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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됨의 뜻(요 17:6-8)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바로 앞장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을 공부했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이 기도의 의미는 십자가를 기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잘 감당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해주십사 하는 심각한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번째로 제자들을 위한 기도 중에서 한 부분인 제자됨에 대해 생각하고, 다음 장에서 제자들을 위한 기도의 전체적인 내용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이 본문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제자됨에 대해서이고, 둘째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하는 것이며, 세째는 제자의 자격, 즉 제자의 도리 또는 제자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제자됨에 대해 생각하겠습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6) "내게 주신 사람들", 또는 "내게 주셨으며"라고 하나님이 선택하여 주셨음을 연이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됨은 자신 스스로가 선택하여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므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택이란 말이 나오면 곧 예정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정이란 시간적 차원의 의미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미에서의 정함의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정에 대해 운명적이라든지 시간적으로 미리 주어졌다고 하는 시차적인 것으로만 고집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시간이란 하나님 앞에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선택하신다는 하나님의 주권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도 말씀하셨듯이 본래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아버지의 주권에 의해서 저들을 내게 주셨다고, 하나님의 주권으로 제자들을 정하여 주셨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잘 알지만 순간순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선택했고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착각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애써서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가 있어야 시간 시간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만약 병원에 입원해 있다면, 마음은 간절해도 교회에 나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 인간에게 자유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 마음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부족한 인간들로서 오직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와 능력만이 나로 하여금 주의 백성이 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았다는 것 그 자체는 큰 은혜입니다. 특별히 완악하고 교만한 내 마음을 여시어 강권적으로 복음을 듣게 하시고, 굳은 마음을 깨뜨려서 열게 하시며, 결국에는 교만을 쳐서 무릎을 꿇게 하시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믿음은 온전히 선물로써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 즉 제자된다고 하는 것은 큰 은사요, 은혜입니다. 많은 사람 중에서 특히 열 두 명의 제자에 속한다는 것은 보통 특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다소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직분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된 섭리 가운데 특권으로 주어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결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집사님이 자기 소개를 하면서 예수 믿은 지 3년만에 집사를 땄다고 해서 웃은 적이 있습니다.
집사라는 직분을 내가 획득했고 땄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자리에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입니다. 내게 기회를 주셨고, 내게 이 일을 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으며, 때로는 물질까지도 허락하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하여서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자가 되었다고 하는 그 됨됨이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는 완전한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 선택적인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특권임을 알고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도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잘난 사람이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 그를 고용하셨단 말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 좀 특이한 점도 있고, 진실한 점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함을 입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어 선택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인격도 지식도 능력도 선택하시고 나아가서는 그의 환경까지도 선택하십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창녀 출신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셨습니다. 호세아의 아내는 결혼 후에도 계속 불륜의 생활을 하다가 집을 나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내를 데려와서 사랑하라고 호세아에게 권고하십니다. 호세아가 어떻게 대답했겠습니까? "하나님 이런 아내를 사랑하기란 정말 힘이 듭니다. 이래서야 어디 살겠습니까?" 하고 불만을 합니다. 하나님은 대답하시기를 "네가 더러운 네 아내를 사랑하기가 힘드느냐? 나도 네 백성을 사랑하기가 힘들다. 아니 너를 사랑하기가 더욱 힘이 든다"고 호세아가 겪는 가정적인 어려움을 이용하시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뜻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 각자가 처하고 있는 형편에 따라 필요한 대로 쓰십니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무식하면 무식한 대로, 있는 그대로를 고용하여 쓰신다는 말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많은 사람 중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여서 예수님께 주심으로 제자가 된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요 17:6 상반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를 소개했다는 말입니다.
