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선택적 신앙의 증거(사도행전 22:11~21)

by 【고동엽】 2023. 2. 26.
목차로 돌아가기

 

선택적 신앙의 증거(사도행전 22:1121)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리라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본의 아니게 체포당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성난 군중 앞에서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담대하게, 그러나 내심은 부드럽게, 성실하게, 진지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듯 성난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이 한 말씀 듣고 정말 몇 사람이나 회개하게 될는지, 어쩌면 진주를 개한테 던지는 격은 아닌지, 쓸데없는 짓이 아닌지 싶습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가 해야 할 말을 성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기 전에 설교하던 모습이 마음에 역력히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바울에게는 바로 그 시간에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거든요. 그것을 알기에 그는 오늘도 종말론적으로, 종말론적 상황에서 담대하게, 정직하게,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일단 '사실'을 말하면서 설교를 시작합니다. 특별히 자기가 경험한 것을 누누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설교를 가리켜 고백적 설교라고 합니다. 자신의 신앙고백이 거기에 있습니다. 무릇 말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지, 들은 말을 옮길 때처럼 힘없는 말이 없습니다. 더구나 말을 하되, 책에서 읽은 정도를 얘기하면서 어떻게 어떻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다면 이런 말에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요새 '같다'는 말이 많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저런 것 같습니다-맹랑한 말입니다. '같다'라고 말을 할양이면 차라리 집어치우세요. 바쁜 세상에 무엇 하러 그런 말까지 합니까? 저는 권투시합 하는 것을 볼 때, 가끔 진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경기 도중에 선수가 손을 허공으로 내지를 때가 있는데, 그것을 보고 해설자는 "저렇게 손을 내미는 것은 아무 짝에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체중이 실리지 않았거든요"라고 합니다. 백번 옳은 말이지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 한마디 말속에 정말 체중이 실리고, 인격이 실리고, 운명이 실려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이 실려야 합니다. 내 평생 생각하던 진리, 내 생명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신앙고백이 거기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한마디라야 권능이 있습니다. 그냥 어디서들은 얘기, 신문 어느 구석에서 읽은 얘기…… 이런 얘기가 무슨 힘이 있다는 말입니까? 행동에 체중이 실려야 하는 것처럼 말에는 신앙고백이 실리고, 인격이 실려야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마세요. 어쩌다가 한번 생각해본 정도의 얘기가 아니라, 그 말에 내 신앙고백과 운명을 걸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의 설교는 큰 의미의 설교입니다. 신앙고백적 설교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바울의 설교는 간증적 설교입니다. 자기체험이 여기에 있어요. 저는 설교할 때에 여러분의 눈을 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내가 실제로 경험한 것을 얘기할 때에는 여러분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제일 열심히 들어요. 가장 잘 먹혀듭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경험이요, 내 고백이요, 내 간증이니까요. 알겠습니까? 자기경험이란 그렇듯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남의 일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 시간에 오직 '내가 이렇게 듣고, 이렇게 경험했노라'하는 중요한 간증적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본문 14절에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자기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의 주제가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심으로 내가 있다, 라는 선택 교리적 신앙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이 인간적인 일이 아닙니다. 주께서 주도하셔서 된 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이 작품을 이룬 것입니다. 바울, 자기의 선택이 아닙니다.

자기의 지혜도 아닙니다. 자기가 그러하리라고 들은 것도 아닙니다. 심리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 그의 선입관 속에 이런 일이 내재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어떤 심리학자는 프로이트 심리학을 응용해서 이렇게도 설명합니다. 스데반이 죽은 모습을 보고 바울이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죄인이 어떻게 저렇게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죄인을 용서하면서 죽을 수 있단 말이냐?'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죄인이 아니라면 내가 죄인이다, 저 분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수용하신 분이라면 나는 천하에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다' 혹은 '아니다, 스데반 저 사람은 율법을 어겼다, 저 사람이 죽을 죄인이다'이렇게 내적 갈등이 심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갈등에 시달리다가 일이 터지니까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택했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기 좋아 이런 소리하는데, 재주 있게 말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데반이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스데반의 맥락과 사도 바울의 맥락은 전혀 틀립니다. 그런고로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증거 했지만 그가 예수 믿는 것과 사도 바울이 예수 만나는 사건은 잠재의식 속에서 전혀 연결될 수 없는, 맥락이 통하지 않는 관계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이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바울 자신의 기대나 경건과 지식, 이런 것들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곧 하나님의 선택인 것입니다.

