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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어린이의 일을 버렸노라(고린도전서 13장 8절~13절)

by 【고동엽】 2023.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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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일을 버렸노라(고린도전서 13장 8절~13절)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몸이 어리고 생각이 어린 자를 '어린이'라 하고, 몸이 작고 생각이 유치한 자를 '아이'라 합니다. 그 말과 행동과 생각이 유치합니다. 실수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어린이는 귀합니다. 우리는 그 많은 실수와 잘못도 마다하지 않고 어린이를 극진히 사랑합니다. 그런가 하면, 몸은 큰데 생각은 여전히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능아, 정신박약아가 그들입니다.

모든 생명에는 저마다 유아기가 있고 아동기가 있습니다. 생명체는 성장하여야 합니다. 성장이 정지되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생명 전체, 나아가 그 존재 자체마저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장을 하여야 하되 균형 있게 성장하여야 합니다. 몸의 자람과 더불어 지식이 자라야 합니다. 영도 자라고 혼도 자라야 합니다. 가치관도 자라고 세계관도 자라고 인격도 자라야 합니다. 겉과 속이 함께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성장해야 하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것도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격이요 생명체입니다. 육체와 더불어 경제도, 지위도, 지식도, 명성도, 능력도 다 컸습니다. 훌륭하게 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격과 도덕성, 곧 내적 존재가 여전히 미숙아로 남아 있다면 그야말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자동차 운전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만취한 사람에게 총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고액권의 돈을 지니고 다니 것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과연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 같습니까? 경제성장에 정신문화가 따르지 못하면 엄청난 부작용이 따릅니다. 지식도 있고 기술도 있고 능력도 있는데 도덕성이 따르지 못한다면 십중팔구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급기야 사회문제로 치닫게 됩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십시다. 찬란하게 꽃피웠던 문명이 많습니다.

애굽의 문명, 로마와 헬라의 문명. 중국과 인도의 문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명국들이 왜 무너졌습니까? 경제문제로 인함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해서, 먹고살기 어려워서 망한 것이 아닙니다. '도덕의 타락'이 패망의 주범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폐허로 남고 만 것이지요. 세계를 여행하면서 특별히 이탈리아의 폼페이를 들러보면 느끼는 바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토록 화려하고 풍족했던 도시가 역사의 기억 속으로 까마득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웅대한 경기장이며 환락가며 엄청난 타락상이라니, 필경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나 자신에 대한 착각과 오해가 문제됩니다. '나는 성숙하다' ---- 자기의식을 잘못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되었는데 잘된 줄로, 악한데 선한 줄로, 죄 중에 있으면서 진실한 줄로 알고 또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망해가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무엇인가 이루어지고 있는 줄로 착각합니다. 사회건 국가건, 정치건 경제건, 다 속고 있습니다. 인격도 그렇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망했으면 망한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나 자신의 나이를 바로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당면한 현실을 사실로 시인해야 합니다. 시편 9012절에 다윗의 진실한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計數)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 간절히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한 심리학자가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나이를 세는 개념이 다르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는 살아온 날을, 어른은 앞으로 살날을 센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다섯 살이건 열 살이건, 자신이 얼마를 살아왔다는 것만 염두에 두고 나이를 셉니다. 앞에 펼쳐질 미래가 무한한 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이든 사람은 살아온 날과 함께 남은 시간을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은 살아온 시간을, 나이든 사람은 남은 시간을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면 남은 시간을 생각할 줄 알면서 비로소 성인이라는 말이 됩니다. 나에게는 얼마만큼의 생이 더 남아 있습니까? 무슨 생각을 하건 무슨 일을 하건 그날을, 디 데이(D-day)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지식이니 물질이니 하는 것들이 도대체 무슨 소용입니까?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엄격한 제약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남은 시간을 먼저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성인이요 성숙한 인격입니다. 한계를 모르고 천방지축 덤벼드는 것은 철부지 어린아이나 하는 짓입니다.

심리학자 피아제(Piaget, Jean)는 아동기의 특징을 여섯으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여기서 아동기란 만 2세에서 5세까지의 아이를 말합니다. 이 시기의 특징을 하나하나 짚어보면서 과연 나는 몇 살이나 되었는가, 정신적인 연령을 가늠해보십시다.

