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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주시는 평안(요 14:25-31)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가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하시니라."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샬롬이란 말은 대단히 뜻이 깊은 단어입니다.
성서적 의미로 보면, 단순한 정신적 평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물질적으로, 윤리적으로 또는 사회적인 모든 평안을 종합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것이나 슬픈 것, 또는 육체적인 어떤 괴로움을 평안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는, 나라가 망하여 이리저리 쫓겨다니는 것, 역시 평안이 아닙니다. 샬롬이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완전한 화평, 나의 양심과의 관계에서도 완전한 화평, 그리고 이웃과 경제와 나라 등 이 모든 관계가 다 화목한 완전한 화평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놀라운 평안을 오늘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중에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불과 몇 시간 후면 체포되어 십자가를 져야 할 형편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모진 고난과 능욕과 고통이 다가오며 죽음을 눈앞에 둔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평안을 헬라어로는 '에이레네'라고 하며, 히브리어로는 샬롬이라 합니다. 이 샬롬은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평안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로써 모든 근심과 고난을 소화해 버리는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본문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평안은 근심과 두려움을 다 몰아내 주는 그런 평안입니다.
사실 여러 가지 근심이 있다 해도 어떤 큰 기쁨을 얻게 되면 조그마한 근심들은 사라지게 됩니다.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안고 걱정하고 있다면 그것은 큰 문제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큰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은 작은 문제를 다 잊게 됩니다.
바꾸어 말해서, 큰 기쁨을 하나 얻으면 작은 문제들은 다 해결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샬롬이란, 큰 기쁨으로 얻는 평안이므로, 부분적으로 실패하고, 성공하고, 고난 당하고 하는 것이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의 마음에 먼저 평안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눈 앞에 십자가는 다가오고 열 두 제자들은 모두 한심한 상태이며, 특히 배반자 가룟 유다가 끼어 있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인간적인 생각에서는 기쁨과 평안을 얻을 일이 없는 사면초가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뻐하는 주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비법과 그 신비를 알면, 우리도 어떤 고난이나 어떤 문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돈 때문이나 명예 때문이 아닌 것으로 대단히 깊고 신비로운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 자에게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비록 내가 넘어지고 소멸할찌라도 의로운 길을 가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에게만 있는 절대적인 기쁨입니다. 오해나 죽음이 이 길을 막지 못합니다. 어떤 원수라도 이 마음에는 슬픔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쁨은 절대적인 동시에 결정된 기쁨입니다. 이미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했고 결정된 것입니다. 다시 움직일 수 없는 정해진 일이기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이럴까 저럴까 하고 망설일 때는 기쁨이 없지만 일단 결정을 하고 나면 진정한 샬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평안을 주시겠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평안은 내가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평안이란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놓아주셔야 있어지는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자유하게 해주셔야 하고 그의 말씀이 들려져야 하고 내게 역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저 얻어지는 기쁨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다른 종교처럼 마음먹기에 달렸거나 개인의 수양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평안할 수 있다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겠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다"(요 14:27 하반절)고 세상의 평안과 다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무엇입니까? 대개 소유를 먼저 생각합니다. 돈이나 지위를 얻으면 기뻐하지만 이 기쁨은 순간적입니다. 부자들의 말에 의하면 가진 것 때문에 늘 불안하다고 합니다. 사실 가난할 때가 많이 소유했을 때보다 더 편안하지만 사람들은 늘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소유란, 마치 갈증이 났을 때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바닷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이 심한 것처럼 소유는 소유할수록 더 욕심이 나며 그만큼 불안은 가중되는 것입니다. 소유와 평안은 무관한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 생활 속에서 계속적으로 간증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두가 순간적이고 찰나적이어서 피곤하고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집니다. 마치, 그림자와 같고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만이 참 평안입니다.
그러면, 예수로 말미암아 오는 평안은 무엇입니까?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평안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한은 어떠한 평안을 논한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죄 가운데는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만이 참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오는 평안은 외롭다 하시는 평안이요,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는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근본적인 것으로 진정한 자유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다음, 성령이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성령은 이미 말한 대로 위로자요, 변호자요, 나를 돕는 분으로서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신학적으로 수백년 동안 내려오며 싸운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왔느냐, 그리스도로부터 왔느냐, 또는 아버지로부터 그리스도로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성령은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왔습니다.
또한, 성령은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신비한 하나님의 세계를 알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평안합니다. 사실,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지 알고 나면 평안합니다. 아버지의 모든 것, 신비로운 하나님의 세계를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어 알게 되므로 평안하게 하십니다.