또 하나, 선택은 강권적인 것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사실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어요. 성경말씀을 가만히 보세요. 주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며 사도 바울의 길을 딱 막아놓으시고, 심지어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으로 만들어놓으신 다음에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들어가면 네게 와서 이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대로 하라'라고 하십니다. 바울의 의사를 전혀 묻지 않으십니다. 바울에게는 아무런 선택권도 주시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강제적일 수가 있습니까? 그야말로 강권적입니다. 이게 바로 선택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의 그 깊은 신앙에는 선택교리가 있어요. 선택교리, 예정교리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이 깊은 사람은 늘 생각합니다. 내게는 아무 자유가 없다, 어쩌면 나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려고, 바둥바둥 멀리 가려고 애썼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이리 치시고 저리 치시고, 아주 강제로 붙드셔서 오늘의 내가 되게 하셨다, 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인의 바른 고백입니다.

또한 바울은 그저 끌려가듯 순종한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 하셨고, 바울에게는 I have no choice-아무 선택권도 없었습니다. 그저 끌려가기만 했습니다. 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몸도, 생각도, 달리 생각할 여지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바울로서는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시간이었으니까요. 육체적인 생명만이 아니라, 그 정신까지도 완전히 노예상태로 붙들려 있었습니다.

그런고로 예정이나 예견,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물을 겨를도 없었습니다. 반항할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자유는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만 순종한 것뿐이다바울은 이 사실을 군중 앞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이 선택의 교리 안에서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일을 봅시다.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와서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14)"합니다. "너를"-개인적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너를 선택했다 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중요한 사실을 뒤늦게 더 깊이 깨닫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1:15)……" "어머니의 태로부터"-그러니까 의식 이전이요, 내가 지각하기 전에, 공부하기 전에, 깨닫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이미 택하셨다 함입니다. 또 이 선택은 완전히 은혜로운 선택이라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1:4)"-"God chose us in Christ." 유명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 함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딱 한번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그는 선택적 교리를 이렇게 은혜로운 선택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의를 완전히 초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자격도 묻지 않으십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처음부터 나를 택정하셔서 개인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어떤 뜻이 계셔서 나를 이 세상에 나게 하셨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무슨 결정을 내리든 간에 이것이 내가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내정하시고 섭리하신 바에 의해서, 그 큰 섭리 속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하는 중요한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이 선택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명의 문제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것은 어디까지나 사도 바울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선택과 예정은 다른 것인데, 예정은 구원의 문제입니다. 선택은 사명의 문제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바울이라고 하는 선택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뜻 안에 바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존재는 비록 하찮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또 비밀한 말씀입니다만 이 선택에 평가 기준이 전혀 없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확실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12절에서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런 묘한 말씀을 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를 때에 한 것이다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충성과 진실은 있었어요.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충성 하나는 있고 볼일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에 충성한 사람은 그 방향만 확 돌리면 그리스도께 충성할 수 있습니다.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무당하던 사람도 열심히 하던 사람은 예수 믿어도 열심입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저는 아무 것도 안 믿어요"하는 사람은 예수 믿기도 힘듭니다. 뭔가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기 제일 어려운 사람이 누군고 하니, 예수 믿으라고 할 때에 "그럼요, 나가야지요. 