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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신학과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공통점과 차이점

by 【고동엽】 2010.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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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 신학과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공통점과 차이점   

 

 

 종교 개혁자 캘빈은 초대 교회 신학자들 중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를 존경하고 그의 신학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캘빈이 아우구스티누스를 맹목적으로 따른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비판하기도 하였고, 또 때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보완하기도 하였다.

 

 

 

그리스도론

 

루터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를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인성의 편재ubiquity를 주장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편재해 있으므로, 성찬의 빵 속에 그리스도의 몸이 존재한다고 하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캘빈은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님 우편에 있으므로 성찬의 빵 속에 그리스도의 인성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후에 루터파에서는 캘빈파의 이런 주장에 대해 ‘extra Calvinisticum’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extra Calvinisticum’이란 하나님의 영원한 성자는 - 화육 후에도 - 인간 본성과 연합하여 한 인격을 이루었으나 육체에 제한되지 않았다는 교리이다. 캘빈주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넘어서도 존재하는 성자의 존재가 루터파의 속성의 교통이란 교리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루터파 신학자들이 듣고 그런 개혁파의 교리에 대해 “저 캘빈주의적인 이외” 理外, illud extra Calvinisticum라는 별명을 붙여준 데서 이 말이 유래했다.1

 

캘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말한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을 떠나지 않고 하늘에서부터 내려왔으며, 놀랍게도 기꺼이 동정녀의 태에서 태어났으며, 지상에서 살았으며, 십자가에 달렸다. 하지만 그는 태초부터 행하던 대로 항상 세계를 채우셨다.”???2

 

루터파가 보기에는 extra Calvinisticum이 생소하게 보였지만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도 같은 주장을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기독교 교리는 신성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날 때 인간의 본성과 혼합되어 우주에 대한 통치를 포기하였거나 또는 상실하였거나 혹은 작고 제한된 물질적 실체인 저 육체에 이양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3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가 우리를 떠났으나, 보라! 그가 여기에 있다. 그는 우리와 오랫동안 있을 수 없었으나 그는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그가 결코 떠난 일이 없는 그 곳으로 돌아갔다.”???4 요컨대 extra Calvinisticum은 캘빈파의 독특한 교리가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전통적인 신학자들이 계속 주장해 온 교리였다.

 

 

 

인간론

 

캘빈은 인간의 죄에 관해서 중세 신학자들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아담의 죄를 탐식에 의한 무절제로 간주하는 것일반적인 생각은 유치하다”하고 말하였다.5 이것은 하나의 과실을 먹지 않는 데 모든 미덕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것과 같다. 캘빈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교만이 모든 악의 시초이었다고 선언한 것은 옳다. 사람이 야심에 의해 자기의 마땅하고 바른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본래의 상태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캘빈은 “우리는 모세가 기록한 유혹의 본질에서 더욱 완전한 정의를 얻어야 한다. 여인이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뱀의 속임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났기 때문에 불순종이 타락의 시초였다는 것은 이미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를 보완하려고 하였다.

 

캘빈은 인간 본성의 타락을 주장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자연적 은사와 초자연적 은사를 구별하였다. 캘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의견이 상식화된 것을 나는 기쁘게 생각한다. 그 의견은 사람의 자연적 은사는 죄로 인하여 사람 안에서 부패하였으나 초자연적 은사는 사람에게서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이 문장의 후반부는 하늘 생명과 영원한 복락을 얻는 데 충분했을 만큼의 믿음과 의의 빛을 의미한다고 일반적으로 이해한다.” 캘빈은 이 초자연적 은사가 인간의 타락에 의해 제거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그것들은 제거된 것이라고 추론한다.” 그러나 “사람이 선과 악을 구별하며 이해하고 판단하는 이성은 자연적인 은사이기 때문에 그것은 완전히 말소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으로 약화되고 부분적으로 부패되어 기형적인 잔해가 남았다”하고 캘빈은 말하였다6

 

득의론

 