첫째로, 상징적 활동이 증가하는 시기입니다. 모든 것을 상징적으로 보려들기 때문에 실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둘째로, 직관적 판단에 매이고 논리에 약한 시기입니다.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된다, 그 일이 어떠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인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보는 대로 듣는 대로 순간 순간만을 생각하지 논리적으로 이해할 줄 모릅니다. 모든 일에 직관적입니다.

셋째로, 자아 중심적입니다. 내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됩니다. 나만 위해달라고 합니다. 실제로 왕노릇을 하고 있지요. 어머니는 젖 먹여 주는 사람, 아버지는 돈벌어오는 사람쯤으로, 나를 위하여 봉사하고 애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다, 내가 요구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보면 꽤 나이가 든 다음에도 여전히 세 살 버릇이 남아 있어서 어디를 가나 '내가 왕이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아기를 못 벗어난 사람입니다.

넷째로, 물활론적(物活論的) 세계관을 가집니다. '모든 것은 살아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애니미스틱 뷰(animistic view)입니다. 나무도 말을 하고 소도 말을 하고 개도 말을 한다, 우리가 무생물이라고 하는 모든 것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동화(童話)가 통하지 않습니까? 다섯째로, 타율적 도덕관에 삽니다. 자율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타율적인 윤리에 매여서 살아갑니다.

마지막 여섯째가 재미있습니다. 꿈의 실재론(實在論)입니다.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주위를 살펴보면 그런 사람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어느 날 밤,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와 좋아지내는 꿈을 꾸고 엉뚱한 상상을 합니다. '단순한 꿈이 아닐 거야.

뭔가 있을 거야. 그렇지 않아도 요즘 낌새가 이상했어.' 꿈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하루종일 남편을 들볶아대는 것입니다.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사람처럼 미련한 사람도 없습니다. 생각이 늘 꿈속을 거니는 것입니다. 유치합니다. , 나에게 이러한 유아기적 특성이 아직도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깊이 돌아볼 일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어린아이의 심리적 현상과 그 특성을 간략하면서도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11)" ---말함이 어린아이와 같이 미숙하다고 말씀합니다. 언어가 유치합니다. 다시 말해서 감정 주도적이고 직감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가만히 보면, 금방 사랑한다고 했다가 다시 미워한다고 하기를 하루에도 몇 차례씩 반복합니다. 과자라도 하나 주면 좋아라 하고, 큰소리로 야단이라도 칠라치면 금방 밉다고 합니다.

변덕스럽기가 죽 끓듯 합니다. 감정 주도적이어서 그렇습니다. 더욱이 모든 것의 본()이 나 자신입니다. 자기중심적인 것입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요, 나에게 나쁘게 대해주는 사람이 나쁜 사람입니다. 모든 일에 흑백논리로 대합니다.

내가 이 말을 하게 되면 어떠한 파급효과가 있을까, 이 말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마음내키는 대로, 즉흥적으로 말을 뱉어버립니다. 자기중심적인 언어생활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요즘도 보면 성숙치 못한, 유치한 언어가 많이 돌아다닙니다. 직감적으로 말해버리는 것이지요. 이것이 파급되어 많은 어려움을 만듭니다. 그런가하면 비논리적입니다. 논리성이 없습니다. 환상적입니다.

둘째,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피상적인 사고에 그친다고 말씀함입니다. 쉬운 말이나 알아듣지, 좀 어려우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릅니다. 이해하는 것, 깨닫는 것이 유치합니다. 생각하는 것은 고작 먹는 것뿐이오 자기 쾌락입니다. 그 이상은 생각할 줄 모릅니다. 기도하는 것도 그렇고, 성경을 이해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유치한 것을 구하고, 깨닫는 것도 부분적이요 피상적입니다.

