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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따르라(요한복음 21장 15절~23절)
베드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首弟子)였습니다.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입니다마는 예수님께서 그의 귀한 신앙고백을 칭찬하시면서 베드로라고 하는 소중한 별명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참된 제자가 되지 못했었습니다.
제자란 스승을 존경하고 신뢰하고 배우고, 그리고 전적으로 본받고 끝까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스승이 고난당할 때에 피신했다면 그는 좋은 제자가 못 됩니다. 스승이 죽임을 당할 때에 홀로 살아남기에 급급했다면 그는 착실한 제자가 못 됩니다. 스승이 아주 어려운 입장에 있을 때에 그를 부인하고 말았다면 그는 더더욱 좋은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체포되고 법정에 가서 재판을 받으시는 바로 그 시각에, 이 베드로라고 하는 수제자는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 뒷전에 앉아 불을 쬐고 있다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됩니다.
부인함으로 말미암아 그는 가슴아픈 과거를 지니게 됩니다. 아마도 그는 뒤에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잡아뗄 수 있단 말인가!'---그래서, 성경이 말한 대로, 예수님이 예언하신 바에 따라서,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하리라" 하고 미리 경고하셨던 대로, 그는 닭이 우는소리를 들으면서 회개하였고, 전설에 따르면 평생을 두고 닭이 우는소리만 나면 벌떡 일 어나 무릎을 꿇고, 지난날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참회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교회의 종탑 위에 십자가 대신 인공 닭 한 마리가 올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닭이 왜 올라가 있느냐고 그곳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아마도 베드로를 참회케 했던 그 닭인 것 같다고 대답합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경고를 주고 잘못을 일깨워 주는 그 새벽닭을 상징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대답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있을 수 없는 실수입니다.
베드로는 본디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평생토록 가슴아파했습니다. 뼈아프게 뉘우치고 다시금 겸손하며, 새삼새삼 경성(警省)하면서 평생을 살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어찌하여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몇 가지로 우리에게 암시해 줍니다.
첫째는 그가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그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피땀 흘려 기도하시는 시간에 이 사람은 쿨쿨 잠만 잤습니다. 깨워도 자고 다시 깨워도 또 잤습니다. 그러다가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둘째는, 스스로 장담을 했습니다. 자기는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을 믿었던 것이지요. 교만한 사람은 무식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모르기 때문에 교만한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사람은 장담을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사람은 정말 약합니다. 누구나 다 약합니다. 그것 을 알았다면 장담을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장담하다가 쓰러졌습니다. 스스로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33절에 보면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죽을지언정 주를 따르겠습니다' 하고 자기를 예외시하고 있는 태도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내가 예수를 부인하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모르시는구먼요. 내가 얼마나 충성된 사람인데요' 하고 장담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특별하게 생각하더니 필경은 특별하게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도망을 치기는 했지만 모른다고 잡아떼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을 특별히 높이더니 특별히 떨어진 것입니다. 호언장담하는 동안에 그는 자기 존재를 몰랐고, 자신의 나약함도 몰랐고, 자기의 진실을 몰랐으며,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귀한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영적인 마음의 귀가 없었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겠고 사흘만에 부활하리라'고 하신 이 결정적인 복음도 그는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 중요한 말씀들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 그저 장담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실수였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했습니다. 사랑이 없어서 주님을 부인하게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제자도를 회복해야 되겠는데 베드로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수차 만나기는 했지만 도저히 떨쳐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 "지난날을 잘못했습니다마는 다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하고 말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어깨가 축 처져 옛날로 돌아갑니다.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 물고기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아마도 속으로는 '예수님, 저를 찾지 마십시오. 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을 제자로 두셨다가는 예수님께서 크게 망신하실 것입니다. 저는 별수 없이 어부 노릇이나 해야 할 주제입니다' 하는 마음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물고기를 단 한 마리도 잡아 올리지 못했습니다. 마음은 지치고 몸은 말할 수 없이 고단했습니다. 이런 때에 예수님께서 몸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는 거두절미하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우리 같으면 으레 지난 일을 한번 짚고 넘어갈 것 같은데,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과거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전혀 내색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부인할 것은 무엇이냐? 부인을 할 양이면 부인하는 것으로 끝낼 일이지 맹세하고 저주까지 할 것은 또 무엇이냐?" 하고 베드로의 아픈 데를 들먹이시지 않고, 다만 '아가파스 메)'----'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실 뿐입니다. 그 리고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자신이 아픈 과거를 상기할 겨를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순간에는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하십니다. 여기에도 생각해야 할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라고 하는 소중한 이름은 어디로 갔습니까? 왜 "베드로야" 하고 부르시지 않았겠습니까? 베드로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늘 '베드로'로 불러 주시던 주님께서 오늘은 '시몬'으로 부르시니 적이 당황했을 것입니다. 15절과 16절, 17절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세 번이나 되풀이하여 부르고 계십니다. 원점으로 돌아가 자연인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옛날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 가운데에 은연중 원인을 지적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실패하였느니라' 하고 말입니다. 사랑은 절대적 관계이며 위탁적인 데가 있습니다. 전적으로 위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재기(再起)해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주님께서 기회를 주십니다. 다시 일어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일어나되, 일어날 수 있으려면 몇 가지 각오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내 양을 먹이라'---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은 추상적인 감상(感傷)이 아닙니다. 말만 하는 사람은 언제나 무력하고 복잡한 생각으로 끝나고 맙니다. 또한 비평으로, 시비로 시종합니다. 으레 원망으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진실한 사랑에는 말이 필요 없는 법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가 위하여 죽은 소중한 내 양을 먹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실천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나 오늘에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묵묵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실천하는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역경에서도 굳게 설 수 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인가를 예고해 주십니다.
