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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경을 평탄케 하라(누가복음 3장 1절~6절)

by 【고동엽】 2023.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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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경을 평탄케 하라(누가복음 316)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는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선지자 이사야의 책을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몇 달 전, 특별한 기회를 얻어서 북한을 방문했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명산 금강산을 가볼 수가 있었습니다마는, 정작 가보고 싶었던 곳은 제가 태어난 고향이었습니다. 1951년 정월 고향을 떠나오던 날, 높은 산을 넘으면서 뒤돌아 내려다본 마을은 온통 붉은 빛이었습니다. 집이며 교회며 할 것 없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울면서 산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불타 버린 교회가 다시 세워졌을 리는 만무하지만 하다못해 그 터라도 다시 한번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평생을 그 예배당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배당이 불타버린 다음에도 그 빈터에서 아침저녁으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어느 날인가 밤새 눈이 하얗게 내린 날, 가마니때기 한 장을 덮어쓰신 채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날이 밝은 아침에 눈을 털고 일어나시는 것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평생 엎드려 기도하시던 그 빈터를 다시 한번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비록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그 예배당 터를 보고자 하는 것이 북한을 방문하는 저의 작은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북한으로 들어가기 전, 북쪽 사람들과 북경에서 만나 일정을 논의하면서 꼭 고향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저들도 그르겠다고 저와 단단히 약속을 했습니다마는, 막상 평양에 도착하니 느닷없이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갈 수 있는가 알아보려고 선발대를 보내보았다고 합니다. 벤츠 자동차로 가는데 길이 너무 험해서 그만 엔진 밑에 있는 트렁크가 터져 기름이 다 빠져버렸다고 합니다. 하는 수없이 5시간을 걸어서 동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면서 길이 잘 닦아지면 다음에 오실 때에 꼭 방문하게 하겠다고 합디다. 결국 못 가보고 말았습니다. 대신 그곳에 살고 있는 조카들을 평양으로 불러서 만나보았습니다. 제가 온다고 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평양으로 올라오라는 전갈을 받고 왔다고 하는 것을 보니 거짓말이 아닌 것 같기는 합니다. 결국에는 길 때문에 그토록 그리던 고향을 못 가고 말았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제아무리 자동차가 좋고 목적지가 확실해도 길이 없으면 못 간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함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길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아스팔트 위를 달리다가 비포장도로를 가느라면 덜컹거려서 참 힘이 듭니다. 탄탄한 포장도로가 편하고 좋은 것입니다. 길은 중요합니다. 길이 있고야 어디든지 자유롭게 갈 수가 있습니다. 옛날 대로마제국이 세계를 점령해 들어갈 때에도 길부터 닦았다고 합니다. 실크로드(Silk Road)도 그렇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길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길이 없으면 어떠한 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역사의 대역(大役)도 길과 함께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옛날 왕에게는 '왕의 길'이 따로 있었습니다. 왕이 행차하게 되면 먼저 길을 예비해야만 했습니다. 왕의 권세에 합당한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대로마제국이 닦아놓은 길을 가보면 양쪽으로 소나무가 열을 지어 서 있습니다. 노면도 지금의 아스팔트처럼 매끈하지는 않지만 큰돌을 깎아서 주욱 깔아놓았습니다. 얼마나 튼튼하게 잘 닦아놓았는지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4)"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집니다.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길, '어서 오십시오'하고 환영하는, 영접하는 마음가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격과 인격의 만남에서 마음을 활짝 열고 '어서 오십시오'하고 맞이할 때에 모든 아름다운 일들이 이루어집니다. 마음의 길이 준비되지 않으면 어떠한 일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본문에 세례 요한의 말씀이 있습니다. '메시야가 왔도다. 회개하고 주의 길을 예비하라' 주님을 영접하라고 그는 광야에서 부르짖습니다.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합니다. '회개'라고 하는 말에는 마음을 돌린다, 뒤로 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 돌려놓고 새로 임하는 주권을 영접하라, 새로 임하는 왕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주의 길'은 헬라 원문에서 '덴 호돈 큐리우'입니다. 