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첼]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
우리가 모래로 덮인 해변을 걷거나 눈덮인 들판을 거닐다 보면 바르게 걷는다고 생각하고 걸었는데도 걸어왔던 길을 돌이켜보면 상당히 구부러지게 걸어온 발자취를 보게 된다.
우리들의 개인적인 신앙생활, 심지어 교회의 움직임까지도 때때로 그 걸어온 발자취를 살펴볼 때, 구부러진 흔적을 남기게 되고, 서서는 안될 자리에 서 있게 되고, 가서는 안될 방향으로 향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래서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고, 서있는 자리를 바로 옮기는 운동이 긴긴 교회 역사를 통해서 때로는 부분적으로, 때로는 전체적인 운동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 중에서도 1517년 10월 31일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일으킨 운동은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러기에 종교개혁운동 하면 우리는 루터를 생각하게 된다. 루터는 교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95개 조문을 내걸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투쟁하여 교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중세기 카톨릭 교회는 하나의 통일된 교회로, 그의 권위는 대단해서 구라파 전역에 미쳤다. 당시 교황은 왕들을 폐하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이렇게 큰 권세를 가진 교황은 인간을 하나님 나라로 보낼 수도 있고, 지옥으로 보낼 수도 있다고 믿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자신의 공로로는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옛날 성자들이나 순교자들의 공로는 그들 자신을 구원하고도 여분의 공로가 남게 된다고 믿었다. 교회는 "이 여분의 공로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 창고에 보관되고, 교황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교황이 베드로 대성당 건립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속죄표를 파는 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사건으로 비화된 것은 1517년에 이르러서였다. 이 속죄표 판매권이 독일의 대주교 알브레트(Albrecht)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는 이 속죄표 판매를 당시 수도사이며, 웅변술이 좋고, 설교를 잘하는 존 티첼(John Tetgel)에게 위임하고 매상고에 따라 커미션을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자 티첼은 매상고를 올리기 위해서 가는 곳마다 그 특유의 웅변술을 구사하여, 이 속죄표를 사는 자마다 자신의 죄의 형벌을 감면 받게 된다고 선전했다. 형벌의 감면은 물론이고,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해서 이 속죄표를 사게 될 때에는 그 돈이 헌금함에 떨어지는 딸그랑 소리와 함께 연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영혼이 순식간에 천국으로 올라가게 된다고 선전했다. 이 말을 그대로 믿고 따랐던 신도들은 하늘 창고로부터 내려오는 이 신통한 은사를 사기 위해서 속죄 표 행렬 주위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루터가 이 속죄표 판매의 부당성에 관해서 95개 조항을 적어 비텐베르크성당 게시판에 못박고 공개토론할 것을 카톨릭 교황 측에 정식 제의함으로써 종교개혁이 불붙게 된 것이다. 루터는 교황이 팔고 있는 속죄표는 성도들에 대한 기만이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며, 그리스도의 매혈행위라고 규탄했다. 그리고 인간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고,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주는 것은 교황이 주는 속죄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말씀에서 온다고 가르쳤다. 루터가 이러한 확신을 갖게 된 것은 긴긴 세월 동안 번민과 고뇌, 신앙훈련을 통해서 시작된 것이다.
개혁자 루터를 고민하게 만들고 수도원을 찾게 한 이면에는 그의 영적인 고민과 갈등이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거룩한 하나님을 우러러 볼 수 있겠는가? 나는 어떻게 구원에 대한 확증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더럽고 속된 인간이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와 화목할 수 있단 말인가? 루터의 이 질문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외치는 죄인 루터의 몸부림이요, 갈망이었다. 이 질문이 종교개혁의 근본적인 내적 동기가 되었다.
루터는 수도원의 고행으로, 신성로마제국을 여행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게 된다. 그는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서 성지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당을 향해서 고행의 순례 길을 떠났다. 금식을 하며, 무릎으로 1,000개에 가까운 계단을 기어올라간 것이다. 옷이 해어지고, 무릎이 찢기어 피가 흘러도 구원의 확신은 오지 않았고, 여전히 하나님은 두려움과 공포로 루터를 심판하고 계셨다.
성지에서 돌아온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읽게 되었을 때, 그토록 간절히 사모하며, 얻으려고 노력했던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다. 그 때, 하나님의 능동적인 의가 수동적인 의로, 율법의 정죄가 사죄의 은총으로 바꾸어지면서 그토록 무섭기만 하던 두려운 하나님이 자비와 은총의 하나님,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 순간 루터는 인간구원이 어떤 공적이나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율법을 지킴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춤을 출 듯이 기뻤다.
나는 아직도 구원을 받을만한 아무런 공로도 자격도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이것이 루터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었고, 놀라운 변화를 일으켜준 것이다. 이것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개혁원리가 되었다. 여기에서 한 인간 루터가 새로워지고, 하나님은 그를 교회 전체를 개혁하는 인물로 사용하신 것이다.
