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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두려워 말라(이사야 43장 1절~7절)

by 【고동엽】 2023.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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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두려워 말라(이사야 43장 1절~7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끝에서 오게 하라.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믿거나 말거나'라는 제목으로 방영되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외국의 프로그램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인데, 원제(原題)는 'Whether you believe it or not'입니다. 저는 이 방송프로그램을 외국에서도 무척 재미있게 보았었습니다. 내용인즉 신기한 이야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면 높은 건물에서 사람이 떨어졌는데도 죽지 않은 이야기, 큰집에 불이 났는데 다 탄 잿더미 속에서 병아리가 기어 나오는 이야기 같은 것을 보여주고는 "믿거나 말거나"하고서 끝내버립니다.

믿거나 말거나-이 말 자체를 깊이 생각해봅시다. 여러분, 내가 믿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는 가끔 지나친 착각을 합니다. 내가 인정하면 되는 것이고 인정을 안 하면 안 되는 것으로, 내가 믿으면 있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없는 것으로, 내가 납득을 하면 사실이 되고 납득을 하지 못하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말 한심스러운 생각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우리가 인정을 하든 안 하든, 사실은 사실입니다. 'Fact is fact'입니다. 여기에 무슨 동의가 필요합니까? 내가 지지하건 안 하건, 내가 인정하건 안 하건, 내가 믿건 안 믿건, 사실은 사실입니다. 간혹 좀 불량한 아이들이 "난 부모가 없어요"하며 불평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다고 해서 부모가 없나요? 있는 것입니다. "난 사랑 받지 못했어요." 세상에 사랑 받지 않고 태어난 사람도 없고 사랑 받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도 없습니다. 사랑을 못 받았으면 어떻게 살아남았겠습니까? 내 마음대로, 내 주관(主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지요. 내가 믿건 안 믿건 그 사건 자체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목숨을 걸고 믿더라도 사실이 아닌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또 내가 아무리 부인하여도 사실은 사실인 것입니다.

사실(事實)-객관적 진리는 나의 주관적 의견의 동의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믿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냐'입니다. 내가 믿으면 그 사건은 나를 위한 사건이 됩니다. 내가 믿지 않으면 그 진리와 사건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어집니다.

사건 자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만이 차이가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문제는 믿는다는 것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내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지 사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노아의 홍수를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께서 120년 후에 홍수를 내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따라 노아는 산꼭대기에서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며 준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그는 홍수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비가 올 리가 있나? 멀쩡한 하늘에서 무슨 비가 내려? 저 노아 할아버지, 노망드셨나보다. 120년 전부터 잠꼬대 같은 소리만 지껄이고 있으니, 쯧쯧……" 그들은 코웃음치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러던 사람들은 결국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직하게 믿었던 노아는 살아남고, 현명하다고 자처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은 사람들은 물의 심판을 당했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관적인 의견을 과대 평가합니다. 사람이 안다, 사람이 인정한다, 내가 믿는다 안 믿는다 하는 것들이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인지 사람들은 미처 헤아리지 못합니다. 너무도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사람이 죽는다는 것-우리가 믿거나 말거나, 사람은 누구나 죽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이 천국과 지옥을 믿든지 안 믿든지 그것은 알 바 아닙니다.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결국은 내가 믿으면 사는 것이요, 안 믿으면 버림받고 마는 것입니다. 진리와 생명의 길에서 제외됩니다. 특히 '사랑'이 그렇습니다. 믿어주었으면 좋겠는데, 사랑을 받고 있는 자가 그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사랑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되어버립니다. 참으로 답답합니다. 부모님들도 그래서 괴로워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도 자녀들은 믿지를 않습니다. 엄연한 사랑이 있는데도 믿지 않고 탕자가 됩니다.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두려워하지 말라(1절)"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는 창세기 3장 10절에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 : 17)"라고 아담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믿지 않고 그만 선악과를 따먹어버렸어요. 그제야 죄지은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기뻐하시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찾으실 때에 그는 두려워서 숨었다고 대답합니다. 두려움은 곧 심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의 뿌리는 죄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이 두려운 것입니다. 심판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그 사망에 대해 가지는 죄인의 반응이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을 단순히 심리학적인 현상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있습니다마는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두려움을 병리적심리(病理的心理)로만 돌려버릴 수는 없습니다. 두려움은 '실재(實在)하는 것'에 근거합니다. 없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해야 할 일이 있기에 '두려움'이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무서운 것이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답하겠습니다. 두려운 마음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다름없습니다. 심판 받아버린 사람입니다. 화인(火印) 맞은 사람입니다. 벌써 제외되어버린 사람입니다. 두려움-이것은 마지막 보루입니다. 아직도 우리의 마음에 두려움이 존재한다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 떨리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무서워할 줄 안다는 것이기 때문에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과 무서운 사망의 저주를 두려워하는 것---이것이 바로 구원의 시작이며, 경건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더는 소망이 없습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십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두려워하는 대상이 무엇이냐입니다. 사람의 격(格)은 여기서 평가됩니다. 여러분, 죄를 두려워하는 사람과 질병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스로 교만해지는 것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과 배고픈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참된 인간, 참된 그리스도인입니까? 하나님께로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하느냐-이것이 그 사람의 사람됨을 평가해줍니다. 예컨대, 매는 두려워하면서 매를 든 자를 무서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의 채찍을 들고치십니다. 갖은 재난, 질병, 전쟁이 있고 환난과 지진이 있을 때에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하나님께서 들고 계신 매, 막대기는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을 무서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의 일은 두려워하면서 다가올 심판은 두려워할 줄 모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두려워하면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심판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겪는 가난, 질병, 전쟁은 두려워하면서 무서운 지옥의 저주를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겪는 실패와 고통은 두려워하면서 3, 4대까지 내려가면서 자손들이 겪을 고통을 두려워할 줄 모릅니다.

