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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의 율법관 비교

by 【고동엽】 2010.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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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과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의 율법관 비교

  1. 들어가는 말

 

  주지된 바와 같이, 칼빈은 신구약 성경책들 거의 전부에 대한 주석을 출판하였다. 그 가운데 1548년(개정판: 1556)에 세 옥중서신과 함께 출판된 갈라디아서의 주석도 들어 있다. 칼빈의 갈라디아서 주석은 양적으로 보자면 비교적 적은 분량의 주석 책에 속한다. 톨룩(A. Tholuck)이 편집한 라틴어판에서 71쪽을 차지할 뿐이다. 칼빈이 저술하여 출판한 신구약 주석 전체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분량이다. 단순히 양적인 분량으로 중요성의 인식의 정도를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시편이나 이사야서, 예레미야서와 같이 엄청난 분량으로 주석을 저술한 경우와 비교해보았을 때, 적어도 주석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겠다. 그러나 칼빈이 갈라디아서와 에베소서를 가지고 연속강해설교를 했으며 방대한 분량의 이 설교들을 책으로 출판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결코 칼빈이 바울서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깊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칼빈과 달리 루터는 신구약 성경책들 중 선별적으로 몇 권만을 주석하였는데, 그 중에 두 권의 갈라디아서 주석이 포함된다. 첫 주석은 1516-17년 겨울에, 즉 95개조 반박문을 써 붙이기 전에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갈라디아서를 강의한 것을 손을 보아 1519년에 주석으로 출판하였다. 칼버(Calwer) 판으로 281쪽 분량이다. 루터는 1531년에 다시 한 번 갈라디아서를 강의하였는데, 이 강의내용을 그대로 1535년에 갈라디아서 주석으로 출판하였다. 분량이 훨씬 많아진 이 주석을 클라인크네히트(H. Kleinknecht)가 여러 부분들을 생략하고 줄인 채 번역·출판하였는데도 모두 346쪽이나 되었다. 루터는 그렇게 "말이 많아진 "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게 된"(마 12:34) 때문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신앙고백의 조항이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고 자신의 모든 신학적 사고 가운데 밤낮으로 철저하게 스며들고 흘러넘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의 주석 서문에서 고백하였다. 루터는 늘 갈라디아서를 가까이 하여 연구하고 그 교훈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이 서신을 “나의 케트 폰 보라(Keth von Bor)다”(WA 1, Nr. 146)고 말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루터의 1531년 강의내용을 출판한 갈라디아서 주석을 기본으로 하여 칼빈의 갈라디아서 주석과 비교하면서 서로의 율법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루터는 1519년에 강의한 갈라디아서 주석에서도 이미 이신칭의 신학에 대한 나름대로의 깊은 연구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나 1531년의 것이 바울사상에 대한 훨씬 깊고 철저한 해석을 제공해주며 성숙한 루터신학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칼빈과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들에 대한 많은 것을 비교·연구할 수 있겠으나 우리의 논문에서의 관심은 그들이 각기 어떤 율법관을 가졌는가의 문제다. 두 종교개혁자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구호로 표현되는 근본적인 종교개혁의 신학원리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일치하였고, 그들은 공통으로 당시 교황파 신학자들의 공로주의 구원관에 반대하여 그들의 저서들과 설교들에서 전투적인 태도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을 분명하게 그리고 자주 천명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관심과 강조점에 있어서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다. 특히 율법관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어떤 저작보다 두 저자의 갈라디아서 주석들에서 그들의 율법관의 특징과 차이점이 가장 잘 드러나게 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헬라어: νόμος, ‘노모스’)”라는 단어가 집중적으로(32회) 나오고 있고, 율법의 목적과 시한(時限), 율법의 아브라함 언약 및 그리스도의 관계, 율법의 행위와 믿음 및 율법과 성령의 대조 등에 대한 일련의 교훈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루터와 칼빈이 율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갈라디아서의 구절들을 주석하면서 각기 가지고 있는 율법관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자주 피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며 또 각각의 견해를 나란히 비교해서 볼 수 있겠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논문에서 루터와 칼빈이 주석하고 있는 갈라디아서의 모든 율법 관계 구절들에 나타난 그들의 견해들을 다 자세하게 살펴볼 수는 없다. 그래서 그들 각기의 율법관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다고 생각되는 다음과 같은 몇 곳을 선별하여 집중적으로 비교·연구해보고자 한다: “서신의 중심사상,” 2:16, 3:19-25, 4:4-5, 5:1-4, 5:13-15. 아래에서 약간의 부연설명을 덧붙이자면:

 

루터와 칼빈은 각기 본격적인 갈라디아서 주석에 들어가기 전 맨 앞머리에서 “개요” 내지는 “서신의 중심사상”을 간추려서 설명해주고 있다. 2:16은 칭의를 얻는 길이 “율법의 행위”에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있는지에 대하여 압축적으로 선언해주고 있는 구절이다. 3:19-25에서 바울은 율법의 목적과 한시성, 그리고 아브라함의 언약과 믿음,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해주고 있다. 4:4-5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으로서의 율법에서의 속량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5:1-4에서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율법의 계명 준수와 은혜 및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5:13-15에서는 율법에서의 자유와 무율법주의의 문제 및 율법과 사랑의 실천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취급 방식: 위에서 선택한 각 부분을 따라, (1) 루터의 갈라디아서 ‘1531년 갈라디아서 강의’와 (2) 칼빈의 ‘갈라디아서 주석’에 나타난 율법관을 순서대로 다루고, 이어서 (3) 두 개혁자들의 율법관을 비교하는 식으로 전개하겠다.

2. “개요”/“서신의 중심사상”에서의 율법관 비교

(1) 루터는 ‘강의’ 맨 앞에 상당히 길게 서술한 “서신의 근본사상”에서 다음과 같은 율법관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과 같은 여러 종류의 의가 있다. 황제나 군주나 법률가가 논하는 정치적인 의, 인간이 만든 전통들이 가르치는 의식적(儀式的)인 의, “모세가 가르치는 율법 또는 십계명의 의.” 그런데 기독교의 의 즉 믿음의 의는 이러한 종류의 의(義)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율법은 세상 모든 것 중 최고이지만 양심에 평안을 가져다주기에는 어림도 없으며 단지 슬픔과 절망을 가져다 줄 뿐이다.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곤고한 양심에게 오직 한 가지 구원의 수단이 있는데, 곧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의 약속인 믿음의 의를 붙잡는 길이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의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능동적(aktiv)인 의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정해주시는 믿음의 의는 “완전히 수동적(völlig passiv)”이며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것을 받게 되는 그런 의이다. 새 사람에게는 율법은 아무 상관이 없고 반면에 은혜 아래 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모세는 가버린다. 율법과 은혜, 능동적인 의와 수동적인 의, 그리고 모세와 그리스도를 구별할 줄 아는 기술을 배우도록 하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이시라는 것을 확실하게 아는 자는 자신의 직장에서 마음속으로부터 그리고 기쁨으로 선을 행하며 위에 있는 권세자에게 사랑으로써 복종한다.

