 배불리 먹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소화가 될 리 없지요. 물론 입맛이 없는 것도 당연합니다. 여러분, 일의 결과만이 복이 아닙니다. 일 자체가 복이요, 일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입니다. 이것이 행복임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에게 노동을 주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리라, 이름을 지으라,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성서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네가 다 이름을 지어라, 생의 존재 의미를 만들어라,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라 하심입니다. 우리는 일하는 것을 마치 죄의 대가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죄 짓기 전에도 일했습니다.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자 분들이 아기를 낳을 때에 무진 고생을 하니까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어휴, 하와 할머니는 왜 선악과를 따먹어 가지고 이 고생을 시키나." 하지만 생산 자체는 죄 짓기 전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다만 거기에 고통과 아픔이 가해졌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어쨌든 에덴동산에서부터, 죄짓기 전에도 사람은 일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죄 때문에 일이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복되다'할 때의 복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수고 없이 먹는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 않고 거둔다는 말씀이 아니요, 심고 거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주시는 과정은 노동과 수고를 통해서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고 없이 내 손에 가져도 그게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를 모르니 내 것이 아니요, 그 뜻을 모르니 내 것이 아니요, 그것을 사용할 줄 모르니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되, 우리의 수고를 통해서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향유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되, 어디서 돈 보따리를 덜렁 떨어뜨려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땀과 수고를 통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점을 꼭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데살로니가교회는 여러 교회 중에서도 특별히 모범적이고 열심히 믿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데 너무 급박하게, 너무 열렬하게, 전적으로 주님의 재림만을 기다리는 그런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일은 안하고 흰옷을 입고 조용히 앉아서 주님만 기다립니다.
집에 있던 먹을 것은 다 먹어버리고, 좀 여유 있게 집에 가서는 "이제 곧 주님 오실 테니까 그것도 마저 먹읍시다"합니다. 이렇게 돌아가며 일만 만드는 사람들이 데살로니가교회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 후서 두 편지를 통하여 사로 바울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렇게 정적인 것이 아니다. 일하며, 활동하며, 전도하며 그렇게 기다려야 할 것이지, 그저 앉아서 무 노동과 안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지금 데살로니가교회에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신앙을 빙자한다 해도 안일은 죄요, 무 수고(無手苦)주의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헬라철학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헬라의 추상적인 철학 때문에 육체노동을 천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유대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노동을 신성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우리네 사상의 흐름을 연구해보면, 뭐 긴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교의 염세주의와 유교의 선비 사상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무노동주의를 지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은 천한 사람이요, 가만히 앉아서 신선처럼 시나 읊고 바둑이나 두고 있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산수화니 풍경화니 하는 그림들을 보면, 대개 산아래 앉아서 바둑을 두는 등의 신선놀음을 그렸습니다. 그림 속의 사람들 모습을 가만히 보세요. 곧 죽게 생기지 않았습디까? 여러분, 그것은 신선놀음이 아닙니다. 일하는 것이 없고, 하나같이 먹고 노는 것만 좋아하는, 이런 사상으로 바꾸어졌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어느덧 육체노동을 천시하는 그런 사상이 우리의 문화가 되고, 우리의 철학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아주 강한 표현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조용히 일하라, 자기 일을 하라, 손으로 일하라.' "종용(從容)하여(11절)"---'조용히 일하라'는 의미의 이 말은 헬라 원문으로는 '헤쉬카제인'이라고 합니다. 따로이 누가복음 14장 4절에서는 '잠잠하다'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시끄럽지 않고, 복잡하지 않고, 안정되고 침착한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하는 데에 있어 원망하지 말아라, 불평하지 말아라, 돌아서서 중얼중얼 투덜대며 일하지 말아라, 조용히 일하라, 짜증내지 말고 일하라 함입니다. 정신의학자 칼 융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서두름은 마귀의 것이 아니다. 서두름, 바로 그것이 마귀 자신이다." 우리가 서두르고 짜증내는 것이 마귀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 것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인생의 모든 문제는, 사람이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앉아 있기를 거부하는 데서부터 일어난다"라고 말했습니다. 