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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티와 들보(마태복음 7 : 1 - 5)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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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와 들보(마태복음 7 : 1 - 5)

 

비판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이제 주신 본문 말씀의 주제는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넓게 해석하여 남의 말, 그것도 특별히 허물이나 단점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문에 나타난 그 좁은 의미로 생각을 하면 반드시 그런 의미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판단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마치 재판장이 판결을 내리는 것과 같이 결정적인 판단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이렇다. 저것은 저렇다. 혹은 나쁜 뜻에서 저 사람은 저래서 나쁘고 이 사람은 이래서 나쁘다는 식의 결정적인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문 그대로의 뜻은 재판장이 재판의 판결 결과를 선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는 이 사람은 유죄, 혹은 무죄하고서는 땅 땅 땅 치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판단하는 것으로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런 판단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또한 그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만이 가진 특권 중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요, 기능입니다. 그로 인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은 물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오늘 할 일과 내일 할 일, 그리고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 등 모든 것을 다 판단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것을 판단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비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말라! 비단 말로써 뿐만 아니라 생각 속에서라도 이렇고 저렇고 하는 비판은 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비판의 기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기능이 없다면 우리는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일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옳고 그른 것, 그리고 선택의 여지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에 대하여 다시 한번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말이냐 하면 이성의 판단을 제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성이 있고, 판단의 기능이 있다고 하여 무엇이나 다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내가 판단해야 할 일이 있는가 하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어요. 내게 주어진 바가 따로 있단 말입니다. 내가 판단해서는 안될 것이 보다 많아요. 이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하나님께 맡기세요. 그것은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라 그분이 하실 일입니다. 따라서 내가 하여야 할 이상의 월권, 그러한 판단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판단을 제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판단 자체가 죄악성을 지니고 있음을 시인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성 자체가 중생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죄 가운데 살면서 이것이 이지러지고 뭉개져서 병적으로 잘못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판단력 자체가 확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항상 알고 있어야 하고 그러한 나의 판단력이 선명하고 깨끗하게 회복되도록 먼저 중생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많은 요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흐리게 하고, 자기를 주장하는 마음이 흐리게 하며, 소중히 여기는 자기 경험도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우리는 가끔 경험을 과시하는 말로 "내 다 해 보았어"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소리인 것입니다. 사람이 다르고 시대가 다르며 환경이 다른데 어떻게 내가 해본 것과 저 사람이 해보는 것이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기 경험에 집착하는 것처럼 무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보면 자기가 경험한 것에 대해서는 어딘가 모르게 그 경험을 절대화하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연유에서 "내가 다 해 보았다"며 힘주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고집이 세고 그로 인해 판단이 흐려집니다. 내가 할 수 있었다고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못할 사람은 끝까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자기 경험, 자기 우월감 같은 것들이 앞서 있기 때문에 판단이 흐려지고 나아가서는 이기적인 생각과 악한 동기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이미 흐려져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흐려진 마음, 흐려진 척도, 흐려진 이성을 가지고 판단한 것은 그 판단 자체가 이미 옳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하고 판단을 지나치게 결정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거듭거듭 조심스럽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하는 랍비들의 교훈을 보면 인간 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여섯 가지의 덕이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 덕은 공부하는 것이요, 둘째 덕은 환자를 방문하는 것이며, 그리고 셋째 덕은 대접하는 일, 넷째 덕은 기도하는 것, 다섯째 덕은 자녀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것인데 이제 마지막 여섯째 덕이 무엇이냐 하면 다른 사람의 최선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덕이 있어요. 일생 동안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든 겸손히 배우고 익히며 공부하는 것이 덕이요. 환자를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것도 덕이요, 오가는 모든 이들에게 물질로 기쁘게 대접하는 것도 덕이요,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덕이며 배울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는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 덕인데 그 다음에 또 하나의 마지막 덕이 있으니 곧 다른 사람의 장점을 생각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생각합니다. 