 

(2) 칼빈은 갈라디아서 주석에 들어가기 전 먼저 “개요(Argumentum)”에서 서신의 중심교훈을 설명하면서 율법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갈라디아교회들에 들어온 거짓교사들은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의 이름과 영광을 힘입어 바울의 사도직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가 전하는 복음을 공격하였다. 거짓교사들은 예루살렘교회에서 율법의 의식계명들이 준수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관습을 다른 교회에서도 따라야 하는 법칙으로 여겨 “의식의 준수”를 요구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권위는 다른 사도들과 동등함을 증거하고, 거짓교사들은 사도들에게서 파송된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한 데, 사도행전 15:1 이하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사도들은 본래 은혜로 죄 용서함을 받으며 율법의 짐을 지우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들의 잘못을 논박하였다. 바울은 2장 끝에 가서 의식법의 준수, 즉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논증하였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칭의가 이뤄진다는 보편적 원리에 근거하여 볼 때, “의식”만이 아니라 “행위”도 배제되는 것이다. 바울은 보편적인 것에서부터 특수한 것으로의 논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의식법은 예전에는 필요한 것이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제는 필요 없게 되었으므로 폐기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의식의 진리와 끝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의식 준수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에 힘써야 한다.

 

(3) 루터가 ‘강의’ 앞머리에서 보여주고 있는 율법관은 칼빈의 갈라디아서 주석의 그것과 비교할 때 두드러진 차이를 보여준다. (‘주석’의 짤막한 “개요”에서 율법 문제에 관하여 2장의 ‘안디옥 사건’ 때의 바울의 발언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언급하고 지나갔었던) 루터는 1531년의 ‘강의’에서는 ‘율법’에 대하여 속사포를 쏘아대는 것처럼 그리고 열변을 토하듯이 집중적으로 논하고 있다. 루터는 “율법의 행위”를 “의식(법) 준수의 행위”로 제한시켜 보지 않고 율법 중 십계명을 비롯한 도덕 계명들을 포함한 모든 율법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루터는 이미 1519년의 ‘주석’에서 율법과 믿음/은혜를 대조시켜 말하면서 ‘율법’을 의식법만이 아니라 도덕법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는 1:13-14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율법, 다시 말해서 의식법뿐만 아니라 도덕법,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명들인, 지극히 거룩한 십계명까지를 포함하는 율법은, 거룩한 어거스틴이 ‘성령과 문자에 대하여(De spiritu et littera)’에서 매우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듯이, 문자요 문자의 전승이며 살리지도 의롭게 만들지도 못하며 단지 죽이며 죄를 더욱 강력하게 되도록 만든다(롬 5:20).”

 

한편 칼빈에게 있어서 율법 중 의식법과 (십계명이 대표하고 있는) 도덕법은 함께 묶어 취급될 수 없는 대상이다. 칼빈은 서신의 개요를 말하는 부분에서 “의식(법)” (ceremoniae)을 11회, “율법(lex)”은 2회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폐기되는 것은 “의식(법)”이라고 하지 “율법”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반면에 루터는 같은 개요 부분에서 “의식(법)”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고 대신 “율법”이라는 단어를 100회 가까이 언급하고 있다. 루터는 율법과 은혜, 율법의 의와 그리스도의 의, (인간적인) 능동적 의와 (신적인) 수동적 의를 대조적인 것으로 이해하여 나눌 뿐이며, 이러한 확실한 구별을 할 줄 아는 법을 배우는 것이 갈라디아서를 연구하는 목적이라는 인상을 줄 정도로 강하게 강조한다.

 

3. 2:16 주석에서의 율법관 비교

  

(1) 루터는 ‘강의’에서 2:16에 대하여 12쪽에 걸쳐 긴 강해를 펼치고 있는데,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구절에서 “율법의 행위”라는 중요한 표현은 가장 넓은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 율법의 행위는 아주 간단하게 은혜와 대립적인 개념으로 취하라. 법률이든 의식법이든 십계명이든 간에 은혜가 아닌 것이 율법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의 행위”는 “율법 전체의 행위”이다. 십계명과 의식법 사이에 구별을 해서는 안 된다. ‘믿음의 의’에 반대되는 것은 ‘율법 전체의 의’이다. 교황과 주교, 신학교수, 수도사 등은 죽음에 이르는 죄는 단지 살인이나 간음, 도둑질 등의 계명을 어긴 행위라고 본다. 죽음에 이르는 죄는 오히려 마음속에서의 하나님 경시, 감사하지 않음, 하나님께의 원망, 하나님의 뜻을 거절함, 하나님보다는 육신을 따라 생각함 등이다. 그들이 인간의 본성 속에 있는 바로 이러한 극도의 부패성을 보았더라면 하나님께로부터 마땅히 인정받을 수 있을 만한 공로와 자격에 대하여 그렇게 불경건하게 발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은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나사렛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저들과 똑같이 생각했었던 것이다.

 

칭의를 얻기 전에 어떤 탁월한 선행과 덕행을 행한 자라도 그것으로써 의롭게 되지 못하며, 칭의를 얻은 후에 어떤 율법의 행위라도 신자를 의롭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 행위를 통해 의인이 되려는 자는 행위를 통해 더욱 거룩할수록 그만큼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원수가 된다. 기독교의 바른 가르침의 방식은 이렇다: 먼저 인간은 율법을 통하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야 한다. 율법은 죄를 보여주고 겸손하게 만들어주어 칭의를 받도록 준비시켜주며 그리스도께로 몰아가는 일을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물을 값없이 주시고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그런 하나님이시다.

 

스콜라신학자들은 허황되게 말하기를, 믿음은 단지 윤곽일 뿐이며 사랑이 비로소 생기를 주는 색깔을 입혀주고 내용을 형성시켜준다고 한다. 그러나 진리는 오히려 그 반대다. 즉 색깔이 벽을 단장해주고 모양을 만들어주듯 믿음이 그리스도를 붙잡으면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단장해주시고 내용을 형성시켜주신다. 우리의 근본적인 의는 믿음에게 비로소 내용을 형성시켜주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 자체가, 즉 우리가 보지 못하나 그럼에도 현존해계시는 그리스도 그분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우리의 근본적인 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붙잡은 그리스도 그리고 마음속에 사시는 바로 그 분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기독교의 의가 되신다. 믿음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의 구속의 주신 그리스도 외에 다른 아무것도 보지 않고 다른 무엇도 붙들지 않는다. 믿음과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받아주심 또는 (의인으로) 여겨주심은 서로 결합되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르친 후에 우리는 또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경배하며 선행을 하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죄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그리고 순전한 마음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그 모든 것들은 참으로 선한 행위가 된다. 또한 정죄하는 율법과 유혹하는 죄와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의 주관자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을 통해서이다.