득의론에 있어서 캘빈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랐으나 그러나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우선 캘빈은 회개와 중생을 동일시하였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나는 회개를 중생으로 해석한다. 중생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인데, 그 형상은 아담의 범죄를 통해 일그러지고 말살된 것이다” 라고 캘빈은 말하였다. 또한 캘빈은 중생과 성화를 동일시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 중생에 의해 그리스도의 유익을 통해 하나님의 의 속으로 회복된다. 그리고 참으로 이 회복은 한 순간이나 하루나 한 해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속적이고 그리고 때로는 늦은 진전을 통해 하나님이 그의 선택자 안에서 육의 부패를 씻고 그들을 죄로부터 정화하며 그들을 자신에게 성전으로 봉헌하게 한다. 그리고 그들의 지성을 참된 순결로 갱신하여 그들이 그들의 삶을 통해 회개를 실천하고 이 전쟁이 죽음에서만 끝날 것임을 알게 한다”라고 캘빈은 말하였다.7

 

이런 점에서 캘빈과 웨슬리는 달랐다. 캘빈은 중생 안에 성화를 포함시킨 반면 웨슬리는 중생과 성화를 출생과 성장의 관계로 구별하였다. 웨슬리는 그의 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새로운 탄생은 성화와 동일하지 않다. 참으로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당연하게 여겨진다. 특히 한 저명한 저술가가 그리스도인의 중생의 본질과 근거들에 관한 그의 최근의 논저에서 이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 논저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반론들을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다음은 명백한 것이다. 이 논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중생을 점진적인 일, 즉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처음 전향한 시간 이후 늦은 속도로 영혼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틀림없이 성화에 대해서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생, 즉 새로운 출생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다. 중생은 성화의 일부이지 전체가 아니다. 중생은 성화에 들어가는 문, 그것에 들어가는 입구이다. 우리가 다시 태어날 때 우리의 성화, 우리의 내적, 외적 거룩함은 시작된다. 그 후 우리는 점진적으로 ‘우리의 머리인 그에게까지 자라도록’ 되어 있다. 사도의 이 표현은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예찬할 만하게 밝혀주며, 그리고 나아가서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있는 정확한 유비를 지적해 준다. 한 아기는 여인에게서 한 순간 혹은 적어도 매우 짧은 시간에 태어난다. 그 후 그는 어른의 신장에 이르기까지 점차 서서히 성장한다. 마찬가지로 한 아이가 하나님에게서 짧은 시간 - 한 순간이 아니라고 한다면 - 에 태어난다. 그러나 그는 그 후 늦은 속도로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장의 분량에까지 자란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연적 출생과 우리의 성장 사이에 있는 동일한 관계가 우리의 새로운 출생과 우리의 성화 사이에도 있다.”8

 

득의와 중생의 관계에 대해 캘빈은 이 둘이 동일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분리되는 것도 아니라고 보았다. 우선 캘빈은 득의와 중생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구별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득의와 중생을 동일시한 루터파의 오지안더Osiander를 비판하였다. “오지안더는 중생의 저 선물과 이 값없는 용납을 혼합하고 그것들을 하나요 동일하다고 주장한다”???9고 캘빈은 말하였다. 캘빈은 득의와 중생은 분리되지 않지만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득의의 은총은 중생과 분리되지 않으나 그것들은 구별된다. 죄의 흔적들이 의인들 안에 항상 남아 있다는 것이 경험에 의해 매우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들의 득의는 삶의 새로움을 향한 개혁과는 전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롬 6:4 참조. 하나님은 그의 선택자 안에서 이 두 번째 점을 시작하고 그 안에서 일생을 통해 점진적으로 때로는 천천히 진보시키므로 그들은 항상 그의 심판대 앞에서 사형 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10

 

캘빈은 득의론에 있어서 의의 분여가 아니라 의의 전가임을 분명히 주장하였다. 캘빈은 “우리는 신앙만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값없는 의를 얻는다”11라고 말하였으며, 득의는 “하나님이 그의 사랑 속에서 우리를 의로운 사람들로 받아들이는 것”12이라고 말하였다. 캘빈은 오지안더가 ‘justify’를 ‘to make righteous’로 설명한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캘빈은 오지안더가 ‘본질적 의’라고 하는 관념을 주장하여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그의 본질과 그의 성질의 주입에 의해 본질적으로 의롭다”고 주장한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오지안더는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값없는 용서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의롭게 되는 것이며, 의는 값없는 전가가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본질이 불어넣는 거룩함과 의로움”이라고 하였다고 캘빈은 비판하였다.13 캘빈은 오지안더의 이런 주장에 대해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혼합하는 것”이라고 한 마디로 비판하였다.14