왕도(王道)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어 본문은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4)"고 말씀합니다.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 길을 곧게 만들라, 구불구불한 것을 곧게, 높고 낮은 것을 평탄케 하라'는 말씀입니다. 편하게 쉽게 빨리 오실 수 있도록, 왕이 그의 주권을 자유롭게 행사하실 수 있도록 너의 마음을 열라, 영접할 마음의 자세를 가져라----뜻을 오시는 분께로 온전히 향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활짝 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강철왕' 카네기(Carnegie. A)를 잘 아실 것입니다.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연구해 볼만한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이 유명한 사업가도 28세까지 세일즈맨이었다고 합니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터라 이집 저집 찾아다니면서 물건을 팔아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습니다. 간혹 환영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대개가 귀찮아합니다. 문전박대를 무릅쓰고 다니기는 하지만, 때로 '내가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다니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살아가야만 하는가'하는 자책감과 후회가 생깁니다. 실의에 빠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이 혼자 사는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응접실에 들어서니 벽에 걸린 그림 한 점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썰물 때라서 물이 다 빠져나간 넓은 해변가의 모래언덕에 낡은 배 한 척이 기대어 서 있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 더욱이 그림 아래 적혀 있는 글귀가 그를 또 한번 놀라게 합니다. '밀물 때가 있음을 생각하라.' 이 글귀에 그는 충격을 받고 다시 용기를 냅니다. 지금은 물이 다 빠져나가 모래언덕에 기대어 서 있지만, 다시 물이 밀려들어오면 배를 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 그림이 썩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농반진반으로 노인에게 간청합니다. "죄송하오나 노인장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에 저 그림을 제게 주십시오." 그러자 노인은 그럴 테니 주소나 적어두고 가라고 하더랍니다. 마침내 그는 노인으로부터 그 그림을 받았습니다. 그는 평생 그 그림을 아주 소중히 여겼습니다. 사업가로 크게 성공해서도 중요한 자리에 그 그림을 걸어놓고 젊은 후배들에게 교훈 하였다고 합니다. '밀물 때가 있음을 생각하라.' 썰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밀물 때가 있습니다. 소용없이 내어버린 낡은 배로 보일는지 모르나, 물이 밀려들어오면 항해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준비'입니다. 사건 이전에 먼저 생각하는 것이 준비입니다. 늙고 나서 늙음을 생각하는 것은 준비가 아닙니다. 젊을 때에 늙을 때를 생각하는 것이요, 여름에 겨울을 생각하는 것이 준비입니다. 생각을 미리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있을 일을 먼저 생각하고 그 미래에 사는 것입니다. 미래를 위하여 준비합니다. 이것을 지혜라고도 하고 때로 믿음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차원의 소망이요 하늘로부터 임하는 한줄기 빛입니다.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시간이요 재창조의 역사가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역사는 조용하게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시작됩니다. 아기가 태어났으니 자랄 것이요, 메시야가 나타났으니 이제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는 앞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2천 년 전인 그 당시로 돌아가서 생각해봅시다. 'Pax Romana'----로마의 지배에 의한 평화, 곧 로마가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할 때입니다. 세계는 공동묘지처럼 조용합니다. 로마의 무력이 워낙 강하여 어느 민족도 찍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억압적 평화입니다. 식민지나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억압과 고통일 뿐입니다. 부자유와 약탈 가운데의 고요함이었습니다. 유대도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그것을 알게 됩니다. '분봉왕'이라는 말이 유대가 로마의 점령 하에 있음을 나타내줍니다. 로마는 점령국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나라를 여럿으로 나누어 각각 분봉왕을 두었습니다. 한 민족이 사분 오열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다보니 자연히 종교계까지도 타락하고 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바, 대제사장은 종신직이요 세습되어야 합니다. 또한 두 명의 대제사장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사람들은 대제사장에게 주어지는 권력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알고, 이를 분산시키기 위하여 로마 황제로 하여금 유대의 종교지도자 대제사장을 임명케 합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주전 37년부터 주후 26년의 63년 동안 무려 28번이나 대제사장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종교계가 타락할 수밖에요.

