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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께 부탁한 사람(사도행전 20:26~38)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파하였음이라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줄을 내가 아노니……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본문말씀 32절에 "말씀께 부탁하노니"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위험한 길입니다. 또 그가 생각하기에 마지막으로 가는 길입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계획입니다.
핍박이 있어서 순교를 하게 되면 그래서 못 돌아오는 것이고, 핍박이 없어서 가능하면 로마로 가는 것이고, 나아가 서바나까지 갈 그런 계획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서 그들에게 목회서 신적인, 혹은 목회적인 교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목회적 교훈이요, 동시에 유언적 교훈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그들을 통하여 교회를 섬기고 다스리면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을 가르쳐주는 목회적 교훈이라고 볼 수 있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보면 크게 두 가지로 성격이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자기 천명입니다. 그 다음에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했다, 나는 이렇게 했다, 너희들이 아는 바와 같이 나는 이렇게 3년 동안 너희들을 위해서 일해 왔다 하는 이야기가 있고 나서 당부의 말씀, 부탁의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자기 천명을 봅시다. 20장 20절과 27절에서 같은 말씀을 합니다. '꺼림이 없이' 복음을 전했다 하는 말씀입니다. 거리낌없이―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어디에를 가나 핍박이 있었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고, 주님이 함께 하시고, 말씀의 능력이 함께 하고, 성령이 충만한 역사인데 어째서 가는 곳마다 핍박이 있었느냐 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찌 생각하면 핍박이 없어야 될 것 같아요. 없어야 복음이 전파될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요.
사도들의 때부터 오늘까지 2천 년 동안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늘 핍박이 있어요. 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밖으로도 있고, 안으로도 있어요. 항상 핍박이 있어요. 중요한 것은 핍박 속에서 전도자가 강해집니다. 핍박 가운데서 전도자의 믿음이 확실해집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전도자의 믿음이 종말론적 신앙으로 화합니다. 그래서 순수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또하나는 핍박이 있는 중에 복음의 전파가 가능해집니다. 평안한 가운데서 웅변적으로 능란하게 설교를 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요, 핍박당하는 것을 보면서 그 복음을 위하여 얼마나 희생을 하고, 얼마나 생명을 바치는지, 이것을 보면서 복음의 복음성, 나아가서는 부활생명의 진리성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믿기에 죽기를 개의치 않습니다. 이 진리가 확실하기 때문에 어떤 고난도 무릅씁니다. 핍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희생을 보면서야 복음을 받아들였어요. 말을 잘해서 받아들인 게 아닙니다. 핍박을 통해서, 그것을 보고 비로소 저들은 마음 문을 열게 됩니다. 곧 핍박 속에서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명심할 것은 핍박 속에서 당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핍박은 여러 가지입니다. 유대사람들의 간계도 있고, 물리적인 것도 있고, 교리적인 것도 있고, 신앙적인 것도 있습니다. 갖은 방법으로 핍박이 있었으나 이 모든 핍박 중에서 사도 바울은 거리낌없이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합니다.
당당해야 됩니다. 핍박으로 인해서 약해지던가 혹은 그 생각이 무너지던가 혹은 조금이라도 위축이 된다면 복음이 전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꺼림이 없이' 복음을 전했다고. 사리사욕이 없었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무슨 인간적인 욕망이 있었다거나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인간적인 나약성을 극복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꼭 마음에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외적인 핍박으로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나약성 때문입니다.
누가 나를 비난할 때에는 '그렇지, 비난받을만하지'하고 생각해요. 또 누가 나를 비방하면 '그래, 나 같은 사람이 복음 전한다는 게 잘못된 거지'하고 자기의 부족함을 생각해요. 이런 일 저런 일 생각하면서 약해지기 쉽습니다. 자기 나약성, 자기 부족,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복음 전할 수 없어요. 가끔 어떤 분들 그런 얘기를 해요. 예수 믿은 지 꽤 오래됐지마는 한번도 예수 믿으라는 말 못해봤대요. 왜요? 나도 신통하게 못 믿으니까. 내가 이 처지인데 누구에게 복음 전하겠느냐 그 말이지요. 그러면 언제 복음 전하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두고봐도 나아질 것 같지 않은데.
