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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영(요 16:12-15)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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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영(16:12-15)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앞에서 성령론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성령론에 대해서는 중요한 말씀이 성경의 여러 곳에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복음서에 기록된 것으로,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도 성령에 대해서는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말씀을 좀더 이해하기 쉽도록 해석한 것일 뿐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의 모든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에 조명하여 그 빛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에 대해 말씀하실 때의 배경은, 불과 몇 시간 후에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일과, 그리고 앞으로 제자들이 큰 핍박을 받게 될 두 가지 사건을 생각하시며 말씀하셨다고 앞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은 정말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왜 돌아가셔야만 했고, 하필이면 그와 같은 방법으로 죽으셔야 했는지 난해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이 오면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제자들이 겪어야 하는 핍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열심히 믿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제자들에게, 복을 주기는커녕 환난과 핍박과 재난 속에서 어렵게 살다가 복음 때문에 순교까지 하게 하시니 말입니다. 순교하는 사람들이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인 고난 때문만이 아니라, 정말 지금 이것이 순교할 만한 가치가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뒤늦게 후세 사람들이 "그는 순교자다"라고 말하지만, 정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순교자인가 할 때 판단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들이 핍박을 당하고 신앙적으로 혼미한 상황이 되겠는데,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너희들을 위로하고 다 가르쳐 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배경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앞에서 공부한 대로 성령이 기억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듣고 보고 깨달은 것이 생활 속에서, 사건 속에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말씀으로 생각나도록 성령이 역사 하시어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본문의 13절과 14절에서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또는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고 아주 세밀하고도 용의주도하게 성령은 알게 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본다고 아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열려야 알 수 있습니다.

지식은 믿음으로 성립되므로, 믿음이 없는 자는 보아도 본 것이 아닙니다. 가령, 여기에 꽃이 있는데 꽃을 보는 순간에 "저것은 꽃이다" 하고 믿으면 꽃이지만, "저것은 허깨비다" 하면 지식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믿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보았고 들었어도 관심이 가지 아니하면 본 것이 아니요, 들은 것이 아닙니다. 또한, 보고들은 사실이 그 자리에서 당장은 모르지만, 두고두고 후에 가서야 깨닫고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님의 꾸지람을 들을 그 때에는 야속하기만 하고 부모님의 심정을 잘 모르다가 후에 자신이 부모가 되고서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도 과거에 본 것, 들은 것, 경험한 것들을 후에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는 성령에 대해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본문의 순서를 좀 바꾸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령이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겠다, 즉 들은 것을 알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16:13) 말씀을 많이 들어 두면 성령이 오시어 들은 것을 알게 한다는 오묘한 말씀입니다. 지금은 잘 몰라도 들어만 두면, 그 때 가서 성령이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교역자들이 설교할 때, 교인들의 계층을 보면 천차만별입니다. 젊은 사람, 나이 많은 사람, 지식인, 예술인, 또는 무학자 등 여러 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어디에다 기준을 두고 설교를 해야 합니까?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존할 뿐입니다. 필자는 설교시에 빠뜨리지 않고 기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인 성도들에게 개별적으로 말씀하여 주옵소서." 또한 설교가 끝난 다음에는 "이제 필요한 말씀만 기억나게 하시고 쓸데없는 말은 다 잊어버리게 해주십시오"라고 혼자 기도합니다. 