반면에 덕이 없는 사람은 항상 좋지 않은 나쁜 방향으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보니 꿈자리까지 사납고 뒤에 그 사람을 만나게 되면 애매하게 기분이 나빠지는 겁니다. 만약 좋은 점을 생각했다가 그 사람을 만났다면 반가울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덕이요, 덕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쁜 점을 생각지를 마십시오. 그런 점에서는 건망증이 있을수록 좋겠습니다. 나쁜 점은 아예 깨끗이 잊어버리고 좋은 점, 그의 장점에 대해서만 항상 생각하고 기억하는 그런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하는 덕이라는 것으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 비추어 오늘 말씀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본문에 의하면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비판은 왜 어떻게 하여 하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쁜 점을 보자니까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면을 보고 좋은 점만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덕이요, 거기에 덕스러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비판이란 도대체 하지 말라며 아주 잘라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한번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그 먼저는 우리가 남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때 그 전체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을 안다는 것은 언제나 부분적으로 아는 것일 뿐 결코 전체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의 외모를 대할 때에도 눈은 어떻고, 코가 어떻고 하는 정도의 얼굴 하나를 보는 것이지 전체가 어떻다 할 정도로 모두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그 사람의 발가락이 예쁜지 안 예쁜지를 어떻게 알겠느냐 말입니다. 기껏 본 것이 얼굴 하나라면 정말로 그 사람을 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렇게 나타난 육체의 외모도 다 못 보는 것이라면 하물며 그 사람의 속마음, 그 사람의 과거를 우리가 언제 보았느냔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될 사람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어떻게 남에 대해서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인격의 전체와 인간 전체를 다 보는 것이 못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쉽게 그 사람은 좋다 나쁘다. 혹은 이렇고 저렇다며 말할 수 있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로 부분적이요, 일방적이며, 어떤 때는 현세적으로, 이렇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내가 경험한 그 조그마한 한 부분을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생전 처음 만나 단 한마디 주고받은 말인데도 그 한 마디가 내게 거슬려서는 그 사람 전체를 나쁘게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얼마나 잘못 된 것인지를! 그 사람은 실은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이요. 칭송 받는 사람이며, 앞으로도 얼마든지 좋은 일을 많이 할 사람인데 나하고 만난 그 한 순간 때문에 그 사람을 그렇게 결정적으로 나쁘게 보겠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단을 쉽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내게 판단할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감히 남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정말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을 만큼의 선한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어찌 생각하면 어느 쪽이 더 큰 것인지, 어느 쪽이 더 잘못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겸손한 사람은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예요. 내 자신을 보노라면 감히 남을 평할 수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생각할 것은 우리는 그 사건 자체를 완전히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왜냐 하면 사건이 오늘 여기에 이르기까지에는 깊은 원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타난 어느 한 부분을 보는 것으로 하여 그 사건 전체를 평하려고 드는 것은 잘못이란 말입니다. 언젠가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선교사가 파키스탄에 들어가 선교를 하는데 이제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보니 그곳 사람들이 매우 한심한 짓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더운 지방이니까 집이라는 것은 그저 대충 나뭇가지로 간단하게 지어 놓고는 그 방에다 돌 세 개를 고여 남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이제 거기에다가 소똥 말린 것을 넣어 불을 붙여서는 입으로 후후 불어가면서 카레라이스를 끓여 먹는 것입니다. 실은 카레라이스의 원조가 인도, 파키스탄 그쪽이고 보면 이것이 세계에서 제일 맛있는 카레라이스인 것입니다. 본래 카레라이스는 가스 불같은 데서 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담배 불처럼 연한 불에다가 오래 오래 끓여야 된다고 합니다. 어쨌든 저 사람이 그렇게 끓이고 있으니 그 연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집집이 방안에 연기가 자욱하고 여자들은 전부가 눈이 빨갛게 병이 나 있더랍니다. 이것을 보는 선교사의 마음에는 이 야만적이고 미련한 사람들을 보았나!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곧 정죄 하는 것이요, 판단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이렇게 한참 비판을 한 다음, 그러나 어떻게 이 우매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 끝에 양철을 말아 만든 2미터 정도의 굴뚝 하나씩을 집집마다 나누어주면서 지붕에다 구멍을 뚫고는 집어넣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냄비 걸린 뒷부분에 고여 놓으면 이제 연기가 그리로 나갈 것이란 말입니다. 그랬더니 정말 연기가 솔솔 잘 나가서 이제 방안에는 연기가 없어지고 눈병도 없어졌습니다. 문제는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러고 난 후 두 달도 못 되어서 집이 폭삭 내려앉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무너지나 하고 그 원인을 찾아보았더니 그 지방에는 이상한 불개미가 있어서 산 나무는 갉아 먹지 않고 죽은 나무는 갉아먹는데 이것들이 소똥 불 피우는 냄새가 났을 때에는 도망을 갔다가 이제 그 냄새가 빠져나가자 다 모여들어서는 기둥뿌리를 전부 갉아먹어 집이 무너지고 말았더라는 것입니다. 이때에 그 선교사는 회개를 했다는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지혜인데 내가 굴뚝 하나로 해결하려고 했으니 그것이 되겠느냔 말입니다.