잊지 말 것입니다. 누구든 복음 전하는 자가 자기 나약성부터 극복해야 합니다. 내가 부족해요. 그래도 복음 전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내가 생각하는 만큼, 기대하는 것만큼 확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지 못해요. 그래도 복음 전해야 돼요. 이 점이 중요합니다. 그래 사도바울은 거리끼지 않고, 모든 것을 내가 극복하고 복음 전했노라 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베드로같이 불학무식해도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불학무식한 사람들이 거리낌없이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신앙적 용기를 말씀함입니다. '너희 가운데 거리낌없이 용기 있게 복음을 전했다'―이것이 사도 바울의 천명 제1호입니다. 두 번째로 그는 스스로 깨끗하다고 말씀합니다. 핍박을 당해도 깨끗하다―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엄격히 구별해서 정말로 확실한 순교가 몇 가지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치적인 것, 인간의 실수, 도덕적인 것, 다 관련돼 있어요. 깨끗하기가 참 어려워요. 핍박을 당하면서 깨끗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북한에서 어느 목사님 한 분이 남쪽으로 탈출해올 때에 심부름을 해드린 일이 있어요. 제가 사십 리 길을 자전거 타고 가서 그 목사님을 모시고, 사십 리 길을 다시 돌아와 우리 집에서 하룻밤 모시고 새벽에 바닷가까지 모셔다드려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왔어요. 그랬는데, 제가 지금도 고생한 기억을 하는 것이 뭐냐하면 갈 때는 무사했는데 올 때는 자전거가 펑크나서 고생을 한 일입니다. 남쪽으로 보내드리려고 할 때에 그 목사님이 솔밭 사이에 서서 울면서 하신 말씀이 있어 제가 지금도 기억해요. "이 늙은 사람이 이렇게 도망갈 필요가 없는데…… 그냥 끌려가서 순교해도 좋겠는데…… 그랬으면 참 좋겠는데…… 다 살았으니 깨끗하게 순교했으면 좋겠는데……" 저들이 내세우는 구실인즉 이분이 예수 믿는다고 잡은 것이 아니라 남쪽에 먼저와 있는 두 아들과 내통한다는 구실을 붙여 잡아가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래서 내가 잡혀갈 수가 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내가 이렇듯 비겁하게 도망을 간다네." 순수하게 예수 이름으로 고난을 당한다면야 why not이지요. 기꺼이 당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못해요.
절반은 예수의 이름으로, 절반은 내게 하자가 있어서…… 이래저래 엉켜 있다는 말이예요. 깨끗하기가 어려워요.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깨끗하다, 나는 핍박을 당하지만 깨끗하다―참으로 부러운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씀이지요. 에스겔 3장에서 이 본문의 더 귀한 의미를 찾게 됩니다. 바울도 에스겔 3장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17절로부터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여기에 악한 사람이 있어요. 당연히 망할 일이 있어서 망하는 거예요. 죄 때문에 망하는 거예요. 망할 죄가 있어서 망하는 것입니다 마는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십니다. 가서 전파하라, 복음을 전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전했는데 그래도 믿지 않는다면 "그의 피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지 않겠다"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을 전했는데도 믿지 아니하면 저들은 자기 죄로 죽으려니와 너는 무방하다, 그러나 내가 복음을 전하라 했는데 아니해서 저들이 복음을 한번도 들을 수가 없었다면, 들을 기회를 못 가지고 그대로 죽어버렸다면, 망하게 되었다면, 저들은 자기 죄로 인하여 그렇게 되었지만 그 피 값은 네 손에서 찾으리라, 네가 벌을 면할 수 없으리라 하심입니다. 그래요.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내버려두는 것도 살인이나 같습니다. 간접살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피 값을 찾으리라, 네가 만일에 전도해야 할 사람이 네가 전도하지 아니해서 예수를 믿을 수가 없었다면, 회개할 기회를 찾지 못했다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 피 값은 네게서 찾으리라―무서운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늘 생각을 합니다. 기회 있는 대로, 힘이 다하는 데까지는 저 북녘 땅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 혹은 철의 장막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남한 천지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복음 못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저 북녘 땅에 가보면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한 번도요. 단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해서 못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책임을 누가 지는 것입니까? 우리의 선교적 책임이 막중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말씀합니다. '나는 깨끗하다'라고. 왜요? 3년 동안 에베소에 있으면서 복음을 전했노라, 힘껏 전했노라, 앞으로 에베소가 망하더라도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고로 나는 깨끗하다-그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여러분, 내 친척이든 내 부모든 내 이웃이든, 누구든 간에 내가 아는 사람에게 다 복음을 전하고 최선을 다하세요. 그랬는데도 망하는 것이야 각자의 죄지요. 알 바 없어요. 그러나 나는 깨끗한 것입니다.
얼마전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 생전처음 나와서 예수 믿게 된 분이 있어요. 그분이 하는 말을 듣고 참 괴로웠어요. "제가 조금 일찍 믿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 좋은 예수를 진작 믿었으면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이렇게 아쉬워해요. 그러면서 말합니다. "내 친구 가운데에도 예수 믿는 사람이 많고 직장 동료 중에도 예수 믿는 사람 많습니다.
