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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예비하시는 가정〈룻기 1장 16~18절〉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오늘은 성경 룻기에서 보는 룻과 나오미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통해서 가정의 참모습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어떻게 보면 룻은 무척 불행한 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행복한 여인으로 뒤끝이 아름답게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 역시 더할 수 없게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마는 끝에 가서는 다윗의 증조모가 되는 크나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두 여인의 관계는 너무나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 만큼 본문 말씀 또한 성서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로 소중한 가치를 지녔다 하겠습니다.
야곱이 장례된 후 5백여 년이 지나 사사들이 치리(治理)하던 시절입니다. 베들레헴 근방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갈 길이 막막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땅을 끝까지 지켜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적 의지였습니다.
그러나 엘리멜렉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내 나오미와 아들 둘을 데리고 향리 베들레헴을 떠나 이방 땅인 모압으로 이민을 갑니다. 그 때에 모압에는 식량이 좀 넉넉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은 얼마 후 그곳에서 죽고 맙니다. 두 아들은 모압 여인 오르바와 룻을 아내로 취했는데, 거기 거한 지 십 년 즈음에 그들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리하여 나오미와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 ---- 이렇게 세 과부가 남아서 살아가게 됩니다.
두 며느리는 이방 여인들이지만 나오미의 가정에 들어왔으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딸로 개종했습니다.
세 과부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을 때, 베들레헴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풍년이 들었습니다. 나오미는 이 소식을 듣자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남편 잃고 홀로되어 사는 두 며느리가 못내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서 간곡히 부탁합니다. '나는 이제 내 고향으로 돌아가 살다 죽으려 하니, 너희는 개가(改家)하여 너희 민족과 함께 살아라' -----나를 떠나라고, 나 혼자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오르바는 그것이 합당하다 싶어 시어머니를 떠납니다.
그런데 룻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시어머니를 끝까지 따르면서 간청합니다. 눈물겹게
아름다운 룻의 마음씨가 오늘의 본문에 나타납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强權)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6절)"
본래 모압 여인이지만 이미 나오미 가정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룻은 이 사실을 엄숙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나오미가 나의 어머니요 나오미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마음으로부터 고백한 것입니다. 노년의 시어머니를 홀로 보내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입니다.
나오미는 그 같은 며느리의 결심을 말릴 수 없었습니다. 하는 수없이 룻을 데리고 고향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베들레헴에 이르렀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나오미를 반기며 '네가 나오미냐?'하고 놀랍니다.
그런 그들에게 나오미는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20절)" ---- '나오미'는'기쁘다'는 뜻이고 '마라'는 '쓰다'는 뜻입니다. 이름만큼 기쁘게 살지 못하고 오히려 쓴 고생을 하다가 홀로 슬프게 돌아왔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르렀을 때는 보리 추수기였습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이 집 저 집 남의 밭을 전전하면서 이삭을 줍습니다. 그것으로 빵을 만들어 시어머니를 받듭니다.
이렇게 하자, '수고하는 저 어여쁜 여인이 누구냐?' '나오미의 며느리인데 홀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다'---사람들 사이에 이렇게 소문이 쫙 퍼진 것 같습니다. 나오미의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에 보아스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상처(喪妻)를 하고 혼자 지내는 처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룻은 이 보아스의 아내가 됩니다. 이윽고 그들 사이에 아들이 태어납니다. 이 아들이 바로 다윗 왕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이방 여인 룻이 다윗 왕가의 어머니가 되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에 룻의 이름을 이처럼 밝히고 있습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보아스와 룻의 가정, 나오미의 가정은 우리가 보통으로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가정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의 가정에서는 우리가 교본(敎本)으로 삼아야 할 윤리가 너무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 이것이 가정이구나! ---- 순간순간, 말 한마디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깨달음을 줍니다. 먼저, 룻은 한번 결혼을 했고, 결혼함으로써 이젠 시집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는 모든 관계가 그 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과 한 몸의 관계가 되는 동시에 남편의 가족 전체와 새로운 관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남편의 어머니가 내 어머니요, 남편의 고향이 내 고향이며, 남편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변을 보면 시어머니를 가리켜 꼭 '시어머니'라고 호칭하는 며느리들이 있습니다. 그냥 '어머니'라고 부르면 좀 좋습니까?
