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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내게 주신 은혜(갈라디아서 2장 6절~10절)

by 【고동엽】 2023.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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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신 은혜(갈라디아서 2610)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준 것이 없고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서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사람은 누구나 그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관은 인생관과 직결되는 것이며, 인생관은 곧 나 자신의 존재의미를 규정합니다. 하찮은 일을 앞에 두고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각도에서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세계관과 직결됩니다. 그 사람의 우주관과 직결됩니다. 결국, 세계관과 우주관은 내 모든 가치관, 내 모든 생활 철학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다 철학자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과를 보면서 원인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를 생각하고 걱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생각하고, 그 결과로 현재를 생각합니다. 나아가 현재에서 하나의 원리를 찾아내어 다시 미래를 전망합니다. 이렇듯 사람은 모두가 철학을 하고 있고, 자기 철학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다만, 어떤 철학을 좇아 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운명이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또한, 사람은 다 종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공산주의자를 가리켜 무신론자라고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에 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 있는지를. 누구에게나 나름의 신이 있습니다. 나름으로 섬기는 대상이 있으며 지금도 섬기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에게는 이데올로기가 신이요 신앙입니다. 초월적 절대적 존재가 아닐지라도 섬김의 정도에 따라 이렇듯 이념도 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돈을 섬기고, 어떤 사람은 향락을 섬깁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명예를 섬깁니다. 몇푼 되지도 않는 자존심을 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아무튼 넓은 의미에서 볼 때에는 모두가 나름대로 섬기는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름의 신이 있습니다.

앞서, 사람은 누구나 그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세계관에는 대략 세 가지의 유형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모든 것을 우연으로, 자연현상으로 봅니다. 세상사 모든 일은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모두 우연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재수가 좋았다는 말을 합니다. 우연하다는 것입니다. 책임질 것도 없고, 미리 걱정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무책임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자연신론적 세계관입니다.

둘째, 모든 것에는 법이 있고 원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 원리를 누가 만들었으며, 누가 주었느냐, 이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연법칙이 있듯이 생명에도 법칙이 있다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도덕법칙이 있기에 도덕적 질서가 있다고 봅니다. 인과율(因果律)을 생각합니다. 선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인과율을 믿기에 막연하지만 하늘을 무서워합니다. 이렇듯 법을 생각하고 하나의 질서를 생각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곧 도덕적 질서(도덕률)를 생각하며 사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셋째, 모든 것을 은혜로 보는 은혜중심의 세계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물리적인 하나님, 기계론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 곧 능력과 권능의 세계를 인격이라 믿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은총을 느낍니다. 사랑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출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물리적인 것입니까, 생리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우연한 것입니까, 업보입니까? 어디선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무서운 업보다. 안 태어났어야 할 생명이 이 사바세계에 나왔다. 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이냐?"라고 표현해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무서운, 그릇된 철학입니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라고 보는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철학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렇지 않다, 우리가 수고를 하지만 그 수고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상선벌악의 원리가 있지만 그 원리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넘어서는 자연법칙이 있다, 이것을 넘어서는 기적이 있다, 윤리와 도덕의 법을 초월하는 은총과 용서와 사랑이 있다고 믿고 사는 은총중심의 철학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도 모든 문제--자연과의 관계, 우주와의 관계,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까지도 율법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고 상선벌악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잘되면 선한 일을 했더니 복을 받았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일이 잘 안되면 십일조를 안 바쳤더니 망하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내가 건강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고 감사하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누구를 원망했더니 심판을 받는구나 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을 부립니다. 불안과 공포에 떱니다. 그래서 때로 보면 예수를 더 잘 믿고 열심히 믿는 사람이 죽을상을 하고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저 하루에 몇 번씩 이렇듯 변덕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괴로운 생활입니까? 이것이 바로 율법적 관계입니다.

어린아이들도 보십시오. 공부를 잘해서 부모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면 기가 살아서 지내다가 혹시라도 공부를 잘못하게 되면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를 미워할 것이라고 지레 생각하고는 죽어지냅니다. 칭찬을 받으면 사랑이요, 책망을 들으면 미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물을 받으면 사랑이요, 매를 맞으면 나가죽으라는 것인가 보다 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그런 것입니까? 공부 잘하면 사랑하고, 잘하지 못하면 미워하는 것입니까? 칭찬하면 사랑하는 것이고, 책망하면 미워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곧 율법적 이해인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철학입니다.

