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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됨의 증거(마태복음 11장 19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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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됨의 증거(마태복음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내 뜻이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을 때에는 흔히들 '대화가 안된다'라고 말합니다. 사람 사이에 대화가 안된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내 마음에 있는 뜻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을 때, 더욱이 옳은 일이, 진리가 소통이 되지 않을 때에는 불행하기까지 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내 말을 상대방이 귀담아 들어야 하는데 듣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말을 해야 할 때처럼 답답한 때가 없습니다. 아주 절박한 고통일 수밖에 없는 줄 압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가셨을 때,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융숭하게 음식을 준비하느라고 수고했지만 별로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귀중한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 무릎 맡에서 정성을 기울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듣고 있는 것이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귀하고 선한 일이어서, 심지어는 이 귀한 일, 마리아가 택한 일은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고, 그렇게까지 보장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듣지 않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 바로 그러한 고통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대로 보면 적어도 몇 가지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볼 때, 먼저는 도대체 듣지를 않습니다. 그 귀중한 진리에 마음을 기울여주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믿어주지를 않습니다. 세상에 의심받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 없거든요. 진실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귀한 말씀을 해도 믿지를 않아요. 그래 예수님을 괴롭히는 질문이 얼마나 많이 들 했습니까? 그 많은 이적을 보면서도, 그 귀한 말씀을 다 들으면서도, 깊이 새겨듣고 그 속에서 이미 생명의 진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표적을 더 보여라, 증거가 무엇이냐, 당신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증거가 무엇이냐, 시비하고 괴롭히고 질문하고 의심했습니다.

남을 의심하는 것이야 자기 마음이지만 의심받는 것은 참 고통스럽습니다. 나는 진실을 말하는데 "이것을 무엇으로 입증합니까?" "무엇으로 증명할 것입니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저들이 믿지를 않았어요. 그 말씀이 얼마나 소중했으면 예수님께서 믿어라,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고 간단하게 말씀하셨겠습니까? 믿으면서부터 이야기가 되는데 저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반응이 없었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적당히 받아들였습니다. 옳은 말씀이지, 그렇고 말고, 그 말씀 그럴듯해--이렇게 적당히 받아들이고는 추상적 진리로 삼았을 뿐 행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믿었으면 따라야 합니다. 옳다면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젊은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묻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계명을 지켜라."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너 가진 것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이 사람, 근심하면서 돌아갑니다. 저같으면 따랐겠는데요. 영생이 더 중요하지 그까짓 재산이 대숩니까? 그런데 이것을 실천하지 못했어요. 지식으로 받고, 추상적 진리로 받고, 철학으로 받을 뿐이지 받고는 행치를 않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새로 어떤 교회에 가서 부임을 했는데, 요한복음 316절만 가지고 6개월 동안을 설교했답니다. 똑같은 설교만 되풀이하니까 교인들이 그만 지쳐가지고 "목사님 그건 이제 좀 그만합시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당신들이 정말 이 말씀을 믿고 그대로 실천하고 있습니까? 이거 실천할 때까지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라고, 신통한 이야기라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늘 똑같은 음식을 먹습니다. 밥 먹고 김치 먹고 물마시고…… 얼마나 똑같은 것을 먹어왔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똑같은 것을 찾습니다. 마음 문을 연 사람은 무슨 새롭고 신기한 것을 찾지 않습니다. 듣던 말 또 들어도 좋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이야 백번 들어도 좋은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그 사랑의 계시야말로 우리가 몇천 년 몇만 년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않았으며 좀더 적극적으로 대하지를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 부활하셨다고 할 때에 무덤을 찾아간 사람은 몇 사람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게 이상했습니다. 온 예루살렘이 다 찾아갔다 -이쯤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핍박자들은 핍박하기 위해서라도 찾아 갔어야지요. 믿는 자들은 믿기 위해서라도 찾아 갔어야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토록 소극적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 예수님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베들레헴으로 갔다는 사람이 없어요. 예루살렘이 소란했다, 이런 정도였습니다. 수백 수천 명이 베들레헴으로 우 몰려 내려갔다. 그렇게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소문에 웅성거리는 정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거품이 일었다 꺼지듯이 말입니다.