셋째,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논리에서 어린아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중심적입니다. 두 아이가 어머니의 생일을 맞이하여 오랫동안 모아온 돼지 저금통을 깨뜨려서 선물을 사러 나갔습니다. 선물을 고르는데, 국민학교에 다니는 큰아이는 제간에는 깊이 생각하여 어머니의 스타킹을 고릅니다. 그런데 유치원에 다니는 작은아이는 제 장난감을 사들고 들어옵니다. 내게 장난감이 좋으니 어머니에게도 당연히 장난감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더는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본위로 판단하고 행동하려 합니다. 얼마전 평양을 방문하면서 일차적으로 중국 북경에서 북쪽 사람들을 만나 일정을 논의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40년만에 처음 찾는 고향입니다. 아는 분들께 선물을 하고 싶은데 무엇이 좋을까요?" 그들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놀랍게도 양말이나 설탕, 눈깔사탕 같은 것들이 좋겠다고 합디다. 우리는 가능하면 설탕을 먹지 않으려고 꽤나 식생활에 신경을 씁니다. 달게 먹으면 큰일나는 줄로 압니다. 그런데 그들은 설탕 구경도 못하고 살아온 것입니다. 수입해야 하는 것이니 당연히 못 먹을 수 밖에요. 설탕을 못 먹어서 배고픈 사람에게는 설탕 한 봉지면 됩니다. 눈깔사탕을 생전 처음 먹어 본다고 합디다. 한마디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설탕 한 봉지라는 말입니다. 옷도 우리가 입는 울긋불긋한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중국 사람들이 입는 인민복 같은 것이 고작입니다. 중요한 것은 받는 사람 본위로 생각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본위로 생각하고,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 본위로 생각합니다. 'recepter's world view,' 곧 상대방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그의 마음, 그의 세계관을 읽고나서 그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에는 다분히 이기적이고 자기본위 적입니다. 구심점이 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이제 남을 생각하게 됩니다. 저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가, 저 사람의 입맛이 어떠한가, 저 사람의 취향은 어떠한가, 저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가에 생각이 미칩니다. 비로소 어른 된 것입니다.

현대사회를 가리켜 충동적 행위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얼마나 유치한 일입니까? 평소에는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감정이 복 받쳐 올라 사람을 죽입니다. 그 순간을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충동적 살인입니다. 다음에 있을 결과를 생각하지 못하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래서 저는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은 어린아이로 취급합니다. 술을 많이 마셔보십시오. 다음날 아침이면 속이 쓰리지요, 사람 추해지지요, 꼴이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될 줄 번연히 알면서도 코가 비뚤어지게 마셔대니 어린아이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다음 일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마실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아내 보기에 미안하고 자식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이웃에도 체신이 떨어집니다. 그러면서도 번번이 그 짓거리니 언제 어른이 되겠습니까? 몸집만 크다고 어른인 것은 아닙니다. 생각하는 것이 충동적이고 즉흥적인데 어떻게 어른이라 하겠습니까?

또한, 편법 능력화의 시대라고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원리원칙을 모릅니다. 편법으로 통하고, 그 편법이 통했을 때에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떻습니까? 정당한 길로, 설령 먼 길로 돌아가야 할지라도 정당한 길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편법으로 통하고 이 편법이 능력으로 통하는 사회는 미숙한 사회입니다. 어린아이는 미래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앞을 생각하지 못하고 당장 놀고 싶어합니다. 순간 순간만을 생각합니다. 영원 지향적인 가치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사고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또 과장하려듭니다.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으로 나갔는데 그만 시간에 늦어 비행기는 이미 이륙한 뒤였습니다. 안내에 가서 따집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비행기는 시간대로 떠났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 큰 소리로 소란을 피웁니다. "아니 내가 가진 항공권은 일등석인데 그냥 떠나면 어떡합니까?"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일등석, 아니 특등석이 비어 있더라도 비행기는 제시간에 떠나야 하지 않습니까? 삼등석이 비면 그냥 떠나도 되고 일등석이 비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뭐가 그리도 대단합니까? 내가 가진 것은 특별하고, 그것으로라면 무엇이든지 다 될 것처럼 생각합니다마는, 망상입니다. 어린아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가운데 성숙한 인격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거듭 암시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10)." 비로소 어른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온전한 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러므로 나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으며,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부분적인 것을 버리고 전체적인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 어린아이의 유치함을 버렸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말함에서, 이해함에서, 생각함에서 성숙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만이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된 우리에게 막중한 책임이 주어집니다. 동물에게 책임을 묻습니까? 인간만이 책임을 가집니다. 자기를 계발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만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 인간만이 운명의 개척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 귀중한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가끔 주위에서 한심스러운 사람을 봅니다. "내 감정을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내 기분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라고 당연한 것처럼 말합니다. 자기 감정, 자기 기분을 다스리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니는 사람입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감정은 정말로 무방비상태인 것입니까? 감정에는 도덕성도 없는 것입니까? 기분은 마음대로 내버려두어도 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내 감정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순간적인 기분의 표출에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나는 어른입니다. 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미워하고, 그래서는 어른이랄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성숙한 인격은 자기 감정을 다스릴 줄 압니다. 그러나 스스로 책임을 지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랜 훈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12)"---지금은 답답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는 그날 밝히 알게 될 것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 미래를 향하여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말씀합니다.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2)." 여기에 사도 바울의 귀중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지금은 내가 나를 모르지만 그날에는 온전히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욥이 고백합니다. "내 길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러분은 나 자신을 아십니까? 나의 운명을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끔 부모와 자식간에 이러한 대화가 오갑니다.