예수 믿는 것은 좋은 것이지요"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안나올 사람이예요. 가만히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안 나가는 것은 물론이요, 남도 안나가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좌우간 어딘가 확신이 있고, 열심이 있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예수 믿지 않았지만 율법에 대해서는 충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과, 자기가 아는 경건에 대해서는 생명을 걸만큼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이 점을 보시고 '그것, 쓸만한데? 방향만 돌리면 괜찮겠는데' 하셨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바울이 그 다음부터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기본적인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열심, 진실입니다. 이런 것은 꼭 있어야 합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자격이 있어서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하시고 그 뒤에 자격과 능력을 주십니다. 바울이 지금 무슨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필요한 능력, 필요한 영력, 필요한 권세를 뒤에 주셨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쓰실 때에는 그에게 자격이 있어서 쓰시는 것이 아니라, 우선 붙들어놓고, 훈련을 시키십니다. 필요한 모든 은사를 주십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가 80세에 하나님께 부름 받았지만 이미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다 붙들어놓으시고 다 선택해놓으셨습니다. 먼저 그를 바로의 궁전에 보내어 40년 동안 공부하게 하시고, 광야로 내몰아 40년 동안 목자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훈련시킨 다음에 ', 이제 네 백성을 건져라' 하십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 사실을 모르고 대답합니다. '주께서 저를 부르시지만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어눌한 사람입니다.' 자꾸 이렇게 꼬리를 빼고 뒤로 물러섭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입을 지은 자가 누구뇨, 내가 가라면 갈 것이 아니냐,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다 알 것이 아니냐, 네가 말을 잘 못하니 말 잘하는 네 형님을 동반시켜주마.' 부세요. 그런고로 선택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진 자격이나, 우리가 가진 능력보다 더 앞서 있습니다. 선택이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모저모로 훈련을 시키시고, 능력도 주시고, 그래서 어느 수준까지 도달하게 된 후에 그를 들어 쓰십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좀더 깊이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선택하심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바로 이것을 오늘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21)."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사실이예요. 이방인에게 보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선택하셨어요. 이 사람이 적절하거든요. 어쩌면 그래서 길리기아 다소에서 바울을 태어나게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하게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다 준비해놓으시고, 이 사람을 쓰신 것입니다. 확실히 바울은 높은 지성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욱 소중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지성이 먼저 있은 게 아닙니다. 선택된 자로서 그 지성의 길을 갔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의미가 여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확실한 사명이 있고, 선교지가 있고, 목적지가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울의 생애를 가만히 음미해보세요.

바울은 분명히 이방인에게로 보냄 받았어요. 그런데 그가 유대인에게 전도하려다가 당했어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길 외의 길로 가려고 할 때마다 그는 필요 없는 많은 핍박을 당해야 했습니다. 무릇 제대로 놓일 자리에 놓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마음먹고 이방인에게로만 갔어야지요. 그랬으면 오히려 핍박을 더 적게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가 실패한 일들이 있었다면 전부 유대사람들과의 관계에서였습니다. 이방인과의 관계는 대체로 다 성공적이었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셔서 이방인의 길로 보내시는데도 사도 바울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양심, 유대인을 인도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그 마음에서 항상 떠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는 로마서 9장에서 말씀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3)"-골육친척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온다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간절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이방인에게 전도하면서도 유대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큰 핍박을 초래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사명에 충실했어야 했습니다. 그가 이렇듯 핍박을 받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예루살렘에 머물러 가말리엘 문하에서 유대사람을 상대로 아주 학술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유대사람과는 영 맞지 않았어요. 유대사람에게 전도하는 일은 항상 핍박을 받았고,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인에게로 보냄 받은 사명에 대해서 보다 더 직선적으로 충성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보내시는가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에서 쓰이게 하시려는가-그 길 외에 다른 길로 갈 생각은 마세요. 그것이 성공의 길입니다.