 

캘빈은 오지안더의 주장에 반해 득의와 중생을 구별하였지만, 캘빈은 득의와 중생을 분리시키지는 않았다. “삶의 실제적 거룩함은 의의 값없는 전가와 분리되지 않는다”고 캘빈은 말하였다. 또한 캘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지혜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전 1:30.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동시에 성화하지 않고 아무도 의롭다 하지 않는다. 이 유익들은 영원하고 분리할 수 없는 띠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그가 그의 지혜로 조명한 자들을 그가 구원한다. 그가 구원한 자들을 그가 의롭다 한다. 그가 의롭다 한 자들을 그가 성화한다.”???15 또한 캘빈은 “그리스도가 부분들로 나누어질 수 없듯이 우리가 그 안에서 인식하는 이 두 가지, 즉 의와 성화는 함께 결합되어 분리될 수 없다”???16고 말하였다. 캘빈은 득의와 중생의 관계를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하였다. “우리는 행함 없이 의롭다 함을 받지 않지만 행함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참여에 있어서 성화는 의와 마찬가지로 포함되기 때문이다.”???17

 

캘빈은 오지안더를 비판하면서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혼합에 대해서는 반대하였지만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은 주장하였다. 캘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머리와 지체들의 저 연합, 우리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내주內住 - 요컨대 저 신비적 연합 - 는 우리가 최고의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것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들 안에서 그의 참여자가 되게 한다. 우리는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를 우리 밖 멀리서 관조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그를 입고 그의 몸에 접붙여지기 때문에, 요컨대 그가 우리를 그와 하나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18 마치 칼케돈 신조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는 것이 아니라 연합되는 것이라고 한 것처럼, 캘빈은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혼합을 주장하는 것은 비판하였지만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은 주장하였다.

 

캘빈과 달리 아우구스티누스는 득의를 의롭다 하는 것과 의롭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우선 아우구스티누스는 「영과 문자」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의롭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단어는 ‘의롭게 만들어진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즉,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는 그 분에 의해 의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는 불경건한 자가 의롭게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19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한편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의롭다고 간주된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의롭다 함을 받을 것이다’는 ‘의롭다 여겨질 것이다,’ ‘의롭다 간주될 것이다’를 뜻한다고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것처럼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즉 의롭다 여겨지거나 의롭다 간주되려고 한 경우와 같다.”???20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의롭다함을 받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살 수 있는가? 성화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거룩하게 살 수 있는가?” “은총이 의롭다 하는 것은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의롭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총이 먼저 오고 그 다음으로 선행이 온다.”???21 요컨대 아우구스티누스는 득의 속에 의롭다 인정받는 것과 의롭게 되는 것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캘빈은 의롭다 인정받는 것은 득의라 하고 의롭게 되는 것은 중생 또는 성화라고 하였다. 반면에 웨슬리는 중생과 성화를 구별하였다.

 

 

 

교회론

 

캘빈은 교회론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교회를 신자들의 어머니로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는 우리 주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그의 교회를 사랑합시다. 전자를 아버지로서, 후자를 어머니로서”22 라고 말하였다. 캘빈은 이 어머니가 “우리를 태속에 품고 낳고 그의 가슴 속에서 우리를 기르고 마침내 우리가 가사적인 육체를 벗고 천사들처럼 될 때까지마 22:30 그의 지킴과 지도 아래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생명으로 들어갈 다른 길이 없다”???23 하고 말하였다. 또한 캘빈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톨릭적 혹은 보편적이라고 말해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나누이지 않는다면 - 그것은 일어날 수 없다 - 둘 혹은 세 [교회가]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선택한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연합하여, 한 머리에 의존한 것처럼 한 몸을 형성하며, 몸의 지체들처럼 연합되고 결합된다.”???24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일치성을 포용하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고백한다면 거기에 무슨 진실성이 있겠는가? 그들은 가톨릭교회 안에 들어와 평화의 유대와 일치의 교제 속에서 사랑의 뿌리를 가지게 된다. 그들이 뿌리와 결합하여 살지 않는다면 외양이야 어떠하든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25 “가톨릭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몸이며,” “이 몸 밖에는 성령이 아무에게도 생명을 주지 않는다”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였다.