"내가 더 오래 살았고 경험도 많을 뿐더러, 내가 너를 키웠으니 너보다 내가 너를 더 잘 안다. 그러니 너는 내 말대로 하여라"--부모 딴에는 자식을 누구보다, 심지어 자식이 그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식의 입장에서는 못마땅하기만 합니다. "나는 내가 더 잘 압니다. 내 일이니 내가 책임을 질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간섭하지 마십시오"--여러분, 어떻습니까? 정말로 내가 나를 잘 아는 것입니까? 내가 나를 완전하게 안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유치함의 소치입니다. 내가 나를 모릅니다. 주님께서 나를 아십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주님께서 나를 더 많이 아십니다. 더 잘 아십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 성숙한 인격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완전한 지식은 오로지 한 분이신 주님께 있습니다. 당장에는 답답한 가운데 살아갑니다. 납득이 가지 않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때에는 그것이 사랑임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믿음으로 삽니다마는, 그때에는 지식으로 살 것입니다. , 납득이 잘 가지 않는 일이 있습니까? 무조건 감사합시다. 하나님의 사랑임을 믿고 기다리십시다.

내 지식으로 판단하려들지 말고, 지금의 상태에서 사랑이 있느니 없느니, 잘되었느니 잘못되었느니, 행복하네 불행하네 판단하려들지 말고 그때에 있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지혜와 능력을 믿고 기다리십시다. 그때에 밝히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수차에 걸쳐 감옥에 갇힙니다. 많은 고통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조차 모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1 : 12)." 그 모든 고난과 실패와 역경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간증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알게 될 것이라.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확실하게 알 것이라.'

우리의 미숙아적인 신앙이 문제입니다. 편협한 신앙이 문제입니다. 이해가 부족하고 자기 척도에 매여 있어서 교만하고 독선적입니다. 또한 내가 중심이 되기에 불만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불만도 그렇거니와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은 더욱 큽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기에 고집스럽습니다. 어른되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심리학에서는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면 저 어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다.' 의존적인 신앙만큼 유치한 것은 없습니다. 보다 자율적이고 자원적이며 자발적인 신앙이 성숙한 신앙일 것입니다.

사랑은 은사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이제는 받는 사람에서 주는 사람으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받는 기쁨을 즐거워하는 것이 어린아이요, 주는 기쁨을 즐거워하는 것이 어른입니다. 물론 어린아이들도 행복을 압니다. 그러나 보람은 알지 못합니다. 어린아이들도 쾌락을 압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사랑 받기를 원해 왔습니까? 이제는 그만하십시다. 그토록 사랑 받으려고 애써 왔는데도 실상 받은 바가 없습니다. 욕구가 채워지지도 않았습니다. 이제는 그만 체념하십시다.

다시 시작하십시다. 이제는 받는 사랑은 말고 주는 사랑으로 살아가십시다. 남은 생애는 주는 것으로 살아가십시다. 나이 들어서 무슨 쾌락입니까? 먹으려고 해도 힘에 부치고 좋은 옷을 입어도 이제는 모양새가 나지 않습니다. 가져 봐야 만족감도 덜합니다. 이곳 저곳 구경 다녀도 피곤하기만 합니다. 쾌락, 이제는 떼어 멀리 보내십시다. 욕망일랑 잊어버리십시다. 앞으로는 의미로 살고, 보람으로 살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살아가십시다.

모름지기 성숙한 인격은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영역을 넓혀 갈 것입니다. 내게 좋은 사람만을 사랑했으면 이제 원수까지 사랑하십시다.