또한 좀더 깊이 생각해보세요. 이방인에게 보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선택하셨는가, 선택의 구체성을 본문에서 네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자기 그 뜻을 알게 하시며(14)"-바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바울에게 알게 해주셨어요. 이것은 영감입니다. 이것은 계시입니다. 바울 신학의 특성 중에 가장 중요한 핵심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바울에게만 주신 특별한 은사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입니다. 이는 로마서, 갈라디아서에만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알게 하셔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구원의 교리를 법적 관계에서 이해하게 되는 이 놀라운 진리를 바울이 깨달았어요. 신비로운 진리, 칭의(稱義)의 교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특별히 십자가를 하나님의 의가 충족되는 사건으로 보았습니다. 십자가를 계시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 이것입니다. 또 하나는 믿음을 생각할 때에 베드로나 야고보, 요한이 생각하는 것 같은 그러한 일반적 믿음을 생각하지 않았어요. 바울은 믿음에 대하여 아주 깊이 분석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모세적 신앙과 아브라함적 신앙을 구분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6)"-이 맥락을 그의 교리인 중심으로 삼습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믿음의 개념,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선택하셨어요.

바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주셨어요. 그래서 그가 우리에게 전해준 것입니다. 이것이 선택입니다.

 

둘째,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14)"-그 의인이 누구냐, 사도행전 313, 14절에 보면 그는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 믿음 없는 사람들이 볼 때에 예수는 저주를 받았고, 죄인의 모습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 의인을 보게" 하셨습니다. 절대로 '죄인'이 아니라 '의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가 계시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선택된 자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큰 진리입니다.