깊은 뜻이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방에 있으면 방에 앉은 대로, 직장에서는 직장대로, 일터에서는 일터대로, 그 자리에 자기가 앉아 있는 것을 불평스럽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불평스러워서 자꾸 뛰쳐나가려 하고, 내가 처한 처지 외에 다른 것을 사모하고…… 바로 이런 마음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가정, 그 가정이라는 곳에서 하루종일 있든 며칠을 있든 짜증스럽지 않아야 됩니다. 그런데 자기 집을 잘 마련해놓고도 거기에 한 시간도 못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 답답해서 못 견뎌합니다. 뛰쳐나가려고 합니다. 그가 어디로 갈 것 같습니까? 공부하는 학생이 공부하는 마음에 젖어 있지 못하고 자꾸 어디론가 떠나려고 하는 마음만 생긴다면, 이것이 어디까지 갈 것 같습니까? 결국은 조용해야 됩니다. 자기가 처한 처지, 자기에게 부과된 일을 잘 수용해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수용하고, 사명적으로 수용하고, 은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결혼했습니까? 어떤 남자와 살든 어떤 여자와 살든, 그와의 사이에서 조용히 일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그저 못마땅해 가지고, 내 남편(아내)은 세상에서 제일 못났고, 남의 남편(아내)만 좋아 보이는데 있습니다. 그가 바로 병통입니다. 또, 자식을 놓아보아도 내 자식이 제일 좋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 자식은 세상에서 제일 못났고, 남의 자식만 잘나 보여서, 앉기만 하면 남의 자식 칭찬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개는 어떻고, 아무개는 잘났고…… 이 말을 듣고 자라는 아이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내게 주어진 자녀가 가장 소중하다고 부모가 얘기하고, 그 말을 들을 때에 그 아이가 긍지를 가지고 자랄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어디서부터 빗나가는 것 같습니까? 그런고로 조용히 일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즐거운 일을 해야 됩니다.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은 먹지 말고, 뭐든지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사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하고 싶지 않은데, 정말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즐겁다고 생각하십시오." 여러분,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즐길 것입니다. 내가 마주 대한 밥상 위의 음식이 맛있게 생각되는 것은, 맛있게 먹을 줄 알고 감사함으로 먹을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철학입니다. 어떤 일이 주어지든지 즐거운 마음으로 즐기는 것입니다. 이런 철학이 필요합니다. 조용히 일하라---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감사함으로 받는 그런 자세를 말씀함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은 "자기 일을 하고(11절)"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일을 하라--내가 내 일을 안 하면 다른 사람이 대신하게 됩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내 일을 할 것입니다. 내가 내 일을 해서 내가 내 것을 먹지 않으면, 내가 남의 것을 먹게 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 3장 12절은 "자기 양식을 먹으라"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양식을 먹으라---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일해서 내 양식을 먹어야 됩니다. 먹기는 먹으면서 일을 안 하면 그것이 바로 도둑입니다. 남의 양식을 먹으니까, 남이 땀흘린 것을 내가 먹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마는, 종종 우리는 '나이 많은 어른들을 잘 모셔야겠다, 그것은 사회적인 책임이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 얘기했지, 근본적인 문제를 잊어버렸습니다. 젊었을 때에 허투루 쓰지 말고 절약할 것이요, 젊었을 때에 노후대책을 마련해야 됩니다.
그 때에 방종하지 말고, 방탕하지 말고, 절약해서 잘 모았다가, 나이 많이든 다음에 그 자기 것을 먹어야지요.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이 많이 들어서 남에게 구제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남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구제가 따로 없어요. 신세지지 않으면 그것이 구제입니다. 그런데 나이 들어 초라하게 되어서, 남이 불쌍하게 여기고 누구인가 도와줘야 되는 그런 사람들을 가만히 보세요. 젊었을 때에 제멋대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구제의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피치 못할 현실임은 인정합니다마는, 좀더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 약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국의 경우에는, 나이 들어 양로원에 들어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양로원이라고 해서, 남이 만들어놓은 양로원에 거저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돈을 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얘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내 양식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양식 내가 못 먹으면, 남의 양식을 먹게 되니까 도둑이지요. 더욱이 사회를 향해서 사랑이 어떻고, 뭐가 어떻고…… 그런 소리 할 것이 아닙니다. 젊었을 때, 여유 있을 때, 힘있을 때에 정신차리세요. 그 때에는 되는대로 살아놓고 마지막에 와서 이제 무슨 얘기를 하는 것입니까? 노후대책,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각자의 것입니다. 자기 양식을 먹으라---이 얼마나 중요한 얘기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노동해서, 내가 수고해서, 내 양식을 내가 먹는 그 철학이 분명해져야 합니다.