일시적인 것보다 영원한 것, 상대적인 것보다 절대적인 것으로 말씀과 성령의 역사 안에서 성숙한 인격으로 사랑이 충만한 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이제 어린아이의 일은 깨끗이 끊어 버립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롭게 출발하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린이의 일을 버렸노라(고린도전서 13813)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몸이 어리고 생각이 어린 자를 '어린이'라 하고, 몸이 작고 생각이 유치한 자를 '아이'라 합니다. 그 말과 행동과 생각이 유치합니다. 실수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어린이는 귀합니다. 우리는 그 많은 실수와 잘못도 마다하지 않고 어린이를 극진히 사랑합니다. 그런가 하면, 몸은 큰데 생각은 여전히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능아, 정신박약아가 그들입니다.

모든 생명에는 저마다 유아기가 있고 아동기가 있습니다. 생명체는 성장하여야 합니다. 성장이 정지되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생명 전체, 나아가 그 존재 자체마저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장을 하여야 하되 균형 있게 성장하여야 합니다. 몸의 자람과 더불어 지식이 자라야 합니다. 영도 자라고 혼도 자라야 합니다. 가치관도 자라고 세계관도 자라고 인격도 자라야 합니다. 겉과 속이 함께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성장해야 하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것도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격이요 생명체입니다. 육체와 더불어 경제도, 지위도, 지식도, 명성도, 능력도 다 컸습니다. 훌륭하게 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격과 도덕성, 곧 내적 존재가 여전히 미숙아로 남아 있다면 그야말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자동차 운전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만취한 사람에게 총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고액권의 돈을 지니고 다니 것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과연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 같습니까? 경제성장에 정신문화가 따르지 못하면 엄청난 부작용이 따릅니다. 지식도 있고 기술도 있고 능력도 있는데 도덕성이 따르지 못한다면 십중팔구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급기야 사회문제로 치닫게 됩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십시다. 찬란하게 꽃피웠던 문명이 많습니다.

애굽의 문명, 로마와 헬라의 문명. 중국과 인도의 문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명국들이 왜 무너졌습니까? 경제문제로 인함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해서, 먹고살기 어려워서 망한 것이 아닙니다. '도덕의 타락'이 패망의 주범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폐허로 남고 만 것이지요. 세계를 여행하면서 특별히 이탈리아의 폼페이를 들러보면 느끼는 바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토록 화려하고 풍족했던 도시가 역사의 기억 속으로 까마득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웅대한 경기장이며 환락가며 엄청난 타락상이라니, 필경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나 자신에 대한 착각과 오해가 문제됩니다. '나는 성숙하다' ---- 자기의식을 잘못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되었는데 잘된 줄로, 악한데 선한 줄로, 죄 중에 있으면서 진실한 줄로 알고 또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망해가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무엇인가 이루어지고 있는 줄로 착각합니다. 사회건 국가건, 정치건 경제건, 다 속고 있습니다. 인격도 그렇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망했으면 망한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나 자신의 나이를 바로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당면한 현실을 사실로 시인해야 합니다. 시편 9012절에 다윗의 진실한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計數)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 간절히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한 심리학자가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나이를 세는 개념이 다르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는 살아온 날을, 어른은 앞으로 살날을 센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다섯 살이건 열 살이건, 자신이 얼마를 살아왔다는 것만 염두에 두고 나이를 셉니다. 앞에 펼쳐질 미래가 무한한 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이든 사람은 살아온 날과 함께 남은 시간을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은 살아온 시간을, 나이든 사람은 남은 시간을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면 남은 시간을 생각할 줄 알면서 비로소 성인이라는 말이 됩니다. 나에게는 얼마만큼의 생이 더 남아 있습니까? 무슨 생각을 하건 무슨 일을 하건 그날을, 디 데이(D-day)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지식이니 물질이니 하는 것들이 도대체 무슨 소용입니까?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엄격한 제약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남은 시간을 먼저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성인이요 성숙한 인격입니다. 한계를 모르고 천방지축 덤벼드는 것은 철부지 어린아이나 하는 짓입니다.

심리학자 피아제(Piaget, Jean)는 아동기의 특징을 여섯으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여기서 아동기란 만 2세에서 5세까지의 아이를 말합니다. 이 시기의 특징을 하나하나 짚어보면서 과연 나는 몇 살이나 되었는가, 정신적인 연령을 가늠해보십시다.

