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기다리라(여호수아 7장 6절~13절)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여호수아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가나인 사람과 이 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의 중에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네가 그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제(除)하기 전에는 너의 대적을 당치 못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은 4백여 년 동안 애굽에서 아무 희망 없이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사 특별한 지도자 모세를 보내셔서 큰 권능을 보이시고 이적 가운데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요단강을 건너서 드디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들은 한시바삐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서고 싶었으나 아무리 느리게 가도 14, 5일이면 갈 수 있는 그곳을 무려 40년 동안이나 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헤매게 됩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들이 정치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는 애굽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지만 정신적으로나 의식, 종교, 풍속 등의 생활 규범에서는 빠져 나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애굽의 풍속에 매여 있고 노예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묻은 애굽 생활을 완전히 씻어버리고 새사람, 새 마음, 새 믿음으로 새 땅에 들어서게 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죽고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통하여 그들은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얼마나 기쁨과 감격에 넘쳤겠습니까? 훈련된 군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뛰어난 전략을 세웠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기에 그 말씀만 믿고 요단강을 건넌 것입니다. 법궤만을 앞세우고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사 손 하나 대지 않고도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여리고 성(城)이 그대로 무너지고 맙니다. 첫 번째 성을 훌륭하게 함락시킨 것입니다. 이어 여세를 몰아 두 번째 성인 '아이 성'으로 들어갑니다. 조그마한 성이기 때문에 큰 군사가 필요 없다 싶어 2, 3천 명의 군사만을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예상외로 그 전쟁에서 패배합니다. 3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군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합니다.
이 패전 소식을 들은 백성들의 마음이 녹아버렸습니다. 물과 같이 녹아버렸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떱니다.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성공은 우연하게 이루어지는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성공에는 성공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실패에는 실패의 원인이 반드시 있습니다. 실패의 원인을 버리지 못하면 성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저들이 한 번의 실패를 놓고 낙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일이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어떻게 실패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주셨는데 어째서 전쟁에 패배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가나안 일곱 족속이 두려움에 떨고, 그러므로 그들과의 전쟁에서 마땅히 승리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패한 것입니다. 만일에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 성 공략에 실패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 것으로 오인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나안 일곱 족속이 동맹을 맺어 쳐들어올 것이고 이스라엘은 꼼짝없이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에 한 번 실패했지만 그 실패는 엄청난 의미를 가집니다. 실의에 빠지고 낙담하게 되고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면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땅에 종일토록 엎드려 있다가 하나님 앞에 원망 섞인 호소를 하며 기도합니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7절)" --- 오늘 실패하고 보니 어제 성공한 것까지 마음에 합당치 않습니다. 여리고 성을 함락한 어제의 영광도 원망으로 바뀝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10절)."
여러분, 좌절과 실패 또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좌절과 실패에 직면하게 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반드시 있습니다.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뜻이 있고 경륜이 있고 그 속에 사건으로 나타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의 말씀은 그들로 하여금 깊은 탄식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근심을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근심할 만큼 근심해야 합니다. 간혹 대학입시에 낙방한 아이가 방문을 잠그고 먹지도 잠자지도 않고 울고불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어머니들은 제게 전화를 하고 찾아와서 걱정을 합니다. 그러면 저는 내버려두라고 합니다. 울만큼 울도록, 탄식할 만큼 탄식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달랠 것도 위로할 것도 없습니다. 겪을 만큼 겪은 후에 스스로 무엇인가를 깨닫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안쓰럽기만 한 어머니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 해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런 기도는 따로 안 한다고 거절해 버립니다. 고민할 만큼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실패가 어디에서부터 말미암았는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일생을 통해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썩을 만큼 썩고 울만큼 울어야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령한 고민, 신앙적인 근심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원인을 찾게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실패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정신 문제, 사회 문제, 경제 문제, 문화 문제, 교육 문제 등 있을 법한 것은 모두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도덕적 문제, 종교적 문제 --- 즉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시점까지 도달하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이 바라는 것, 인간에게 의지하려는 것을 다 끊어버리고,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다 부정한 상태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직선적 관계를 맺으면서 원인을 찾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여호수아는 원인 수긍의 의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살필 생각은 하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왜 실패하게 하셨습니까? 이제 어떻게 하시렵니까? --- 이렇게 대들고만 있습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라고 하십니다. 원인이 하나님께 있습니까? 아이 성이 강하기 때문입니까? 정치적인 이유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원인은 바로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어찌하여 엎드렸느냐 --- 그 원인을 네 스스로 찾아내라고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셋째는 새로운 신앙고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느냐?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느냐? 하나님의 능력이 어디에 있다고 믿느냐?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상을 주시고 누구에게 벌을 주시는지 아느냐 --- 하나님의 경륜이 어디에 있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 신앙고백 하라는 것입니다.