 

(2) 칼빈은 ‘주석’에서 2:16에 대하여 단지 한 쪽 분량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고 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단지 의식 준수나 어떤 행위가 믿음의 도움 없이는 불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행위로써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라는 배타적인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짓교사들은 그리스도나 믿음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의식이 결합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이다. 만일 바울이 그들의 그러한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사람들에게 불쾌한 마음을 일으켰을 본문의 선언을 통해서 교회에서 논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가 아닌 다른 길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즉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sola fide iustificari)”는 배타적인 명제를 확고히 해야 한다.

 

교황파 신학자들은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의의 한 부분을 행위에다 둔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마치 우리가 그 단어를 창조해냈다는 듯이, 우리와 싸움을 하려 한다. 그러한 ‘절반의 의’는 바울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바울이 행위로써 의롭게 되지 못하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할 때,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에 대하여 가난하고 결핍한 자가 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진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전부를 돌리든지 행위에 전무(全無)를 돌리든지 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의를 다 빼앗겼을 때 거저 주시는 의의 기초가 세워진다.

 

(3) 루터는 ‘갈라디아서 강의’에서 율법의 행위에 의한 칭의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한 칭의를 대조시켜 말하고 있는 2:16을 설명하고 있는데, 칼빈의 갈라디아서 주석의 경우와 취급 분량만을 가지고 비교한다면 루터가 열 배의 관심을 가지고 그 주제를 논하고 있는 셈이다. 2:16은, 주지되고 있는 것처럼, 갈라디아서의 서론의 마지막 부분 중, 바울이 서신중에서 제시하려는 중심 주제를 전략적으로 예루살렘의 대사도인 베드로를 면책하면서 언급하고 있는 의미심장한 구절이다. 그런데 칼빈은 이 구절을 이상하다고 여길 정도로 간략하게 주석하고 넘어간다. ‘율법의 의’와 ‘그리스도의 의’/‘믿음의 의’라는 주제에 대한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라고 판단된다. 바울의 ‘십자가 신학’이 그의 율법관과 연관되어 언급되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구절인 2:19-20에 대한 주석도 루터는 13쪽의 분량으로 다루고 있는데 반하여, 칼빈은 세 쪽에 걸쳐 다루고 있을 뿐이다.

 

루터는 2:16의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율법의 행위”에 대하여 ‘의식법’만이 아닌, ‘십계명’ 내지는 ‘도덕법’까지를 포함한 “율법 전체의 행위”를 가리킨다고 강조하면서 ‘율법의 행위에 의한 칭의’와 ‘믿음에 의한 칭의’를 대조하며 설명한다. 반면에 칼빈은 2:16의 주석에서 “율법의 행위”와 “율법의 의”라는 표현을 각기 1회 언급할 뿐이다. 칼빈은 오히려 ‘율법’이라는 단어와 직접 연결시키지 않고 “행위(opera)”와 “의식(ceremoniae)”이라는 단어를 각기 5회와 2회,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의”라는 표현을 2회 쓰고 있다. 칼빈은 바울이 부정적으로 말할 때의 ‘율법’은 ‘율법 전체’를 말하기보다 일차적으로 ‘의식법’을 가리키며 ‘율법의 행위’는 ‘의식법 준수 행위’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갈라디아서의 주석에서 칼빈은 ‘의식(법)’을 가리키는 복수명사 ‘ceremoniae’와 형용사 ‘ceremonialis’를 (주석 맨 처음에 있는, 내용의 개요를 말하고 있는 ‘Argumentum’에서의 11회를 포함하여) 주석 중 무려 80회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칼빈의 율법관의 특징을 암시해주는 분명한 예라고 하겠다.

 

한편 칼빈은 2:16의 주석에서 루터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위의 공로에 의한 칭의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대한 종교개혁의 근본원리를 강력하게 붙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똑같이 이신칭의를 강조하면서도 루터는 2:16의 주석에서 믿음의 내포를 명백하게 ‘대속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규명하는데 열정적인 점에서, 칼빈보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의 특징을 드러내주고 있다고 보겠다. 또 더 나아가 루터는 스콜라신학을 의식하여 ‘믿음과 사랑’의 바른 관계를, 즉 ‘사랑으로 형성되는 믿음(fides caritate formata)’이 의인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관계없이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칭의를 얻게 해주며 이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자가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해준다. 루터는 칼빈에 비하여 주석가이면서 동시에 이신칭의 신학에 대하여는 훨씬 더 투쟁적이고 변증적인 신학자라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또 한편으로는 칼빈은 문맥을 일차적으로 중시하는 주석가로서 루터보다 더 충실한 면이 있음을 2:16의 주석에서 엿보게 해주는 면이 있다. 왜냐하면 바로 앞 뒤 문맥을 이루는 구절인 2:11-15과 2:17-18에서 논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성문율법과 구전율법의 의식법 준수이며 기독교 유대교인으로 살아야 하느냐의 문제였던 것이며, 그래서 칼빈은 이 문제의 연속선상에서 2:16의 “율법의 행위”라는 표현을 ‘의식법의 준수 행위’로 보고 주석하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루터는 바울이 서신 전체와 더 나아가 로마서에서 보여준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율법의 행위”로 이해하여 신학적인 주석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 3:19-25 주석에서의 율법관 비교

 

(1) 율법을 주신 목적과 그 기능의 한시성, 율법과 아브라함의 언약과의 관계, 그리고 율법과 믿음 내지는 그리스도와의 대조적 성격을 교훈하고 있는 본문을 ‘갈라디아서 강의’에서 주석하면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이 율법과 행위와 상관없이 의롭게 된다면 율법은 왜 주셨는가? 그렇다면 바울은 율법을 폐기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돈이 칭의를 얻게 하지 못한다고 돈을 폐기해야 하는가? 아니다. 돈은 돈으로서 유익한 것이다. 율법은 율법으로서 사용될 때 유익하다. 다만 칭의를 얻게 하는 것은 율법으로서는 할 수 없다. 칭의를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은 아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을 위해 주셨는가? 바울은 “범죄함을 인해 주셨다“고 대답한다. 정확하게 무슨 뜻인가? 로마서 5:20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율법은 은혜의 약속을 이루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bis auf Christus)” 중간에 끼어들어온 어떤 것으로 있게 된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무슨 용도를 위해 주셨나? 두 가지 용도로. 즉 한편으로는 한계를 넘는 것을 막아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는 것, 또 다른 편으로는 죄를 보여주고 죄인 됨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후자의 율법의 용도에 대하여 로마서 7:13에서 잘 표현해주고 있는데, 율법의 역할은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죄인 됨에 대한 깨달음과 이로 인한 낮아짐과 좌절은 무엇을 위함인가? 그로써 은혜가 우리에게서 입구를 찾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너무도 어리석어서 율법이 본래적인 직임을 행하여 양심의 찔림을 받았을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속죄를 약속하는 은혜의 교리를 붙잡지 않고 도리어 더욱 율법을 추구하여 도움을 받고자 한다. 우리가 율법을 통해 죄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이 닥칠 그때에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목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를 붙잡으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말 것이다. 율법은 칭의를 얻게 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우리를 은혜의 약속에로 몰아가는, 즉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몰아가는 일을 하는, 최고로 유익한 종인 것이다.