첫째로, 상징적 활동이 증가하는 시기입니다. 모든 것을 상징적으로 보려들기 때문에 실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둘째로, 직관적 판단에 매이고 논리에 약한 시기입니다.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된다, 그 일이 어떠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인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보는 대로 듣는 대로 순간 순간만을 생각하지 논리적으로 이해할 줄 모릅니다. 모든 일에 직관적입니다.

셋째로, 자아 중심적입니다. 내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됩니다. 나만 위해달라고 합니다. 실제로 왕노릇을 하고 있지요. 어머니는 젖 먹여 주는 사람, 아버지는 돈벌어오는 사람쯤으로, 나를 위하여 봉사하고 애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다, 내가 요구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보면 꽤 나이가 든 다음에도 여전히 세 살 버릇이 남아 있어서 어디를 가나 '내가 왕이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아기를 못 벗어난 사람입니다.

넷째로, 물활론적(物活論的) 세계관을 가집니다. '모든 것은 살아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애니미스틱 뷰(animistic view)입니다. 나무도 말을 하고 소도 말을 하고 개도 말을 한다, 우리가 무생물이라고 하는 모든 것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동화(童話)가 통하지 않습니까? 다섯째로, 타율적 도덕관에 삽니다. 자율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타율적인 윤리에 매여서 살아갑니다.

마지막 여섯째가 재미있습니다. 꿈의 실재론(實在論)입니다.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주위를 살펴보면 그런 사람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어느 날 밤,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와 좋아지내는 꿈을 꾸고 엉뚱한 상상을 합니다. '단순한 꿈이 아닐 거야.

뭔가 있을 거야. 그렇지 않아도 요즘 낌새가 이상했어.' 꿈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하루종일 남편을 들볶아대는 것입니다.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사람처럼 미련한 사람도 없습니다. 생각이 늘 꿈속을 거니는 것입니다. 유치합니다. , 나에게 이러한 유아기적 특성이 아직도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깊이 돌아볼 일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어린아이의 심리적 현상과 그 특성을 간략하면서도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11)" ---말함이 어린아이와 같이 미숙하다고 말씀합니다. 언어가 유치합니다. 다시 말해서 감정 주도적이고 직감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가만히 보면, 금방 사랑한다고 했다가 다시 미워한다고 하기를 하루에도 몇 차례씩 반복합니다. 과자라도 하나 주면 좋아라 하고, 큰소리로 야단이라도 칠라치면 금방 밉다고 합니다.

변덕스럽기가 죽 끓듯 합니다. 감정 주도적이어서 그렇습니다. 더욱이 모든 것의 본()이 나 자신입니다. 자기중심적인 것입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요, 나에게 나쁘게 대해주는 사람이 나쁜 사람입니다. 모든 일에 흑백논리로 대합니다.

내가 이 말을 하게 되면 어떠한 파급효과가 있을까, 이 말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마음내키는 대로, 즉흥적으로 말을 뱉어버립니다. 자기중심적인 언어생활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요즘도 보면 성숙치 못한, 유치한 언어가 많이 돌아다닙니다. 직감적으로 말해버리는 것이지요. 이것이 파급되어 많은 어려움을 만듭니다. 그런가하면 비논리적입니다. 논리성이 없습니다. 환상적입니다.

둘째,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피상적인 사고에 그친다고 말씀함입니다. 쉬운 말이나 알아듣지, 좀 어려우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릅니다. 이해하는 것, 깨닫는 것이 유치합니다. 생각하는 것은 고작 먹는 것뿐이오 자기 쾌락입니다. 그 이상은 생각할 줄 모릅니다. 기도하는 것도 그렇고, 성경을 이해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유치한 것을 구하고, 깨닫는 것도 부분적이요 피상적입니다.