은혜 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이것도 은혜요 저것도 은혜입니다. 칭찬도 은혜요 책망도 은혜입니다. 성공도 은혜요 실패도 은혜입니다. 건강도 은혜요 심지어는 질병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라고 받아들입니다. 은총중심의 세계관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꽃을 보아도 아름답고, 사람을 보아도 아름답고, 시간시간 사는 것이 아름답다--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은혜중심의 세계관으로 살아가려면 적어도 세 가지의 기본 신앙이 필요합니다.

첫째, 모든 것은 내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요, 내 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어야 합니다. 내 공로와 내 의를 완전히 포기해야 합니다. 다시말해서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확실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나는 무자격하다, 나는 아무 의도 없고 복받을만한 선도 없는 자다'하는 것을 인정하는, 그 고백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은혜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은혜로운 생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부부관계도 그렇습니다. '나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고약한 사람이다, 아무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할 줄 아는 남편은 별로 예쁘게 생기지 않은 아내일지라도 그녀를 보면서 고마움을 느낍니다. 나같이 못난 사람을 위해서 평생 함께 살아주니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장가를 잘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녀를 보아도,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그저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합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그저 고마운 일들뿐입니다.

그런가하면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는 잘났고 아내는 못났다고 생각하기에, 심지어는 장가를 잘못갔다고까지 말합니다. 만사가 손해요 불평이요 짜증뿐입니다. 일생동안 여기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보니까, 죽기 직전에 모두가 나에게 잘해주어서 고마웠다고 말을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나는 무자격하다,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하는 고백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어째서 이 좋은 세상에 살면서 원망과 불평만을 일삼습니까? 모두가 번민과 싸움뿐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강권적인 사랑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죄인되었을 때에 그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가 나를 구원하셨다." 다윗도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돌아보시나이까?"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 모든 부족함과 내 모든 더러움과 내 모든 부덕함을 마다하시지 아니하고 받아주시고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강권적인 은혜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고, 은혜 아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은혜의 현실성을 믿어야 합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은혜가 은혜 되어 내가 있고, 은혜 아래서 미래를 전망합니다. 흔히들 과거에 되어진 일, 현재에 이루어지는 일이 은혜임에는 의심치 않는데 미래에 대해서는 의심하고 걱정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과거가 은혜요 현재가 은혜라면 미래도 은혜인 것입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십시오. 여러분 마음대로 된 일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전적인 은혜로 지난날을 살았듯이 앞으로 남은 생도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분 약속된 미래를 전망하십시오. 그래야만 오늘의 은혜를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중심의 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일반적인 은혜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특별히 은혜에 대하여 아주 깊은 이해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말씀에는 일반적인 은혜보다는 개인적인 은혜에 대하여 더 깊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의 나됨이 은혜요 내가 오늘 존재하는 것이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내게 주신 개별적인 은혜, 특별한 은혜를 말씀합니다. 특별히 내게만 주시는 은혜, 이것이 주관적인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내게 주신 은혜를 어느 정도 간증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9)"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그 자신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모든 교회가 다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특별히 은혜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다같이 알고 있습니다. 공인된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첫째, 다메섹에서의 경험입니다. 본디 바울은 예수믿는 자를 박해하던 사람으로, 다메섹에 피난가 있는 사람들을 체포해오려고 공문서를 가지고 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극악무도한 사람을 다메섹 도상에서 멈추어 세우시고 물으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여기서 사울은 예수님께 굴복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포로가 됩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는 이 순간은 그에게 있어서 한시도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남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입니다. 선택적인 것이요 일방적인 것이요 효과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생각했던 것이 아니요, 평소 꿈꾸어오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강권적으로 붙드신 것입니다. 이 은혜로 그는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원래 "포행자요 핍박자요 죄인 중에 괴수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부르셔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평생을 살게 하십니다. 여기에 무슨 할말이 있습니까? 오로지 은혜일 뿐입니다.

