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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신에게(사도행전 17:22~34)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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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신에게(사도행전 17:2234)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우리는 지금 사도 바울의 아덴 전도에 대하여 몇 시간째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바울이 아덴에 도착해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는지, 그가 만나는 사건들이 어떤 것들이었는지, 전도의 대상은 어떤 성격의 사람들이었는지를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이며 전도의 내용과 결과에 대하여 공부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헬라 철학의 본산지 아덴에 도착하면서부터 그 신학이랄까 생각이랄까 선교 사상에 상당히 흔들림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결엔지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철저하게 절대적인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의 위치에서 잠시 떠나 철학적 인간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철학적 방법에 빠져들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철학자들을 상대로 하면서 철학적으로 말하고, 또 저들과 대화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철학적 지식의 우월성을 한번 드러내보고자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철학적 방법으로 전도를 하려듭니다. "당신들의 철학은 잘못됐소"하면서도 순수한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철학적 방법을 시도함으로 아덴 전도는 거의 실패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몇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하나, 다른 데서처럼 튼튼하게 교회를 세우고 떠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게 떠나는 사건이 오늘의 본문에 간단히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는 그로 말미암아 그가 다음 도시인 고린도로 갔을 때에는 대단히 실의에 빠지고, 심지어는 전도할 용기마저 잃어버리는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아덴 전도의 실패 때문입니다. 그것을 깊이 뉘우치면서 이렇게 나약해지지 않았는지이렇게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금 알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고맙게도 "하나님"하고 분명하게 유일신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옛사람들은 막연하게 "하늘"이라고 했지요. 저 푸른 하늘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하나님'이라 부름으로 신에 대한 개념을 아주 분명히 하고 삽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하늘은 하늘이고, 귀신은 귀신이고, 도깨비는 도깨비올시다. ()은 영입니다. 아주 단어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일본을 가보니 이게 잘못됐어요. 일본의 교회가 부흥 안 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가미사마"라고 하거든요. 하나님을 "가미사마"라고 하는데,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도 가미사마고, 그들이 민족 신으로 받드는 천왕이라는 인간도 가미사마고, 귀신도 가미사마라 부릅니다. 혼동, 혼돈 상태입니다. 그래서 문제인 것입니다. 영어도 'God'를 큰 글자로 쓰면 하나님이고, 작은 글자로 쓰면 귀신입니다. 복수로 쓰면 귀신이고, 단수로 쓰면 하나님입니다. 그것 가지고는 안되지요. 하나님, 귀신이렇게 달라야지.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요, 귀신은 '귀신'이어야지 God, gods로는 안될 일입니다.

, 이제 중요한 것은 부르는 것이 아니라 개념입니다. 뜻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얘기는 신론(神論)에서 여러 가지로 말하겠습니다마는 여기서는 아덴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좀 언급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우상 숭배라든가 귀신 숭배라든가 혹은 성물 숭배 같은, 정리되지 않은 신 개념이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헛갈리기 쉬운 것이 뭐냐 하면 철학적 신입니다. 상당히 논리적이고 추상적입니다. 그리고 관념적입니다. 모든 것의 근원생명의 근원, 물질의 근원, 만물의 근원이 무엇이겠는가, 그게 바로 신이다, 만물을 존재케 하는 원인으로 존재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신이다하는 생각이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철학적 신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 좀더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가 있잖아요? 물질이 있습니다. 물질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거든요. 분자, 원자, 전자…… 이런 것을 우리가 육안으로 보지 못합니다. 보이지 않아요. 넓게는 우주로 보아도 넓고 넓은 것이니 다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물질은 유한하고, 정신은 무한하다는 이야기도 옛날 이야기입니다. 물질도 무한해요. 작은 면으로도 무한하고, 큰 면으로도 무한합니다. 우주 끝에, 저 몇백, 몇억 광년 저 뒤에 무엇이 있습니까? 요새 와서 블랙홀(Black Hole)이라고 합니다마는 그것은 모르니까 하는 소리입니다. 아무튼 이것도 물질입니다. 물질이라고 하는 공간의 저 끝에, 끝에, 끝에는 무엇입니까? 끝의 끝은 또 무엇입니까? 결국은 이렇듯 해결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만물의 존재의 근본으로서, 아르케(arche)로서 신을 생각하게 됩니다.