 

바울이 율법의 유효기간을 “약속하신 자손이 오실 때까지”라고 말한 것은 문자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율법과 모든 모세의 예배제도의 유효기간이 끝났다는 말이 되겠다. 영적으로 해석하면,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로 정해진 때까지보다 더 오래도록 율법이 양심에서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즉 약속하신 자손이 현존하시게 되면 율법은 자신의 지배권을 그리스도께 넘겨드려야 한다는 뜻이 되겠다.

 

바울을 더 나아가 율법을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자의 손을 통하여” 주어진 것으로 말한 것은, 천사의 중개와 하나님의 종인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에 비하여 복음은 주님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통하여 주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탁월성을 지녔다는 뜻이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수감되었다”는 말은 율법의 신학적·영적 기능에 대하여, 즉 영적 간수인 율법이 인간의 죄와 악행을 드러내고 벌과 두려움을 줌으로써 자신의 비참함과 저주의 상태를 깨달은 인간이 장차 나타날 믿음과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몽학선생(Zuchtmeister)' 역할을 한다. 몽학선생은 매를 가지고 학생을 훈육하는데 장차 유산을 상속하여 누릴 수 있는 자격자가 되도록 만들어 준다. 마찬가지로 율법은 단순히 몽학선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도와주는 몽학선생이며, 그래서 행함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해준다. 그래서 우리가 일단 그리스도께로 와서 믿음으로 칭의를 경험하게 되면, 더 이상 몽학선생인 율법의 지배 아래 있을 필요가 없게 된다.

 

(2) 칼빈은 3:19-25의 주석에서 그의 율법관을 다음과 같이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율법이 칭의를 얻게 하기에 무력하다는 말을 듣게 될 때, 즉각적으로 다양한 생각이 생긴다. 율법은 불필요하다든가 또는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에 반대되는 것일 수밖에 없어 라는 생각 등. 먼저 바울은 율법의 용도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한다. 여기서 바울은 도덕법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모세의 사역에 관계된 모든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모세에게 있어서의 독특한 사명은 삶의 규율과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준행할 의식에 대한 명령들을 제정하고 거기에 약속과 경고를 덧붙이는 일이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자비와 그리스도에 관계된 많은 약속이 그가 쓴 글에 나타나 있고, 이 약속들은 믿음에 속해 있다. 여기서 질문해야 할 문제는 이것이다: 모세는 왜 “이것을 행하는 자는 살리라”(레 18:5)와 “이 율법의 모든 것들을 준수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신 27:26)와 같은 새로운 조건을 덧붙였는가? 더 나은 그리고 더 완전한 어떤 것을 만들어내려고 하신 것인가?

 

율법의 용도가 많이 있지만 바울은 여기서 서술의 목적에 따라 한 가지 용도만 다루고 있다. 즉 “범죄함 때문에.” 무슨 뜻인가? 바울은 율법이 단순히 악행을 억제하는 목적으로 주셨다는 차원 이상의, 독특한 진리를 말하고자 한다. 즉 율법을 주신 목적은 범죄를 밝히 드러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책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려 하심이라는 것이다. 로마서의 여러 구절들(3:20; 5:20; 7:13)에서처럼, 율법의 가르침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서 단지 범죄를 증가시킬 뿐이다.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받게 되는 중생의 성령께서 오시어 마음에 참된 의를 기록해주실 때까지 그러하다.

 

“자손이 오실 때까지”라는 말은 약속된 자손이 오실 것을 기대하고 있는 동안을 가리킨다. 즉 율법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사람들을 일깨우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졌다는 말이다. 여기서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만 지속되는 것이고 이제 그가 오셨으니 율법은 폐기되었다는 말인가? 모든 율법의 시행은 임시적인 것이었고 율법은 옛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이르도록 그들을 지켜주는 목적으로 주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모든 율법이 폐기되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지 바울이 의도하였던 것은 과거에 도입되었던 율법의 시행 방식이 양속의 성취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중보자의 손으로” 율법이 공포되었다고 했는데, 여기서 “중보자”는 디모데전서 2:5에서처럼 영원하신 지혜와 성자가 되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래서 은혜 언약의 기초가 되시는 그가 율법을 주셨을 때에도 역시 가장 높은 지위에 계셨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전에 언약을 세우실 때 하나님을 유대인과 화목하게 하시는 일을 하셨던 것처럼, 이제는 할례와 의식들의 장벽을 인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이방인들의 중보자가 되신다.

 

율법과 은혜 언약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기원하는데 양자 간에 겉으로 나타나는 모순을 바울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양자가 다 같이 의에 이르는 길이라면 서로 모순이 될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칭의의 능력이 없고 오히려 정죄하며 의를 빼앗는다. 그러므로 양자는 모순이 되지 않는다. 이제 행위의 의를 던져버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로 달아나는 길 외에 치유할 방도가 없다.

 

바울은 “믿음이 오기 전”의 율법의 용도를 설명하고 왜 율법이 임시적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의식법이나 도덕법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주님이 옛 언약 시대에 당신의 백성에게 적용하셨던 모든 질서를 포함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을 먼저 감옥 또는 유치장에 비유하고 뒤에 가서 ‘몽학선생(paedagogus)’에 비유한다. 이 비유들은 율법이 어떤 시간 동안만 유효한 것임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라는 표현에서 바울은 율법의 그림자의 어둠 속에 감춰진 것들에 대한 충만한 계시의 때를 가리켜 말하였다. 바울은 율법 아래에 살았던 조상들에게서 믿음을 빼앗지 않는다. 본 서신의(3장) 앞부분에서도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다. 다른 조상들의 경우들은 히브리서 저자에 의해 인용되었다. 믿음에 대하여 그 때에는 명료하게 증거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신약시대를 바울은 믿음의 때라고 부르는데, 절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에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이는 율법의 보호 아래에 있던 자들도 똑같은 믿음에 동참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율법은 믿음의 조상들을 저주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감옥 벽이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감옥을 호의적인 의미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시대에 믿음이 계시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의식법이 현존하지 않은 그리스도를 윤곽적으로 묘사한 것에 비하여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현존하시는 분으로서 나타나셨다.

 

“율법은 우리의 몽학선생이었다”는 문장에서 ‘몽학선생’은 비유적으로 어떤 개인의 온 생애 동안이 아니라 어린 시절에만 돌보도록 임명받은 자이다. 이 비유를 통하여 두 가지를 말하고자 하는데, 즉 율법의 권위가 정해진 시기까지로 제한이 되어 있다는 것과 기초학습 과정이 끝나면 성년이 되기에 합당할 정도의 진보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현을 덧붙인다. ‘언어교사(grammaticus)’가 아이를 훈련시켜 더 높은 단계의 학문을 하도록 인도해주는 다른 사람에게로 넘겨주듯이, 율법은 말하자면 완성되어갈 믿음에게로 넘겨주는 신학의 선생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은 유대인들을 어린아이로 그리고 우리를 장성한 젊은이로 비유한다.