또한 이 은혜에는 cultural mandate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속한 문화로 특별한 신임을 받았습니다. 만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더라면 자연히 히브리어밖에는 구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의 땅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격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방에서 태어난 유대교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헬라 문화에 익숙합니다. 이방 생활에 익숙합니다. 바울은 헬라 철학과 히브리 종교를 모두 겸비한 사람입니다. 로마시민권까지 가진 사람입니다. 이방에 복음을 전파하기에 아주 적절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주님의 부름을 받아 온 세계에 다니면서 자유자재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제 와서 사도 바울이 돌이켜보니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지난날, 출생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은혜입니다. 지난날 내가 잘못한 일도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했기에 핍박자의 마음을 압니다. 예수님을 핍박했기에 핍박을 받아도 할말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죽였기에 그 자신이 맞아죽는다 해도 할말이 없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붙드셨습니다. 지난날은 실수도 많았고 잘못도 많았습니다. 이렇듯 부끄러운 과거가 있습니다마는 이제 와서 은혜 안에서 소화하니 그 모든 것이 효과적으로 쓰임 받습니다. 그 모든 경험들이 선교를 위하여 소중하게 쓰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곳곳에 많은 복음을 전했고, 교회도 세웠습니다. 진정, 온 세계와 인류 역사를 바꾸어놓는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일이 주님께서 계시영(啓示靈)으로 역사 하셨기에, 성령이 함께 하셨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내 눈을 밝혀주시고, 내 마음을 틔워주시어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율법을 십자가 중심적으로 이해하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이렇듯 그는 은혜중심의, 확고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온 세계에 복음을 전했지만, 자기의 뜻대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말하고, 성령에 이끌리어 세계 곳곳을 누빈 것입니다.

선교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바울의 전도 전략을 연구하다가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는 전략이 없다는 것이 전략이다." 요새는 전략도 많고 master plan도 다양합니다만, 사도 바울에게는 일체 전략이 없습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그 전략대로 행할 뿐입니다. 성령이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하면 그대로 좇아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6장에서 주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듣는 자가 모두 청종(聽從)하게 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이 그 완악한 마음의 문을 열게 하심을 보고,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이 오로지 은혜일 뿐 내가 한 일은 하나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나를 고용하시어 내 경험을 통하여, 내 지식을 통하여, 내 건강을 통하여, 내 육신을 통하여, 내 인격을 통하여 엄청난 역사를 이루시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고용된 것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는, 이 엄청난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도 바울은 더 깊은 은혜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외적으로, 내적으로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는 숱하게 핍박을 당했습니다.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로부터도 비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비롯하여 많은 종교지도자들까지도 종종 사도 바울을 핍박하고 괴롭혔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하고 말할 정도로 바울은 숱한 고난과 핍박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그 역시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시력이 안 좋아 마음대로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말을 대필로 편지에 담았습니다. 또한 전설에 따르면 바울은 간질병과 주기적인 학질로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설교를 하다가 쓰러질 정도로 몸도 쇠약했습니다. 이렇듯 전도자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건강도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기가 그로서는 얼마나 힘겨웠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런 가운데서도 평생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이것도 은혜라는 것을.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가 내게 있음으로 그리스도로 늘 내 안에 머무시게 함을 감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만 의지하게 함을 감사했습니다. 모 든 시련과 고난을 오직 '은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렇듯 그는 개인적인 경험과 간증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하고 솔직하게 말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고전 9:16)." 무슨 말씀입니까? 바울은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라는 사람은 원래 변변치 않아서 조금만 일이 잘되면 교만해지고, 조금만 사정이 형통하면 게을러지고, 조금만 몸이 건강하면 못된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팽팽한 긴장 속에 살면서 그 같은 고난과 역경을 겪어내면서도 이를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걱정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열심히 믿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외국에서 오신 교역자들은 하나같이 우리 교회에서 예배드려보고는 깜짝들 놀랍니다. 수많은 신도들이 모여서 열심히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고 부러워들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는 일주일에 엿새 일하고 하루를 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앞으로는 닷새 일하고 이틀 쉴 것이라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세계 교회가 타락한 이유를 주 5일제 근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틀씩 쉬게 되니까 신앙이 희미해지고 교회가 약해져서 구미(歐美)의 교회들이 그 모양으로 타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우리 교역자들도 모이기만 하면 이것을 걱정합니다. 언젠가는 제가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거요. 우리 나라는 땅덩이가 좁아서 갈 데가 마땅치 않으니까요"라고 농삼아 말한 적도 있습니다마는, 이렇듯 좀 건강하면 못된 생각이나 하고, 좀 잘되면 교만해지고, 좀 편안하면 타락하고 마는 것이 인간입니다. 여기서 헤어나는 길은 내게 주신 환난과 역경이 은혜임을 깨닫는 것밖에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말년에 귀가 어두워져 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의사가 와서 진찰을 해보고는 수술을 받으면 청력을 되찾을 수 있겠다고 하며 수술을 권합니다. 에디슨은 이를 거절합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거듭되는 수술 권유에 하는 수없이 응하고는 수술 날짜와 시간을 정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날이 되었을 때, 에디슨은 병원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걱정이 된 의사가 집에 가보니 에디슨은 태연히 연구실에 앉아 실험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힌 의사는 "왜 수술은 안 받고 여기 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에디슨은 정중하게 대답합니다. "귀머거리가 되고 보니 오히려 편하네요. 야단스러운 칭찬의 소리도 시끄러운 비난의 소리도 듣기지 않으니까요.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들을 듣지 않으니 조용하고 좋습니다. 덕분에 이렇듯 집중하여 연구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가 아니겠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도 바울은 깊이 생각하고,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라고 간증합니다. 이렇듯 바울은 은혜를 아는 자요, 은혜로 은혜됨을 아는 자요, 은혜의 현실을 아는 자요, 은혜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줄 압니다. '내 모든 행위 가운데 죄 아닌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죄다. 나는 죄인이다'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할 줄 압니다. 사람 앞에서도 그러합니다.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다. 은혜 아닌 것이 없다'라고. 이것이 은혜자의 간증입니다.