지난날처럼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하고, 이미 부인한 베드로인데도 불구하고 마지막을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너는 부인했다가 긍정할 때도 있고, 열심히 하다가 약해질 때도 있고,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할 때가 있겠으나, 마지막에는 나를 위하여 죽을 것이니라. 큰 고난을 당할 것이니라"---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질 것이라고 예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릴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시간에 좀 심각한 질문을 한 가지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몇 살까지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죽을 때가 되어 병원에 입원을 했다면 며칠 동안이나 입원했다 떠나면 좋겠습니까? 여러분의 장례식은 어떤 모습으로 치러질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결코 먼 뒷날의 이야기도 아니고 남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나의 죽음, 나의 종말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이것은 기도 제목입니다.
사람에게는 그가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보다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어차피 우리가 한번은 꼭 가야 하겠는데, 어떤 모습으로 가야 합니까? 어떤 부자가 평생을 인색하게 살다가 죽었는데, 그 아들이 아버지의 무덤 비석에 비문을 쓰기 위하여 어떤 사람을 찾아가 문안(文案)을 부탁했습니다.
"자네 아버지가 어떻게 살았던가?" 아들은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글쎄요" 하고 눈만 껌뻑거리고 있으려니까 그 사람이 말합니다. "이렇게 쓸까? '먹다, 죽다' 라고."
여러분, 저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설교를 좋아합니다. 그분은 마지막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성대한 장례식을 원치 않습니다. 나의 장례식을 집전하는 분은 부디 너무 길게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조사(弔辭)에서는 나의 노벨 평화상에 관하여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학위, 명예 등에 관해서도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정의를 위해 외쳤다고만 해 주십시오. 오직 인류를 사랑하고 인류에게 봉사하였다고만 말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장례식에서는 조사(弔辭)를 하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할 것 같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을 어떤 사람이라고 결론지어 말할 것 같습니까? 심각하게 생각해 두어야 할 문제입니다. "베드로야, 너는 이렇게 죽으리라. 그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하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결론부터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일생동안 여러 번 실패를 했습니다. 센키에비치의 「쿠오바디스」에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도망가다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발길을 돌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휘청휘청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근사했습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고, 그의 시신이 묻힌 곳에 베드로 대성당이 섰지 않습니까? 참으로 영광되이 죽은 것입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생각을 하고 여기서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나?---이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절대적 관계입니다. 직선적 관계입니다. 베드로가 전에 는 예수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으나 오늘은 그런 소리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밑바닥에는 여전히 못된 비교 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옆에 있는 요한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19-20절)" 하고 말씀합니다마는 여기서 '그 제자'란 요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익명의 표현은 요한복음의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는데, 사도 요한의 자신의 이름이기 때문에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 가 예수님 옆에서 따르는 것을 보고 신경이 쓰였던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은 예수님을 부인했고 도망갔었는데, 요한은 법정에도 갔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도 따라갔고,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의 어머니를 부탁 받기도 한 사람입니다. 어느 모로 생각해도 요한이 베드로 자기보다는 훌륭하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 요한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여쭈어 봅니다. 이 물음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의 운명은 어떠합니까? 그는 어떻게 죽을까요? 그에게 돌아갈 보상은 무엇입니까?' 하는 궁금증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물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매우 강하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2절)."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비교 심리는 큰 문젯거리입니다. 시기나 질투는 죄 중에서도 고급 죄입니다. 이 죄는 기도하는 데도 있고, 선한 일 하는 데도 있고, 성직자에게도 있습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모두가 인정할 만큼 정결하고 경건하게 일생을 살아 온 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마귀들이 그를 시험하였습니다. 돈으로 시험하고, 여자로 시험하고, 직위로 시험하고…… 별의별 방법을 다 써서 시험하였으나 수도사는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귀들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럴 때에 어느 마귀가 자신 있게 나섰습니다. "내가 시험을 걸겠다" 하고 수도사에게 다가갔습니다. "수도사님!"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왜 그래?" 수도사가 의연한 태도를 보입니다. 마귀는 점잖게 말합니다. "수도사님의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대번에 수도사의 얼굴빛이 달라지더랍니다.