셋째,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14)"-하나님께서 친히 바울에게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일전에 제가 독일의 시투트가르트에 갔을 때, 그곳 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그림 한 폭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계시 받는 장면을 그린 것이라고 하는데, 보아하니 한 대머리 영감이 감옥에 앉아서 성경을 쓰고 있습니다. 손은 땅에 있지만 생각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면서 쓰는 것입니다. 이 그림이 화가 렘브란트의 걸작품이라고 합니다. 정말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하나님의 음성을 계속 들으면서 성경을 썼고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전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들은 것과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하나님과 40일 밤낮을 동행했고, 하나님의 지시를 직접 받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레위사람들과 불 신앙적인 사람들이 종종 이에 대해서 반항을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왜 모세를 통해야 되느냐, 왜 저 사람을 통해야만 되느냐고 따집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하고, 너는 모세를 통해서 들어라, 나는 모세와 대면할 것이고, 모세가 나를 보고 나를 듣느니라'-그 외에는 누구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대표성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선택에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대표적으로 듣고, 그래서 설명을 하고바울은 이렇게 선택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었고,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직접 들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선택한 자로 인해서 간접적으로 듣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보는 대로 증인되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들은 바를 증거 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선택하셔서 당신의 뜻을 알게 하시고, 의인을 보게 하시고, 음성을 듣게 하시고, 그리고 그의 온 생애를 통하여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바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알고, 바울을 통해서 주의 음성을 듣고, 바울을 통해서 그 사건의 증거를 내가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 사건이 내게 주신 사건이 됩니다. 여기에 엄청난 진리가 있어요. 이것이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사도 바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선택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선택의 교리, 이 신앙에, 사도 바울은 완전히 순종해야 했습니다. 나는 그저 끌려간 것뿐이고, 충성을 다한 것뿐이다이것이 그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버지 콘스탄티누스가 왕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엔가 그는 관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콘스탄티누스 왕은 칙령을 내렸습니다. "예수를 믿든지, 관직을 그만두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예수를 버릴 줄로 알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인격이 훌륭한 사람들이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를 믿겠습니다"하며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왕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없이는 제대로 정치를 할 수가 없거든요. 드디어 그는 신중하고도 깊이 생각한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스도께 충성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내게도 충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왕은 예수 믿으면서도 이제 안 믿겠다며 관직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을 다 내쫓고, 관직을 버리고 예수 믿고자 한 사람들을 다시 불렀습니다. 그리하여 훌륭하고 성공적인 정치를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그 부름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나를 어디로 부르셨는지, 무엇을 위해 부르셨는지 분명히 깨닫고 거기에 나의 온 운명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선택적 신앙의 증거(사도행전 22:1121)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리라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본의 아니게 체포당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성난 군중 앞에서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담대하게, 그러나 내심은 부드럽게, 성실하게, 진지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듯 성난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이 한 말씀 듣고 정말 몇 사람이나 회개하게 될는지, 어쩌면 진주를 개한테 던지는 격은 아닌지, 쓸데없는 짓이 아닌지 싶습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가 해야 할 말을 성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기 전에 설교하던 모습이 마음에 역력히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바울에게는 바로 그 시간에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거든요. 그것을 알기에 그는 오늘도 종말론적으로, 종말론적 상황에서 담대하게, 정직하게,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일단 '사실'을 말하면서 설교를 시작합니다. 특별히 자기가 경험한 것을 누누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설교를 가리켜 고백적 설교라고 합니다. 자신의 신앙고백이 거기에 있습니다. 무릇 말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지, 들은 말을 옮길 때처럼 힘없는 말이 없습니다. 더구나 말을 하되, 책에서 읽은 정도를 얘기하면서 어떻게 어떻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다면 이런 말에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요새 '같다'는 말이 많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저런 것 같습니다-맹랑한 말입니다. '같다'라고 말을 할양이면 차라리 집어치우세요. 바쁜 세상에 무엇 하러 그런 말까지 합니까? 저는 권투시합 하는 것을 볼 때, 가끔 진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경기 도중에 선수가 손을 허공으로 내지를 때가 있는데, 그것을 보고 해설자는 "저렇게 손을 내미는 것은 아무 짝에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체중이 실리지 않았거든요"라고 합니다. 백번 옳은 말이지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 한마디 말속에 정말 체중이 실리고, 인격이 실리고, 운명이 실려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이 실려야 합니다. 내 평생 생각하던 진리, 내 생명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신앙고백이 거기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한마디라야 권능이 있습니다. 그냥 어디서들은 얘기, 신문 어느 구석에서 읽은 얘기…… 이런 얘기가 무슨 힘이 있다는 말입니까? 행동에 체중이 실려야 하는 것처럼 말에는 신앙고백이 실리고, 인격이 실려야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마세요. 어쩌다가 한번 생각해본 정도의 얘기가 아니라, 그 말에 내 신앙고백과 운명을 걸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의 설교는 큰 의미의 설교입니다. 신앙고백적 설교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바울의 설교는 간증적 설교입니다. 자기체험이 여기에 있어요. 저는 설교할 때에 여러분의 눈을 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내가 실제로 경험한 것을 얘기할 때에는 여러분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제일 열심히 들어요. 가장 잘 먹혀듭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경험이요, 내 고백이요, 내 간증이니까요. 알겠습니까? 자기경험이란 그렇듯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남의 일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 시간에 오직 '내가 이렇게 듣고, 이렇게 경험했노라'하는 중요한 간증적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본문 14절에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자기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의 주제가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심으로 내가 있다, 라는 선택 교리적 신앙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이 인간적인 일이 아닙니다. 주께서 주도하셔서 된 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이 작품을 이룬 것입니다. 바울, 자기의 선택이 아닙니다.

자기의 지혜도 아닙니다. 자기가 그러하리라고 들은 것도 아닙니다. 심리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 그의 선입관 속에 이런 일이 내재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어떤 심리학자는 프로이트 심리학을 응용해서 이렇게도 설명합니다. 스데반이 죽은 모습을 보고 바울이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죄인이 어떻게 저렇게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죄인을 용서하면서 죽을 수 있단 말이냐?'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죄인이 아니라면 내가 죄인이다, 저 분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수용하신 분이라면 나는 천하에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다' 혹은 '아니다, 스데반 저 사람은 율법을 어겼다, 저 사람이 죽을 죄인이다'이렇게 내적 갈등이 심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갈등에 시달리다가 일이 터지니까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택했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기 좋아 이런 소리하는데, 재주 있게 말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데반이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스데반의 맥락과 사도 바울의 맥락은 전혀 틀립니다. 그런고로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증거 했지만 그가 예수 믿는 것과 사도 바울이 예수 만나는 사건은 잠재의식 속에서 전혀 연결될 수 없는, 맥락이 통하지 않는 관계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이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바울 자신의 기대나 경건과 지식, 이런 것들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곧 하나님의 선택인 것입니다.