알고 보면 물질에서의 근본이니까 그것도 물질이지요. 이렇게 말해야 될 것 아닙니까?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 어떤 과학자가일평생 이것을 생각하다가 죽으면서 한 마디 했어요. 그 유언을 들은 사람이 제게 직접 말해서 들어본 일이 있습니다. 평생토록 물리학을 탐구하고 연구하면서, 화성에 올라가는 인공위성도 만드는 세계적인 과학자입니다. 그가 제자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인즉 "물질에서 물질로 추구했지마는 그것은 결론이 없었다. 내가 오직 한 가지 깨달은 것은 '물질의 근본은 인격이다'라는 것이다." 이 유언을 들은 제자가 저보고 그걸 좀 설명해달라 해요. 아무튼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이 철학적 하나님이요 과학적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같이 논리적 추상적 개념적 관념적 신관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신을 의인화해서,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인격이니까 하나님도 인격이다 라는 생각을 전제해놓고, 그에 의해서 모든 것이 움직이는 것처럼 생각하는 인격적, 의인적 신관이 있습니다. 이런 신관에서는 이를테면 바람이 불 때에도 하나님이 날개는 치는가보다 라고 생각하고, 불이 번쩍하거나 번개가 칠 때에는 아, 저것도 아마 하나님이 어떻게 하는 것일 거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만사를 그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나갑니다. 좋은 예가 하나 있어요. 세상에 용이 있습니까? 용은 없으나 어느 나라에든지 용이라는 말은 있어요. 용이라는 말은 있는데 용은 없어요. 그래 모든 사람들이 용을 생각해요. 하늘에 떠다니는 뱀 같은 것쯤으로 생각해서 그놈들이 서로 싸우면 비가 온다는 따위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물질에다 투사시켜 가지고 그걸 의인화해서 이해하는 식의 이 같은 신관이 있습니다.

더 복잡한 이야기는 건너뛰기로 하고, 이제 제일로 헛갈리기 쉬운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뭐냐하면 바로 욕망이나 이상을 추상화하고 인격화하는 것입니다. 내가 뭘 하려고 해요. 안 되요. 안되면 안 되는 부분을 하나님께 맡기는 거예요. 하나님 때문이다이렇게 되거든요.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지요. 힘이 미치지 못할 때에 거기서 신을 생각해내는 것이지요. 이것도 역시 추상적인 것입니다. 하나 더 말하지요. 제가 프린스턴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에 닥터 콜이라고 하는 교수가 바로 이 신관에 대해서 설명하는 날이었습니다. 강의는 한 20, 하는 척하더니 "오늘은 영화나 하나 보고 말지" 하더니 강의 시간에 영화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져온 필름을 가지고. 그 영화인즉 무슨 별난 영화도 아니예요. 자세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별로 좋지 않은 두 젊은이가 초저녁에 만났어요. 만나 가지고 저들끼리 술도 마시고, 댄스도 하고 하면서 밤 12가 되었어요. 지금 둘 이는 한마디로 말하면 몸이 달았어요. 마음이 뜨거워졌어요. 그랬을 때에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말입니다. "너 참 예쁘다. 내가 너한테 미치겠다. 그러니 나하고 결혼하자"하고는 "오늘밤 나하고 같이 지내자." 아주 간절하게 요청해요. 그랬더니 여자가 하는 말, "노우! 나는 다른 남자 친구와 약속이 있어. 가봐야 돼." 남자가 급해졌습니다. 여자 앞에 무릎을 끓어요. 그러고는 하는 말인즉 여러분도 잘 아시는 말이예요. "You are my destiny andmy God(그대는 나의 운명, 그대는 나의 하나님)." 영화는 그것으로 끝났어요. 그 때에 그 교수는 "보라, 여기서 말하는 이 남자의 하나님은 뭐냐?"하고 학생들에게 묻습니다. 이 남자의 하나님이 무엇입니까? 같은 얘기가 또 하나 있어요. 하나님을 안 믿는 어떤 사람이 얼음판을 지나가다가 얼음판이 찌직하고 갈라지려 하자 ", "하다가 와지끈 하니까 "아이구, 하나님"이라고 비명을 질렀다고 합니다. 이 때의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무슨 뜻으로 부르는 하나님입니까? 뭐가 잘 안되면 '아이구 하나님 맙소사'합니다. 이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이렇듯 자신의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그 어느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에 현실은 거기까지고 욕망은 그 위로 올라갈 때에, 그 남은 부분을 추상화하고 신화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신 개념입니다. 바로 이 같은 신관에 의해서 여기에다 초점을 맞추고 사신론(死神論)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었다, 과학 시대에 그런 게 어디 있느냐이렇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신과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우리의 하나님을 혼동해서는 안되지요. 신의 개념이 틀려요. 인간이 부족해서, 약해서, 미련해서, 그래서 추상화해놓은, 욕망을 인격화해놓은, 그런 의미의 신은 현대의 밝은 과학과 함께 다 죽었다이렇게 해석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신이란 그런 게 아니예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요, 인격적인 하나님이요, 초월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웬만하면 모든 문제에서 신이라는 단어를 안 쓰는 게 좋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지, "전지전능하신 신"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 갔더니 장로님이 기도를 하는데 듣자니 제가 좀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대학 학장 되는 분인데 ", 신이시여"하는 것입니다.