다음은,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듣고 본 것을 필요한 때에 생각나게 하므로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보아야 합니다. 많은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이 깨달아서 필요한 시간에 말씀들이 생각나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밤이 새도록 열심히 시험 준비를 했는데 시험 보는 현장에서 생각이 나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많이 배워서 생활 현장에서 사건을 만날 때마다 그 때 그 때 필요한 말씀들이 생각이 나서 발의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말씀의 효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의 해결이 있는 것으로, 이 일을 성령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잊어버린다고 걱정할 것 없습니다. 열심히 들어두면 성령께서 필요할 때에 필요한 말씀이 생각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 14 : 28) 예수님은 죽음을 간단하게 표현해서 갔다가 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결국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과정이 조금 복잡해도 마지막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면 문제는 없습니다. 불안한 이유는 마지막이 어떻게 끝맺을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령, 끝에 가서 성공한다는 보장만 있으면 중도의 실패와 고생은 귀한 경험으로 좋은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합동하여 선을 이루기만 한다면 고생해도 좋기만 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 마지막을 알고 계시므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고 내가 주는 평안으로 화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웨슬리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각자 자기가 믿는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 웨슬리는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 사랑하는 우리 주 나를 품어 주소서"(441장)라는 유명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때 선장은 "지금 죽을 지경이니 기도나 하시오. 당신의 하나님은 없소?" 하며 짜증을 부렸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선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 갈 것입니다. 천당을 가든 미국을 가든 둘 중에 한 곳에는 갈 것입니다"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풍랑으로 인하여 바다에 빠지면 천당을 갈 것이고, 무사하면 미국에 갈 것이니 걱정이 없습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천당가는 티켓은 이미 받았으니 남은 생애가 좀 복잡하면 어떠하고, 고생하면 어떻습니까? 사실, 너무 순탄한 생애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만 잘 맺을 수 있다면 고생이 훨씬 더 멋있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과를 아셨으므로 갔다 온다고 마지막 약속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카드를 손에 쥐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앞두고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시고, 마지막에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말 것임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무슨 일이든 우연이라고 말하지 맙시다.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께서 사건을 통하여 역사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음, "너희가 나를 사랑했더라면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했으리라"고 아버지께 가심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표현은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셨지만 내용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바꾸어 말하면 "너희가 나를 사랑했더라면 내가 십자가를 지는 것을 기뻐했으리라"고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뜻과 고난의 의미를 바로 알고 사랑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백 번, 천 번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사랑하면 믿어지고 믿으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KBS에서 교육 자료로 만든 아브라함에 관한 영화를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라아산에 올라가서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 하나님 앞에 바치려는 장면입니다. 생각하면, 얼마나 숨막히는 순간입니까? 작가는 성경에 없는 자기 상상으로 이 장면을 잘 처리하고 있기에 소개하려 합니다.
"이삭아,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아느냐?"
"네, 압니다."
"얼마나 사랑하는 것 같으냐?"
"아버지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줄 압니다."
"그렇다. 그러면, 이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든지 이것 모두가 너를 사랑해서 하는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느냐?"
"네, 믿습니다."
"좋다. 여기 누워라."
이삭은 순종하여 그대로 눕고, 아버지는 제물을 위해 아들을 향해서 칼을 높이 듭니다. 이것이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면 죽이는 것까지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므로,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기 앞에 전개되는 사건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므로 있어진다고 믿고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고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모든 환경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예수님은 배신한 베드로에게도 찾아가시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해석하면, "네가 왜 나를 모른다고 했고, 근심과 걱정의 사람이 되었는지 아느냐,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의미가 포함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소화하게 되고 평안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믿어지고 믿어지면 평안한 것입니다.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가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4:30-31) 세상 임금이 오겠다는 뜻은, 지금 십자가가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빌라도의 군사, 가야바의 군사들이 잡으러 오지만 예수님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저들 때문에 지는 십자가가 아니니까요. 단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기 위해서 이 사건이 있을 뿐이라고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직선적으로 말하면, 앞에 십자가가 있지만 이 십자가의 고통과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다만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함이라고 결국에는 승리함을 알고 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는, 첫째로 자기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을 나타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사랑을 드러낼 수 있습니까? 사랑한다고 말만 하면 됩니까? 십자가 지는 것을 보아야만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이란 사랑을 나타내는 가장 귀한 계기입니다. 가족들끼리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가 사랑한다고 수십 번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누가 한 번 앓아 눕든지, 어려운 사건을 만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앞에 십자가가 오지만 그것은 상관없고, 다만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이것을 통해서 세상이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아버지가 명한 대로 내가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 게 돌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바로 그 기도대로 이루어지는 것뿐입니다. 기도대로 시행하시는가 아닌가를 십자가 앞에서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만일, 십자가를 회피하든지 무슨 핑계로 도망을 갔다면, 아버지의 명대로 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우리들도 우리 앞에 있는 고난을 보면서, 내가 하나님께 향한 사랑이 여기서 나타나며 하나님 앞에 얼마나 진실한가가 이 사건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임해야겠습니다. 사건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믿어라. 사랑하라, 그리하면 내 평안을 너희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깊은 뜻을 알고 신비로운 의미를 바라보시며 앞에 있는 영광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르다"고 힘주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충만하셨던 그 놀라운 샬롬이 우리 마음과 생활에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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