본문에 대제사장 안나스가 나옵니다. 그는 주후 7년부터 14년까지 대제사장에 봉직했습니다마는, 이후 부득불 다른 사람을 임명해야 했기에 아들 넷을 임명했다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다시 사위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정신적으로는 안나스가, 실제적으로는 가야바가 대제사장입니다. 그래서 보면 예수님을 체포하고도 먼저 안나스에게 끌고갔다가 후에 가야바에게로, 다시 헤롯에게 갔다가 빌라도에게 가지 않습니까? 이것이 당시 종교계의 타락을 말해주는 한 단면입니다. 세속화하였을 뿐더러 심지어 정치와 야합을 합니다. 교회에는 깨끗함과 거룩함이 다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혼란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집니다. 역사학자들은 당시를 가리켜 '정치경제문화 할것없이 모든 면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혼란한 암흑시대였다'고 합니다. 그런 때에 복음이 전해집니다. 빈 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합니다. 본문의 '광야'라는 말은 다분히 상징적입니다. 정말로 넓은 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겠으나, 당시의 세상이 광야 그 자체였습니다. 이제 그 광야 같은 세상에 복음이 전해집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메시야가 왔으니 회개하고 마음을 돌이켜 주를 영접하라'----회개의 복음을 외치고 다닙니다. 그 방법으로 첩경을 평탄케 하라고 말씀합니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은 세 번 오신다고 말합니다. 세 가지 모양으로 오신다는 말입니다. 첫째는 초림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십니다. 선지자들의 오랜 예언대로, 그 예표적 말씀대로 이제 실제적으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인격으로 오신 말씀입니다. 둘째는 심판 주로 재림하십니다. 역사의 끝에 만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영광 중에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종말론적으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셋째는 이미 말씀으로 오셔서 역사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성령과 말씀이 그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설교를 통하여 말씀을 듣고, 성경을 통하여 말씀을 읽고, 기도 중에 성령으로 말씀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과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영접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 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 네 가지를 버려야 첩경을 곧게 하고 평탄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는바, 그 네 가지가 무엇인지 보십시다.

첫째로, 골짜기를 메우라 합니다. 요즘 들어 전에 없던 유행어가 하나 있습니다. '골이 깊다'는 말입니다. 불신의 골이 깊다느니 피해의식의 골이 깊다느니 하는 말을 곧잘 듣습니다. 아예 골짜기가 되어버렸다는 것이지요. 상처 입은 심령, 배신당한 자의 아픈 마음, 실패의 경험으로 인한 깊은 상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절망과 실의에서 다시 올라오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종종 신문이나 방송에서 징용이니 정신대니 하는 문제를 거론하여 일본치하의 기억을 되살려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아주 괴로운 일입니다. 저는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일본말로 공부를 했습니다. 한마디라도 우리말을 하면 매를 맞고 하루종일 벌을 서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는 우리말을 써야 합니다. 어쩌다 일본말이 섞여나오기라도 하면 이번에는 아버지한테 매를 맞습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이래저래 맞기만 합니다. 또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등 강압적인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의 골이 아주 깊습니다. 일본에 가는 것조차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일본 목사님을 만나는 것도 싫습니다. 참 큰일이지요. 사실하자고 들면 일본말을 쉽게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저입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배워서 귀에 익습니다마는, 일부러 안 배웁니다. 이것이 무슨 심사이겠습니까? 골이 너무 깊어서 그렇습니다. 어려서 받은 상처가 너무나 크기에 좋은 마음을 가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 골이 메워져야 합니다.

개인적이건 사회적이건 민족적이건 더는 과거를 묻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깊은 골을 다시는 떠올리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이야기를 자꾸 하려들면 주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참 평안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실패의 경험과 아픈 상처를 돌이켜 절망하고 실의에 빠지고 낙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새로운 소망으로, 새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산이 낮아져야 한다고 합니다. 산은 교만과 자랑을 의미합니다. 때로 남 앞에서 명예니 칭찬이니 허세니 하는 것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사람들을 봅니다. 걸핏하면 족보 타령입니다.

