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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교회음악

by 【고동엽】 2010.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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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 Smelik trans. SeokJun Yun

 

 본 글은 Klankbord (February 1991), a publication of the Gereformeerde Organisatie voor Muziek en Zang에 처음 실렸던 것이며, 개혁음악저널(the Reformed Music Journal) Vol. 3, No. 4 (1991)(Brookside Publishing Langly B.C.)에 실렸던 것을 허락을 받아 가져온 것이다.

 

 음악은 그에 대한 활동 없이 단순히 토론을 위한 주제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우리가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건전하고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우리가 지금 진실로 행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학문적인 질문이 될 것이지만, 그것이 이 질문이 필수적이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따르지만 이 모든 것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를 노래함

 

 

개혁파 찬양대는 종교개혁 교회에서 능동적이다. 따라서 칼빈이 음악에 대해 말했던 것을 살피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이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소스를 우리는 제네바 시편찬송인 La Forme des Prieres et Chant, Ecclesiastiques 의 서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서문은 우리에게 음악과 찬송에 대한 칼빈의 관점에 대해 많은 정보를 주고 있다.

 

 

그 개혁자는 예배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 세 가지 있다고 쓰고 있다: 설교, 기도, 그리고 성례. 기도에 관하여 그는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한다. 말로 하는 기도와 노래로 하는 기도가 그것이다. 그는 노래로 하는 기도라는 것이 종교개혁의 창안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사도바울을 언급하고 초대교회의 용례들에 호소한다. 실로 노래로 하는 기도란 매우 고대의 풍습인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기도를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불렀다. 칼빈이 기도로 노래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말할 때 그것은 또한 우리의 찬송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워주시는 것들에 대한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칼빈은 특별히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았다. 어거스틴을 따라, 이 제네바의 개혁자는 이 노래로 하는 기도의 곡조들은 “가벼워서도 경솔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이 곡조들은 “무게 있고 장엄해야 한다”고 말한다.

 

 칼빈은 여기에서 음악이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하지만 곡조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다. “무게와 장엄(weight and majesty)”이라는 단어들로부터 그 노래는 고고한 태도로, 느린 템포로 불리워져야 한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가 가진 종교개혁 시기의 모든 정보들에 의하면 시편은 다소 빠른 템포로 불려졌다.

 

 

칼빈이 음악이라는 것이 기도와 찬송으로 사용되는 데에 매우 적절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을 정립해 둠이 중요하다. 그는 본문만 좋다면 어떤 종류의 음악을 사용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칼빈에 따르면 교회에서 사용되는 음악과 집에서 사용되는 음악 간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어야만 했다. 칼빈은 교회를 위한 음악 스타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른 모든 종류의 음악 유형으로부터 스스로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는 일반적이고도 사용가능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그 곡조는 가사의 내용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칼빈의 시대에 가사와 음악을 통일화하도록 하기 위한 가능성 중의 하나는 8선법을 사용하는 것을 통해서였다. 각 선법은 독특한 특징을 지녔고, 따라서 가사의 특성과 선법의 특성을 매치시키는 일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 말이 오늘날 우리는 교회 음악에 교회 선법들을 사용하는 것만을 허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가사의 내용을 곡조에 매치시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다른 많은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다.

 

 칼빈이 음악을 “하나님께서 인간을 ‘recreating’하고 그에게 즐거움을 주는 최선의, 혹은 중요한 선물들 중의 하나인 것”으로 보았다는 점을 상기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여기에서 recreatin이라는 말은 우리가 통상 이해하는 바와는 다른 의미이다. 우리에게 ‘레크레이션’이라는 말은 여가활동이나 휴양이라는 의미를 갖지만, 칼빈이 이 ‘recreating'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는 문자적으로, 즉 진짜 ’재창조‘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 용어는 칼빈에게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바로 그 목적, 곧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데에 자신을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칼빈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과 복지를 위해 주신 그 선물을 사용하지 않거나 남용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여기에서 칼빈이 음악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과 루터가 가졌던 생각과의 일치점이 드러난다. 루터 역시 음악을 신학의 곁에 두었고 음악을 하나님께서 그분을 찬송하기 위해 주신 가장 중요한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두 개혁자 모두에게서 음악은 신학과는 아무 관련성이 없는 독립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신학과 음악은 함께였던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개혁자들은 음악에 대한 신학적 이해 없이 음악을 취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을 펼쳐 음악이 얄팍한 여가활동을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창조주를 섬기고 사람의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람에게 중요하게 주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따라서 노래로 하는 기도는 전체 교회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이다.