찬송가 405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사가이자 목사인 뉴턴(J. Newton)은 본래 아프리카 노예 상인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다가 팔아먹는 악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진심으로 지난날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그는 평생을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라고 그 크신 은혜를 찬송하며 보냈습니다. 뉴턴은 죽기 전, 자신의 묘비에 남길 말을 스스로 썼습니다. '존 뉴턴, 그는 한때 방탕에 빠진 노예상인이었으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았다.' 참으로 은혜 받은 자의 간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은혜에 의존하고 살아야 합니다. 은혜를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의 간증이 있어야 하고, 그 은혜 안에서 미래를 내다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약속된 미래를 또 다른 은혜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갈라디아서 2610)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준 것이 없고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서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사람은 누구나 그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관은 인생관과 직결되는 것이며, 인생관은 곧 나 자신의 존재의미를 규정합니다. 하찮은 일을 앞에 두고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각도에서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세계관과 직결됩니다. 그 사람의 우주관과 직결됩니다. 결국, 세계관과 우주관은 내 모든 가치관, 내 모든 생활 철학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다 철학자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과를 보면서 원인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를 생각하고 걱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생각하고, 그 결과로 현재를 생각합니다. 나아가 현재에서 하나의 원리를 찾아내어 다시 미래를 전망합니다. 이렇듯 사람은 모두가 철학을 하고 있고, 자기 철학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다만, 어떤 철학을 좇아 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운명이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또한, 사람은 다 종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공산주의자를 가리켜 무신론자라고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에 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 있는지를. 누구에게나 나름의 신이 있습니다. 나름으로 섬기는 대상이 있으며 지금도 섬기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에게는 이데올로기가 신이요 신앙입니다. 초월적 절대적 존재가 아닐지라도 섬김의 정도에 따라 이렇듯 이념도 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돈을 섬기고, 어떤 사람은 향락을 섬깁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명예를 섬깁니다. 몇푼 되지도 않는 자존심을 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아무튼 넓은 의미에서 볼 때에는 모두가 나름대로 섬기는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름의 신이 있습니다.

앞서, 사람은 누구나 그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세계관에는 대략 세 가지의 유형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모든 것을 우연으로, 자연현상으로 봅니다. 세상사 모든 일은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모두 우연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재수가 좋았다는 말을 합니다. 우연하다는 것입니다. 책임질 것도 없고, 미리 걱정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무책임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자연신론적 세계관입니다.