 

뼈대있는 집안이라나요? 도대체 뼈대 없어진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나를 높이고, 친척을 높이고, 가문을 높이고, 민족을 높이고----스스로 높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한 주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으면서까지도 그 산을 헐어버리지 못해서 참믿음에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헐어서 깨끗하게 낮추어야 합니다. 지식, 별 볼일 없습니다. 가진 것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높이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높이고 높이다가 마지막 장례식까지 높이는 사람이 있습디다. 기분 나쁩니다. 관 하나에 몇백만 원이라고 하는데, 하도 크게 만들어서 여덟 사람이 들기에도 벅찹니다. 들고 나가느라고 애쓰는 것을 보면 참 부질없는 짓이구나 싶습니다. 시체에도 특별한 시체가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북경에 가면 '13'이라고 하는 데가 있는데 그 중에서 왕릉은 관이 엄청나게 큽니다. 재미있는 것은 왕후의 관은 그보다 좀 작고, 다시 대신들의 관은 왕후의 관보다 작습니다. 신분에 따라 차이를 둔 것입니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그 속의 시체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제는 옷을 깨끗이 벗으십시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겸손한가, 나를 진정 비웠는가만을 생각합시다. 마음속에 고민이 있다면 아직도 산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큰산은 무너졌는지 모르겠으나 아직 야산이 남아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것이 남아 있어서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헐어버리십시오. 깨끗이 헐어버리고 겸손한 자리에 들 때에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굽은 것을 곧게 하라고 합니다. 왜곡되고 비뚤어진 심리는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간혹 방송이나 신문을 보면 글쓰는 분들 가운데 사건을 바로 보지 못하고 꼭 비뚜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봅니다. 언제, 어떤 사건이든지 비뚜로만 봅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이 사람 배냇병신이구나'싶어요.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모르겠으나 만사를 부정적으로 어둡게만 보려 합니다. 스스로도 못할 짓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병에 걸려 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평안도 없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굽어진 것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넷째로, 험한 길을 평탄케 하라고 합니다. 험한 길, 거친 마음입니다. 반항이요 폭력이요 황폐해진 마음입니다. 상처 입은 흔적일랑 이제 깨끗이 지워버리십시다.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새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대로는 주님을 영접하지 못합니다. 온유함과 겸손함,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비로소 주님을 바로 영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의 '골짜기'란 당시의 민중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절망과 실의에 사는 민중, 깊은 골짜기입니다. 메워져야 하겠습니다. ''은 헤롯왕과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명색이 왕이기는 하나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로봇입니다. 로마 총독의 지배를 받는 허수아비 왕이면서도 주님이 오신다고 하자 그 주님을 영접하기는커녕 왕권을 내놓지 않으려고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듭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변변치 않은 왕권일랑 훌렁 벗어버렸으면 좋으련만, 그 잘난 왕권을 지키려고 메시야를 죽여야 했던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굽은 것'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지칭함입니다. 바리새인이요 잘못된 신학사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니고데모에게 중생 하라, 그래야 하나님을 볼 것이라 하셨습니다. '험한 길'이란 여관의 주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말구유 이야기를 들으면 참으로 세상 인심이 야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삭된 여자가 애원을 하는데 마구간으로 내쫓을 수가 있습니까? 돈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험한 마음가짐도 이제는 다 비워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예언이며 약속이며 성취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대로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복음이 되고, 거절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가짐은 어떻습니까? 부디 골을 메우십시오. 산은 깎아서 낮추어야 하겠습니다. 굽은 것은 바로 펴야 하겠고 험한 것은 씻어버리십시다. 그리고 우리함께 주의 길을 예비하십시다.

마음의 첩경을 곧게 하십시다. 그럴 때에 비로소 성탄이 성탄 됩니다. 내 일생을 통하여 처음으로 맞는 참기쁨의 성탄이 될 것입니다.  