또 여기저기 이사 다니다보면 이웃 중에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오늘까지 날 보고 정말로 예수 믿으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던 중에 이번에야 바로 문 앞에 사는 이웃사람이 끈질기게 교회 나가보자고 해서 나왔다가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사는 것 같아도, 그리고 그 많은 교인들이 있는데도 그들이 다 벙어리 교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하고, 또 간절히 부탁하고, 정말 단 한 번이라도 교회에 인도하고, 그랬는데도 안 믿는 거야 도리가 없지요. 적어도 나는 깨끗해요. 피에서 깨끗해요. 그러나 만일에 내가 전해야 될 사람이 내가 전하지 아니해서 복음을 듣지 못했다면 그 피값을 내 손에서 찾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7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다 전했다, 최선을 다했다, 3년 동안 전했다―얼마나 귀한 간증입니까? 그리고 35절에 가서 보면 "범사에 본을 보였다"라고 말씀합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다른 의미에서 이것은 '깨끗하다'라는 말씀입니다. 탐심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이렇게 말씀합니다. 탐심이 없었어요.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탐심이라고 하면 꼭 물질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보아하면 흔히들 수고를 하긴 하는데 뭔가 내게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요. 실리를 계산해요. 구제하고 봉사하고 하면서 물질적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칭찬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인기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명예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거예요. 탐심입니다. 이게 안 돌아올 때에 섭섭하다고 해요. 다 탐심입니다.
모름지기 깨끗함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예요. 설교학에 관한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목사가 되어 가지고 10년 동안 아무리 열심히 목회를 해도 교회가 부흥되지를 않아요. 그리고 힘이 들어요. 그래서 나이 많은 선배 목사님을 찾아가 자문을 받습니다. "목사님, 내가 이렇게 정열을 다해서 설교를 하는데도 은혜가 없는지 교회가 부흥되지를 않습니다"하고 고충을 털어놓습니다. 그 선배 목사님이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저 교인들을 어떻게 하면 구원할까 하는 마음으로 설교했는가, 아니면 교인들로부터 설교 잘한다 하는 칭찬을 듣고자 설교했는가?" 질문을 받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후자의 경우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설교 잘한다는 칭찬을 받을까―거기에다 초점을 맞춘 거예요. 그래서 유식하게 굉장하게 해보려고 했어요. 그래서 결국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어떻게 하면 교인들이 알아들을까, 어떻게 하면 교인들에게 은혜가 될까, 어떻게 하면 교인들을 구원할까, 거기다만 목적을 둘 것이요, 나 자신의 인기나,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라고 선배 목사님은 충고해주었어요. 그 충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돌아와 다시 시작을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마침내는 훌륭한 설교가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탐심이 없어야 돼요. 물질, 칭찬-이런 것에다 초점을 맞추면 참 처절해집니다. 비참해집니다.
필경에는 원망 불평으로 끝나게 됩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하나같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제가 늘 말합니다마는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는지 모르겠어요. 무엇 때문에 하는 것입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탐심이 없어야 돼요. 깨끗한 마음으로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또, 자급자족했다고 해요. 쓰는 것을 내가 담당했다는 것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신세를 지든가 폐를 끼치지 않고자 했어요. 무슨 보수를 바란다고 하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그는 몸소 수고를 하여 자급자족하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본을 보인 것입니다. 스스로 일하는 것, 자급자족하는 것, 스스로 수고하는 것, 될 수 있는 대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런 본을 보였다는 말씀입니다.
또 있어요. 그는 주는 자로서 본을 보였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한 가지라도 더 주려고 했습니다. 복음을 주고, 생명을 주고, 은혜를 주고―'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줄 때에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받으면 속박이 됩니다.
줄 때에 자유할 수가 있습니다. 베푸는 자만이 자유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될 수 있는 대로 주려고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전에 인천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주기만 하고 받는 법이 없는 장로님 한 분이 있었어요. 누가 이 장로님을 대접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한 경우에도 언제나 이 장로님이 값을 치르고 맙니다. 같이 식사를 하는 동안에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하고 일어서서는 돈 다 내고 말아요.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가 냅니다. 철저하게 안 받으려고 해요.