'저 양반이 유식한 척하고 지금 기독교 팔아먹고 앉았구만'속에서 화가 나더라고요. 유식한 척하고 기독교를 매도하는 짓인 것입니다. 하나님이지 어떻게 신입니까? 신이라면 잡신이지요. 개념이 틀립니다. 모름지기 우리 기독교인은 언제나 '하나님'이라는 말을 구별해서 쓰는 것이 합당합니다. 공연히 유식한 척하고 신이시여 어쩌고 하지 말 것입니다.

개념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성서적 하나님, 계시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개념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이런 하나님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덴에 와서 철학적 하나님을 만나면서 계시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혼란을 일으키고 맙니다.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아덴에 와서 화가 났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상이 많은 것을 보고 화가 났어요. 왜 화가 나요? 철학을 알고, 유식하고, 지성인이고, 헬라 철학을 어느 만큼 안다는 지성인들이 그래, 전부 우상을 섬기고 있어?이렇게 화가 난 것입니다. 화날 게 하나도 없는 일이지요. 우상이 많다고 화낼 것 하나도 없어요. 철학자라고 해서 우상 섬기지 말라는 법 없고요. 철학과 우상이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현대과학과 미신이 공존하는데요.

제가 언젠가 한번 지나가다가 일부러 굿하는 데 가서 문 열고 들여다봤습니다. 형광등 켜놓고 마이크 놓고 합디다. 그래서 저는 ', 이거 참 희한한 세상이다' 싶었어요. 형광등 켜놓고, 마이크 놓고 굿하고 앉았어요. 현대과학과 미신이 공존하는 현장이 아닙니까? 그러니 '과학자가 뭐 저래?'하고 화낼 것 아무 것도 없어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한 도깨비놀음이기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수준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유식하다고 해서 우상 섬기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실 화낼 이유가 없이 화를 낸 것입니다. 그것은 철학에 대해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철학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이런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 보니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22)"라고 말씀합니다. 종교성이 많다는 말은 헬라어로 '데이시다이모네스테루스'라고 하는데 그 말은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상을 섬기고 있지만 그래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우상이라도 섬기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래서 하나님 찾는 마음이 있다, 라고 바울이 칭찬하는 말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파스칼이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큰 구멍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쾌락으로도, 명예로도, 철학으로도,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가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메울 수 있는 구멍이다.' 정말입니다. 아무리 우상을 섬기고, 아무리 철학을 하고, 아무리 과학자가 되고 해봐도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종교, 하나님을 찾는 그 큰 구멍은 메울 길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실의에 빠지고, 절망하고, 자살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 많은 우상들을 보면서 "종교성이 많도다"라고 일단 칭찬을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에서 실수를 합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간 단도 보았으니(23)"'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아그노스토 데오'라고 하는데 여기서 '그노스'"안다는" 말이거든요. 아그노스는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어로 말하면 'An Unknown God'알지 못하는, 알려지지 않은, 혹은 알 수 없는 그러한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어서 하는 말이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23)" 합니다. 