 

그러면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이 가르친 내용은 무엇이었나? 첫째로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은 불의한 자임을 깨닫게 하고 거울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통해 자신이 참된 의에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보도록 하는 일을 하며, 그리하여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 의를 찾도록 상기시켜주는 일이었다. 율법의 위협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피하도록 재촉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찾게 될 때까지 안식을 주지 않았다. 이것이 모든 의식(ceremoniae)의 목표이었다. 의식은 양심에게 경고하여 겸비한 자가 되게 하는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오실 구속자에 대한 믿음을 가지도록 양심을 충동하는 능력을 가졌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더 이상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다”고 했는데, 무엇을 뜻하는가? 성전 휘장이 찢어진 후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써 은혜의 계시가 더욱 밝게 주어졌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서 몽학선생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있는 어린아이 시절은 지나갔다는 것, 그래서 율법의 그 임무를 끝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율법이 그리스도를 위한 준비가 사명이며 임시적인 존재라면, 율법은 폐기되었고 그래서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 되었나? 율법이 삶의 규율인 한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변함없이 주님을 경외하도록 해주는 재갈이며 육체의 느슨함을 고쳐주는 박차(拍車)이다. 한 마디로 율법은 교훈과 바르게 함과 책망과 신자가 모든 선한 일에 교육을 받기에 유익하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율법이 폐기되었다는 것인가? 다음과 같은 성격과 역할과 관계된 면에서 폐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율법이 그것을 지키는 자에게 생명을 약속하고 어긴 자에게는 저주하는 면, 최고의 완전과 정밀한 순종을 요구하는 면, 아무런 용서로 베풀지 않으면서도 가장 작은 잘못에 대해서도 엄격한 보상을 요구하는 면,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주지 않고 다만 멀리서 그리고 의식에 싸여서 그를 가리키는 점 등. 외양적인 면에서 은혜언약과 다르다는 점에서 모세의 직임은 끝났다.

 

(3) 3:19-25의 주석에 있어서도 루터는 칼빈에 비하여 약 네 배 분량으로 많은 설명을 쏟아내고 있다. 이 구절들에 대해서는 현대 주석가들에 의하여 새로운 그리고 좀 더 정확한 해석들이 제시되고 있어 루터와 칼빈의 옛 해석과 사이에 차이가 크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반면에 루터와 칼빈은 여러 면에서 공통적인 해석을 보여주고 있음도 확인된다.

 

19절의 “범죄함을 인하여(또는: 위하여)”를 루터와 칼빈은 함께 로마서의 관련구절들(3:20; 5:20; 7:13)을 참조하면서 율법이 인간의 죄를 정죄하고 죄책을 더욱 심각하게 느끼도록 하며 더 나아가 인간의 죄성을 자극하여 더욱 범죄하도록 함으로써 좌절하고 그래서 겸비하게 만들어 은혜의 약속을 소망하며 그리스도에게로 몰아가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로마서의 관련구절들과 연결시키면서 율법을 통한 인간의 죄성과 연약성에 대한 깊은 깨달음은 루터와 칼빈이 바울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반면에 이들은 다 같이 율법의 정죄의 기능과 인간의 죄성에 대한 자각이 은혜의 약속과 그리스도를 소망하도록 인도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는 아니었다.

 

19절의 주석에서 루터와 칼빈의 특징적 차이가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즉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실 때까지” 한시적으로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제는 율법은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려는 자들을 예견하고는 이 문제를 집고 지나가고자한다. 자기는 율법 전체가 폐기되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입장을 밝히면서, 오히려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식으로 본문을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칼빈은 문맥에서 먼 신학적 해석을 도입하고 있는 셈이다. 엄밀한 주석가이면서도 동시에 탁월한 조직신학자로서 성경의 통일성과 조화를 추구하는 적극적인 태도의 결과로 이해될 수 있겠다. 반면에 루터는 19절에서 율법과 복음 간의 뚜렷한 구별을 보았다. 그리고 양자에 대한 바른 구별을 하게 될 때 참된 칭의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며 믿음과 행위, 그리스도와 모세 사이의 구별을 쉽게 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하였다.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분명한 나팔소리를 우리는 칼빈에게서보다 루터에게서 들을 수 있는 것 같다.

 

19-20절에서 “중보자의 손을 빌어” 율법이 주어졌다고 되어 있는데, 문맥상 중보자는 시내산 율법을 받을 때 중개자로서 역할을 한 모세를 가리키며,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약속으로 주어진 아브라함의 언약에 비하여 율법의 열등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칼빈은 본문의 “중보자”는 모세가 아닌, 그리스도라고 해석하고 또 여기서, 시내산의 언약 때 하나님과 유대인을 화목하게 하셨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의 중보자가 되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칼빈은 21절을 해석하면서 역시 ‘율법과 은혜언약’ 사이에 모순이 없고 조화된다고 강조하기를 잊지 않는다. 또 칼빈은 22절에서 “성경이 온 세상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선언을 설명하면서 여기서 “성경(ἡ γραφή, ‘헤 그라페’)”은 율법을 가리킨다고 본다. 오늘날 주석가들 중 칼빈과 같은 해석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대부분 성경을 특정의 성경구절이나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율법 〓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라는 율법 개념이 칼빈에게 있어서 깊이 뿌리를 박고 있어서 그러한 해석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러나 실은 바울에게 있어서 부정적으로 말할 때의 ‘율법’은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성경을 뜻하기보다, 하나님의 구원사적 계획의 전개과정 중에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옛 언약”으로서의 의미로, 그리고 은혜, 복음, 믿음, 그리스도, 성령과 대조적인 위치에 있는 그런 의미로 쓰인 용어이다. 한편 루터는 22절의 “성경”을 바울이 3:10에서 인용한 성구인 신명기 27:26을 가리킨다고 이해한다.