둘째, 모든 것에는 법이 있고 원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 원리를 누가 만들었으며, 누가 주었느냐, 이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연법칙이 있듯이 생명에도 법칙이 있다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도덕법칙이 있기에 도덕적 질서가 있다고 봅니다. 인과율(因果律)을 생각합니다. 선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인과율을 믿기에 막연하지만 하늘을 무서워합니다. 이렇듯 법을 생각하고 하나의 질서를 생각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곧 도덕적 질서(도덕률)를 생각하며 사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셋째, 모든 것을 은혜로 보는 은혜중심의 세계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물리적인 하나님, 기계론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 곧 능력과 권능의 세계를 인격이라 믿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은총을 느낍니다. 사랑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출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물리적인 것입니까, 생리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우연한 것입니까, 업보입니까? 어디선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무서운 업보다. 안 태어났어야 할 생명이 이 사바세계에 나왔다. 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이냐?"라고 표현해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무서운, 그릇된 철학입니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라고 보는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철학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렇지 않다, 우리가 수고를 하지만 그 수고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상선벌악의 원리가 있지만 그 원리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넘어서는 자연법칙이 있다, 이것을 넘어서는 기적이 있다, 윤리와 도덕의 법을 초월하는 은총과 용서와 사랑이 있다고 믿고 사는 은총중심의 철학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도 모든 문제--자연과의 관계, 우주와의 관계,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까지도 율법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고 상선벌악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잘되면 선한 일을 했더니 복을 받았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일이 잘 안되면 십일조를 안 바쳤더니 망하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내가 건강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고 감사하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누구를 원망했더니 심판을 받는구나 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을 부립니다. 불안과 공포에 떱니다. 그래서 때로 보면 예수를 더 잘 믿고 열심히 믿는 사람이 죽을상을 하고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저 하루에 몇 번씩 이렇듯 변덕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괴로운 생활입니까? 이것이 바로 율법적 관계입니다.

어린아이들도 보십시오. 공부를 잘해서 부모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면 기가 살아서 지내다가 혹시라도 공부를 잘못하게 되면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를 미워할 것이라고 지레 생각하고는 죽어지냅니다. 칭찬을 받으면 사랑이요, 책망을 들으면 미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물을 받으면 사랑이요, 매를 맞으면 나가죽으라는 것인가 보다 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그런 것입니까? 공부 잘하면 사랑하고, 잘하지 못하면 미워하는 것입니까? 칭찬하면 사랑하는 것이고, 책망하면 미워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곧 율법적 이해인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철학입니다.

은혜 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이것도 은혜요 저것도 은혜입니다. 칭찬도 은혜요 책망도 은혜입니다. 성공도 은혜요 실패도 은혜입니다. 건강도 은혜요 심지어는 질병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라고 받아들입니다. 은총중심의 세계관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꽃을 보아도 아름답고, 사람을 보아도 아름답고, 시간시간 사는 것이 아름답다--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은혜중심의 세계관으로 살아가려면 적어도 세 가지의 기본 신앙이 필요합니다.

첫째, 모든 것은 내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요, 내 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어야 합니다. 내 공로와 내 의를 완전히 포기해야 합니다. 다시말해서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확실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나는 무자격하다, 나는 아무 의도 없고 복받을만한 선도 없는 자다'하는 것을 인정하는, 그 고백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은혜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은혜로운 생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부부관계도 그렇습니다. '나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고약한 사람이다, 아무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할 줄 아는 남편은 별로 예쁘게 생기지 않은 아내일지라도 그녀를 보면서 고마움을 느낍니다. 나같이 못난 사람을 위해서 평생 함께 살아주니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장가를 잘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녀를 보아도,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그저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합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그저 고마운 일들뿐입니다.