한 말씀을 들었건 두 말씀을 들었건 깨달았으면 바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실천해야 그 진리가 과연 나의 진리가 되고, 깊이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듣기만 하고 다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뭐니뭐니해도 예수님을 비난한 일입니다. 비난하고 왜곡하고 오해하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내쫓는 것보고 바알새불을 힘입어서라고, 큰 귀신을 힘 입어 가지고 작은 귀신보고 나가라 한 것이다 한 것입니다. 좀 마음에 안 들면 안 든다고 하지 예수님을 이렇듯 귀신들린 자로 몰아붙일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아주 도전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말씀에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앞에 놓고 매우 슬픈 마음에서 책망조의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본문 앞의 16, 17절에 얼마나 개탄하는 말씀을 하십니까?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 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 피리를 불었으면, 장단을 맞췄으면 들썩들썩 춤을 춰주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또 누가 애곡을 한다면 같이 따라 울어주어야 되겠는데 영 감동이 없다는 말입니다. 반응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새 어떤 부흥목사들 설교를 할 때에 보면 '아멘'소리가 나오기를 바라거든요. 조용히 쳐다보면 그것으로 된 것이건만 꼭 '아멘' 해야만 좋아하는 부흥사가 있어요. '아멘' 체질인가 봅니다. '아멘'소리가 없으면 '아멘 하시오' '아멘 하시오'하고 다그칩니다. '아멘'소리 왜 그렇게 작으냐, 더 크게 '아멘'하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아멘 소리가 없으면 이번에는, 제발 아멘 좀 하세요 하고 통사정을 합니다. 한번은 목사님이 그렇게 통사정하는 것을 보고 하도 딱했던지 앞에 앉은 한 교인이 "감동되는 게 있어야 아멘 하지요"했더랍니다. 그래서 '아멘'대신 폭소가 터졌다고 합디다. 기가 찰 일입니다. 감동도 안 되는데 아멘을 하는 것도 딱한 노릇이지만 그렇게 억지로 아멘 소리 들어서는 무엇에 씁니까?

반응 없는 사람에게 말하기란 저렇듯 힘이 듭니다. 딴청부리는 사람을 앞에 놓고 말하는 것은 고통입니다. 저는 이 앞에 앉은 분들이 다 고맙습니다. 우리 교회는 앞에서부터 앉는 것이 자랑거리인데,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졸리거든 아예 뒤로 가주셨으면 좋겠다 싶어요. 앞에 앉아가 지고 하품을 하고 삐딱하게 앉아 꾸벅거리니, 피곤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사실은 조는 것에 대해서는 절반은 내 책임이거든요. 설교를 어떻게 하기에 졸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나무랄 권리는 없습니다만 제 사정은 제발 잘 안 보이는데서 졸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피리를 불면 춤을 추어야 하고 회개하라고 외치면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다 망한다고 외쳐대도 끄떡도 하지 않아요. 기가 막힙니다.

본문말씀은 반응이 없는 세대를 향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처음부터 듣지 않으려 했고, 그리고 시비조로 나오고 비난조로 나왔습니다. 아주 결정적인 비난을 합니다. 세례 요한이 약대털옷을 입었고, 이상하게 생긴 기다란 지팡이를 들었고, 또 험상궂게 눈을 부릅뜨고 "독사의 자식들아!"하고 욕을 하고 다닙니다. 광야에 살면서 먹는 것이 석청과 메뚜기입니다. 여느 사람들이 먹는 것은 먹지도 않습니다. 그렇듯 진기한 행색으로 진기한 생활을 했으니 믿는 사람들이야 이제야말로 선지자가 나타났다, 4백 년만에 이 땅에 선지자의 음성이 들린다 하고 감격해서, 광야로 우 몰려와서는 당신이 메시야입니까, 당신이 그분입니까, 하면서 세례를 받고 그를 따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안 따르는 사람들은 비스듬히 앉아가지고 비난을 하는데 '당신이 메시야요?' 합니다.'나는 메시야가 아니오. 나는 광야의 소리요'하고 대답하면 '그런데 왜 세례를 주는 거요?'하고 비난을 합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입은 것, 먹는 것, 생활하는 것을 보고는 미치광이라고 흉을 봅니다.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는 것이 하도 기이하고 보니 귀신들렸다는 비난도 받습니다.

그렇더니, 예수님께서는 그와 대조적으로 아주 철저하게 서민적이지 않습니까? 사람들과 함께 사셨고, 죄인들과 나란이 앉아서 잡수셨습니다. 사람들이 죄인으로 몰아 상대를 해주지 않는 세리의 집에도 들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창녀 막달라 마리아와도 같이 앉아서 얘기를 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더러운 여자가 옥합의 향유를 깨뜨려 부을 때에도, 더러운 여자인 줄 알지만 그 회개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이렇게 죄인들과 가까이하고 저들 먹는 대로 떡도 먹고 포도주도 마시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다'하고, 요샛말로 하자면 '세속주의자다, 이 사람은 도대체 다를 데가 없다, 보통사람이다'하고 시비를 벌입니다. 저렇게 하면 미치광이라 하고 이렇게 하면 세속주의자라 하니 참으로 어려운 노릇입니다.