사위가 장모를 호칭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제 친구의 장모 되는 분이 '사위한테 어머니 소리 한번 들어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해요. 늘 '장모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아내의 어머니도 내 어머니일진대 그냥 '어머니'라고 부르면 이 또한 얼마나 듣기에 좋습니까? '시어머니' '장모님'은 "제 시어머님이어요" "제 장모님이십니다"하고 남에게 소개할 때에나 씀직한 호칭입니다.
아무튼 여자는 일단 시집에 들어왔으면 온전히 그 집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과 이어진 그 집의 모든 관계가 나하고 완전히 이어져야 합니다. 몸은 그 집에서 평생을 살면서도 '나는 이 집사람이 아니다' '나는 시집온 사람이다'라고 느끼거나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시어머니 쪽에서 보는 며느리도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며느리 역시 딸입니다.
우리나라의 가정들을 살펴보면 예로부터 주로 고부(姑婦) 사이가 좋지 않아 말썽이 많았습니다. 남편을 사랑하면서 그 남편을 낳은 시어머니는 미워합니다. 손주는 애지중지하면서 정작 그 손주를 낳은 며느리는 미워합니다. 이 어떻게 된 노릇인지 참으로 답답합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어머니로 여기고, 시어머니는 딸 하나 얻었다 생각하고 며느리를 내 아들과 똑같게 귀히 여기고 대하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몇십 년을 한 가족으로 살면서 여전히 '저건 남의 식구다'하고 며느리에게 눈을 흘기는 시어머니가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나오미를 봅시다. 비록 아들은 죽고 없지만 며느리를 내 딸로 여깁니다. 또 룻은 어떻습니까? 남편이 죽고 없지만 남편의 어머니가 곧 내 어머니입니다. 룻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라고 말합니다. '시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17절)"이라고 말합니다. 결혼하면 완전히 그 집의 식구, 그 집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웅변해 주는 대목입니다. 남편이 살아 있든 죽었든 상관이 없습니다. 남편과 결혼하는 순간부터 내 운명은 남편의 집안에 가 있다---- 룻은 가정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가정에 대한 이해가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요즘의 가정을 보면 부부간의 사랑에만 지나치게 치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옛날에는 부부의 사랑을 소홀히 여겨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제쳐두고 부모 사랑, 자식 사랑이 먼저였습니다. 수직적인 관계가 강조되다보니 자연히 남편과 아내와의 수평적인 관계가 무시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개념으로는 가정이 남편과 아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있어야 가정이지 남편과 아내만 있으면 가정이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것이 뒤바뀌었습니다. 수직적인 관계는 전혀 중요치 않습니다. 수평적인 관계, 다시 말해 둘만 좋으면 그만인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둘만 잘살면 그만입니다. 부모와 나와의 관계, 나와 자식과의 관계가 너무 소홀히 취급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심하게 말해서 '부모도 자식도 모른다, 우리만 행복하면 된다'라고 하는 모습입니다. 예삿일이 아닙니다.
결혼적령기에 접어든 젊은 여성들이 신랑감으로 '둘째아들'을 찾지 못해 고민이라고 합니다. 장자(長子)의 아내가 되면 시부모를 모셔야 되니 싫다는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두 남녀의 만남에 앞서 가정과 가정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結婚)'이라는 말보다 '혼인(婚姻)'이라는 말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혼인'은 둘만의 만남이 아닙니다. 가정과 가정과의 만남입니다. 전체적인 만남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웃어른과의 관계를 무시하면 부부의 사랑마저 무너지게 됩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룻은 자신의 행복보다 효(孝)를 앞세우고 살아갑니다. 룻에게서 행복이 떠난 지는 오래입니다. 남편과 살았던 몇 년으로 행복한 때는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제 고부간의 관계만 남아 있습니다. 룻은 끝까지 이 관계를 지켜나갑니다. 효를 지키고 의리를 지킵니다. 내게 주어지는 행복이 우선이 아닙니다. 효가 첫째요 의리가 먼저입니다.
