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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신 은혜의 선물(에베소서 3장 1절~9절)

by 【고동엽】 2023.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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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신 은혜의 선물(에베소서 3장 1절~9절)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치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그 가치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남이 가진 것만 좋고 귀하게 보여 불행을 느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불행의 대부분이 오해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혼한 지 몇 년 된 어느 남편이 자기 아내가 보기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밉게 생겼고 구질구질한 것 같아 하루는 아내를 불러놓고 친정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큰일날 소리이지만 옛날인데다가 또한 그 부인이 착해서 아무 소리도 못하고 짐을 쌌습니다. 그리고 옷을 곱게 갈아입고 화장을 정갈하게 한 다음 남편에게 하직 인사를 합니다. 정말 가고 싶지 않지만 가라고 하시니 떠난다고 말하면서 슬프게 자리를 떴습니다. 이 때 남편은 곱게 단장한 아내의 모습이 새롭고 아름답게 보여 그만 붙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내에게도 잘못은 있습니다. 평소에 좀 단정하게 꾸며서 살아야지 구질구질한 것을 좋아하는 남자가 어디 있습니까? 아무튼 이 남편은 자기 부인의 가치를 오해하고 있다가 다시 회복하였으니 다행입니다. 우리는 정말 소중한 사람과 살고 있으면서 그 가치를 몰라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해가 바로 불행의 원인입니다.
그 중에 특히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받지 못했다고 불평입니다. 그러고는 그 사랑을 잃어버린 뒤에야 후회하고 아쉬워하는 것입니다. 죽거나 잃어버린 다음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빼앗긴 다음에 억울해 봐야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것, 받은 것, 되어진 것 등, 내게 처한 모든 것이 소중한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또한 고독한 사람은 불행합니다. 불행한 것 중에 가장 불행한 요소가 바로 고독입니다. 왜 고독이 있습니까? 고독은 착각입니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많은 사람들의 신세를 지며 태어나고,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다가, 죽은 다음에도 많은 사람들의 신세를 져야 땅에 묻힐 수 있습니다. 즉 혼자서는 존립할 수 없으므로 고독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고독은 어디까지나 착각입니다. 그 예로 철없는 자식들은, 그들을 아픈 마음으로 사랑하며 헌신하는 부모들이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독하며 외롭다고 울고 있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그래서 불행은 오해이며 불신입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이 고독합니다. 왜냐하면 교만한 마음은 은혜를 알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교만한 사람에게는 선물이 없습니다. 주어지는 은혜나 선물을 마치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보상으로 또는 공로로 착각합니다. 또한 선물을 뇌물로 생각하고 부담스러워하며, 걱정 근심으로 바꾸니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은혜의 선물이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받아들여 감사하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러나 선물의 뜻을 모르는 자는 절망할 수밖에 없고 고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은 은혜를 아는 자이기에 행복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이것이 바로 그의 삶의 원천이었으며 생명의 근원이고 믿음의 근본이며 행복의 뿌리였습니다. 이것은 성경적 진리요 원칙입니다. 모든 것을 선물로 은혜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담은 상징으로 소화했습니다. 마귀가 낳는 것은 의심과 교만이지만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자는 그 마음속에 믿음과 겸손이 있습니다. 불신과 교만이 있는 곳에는 항상 불안과 저주와 원망이 가득차서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 자체가 은혜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믿지 않겠다는 사람에게는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에베소서 2:8에서는 믿음은 선물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믿어지는 그 마음 자체는 틀림없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겸손보다 더 큰 은혜는 없습니다. 믿음과 겸손을 가진 자는 모든 것이 선물이요 모든 것이 감사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세 가지의 은혜의 선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들은 자기 공로나 노력이나 결단이나 의지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첫째 선물은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 은혜를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 계시의 영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안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행복이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아는 문제요 깨달음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알게 하려고 애를 써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듯 안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끝까지 모르고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알게 해 주신 이 은혜는 얼마나 감사합니까? 