내 생각에는 잘못하는 것 같고,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하나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것이 그런 것이 아니예요. 그 사건 하나가 있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과 오랜 생활이 있어야 했고, 그 결과, 그 끝에서 비로소 그 사건이 있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 시점에서 쉽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 속담에는 "나무에 가리워서 숲을 못 본다"는 말이 있지요. 숲은 큰 것입니다. 따라서 멀리서 보아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가까이 가면 나무에 가리워서 진작 보아야 할 숲은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판단은 이와 같아서 도저히 정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그대로를 알아볼 수 없는 우리로서는 쉽게 판단하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더욱 중요한 말은 "네 형제의"란 말입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 이는 내가 판단할 대상이 바로 형제란 말이요, 형제의 아픈 곳을 쑤시면 결국은 내가 아파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남이 아니라 형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비판할 수가 없어요. 내가 비판받을 때에 아프다면 내 형제를 비판하면 또 저가 아플 것이란 말입니다. 그가 아픈 것이나 내가 아픈 것이나 그 아픔은 마찬가지로 아픈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 는 것입니다. 형제는 사랑할 대상이지 비판받아야 할 대상은 아닙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그는 사랑해야 하는 형제라는 것을 먼저 생각할 때 우리는 그렇게 쉽게 비판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3 - 4절 말씀을 보면 매우 과장된 점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티라고 하는 헬라어 '칼포스'는 매우 작은 먼지 같은 것을 뜻하며 무의미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작은 것도 눈에 들어가면 아프게 합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티는 눈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들보라고 하는 말은 헬라 원문에는 '도콘'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그야말로 들보입니다. 우리가 집을 지을 때에 쓰여지는 큰 재목인 대들보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눈 속에 들어갔다니 과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앞서 티가 눈 속에 들어갔다는 말씀은 이해가 되는데 들보가 눈에 들어갔다는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도 너무하셨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그러시려면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을 가리우고 있는 들보는 못 보느냐?"고 하셨으면 차라리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들보가 아예 눈에 들어갔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극단적인 극과 극의 비유가 된단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이 극단적인 비유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보신 비판에 대한 비판의 말씀인 것입니다. 너희 사람들의 비판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이냐? 그것은 티를 보는 사람이 들보는 깨닫지 못하기 마련이며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을 보는 사람은 자기를 못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 자꾸 하며 다니는 사람은 자기 일에 충실치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처세학 책에서 보니까 남의 집에 가서 다른 사람의 흉을 보는 아낙네가 있으면 빨리 집으로 돌아가 반짇고리가 제자리에 있는가 보라고 하였습니다. 자위가 제자리에 있고 바늘꽂이가 제자리에 있는지를 가서 보면 틀림없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이 남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예외없이 자기 일에는 충실치를 못합니다.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자기의 가장 중요한 일에는 관심이 없어요. 남의 일을 너무 많이 생각하는 사람은 진작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도리는 생각지를 못하더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시는 비판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제 남의 눈의 티를 비난하는 사람은 자기 눈의 들보에 대한 의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는 것인데 이는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이 비판이란 대체로 자기를 모르는 것에서 비롯되는 남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그 다음의 문제로 넘어가서 오늘 본문 중의 "먼저"라고 하는 말씀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먼저 네 눈 속에서! 할 때에 이 '먼저'라고 하는 프라이어리티(Priority)가 중요하고 그 다음이 다른 사람입니다. 이에 자기를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자기를 먼저 비판하고 그리고 남을 비판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남의 일에 대해서는 바늘 끝처럼 예민하게 비판하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바다처럼 관용을 베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하는 말이 인간인 고로 다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나오는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자기 먼저라고 하는 이 프라이어리티가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밝히 보고"하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자기의 상태, 자기의 의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충실을 먼저 생각하라! 그렇게 밝히 본 다음에 이제 다른 사람의 눈의 티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티와 들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추가해 드리자면 이 티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는 마치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아픈 것처럼 순간 순간 의식이 되는 것으로, 예를 들면, 거짓말하는 죄나 도둑질하는 죄, 간음하는 죄 등 눈에 띄게 형식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죄를 의미합니다. 