참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대접하려고 해도 대접할 수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주는 편에 서지 받는 편에는 절대로 서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는 주는 자로 남고 싶다, 나는 스스로 수고하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겠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는 순수한 희생과 수고가 조금이라도 어떤 일로 인해서 비난을 받든가 손해를 보는 일이 있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소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당부의 말씀이 있습니다. 삼가라고 말씀합니다.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자신을 위하여 삼가라고 말씀합니다. 장로들을 앞에 놓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목회적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삼가고 자기 믿음을 위해서, 혹은 양들을 위해서, 교인들을 위해서 삼가라 합니다. 콜린 윌리암스의 구분에 따르면 교회에 세 가지 모델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적 동기의 교회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하는 믿음, 믿음을 주제로 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는 모세적 교회입니다. 조직과 행정에 치중하는 율법주의적인 의미의 교회입니다. 또 하나는 바울적 동기의 교회입니다. 영적 회심을 바탕으로 한 진실한 교회입니다.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영적 회심을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본문에도 보면 성령이 저희 가운데에 너희를 감독자로 삼고-라 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에 교회는 성령이 세우는 것입니다. 감독자도 성령이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해서 교회가 있고, 감독이 있고, 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확실한 신학이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고로 삼가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까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친교단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본문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래서 세운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래서 교회의 정의를 달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간에 우리가 교회라 하게 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이면 교회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교제하면 교회다-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요. 잘못되었어요. 얼마가 모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예요. 두세 사람이 모여도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살아 역사 하실 때, 거기에 교회가 있는 것이지, 사람 많이 모여서 교제한다고 그것이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계셔서 교회, 그리스도가 세워서 교회, 성령이 역사 하셔서 교회입니다. 성령이 세워서 감독이요 장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을 주시고 사서 세워놓으신 것이 교회다-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런고로 교회를 섬기는 데 있어서 삼가라, 조심하라, 깨어 기도하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당부의 말씀을 하는데 흉한 이리들이 올 것이다 하고 또다시 어려운 역경이 있을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리가 양의 옷을 입고 오겠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이리인데 이것이 들어와서 양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양을 미혹할 것이다 합니다. 열두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모여진 교회에, 그 거룩한 교회 안에 이리와 같은 악한 존재가 들어와서 양들을 해치는 일들이 있을 것이니 '삼가라' 말씀합니다. 세 번째로 그는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3년 동안 훈계한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다시 새롭게 말씀하지 않았어요.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서 아주 강조된 바가 그것입니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3년 동안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새로운 말씀이 없어요. 반복적으로 말씀했어요. 사실 중요한 말씀은 반복되어야 합니다. 밤낮 쉬지 않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간절하게 말씀했고, 진심으로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3년 동안 가르쳤던 것, 저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remind해서 다시 생각하라는 것이예요. 다시 생각해내서 그 말씀 안에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느 분의 유언과도 같아요. 세상 떠나면서 긴 얘기를 합니까? 다만 내가 늘 하던 말을 기억하라고만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항상 하던 말이 있어야 되지요. 밤낮 눈물로 훈계하던 말이 있어야지요. 이것이 있고야 기억하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어느 어머니가 있어 자녀들이 생각해볼 때, 아버지하고 싸우던 것밖에는 기억이 안나요. 여러분은 어떤 인상을 남겨주고 있습니까?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참으로 믿음으로 살고자 애쓰셨다, 눈물로 훈계하셨다, 간절하게 나를 가르치려고 애쓰셨다---이런 것이 기억되어야지요.
정말 기억될만한 그런 간절한 훈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유언 속에서 새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늘 하던 말 기억하라 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런고로 우리가 항상 무슨 말을 하고 살아야 되겠는가를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32절)"합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의 특별한 말씀 신학이 있습니다. 그는 말씀에 충실했습니다. 말씀을 전하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말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말씀을 전하지만, 내가 말씀을 믿을 수도 있고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마지막에는 그렇지 않아요. 말씀이 나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에 한번 들어가 보세요. 깊은 물에 들어가 보면 물이 무릎까지 왔을 때에는 내 마음대로 해요. 내가 마음대로 다닐 수도 있고 헤엄칠 수도 있어요. 가슴까지 와도 헤엄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이제는 내 허우적거림이 별 의미가 없어요. 겨우 떠 있을 정도이고, 물이 가는 데로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처음에는 내가 물을 지배할 수 있었지만 깊은 곳에 들어가면 물이 가는 곳으로 내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내가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어느 선을 넘으면 이젠 말씀이 나를 지배합니다. 말씀의 능력이 내 생각, 내 운명, 내 의지를 다 지배합니다. 그래서 능히 든든히 세우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고로 말씀을 전하라, 말씀만 순종하라, 그리하면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하게 세워줄 것이다, 그리고 기업이 있게 하리라―종말론적 약속입니다.
속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마지막에 이별 장면이 있습니다. 이별할 때에 다른 순서가 없습니다.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기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어요. 함께 기도하고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지는데, 끝에 가서 그를 전송 하니라 했습니다. 그렇게 울기만 하고 붙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예요. 가야 할 길은 가야 돼요. 그런고로 '전송 하니라'합니다. 거기에 기도가 함께 가고 있고, 믿음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말씀께 부탁한 사람(사도행전 20:26~38)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파하였음이라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줄을 내가 아노니……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본문말씀 32절에 "말씀께 부탁하노니"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위험한 길입니다. 또 그가 생각하기에 마지막으로 가는 길입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계획입니다.