진리는 감추어진 자에게는 영원히 감추어진 것이요 멸망받을 자에게는 영원히 비밀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것을 내게는 눈을 뜨게 하시고 귀를 열게 하시며 마음문을 여시어 깨닫게 하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계시의 영을 주셔서 그리스도의 신비, 십자가의 신비의 그 능력 그 지혜를 우리들에게는 알게 하셨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는 설교를 하고 학교에서는 강의를 합니다만 이상하게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반응은 천태 만상(千態萬象)입니다. 특히 학생들의 경우에는 시험을 보면, 똑같은 강의를 듣고도 어쩌면 그렇게도 서로 다른 답을 쓸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입니다. 어떤 학생은 제가 가르친 그대로 모범 답안을 정확하게 쓰는가 하면, 어떤 학생은 도대체 그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 엉뚱한 답을 쓰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성도는 은혜를 듬뿍 받고 기뻐하며 이 말씀으로 전도하며 간증할 분이 계시는가 하면, 어떤 성도는 졸고 있습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으니 잠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많지도 않은 열두 제자를 가르치시면서,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기나 너희들이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즉 가룟 유다는 제외하고 있음을 봅니다. 깨달아지고 믿어지는 것은 확실히 은혜요 선물입니다. 사도 바울도 한때는 몰라서 교회를 핍박했고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몰랐기 때문에 다메섹까지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여시고 깨닫게 하시며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기에 그는 감사하며 귀한 선물로 받았습니다. 어느 부부가 아이가 없어 갓난아기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고 잘 키웠습니다. 그는 어느덧 여대생이 되어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딸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자기가 고아라는 사실과 부모들이 친부모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는 큰 충격을 받고 부모들에게 반항하며, 자기 자식도 아닌데 애지중지 키워 준 것은 위선이라고 폭언까지 하면서 가출을 해 버립니다. 어머니는 너무 마음이 아파 어떻게 하면 자기들의 사랑을 딸에게 바로 전할 수 있을까 고심했습니다. 어머니는 사방에 수소문하여 딸의 거처를 알아내 찾아가 보니, 딸은 없고 방 안의 어지러운 물건들이 그의 방탕한 모습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술병과 소지품들이 난잡하게 흩어져 있어 어머니의 마음은 몹시 괴로웠습니다. 그는 방을 깨끗이 청소한 다음 냉장고에 먹을 것을 다 채워 놓고 편지 한 장을 남긴 다음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녁에 귀가한 딸은 방 구석구석에서 어머니의 사랑의 손길을 느꼈으나 강하게 이를 부정하려다가 몇 줄의 편지에서 그만 통곡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너는 내가 필요하지 않을지 모르나 나는 네가 필요하다.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한다. 매일 밤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돌아와 다오." 그는 어머니의 사랑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각을 다시 하니 낳지도 않은 자기를 이렇게까지 사랑하는 그 사랑은 보통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보다 더 큰 사랑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크게 뉘우치고 돌아와서 효녀가 되었다고 합니다. 깨닫고 보면 내가 부족하기에 사랑을 더 많이 받았고, 내가 죄인이기에 사랑을 더 많이 받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는 모든 사람보다 가장 못된 사람이나 구원을 받았으니 남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이 사실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선물을 받되 일하게 하시는, 즉 일꾼이 되게 하셨음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을 선물로 받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내게 주신 은혜를 따라서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가끔 일하는 것에 대해 불평하며 피곤해서 죽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틈만 있으면 쉬는 일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쉬겠다고 시간을 움켜잡지 마시고 뛸 수 있을 때 열심히 일하십시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아주 푹 쉴 때가 오지 않습니까? 미리 쉬겠다고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휴식할 나이가 옵니다. 일이 있을 때는 일하는 고마움을 잘 모르다가 정년 퇴직한 다음에야 일이 있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또한 병들어서 누워 있게 되면 일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이 병만 나으면 월급 받지 않아도 좋으니 일하겠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렇게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가치를 알게 됩니다. 