 

23절의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에 대하여 루터와 칼빈는 각기 그들의 주석에서 기본적으로 공통적인 이해를 보여준다. 즉 율법을 통하여 인간의 죄와 악행이 들어나게 되고 율법의 재앙과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비참과 저주 상태를 알고서 믿음과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된다고 그들은

 

설명하였다. 앞에서와 같이 문맥을 따른 이해보다는 어거스틴의 죄론과 율법관과 은총론의 전통을 따른 이해라 할 수 있겠다. 루터가 붙인 표현대로, 율법에 “신학적-영적 의미”의 용도가 있는데 바로 23절에서 이 용도로 쓰인 예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교사로서 칼빈은 23절의 ‘믿음이 오기 전에’라는 표현을 만나게 되었을 때 성경 계시와 구원사적 계획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또 다시 강조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 독자들에게 있을 수 있는 오해를 예견하여 설명해준다. 칼빈은 “믿음이 오기 전에”라는 표현에서 구약시대에 믿음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칼빈은 바울이 이미 아브라함도 믿음이 있었다고 3:6-9에서 말한 사실과 히브리서 11장에서 구약의 수많은 일련의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았다고 증거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장차 계시될 믿음”이란 표현 역시 (신약시대에 비로소 계시되었다는 절대적인 의미가 아닌, 상대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시대의 신자들처럼 믿음과 그리스도를 명백하게 알았느냐 아니면 구약시대에 살았던 성도들처럼 계시의 빛을 적게 받아 의식을 통해 또는 그림자로서 알았느냐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모두가 “동일한 믿음의 동참자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엄밀한 주석가로서보다 탁월한 조직신학자로서의 접근태도가 엿보이는 것 같다. 반면에 루터는 23절을 주석하면서 처음부터 “즉 믿음이 오기 전에”를 “복음과 은혜의 때가 오기 전에”라고 설명함으로써 칼빈과 같은 교리적 접근보다는 구원사적 접근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24절의 헬라어 원문 παιδαγωγὸς ἡμῶν γέγονεν εἰς Χριτστόν(‘파이다고고스 헤몬 게고넨 에이스 크리스톤’)은 현대의 번역성경들에서나 주석들에서 오늘날 대체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몽학선생이 되었다”는 의미로, 즉 율법의 한시성(限時性)을 말하고 있는 의미로 번역되고 있다. 그런데 루터와 칼빈이 주석할 때 원문과 함께 기본적으로 사용한 본문인 제롬의 라틴어 번역성경(Vulgata)은 “paedagogus noster fuit in Christum”으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우리 구절을 주석하면서 παιδαγωγός(‘파이다고고스’)에 본래적인 감독자와 한시적 직임의 의미 외에 교육자의 의미까지 부여하여 사용하였다. 우리의 두 종교개혁자들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와 비참함과 저주 상태를 깨닫고 좌절, 겸비, 두려움을 느끼고 은혜와 그리스도를 소망하도록 몰아가는 기능을 한다는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라틴어의 paedagogus는 ‘선생’을 뜻하는 다른 전문용어들(예: magister, praeceptor, doctor)이 별도로 있었지만 당시 paedagogus가 본래적 의미가 희석되고 (오늘날의 전문적 ‘교육자’의 의미는 아닐찌라도) 이미 ‘교육자’의 의미로도 쓰이고 있었던 사실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그런데 칼빈은 주석에서 paedagogus를 grammaticus(‘언어선생’)로 이해하여 교사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주면서 설명하고 있는 반면에, 루터는 같은 단어를, “교육도 하며 (매를 가지고) 징계도 하는” Zuchtmeister (‘쭈흐트마이스터’)의 의미로 이해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칼빈은 3:24-25에서 ‘율법’이라는 단어를 자주 ‘의식(법)(ceremoniae)’의 의미로 이해하며 율법의 예비적 및 임시적 성격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칼빈은 의식적 및 계율적 성격의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폐기된 것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삶의 규칙과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은 폐기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반면에 루터는 같은 구절을 주석하면서 몽학선생의 엄격성을 강조하며 채찍으로 징계하는 교사 모티프를 율법에 대한 비유어로서의 몽학선생 개념에 집어넣어 설명한다. 그럼으로써 루터는 율법이 한시적이며 과거시대에 속한 것이며 믿음과 그리스도와는 관계가 없는 대상임을 강조한다. 루터는 이렇게 선언한다: “믿음은 율법이나 행위가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확신이다.” “내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는 한에 있어서, 율법 역시 나에게서 떨어져나갔다.”

 

5. 결론

 

루터와 칼빈의 신학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며 당시와 교회 역사상의 모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세계교회에 큰 축복이었고 또 현재에도 그렇다. 한편 그들의 신학사상 중 오늘날에 와서 평가할 때 위대한 장점들이 드러나며 또한 결점과 실수와 부족 또한 드러난다. 물론 평가하는 자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결과가 나타나게 되겠지만.

 

본 논문에서 루터와 칼빈의 율법관을 그들의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특히 2:16과 3:19-25의 주석을 비교하면서 특징을 살펴보았다. 필자가 나름대로 평가해보기로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 가운데 주신 율법에 대하여 칼빈에 비하여 루터가 훨씬 바울신학적인 깊고 날카로운 혜안을 가지고 바른 설명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칼빈의 율법관의 약점은 성경 계시로서의 율법과 구원사적 계획에 따라 주신 ‘옛 언약’ 내지는 ‘계명’으로서의 율법을 정확하게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반면에 루터는 율법과 복음, 율법과 은혜, 율법과 믿음, 율법과 그리스도 간의 구별에 대한 깊고 확실한 복음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점에서 장점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또 한편에서 본 논문에서 다루지 않은 중요한 관련 주제는 믿음과 행함(윤리, 세계관), 행함과 성령, 행함과 심판, 행함과 성화가 되겠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루터보다는 칼빈이 훨씬 깊고 균형잡힌 깨달음을 제시해줄 수 있다고 필자는 나름대로 판단한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세계교회에 위대한 선물로 주신 두 종교개혁자들의 정신과 사상들을 더욱 깊이 그리고 균형감각을 가지고 비교·연구함으로써 더욱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논           평

 

오성종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평

 

합신 조병수 교수

본 논문은 논자가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여 진술했더라면 훨씬 훌륭한 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논자의 개인사정으로 말미암아 이처럼 글의 완성도가 떨어지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계획과 달리 2:16과 3:19-25에만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참조 2쪽).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더 여유 있게 시간을 드려 귀한 논문으로 완성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진다.

 

본 논문은 갈라디아서에 진술된 바울의 율법 언급 가운데 대표적으로 몇 곳을 선별해서 루터와 칼빈이 어떻게 이해했는지 다루고 있다. 본 논문에 의하면 이 두 종교개혁자의 율법관 차이는, 칼빈이 성경계시의 통일성에 준해서 말하는 반면에 루터는 율법과 복음의 대조를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것은 본 논문이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것(2쪽)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본 논문에서 더 밝혀진 것은 없다.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문제를 토의한 견해들을 참조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실제로 칼빈과 루터의 율법관은 이미 많은 학자들에게 주목을 받아왔다(예를 들면, D. MacLeod, "Luther and Calvin in the Place of the Law"[1974]; E. A. Dowey, "Law in Luther and Calvin"[1984]). 그러나 본 논문에서 이런 견해들은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본 논문과 관련하여 이 외에도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본 논문이 잘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칼빈의 갈라디아서는 분량이 매우 적기 때문에 율법관을 충분하게 서술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칼빈의 율법관을 논할 때는 갈라디아서 주석 외에도 그의 다른 저술들을 더 참조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율법에 대한 견해를 자세히 피력했다(2권 7-11장). 여러 저술들을 상호 비교했더라면 칼빈의 율법관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쨌든 본 논문은 율법관과 관련하여 칼빈과 루터를 비교함으로써 종교개혁자들의 다양한 견해를 보게 해주었다는 데서 공헌이 있다. 이와 같은 논문을 통해서 현대적인 시각에서 율법관을 이해하기 전에 종교개혁시대의 견해를 접촉하여 눈이 밝아진 효과를 얻는다. 어느 시대(현대 또는 종교개혁시대)가 더 정확하게 성경을 이해하는가는 아무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오성종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평