성서신학자 로버트 카프는 사도 바울의 직업관을 네 가지로 요약해서 말했습니다. 네 가지 모두 영어의 'A'자로 시작합니다. 첫째로, Attitude--노동에 대한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Availability--유효성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유효하게 쓰임 받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Acting--행동적인 것이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Accountability--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내가 해야 할 일과 나의 책임이 따로 있습니다. 이것을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책임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이 마지막으로 주는 교훈은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11절)"입니다. 손으로 일하라---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가만히 보세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 노동자입니다. 목자입니다.
모세도 목자요, 다윗 왕도 원래 목자입니다. 엘리사는 소를 모는 농사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0세까지 목수이셨습니다. 바울도 천막을 치는 업을 가진 하나의 노동자입니다. 자, 성경에 나오는 귀한 인물들이 노동자 출신이라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여러분, 일해야 합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보고서에 의하면, 사람은 놀고 있을 때에 체력이 더 많이 소모됩니다. 뿐만 아니라, 일을 안하고 놀고 있으면 병균에 대한 신체의 저항력이 평소의 4분의 1로 저하됩니다. 그러니까 노는 사람들이 오는 감기 가는 감기에 다 걸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놀고 있으니까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몸조리한답시고 그저 따뜻하게만 생활하니까 그럴 수밖에요. 추웠다 더웠다 해야 건강해지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의 몸이란, 놀게 되면 점점 약해지고 약해져서 마지막에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건강을 지킬 수가 없어요.
움직여야 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건강이란 부지런한 자의 것입니다. 사실은 힘도 일에서 얻는 것입니다. 힘이 있어서 일하기보다 일해서 힘을 얻는 것입니다. 육체도 그렇지만 특별히 정신도 그렇습니다. 정신도 계속 공부를 해야 합니다. 책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이 많은 어른들을 보면 전부 옛날 얘기만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근자(近者)에는 머리에 입력된 게 아무 것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밤낮 옛날 얘기만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보고, 듣고, 배우고, 토론하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는 하지 않고 옛날 얘기만 하고 앉았으니까 발전이 없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는 책상에서 얻는 게 아닙니다. 부딪쳐야 됩니다. 오늘날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방면을 살펴보면, 학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깜짝 놀라거나 '처음 있는 일입니다'라며 궁색한 변명만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아니, 이것 하나 예상을 못했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건에 부딪쳐야 비로소 알거든요. 공부해 가지고는 알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지혜가 따로 없습니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 지혜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자동차를 직접 몰고 다닙니다마는, 요새는 새 차를 타니까 영 재미가 없습니다. 어쨌든, 차에 대해서는 제가 많이 아는 편인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오래 전에 고물 차를 마련해서 탔는데, 잘 달리다가 도중에 그만 덜컥 서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균 하루에 다섯 번입니다. 이것 하나 고치면 되겠구나 하고 고쳐놓으면 이번에는 다른 것이 고장납니다. 그래서 그것을 고쳐놓으면 또 다른 것이 고장나고…… 그렇게 끌고 다니다보니 차에 관해서는 도사가 됐습니다. 여러분, 사건에 자꾸 부닥쳐서, 그것을 극복하고 이기면서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어디 공짜로 주어지던가요? 능력도, 지혜도, 힘도, 건강도 노동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냥 앉아서 얻어지리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잘못된 생각입니다. 생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질병도 가난도 아닙니다. 권태입니다. 권태가 문제입니다. 오래 살지 못해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짧은 생마저도 권태로워서 문제이지요. 이것이 바로 노동하지 않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상하게도, 정신병원에 가보면 남자보다 여자가 많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여자 중에도 자녀가 다섯 이상인 환자는 없답니다. 도시락 싸느라고 바빠서 못 옵니다. 독신이라든가 자녀가 하나라든가 하는 사람들이 정신병원에 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한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바빠야 하느냐---인생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물을 겨를이 없을 만큼 바빠야 합니다. 그러면 건강합니다. 우리 나라처럼 시중에 두통 약이 많은 나라는 없습니다. 여러분, 일해서 해결해야 될 것입니다. 이게 어디 두통 약으로 해결해야 될 문제입니까? 그러니까 만 가지 병이 다 오는 것이지요.
발명왕 에디슨은 식사시간을 놓쳐가면서, 어떤 때에는 18시간씩 연구실에 들어앉아 연구에 열중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평생 일을 많이 했지만 그가 남긴 기록은 이렇습니다. "나는 한 번도 일한 적은 없다. 모든 것을 즐겼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즐겼고 하고 있는 일에 미쳐 있었기 때문에 노동한 기억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을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일을 축복으로, 일을 행복으로, 일을 은혜로 받아들일 때,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건강도, 지혜도, 은혜도, 새로운 능력도, 더 큰 은혜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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