간혹 행복을 먼저 찾다가 그 행복도 찾지 못하고 의리마저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안쓰럽습니다. 대의(大義)를 먼저 지켜나갈 때에 행복이 그 뒤를 따르는 법입니다. 결혼 서약서에 보면 '부부의 대의를 다하겠느뇨?'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일단 결혼을 했으면 결혼한 것에 대한 자기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당장에는 행복하지 않다 해도, 눈앞에 기쁜 일이 있지 않다 해도, 내가 하나님 앞에 약속한 의리는 다 지켜나가야 합니다.
남편이 내게 잘하든 못하든 상관하지 마십시오. 묵묵히 내 할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자식한테 지나친 신경을 쓸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만 가르치면 됩니다.
또 시어머니가 내게 어떻게 하느냐를 거론하지 마십시다. 그분은 그분대로 살아온 방식이 있고 세계관이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본분을 다할 뿐입니다. 앞으로의 행복은 지금의 내 본분과는 상관없습니다. '어머니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고, 어머니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겠으니 날더러 떠나라 하지 마십시오' ---- 룻은 이의와 효를 끝까지 지키고 다했습니다. 여러분, 끝까지 의와 효를 다하면 생각지도 않았던 보너스가 주어집니다. 행복이 바로 보너스입니다. 행복 자체만을 추구한다고 행복이 얻어집니까? 신앙을 지키고 의를 지키고 효도를 다했을 때에 비로소 행복이 덤으로 따라옵니다. 행복을 찾겠다, 행복을 지키겠다고 혈안이 되어도 행복이 주어지기는커녕 가지고 있던 행복도 영구한 것이 아니 됨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의가 먼저요, 도리가 우선 입니다. 룻은 효도를 다했습니다. 그랬더니 생각지도 않게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의 아내가 됩니다. 다윗의 조모가 되는 축복까지 받게 됩니다.
일찍이 룻으로서는 기대할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남편이 죽었습니다. 시아버지도 없습니다. 재산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보장된 것이라곤 한가지도 없습니다. 오히려 봉양해야 할 시어머니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최선을 다합니다. 행복한 미래가 보이지는 않지만 개의할 것 없습니다. 오로지 지금 내가 해야 할 도리를 다할 뿐입니다. 그랬더니 그토록 큰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아름다운 본문 말씀 중에서 특별히 더 아름다운 대목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 바로 이 대목입니다.
모압 여인이지만 나오미의 가정에 들어와서 신앙을 하나로 했습니다. 한 가족이면서 신앙이 따로 따로인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룻은 매우 신앙적인 여인이었습니다. 신앙까지 전적으로 어머니를 따릅니다. 그 때문에 귀한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행복을 앞세우기 전에 신앙부터 앞세워야 합니다. 나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은 저만치 밀어놓아도 괜찮습니다. 먼저 나의 마땅히 행할 도리를 다하고 기다릴 일입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된 것은 축복이요 덤이자 보너스입니다. 그것은 분명 기적입니다. 기적은 룻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간다면 누구에게나 기적이 일어납니다. 눈앞에 있는 작은 이득을 탐하여 큰 의를 저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사소한 행복을 찾겠다고 마땅히 행할 도리를 쉽게 저버리지 맙시다. 그런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신앙을 앞세우고 효와 도리를 다하고, 본분을 다해 사노라면 하나님께서 알게 모르게 저 앞에서 축복을 안겨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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