  

                                                                     최갑종 교수 (백석대학교, 신약학)

 

오성종교수의 논문, “칼빈과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의 율법관”(이하 ‘논문’)은 매우 시기적절한 논문이다. 왜냐하면 그의 논문은 최근의 바울신학연구에 있어서 가장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율법문제”를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샌더스(E.P Sanders), 던(James D.G Dunn), 라이트(Tom Wright)에 의해 주도 되고 있는 “새 관점의 바울운동”((The New Perspective on Paul, 이하 ‘새 관점’)은 전통적으로 이해되어 왔던 바울의 율법관은 물론, 바울의 충실한 해석자로 알려진 루터와 칼빈의 율법관에 대하여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였다. 새 관점에 따르면 바울 당대의 유대교는, 루터와 칼빈이 생각한 것처럼 율법을 지켜 그 공로나 선행으로 의와 구원에 도달하려는 "율법주의"(legalism)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에 의해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신분 유지를 위해 기쁨으로 율법을 준수하려는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이었다. 사도 바울이 유대교의 율법을 비판한 것도, 율법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하는 의와 구원의 수단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유대인과 이방인을 서로 분리시키는 종교적, 사회적 장벽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루터와 칼빈은 그들 당대 로마캐토릭교회의 공로주의사상을 1세기의 유대교를 이해하는 열쇠로 잘못 사용함으로써, 유대교의 율법은 물론, 바울의 율법관까지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래서 새 관점은 루터와 칼빈의 안경 없이 1세기의 바울과 유대교를 바르게 보는 새 관점의 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과연 새 관점의 주장처럼 루터와 칼빈이 바울의 율법관을 잘못되게 이해하였는가?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율법관은 물론, 바울 당대 유대교의 율법관을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바울서신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한편으로 모세의 율법(할례 및 유대교의 절기 등)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함께 일종의 구원론적 의미를 주려고 했던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된 교훈을 반박하기 위해, 또 다른 한편으로 이들의 거짓 된 가르침에 유혹을 받고 있는 갈라디아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전파한 그 복음에 머물도록 설득하기 위해, 율법과 복음, 율법의 행위와 믿음, 율법과 약속, 율법과 그리스도, 율법과 성령, 율법과 크리스천의 삶 등에 관한 자세한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갈라디아서가 바울의 율법관은 물론 바울 당대 유대교의 율법관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루터와 칼빈의 갈라디아서 주석은 그들이 과연 바울의 율법관을 바르게 이해하였는지, 아니면 새 관점의 주장처럼 바울의 율법관을 왜곡시켰는지를 판가름 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비록 오 교수가 자신의 논문에서 새 관점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이 논문을 쓸 때 바울의 율법관과 관련된 현금의 상황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오 교수가 이 논문을 통해서 현금의 상황이 불러일으킨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변을 주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 교수는 자신의 논문의 목적을, 1535년에 출판된 루터의 [갈라디아서주석]과 1548년에 출판된 칼빈의 [갈라디아서주석]에 나타나 있는 “서신의 중심사상”과, “2:16, 3:19-25의 주석”을 중심으로 루터와 칼빈의 율법관을 서로 비교 검토하는데 둔다(pp. 1-2). 오 교수는 갈라디아서주석을 중심으로 루터와 칼빈의 율법관을 서로 비교 검토하면서 양자 사이에 공통점은 물론 차이점도 발견한다. 먼저 양자 사이의 주요 공통점을 살펴보면, 루터와 칼빈은 다 같이 다음의 사실을 받아들인다.

 

(1)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선한 의지의 표현이다.

 

(2)율법, 혹은 율법에 따른 선행은 결코 의와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의와 구원의 수단이다.

 

(3)율법은 시민적, 사회적 용도, 곧 율법이 죄를 억제하는 기능과 함께, 신학적 용도, 곧 율법이 죄를 보여주고 죄인 됨을 깨닫게 하여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몽학선생의 긍정적 역할을 가지고 있다.

 

(4)율법은 그 전체(루터)나 부분(의식적, 계율적 성격의 율법, 칼빈)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다.

 

다음으로 양자의 주요 차이점을 살펴보면,

 

(1)율법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루터는 성경을 “율법”(‘명령’)과 “복음”(‘약속’)으로 나누고, 성경에서, 그것이 구약에 있든, 신약에 있든, 사람에게 지킬 것(‘능동적 의’)을 요구하는 모든 것을 “율법”으로, 반면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것을 사람들이 믿음을 통해 받아들이도록 제시되고 있는 모든 것(‘수동적 의’)을 “복음”으로 본다. 따라서 루터에 따르면 “율법”과 “복음”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와 반위관계가 있다. 반면에 칼빈은 루터보다도 율법을 훨씬 더 포괄적으로 이해하여 율법을 복음과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언약의 한 부분으로 본다. 양자의 차이점은 그 본질에 있지 않고, 그 주어진 양식과 시대적 차이, 곧 율법은 옛 언약으로, 복음은 새 언약으로 주어진 점에 있다. 따라서 양자는 서로 반위관계가 아닌 상호보완관계에 있다.

 

(2)루터는 율법이 그 용도에 있어서 시민적, 신학적, 도덕적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율법 자체를 시민적, 의식적, 도덕법 등으로 나누지는 않는다. 그가 2:16의 주석에서 “율법의 행위”를 의식적 율법에 한정시키지 않고 율법 전체와 관련시키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반면에, 칼빈은 율법의 용도에서는 물론 율법 자체를 시민적, 의식적, 도덕법으로 나누고, 본래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졌던 의식적, 시민적 율법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폐지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십계명을 위시한 도덕적 율법은 결코 폐지되지 않고 항구적으로 유효하다고 본다. 칼빈이 2:16의 주석에서 “율법의 행위”를 거부한 것도 의식적 율법의 거부이지 율법 자체의 거부는 아니다.

 

(3)루터는 율법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리고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신학적, 영적 기능을 완수함으로써, 그 기능이 완전히 중지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율법이 결코 복음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칼빈에 따르면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도 여전히 신자의 유효한 삶의 규율이 된다.