제가 삼십여 년 목회하면서 느낀 것인데, 정말이지 성경은 문자 그대로 사실입디다. 의롭게 살면 수천 대까지 복을 주실 것이고, 불의하게 살면 삼사 대까지 벌을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놀랄 때가 많습니다. 내가 겪는 고통만이 고통이 아닙니다. 내가 한번 삐꺽하고 죄를 범할 때에 삼사 대 후손까지 그 죄의 댓가와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것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은 경건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래서 두렵습니다. 죄로 인한 심판이 두렵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께서 위로해주신다." 창조주 되시고 심판주 되시는 구원의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이런 말을 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 말고는 진정한 의미에서 위로할 자가 없습니다. 이번 여름, 수해(水害)로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직접 방문했던 우리 교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위로할 수가 없더랍니다.

돈 몇백만 원 가지고 물질적인 위로가 되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위로가 된다 할지라도 하루아침에 가정을 잃고 혈육을 잃은 분들에게 그까짓 돈 몇푼이 무슨 위로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현지에 가 보고야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위로하는 것-이것은 참된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건강한 사람이 병든 자에게 위로하는 것,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자에게 몇푼 돈으로 위로하는 것이 정말 위로가 되겠습니까? 큰집에서 사는 사람이 집 없이 방황하는 사람에게 '따뜻하게, 배부르게 사시오. 건강 조심하시오' 한다고 해서 위로가 되겠습니까? 참 위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귀중한 복음을 전해주십니다. "내가 너를 속량(贖良)했다"-이 '속량'이라는 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에 흐르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를 보면, 그들이 지은 죄가 엄청납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제 멸망이 오고 포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요.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실망하고 낙담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지금은 너희 죄로 인하여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가겠지만, 70년 후에는 다시 돌아오게 해주겠다.' 오늘의 본문에 기록된 위로의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놈은 그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 받을 만한 거룩함과 정결과 의가 내게 없음을 내가 안다는 것-이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차한(此限)에 부재(不在)다. 나는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괴롭고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너를 속량하였느니라(I have ransomed you. I gave ransom.).