혹시라도 말씀을 전하는 중에 잘못 전한 것이 있으면 다 잊어버리게 하시고 필요한 말씀만 기억나게 하여 각자 생활 속에서 열매맺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전했으니 성령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므로 기도로 맡기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16 : 14)고 내 것을 알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누군가를 만나게 해서 결혼하게 하거나, 돈을 벌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에 관해서 알게 하는 역사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게 하는 역사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세째로, 13절 하반절에서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앞으로 되어질 일을 알게 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일을 말씀하고 계시지만, 다음에 되어질 일은 누가 알려 줄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시작을 하셨고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것은 다 말씀하셨고, 앞으로 되어질 것은 성령이 맡아서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원리를 알아서 한 마디만 들어도 열 가지를 알아듣지만, 미련한 자는 원리를 모름으로 열 가지를 들었어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리만 알면 됩니다. 그러면, 한 마디만 듣고도 계속 발전하여 마치 샘물이 솟아나듯 더 깊이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를 알고 십자가 사건 하나만 깨닫고 나면, 그 다음에도 성령 안에서 지혜도 얻고, 능력도 얻고, 철학도 얻고, 그리고 미술, 음악 등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이 세상에 훌륭한 음악, 미술 등 예술의 극치가 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았습니까? 모두가 주님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성령은 이렇게 오늘의 일만 아니라 장래 일도 알게 하여, 앞으로 있을 재림과 심판 등 미래로 향한 모든 사건을 알게 하므로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령은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므로, 미래지향적이며 종말론적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종합해 보면 사건은 단회적(單回的)이라는 말이 됩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도 단회적이요, 말씀도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3년에 끝났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지속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도 하루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만, 베드로는 이사건에 대한 깨달음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서에 보면,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는 말이 있는데, 하필이면 허리를 동이라고 했을까? 생각하다가 어떤 주석가는 해석하기를, 이 말을 한 것은 예수님께서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그 모습을 생각하고 말한 것 같다고 일리 있는 해석을 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그 장면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 빅스터의 유명한 저서인Going Deeper라는 책이 있습니다. 성경 한 구절을 가지고 책 한 권을 쓴 것입니다. 더 깊이, 더욱 깊이, 어떤 의미에서는 죽을 때까지 더 깨닫고, 성령이 감동하시면 또 깨닫는 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3:16을 보더라도 30대에 깨닫는 것이 다르고 50대에 깨닫는 것이 다르듯이 좀더 깊이, 더욱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계시의 사건은 단회적이지만 계시의 이해는 계속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사건의 의미를 지속케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은 단회적이지만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한 다음에 비로소 깨닫고, 전도하며 깨닫고, 예수 이름으로 핍박을 당하면서 깨닫고, 순교하면서 점점 더 깊이 깨닫게 되니, 성령이 도와서 알게 한다는 말씀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다음, 본문에서 "감당케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감당케 한다는 말은 소화한다, 견디어 낸다, 받아들여진다라는 뜻입니다. 진리란, 마치 음식과 같아서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약도 감당할 수 있어야 병이 낫듯이 말입니다. 얼마 전에 필자가 집회 인도차 괌도에 갔었습니다.

비행기 도착 시간이 새벽 한 시인데, 열심인 여집사님 한 분이 마중을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찬 새벽 공기 탓으로 그만 감기에 걸려서 집회 참석이 어렵게 되자 빨리 회복하려는 욕심에 감기약을 보통 양의 두 배를 잡수셨다고 합니다. 빨리 나아서 집회에 참석하려다가 오히려 병원 신세까지 지고 길게 앓았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약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어야 낫는 것이므로 반드시 처방대로 먹어야 합니다. 적당히 먹고 소화를 해야 음식도 몸에 영양이 되고 소화를 해야 약도 약이 되는 것입니다. 소화하지 못하면 흡수가 되지 않으므로 좋은 것이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진리도 이와 같습니다. 교훈에 비추어 설명하면, 어린 아이들에게는 책망보다는 칭찬이 좋습니다. 그저 조금만 해도 칭찬하고 거들어 주다가 좀 자라고 나면 그 때에는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좀더 크면, 매도 맞고 필요하면 내어 쫓기도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교육법은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는 케어링(보살핌)이고, 또 하나는 내어보내는 것입니다. 