 

캘빈은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여기서 그것이 무엇을 뜻했는지를 고찰하려고 한다. 캘빈이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교회가 그 자체로 구원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고 말씀과 성례를 통해 구원하는데,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구원하는 권능은 하나님에게 있지만, 그는 바울이 증거한 것처럼 복음의 선포 안에서 그것을 나타내고 드러낸다.”???26 캘빈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하여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에 따라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처럼 많은 양들이 밖에 있으며 많은 이리들이 안에 있다”???27라고 말하였다. 캘빈이 아우구스티누스처럼 교회 안에 많은 이리들이 있다고 말했을 때 교회가 그 자체로 구원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한 것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교회의 권위와 성서의 권위 사이의 관계의 문제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종교 개혁자들 사이에 있었던 가장 큰 쟁점이었다. 종교 개혁자들은 성서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 위에 둠으로써 성서적 근거에서 교회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캘빈은 성서의 권위를 최 우위에 두었으며 감독이나 지방 교회 회의나 세계 교회 회의의 결정은 성서에 일치할 때만 권위를 가지는 것으로 보았다. 요컨대 교회의 권위를 성서의 권위에 종속시켰다.

 

캘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의 권위를 성서의 권위 위에 둔 듯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한 문장을 해석하기 위해 고심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를 비판하는 글에서 “나로서는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았을 경우 복음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28라고 말했다. 캘빈은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다만 우리도 또한 사실로 고백하는 것을 가리키려고 했을 뿐이다. 즉, 아직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계명되지 않은 사람들은 교회에 대한 존경에 의해 가르침을 받을 마음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계속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29 우리는 이 한 구절을 가지고 교회의 권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는 캘빈의 견해와 다르다거나 혹은 캘빈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바르게 해석했다고 결론을 내리거나 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 문제는 좀더 깊은 검토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구약성서 정경은 후의 감독들의 모든 편지들보다 절대적으로 더 탁월한 위치에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감독들의 편지들이 진리로부터 벗어났을 경우 논박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즉, 권위나 학식이 더 많은 감독들에 의해서나 총회의 권위에 의해 비판받을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총회라 하더라도 지역적 총회보다는 세계적 총회가 더 권위가 있으며, 앞의 총회는 후의 총회들에 의해 가끔 수정을 받는다고 한다.30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는 신구약성서 정경만이 절대적 권위를 가지며 감독이나 지역 총회나 세계적 총회는 상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전술한 캘빈이 인용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은 교회의 권위를 성서의 권위 위에 둔 말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워필드의 해석처럼,31 아우구스티누스가 성서에 대한 증거를 위해 교회를 언급한 것은 교회를 성서에 대한 증인으로 본 것이지 성서에 대한 유권자로 본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는 캘빈의 견해와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성례론

 

캘빈은 성례론에 있어서도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랐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츠빙글리나 캘빈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루터와는 달리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으로는 편재하지만 그의 인성으로는 하늘에 있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르다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하나님으로서는 모든 곳에 전체적으로 임재하며 또한 하나님의 동일한 성전에 거하지만 참된 몸으로는 하늘 어떤 곳에 있음을 의심하지 마십시오”???32 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츠빙글리처럼 성찬을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의식으로 보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는 구절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그의 살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고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쁘고 유익하게 기억 속에 간직해야 한다”???33 하고 말하였다. 이 구절은 츠빙글리의 견해를 지지해 주는 것 같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는 그의 몸과 피의 유익한 음식을 우리에게 주었다”고 말했으며 “만약 어떤 것을 성례를 통해 가시적으로 먹는다면 진리 안에서 영적으로 먹고 영적으로 마신다”???34고 말했다. 이 구절들은 성찬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의식이라는 츠빙글리의 설명을 넘어서고 있음이 분명하다. 요컨대 성찬론에 있어서 루터와 츠빙글리와 캘빈 중 캘빈의 입장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과 가장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결언