똑바로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내가 역경을 만나고 좌절하게 될 때에 신앙고백을 다시 하십시다.
내 신앙에 문제가 없는가 --- 하나님의 경륜과 뜻을 다시 한번 물어야 하겠습니다.
넷째는 스스로 성결(聖潔)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좌절을 통하여 성결케 되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못하는 성결, 버려야 될 줄 알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실패와 좌절의 시련을 통하여 끊어버리게 하십니다. 교만한 사람, 욕심이 많은 사람, 명예욕이 강한 사람, 이기적인 사람 역시 큰 사건을 통하여 스스로 온유해지고 겸손해지도록 만드십니다. 이것이 바로 역경입니다.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쓰셔야만 비로소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게으른 사람이 있습니다. 죽으면 썩어질 육신을 위하느라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어려운 사건을 주어 부지런하게 만드십니다. 이는 우리가 실제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희 교회의 새벽기도회에는 많은 교인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1천7백여 명이나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잘은 모릅니다마는 새벽에 나와 기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매를 많이 맞은 사람들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지런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된 것입니다. 기도 안 하는 사람을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더러운 사람을 성결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와 좌절을 통하여 역사를 이루려고 하십니다.
본문을 보면 "내일을 기다리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기다리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던 거친 성격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립니다.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 '기다리라, 그래서 내가 하나님됨을 알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좀더 기다려야 합니다. 느긋하게 주님의 뜻을 기다리는 자세 - 좌절과 실패를 통하여 이루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사랑, 기다림의 신앙 - 그 인내를 바로 여기서 생산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어제의 실패 때문에 내일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내일은 없다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13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일은 내 손에 있다, 내가 내일을 줄 터이니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만 하라 - 승리의 요인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데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 실패의 요인은 하나님께서 떠나셨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떠나셨습니까? 저들이 먼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고 약속을 어겼고 계약을 저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들을 떠나시게 되었고 전쟁은 실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신앙을 가다듬고 정비하여 새 마음 새 뜻으로 스스로 성결케 하라. 그러면 내일을 주리라' - 미래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스스로 성결케 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본문을 상고(詳考)해보면 아간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앙적 의식을 새롭게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큰 경륜이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점령할 때에 총칼을 휘두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법궤를 메고 일주일 동안 성 주위를 그저 뱅뱅 돌았더니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악의 땅 가나안을 진멸(盡滅)하시는 심판임을 주지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여러 목적과 이유로 저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집행자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점령했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말씀에 순종하기만 한 것입니다. 자비와 긍휼도 필요가 없습니다. 죽이라면 죽이고 불지르라면 불지를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기본 자세인데,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자세가 없었습니다. 스스로 이긴 줄로 착각했습니다.
이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사역입니다. 그럴진대 여기에 어떤 물건을 아끼든가 어떤 사람을 아끼든가 또 탐심을 품는다면 이는 강도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싸움이 물건을 취하고 사기하고 강도질함으로써 약탈전쟁이 돼버리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성결케 하라, 생각을 바로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아간을 제거하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실제로 아간은 죄를 지었습니다.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 금덩이 하나를 감추었습니다. 감춘 것이 죄가 되어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실패로 유도하신 것입니다. 저 아간을 제하라, 너희 속에 있는 아간을 죽여라 - 그래서 돌로 쳐죽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전쟁에서 절대로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도대체 아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아간은 탐심을 품은 사람입니다. 우리에게서 그 아간적 요소를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탐심은 금물입니다. 욕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가 아간이 죽기 전에 그에게 왜 그랬느냐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이 나서 취하였나이다' - 금덩이를 보자 탐심이 생겼다고 대답합니다. 이 탐심이 무서운 죄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탐심은 죄의 뿌리입니다.
