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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죽음의 비유(요한복음 11:1-16)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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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비유(요한복음 11:1-16)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었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니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요한복음 11장에서 나는 부활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 그 이전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장면입니다. 사건의 줄거리를 보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가정의 나사로라고 하는 사람이병이 들어 죽어가게 되자 그의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오셔서 오빠를 살려주실 것을 부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소식을 들으시고도 곧 오시지를 않고 며칠을 지연하시다가 나사로가 죽어 장사를 치른 다음에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을 맞는 누이들이 예수님께서 여기에 계셨다면 내 오빠가 죽지 않았을 터인데 이제 장사까지 치른 다음에 오시면 무얼 하겠습니까? 왜 진작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는 원망스런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누이들은 병든 오빠는 예수님께서 낫게 하여 살릴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죽은 오빠는 살리실 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덤에까지 찾아가셔서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다시 살게 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뭐니 뭐니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역시 죽음의 문제입니다. 죽음이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에 있어서의 자연현상입니다. 흔히 병이 들어 죽기도 하고 이런 저런 모양의 사고를 당해 죽기도 하지만 어쨌든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자연현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어떠한 한 개인에게 특별히 역사 되어지는 죽음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심판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한 사람 그가 살아 있음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에게 괴로움과 피해를 주겠기에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위해 하나님께서 치워버리시는 죽음입니다.

그런가하면 죽음과는 반대로 자연 현상적으로는 꼭 죽을 사람인데도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를 계속 쓰시고자 하여 그 생명을 연장해 주시는 특별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히스기야 왕이 15년간의 생애를 연장 받은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나사로의 죽음에서 우리는 먼저 세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 하나가 사랑하는 자에게 병이 들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본문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 개별적으로 특별히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고 죽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토록 사랑하시는 자를 죽도록 내어버려 두셨느냐하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을 풀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에게도 병이 있고 죽음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라고 하여 병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때에는 병과 죽음이 있음으로서 저를 더욱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를 더 사랑하시기에 병들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하는 말을 들으면서 내가 병들고 죽어야하는 문제가 주님의 사랑에서 멀어진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음 또 하나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병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어지고 죽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전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꼭 살아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아서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야 할렐루야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나 어느 때이고 죽었다 할 때에는 할렐루야할 마음도, 아멘할 마음도 없으며 물론 하나님께 감사할 마음도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신앙의 결정적인 병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해 주는 죽음에 대한 중요한 교훈은 병이 들거나 죽는그 모든 괴롭고 슬픈 일들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주어진 사건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히 생각하는 성공과 실패, 혹은 병들고 건강한 것에 좌우하여 성공하고 건강하면 하나님께 영광이요 실패하고 병들면 저주받은 것처럼 생각하려는 것은 성경적인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이 사람이 죽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20)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할 것은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하시는 15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또한 깊은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어 살아있을 때에 옆에 계셨더라면 예수님의 성품이나 능력으로 보아 죽기 전에 그 병을 고치셨을 것입니다. 옆에 계시지 않아도 모셔올 판인데 옆에 계셨다면이야 그 누이들이 오죽이나 애원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계시지 않았으며, 안 계셨기 때문에 나사로가 죽도록 내어버려 둘 수가 있었고 장례식까지 치를 수 있도록 진행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는 일이 여기에까지 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얼마나 놀라운 말씀이요 일입니까? 다시 한번 그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다. 