지금도 교회를 개혁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왜 개혁되지 않는 것인까? 교회는 비판을 통해서 개혁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가 개혁되기는커녕, 더욱 미움과 불신, 갈등만 심화되고, 분열과 분쟁이 계속될 뿐이다. 왜 그런지 아는가? 교회갱신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교회개혁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하시는 일이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새롭게 갱신하고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서 교회 전체를 새롭게 만드는 운동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은 혼자서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정복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힘에 겨운 일이었다. 결전의 순간이 왔다. 루터를 파면하기 위한 종교재판이 웜스 대성당에서 열렸다. 그를 아끼는 모든 이들이 그가 가는 것을 만류했다. 그러나 루터는
"웜스성당 지붕의 모든 기왓장들이 마귀가 되어 내게 덤벼든다 해도 나는 두렵지 않다. 진리가 승리할 것이다"
이 한마디를 남기고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가 승리하리라"
라는 찬송을 작사해 부르면서 웜스 대성당으로 갔다.
루터는 진리가 승리하리라는 신앙이 있었기에 두려움 없이 나설 수가 있었다. 이 용기를 가지고 사는 자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다. 바울 사도도 이 신앙을 가지고 산 사람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느니라.
루터가 웜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회의가 시작되었고, 거기에는 는 내용의 루터의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회의장은 물을 끼얹듯 조용하고, 엄숙했다. 교황이 말문을 열었다.
"루터 신부, 이것들이 그대가 쓴 책인가?"
"예, 그렇습니다"
"자네에게 마지막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겠네. 이 책들의 주장을 포기하고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오직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할 뿐입니다. 저는 저의 주장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라고 믿습니다"
루터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교황은 "내가 하나님의 권위로 루터 신부를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파면한다"는 추상같은 선고를 내렸다. 파면이란 가장 무섭고, 잔인한 형벌이었다. 그는 공민권을 완전히 박탈당한 셈이다. 그 누구라도 돌을 들어 그를 쳐죽여도, 그는 보호 받을 길이 없었고, 오히려 그를 죽인 자는 표창을 받게 된다. 루터가 힘없이 성당 문을 나서는 순간, 대기하고 있던 마차가 그를 싣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만 알았다. 그런데 루터를 아끼고, 사랑하던 한 백작이 그가 궁지에 빠지게 될 것을 예견하고 구해준 것이다.
진리를 위해 사는 자는 때로는 환란과 핍박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은 그를 지켜주시고 그를 통해서 잘못되어 가는 교회를 바로 잡아주시고, 거짓과 불의 가운데 빠져 망해 가는 세상을 진리 가운데 세워 주신다. 이러한 종교개혁 운동은 단 한번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부단히 새로워져야 하고 쉬지 않고 개혁되어 가야 한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특별히 바로 잡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 거라고 생각하는가? 첫째로 우리는 오늘의 교회가 사람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인가? 교회가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교회인가, 아니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교회인가를 물어야 한다.
여기에 긍정적 대답을 할 수 없는 교회라면, 제아무리 크고, 화려한 교회라 할지라도,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특히 대교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이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있다.
둘째는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금년으로 한국의 개신교가 이 땅에 전래 된지 120년이 되었다. 대부분 기독교 신앙은 초월신앙이나 내재신앙이 되어버렸다. 보수성과 기복사상, 성공주의에 편승해서 경이로운 성장을 이루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결과 교회는 그 정체성을 상실하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이 아니라, 사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이 되어 가고 있다.
셋째로 한국교회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외쳐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교인들은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상당수의 한국교회는 인기에 영합하는 흥미 위주의 말이나 인간의 생각과 사상, 그 시대사조나 흥행 등 인간의 말이 지배하고 있다.
넷째로 한국교회는 나와 같지 않으면 모두 틀렸다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성령의 시대요, 은혜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성령의 은사는 있는데 성령의 열매는 없고, 은혜의 모양은 있는데 은혜의 내용은 빈약하다. 성령이 역사 하는 곳에는 사랑이 충만하고, 갈라진 것들이 하나가 되고, 화해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성령 충만한 교회라고 말하면서도 중상모략, 분열, 원수 맺기에 익숙해 있다. 나에게 없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있고 나에게 있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없을 수 있기 때문에 나의 단점은 상대방의 장점을 배워 채워 가고, 나의 장점으로 상대방의 단점을 채워줄 수 있는 겸손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체는 모두가 다르지만, 하나같이 몸을 위해 봉사한다.
다섯째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 누룩으로 존재해야 한다. 어두운 세상을 밝게 하고, 썩어 가는 세상을 정화하고, 맛잃은 세상에 맛을 주어야 한다.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변화시키고 개혁해 가는 개혁의 역동성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개혁의 역동성을 상실하고 개혁의 대상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우리나라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민주사회가 되는데 큰 기여를 해왔다. 그러나 기독교가 우리 사회를 위해서 계속해서 기여하기에는 너무나 많이 변질되어 버렸다. 교회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기여하려면 개혁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가 개혁되기 위해서는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나 자신부터, 루터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를 받아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박원근 목사(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서울이수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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