 

 음악의 역사로부터 우리는 종교개혁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교회 음악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음악 역사는 교회에 의해 씌어진, 그리고 교회 안에서 수행된 음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교회와 매일의 삶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는 또한 성-속 음악의 구별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 정도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음악에 대한 (신학적) 관점, 씌어진 음악 이론서들, 그리고 교회(음악) 안에서 발전된 많은 음악 장르들은 또한 소위 당시의 세속음악이라고 불리운 것에도 영향을 주었다. 계몽주의 이후 상황은 급변하여 교회와 삶은 분리되었다. 계몽된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교회도 필요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 자신의 재미를 살피는데는 능숙했다. 음악적인 문제에 있어 교회의 주도적 역할과 지배적인 지위는 점점 더 줄어갔고, 계몽주의 이후에 교회는 더 이상 주체가 아니었다.

 

 

불행히도 교회는 이러한 진전에 대해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그 교회 역사의 초기에 음악에 대한 관심과 주의가 전례 없이 낮아지게 되었음을 보게 된다. 회중 찬송의 수준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의 예외 없이 교회는 이러한 진전에 따랐고, 결국 음악은 종교적이고 영적인 문제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어떤 것이 되어 버렸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음악을 사용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사용하지는 않았다. 음악이 믿음을 세우는 일은 내팽개쳐진 것이다.

 

 오늘날 화란에서의 회중찬송의 수준이 이전 어떤 때보다 더 높아졌다는 주장은 지극히 사실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내 의견으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여전히 음악을 가능한 한 세상에 속한 어떤 것으로 보고 있다고 결론 내려야 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음악은 예배 밖에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로 휴식과 즐거움, 유쾌한 기분전환용 외에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수많은 음악들이 있고,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 음악들이 예배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로는 우리가 그 음악이란 것이 우선적으로 다른 목적을 위해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유념하기만 한다면, 휴식이나 유쾌한 기분전환을 위해 음악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음악은 우리의 유익과 복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말씀의 성경적 관점에서).

  

이것이 바로 말씀을 음악으로 들을 때 우리가 즉각적으로 즐거움이나 취미생활 혹은 잉여장식쯤을 떠올리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의 이유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쉽게 다윗에게서, 느헤미야와 바울에게서, 어거스틴과 루터, 심지어는 음악에는 소양이 없는 칼빈에게서조차도 음악이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며, 믿음을 세우도록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최선의 혹은 최고의 것 중의 하나인” 선물이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오늘날의 찬양과 선포는 반대편 극으로 보여지지만,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바로 음악을 그 찬양과 선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지위로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음악을 단지 단순한 즐거움으로 삼는 것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음악을 우선적으로 콘서트 홀이나 음악당을 위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 건설을 위해 창조하셨다는 사실로부터 떠나서는 안 된다. 음악은 교회를 위해 창조된 것이다.  

 

 찬양을 위해 부름받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끊임없이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 가운데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그 목적을 위해 생기를 주신 것이다(벧전2:9).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그리고 여기에서 이 말은 우리의 전체 삶이 찬양 노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그러하기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입의 찬송을 위해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누가 할 것인가?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인생에게 주셨도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115:16,17)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서로를 격려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시편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이유가 아니던가!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받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자주 노래라는 것이 단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것만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이유라면 찬양대 구성원들은 볼링 클럽 회원이 되어서도 똑같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문제들과 의문들과 기대감들과 함께 찬송이라는 수단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오도록 요구하신다. 기도를 노래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존을 고백하게 되고,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 찬양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을 찬양하고 우리의 필요들을 그분 앞에 가지고 나오게 하기 위해서 음악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신다. 모든 사람들이 다 성가대원이 되거나 악기를 연주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들이 노래라는 도구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하고 노래 안에서 그분을 부를 직무를 가졌다. 우선은 예전 안에서이지만 또한 예전 밖에서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 이 명령은 찬송이 사람이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것 이상임을 보여준다. 찬양의 노래는 심지어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사명이다. 신약 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불려진 찬양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조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시편 50:23에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는 말씀을 읽게 된다. 하나님의 찬양을 노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길을 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찬송, 노래된 기도는 모두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찬송하는 것은 먹는 것과 같다: 우리는 생명의 양식을 먹고 그것을 소비한다.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이다. 찬송하는 것은 마시는 것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마신다.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이다. 이는 우리가 소비하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이유가 된다. 크림빵, 프렌치 프라이, 미트볼, 맥주와 진 같은 것들은 맛있지만 멀리 볼 때는 과도하게 소비하면 우리의 건강을 해친다.