핍박이 있어서 순교를 하게 되면 그래서 못 돌아오는 것이고, 핍박이 없어서 가능하면 로마로 가는 것이고, 나아가 서바나까지 갈 그런 계획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서 그들에게 목회서 신적인, 혹은 목회적인 교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목회적 교훈이요, 동시에 유언적 교훈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그들을 통하여 교회를 섬기고 다스리면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을 가르쳐주는 목회적 교훈이라고 볼 수 있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보면 크게 두 가지로 성격이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자기 천명입니다. 그 다음에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했다, 나는 이렇게 했다, 너희들이 아는 바와 같이 나는 이렇게 3년 동안 너희들을 위해서 일해 왔다 하는 이야기가 있고 나서 당부의 말씀, 부탁의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자기 천명을 봅시다. 20장 20절과 27절에서 같은 말씀을 합니다. '꺼림이 없이' 복음을 전했다 하는 말씀입니다. 거리낌없이―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어디에를 가나 핍박이 있었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고, 주님이 함께 하시고, 말씀의 능력이 함께 하고, 성령이 충만한 역사인데 어째서 가는 곳마다 핍박이 있었느냐 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찌 생각하면 핍박이 없어야 될 것 같아요. 없어야 복음이 전파될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요.
사도들의 때부터 오늘까지 2천 년 동안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늘 핍박이 있어요. 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밖으로도 있고, 안으로도 있어요. 항상 핍박이 있어요. 중요한 것은 핍박 속에서 전도자가 강해집니다. 핍박 가운데서 전도자의 믿음이 확실해집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전도자의 믿음이 종말론적 신앙으로 화합니다. 그래서 순수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또하나는 핍박이 있는 중에 복음의 전파가 가능해집니다. 평안한 가운데서 웅변적으로 능란하게 설교를 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요, 핍박당하는 것을 보면서 그 복음을 위하여 얼마나 희생을 하고, 얼마나 생명을 바치는지, 이것을 보면서 복음의 복음성, 나아가서는 부활생명의 진리성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믿기에 죽기를 개의치 않습니다. 이 진리가 확실하기 때문에 어떤 고난도 무릅씁니다. 핍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희생을 보면서야 복음을 받아들였어요. 말을 잘해서 받아들인 게 아닙니다. 핍박을 통해서, 그것을 보고 비로소 저들은 마음 문을 열게 됩니다. 곧 핍박 속에서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명심할 것은 핍박 속에서 당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핍박은 여러 가지입니다. 유대사람들의 간계도 있고, 물리적인 것도 있고, 교리적인 것도 있고, 신앙적인 것도 있습니다. 갖은 방법으로 핍박이 있었으나 이 모든 핍박 중에서 사도 바울은 거리낌없이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합니다.
당당해야 됩니다. 핍박으로 인해서 약해지던가 혹은 그 생각이 무너지던가 혹은 조금이라도 위축이 된다면 복음이 전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꺼림이 없이' 복음을 전했다고. 사리사욕이 없었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무슨 인간적인 욕망이 있었다거나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인간적인 나약성을 극복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꼭 마음에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외적인 핍박으로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나약성 때문입니다.
누가 나를 비난할 때에는 '그렇지, 비난받을만하지'하고 생각해요. 또 누가 나를 비방하면 '그래, 나 같은 사람이 복음 전한다는 게 잘못된 거지'하고 자기의 부족함을 생각해요. 이런 일 저런 일 생각하면서 약해지기 쉽습니다. 자기 나약성, 자기 부족,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복음 전할 수 없어요. 가끔 어떤 분들 그런 얘기를 해요. 예수 믿은 지 꽤 오래됐지마는 한번도 예수 믿으라는 말 못해봤대요. 왜요? 나도 신통하게 못 믿으니까. 내가 이 처지인데 누구에게 복음 전하겠느냐 그 말이지요. 그러면 언제 복음 전하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두고봐도 나아질 것 같지 않은데.