셋째,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논리에서 어린아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중심적입니다. 두 아이가 어머니의 생일을 맞이하여 오랫동안 모아온 돼지 저금통을 깨뜨려서 선물을 사러 나갔습니다. 선물을 고르는데, 국민학교에 다니는 큰아이는 제간에는 깊이 생각하여 어머니의 스타킹을 고릅니다. 그런데 유치원에 다니는 작은아이는 제 장난감을 사들고 들어옵니다. 내게 장난감이 좋으니 어머니에게도 당연히 장난감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더는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본위로 판단하고 행동하려 합니다. 얼마전 평양을 방문하면서 일차적으로 중국 북경에서 북쪽 사람들을 만나 일정을 논의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40년만에 처음 찾는 고향입니다. 아는 분들께 선물을 하고 싶은데 무엇이 좋을까요?" 그들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놀랍게도 양말이나 설탕, 눈깔사탕 같은 것들이 좋겠다고 합디다. 우리는 가능하면 설탕을 먹지 않으려고 꽤나 식생활에 신경을 씁니다. 달게 먹으면 큰일나는 줄로 압니다. 그런데 그들은 설탕 구경도 못하고 살아온 것입니다. 수입해야 하는 것이니 당연히 못 먹을 수 밖에요. 설탕을 못 먹어서 배고픈 사람에게는 설탕 한 봉지면 됩니다. 눈깔사탕을 생전 처음 먹어 본다고 합디다. 한마디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설탕 한 봉지라는 말입니다. 옷도 우리가 입는 울긋불긋한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중국 사람들이 입는 인민복 같은 것이 고작입니다. 중요한 것은 받는 사람 본위로 생각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본위로 생각하고,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 본위로 생각합니다. 'recepter's world view,' 곧 상대방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그의 마음, 그의 세계관을 읽고나서 그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에는 다분히 이기적이고 자기본위 적입니다. 구심점이 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이제 남을 생각하게 됩니다. 저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가, 저 사람의 입맛이 어떠한가, 저 사람의 취향은 어떠한가, 저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가에 생각이 미칩니다. 비로소 어른 된 것입니다.

현대사회를 가리켜 충동적 행위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얼마나 유치한 일입니까? 평소에는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감정이 복 받쳐 올라 사람을 죽입니다. 그 순간을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충동적 살인입니다. 다음에 있을 결과를 생각하지 못하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래서 저는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은 어린아이로 취급합니다. 술을 많이 마셔보십시오. 다음날 아침이면 속이 쓰리지요, 사람 추해지지요, 꼴이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될 줄 번연히 알면서도 코가 비뚤어지게 마셔대니 어린아이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다음 일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마실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아내 보기에 미안하고 자식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이웃에도 체신이 떨어집니다. 그러면서도 번번이 그 짓거리니 언제 어른이 되겠습니까? 몸집만 크다고 어른인 것은 아닙니다. 생각하는 것이 충동적이고 즉흥적인데 어떻게 어른이라 하겠습니까?

또한, 편법 능력화의 시대라고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원리원칙을 모릅니다. 편법으로 통하고, 그 편법이 통했을 때에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떻습니까? 정당한 길로, 설령 먼 길로 돌아가야 할지라도 정당한 길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편법으로 통하고 이 편법이 능력으로 통하는 사회는 미숙한 사회입니다. 어린아이는 미래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앞을 생각하지 못하고 당장 놀고 싶어합니다. 순간 순간만을 생각합니다. 영원 지향적인 가치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사고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또 과장하려듭니다.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으로 나갔는데 그만 시간에 늦어 비행기는 이미 이륙한 뒤였습니다. 안내에 가서 따집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비행기는 시간대로 떠났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 큰 소리로 소란을 피웁니다. "아니 내가 가진 항공권은 일등석인데 그냥 떠나면 어떡합니까?"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일등석, 아니 특등석이 비어 있더라도 비행기는 제시간에 떠나야 하지 않습니까? 삼등석이 비면 그냥 떠나도 되고 일등석이 비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뭐가 그리도 대단합니까? 내가 가진 것은 특별하고, 그것으로라면 무엇이든지 다 될 것처럼 생각합니다마는, 망상입니다. 어린아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가운데 성숙한 인격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거듭 암시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10)." 비로소 어른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온전한 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러므로 나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으며,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부분적인 것을 버리고 전체적인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 어린아이의 유치함을 버렸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말함에서, 이해함에서, 생각함에서 성숙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만이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된 우리에게 막중한 책임이 주어집니다. 동물에게 책임을 묻습니까? 인간만이 책임을 가집니다. 자기를 계발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만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 인간만이 운명의 개척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 귀중한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가끔 주위에서 한심스러운 사람을 봅니다. "내 감정을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내 기분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라고 당연한 것처럼 말합니다. 자기 감정, 자기 기분을 다스리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니는 사람입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감정은 정말로 무방비상태인 것입니까? 감정에는 도덕성도 없는 것입니까? 기분은 마음대로 내버려두어도 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내 감정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순간적인 기분의 표출에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나는 어른입니다. 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미워하고, 그래서는 어른이랄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성숙한 인격은 자기 감정을 다스릴 줄 압니다. 그러나 스스로 책임을 지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랜 훈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12)"---지금은 답답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는 그날 밝히 알게 될 것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 미래를 향하여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말씀합니다.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2)." 여기에 사도 바울의 귀중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지금은 내가 나를 모르지만 그날에는 온전히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욥이 고백합니다. "내 길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러분은 나 자신을 아십니까? 나의 운명을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끔 부모와 자식간에 이러한 대화가 오갑니다.