환자의 병은 점점 더 깊어서 사경을 헤매며 오시라는 예수님은 오시지 않은 채 끝내 오빠는 숨을 거두었고 이제는 장례식까지 치루어 놓고 모두가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은근히 예수님을 원망까지 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았던 것을 기뻐하노라고 하시니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이런 문제들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일이 이렇게 전개됨으로써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이 일을 두고 당황해 하시거나 잘못했다며 후회하시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이제 나사로의 죽은 사실을 하나의 비유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곧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려 가노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주여 잠들었으면 났겠나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잠이 들었으면 깨어날 것인데 일부러 여기에서 깨우러 갈 것까지야 없지 않습니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나사로가 죽어서 장례식까지 치루고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이 끝난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터인데도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좌절함이 없는 태연한 모습으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는 죽었다는 표현을 대신하여 잠들었다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9:24에는 예수님께서 한 소녀의 죽음 앞에서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셨으며 그리고 사도 바울역시 고린도 전서15:20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일컬어 "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표현하고있으며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4:13-14에서는 죽음을 두고 잠을 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죽었다는 말을 쓰기를 꺼려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무튼 지금 예수님께서는 잠을 잔다는 것을 비유로 죽음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이제 이 죽음의 문제를 놓고 생각해 볼 때 왜 죽음이 두려워지는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심리학적으로 세 가지가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는 죽은 다음의 세계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천국을 바라보며 천국에 대한 찬송을 부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확실하게만 믿어진다면 죽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전혀 모르고 보면 아무리 영광스러운 세계가 전개된다 하더라도 죽음에 대한 공포는 남아 있는 것입니다. 죽은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이 보여 주는 것 외에 밝혀진 바가 없기 때문에 그 세계를 모르는 한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 두 번째는 왜 나만 죽느냐 하는 것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필이면 이 죽음이 지금 나에게 오는가하는 생각입니다. 자기로서는 좀더 있다가 죽었으면 좋겠는데 지금 죽게되고 보니 어쩌면 자기만 죽는 것 같고 죽어서는 안될 시간에 죽는 것 같아서 아깝고 억울한 마음에서 죽음을 기피하고자 할뿐만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죄책감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장 무서운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결국은 비록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천당과 지옥이 있는지 없는 것인지를 모르지만 만약 있다면 나는 지옥으로 갈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사건까지도 나의 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 세 가지 죽음을 두려워하는 원인들을 놓고 보면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도 해당되는 바가 없는 문제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해 놓으신 후에 다시 오셔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우리를 영접하여 함께 있게 하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14:3)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는 순간 이미 사후의 세계를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나 그 이후의 세계가 결코 미지수가 아닙니다. 앞서 말한 왜 나만 죽느냐하는 문제를 놓고 보더라도 이것은 내 마음대로 결정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시고 그의 경륜과 섭리 가운데 필요한 때와 필요한 장소에서 부르시는 것이기에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거기에 우리 믿음의 소재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적어도 죽음을 죄의 댓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죽음 때문에 죄책을 느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죽음은 마치 잠을 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잠들었도다"라며 비유로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자는 것이냐고 한다면 잠은 삶의 과정이면서도 생각해 보면 죽음의 연습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은 크게 나누어 깨어있는 것과 잠자는 것의 반복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할 일이 많다고 하더라도 내내 깨어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잘 때에는 자야하고 또 충분히 자야합니다. 사람에게는 먹는 것 보다 잠자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면 온 몸이 쇠해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며 모든 일에 있어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필요한 만큼의 잠을 자야하는 것입니다. 만일 보름 동안 계속 잠을 자지 못하면 마침 내 사람이 미치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병이 잠을 못 자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생의 또 하나의 과정이요 생의 현상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가리켜 잠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죽음을 그렇게 보셨기 때문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울고 통곡을 하는 데에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며(8:52)여기 나사로의 죽음을 두고도 잠들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죽음의 잔다는 것을 실제적인 잠과 비교하여 생각해 볼 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생애의 결론도 중단도 아닌, 다만 기다리고있던 일일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이란 최후의 순간이 아니라 자기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나 찬송가를 통해서 죽음에 대한 메시지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죽음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고 그런 가운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준비하고 있다가 맞는 죽음은 결코 최종 끝이 아닙니다. 이것은 의미의 완성이요 자기의 완성이며 경주자로 볼 때에는 최종 고울인의 순간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결코 종말이 아닌 한 인생의 완성이 죽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잠이라고 하는 것은 쉬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병중에서도 잠을 못 자는 병은 참으로 괴로운 병입니다. 한번은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가정의 어려운 문제들로 인해 신경을 쓰다보니 신경이 쇠약해지면서 잠이 안 오기 시작하여 보름동안이나 잠을 못 잤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수면제를 먹어도 보았지만 소용이 없고 눈을 감으나 뜨나 마찬가지로 정신이 멀쩡한 것이 잠이 오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지칠 대로 지쳐서 누워 있으면서 저에게 하는 말이 목사로서 걸려서는 안될 병에 걸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목사가 오죽이나 믿음이 없으면 잠을 못 자고 그럴까하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사랑하는 자에게는 여호와께서 잠을 주신다고 하셨고 보면 어쨌든 잠 못 자는 병은 믿음이 없는 병인 것은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잠을 잠으로 쉼이 되고 그래야 건강한 몸으로 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쉰다는 것이 앉아있다고 쉬는 것이겠습니까? 