여러분, 시기심이나 질투심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의 근심 걱정과 모든 잘못의 밑바닥에는 반드시 시기 질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여 신경을 곤두세우는 마음이 있는 동안에는 자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기 성실, 자기 진실, 자기 믿음을 상실하게 되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을 다 망각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자기 페이스를 잃고 마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마침내는 자기 존재까지도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네게 무슨 상관이냐?"---"What is that to you?" 곧 "It's not your job."이라고 못박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너의 문제가 아니다. 남의 일에는 흥미를 가지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남의 일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은 자기 일에 태만합니다. 뭐니뭐니해도 우리에게는 나 자신의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내 영혼의 문제, 내 죽음의 문제, 내 영생의 문제만큼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요새 사람들은 대체로 사회 문제, 정치 문제에 대하여 너무 많이 알고 또 흥미가 깊습니다. 그렇게 정신을 팔다 보면 내 정신을 못 차리게 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남자들 가운데에는 자기 아내에 대해서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내도 남입니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남편도 내가 아닙니다. 자식 또한 내가 아닙니다. 별로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마는, 술 좋아하는 남편이 그릇된 짓 많이 하고 술이 잔뜩 취해서 집에 돌아올 때에는 미상불 조금 미안한 마음이 있답니다. 아까운 돈을 쓸데없는 것에 낭비하고 들어오자니 아내에게는 물론 자식들 보기에도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으로 귀가하는데, 아내가 문간에서부터 '바가지'를 긁고 난리를 치면 그만 신이 난답니다. 자기도 못된 남편이지만 아내도 좋은 아내는 못 된다는 동류 의식(同類意識)으로 자위(自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아내가 "아이고 여보, 하루종일 수고 많이 하고 이렇게 밤늦게까지 시달리시느라 애잡수셨어요. 고단하시지요?" 하고 따뜻하게 나오면 남편은 '아, 나는 나쁜 놈이구나!' 하고 가책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남의 탓하지 말고 내 스스로가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되면 그만입니다. 자식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애써 자식 교육 을 운위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가르치고 어떻게 키우겠다고 계획표를 짤 것도 없습니다. 부모된 자 스스로 덕을 쌓아 훌륭한 부모가 되고 보면 자식 교육은 따로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다려 보면 절로 좋은 자식이 됩니다. 훌륭한 부모 밑에서 그릇된 자식이 나오는 법은 없으니까요.
아무쪼록 남의 일에 열을 올리지 맙시다. 세상이 이처럼 어지러운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합니다.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내 할 일에 충실하면 되겠는데, 저 할 일 제쳐두고 남의 일을 따지고 있습니다. 남의 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하는 데서 시비가 생깁니다. 그렇게 하고 있을 만큼 시간이 넉넉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만 열중해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한 사람대로, 병든 사람은 병든 사람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일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어떤 사람은 높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천한 일을 하는 것 같으나 역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당장 순교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어떤 사람은 평생토록 선교하느라 많은 고생을 겪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합니다. 각자에게 지정된 길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나에게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반드시 부자라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했으면 실패한대로, 역경은 역경 그대로, 환난은 환난대로, 그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양하게 역사 하십니다. 우리들 하나하나에게 주신 것이 따로따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저할 것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요한은 요한대로, 야고보는 야고보대로, 스데반은 스데반대로, 바울은 바울대로 할 일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저가 나와 같아야 되고, 내가 저와 같아야 한다는 법이 없습니다. 더욱이 저가 나보다 못해야 되고, 내가 저보다 나아야 된다는 법도 없습니다. 그런 착각은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보상(補償)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남이 면류관을 얻든 못 얻든 내가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받을 영광과 내가 받을 면류관을 생각할지언정 남의 그것에 대해서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이어야 합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새겨듣고 다시 새길 말씀입니다. 쓸데없이 남에게 신경을 써서 남이 받아야 할 상급이 나보다 크냐 작으냐, 비교하면서 시기하고 질투하다 보면 마침내 자기를 잃어버리고 마는 엄청난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남녀 관계에서도 참으로 답답한 사람이 있는 것을 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신경 쓰기에도 바쁜데,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쓰면서 자기 존재를 잃어버리는 가련한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며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데 쓸데없는 생각에다 정력과 시간을 낭비한 단 말입니까?
"너는 나를 따르라"----주께서 내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모름지기 사랑을 회복하십시다.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 관계를 정립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삶을 영위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남의 달란트에 마음쓰느라 내 달란트 하나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맙시다. 나에게 향한 하나님의 경륜과, 나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 내가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길이 따로 있음을 알아서 내게 맡겨진 직분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게 맡기신 사명,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내게 주어진 현실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그 현실임을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남이 받을 상급이 아니라 내가 받을 상급을 바라보고 나아갈 줄 아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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