이름이란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단순히 그 사람을 부르는 호칭만이 아니라, 그의 인격과 운명까지도 좌우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라는 이름 속에 아브라함 됨이 있고, 야곱의 이름 속에 간사한 야곱 됨이 들어 잇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잘 아는 대로 구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너무 소중하여 그들이 부르지 못했습니다. 특히 십계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지 말라"고 명시되어 있으므로 「여호와」라고 써놓기는 하여도 그대로 읽지는 못하고 「아도나이」라고 읽었습니다. 원래 여호와라는 글자는 자음뿐인데 아도나이라고 하는 글자의 모음을 붙여서 부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호와를 마음대로 부릅니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1년에 한 번 있는 대 속죄의 날에 대제사장이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를 지낼 때, 여호와 하나님을 한 번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도 대제사장이 여호와를 어떻게 불렀는지 아직 모릅니다. 이토록 여호와의 이름은 아주 신비로운 것입니다. 이 신비로운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께서 저들에게 알게 했다고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바른 계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비밀스럽고 신비한 이름을 제자들에게 알도록 전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마음대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곧 제자들에게 주시는 은총이요, 특권인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 묻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 3 : 13) 이 때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다"(출 3 : 15)라고 당신의 이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여호와란 이름의 뜻은 "내가 있으니 내가 있다"(I am that I am)는 뜻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입니다. 이 거룩한 이름을 이스라엘을 구하고자 할 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직접 알려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통하여 만백성을 구원하고자 할 때에, 즉 전도 사업을 할 때에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습니다. 모세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같은 문맥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제자의 사명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째로, 제자의 자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에서는 네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로 믿었사옵나이다."(요 17:8) 첫째, 제자들은 주신 말씀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받아들여야 제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답답한 일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유는 가슴을 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슴을 열고 마음을 열어 수용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제자란 우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판하거나 거부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왜곡하는 일은 더욱 없습니다. 전적으로 수락하며 받아들이는 자가 제자인 것입니다. 오래 전에 필자가 여자대학에 가서 「배우자 선택」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질문 시간에 어느 학생이 필자에게 묻기를 "목사님께서 다시 총각이 되어 결혼하신다면 어떠한 여자와 결혼하겠습니까?"라고 물어 왔습니다. 저는 서슴없이 수용성이 좋은 여자라고 대답했습니다. 수용성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옳은 말이구나" 하고 상대방이 전적으로 받아주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다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자가 되려면 우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둘째로, 제자들은 말씀을 알았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그 뜻을 알고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요한복음을 공부해 오는 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니고데모가 그랬고, 사마리아 여인이 전혀 알아듣지 못했으며, 도마, 빌립도 그랬습니다. 적어도 제자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알아듣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야만 정말 알아듣는 것입니다. 또한 눈으로 보이는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볼 수 있어야 알아듣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요 17 : 7)라고,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자는 것이지, 예수님의 나이나 취미를 알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의 행위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께서 병을 고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병을 고치셨다는 것이며, 예수께서 환자를 고치셨다는 것은 그의 죄를 사하셨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역으로 그렇게 깨닫고 믿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보고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8에서 이미 보았듯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를 보았으면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렇게 아는 것이 예수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세째로, 제자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믿었습니다. 8절 끝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로 믿었사옵나이다"라고 믿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이 예수를 보냈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제자입니다.
네째는, 그 말씀을 지켰습니다.(6절 끝) 제자됨의 증거는, 알았으면 행하는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믿으면 힘이 생기는 것으로, 믿음은 곧 활력이요 동력입니다. 알고 믿으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제자가 되면, 그 말씀을 알고 순종하고 지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말씀을 알고, 전하고, 지키며 순교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에는 겸손과 헌신과 감사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지키며, 예수님이 행하신 역사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며, 그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입니다. 제자는 앉아서 듣고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요즘 성경 공부 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성경 공부반마다 뛰어다니며 이것저것 다 하겠다고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만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성경을 아는 것과 기도하는 것, 그리고 실천하는 것의 세 박자가 맞아야 제대로 성경을 아는 사람입니다. 가령,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었으면, 실제로 원수를 사랑해 보아야 그 말씀을 알게 됩니다. 이론적으로만 "사랑해야지"라고 생각하든가, 또는 "과연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그 가능성을 진단하고 앉았다면 원수 사랑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억지로라도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 보아야만, 즉 몸으로 실천해야만 그 뜻을 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머리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발로 아니 몸 전체로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허물이 많고 부족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아버지라 부르도록 허락하셨음은 아무리 생각해도 큰 은혜요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중하게 이 특권을 누리며 말씀대로 순종할 때에 진정 그의 제자됨을 확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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