누워있다고 쉬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잠을 주셔야 쉬는 것입니다. 일하지 않고 한 달을 누워있다 하더라도 잠이 오지 않으면 그것은 쉬는 것이 아닙니다. 잠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잠을 주십니다. 피곤한 자에게 단잠을 주심으로 편히 쉬게 합니다. 잠을 자는 동안은 몸도 마음도 다 쉬게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잊지 말 것은 잠을 잔다는 것은 의식은 쉬지만 호흡과 맥박 등의 다른 기관은 계속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현상인지 모릅니다. 만일의 경우 잔다고 할 때 심장까지 함께 자버린다면 그것은 끝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호흡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잔다는 것은 의식이 쉰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비유하여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내가 그 얼굴을 볼 수가 없고 그 음성을 들을 수가 없지만 그러나 언제든지 내가 부르면 일어나 나올 것이란 말입니다. 의식으로서는 쉬고 있으나 그 외의 기관에는 여전히 생명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므로 아주 생명이 떠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를 두고 안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쫓기는 인생살이로부터 떠나 편안히 쉬고있는 것이고 보면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가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믿음으로 살던 분이 세상을 떠날 때 보면 "이제는 쉬고 싶소"라는 말을 하고는 눈을 감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참으로 피곤한 세상을 살아오다가 이제 좀 길게 잠을 자는 안식을 얻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며, 그리고 영혼은 살아있어서 계속 하나님 앞에서 교제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자는 자는 반드시 깰 때가 있습니다. 스스로 깨기도 하지만은 다른 사람이 흔들어 깨우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신 것은 나사로의 잠은 스스로는 깨어나지 못하는 잠이니 내가 가서 깨우겠노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절망적으로 생각하는 이죽음을 그저 잠깐 자는 잠으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이 잠은 철학적인 용어나 단순히 빌어온 추상적인 용어로서의 잠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잠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시어 "나사로야 나오라"며 그를 불러 깨우십니다. 그럴 때에 나사로가 그대로 깨어서 나오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의 단순한 추상적인 비유가 아니라 사실 그대로의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시고 나사로는 또한 깨어 나왔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죽음은 부활을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생의 단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다음날을 위해서는 오늘밤을 쉬면서 반드시 잠을 자야하는 것처럼 우리는 다음 생명인 부활한 생명을 위해서는 오늘죽음이라고 하는 안식과 수면을 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거쳐야만 영원한 다음 생명에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다시 한번 나사로가 병들어서부터 죽어 장사를 지낼 때까지의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다. 실로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필요했던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만일 감기 몸살 정도로 걸린 것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다면 그렇게 영광이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문둥병쯤 걸렸다가 나았다 하더라도 특별히 큰 영광이 돌아가지는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이렇게 유명해지고 그 가정은 물론 하나님께와 예수님에게 큰 영광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죽은지 나흘만에 살아났다"고 하는 그 사건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사로가 당한 고난과 그에 해당하는 깊은 잠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큰 영광이 돌아가며 또한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나사로에게 이 큰 영광을 선물로 주시게 된 것입니다. 잠시 잠깐 사랑하는 자가 병들고, 죽어 장사를 치르는 슬픈 사건들이 있어 왔지만 예수님으로 인하여 그 모든 것이 뒤바뀌게 될 때 참으로 큰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거기에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당장에 뜻대로 되지 않음을 답답해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시면서 "내가 그 일로 인해 너희를 위하여 기뻐한다"라는 말씀을 하실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나사로와의 관계에서 생명의 주로 역사 하신 그 예수님으로 인해 온 인류도 함께 부활의 생명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언젠가는 주님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고난이 있고 잠들어야하는 안식의 때도 있겠지만 또한 언젠가는 아무개야 나오너라 하시며 불러 깨우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사건을 치르고 슬퍼하는 자들 앞에서 "나는 부활"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인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죽는다는 것을 잠자는 것으로 비유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잠을 잘 때마다, 그리고 잠이라는 생리적인 현상을 통해서 생명의 궁극적인 문제인 죽음에 대한 진리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보다 심각한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내일 아침도 반드시 내가 깨어날 것처럼 그렇게만 생각하지를 마십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내 영혼을 주께 부탁하나이다"하는 임종기도를 매일 밤 잠잘 때마다 드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잠이 들고는 다시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자는 것과 죽는다는 것이 동일한 의미임을 생각하면서 만약 오늘밤에 내가 죽는다고 하면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를 위한 행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잠들 때가 있다면 또한 깰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깰 때 일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밤이 깊고 날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3:12)고 말한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밤이 될 때마다 밝아올 아침을 생각하듯이 죽음다음에 있는 부활을 한번 더 생각하는 매일 매일의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죽은 나사로를 잠들었다시며 잠자는 자를 깨우시듯 살리시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잠들어야 하는 죽음의 과정을 부활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건으로 확정해 나가는 보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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