잊지 말 것입니다. 누구든 복음 전하는 자가 자기 나약성부터 극복해야 합니다. 내가 부족해요. 그래도 복음 전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내가 생각하는 만큼, 기대하는 것만큼 확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지 못해요. 그래도 복음 전해야 돼요. 이 점이 중요합니다. 그래 사도바울은 거리끼지 않고, 모든 것을 내가 극복하고 복음 전했노라 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베드로같이 불학무식해도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불학무식한 사람들이 거리낌없이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신앙적 용기를 말씀함입니다. '너희 가운데 거리낌없이 용기 있게 복음을 전했다'―이것이 사도 바울의 천명 제1호입니다. 두 번째로 그는 스스로 깨끗하다고 말씀합니다. 핍박을 당해도 깨끗하다―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엄격히 구별해서 정말로 확실한 순교가 몇 가지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치적인 것, 인간의 실수, 도덕적인 것, 다 관련돼 있어요. 깨끗하기가 참 어려워요. 핍박을 당하면서 깨끗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북한에서 어느 목사님 한 분이 남쪽으로 탈출해올 때에 심부름을 해드린 일이 있어요. 제가 사십 리 길을 자전거 타고 가서 그 목사님을 모시고, 사십 리 길을 다시 돌아와 우리 집에서 하룻밤 모시고 새벽에 바닷가까지 모셔다드려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왔어요. 그랬는데, 제가 지금도 고생한 기억을 하는 것이 뭐냐하면 갈 때는 무사했는데 올 때는 자전거가 펑크나서 고생을 한 일입니다. 남쪽으로 보내드리려고 할 때에 그 목사님이 솔밭 사이에 서서 울면서 하신 말씀이 있어 제가 지금도 기억해요. "이 늙은 사람이 이렇게 도망갈 필요가 없는데…… 그냥 끌려가서 순교해도 좋겠는데…… 그랬으면 참 좋겠는데…… 다 살았으니 깨끗하게 순교했으면 좋겠는데……" 저들이 내세우는 구실인즉 이분이 예수 믿는다고 잡은 것이 아니라 남쪽에 먼저와 있는 두 아들과 내통한다는 구실을 붙여 잡아가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래서 내가 잡혀갈 수가 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내가 이렇듯 비겁하게 도망을 간다네." 순수하게 예수 이름으로 고난을 당한다면야 why not이지요. 기꺼이 당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못해요.
절반은 예수의 이름으로, 절반은 내게 하자가 있어서…… 이래저래 엉켜 있다는 말이예요. 깨끗하기가 어려워요.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깨끗하다, 나는 핍박을 당하지만 깨끗하다―참으로 부러운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씀이지요. 에스겔 3장에서 이 본문의 더 귀한 의미를 찾게 됩니다. 바울도 에스겔 3장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17절로부터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여기에 악한 사람이 있어요. 당연히 망할 일이 있어서 망하는 거예요. 죄 때문에 망하는 거예요. 망할 죄가 있어서 망하는 것입니다 마는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십니다. 가서 전파하라, 복음을 전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전했는데 그래도 믿지 않는다면 "그의 피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지 않겠다"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을 전했는데도 믿지 아니하면 저들은 자기 죄로 죽으려니와 너는 무방하다, 그러나 내가 복음을 전하라 했는데 아니해서 저들이 복음을 한번도 들을 수가 없었다면, 들을 기회를 못 가지고 그대로 죽어버렸다면, 망하게 되었다면, 저들은 자기 죄로 인하여 그렇게 되었지만 그 피 값은 네 손에서 찾으리라, 네가 벌을 면할 수 없으리라 하심입니다. 그래요.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내버려두는 것도 살인이나 같습니다. 간접살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피 값을 찾으리라, 네가 만일에 전도해야 할 사람이 네가 전도하지 아니해서 예수를 믿을 수가 없었다면, 회개할 기회를 찾지 못했다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 피 값은 네게서 찾으리라―무서운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늘 생각을 합니다. 기회 있는 대로, 힘이 다하는 데까지는 저 북녘 땅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 혹은 철의 장막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남한 천지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복음 못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저 북녘 땅에 가보면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한 번도요. 단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해서 못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책임을 누가 지는 것입니까? 우리의 선교적 책임이 막중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말씀합니다. '나는 깨끗하다'라고. 왜요? 3년 동안 에베소에 있으면서 복음을 전했노라, 힘껏 전했노라, 앞으로 에베소가 망하더라도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고로 나는 깨끗하다-그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여러분, 내 친척이든 내 부모든 내 이웃이든, 누구든 간에 내가 아는 사람에게 다 복음을 전하고 최선을 다하세요. 그랬는데도 망하는 것이야 각자의 죄지요. 알 바 없어요. 그러나 나는 깨끗한 것입니다.
얼마전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 생전처음 나와서 예수 믿게 된 분이 있어요. 그분이 하는 말을 듣고 참 괴로웠어요. "제가 조금 일찍 믿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 좋은 예수를 진작 믿었으면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이렇게 아쉬워해요. 그러면서 말합니다. "내 친구 가운데에도 예수 믿는 사람이 많고 직장 동료 중에도 예수 믿는 사람 많습니다.