첩경을 평탄케 하라(누가복음 316)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는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선지자 이사야의 책을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몇 달 전, 특별한 기회를 얻어서 북한을 방문했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명산 금강산을 가볼 수가 있었습니다마는, 정작 가보고 싶었던 곳은 제가 태어난 고향이었습니다. 1951년 정월 고향을 떠나오던 날, 높은 산을 넘으면서 뒤돌아 내려다본 마을은 온통 붉은 빛이었습니다. 집이며 교회며 할 것 없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울면서 산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불타 버린 교회가 다시 세워졌을 리는 만무하지만 하다못해 그 터라도 다시 한번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평생을 그 예배당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배당이 불타버린 다음에도 그 빈터에서 아침저녁으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어느 날인가 밤새 눈이 하얗게 내린 날, 가마니때기 한 장을 덮어쓰신 채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날이 밝은 아침에 눈을 털고 일어나시는 것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평생 엎드려 기도하시던 그 빈터를 다시 한번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비록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그 예배당 터를 보고자 하는 것이 북한을 방문하는 저의 작은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북한으로 들어가기 전, 북쪽 사람들과 북경에서 만나 일정을 논의하면서 꼭 고향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저들도 그르겠다고 저와 단단히 약속을 했습니다마는, 막상 평양에 도착하니 느닷없이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갈 수 있는가 알아보려고 선발대를 보내보았다고 합니다. 벤츠 자동차로 가는데 길이 너무 험해서 그만 엔진 밑에 있는 트렁크가 터져 기름이 다 빠져버렸다고 합니다. 하는 수없이 5시간을 걸어서 동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면서 길이 잘 닦아지면 다음에 오실 때에 꼭 방문하게 하겠다고 합디다. 결국 못 가보고 말았습니다. 대신 그곳에 살고 있는 조카들을 평양으로 불러서 만나보았습니다. 제가 온다고 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평양으로 올라오라는 전갈을 받고 왔다고 하는 것을 보니 거짓말이 아닌 것 같기는 합니다. 결국에는 길 때문에 그토록 그리던 고향을 못 가고 말았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제아무리 자동차가 좋고 목적지가 확실해도 길이 없으면 못 간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함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길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아스팔트 위를 달리다가 비포장도로를 가느라면 덜컹거려서 참 힘이 듭니다. 탄탄한 포장도로가 편하고 좋은 것입니다. 길은 중요합니다. 길이 있고야 어디든지 자유롭게 갈 수가 있습니다. 옛날 대로마제국이 세계를 점령해 들어갈 때에도 길부터 닦았다고 합니다. 실크로드(Silk Road)도 그렇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길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길이 없으면 어떠한 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역사의 대역(大役)도 길과 함께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옛날 왕에게는 '왕의 길'이 따로 있었습니다. 왕이 행차하게 되면 먼저 길을 예비해야만 했습니다. 왕의 권세에 합당한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대로마제국이 닦아놓은 길을 가보면 양쪽으로 소나무가 열을 지어 서 있습니다. 노면도 지금의 아스팔트처럼 매끈하지는 않지만 큰돌을 깎아서 주욱 깔아놓았습니다. 얼마나 튼튼하게 잘 닦아놓았는지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4)"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집니다.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길, '어서 오십시오'하고 환영하는, 영접하는 마음가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격과 인격의 만남에서 마음을 활짝 열고 '어서 오십시오'하고 맞이할 때에 모든 아름다운 일들이 이루어집니다. 마음의 길이 준비되지 않으면 어떠한 일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본문에 세례 요한의 말씀이 있습니다. '메시야가 왔도다. 회개하고 주의 길을 예비하라' 주님을 영접하라고 그는 광야에서 부르짖습니다.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합니다. '회개'라고 하는 말에는 마음을 돌린다, 뒤로 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 돌려놓고 새로 임하는 주권을 영접하라, 새로 임하는 왕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주의 길'은 헬라 원문에서 '덴 호돈 큐리우'입니다. 왕도(王道)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어 본문은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4)"고 말씀합니다.