언젠가 교인 한 분이 제게 묻습니다. "목사님, 성경에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남의 여자를 보는 마음이 이토록 죄가 되면 어떡합니까?" 그래서 저는 여자를 꽃에 비유하여 대답하기로 했습니다. "남의 화단에 활짝 피어 있는 꽃을 볼 때, 저 꽃 참 아름답다고 느끼며 그냥 지나가느냐 또는 꺾어서 집에 가져다 꽂아놓고 싶다고 생각하느냐의 차이입니다"라고 말입니다. 남의 화단에 있는 꽃이라도 아름답게 감상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꺾어서 우리 집에 가져다 꽂아야지 하는 것은 죄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남의 여자라도 하나님께서 참 아름답게 만드셨구나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면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취하고자 하면 죄가 됩니다.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아이 쇼핑(eye shopping)하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부당하게 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나쁩니다. 여러분, 탐심이 죄로 통함을 잊지 맙시다.
또한 본문말씀은 이기심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탐심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방물장수가 시장에서 좌판에 물건을 늘어놓고 팔고 있었습니다. 물건 중에 가짜 금으로 도금을 한 가짜 금덩이 하나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 금덩이를 슬쩍 훔쳐서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이 쫓아가서 붙잡아 따지니 금덩이를 보는 순간 그만 눈에 보이는 것이 없더라고 말하더랍니다. 자꾸 들여다보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들리지도 않습니다. 탐심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오직 나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마음에는 사회도 국가도 교회도 없습니다. 이기주의입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 -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내 욕심만 챙기려듭니다. 요즈음 야외에 나가보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춤추고 먹고 마시고 떠드는 것이 보통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와 혼자 떠들면서 기도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이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한마디 충고를 했습니다. 나만 기도하면 다른 사람의 기도는 방해해도 된다는 것입니까? 때로 내가 못 나와도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기 좋은 분위기로 만들어놓아야 합니다. 남이야 어떻든 상관없다 --- 이러한 에고이즘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빼버리라 - 또한 숨겼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나쁜 일임을 알기 때문에 일단 숨겼다가 전쟁이 끝나면 취할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지 않았다면 이 악은 영원히 숨겨지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만홀(漫忽)히 여김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전쟁, 혁명 등의 큰 사건이 있은 뒤에는 숨겨진 악이 낱낱이 노출되는 것을 말입니다. 숨겨졌던 부정 부패가 전부 밝혀집니다. 숨어 있던 악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화살을 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 감추어진 부정이 드러나기 전에, 즉 하나님께서 드러내시기 전에 나 스스로 드러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전에 내가 나를 심판해야 합니다.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 유명한 제갈공명은 화전(火戰)을 계획해놓고 이런 말을 합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 사람이 할 일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성결케 하고 하늘이 주는 내일을 기다려야 합니다. 실패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고 내일을 기다리는 것은 망상입니다. 지난날의 실패한 원인을 깨끗이 청산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또 다른 내일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여기 믿음의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는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할 만큼 정규적인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스물 두 살에 처음으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마는 보기 좋게 실패합니다. 스물 세 살에 주(州) 의회에 출마하여 낙선합니다. 스물 네 살에 또 사업에 손을 댔지만 이 사업에서마저 실패합니다.
스물 일곱 살에 신경쇠약과 정신분열증으로 시달림을 받기도 합니다. 다시 스물 아홉 살에 의회의 의장직에 도전하지만 낙선하고 맙니다. 서른 한 살에 대통령 선거위원에 도전했다가 낙선하고, 서른 네 살에 국회의원에 낙선하고, 서른 일곱 살에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서른 아홉 살에 또 낙선을 경험합니다. 마흔 여섯 살에 상원의원으로 출마했다가 낙선, 마흔 일곱 살에 부통령으로 출마했다가 낙선, 마흔 아홉 살에 또다시 상원의원에 낙선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실패 경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했습니다. 드디어 쉰 한 살에 대통령으로 출마해서 당선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 링컨, 미국의 16대 대통령입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성공이 아닙니다. 많은 낙선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미국의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그는 그의 어머니가 가르쳐준 귀한 성경 말씀을 늘 사랑하고 품에 지녀 다녔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바로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가 실패할 때에 악마는 늘 옆에 붙어 '너는 끝났다'고 말했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실패와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더욱 큰 일에 도전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는 악마의 말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아가 마침내 큰 역사를 이루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름지기 스스로 성결케 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내일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