또 하나, 선택은 강권적인 것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사실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어요. 성경말씀을 가만히 보세요. 주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며 사도 바울의 길을 딱 막아놓으시고, 심지어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으로 만들어놓으신 다음에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들어가면 네게 와서 이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대로 하라'라고 하십니다. 바울의 의사를 전혀 묻지 않으십니다. 바울에게는 아무런 선택권도 주시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강제적일 수가 있습니까? 그야말로 강권적입니다. 이게 바로 선택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의 그 깊은 신앙에는 선택교리가 있어요. 선택교리, 예정교리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이 깊은 사람은 늘 생각합니다. 내게는 아무 자유가 없다, 어쩌면 나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려고, 바둥바둥 멀리 가려고 애썼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이리 치시고 저리 치시고, 아주 강제로 붙드셔서 오늘의 내가 되게 하셨다, 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인의 바른 고백입니다.

또한 바울은 그저 끌려가듯 순종한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 하셨고, 바울에게는 I have no choice-아무 선택권도 없었습니다. 그저 끌려가기만 했습니다. 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몸도, 생각도, 달리 생각할 여지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바울로서는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시간이었으니까요. 육체적인 생명만이 아니라, 그 정신까지도 완전히 노예상태로 붙들려 있었습니다.

그런고로 예정이나 예견,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물을 겨를도 없었습니다. 반항할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자유는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만 순종한 것뿐이다바울은 이 사실을 군중 앞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이 선택의 교리 안에서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일을 봅시다.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와서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14)"합니다. "너를"-개인적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너를 선택했다 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중요한 사실을 뒤늦게 더 깊이 깨닫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1:15)……" "어머니의 태로부터"-그러니까 의식 이전이요, 내가 지각하기 전에, 공부하기 전에, 깨닫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이미 택하셨다 함입니다. 또 이 선택은 완전히 은혜로운 선택이라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1:4)"-"God chose us in Christ." 유명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 함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딱 한번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그는 선택적 교리를 이렇게 은혜로운 선택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의를 완전히 초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자격도 묻지 않으십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처음부터 나를 택정하셔서 개인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어떤 뜻이 계셔서 나를 이 세상에 나게 하셨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무슨 결정을 내리든 간에 이것이 내가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내정하시고 섭리하신 바에 의해서, 그 큰 섭리 속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하는 중요한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이 선택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명의 문제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것은 어디까지나 사도 바울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선택과 예정은 다른 것인데, 예정은 구원의 문제입니다. 선택은 사명의 문제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바울이라고 하는 선택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뜻 안에 바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존재는 비록 하찮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또 비밀한 말씀입니다만 이 선택에 평가 기준이 전혀 없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확실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12절에서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런 묘한 말씀을 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를 때에 한 것이다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충성과 진실은 있었어요.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충성 하나는 있고 볼일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에 충성한 사람은 그 방향만 확 돌리면 그리스도께 충성할 수 있습니다.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무당하던 사람도 열심히 하던 사람은 예수 믿어도 열심입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저는 아무 것도 안 믿어요"하는 사람은 예수 믿기도 힘듭니다. 뭔가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기 제일 어려운 사람이 누군고 하니, 예수 믿으라고 할 때에 "그럼요, 나가야지요. 