그런가하면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는 잘났고 아내는 못났다고 생각하기에, 심지어는 장가를 잘못갔다고까지 말합니다. 만사가 손해요 불평이요 짜증뿐입니다. 일생동안 여기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보니까, 죽기 직전에 모두가 나에게 잘해주어서 고마웠다고 말을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나는 무자격하다,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하는 고백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어째서 이 좋은 세상에 살면서 원망과 불평만을 일삼습니까? 모두가 번민과 싸움뿐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강권적인 사랑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죄인되었을 때에 그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가 나를 구원하셨다." 다윗도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돌아보시나이까?"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 모든 부족함과 내 모든 더러움과 내 모든 부덕함을 마다하시지 아니하고 받아주시고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강권적인 은혜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고, 은혜 아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은혜의 현실성을 믿어야 합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은혜가 은혜 되어 내가 있고, 은혜 아래서 미래를 전망합니다. 흔히들 과거에 되어진 일, 현재에 이루어지는 일이 은혜임에는 의심치 않는데 미래에 대해서는 의심하고 걱정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과거가 은혜요 현재가 은혜라면 미래도 은혜인 것입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십시오. 여러분 마음대로 된 일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전적인 은혜로 지난날을 살았듯이 앞으로 남은 생도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분 약속된 미래를 전망하십시오. 그래야만 오늘의 은혜를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중심의 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일반적인 은혜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특별히 은혜에 대하여 아주 깊은 이해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말씀에는 일반적인 은혜보다는 개인적인 은혜에 대하여 더 깊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의 나됨이 은혜요 내가 오늘 존재하는 것이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내게 주신 개별적인 은혜, 특별한 은혜를 말씀합니다. 특별히 내게만 주시는 은혜, 이것이 주관적인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내게 주신 은혜를 어느 정도 간증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9)"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그 자신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모든 교회가 다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특별히 은혜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다같이 알고 있습니다. 공인된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첫째, 다메섹에서의 경험입니다. 본디 바울은 예수믿는 자를 박해하던 사람으로, 다메섹에 피난가 있는 사람들을 체포해오려고 공문서를 가지고 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극악무도한 사람을 다메섹 도상에서 멈추어 세우시고 물으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여기서 사울은 예수님께 굴복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포로가 됩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는 이 순간은 그에게 있어서 한시도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남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입니다. 선택적인 것이요 일방적인 것이요 효과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생각했던 것이 아니요, 평소 꿈꾸어오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강권적으로 붙드신 것입니다. 이 은혜로 그는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원래 "포행자요 핍박자요 죄인 중에 괴수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부르셔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평생을 살게 하십니다. 여기에 무슨 할말이 있습니까? 오로지 은혜일 뿐입니다.

또한 이 은혜에는 cultural mandate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속한 문화로 특별한 신임을 받았습니다. 만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더라면 자연히 히브리어밖에는 구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의 땅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격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방에서 태어난 유대교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헬라 문화에 익숙합니다. 이방 생활에 익숙합니다. 바울은 헬라 철학과 히브리 종교를 모두 겸비한 사람입니다. 로마시민권까지 가진 사람입니다. 이방에 복음을 전파하기에 아주 적절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주님의 부름을 받아 온 세계에 다니면서 자유자재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제 와서 사도 바울이 돌이켜보니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지난날, 출생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은혜입니다. 지난날 내가 잘못한 일도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했기에 핍박자의 마음을 압니다. 예수님을 핍박했기에 핍박을 받아도 할말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죽였기에 그 자신이 맞아죽는다 해도 할말이 없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붙드셨습니다. 지난날은 실수도 많았고 잘못도 많았습니다. 이렇듯 부끄러운 과거가 있습니다마는 이제 와서 은혜 안에서 소화하니 그 모든 것이 효과적으로 쓰임 받습니다. 그 모든 경험들이 선교를 위하여 소중하게 쓰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곳곳에 많은 복음을 전했고, 교회도 세웠습니다. 진정, 온 세계와 인류 역사를 바꾸어놓는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일이 주님께서 계시영(啓示靈)으로 역사 하셨기에, 성령이 함께 하셨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내 눈을 밝혀주시고, 내 마음을 틔워주시어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율법을 십자가 중심적으로 이해하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이렇듯 그는 은혜중심의, 확고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온 세계에 복음을 전했지만, 자기의 뜻대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말하고, 성령에 이끌리어 세계 곳곳을 누빈 것입니다.