 

(4)4:19의 주석에서 루터는 율법과 복음의 반위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율법의 중보자를 모세로 본다. 반면에 칼빈은 율법과 복음의 상호보완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율법의 중보자를 모세가 아닌 그리스도로 본다. 즉 시내산 언약 때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적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칼빈에 있어서는 옛 언약(‘율법’)과 새 언약(‘복음’)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는 본질적인 일치가 있다.

 

오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루터와 칼빈의 율법관을 서로 비교 검토한 다음 율법에 관한 한 루터가 칼빈보다 바울을 더 정확하게 보았다고 결론을 내린다.

 

“필자가 나름대로 평가해보기로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가운데 주신 율법에 대하여 칼빈에 비하여 루터가 훨씬 바울신학적인 깊고 날카로운 혜안을 가지고 바른 설명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칼빈의 율법관의 약점은 성경계시로서의 율법과 구원사적 계획에 따라 주신 ‘옛 언약’ 내지는 ‘계명’으로서의 율법을 정확하게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반면에 루터는 율법과 복음, 율법과 은혜, 율법과 믿음, 율법과 그리스도 간의 구별에 대한 깊고 확실한 복음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점에서 장점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오 교수의 논문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하여야 하는가? 필자는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 루터와 칼빈을 평가하는 방법론 문제와 관련하여, 둘째, 갈라디아서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율법관에 관하여, 셋째, 신자의 삶에 있어서 율법의 효용성문제에 관하여.

  

먼저 첫 번째 문제를 생각해보자. 오 교수는 루터와 칼빈의 율법관을 서로 비교 검토한 다음 루터가 칼빈보다 바울의 율법관을 더 깊이 이해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과연 그런가? 오 교수의 지적처럼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이 칼빈의 갈라디아서주석보다 부피가 더 크고, 율법에 대하여서도 보다 더 자세하게 말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부피의 많음과 긴 설명이 부피의 작음과 간략한 설명보다 필연적으로 더 우월하다거나 더 정당하다는 것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루터와 칼빈의 율법관을 서로 비교 검토할 경우 우리는 텍스트 그 자체의 분석과 함께 반드시 그 텍스트가 쓰여 진 저자의 역사적 정황과 의도 역시 중요하게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사실 루터와 칼빈의 갈라디아서 주석은 연대적으로 적어도 15년의 차이가 있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로서 갈라디아서 주석을 통하여 당대 로마카토릭교회의 공로주의적 구원관을 반박하기 위해 율법과 복음의 반위관계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면, 칼빈은 종교개혁신학을 정립하여야 할 입장에서 루터의 율법과 복음의 이분법이 가져올 폐단, 이를테면 신자의 윤리적 삶의 경시문제를 가능한 한 줄이기 위해서 율법과 복음의 상호관련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다. 그럼으로 우리가 바울과 야고보의 역사적 정황을 고려하지 않고 양자를 단순하게 비교하여 우월성을 논할 수 없는 것처럼, 루터와 칼빈의 단순비교를 통해서 어느 한쪽의 우월성을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 루터와 칼빈은 갈라디아서에 나타나는 바울의 율법관을 바르게 이해하였는가? 오 교수는 율법과 복음의 반위관계를 강조하고 있는 루터의 해석이 율법과 복음의 상호연관성을 강조하는 칼빈의 해석보다 바울의 율법관을 보다 더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오 교수가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2:16, 3:19-25의 주석부분에만 둔다면 오 교수의 결론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유대주의자들의 율법관을 비판하면서 복음과 율법의 반위관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서 말한다면 루터가 칼빈보다 바울의 율법관을 더 잘 반영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신칭의문제를 직접 거론하는 3-4장에서는 유대주의자들을 공격하면서 복음과 율법의 반위관계를 부각시키지만, 신자들의 삶의 문제를 거론하는 5-6장에서는 오히려 율법과 성령, 율법과 그리스도와의 제휴관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 교수도 자신의 논문에서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지만 믿음과 행함, 행함과 성령, 행함과 심판, 행함과 성화의 영역에서는 칼빈이 루터보다도 훨씬 더 깊고 균형 잡힌 깨달음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필자가 볼 때 루터와 칼빈이 바울의 율법관을 제시하면서 개인구원 및 구원역사적 관점(루터)과 언약적 관점(칼빈)을 뛰어넘어 바울의 율법관의 골격을 형성하고 있는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관점까지 확대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셋째, 율법은 신자의 삶에 있어서 여전히 유효한가? 오 교수의 지적처럼 루터는 율법이 신자의 삶의 유효한 규율이 된다는 점을 강하게 반대한다. 루터는 율법을 신자에게 유효한 삶의 규율로 받아들일 경우 그가 한사코 고수하려는 이신칭의교리가 위협되고 또다시 로마카토릭교회의 공로주의를 끌어들이는 위험이 있다고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율법 대신 성령을 신자의 삶의 원리로 제시한다. 그러나 칼빈은 율법을 신자의 삶의 영역에서 배제할 경우 율법을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삶의 규율로 주신 하나님의 의도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무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칼빈은 율법폐지론을 한사코 반대하고, 율법이 신자의 삶의 규율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루터가 율법이 신자의 삶의 규율됨을 반대한다고 해서 마치 그가 율법이 신자에게 있어서 전혀 무용(無用)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루터는 신자라 할지라도, 그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의인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기 때문에, 날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성화의 삶을 위하여 율법의 신학적 용도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보았다. 반면에 칼빈이 율법을 신자의 삶의 규율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마치 그가 율법이 칭의와 성화의 힘을 제공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성령과 믿음 없이는 율법은 신자에게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신자의 삶의 영역에 있어서 율법의 역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바울은 신자의 삶의 문제를 말하는 갈라디아서 5-6장에서 성령의 목적과 율법의 목적이 서로 배치되지 않고 동일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율법의 주된 목적이 하나님과 이웃 사랑인 것처럼, 성령의 목적도 그러하다는 것이다(5:14-16, 22-23).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6:2에서 “서로의 짐을 짐으로써(즉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라고 교훈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일, 곧 사랑하는 일은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 인간 자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성령을 따라 살 때만이 사랑을 하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을 성취하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 없이는 성령이 추구하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삶의 원리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당위성을 알 수 없다. 바울은 성령이 율법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언약백성의 삶의 규율로 주신 율법의 본래 기능을 회복시킨다고 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리스도의 오심은 율법을 폐지하지 않고 오히려 성취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마 5:17)을 옹호한다. 이런 점에서 루터와 칼빈은 다 같이 바울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반영하면서 상호보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루터는 신자의 삶의 영역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그리고 칼빈은 율법은 성령을 통해 신자의 삶의 규율로 재 회복된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각각 바울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루터와 칼빈이 바울의 율법관을 잘못 이해하여 후대 교회에 왜곡된 유산을 물러주었다는 새 관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다시 한 번 루터와 칼빈이 그들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통해 바울의 율법관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루터와 칼빈이 바울의 율법관을 왜곡시켰다는 새 관점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밝혀준 오 교수의 노력을 치하하면서 이 논찬을 마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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