예수 믿는 것은 좋은 것이지요"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안나올 사람이예요. 가만히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안 나가는 것은 물론이요, 남도 안나가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좌우간 어딘가 확신이 있고, 열심이 있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예수 믿지 않았지만 율법에 대해서는 충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과, 자기가 아는 경건에 대해서는 생명을 걸만큼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이 점을 보시고 '그것, 쓸만한데? 방향만 돌리면 괜찮겠는데' 하셨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바울이 그 다음부터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기본적인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열심, 진실입니다. 이런 것은 꼭 있어야 합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자격이 있어서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하시고 그 뒤에 자격과 능력을 주십니다. 바울이 지금 무슨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필요한 능력, 필요한 영력, 필요한 권세를 뒤에 주셨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쓰실 때에는 그에게 자격이 있어서 쓰시는 것이 아니라, 우선 붙들어놓고, 훈련을 시키십니다. 필요한 모든 은사를 주십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가 80세에 하나님께 부름 받았지만 이미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다 붙들어놓으시고 다 선택해놓으셨습니다. 먼저 그를 바로의 궁전에 보내어 40년 동안 공부하게 하시고, 광야로 내몰아 40년 동안 목자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훈련시킨 다음에 ', 이제 네 백성을 건져라' 하십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 사실을 모르고 대답합니다. '주께서 저를 부르시지만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어눌한 사람입니다.' 자꾸 이렇게 꼬리를 빼고 뒤로 물러섭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입을 지은 자가 누구뇨, 내가 가라면 갈 것이 아니냐,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다 알 것이 아니냐, 네가 말을 잘 못하니 말 잘하는 네 형님을 동반시켜주마.' 부세요. 그런고로 선택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진 자격이나, 우리가 가진 능력보다 더 앞서 있습니다. 선택이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모저모로 훈련을 시키시고, 능력도 주시고, 그래서 어느 수준까지 도달하게 된 후에 그를 들어 쓰십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좀더 깊이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선택하심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바로 이것을 오늘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21)."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사실이예요. 이방인에게 보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선택하셨어요. 이 사람이 적절하거든요. 어쩌면 그래서 길리기아 다소에서 바울을 태어나게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하게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다 준비해놓으시고, 이 사람을 쓰신 것입니다. 확실히 바울은 높은 지성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욱 소중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지성이 먼저 있은 게 아닙니다. 선택된 자로서 그 지성의 길을 갔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의미가 여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확실한 사명이 있고, 선교지가 있고, 목적지가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울의 생애를 가만히 음미해보세요.

바울은 분명히 이방인에게로 보냄 받았어요. 그런데 그가 유대인에게 전도하려다가 당했어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길 외의 길로 가려고 할 때마다 그는 필요 없는 많은 핍박을 당해야 했습니다. 무릇 제대로 놓일 자리에 놓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마음먹고 이방인에게로만 갔어야지요. 그랬으면 오히려 핍박을 더 적게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가 실패한 일들이 있었다면 전부 유대사람들과의 관계에서였습니다. 이방인과의 관계는 대체로 다 성공적이었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셔서 이방인의 길로 보내시는데도 사도 바울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양심, 유대인을 인도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그 마음에서 항상 떠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는 로마서 9장에서 말씀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3)"-골육친척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온다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간절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이방인에게 전도하면서도 유대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큰 핍박을 초래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사명에 충실했어야 했습니다. 그가 이렇듯 핍박을 받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예루살렘에 머물러 가말리엘 문하에서 유대사람을 상대로 아주 학술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유대사람과는 영 맞지 않았어요. 유대사람에게 전도하는 일은 항상 핍박을 받았고,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인에게로 보냄 받은 사명에 대해서 보다 더 직선적으로 충성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보내시는가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에서 쓰이게 하시려는가-그 길 외에 다른 길로 갈 생각은 마세요. 그것이 성공의 길입니다.