선교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바울의 전도 전략을 연구하다가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는 전략이 없다는 것이 전략이다." 요새는 전략도 많고 master plan도 다양합니다만, 사도 바울에게는 일체 전략이 없습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그 전략대로 행할 뿐입니다. 성령이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하면 그대로 좇아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6장에서 주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듣는 자가 모두 청종(聽從)하게 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이 그 완악한 마음의 문을 열게 하심을 보고,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이 오로지 은혜일 뿐 내가 한 일은 하나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나를 고용하시어 내 경험을 통하여, 내 지식을 통하여, 내 건강을 통하여, 내 육신을 통하여, 내 인격을 통하여 엄청난 역사를 이루시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고용된 것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는, 이 엄청난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도 바울은 더 깊은 은혜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외적으로, 내적으로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는 숱하게 핍박을 당했습니다.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로부터도 비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비롯하여 많은 종교지도자들까지도 종종 사도 바울을 핍박하고 괴롭혔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하고 말할 정도로 바울은 숱한 고난과 핍박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그 역시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시력이 안 좋아 마음대로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말을 대필로 편지에 담았습니다. 또한 전설에 따르면 바울은 간질병과 주기적인 학질로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설교를 하다가 쓰러질 정도로 몸도 쇠약했습니다. 이렇듯 전도자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건강도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기가 그로서는 얼마나 힘겨웠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런 가운데서도 평생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이것도 은혜라는 것을.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가 내게 있음으로 그리스도로 늘 내 안에 머무시게 함을 감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만 의지하게 함을 감사했습니다. 모 든 시련과 고난을 오직 '은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렇듯 그는 개인적인 경험과 간증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하고 솔직하게 말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고전 9:16)." 무슨 말씀입니까? 바울은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라는 사람은 원래 변변치 않아서 조금만 일이 잘되면 교만해지고, 조금만 사정이 형통하면 게을러지고, 조금만 몸이 건강하면 못된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팽팽한 긴장 속에 살면서 그 같은 고난과 역경을 겪어내면서도 이를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걱정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열심히 믿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외국에서 오신 교역자들은 하나같이 우리 교회에서 예배드려보고는 깜짝들 놀랍니다. 수많은 신도들이 모여서 열심히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고 부러워들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는 일주일에 엿새 일하고 하루를 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앞으로는 닷새 일하고 이틀 쉴 것이라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세계 교회가 타락한 이유를 주 5일제 근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틀씩 쉬게 되니까 신앙이 희미해지고 교회가 약해져서 구미(歐美)의 교회들이 그 모양으로 타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우리 교역자들도 모이기만 하면 이것을 걱정합니다. 언젠가는 제가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거요. 우리 나라는 땅덩이가 좁아서 갈 데가 마땅치 않으니까요"라고 농삼아 말한 적도 있습니다마는, 이렇듯 좀 건강하면 못된 생각이나 하고, 좀 잘되면 교만해지고, 좀 편안하면 타락하고 마는 것이 인간입니다. 여기서 헤어나는 길은 내게 주신 환난과 역경이 은혜임을 깨닫는 것밖에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말년에 귀가 어두워져 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의사가 와서 진찰을 해보고는 수술을 받으면 청력을 되찾을 수 있겠다고 하며 수술을 권합니다. 에디슨은 이를 거절합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거듭되는 수술 권유에 하는 수없이 응하고는 수술 날짜와 시간을 정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날이 되었을 때, 에디슨은 병원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걱정이 된 의사가 집에 가보니 에디슨은 태연히 연구실에 앉아 실험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힌 의사는 "왜 수술은 안 받고 여기 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에디슨은 정중하게 대답합니다. "귀머거리가 되고 보니 오히려 편하네요. 야단스러운 칭찬의 소리도 시끄러운 비난의 소리도 듣기지 않으니까요.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들을 듣지 않으니 조용하고 좋습니다. 덕분에 이렇듯 집중하여 연구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가 아니겠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도 바울은 깊이 생각하고,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라고 간증합니다. 이렇듯 바울은 은혜를 아는 자요, 은혜로 은혜됨을 아는 자요, 은혜의 현실을 아는 자요, 은혜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줄 압니다. '내 모든 행위 가운데 죄 아닌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죄다. 나는 죄인이다'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할 줄 압니다. 사람 앞에서도 그러합니다.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다. 은혜 아닌 것이 없다'라고. 이것이 은혜자의 간증입니다.

찬송가 405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사가이자 목사인 뉴턴(J. Newton)은 본래 아프리카 노예 상인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다가 팔아먹는 악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진심으로 지난날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그는 평생을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라고 그 크신 은혜를 찬송하며 보냈습니다. 뉴턴은 죽기 전, 자신의 묘비에 남길 말을 스스로 썼습니다. '존 뉴턴, 그는 한때 방탕에 빠진 노예상인이었으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았다.' 참으로 은혜 받은 자의 간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은혜에 의존하고 살아야 합니다. 은혜를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의 간증이 있어야 하고, 그 은혜 안에서 미래를 내다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약속된 미래를 또 다른 은혜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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