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 길을 곧게 만들라, 구불구불한 것을 곧게, 높고 낮은 것을 평탄케 하라'는 말씀입니다. 편하게 쉽게 빨리 오실 수 있도록, 왕이 그의 주권을 자유롭게 행사하실 수 있도록 너의 마음을 열라, 영접할 마음의 자세를 가져라----뜻을 오시는 분께로 온전히 향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활짝 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강철왕' 카네기(Carnegie. A)를 잘 아실 것입니다.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연구해 볼만한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이 유명한 사업가도 28세까지 세일즈맨이었다고 합니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터라 이집 저집 찾아다니면서 물건을 팔아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습니다. 간혹 환영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대개가 귀찮아합니다. 문전박대를 무릅쓰고 다니기는 하지만, 때로 '내가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다니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살아가야만 하는가'하는 자책감과 후회가 생깁니다. 실의에 빠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이 혼자 사는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응접실에 들어서니 벽에 걸린 그림 한 점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썰물 때라서 물이 다 빠져나간 넓은 해변가의 모래언덕에 낡은 배 한 척이 기대어 서 있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 더욱이 그림 아래 적혀 있는 글귀가 그를 또 한번 놀라게 합니다. '밀물 때가 있음을 생각하라.' 이 글귀에 그는 충격을 받고 다시 용기를 냅니다. 지금은 물이 다 빠져나가 모래언덕에 기대어 서 있지만, 다시 물이 밀려들어오면 배를 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 그림이 썩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농반진반으로 노인에게 간청합니다. "죄송하오나 노인장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에 저 그림을 제게 주십시오." 그러자 노인은 그럴 테니 주소나 적어두고 가라고 하더랍니다. 마침내 그는 노인으로부터 그 그림을 받았습니다. 그는 평생 그 그림을 아주 소중히 여겼습니다. 사업가로 크게 성공해서도 중요한 자리에 그 그림을 걸어놓고 젊은 후배들에게 교훈 하였다고 합니다. '밀물 때가 있음을 생각하라.' 썰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밀물 때가 있습니다. 소용없이 내어버린 낡은 배로 보일는지 모르나, 물이 밀려들어오면 항해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준비'입니다. 사건 이전에 먼저 생각하는 것이 준비입니다. 늙고 나서 늙음을 생각하는 것은 준비가 아닙니다. 젊을 때에 늙을 때를 생각하는 것이요, 여름에 겨울을 생각하는 것이 준비입니다. 생각을 미리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있을 일을 먼저 생각하고 그 미래에 사는 것입니다. 미래를 위하여 준비합니다. 이것을 지혜라고도 하고 때로 믿음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차원의 소망이요 하늘로부터 임하는 한줄기 빛입니다.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시간이요 재창조의 역사가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역사는 조용하게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시작됩니다. 아기가 태어났으니 자랄 것이요, 메시야가 나타났으니 이제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는 앞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2천 년 전인 그 당시로 돌아가서 생각해봅시다. 'Pax Romana'----로마의 지배에 의한 평화, 곧 로마가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할 때입니다. 세계는 공동묘지처럼 조용합니다. 로마의 무력이 워낙 강하여 어느 민족도 찍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억압적 평화입니다. 식민지나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억압과 고통일 뿐입니다. 부자유와 약탈 가운데의 고요함이었습니다. 유대도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그것을 알게 됩니다. '분봉왕'이라는 말이 유대가 로마의 점령 하에 있음을 나타내줍니다. 로마는 점령국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나라를 여럿으로 나누어 각각 분봉왕을 두었습니다. 한 민족이 사분 오열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다보니 자연히 종교계까지도 타락하고 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바, 대제사장은 종신직이요 세습되어야 합니다. 또한 두 명의 대제사장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사람들은 대제사장에게 주어지는 권력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알고, 이를 분산시키기 위하여 로마 황제로 하여금 유대의 종교지도자 대제사장을 임명케 합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주전 37년부터 주후 26년의 63년 동안 무려 28번이나 대제사장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종교계가 타락할 수밖에요.