우리들 교역자도 그렇습니다. 교역자의 생활도 그런 것이 있어요.

여러분도 아마 그런 경험을 많이 겪는 줄 압니다. 너무 가난하고 어렵게 살면 무능하다고들 무시합니다. 조금 번듯하게 살면 교만하다고 합니다.

귀족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옳습니까? 세례 요한은 빈손으로 청빈하게 살았더니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아주 서민적으로 백성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살았더니 먹기를 탐하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라고 손가락질합니다. 세속주의자라고 몰아붙입니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 내리시는 결론이 오늘의 잠언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지혜로운 결론을 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옳으냐 그르냐는 너희가 시비할 문제가 아니다, 너희가 옳다고 해서 옳아지고, 아니라고 해서 아닌 것이 되고, 너희가 미쳤다고 해서 멀쩡한 사람이 미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심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객관화하고 계십니다. 저들의 시비나 저들의 비난에 조금도 말려들지 않고 계십니다. 당신의 위치를 추호도 욕됨이 없이 깨끗하게 지켜가고 계십니다. '종속경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경제사정에 따라서 우리 나라의 경제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중동의 기름 값이 오르락내리락하면 우리네 경제사정이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종속가치라는 것도 있습니다. 종속윤리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해주면 나도 잘해줍니다. 다른 사람이 미워하면 나도 미워합니다. 연동작용(連動作用)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떻습니까? 과연 환경대로, 바람 부는 대로, 남이 나를 대하 는대로 따라 돌아가고 맞물려 돌아갈 것입니까?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적어도 기독교인은 이런 면에서 독선적이어야 하고 우선적이어야 하고 독단적이어야 합니다.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남이 미쳤다고 해도 나는 나의 길을 부지런히 갈 따름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이라 할 것입니다. 조금 뭐라고 하면 좋아서 펄펄 뛰다가 조금 언짢은 소리가 들려오면 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것-이런 것을 일컬어 '알레르기성 체질'이라고 합니다. 저렇듯 지나치게 민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 보면, 신문에 알레르기 체질이 돼 가지고 좀 좋은 이야기가 나오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대로 붙들고는 "아이고 어쩌고"하면서 호들갑을 떨다가 좀 언짢은 이야기가 실리면 "아이구 망했다, 죽었다"하고 야단스럽습니다. 다 잘못된 것입니다.

우선 오늘의 본문말씀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를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여기서 "지혜는"하고 말씀하십니다. 지식과 지혜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지식에는 아무래도 과거적인 의미가 있고, 지혜에는 미래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지식이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선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이 많다고 꼭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새도 보면 전혀 공부한 바 없는 사람도 삶을 처리하는 데 아주 지혜로운 것을 보아요. 어떤 사람은 무척이나 공부를 많이 했다고 아는 것 자랑하고 또 실제로도 아는 것이 있는 것은 같은데 인생을 처리하는 것 보면 아주 멍청하고 어리석어요.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지식인이 곧 지혜 있는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때로는 지식이 사람을 교만하게 하여 지혜도 함께 가진 것처럼 착각함으로 마침내 지혜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식이 있기 때문에 지혜를 못얻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안다고 하기로 죄가 있느니라, 본다고 하기로 죄가 있느니라고. 차라리 못 보았더라면 보게 해주십시오, 하고 예수님께 구했을 것인데 안다고 하고 본다고 하고 이렇게 교만하기 때문에 지식이 좀 있음으로써 그 지식 때문에 바리세인들이 지혜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주 조심해야 될 문제입니다.

지식을 세상에 관한 것, 세상 이치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혜는 그 내용이 하나님께 대한 것이요 생명에 대한 것입니다. 생명과 관련된 것들은 성경은 대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지혜는"하고 말씀하심은 예수님의 교훈을 가리킴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지칭하심입니다. 마치 나무는 열매를 보고 안다 하신 말씀과도 같습니다. 지금은 알 수가 없지마는 열매가 맺힐 때에는 알 것이 아니냐, 행함으로 옳다 인정함을 받는 것이다 하심입니다. 열매가 맺히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당장은 우리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안달할 것은 없습니다. 가을이 되면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이니까요.