또 여기저기 이사 다니다보면 이웃 중에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오늘까지 날 보고 정말로 예수 믿으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던 중에 이번에야 바로 문 앞에 사는 이웃사람이 끈질기게 교회 나가보자고 해서 나왔다가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사는 것 같아도, 그리고 그 많은 교인들이 있는데도 그들이 다 벙어리 교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하고, 또 간절히 부탁하고, 정말 단 한 번이라도 교회에 인도하고, 그랬는데도 안 믿는 거야 도리가 없지요. 적어도 나는 깨끗해요. 피에서 깨끗해요. 그러나 만일에 내가 전해야 될 사람이 내가 전하지 아니해서 복음을 듣지 못했다면 그 피값을 내 손에서 찾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7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다 전했다, 최선을 다했다, 3년 동안 전했다―얼마나 귀한 간증입니까? 그리고 35절에 가서 보면 "범사에 본을 보였다"라고 말씀합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다른 의미에서 이것은 '깨끗하다'라는 말씀입니다. 탐심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이렇게 말씀합니다. 탐심이 없었어요.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탐심이라고 하면 꼭 물질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보아하면 흔히들 수고를 하긴 하는데 뭔가 내게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요. 실리를 계산해요. 구제하고 봉사하고 하면서 물질적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칭찬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인기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명예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거예요. 탐심입니다. 이게 안 돌아올 때에 섭섭하다고 해요. 다 탐심입니다.
모름지기 깨끗함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예요. 설교학에 관한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목사가 되어 가지고 10년 동안 아무리 열심히 목회를 해도 교회가 부흥되지를 않아요. 그리고 힘이 들어요. 그래서 나이 많은 선배 목사님을 찾아가 자문을 받습니다. "목사님, 내가 이렇게 정열을 다해서 설교를 하는데도 은혜가 없는지 교회가 부흥되지를 않습니다"하고 고충을 털어놓습니다. 그 선배 목사님이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저 교인들을 어떻게 하면 구원할까 하는 마음으로 설교했는가, 아니면 교인들로부터 설교 잘한다 하는 칭찬을 듣고자 설교했는가?" 질문을 받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후자의 경우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설교 잘한다는 칭찬을 받을까―거기에다 초점을 맞춘 거예요. 그래서 유식하게 굉장하게 해보려고 했어요. 그래서 결국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어떻게 하면 교인들이 알아들을까, 어떻게 하면 교인들에게 은혜가 될까, 어떻게 하면 교인들을 구원할까, 거기다만 목적을 둘 것이요, 나 자신의 인기나,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라고 선배 목사님은 충고해주었어요. 그 충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돌아와 다시 시작을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마침내는 훌륭한 설교가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탐심이 없어야 돼요. 물질, 칭찬-이런 것에다 초점을 맞추면 참 처절해집니다. 비참해집니다.
필경에는 원망 불평으로 끝나게 됩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하나같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제가 늘 말합니다마는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는지 모르겠어요. 무엇 때문에 하는 것입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탐심이 없어야 돼요. 깨끗한 마음으로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또, 자급자족했다고 해요. 쓰는 것을 내가 담당했다는 것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신세를 지든가 폐를 끼치지 않고자 했어요. 무슨 보수를 바란다고 하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그는 몸소 수고를 하여 자급자족하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본을 보인 것입니다. 스스로 일하는 것, 자급자족하는 것, 스스로 수고하는 것, 될 수 있는 대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런 본을 보였다는 말씀입니다.
또 있어요. 그는 주는 자로서 본을 보였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한 가지라도 더 주려고 했습니다. 복음을 주고, 생명을 주고, 은혜를 주고―'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줄 때에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받으면 속박이 됩니다.
줄 때에 자유할 수가 있습니다. 베푸는 자만이 자유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될 수 있는 대로 주려고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전에 인천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주기만 하고 받는 법이 없는 장로님 한 분이 있었어요. 누가 이 장로님을 대접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한 경우에도 언제나 이 장로님이 값을 치르고 맙니다. 같이 식사를 하는 동안에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하고 일어서서는 돈 다 내고 말아요.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가 냅니다. 철저하게 안 받으려고 해요.