본문에 대제사장 안나스가 나옵니다. 그는 주후 7년부터 14년까지 대제사장에 봉직했습니다마는, 이후 부득불 다른 사람을 임명해야 했기에 아들 넷을 임명했다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다시 사위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정신적으로는 안나스가, 실제적으로는 가야바가 대제사장입니다. 그래서 보면 예수님을 체포하고도 먼저 안나스에게 끌고갔다가 후에 가야바에게로, 다시 헤롯에게 갔다가 빌라도에게 가지 않습니까? 이것이 당시 종교계의 타락을 말해주는 한 단면입니다. 세속화하였을 뿐더러 심지어 정치와 야합을 합니다. 교회에는 깨끗함과 거룩함이 다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혼란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집니다. 역사학자들은 당시를 가리켜 '정치경제문화 할것없이 모든 면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혼란한 암흑시대였다'고 합니다. 그런 때에 복음이 전해집니다. 빈 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합니다. 본문의 '광야'라는 말은 다분히 상징적입니다. 정말로 넓은 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겠으나, 당시의 세상이 광야 그 자체였습니다. 이제 그 광야 같은 세상에 복음이 전해집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메시야가 왔으니 회개하고 마음을 돌이켜 주를 영접하라'----회개의 복음을 외치고 다닙니다. 그 방법으로 첩경을 평탄케 하라고 말씀합니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은 세 번 오신다고 말합니다. 세 가지 모양으로 오신다는 말입니다. 첫째는 초림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십니다. 선지자들의 오랜 예언대로, 그 예표적 말씀대로 이제 실제적으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인격으로 오신 말씀입니다. 둘째는 심판 주로 재림하십니다. 역사의 끝에 만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영광 중에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종말론적으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셋째는 이미 말씀으로 오셔서 역사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성령과 말씀이 그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설교를 통하여 말씀을 듣고, 성경을 통하여 말씀을 읽고, 기도 중에 성령으로 말씀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과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영접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 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 네 가지를 버려야 첩경을 곧게 하고 평탄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는바, 그 네 가지가 무엇인지 보십시다.

첫째로, 골짜기를 메우라 합니다. 요즘 들어 전에 없던 유행어가 하나 있습니다. '골이 깊다'는 말입니다. 불신의 골이 깊다느니 피해의식의 골이 깊다느니 하는 말을 곧잘 듣습니다. 아예 골짜기가 되어버렸다는 것이지요. 상처 입은 심령, 배신당한 자의 아픈 마음, 실패의 경험으로 인한 깊은 상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절망과 실의에서 다시 올라오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종종 신문이나 방송에서 징용이니 정신대니 하는 문제를 거론하여 일본치하의 기억을 되살려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아주 괴로운 일입니다. 저는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일본말로 공부를 했습니다. 한마디라도 우리말을 하면 매를 맞고 하루종일 벌을 서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는 우리말을 써야 합니다. 어쩌다 일본말이 섞여나오기라도 하면 이번에는 아버지한테 매를 맞습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이래저래 맞기만 합니다. 또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등 강압적인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의 골이 아주 깊습니다. 일본에 가는 것조차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일본 목사님을 만나는 것도 싫습니다. 참 큰일이지요. 사실하자고 들면 일본말을 쉽게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저입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배워서 귀에 익습니다마는, 일부러 안 배웁니다. 이것이 무슨 심사이겠습니까? 골이 너무 깊어서 그렇습니다. 어려서 받은 상처가 너무나 크기에 좋은 마음을 가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 골이 메워져야 합니다.

개인적이건 사회적이건 민족적이건 더는 과거를 묻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깊은 골을 다시는 떠올리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이야기를 자꾸 하려들면 주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참 평안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실패의 경험과 아픈 상처를 돌이켜 절망하고 실의에 빠지고 낙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새로운 소망으로, 새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산이 낮아져야 한다고 합니다. 산은 교만과 자랑을 의미합니다. 때로 남 앞에서 명예니 칭찬이니 허세니 하는 것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사람들을 봅니다. 걸핏하면 족보 타령입니다.