'Ransom;대속(代贖)'이라는 말을 생각해봅시다. 대신 값을 치렀다는 것입니다. 교육학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에 때린다는 말을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때린다는 말은 하지 말되, 만약 때린다고 했으면 반드시 때려야 한다'-때린다고 해놓고 용서한다며 안 때리고 놔두면 그 용서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용서한다 용서한다 했다가 다 모아서 야단치겠지'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평소에는 용서를 해주다가 한번 야단치게 되면 아무 때는 뭘 잘못했고 아무 때는 뭘 잘못했고 해가면서 야단을 칩니다. 이때에 어린아이들은 내 그럴 줄 알았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못된 짓 한 번 했으면 한 대 맞아야 시원합니다. 본인이 맞건 누가 대신 맞아주건, 맞을 일을 했으면 맞아야 시원합니다. '아! 이제 됐다. 이제 끝났다'-그래야 문제의 해결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랑이 확증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용서하심이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사건을 다시 한번 조명해보시기 바랍니다. 왜 하필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며, 그리고 나를 향하여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 자신을 희생하시는 것입니다. 이 희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대속적인 사랑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너무 감상적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맞을 것을 누가 대신 맞더라도 맞아야 합니다. 그 댓가를 치르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입니다.

미안합니다만 제 자신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1950년 6․25가 일어나던 해, 제가 북한에서 고생을 했습니다. 광산에 끌려갔다가 몇 달만에 구사일생으로 도망을 하여 산에 숨어 있었습니다.

제가 산 속에 숨어 있는 몇 달 동안 저희 아버님께서 식량을 날라다주시어 굴 속에서 그것을 먹으며 연명을 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 저는 아버님의 사랑을 느껴본 일이 없었습니다. 툭하면 때리셨거든요. 무슨 일이든간에 칭찬하시는 일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섭섭하게 생각했었습니다. 심지어는 맞으면서 군소리한다고 더 맞은 적도 많았습니다. "저를 사랑하신다면서 왜 때리셔요?" 이렇게 대들면, "너를 사랑하니까 때리지"하고 다시 때리셨습니다. 매를 많이 맞아서 그런지 어머니의 사랑은 많이 느꼈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별로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평소 그런 심정이었는데, 굴속에서 아버지가 날라다주시는 것을 먹을 때에, 그 위험한 길에 목숨을 걸고 식량을 가져다주셨을 때에, 저는 그제야 사랑을 느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뭇짐 속에다 미숫가루라든가 감자, 고구마 같은 것들을 넣어서 오시는데, 만일 발각되는 날이면 현장에서 총살되는 무시무시한 걸음이었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사랑에 보답해야 되겠다. 아버지께 효도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국군이 북쪽으로 진격해 올라갈 때, 집에 돌아와보니 아버지는 벌써 총살당하고 안 계셨습니다.

저는 효도할 기회를 이렇게 놓쳐버렸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살아 계십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가 대신 죽지는 않았습니까? 나 하나가 바로 되기 위해서 누군가가 고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까지는 누군가가 뼈아픈 값을 지불한 것이나 아닌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애굽과 이디오피아를 속량물로 주었노라. 값을 다 치르었다. 똑똑히 보아라.

너희를 살리기 위해 죽은 자가 얼마더냐? 그래도 내 사랑을 못 믿겠느냐? 내가 너를 속량하였느니라' 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희생적 사랑이 바로 십자가에 계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각별하게 우리를 부르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필요로 한다고 주님께서 개별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 부르십니다. 여기에 사명(使命)이 있습니다. 또한 '너는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주도적이요 창조적인 사랑이 나타나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도 '값을 지불하고 사신(고전 7:23)' 주님의 사랑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사야 7장 18절에서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내가 너희를 속량했다. 지난 일을 잊어라. 지금의 너와는 상관없다. 너는 내 것이다. 네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너 자신을 생각하지 말고 나만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너의 과거는 십자가 위에서 청산되었으며, 내가 보증하는 미래에 너의 가치가 있고 너의 특별한 사명이 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엄청난 축복의 약속, 그 구체성이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21절을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도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속량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너를 지명했다. 너는 내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찬송을 부르라. 나를 사랑하라. 내가 너를 사랑했으니 너는 나를 사랑하라---오늘도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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