"내가 더 오래 살았고 경험도 많을 뿐더러, 내가 너를 키웠으니 너보다 내가 너를 더 잘 안다. 그러니 너는 내 말대로 하여라"--부모 딴에는 자식을 누구보다, 심지어 자식이 그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식의 입장에서는 못마땅하기만 합니다. "나는 내가 더 잘 압니다. 내 일이니 내가 책임을 질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간섭하지 마십시오"--여러분, 어떻습니까? 정말로 내가 나를 잘 아는 것입니까? 내가 나를 완전하게 안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유치함의 소치입니다. 내가 나를 모릅니다. 주님께서 나를 아십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주님께서 나를 더 많이 아십니다. 더 잘 아십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 성숙한 인격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완전한 지식은 오로지 한 분이신 주님께 있습니다. 당장에는 답답한 가운데 살아갑니다. 납득이 가지 않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때에는 그것이 사랑임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믿음으로 삽니다마는, 그때에는 지식으로 살 것입니다. , 납득이 잘 가지 않는 일이 있습니까? 무조건 감사합시다. 하나님의 사랑임을 믿고 기다리십시다.

내 지식으로 판단하려들지 말고, 지금의 상태에서 사랑이 있느니 없느니, 잘되었느니 잘못되었느니, 행복하네 불행하네 판단하려들지 말고 그때에 있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지혜와 능력을 믿고 기다리십시다. 그때에 밝히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수차에 걸쳐 감옥에 갇힙니다. 많은 고통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조차 모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1 : 12)." 그 모든 고난과 실패와 역경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간증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알게 될 것이라.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확실하게 알 것이라.'

우리의 미숙아적인 신앙이 문제입니다. 편협한 신앙이 문제입니다. 이해가 부족하고 자기 척도에 매여 있어서 교만하고 독선적입니다. 또한 내가 중심이 되기에 불만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불만도 그렇거니와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은 더욱 큽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기에 고집스럽습니다. 어른되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심리학에서는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면 저 어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다.' 의존적인 신앙만큼 유치한 것은 없습니다. 보다 자율적이고 자원적이며 자발적인 신앙이 성숙한 신앙일 것입니다.

사랑은 은사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이제는 받는 사람에서 주는 사람으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받는 기쁨을 즐거워하는 것이 어린아이요, 주는 기쁨을 즐거워하는 것이 어른입니다. 물론 어린아이들도 행복을 압니다. 그러나 보람은 알지 못합니다. 어린아이들도 쾌락을 압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사랑 받기를 원해 왔습니까? 이제는 그만하십시다. 그토록 사랑 받으려고 애써 왔는데도 실상 받은 바가 없습니다. 욕구가 채워지지도 않았습니다. 이제는 그만 체념하십시다.

다시 시작하십시다. 이제는 받는 사랑은 말고 주는 사랑으로 살아가십시다. 남은 생애는 주는 것으로 살아가십시다. 나이 들어서 무슨 쾌락입니까? 먹으려고 해도 힘에 부치고 좋은 옷을 입어도 이제는 모양새가 나지 않습니다. 가져 봐야 만족감도 덜합니다. 이곳 저곳 구경 다녀도 피곤하기만 합니다. 쾌락, 이제는 떼어 멀리 보내십시다. 욕망일랑 잊어버리십시다. 앞으로는 의미로 살고, 보람으로 살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살아가십시다.

모름지기 성숙한 인격은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영역을 넓혀 갈 것입니다. 내게 좋은 사람만을 사랑했으면 이제 원수까지 사랑하십시다.

일시적인 것보다 영원한 것, 상대적인 것보다 절대적인 것으로 말씀과 성령의 역사 안에서 성숙한 인격으로 사랑이 충만한 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이제 어린아이의 일은 깨끗이 끊어 버립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롭게 출발하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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