 

뼈대있는 집안이라나요? 도대체 뼈대 없어진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나를 높이고, 친척을 높이고, 가문을 높이고, 민족을 높이고----스스로 높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한 주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으면서까지도 그 산을 헐어버리지 못해서 참믿음에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헐어서 깨끗하게 낮추어야 합니다. 지식, 별 볼일 없습니다. 가진 것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높이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높이고 높이다가 마지막 장례식까지 높이는 사람이 있습디다. 기분 나쁩니다. 관 하나에 몇백만 원이라고 하는데, 하도 크게 만들어서 여덟 사람이 들기에도 벅찹니다. 들고 나가느라고 애쓰는 것을 보면 참 부질없는 짓이구나 싶습니다. 시체에도 특별한 시체가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북경에 가면 '13'이라고 하는 데가 있는데 그 중에서 왕릉은 관이 엄청나게 큽니다. 재미있는 것은 왕후의 관은 그보다 좀 작고, 다시 대신들의 관은 왕후의 관보다 작습니다. 신분에 따라 차이를 둔 것입니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그 속의 시체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제는 옷을 깨끗이 벗으십시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겸손한가, 나를 진정 비웠는가만을 생각합시다. 마음속에 고민이 있다면 아직도 산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큰산은 무너졌는지 모르겠으나 아직 야산이 남아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것이 남아 있어서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헐어버리십시오. 깨끗이 헐어버리고 겸손한 자리에 들 때에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굽은 것을 곧게 하라고 합니다. 왜곡되고 비뚤어진 심리는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간혹 방송이나 신문을 보면 글쓰는 분들 가운데 사건을 바로 보지 못하고 꼭 비뚜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봅니다. 언제, 어떤 사건이든지 비뚜로만 봅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이 사람 배냇병신이구나'싶어요.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모르겠으나 만사를 부정적으로 어둡게만 보려 합니다. 스스로도 못할 짓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병에 걸려 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평안도 없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굽어진 것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넷째로, 험한 길을 평탄케 하라고 합니다. 험한 길, 거친 마음입니다. 반항이요 폭력이요 황폐해진 마음입니다. 상처 입은 흔적일랑 이제 깨끗이 지워버리십시다.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새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대로는 주님을 영접하지 못합니다. 온유함과 겸손함,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비로소 주님을 바로 영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의 '골짜기'란 당시의 민중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절망과 실의에 사는 민중, 깊은 골짜기입니다. 메워져야 하겠습니다. ''은 헤롯왕과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명색이 왕이기는 하나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로봇입니다. 로마 총독의 지배를 받는 허수아비 왕이면서도 주님이 오신다고 하자 그 주님을 영접하기는커녕 왕권을 내놓지 않으려고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듭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변변치 않은 왕권일랑 훌렁 벗어버렸으면 좋으련만, 그 잘난 왕권을 지키려고 메시야를 죽여야 했던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굽은 것'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지칭함입니다. 바리새인이요 잘못된 신학사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니고데모에게 중생 하라, 그래야 하나님을 볼 것이라 하셨습니다. '험한 길'이란 여관의 주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말구유 이야기를 들으면 참으로 세상 인심이 야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삭된 여자가 애원을 하는데 마구간으로 내쫓을 수가 있습니까? 돈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험한 마음가짐도 이제는 다 비워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예언이며 약속이며 성취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대로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복음이 되고, 거절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가짐은 어떻습니까? 부디 골을 메우십시오. 산은 깎아서 낮추어야 하겠습니다. 굽은 것은 바로 펴야 하겠고 험한 것은 씻어버리십시다. 그리고 우리함께 주의 길을 예비하십시다.

마음의 첩경을 곧게 하십시다. 그럴 때에 비로소 성탄이 성탄 됩니다. 내 일생을 통하여 처음으로 맞는 참기쁨의 성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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