 

필립 샤프Philip Schaff가 캘빈과 아우구스티누스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적절하다고 하겠다. “캘빈은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 자라났으나 그것의 만연된 부패로부터 성서라고 하는 성으로 도피하여 교황권에 대한 가장 무서운 적이 되었다. 만일 아우구스티누스가 16세기에 살았다고 한다면 그는 아마 종교 개혁자들과 반쯤 동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시적 교회의 일치를 높이 평가한 점과 그리고 분리주의적인 도나투스파에 대해 취한 행동을 미루어 볼 때 십중팔구 로마 교회 안에서 복음주의적 가톨릭주의 학파의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다.”???35 캘빈을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은 불가시적인 교회의 가톨릭성을 믿었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분리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불가시적인 교회의 거룩성을 믿었기 때문에 가시적인 가톨릭 교회 안에 타락한 자들이 있다고 해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고 하겠다.

 

 

 

1. Cf. E. David Willis, Calvin’s Catholic Christology (Leiden: E. J. Brill), 1 ff.

 

2.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2.13.4. (이하 Inst.라 약함).

 

3.  Augustine, Letters, 137,2,4, A Select Library of the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First Series, ed. Philip Schaff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56), 1:474. (이하 NPNF 1이라 약함).

 

4. Augustine, Confessions, 4.12.19,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53-1969), 7:87. (이하 LCC라 함).

 

5. Inst., 2.1.4.

 

6. Inst., 2.2.12.

 

7. Inst., 3.3.9.

 

8.  John Wesley, Sermons: “The New Birth,” Ⅳ, 3 (S. Ⅱ, 239~40), quoted in Robert W. Burtner and Robert E. Chiles,ed. Compend of Wesley’s Theology (New York: Abingdon Press, 1954), 171~72.

 

9. Inst., 3.11.6.

 

10. Inst., 3.11.1.

 

11. Inst., 3.11.1.

 

12. Inst., 3.11.2.

 

13. Inst., 3.11.5~6.

 

14. Inst., 3.11.10.

 

15. Inst., 3.16.1.

 

16. Inst., 3.11. 6.

 

17. Inst, 3,16,1,

 

18. Inst., 3.11.10.

 

19. Augustine, on the Spirit and the Letter, 45, LCC 8:228.

 

20. Ibid., LCC 8:229

 

21. Augustine, To Simplician - on Various Questions, LCC 6:388.

 

22. Augustine, Ps. 88.2.14, Corpus Christianorum Series Latina (Tournhouti: Typographi Brepols, 1956), 39:1244, 33~35.

 

23. Inst., 4.1.4,

 

24. Inst., 4.1.2,

 

25. The Letters of St. Augustine, Letter 51.2, NPNF 1 1:318~19.

 

26. Inst., 4.1.5,

 

27. Inst., 4.1.8,

 

28. Augustine, Against the Epistle of Manichaeus Called Fundmental 5,6, NPNF 1 4:131.

 

29. Inst., 1.7.3.

 

30. Augustine, on Baptism 2.3.4, NPNF 1 4:427.

 

31.  Benjamin B. Warfield, Calvin and Augustine, ed. Samuel G. Craig (Philadelphia: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71), 451.

 

32. Augustine, Ep. 187.13.41, Obras de San Agustin (Madrid: Biblioteca de Autores Cristianos, 1958-1975), 11a, 564. Also cf. Inst. 4.17.28,

 

33. Augustine, De Doctrina Christiana 3,16.24, NPNF 1 2:563.

 

34.  Sermo, 131,1.1, quoted in E. Portalie. A Guide to the Thought of Saint Augustine trans. R. J. Bastian (Westport, Conn.: Greenwood Press, Publishers, 1975), 257.

 

35.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2), 8:540

 

이 양 호 연세대학교 교회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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