 

 

“취향을 토론할 수는 없어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사가 살이 덜찌기 위해 먹을 것을 충고하거나 담배를 덜 필 것을 조언할 때 누가 의사에게 뭐라 하겠는가? 반면에 건강에 좋은 음식은 맛도 좋다. 덧붙여 건강한 음식은 충분히 다양하기도 하다. 우리는 교회 음악에 대해서는 토론할 수 없다는 생각을 스스로에게서 철저하게 제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음악의 역할이 항상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기능한다는 사실과 우리의 음악적 선택들이 항상 생명과 믿음에 대한 음악적 관점과 병행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의 항상 내리는 그러한 선택들이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우리의 교회 음악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혹은 잠재의식적으로) 음악에게 부여한 기능과 목적에 의해 크게 결정지어진다. 예를 들자면 음악에 매혹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끝없는 장엄함을 찬양하고 싶어 하는 사람과는 다른 음악을 선택할 것이다. 혹은 모호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절대 제네바 시편 찬송곡을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찾게 된다. 예를 들자면 거짓종교의 음악이나 에로틱한 소프트 팝송 같은 것을 말이다.

 

 

음악에 대해 건전한 성경적 관점을 갖는 일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론상 소망하는 기능이나 목적이란 모든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지속할 힘을 주고 모든 이들을 책임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론의 발전은 우리가 무엇에 분주해야 할 지에 대해 생각하도록 부추긴다.

 

 칼빈과 그와 함께 했던 많은 이들은 모든 음악이 다 교회에 적합하지는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하다. 개혁자들은 “poids Є majesté”(무게와 장엄)을 가져야만 하는 교회 음악 스타일을 강력하게 선호했다. 그는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거룩하신 유일자 앞에서 우리가 음악을 만들고 있다는 점을 잘 알았다. 성경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에 앉아계시는 존엄한 분이시라는 사실과 조우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시므로 영광 받으셔야 하고(사3:5), 또한 그의 능력과(욥36:22), 높은 곳에서 낮은 이들을 굽어보심으로 인해(시138:6) 영광 받으셔야 한다.“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시기 때문이다”(출15:21).

 

 

이러한 사실은 구약적인 것만은 아니다. 히브리서 7장 26절에서도 이렇게 적고 있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의 필요에 부합하니(역자 사역) 그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히브리서 8장 6절과 계시록 11, 12, 15, 19장에 나오는 찬송들도 함께 보라.

 

 칼빈에게 있어 하나님의 높으심과 인간의 작음은 모든 예전적 행위들에서도 결정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예전 안에서 찬양으로 불려질 음악의 종류에서도 중요성을 가진다. 이 음악은 칼빈이 문자적으로도 그 중요성을 쓴 바와 같이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의 현존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최근에 오 재거(O. Jager)는 시편 150편의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2절-역자주)란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당신의 찬양과 당신의 태도가 바로 하나님의 높으신 영광과 위대하심과 비견되도록 하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지적한 바 있다.

 

 

이는 고풍스럽고, 과장된, 점잖을 빼면서 허풍을 떠는 음악을 위한 변론이 아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아무도 표현할 수도 비길 수도 없으며, 어떤 소리로도 번역할 수도 없다. 게다가 고요함 또한 그분의 것이며, 사람은 하나님의 높으심 앞에서 고요하게 된다(느8:12; 시62:2; 65:1; 76:9; 사30:15).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는 또한 엘리트 음악을 위한 것도, 노래하려고 하는 회중이 스스로 알 수도 없는 엘리트 음악 연습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복음의 소중한 가치를 위한 음악 형식을 향한 요청이다. No flag on a broomstick!