참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대접하려고 해도 대접할 수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주는 편에 서지 받는 편에는 절대로 서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는 주는 자로 남고 싶다, 나는 스스로 수고하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겠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는 순수한 희생과 수고가 조금이라도 어떤 일로 인해서 비난을 받든가 손해를 보는 일이 있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소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당부의 말씀이 있습니다. 삼가라고 말씀합니다.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자신을 위하여 삼가라고 말씀합니다. 장로들을 앞에 놓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목회적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삼가고 자기 믿음을 위해서, 혹은 양들을 위해서, 교인들을 위해서 삼가라 합니다. 콜린 윌리암스의 구분에 따르면 교회에 세 가지 모델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적 동기의 교회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하는 믿음, 믿음을 주제로 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는 모세적 교회입니다. 조직과 행정에 치중하는 율법주의적인 의미의 교회입니다. 또 하나는 바울적 동기의 교회입니다. 영적 회심을 바탕으로 한 진실한 교회입니다.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영적 회심을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본문에도 보면 성령이 저희 가운데에 너희를 감독자로 삼고-라 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에 교회는 성령이 세우는 것입니다. 감독자도 성령이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해서 교회가 있고, 감독이 있고, 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확실한 신학이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고로 삼가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까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친교단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본문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래서 세운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래서 교회의 정의를 달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간에 우리가 교회라 하게 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이면 교회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교제하면 교회다-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요. 잘못되었어요. 얼마가 모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예요. 두세 사람이 모여도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살아 역사 하실 때, 거기에 교회가 있는 것이지, 사람 많이 모여서 교제한다고 그것이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계셔서 교회, 그리스도가 세워서 교회, 성령이 역사 하셔서 교회입니다. 성령이 세워서 감독이요 장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을 주시고 사서 세워놓으신 것이 교회다-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런고로 교회를 섬기는 데 있어서 삼가라, 조심하라, 깨어 기도하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당부의 말씀을 하는데 흉한 이리들이 올 것이다 하고 또다시 어려운 역경이 있을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리가 양의 옷을 입고 오겠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이리인데 이것이 들어와서 양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양을 미혹할 것이다 합니다. 열두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모여진 교회에, 그 거룩한 교회 안에 이리와 같은 악한 존재가 들어와서 양들을 해치는 일들이 있을 것이니 '삼가라' 말씀합니다. 세 번째로 그는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3년 동안 훈계한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다시 새롭게 말씀하지 않았어요.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서 아주 강조된 바가 그것입니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3년 동안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새로운 말씀이 없어요. 반복적으로 말씀했어요. 사실 중요한 말씀은 반복되어야 합니다. 밤낮 쉬지 않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간절하게 말씀했고, 진심으로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3년 동안 가르쳤던 것, 저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remind해서 다시 생각하라는 것이예요. 다시 생각해내서 그 말씀 안에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느 분의 유언과도 같아요. 세상 떠나면서 긴 얘기를 합니까? 다만 내가 늘 하던 말을 기억하라고만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항상 하던 말이 있어야 되지요. 밤낮 눈물로 훈계하던 말이 있어야지요. 이것이 있고야 기억하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어느 어머니가 있어 자녀들이 생각해볼 때, 아버지하고 싸우던 것밖에는 기억이 안나요. 여러분은 어떤 인상을 남겨주고 있습니까?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참으로 믿음으로 살고자 애쓰셨다, 눈물로 훈계하셨다, 간절하게 나를 가르치려고 애쓰셨다---이런 것이 기억되어야지요.
정말 기억될만한 그런 간절한 훈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유언 속에서 새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늘 하던 말 기억하라 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런고로 우리가 항상 무슨 말을 하고 살아야 되겠는가를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32절)"합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의 특별한 말씀 신학이 있습니다. 그는 말씀에 충실했습니다. 말씀을 전하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말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말씀을 전하지만, 내가 말씀을 믿을 수도 있고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마지막에는 그렇지 않아요. 말씀이 나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에 한번 들어가 보세요. 깊은 물에 들어가 보면 물이 무릎까지 왔을 때에는 내 마음대로 해요. 내가 마음대로 다닐 수도 있고 헤엄칠 수도 있어요. 가슴까지 와도 헤엄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이제는 내 허우적거림이 별 의미가 없어요. 겨우 떠 있을 정도이고, 물이 가는 데로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처음에는 내가 물을 지배할 수 있었지만 깊은 곳에 들어가면 물이 가는 곳으로 내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내가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어느 선을 넘으면 이젠 말씀이 나를 지배합니다. 말씀의 능력이 내 생각, 내 운명, 내 의지를 다 지배합니다. 그래서 능히 든든히 세우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고로 말씀을 전하라, 말씀만 순종하라, 그리하면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하게 세워줄 것이다, 그리고 기업이 있게 하리라―종말론적 약속입니다.
속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마지막에 이별 장면이 있습니다. 이별할 때에 다른 순서가 없습니다.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기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어요. 함께 기도하고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지는데, 끝에 가서 그를 전송 하니라 했습니다. 그렇게 울기만 하고 붙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예요. 가야 할 길은 가야 돼요. 그런고로 '전송 하니라'합니다. 거기에 기도가 함께 가고 있고, 믿음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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