사람의 증명, 사람의 성원, 사람의 원조를 애써 바랄 것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간에 사람들로부터 받는 성원을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지혜는 행함으로 인하여 옳다 인정함을 받느니라, 그런고로 내가 너희들의 시비에 대해서 마음 안 쓰기로 한다, 언젠가는 다 알 것이다-그런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놓고, 이 참된 진리를 놓고 시비를 벌이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입니다. 천하의 어리석음입니다. 이 어리석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지금 심판하시는 내용입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입니다. 언젠가는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니까요. 유명한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종교재판에서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겠다 라고 위협받습니다. 그래 갈릴레이는 지혜롭게도 그 자리에서는 일단 부정해놓고 재판을 나섭니다. 재판정을 나서면서 그는 중얼거립니다.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 내가 돈다고 하면 돌고 멎었다고 하면 멎는 것입니까? 사실은 사실이고 진리는 진리인 것입니다. 진리가 사람들의 긍정을 바랍니까? 우리가 천당 있다고 해서 천당이 있고, 없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내 마음대로 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진리는 언젠가 진리 그대로 나타날 것이요, 사실은 사실 그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본문에서 보는 예수님의 자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지혜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는 지극히 히브리적인 표현입니다. '내가 지혜다, 지혜 자체다, 내가 말하는 것이 지혜요, 나 자신이 지혜다' 하심입니다. 참 지혜는 참이니까 시비가 필요 없다, 너희들이 뭐라고 하건 상관없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반드시 옳다 인정함을 받을 때가 있다, 왜냐하면 생명의 열매가 맺힐 것이니까-말씀이 말씀이고 진리가 진리이니 만큼 여기에서 큰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다 수고하게 되고, 교회가 세워지고, 오늘 온 세계에 엄청난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사실이 사실이요 진리가 진리인 만큼 언젠가는 다 행위로 인하여 옳다 인정함을 받게 될 것이다 하신 대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결코 변증이나 변명을 하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할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세속주의자라는 소리를 듣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예수님은 대답을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자세였습니다.

우리는 너무 변명이 많습니다. 너무 말이 많습니다. 너무 사람으로부터 지지를 받으려고 합니다. 쓸데없는 일이지요. 변명하려고 들면 변명하려고 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더욱 일이 난처해집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이면 사실대로 나타날 것이니까요. 사실이 아니면 그러다 말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술을 좋아하는 분이라고 방을 써 붙인들 예수님께서 눈썹 하나 까딱하시겠습니까? 십자가에 매달리시고도 '나는 죄가 없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걸핏하면 성명서가 나옵니다. 신문에다 성명 내고, 방송에다 성명 내고, 대자보를 써 붙이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짓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엄청난 오해를 받고 계십니다. 세례 요한을 미친놈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예수님을 가리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합니다. 이런 시비에도 예수님은 말씀이 없으십니다. 지혜는 그 행함 뒤에 있는 결과로 인하여 언젠가는 반드시 옳다 인정함을 받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엄청난 누명을 그대로 쓰시고 십자가를 지십니다.

예수님께 대한 누명과 오해는 오늘도 있지 않습니까? 소설 좋아하고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한 영화를 만들 때, 이를테면 가룟 유다와 막달라 마리아가 어떻게 해 가지고…… 하면서 이상하게 만들어버려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애인인가 봐, 이래가면서 별소리를 다합니다. 가룟 유다의 애인인데 예수님이 뺏었나보다-이런 소리까지 합니다. 저들 하고 싶은 대로 까불어대는 것입니다. , 이런 일에 대해서 변명이 필요합니까? 사실은 사실대로, 진리는 진리대로, 지혜는 지혜대로 반드시 정당화하고 맙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변명하지 말 것이요, 시비를 벌이지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고. 열매가 맺힐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는 침묵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는 다만 행위가 있을 뿐, 어떤 인간적인 노력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누가예수심리학이라는 책을 썼지요.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보아도 승부욕이 없다고 했습니다. 누구를 굳이 이기려고 한다든가 누구를 질투하고 시기하고 하는 것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없는 것은 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변명을 하시지 않습니다. 변명할만도 하고 꼭 해야 될 것 같은데도 예수님은 오직 한마디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하실 뿐입니다. 조금 더 길게 설명을 붙여 이야기하자면 진리는 진리대로 언젠가는 다 드러날 것이니, 그런고로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No comment,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아니하겠노라-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당신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이 또한 중요한 일입니다. 시비가 났다고 해서 다음부터는 세리의 집에 가서 밥을 잡숫지 않으셨다든가 나사로의 집에는 여자가 둘 있으니까 되도록 안가는 게 좋겠다 해서 삼가 하시게 되었다든가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여전히 세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누가 무슨 소리했다고 해서 이렇게 움직이고 저렇게 움직이고 하니까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기 올무에 빠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사람은 그런 일없습니다. 묵묵히 스스로 가야 할 길을 갈 뿐입니다. 할말이 있다면 오직 하나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면 그만입니다. 반드시 사실대로 되어질 것이니까요.

참 지혜인고로 무식한 사람들에 대해서 불쌍히 여길 뿐이요, 오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한번 주님의 이 자세로, 이 잠언에 나타난 지혜로, 이 믿음으로 살아갈 마음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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