또한 좀더 깊이 생각해보세요. 이방인에게 보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선택하셨는가, 선택의 구체성을 본문에서 네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자기 그 뜻을 알게 하시며(14)"-바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바울에게 알게 해주셨어요. 이것은 영감입니다. 이것은 계시입니다. 바울 신학의 특성 중에 가장 중요한 핵심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바울에게만 주신 특별한 은사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입니다. 이는 로마서, 갈라디아서에만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알게 하셔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구원의 교리를 법적 관계에서 이해하게 되는 이 놀라운 진리를 바울이 깨달았어요. 신비로운 진리, 칭의(稱義)의 교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특별히 십자가를 하나님의 의가 충족되는 사건으로 보았습니다. 십자가를 계시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 이것입니다. 또 하나는 믿음을 생각할 때에 베드로나 야고보, 요한이 생각하는 것 같은 그러한 일반적 믿음을 생각하지 않았어요. 바울은 믿음에 대하여 아주 깊이 분석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모세적 신앙과 아브라함적 신앙을 구분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6)"-이 맥락을 그의 교리인 중심으로 삼습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믿음의 개념,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선택하셨어요.

바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주셨어요. 그래서 그가 우리에게 전해준 것입니다. 이것이 선택입니다.

 

둘째,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14)"-그 의인이 누구냐, 사도행전 313, 14절에 보면 그는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 믿음 없는 사람들이 볼 때에 예수는 저주를 받았고, 죄인의 모습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 의인을 보게" 하셨습니다. 절대로 '죄인'이 아니라 '의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가 계시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선택된 자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큰 진리입니다.

셋째,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14)"-하나님께서 친히 바울에게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일전에 제가 독일의 시투트가르트에 갔을 때, 그곳 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그림 한 폭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계시 받는 장면을 그린 것이라고 하는데, 보아하니 한 대머리 영감이 감옥에 앉아서 성경을 쓰고 있습니다. 손은 땅에 있지만 생각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면서 쓰는 것입니다. 이 그림이 화가 렘브란트의 걸작품이라고 합니다. 정말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하나님의 음성을 계속 들으면서 성경을 썼고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전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들은 것과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하나님과 40일 밤낮을 동행했고, 하나님의 지시를 직접 받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레위사람들과 불 신앙적인 사람들이 종종 이에 대해서 반항을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왜 모세를 통해야 되느냐, 왜 저 사람을 통해야만 되느냐고 따집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하고, 너는 모세를 통해서 들어라, 나는 모세와 대면할 것이고, 모세가 나를 보고 나를 듣느니라'-그 외에는 누구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대표성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선택에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대표적으로 듣고, 그래서 설명을 하고바울은 이렇게 선택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었고,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직접 들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선택한 자로 인해서 간접적으로 듣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보는 대로 증인되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들은 바를 증거 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선택하셔서 당신의 뜻을 알게 하시고, 의인을 보게 하시고, 음성을 듣게 하시고, 그리고 그의 온 생애를 통하여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바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알고, 바울을 통해서 주의 음성을 듣고, 바울을 통해서 그 사건의 증거를 내가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 사건이 내게 주신 사건이 됩니다. 여기에 엄청난 진리가 있어요. 이것이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사도 바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선택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선택의 교리, 이 신앙에, 사도 바울은 완전히 순종해야 했습니다. 나는 그저 끌려간 것뿐이고, 충성을 다한 것뿐이다이것이 그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버지 콘스탄티누스가 왕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엔가 그는 관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콘스탄티누스 왕은 칙령을 내렸습니다. "예수를 믿든지, 관직을 그만두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예수를 버릴 줄로 알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인격이 훌륭한 사람들이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를 믿겠습니다"하며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왕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없이는 제대로 정치를 할 수가 없거든요. 드디어 그는 신중하고도 깊이 생각한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스도께 충성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내게도 충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왕은 예수 믿으면서도 이제 안 믿겠다며 관직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을 다 내쫓고, 관직을 버리고 예수 믿고자 한 사람들을 다시 불렀습니다. 그리하여 훌륭하고 성공적인 정치를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그 부름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나를 어디로 부르셨는지, 무엇을 위해 부르셨는지 분명히 깨닫고 거기에 나의 온 운명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