여기서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이름을 쓴 신상이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다 씌어 있습니다. 하늘신, 별신, 나무신, 돌신, 무슨 신…… 수없이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 신상에게만은 An Unknown God아그노스토 데오, 라고 썼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이다, 라고 해놓았습니다. 왜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했겠습니까? 그 알지 못하는 신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 신을 아예 섬기지 않으면 몰라도, 섬기면서 빼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경우에도 여기 몇 사람 모였는데 전부 이름을 다 부르다가 한 사람만 싹 빼면 기분이 나쁘잖아요? 그것처럼 신의 이름을 다 부르다가 몇 가지 신이 빠진다면 이 신이 얼마나 진노하겠어요? 아덴사람들은 그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름에다 주()를 달면 이렇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인간이 미련해서 이름을 미처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고로 이름을 제대로 못 불렀더라도 그저 용서하고 여기서 제물을 받아 잡수시고 진노하지 말아주세요. 그 뜻입니다. 마치 무명용사처럼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이것도 우상입니다.

이름을 미처 부르지 못한 것일 뿐이지요. 이름을 짓다가 못 지은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 앞에 서서 '너희가 알지 못하고 섬기는 것을 내가 알게 하겠다'고 하니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우상 앞에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궤변적이요, 철학적 발상입니다. 자기 지식과 재주를 믿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놓고 방향을 돌려서 복음을 말하고 복음 진리로 끌고 나가려고 했지만 끌려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논리를 뒤집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신이 다 잘못되었고, 모르고 섬기는 이것은 더 잘못되었다'라고 이렇게 말을 했어야지요. 여기서 '알지 못하고 섬기는 우상, 그것을 알게 하겠노라'하면서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한 의도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잘못된 이유가 있다면 자기의 철학적 지식이 여기서 나타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린 대로 사도 바울은 지금 복음을 선포하는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말하는 어투가 전부 철학을 강해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그의 논리가 전부 그렇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회개하라" 이렇게 말하지 않고, "회개하라 하셨으니"라는 논리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proclamation선포가 없습니다. 메시지 선포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아주 희미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31)"이렇게 끝났습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 우상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큰 진노를 사는 것인지 아느냐'라고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맥빠진 설교입니다. 저는 설교에 있어서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만, 간혹 보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얘기를 하면서"어떻게 어떻게 생각되어지기도 합니다"하고 합니다. 그런 희미한 소리라면 그만두십시오. 안 그렇습니까? 이 바쁜 세상에 "반드시 이렇습니다"해도 믿을까 말까 한데, 확실하게 말해야지요. "어떻게 생각되어 질 수도 있습니다"라니, 이 무슨 희미한 소리입니까? 이게 바로 잘못된 것입니다.

, 다시 한번 아브라함의 얘기를 해봅시다. 이 얘기는 성경에 없는 전설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살았는데 그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많이 만들어서 파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잠깐어디 외출한 사이에 어린아이인 아브라함이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우상에게 바치겠다며 고기를 가지고 왔어요.