어느 한계점에 이르면 가차없이 내어쫓는 것입니다. 우리 교육은 맺고 끊는 것이 분명치 않아 계속 나이가 들어도 붙잡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애처롭다고만 생각하는데, 사실은 때가 되면 감당할 수 있도록 책망도, 매질도 해야 합니다. 사실 감당할 수만 있다면 칭찬보다는 책망이, 쓰다듬는 것보다는 매질이 더 유익한 것입니다. 감당할 수만 있다면 굳은 음식이 더 좋은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감당하게 하고, 핍박을 감당하게 하여, 내게 주어진 사건을 내게 향한 말씀으로 소화하게 합니다. 얼마나 소중한 역사입니까? 그러고 보면,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한 젊은 여인이 시어머님이 다니시는 교회에 모처럼 마음먹고 나왔다가 설교를 듣고서는 오해를 하여 시어머님께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왜 자기 잘못을 목사님께 일러 바쳤느냐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내게 주신 말씀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해를 하거나 반항을 한다면 전혀 은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필자가 잘 아는 어느 목사님께 70살이 넘은 어머님이 계셨습니다. 이 어머님은 할 일이 별로 없으시니 보따리를 들고 이곳 저곳의 부흥회에 열심이셨습니다. 멀고 가까운 것에 상관없이 아무데라도 부흥회만 있으면 일주일씩 다니시니 아들인 목사님의 마음이 좀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머니, 제가 목사 아닙니까? 제가 속해 있는 노선도 있고, 집회도 있는데 어머님께서 아무 집회나 다니시니 제 입장이 좀 그렇습니다" 하면 어렵게 이야기를 드리자, 어머님의 말씀은 한 마디로 "아니다, 은혜가 많더라"고 일축하시며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결론내리시기를, 내 어머니는 먹성이 좋으셔서 무슨 말씀이든 소화를 잘하시니 좋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비판이라는 것은 전혀 없고 그저 듣는 대로 소화해서 은혜가 많은데 더 이상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소화 불량이 문제입니다. 소화기가 약해서 수시로 걸려 넘어지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하나 그 때에는 감당할 것이다", 즉 성령이 임하면 은혜로 감당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본문 13절 상반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별명은 그리스도의 영이요, 자유의 영이요, 진리의 영입니다. 이 진리의 영은 곧 하나님의 계시로써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게 하고 나아가서는 우리를 진리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소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게로 인도까지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전하고 나서 팔짱을 끼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있도록,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즉 그 진리에게로 올 수밖에 없도록 강권적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양보하지 않으시는 귀중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만일, 사랑하라, 겸손하라 하고서는 버려 두면 어찌되겠습니까?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겸손할 수밖에 없도록 열심히 강권적으로 창조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 방법으로는 교육학에서 말하는 대로 알게도 하고 (knowledge), 느끼게도 하고(acceptance), 행하게도 하지만(practice), 그러나 꼭 알아야 할 것은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인도한다는 말의 의미는 양치는 목자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인도할 때 양이 좋아하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합니다. 처음에 양들이 가지 않으려 하면 달래기도 하고 끌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지 않으면 때리며 강권적으로 번쩍 들어서 옮기기도 합니다. 목자는 서서 소리를 지르다가, 안 되면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강권적으로 억지로라도 잡아 이끄는 것입니다. 성령이 인도하신다 함은 우리의 감정도 지식도 다 소중하게 여기지만, 그러나 인도되지 않을 때에는 잡아 끌어서라도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목자의 지팡이가 길고 지팡이 끝이 구부러진 이유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오지 않으면 목을 걸어서 잡아당기겠끔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도 성령의 강력한 인도하심으로 지금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기독론적으로 이해하고, 구원론적으로 이해하고, 계시적으로 이해하고,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주께서는 그렇게 완고하시지는 않습니다. 알게도 하고, 믿게도 하고, 받아들이게도 하고, 순종하게도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인도하십니다. 우리들의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믿음의 수준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무엇이든 주십시오라고 달라는 기도를 하다가, 조금 나아지면 알게 해주시고 가르쳐 주십사고 기도하고, 조금 더 나아지면 주님의 뜻대로 인도해 주십시오라고 나의 자유를 포기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선하신 대로 인도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 수준 높은 기도입니다. 이제부터는 청구서만 제출하는 기도에서 벗어나, 지금까지도 주님이 인도하신 것처럼 앞으로도 당신의 뜻대로 인도해 주십사고 하는 훌륭한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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