일한다는 것,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높은 자리 낮은 자리 너무 가리지 말고 할 일이 있다는 것, 그 자체를 귀하게 여기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셨다"고 자기가 인정받은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쓸모있다고 인정해 주시고 능력을 주셨음에 감사하며, 그리고 새로운 기회를 주셔서 일하게 하심에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일을 기뻐하는 자는 행복하고, 일을 의무로 생각하는 자는 노예입니다. 비록 사장(社長)이라 할지라도 그 일을 즐거워하지 않고 마지못해 하며 사장된 그 임무를 무겁게 생각하면 그는 노예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하찮은 일일지라도 일하게 하신 것에 감사하면서 일하면 그는 주인입니다. 일은 은혜요, 일 자체가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셋째, 바울은 핍박과 고난도 선물로 생각했습니다. 고난을 기뻐하는 것이 바울의 철학입니다. 골로새서 1:24에 보면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고난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왜 괴로움을 기뻐했습니까? 심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는 너무나도 은혜를 많이 받았기에 만에 하나라도 이에 보답하는 길이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이라고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주시는 은혜를 전적으로 거저 받기만 하려니 염치가 없어서도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습니까?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수고를 하고 희생도 해야 천국에 가서 체면이 있지, 한평생 공짜로 겨우 턱걸이해서 천당가면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며칠 후면, 우리 교회가 증축이 완공되어 본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이 교회를 위하여 많은 분들이 기도하고 헌금하여 물심양면으로 희생을 치렀습니다. 이렇게 큰 역사를 이루었는데 공짜로 그냥 지나간 성도는 없습니까? 만약 있다면 본당에 들어가실 때에 마음의 부담이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합하여 큰희생을 치르는데 다소라도 보탬이 되고 정성을 기울여야 들어가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에서나 공짜로 통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 은혜를 입었으니 희생을 하고 싶던 차에 매를 맞으니 기쁘고 고난을 당하니 그것을 선물로 기쁘게 받은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고난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고난을 통해서 겸손해지고 강해지고 순수해지고 진실해지고 의로워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가 상상할 수 없는 큰 역사를 이루심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고난에 대해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우 중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신 분이 바이올린 솔로를 하신다기에 콘서트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가진 바이올린의 가격이 2억 원이라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그 고가품을 구경하면서 나무통 하나가 왜 이렇게 비싸야만 하는지 전문가 후배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바이올린을 만드는 재목은 일단 잘라서 수십 년 동안을 그냥 들판에 버려 두어 비를 맞고 햇볕을 받으며 바람에 의해 말리기를 거듭한 후에 정성껏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바이올린의 소리가 좋다는 것입니다. 공감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인격도 마찬가지입니다. 갖은 고난과 희생을 통과해야만 소리가 좋습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맙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아니, 고난을 통한 영광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808년 비엔나에서 대작 「천지창조」가 연주된 적이 있습니다. 그 곳에는 작곡자 하이든도 물론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는 몹시 늙고 병약하여 자기 의자를 끌어당길 힘조차도 없었다고 합니다. 연주가 끝난 다음 감격한 청중들은 모두 기립하여 하이든에게 갈채를 보내고 환호하였습니다. 하이든은 그 갈채를 감당할 수 없다는 자세로 일어서면서 큰 소리로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 작품은 내 것이 아니라 위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된 것이지, 내 작품이 아닙니다"라고 외치며 의자에 앉다가 실수하여 뒤로 넘어지고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말이 하이든의 마지막 말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감사가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모든 것을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자입니다. 모든 것을 보수와 댓가로 여기는 사람은 곧 실망과 실의에 빠집니다. 모든 것을 은혜와 선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진정한 행복과 영광이 있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이 감격, 이 은혜에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은혜는 창조적이요 선물은 생산적입니다. 이 귀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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