보나마나 우상은 그것을 안 먹을 것 아닙니까? 그 때에 아브라함에게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큰 우상 앞에다 고기를 놓고, 그 다음에 작은 우상들을 모조리 도끼로 때려부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도끼를 큰 우상의 손에 떡 하니 들려놓았습니다. 그래놓고는 척 시치미를 떼고 앉아 있었습니다. 저녁에 아버지가 돌아와서 보니까 큰일났습니다. 일껏 만들어놓은 우상들이 모조리 다 목이 부러지고 망가졌습니다. 누가 그랬느냐고 야단을 피웁니다. 데라는 아브라함에게 네가 그랬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요, 저는 안 했습니다. 누가 제물을 바친다기에 갖다놓았는데, 글쎄 이놈들끼리 서로 먼저 먹겠다고 싸우다가 큰 놈이 작은 놈들을 다 죽여버려서 그만 저렇게 되었습니다." 데라는 되묻습니다. "우상에 무슨 생명이 있다고 저희들끼리 죽이고 말고 하느냐?" 그 때에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아버지, 그렇게 재물 하나도 받아먹지 못하고, 화도 내지 못하는 그런 신을 왜 섬긴다고 그러세요?" 이에 아버지는 그에게 매우 진노하였고 결국 아브라함은 이일로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는 전설입니다.

아무튼 우상이라는 것은 원래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고 왜 이렇게 설명을 했어야 했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면 그가 아덴에서 내놓는 메시지를 가만히 들어보세요. 자세히 읽으면 그의 철학적 방법이 거기에서 다 노출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에서는 원자들이 우연히 결합된 것이라고 강조하는 따위로 추상적이예요. 또 사실상 범신론이나 다름없는 것이 스토아 학파입니다. 이 에피큐리언, 스토아, 이 사람들 앞에서 사도 바울이 지금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들의 하나님에 대해서 부정하지를 않고, 또 하나의 그 비슷한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철학적 하나님을 부정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또 하나의 철학적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철학적으로 맞서서 변론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래서 사도 바울이 실패한 것입니다.

또 하나, 사도 바울은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하고 25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설명이 불충분합니다. 또 통치자 하나님이심을 26절에서 28절까지 설명합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고 말씀합니다. 그 다음에 결정적으로 실수한 것이 있습니다. 27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계시론에서 실패합니다.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합니다.

더듬어 찾아 발견한다어디 그런 게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그 아가페적 계시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는다는 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것은 기독교적 계시론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은 더 큰 실수를 합니다. 28절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합니다. 시인(詩人)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우리는 신의 소생이다'라고 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얘기가 됩니다. 예수 믿지도 않고,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좀 불충분하기는 하겠지만 시인은, 한마디로 말하면 철학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논리가 전개됩니다. 어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실패한 것입니다. 31절에 심판자 되심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대단히 애매 모호하게 얼버무립니다. 희미합니다. 부활의 복음이 확실치 않습니다.

또 마지막에 말하는 것도 서술적인 설명에 그칩니다. 결국은 십자가의복음성이 결여되고,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성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상대적으로, 또 철학적 하나님과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실수를 했습니다. 특별히 시()와 계시를 혼돈했습니다. 또한 회개의 복음이 미흡했습니다. 그의 복음의 절대성이, 십자가가 들어 있지 못했습니다. 철학의 위력 앞에서 그는 자기 철학에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철학적 방법으로 여러 가지 설명을 하려고 애쓴 흔적은 있습니다만 선포가 없는 메시지를 전했고, 십자가 중심의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복음의 절대성을 깜빡 잊어버렸습니다.

결국 그는 여기에서 실패하고 다시 십자가 중심의 복음으로 메시지를 재정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 2:3)"핍박하는 자도 없는데 심히 떨었습니다. 아덴에서 한번 실수한 것으로 해서 고린도까지 와서 심히 떨었습니다. 다시 그는 말씀합니다. 아주 굳게 결심했나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라고 확실히 말씀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남에게 전도할 때에는 언제나 좀 미련한 방법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습니다'그러면 깨끗이 끝나는 것입니다. 무슨 철학적 방법, 논리적 방법, 심리적 방법, 사회학적 방법을 동원한다거나 이렇게 저렇게 구차한 수단을 부리다보면 어느 사이에 예수도, 십자가도 멀리 가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62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말씀합니다.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변론하지 말아라, 철학적으로 하지 말아라, 그것은 무익했다, 내가 아덴에서 그것 때문에 실패했다.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직 십자가, 여기에 복음의 중심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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