그런가 하면 들보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 죄를 말합니다. 이는 너무 커서 생각도 나지 않고, 너무 오랫동안 젖어 왔기에 이제는 당연한 듯이 가리워져서 무의식 상태로 돌아가 버린 그러한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죄가 적을 때에는 비판도 받습니다마는 죄가 아주 클 때에는 흔히들 담대하다고도 하고 때로는 영웅이라는 말까지 하면서 하나의 위대함으로 평가받기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아마도 이렇게 짐작이 되어집니다. 여기 들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죄인 줄 모르는 죄이면서도 큰 죄요, 그리고 이 티라고 하는 것은 작은 것이면서도 눈에 들어가면 아프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들보에 대해서는 감각이나 의식이 없습니다. 따라서 아픈 것도 없기 마련이지요. 그러니 이 죄는 곧 교만이요, 불 신앙이며, 외식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적인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죄에 젖어 있다 보니 이제는 엄청나게 큰 죄인데도 불구하고 그 죄에 대한 의식은 전혀 없는 가운데 죄인 줄도 모르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보잘것없는 티만 보며 열심히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교만과 자기 우월감에 빠져서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태, 다시 말해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와 같이 무의식 상태에까지 들어와 버린 죄!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들보를 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빼어 버린 후에라야 밝히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안목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안목 자체가 중생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고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꽃을 볼 때에도 하나님이 보이고 새를 보는 데에도 하나님이 보이며 풍랑이 일어나는 때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눈앞에 보이는 전부가 불만스럽고 그리고 남의 죄만 보이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 큰 병이요, 그렇게 병든 눈은 수술을 해야 하고 다시 고쳐야 합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할 때에 스랍 천사 중 하나가 숯불을 가지고 와서는 이사야의 입을 지져 정하게 하듯이(6 : 5-7)이 눈도 아주 지져서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런 눈을 가지고 살기가 힘듭니다. 보면 볼수록 좋은 것도 많은데 하필이면 왜 자꾸 그런 것만 보이는가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의 기도 제목이 하나님이여 나의 눈을 고쳐 주시옵소서! 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저의 눈에는 어둡고 이상한 것들만 자꾸 보이는데 제발 이런 것이 보이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는 그런 기도 말입니다. 미국에 계시는 어느 목사님 한 분이 중공에 선교를 하러 가면서 성경책을 가지고 가는데 자그마치 그 무게가 91kg이나 되는 200권의 성경책을 가지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중공은 성경책이라면 단 한 권만 가지고 가다가 발각되어도 큰일이 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사흘 동안 금식을 하면서 무사히 들어갈 수 있도록, 검사하는 세관원의 눈을 잠깐만 멀게 해서 이것이 좀 보이지 않게 해 달라며 간절히 기도를 하고 출발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항에 도착하여 그 자리에 서게 되었는데 "이게 뭐요?"하고 묻고서는 이 목사님이 이것, 저것이라며 대충 대답하니까 더 살펴보지도 않고 그냥 "가세요"하고 보내 주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아멘하고 들어가서 성경책 200권을 무사히 전달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자니 얼마나 긴장을 하셨든지 돌아와서는 몹시 앓았다며 저에게 상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이란 보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마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이 곧잘 보이거든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면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이제 교도서에 가보면 8, 9범되는 절도범들이 들어와 있는데 그들에게 "한두 번 들어 왔으면 되었지 여덟 번, 아홉 번씩이나 왜 들어오느냐?"고 물어보면 그들의 하는 대답이 교도소에서 출감할 때에는 이제 다시는 도둑질하지 않으리라며 맹세하고 나가는데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남의 주머니에 있는 돈이 환하게 보인답니다. 뿐만 아니라 담장 너머 집안 깊숙이에 있는 것까지도 환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병은 눈이 병이지요. 우리는 자신이 둔 것도 못 찾을 정도인데 다른 사람이 깊이 감추어 둔 것까지 찾아낸다니 이것은 아무래도 보통 사람은 아니란 말입니다.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네 눈을 수술하라! 네 눈이 먼저 깨끗해져서 밝히 본 다음에, 그리고 이야기하자는 것입니다. 이는 곧 무엇을 뜻하는 말씀이겠습니까? 이제는 진정 겸손과 사랑과 진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중생한 눈을 가지고 사랑으로 보고, 겸손과 진실로 보게 될 때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정확하게 볼 수가 있으며 나아가서는 그 티를 빼라는 권면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권면의 말도 받아들일 수가 있어서 둘 다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너희가 남을 비판하면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남을 헤아리면 너희는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 편에서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어느 누구를 비판할 것이 있습니까? 그 만큼 내가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와 똑같은 비판이 내게도 올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5 : 7). 따라서 내가 용서하면 용서를 받을 것이요, 사랑하면 사랑을 받을 것이며, 남을 불쌍히 여기면 나 또한 불쌍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적 비판의 자세는 나와 그 서로를 하나님 앞에 밝히 세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형제"라고 하는 이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남이 아닌 형제를 보는 참사랑의 마음, 사랑의 눈에는 아마도 그 작은 티는 보이지를 않을 것입니다. 진정 그렇게 된다면 그 후에는 우리도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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