 

 

모든 속됨, 종교적 감성주의, 상업적이고 즐거움을 위한 음악이나 음악형식은 우리가 우리 목소리를 높이 들어 찬양드리게 될 때 뒤에 남겨질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역시 그렇게 한다. 뿐만 아니라 찬송과 오르간 연주의 질을 개선할 현실적인 가능성에서도 여러분은 먼저 “그분의 놀라운 위대하심 때문에” 그분을 찬양하는 데 전력을 기울일 것이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처럼 (노래하는) 기도가 우리의 삶의 첫 번째 필요라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집에서와 학교에서 음악을 적절히 사용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아동기에 흥미로운 취미를 개발하려는 것 때문이 아니기 때문에 잘만 하면 아이들이 디스코 음악에서 멀어지기를 바라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믿음과 찬송음악이 불가분리적으로 함께 가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래와 음악은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육체”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한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플라톤도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플라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를 확인하였다. 또한 오늘날 이 사실은 과학적으로도 확인된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 대한 우리의 의존을 고백해야 한다. 그런데 이는 우리 입술의 열매인 노래 없이는 할 수 없다.

  

덧붙여서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닿고, 노래를 수단으로 하여 우리의 마음을 꿰뚫는다. 성경에서 선포와 노래는 함께 간다. 이 말은 성령께서 종종 음악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신명기 31장을 지적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노래를 써서 백성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신다. 32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된다. “모세가 이 모든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인하여 너희가 요단을 건너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신32:45-47)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그 말씀을 자기 백성들에게 가져가시기 위해 노래를 사용하신다. 노래는 결코 단순히 믿음의 표현일 뿐인 것이 아니라 동시에 믿음을 일깨우는(impress)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는 우리가 그분의 손에서 받았던 것을 다시 그분께 돌려 드리는 것이다(대상29:14). 우리가 먼저 감화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우리가 우리 믿음을 표현하겠는가? 그리고 먼저 선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믿음이 우리를 감화할 수 있었겠는가? 참으로 우리는 여기에서 설교에 도달하게 된다.

 

 

또한 우리는 성경읽기와 우리 부모님들이 집에서 말씀해 주셨던 모든 것들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입술에 놓여져 있어왔던 찬송에 도달하게 된다. 이와 같이 교회 역사에 있어서 찬송은 말씀을 확장하는데에 있어 극도로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이미 신명기에서의 모세의 노래에 대해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예를 들어 반동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 시기를 살펴볼 수도 있다. 그 시기에 다양한 로마교 신학자들이 루터가 그의 다른 저술들 보다 오히려 그의 찬송곡들이 더 많은 데미지를 입혔다고 쓰고 있다.

 

 서로를 섬김으로써의 예배

 

 

교회 예배는 경배의 섬김과 말씀의 섬김이지만, 또한 “godsdienst­oefening”(하나님의 섬김의 실제, an exercise of God's service)이기도 하다. 교회 예배 시간 동안은 그곳이 이 섬김을 실현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칼빈이 계속해서 강조했듯이- 찬양과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하는 것은 하나님의 섬김의 주된 목적이며 감사의 중대한 요소이다. 진실은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산다는 점이다.

 

 

교회 생활은 예전으로부터 발전한다. 회중의 발전을 위한 기초는 우리가 붙드는 예배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 예배에서 우리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리고 교회가 그 예배에서 고백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교회는 어디에서 그것을 배울 것이며, 또한 그것을 배울 수 있는 다른 공동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칼빈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칼빈의 시편 주석을 읽어보면 우리는 예배야말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을 실현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탁월한 처소라는 사실을 빈번하게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제네바에서는 이 노래하는 기도를 위한 많은 방들이 제공되었다. 시편찬송은 주일 예배와 수요일 밤 예배 동안 고정된 당번들에 의해 불려졌다.

 

 

매 교회 예배마다 사람들은 평균 18절에서 20절 가량의 찬송을 불렀다. 이는 그들이 간혹 각 찬송에 7-8절을 불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실은 시편 찬송이 1562년에 완성되었을 때, 시편 전체를 노래하는 데 25주가 걸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체 시편이 1년에 두 번 불려졌다.

 

 또한 교회 예배에서 우리는 상호섬김을 연습한다. 헌금 시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서로를 요청하는 시간에도, 서로를 위로하는 시간에도, 격려하고 서로를 믿음으로 세우는 시간에도 그러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전에서 함께 찬양해야 하는 이유이다. 찬송 곧 노래하는 기도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다루는(deal with) 것이다.

 

 

에베소서 5장 18절과 19절에서의 바울의 요청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서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라고 명령하고 있다. 시편 역시 우리에게 우리가 서로 다루기를 말씀하고 있다. 예를 들면 시편 40:10은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great congregation, 큰 회중-역자주)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시22:23도 보라).

 

 

이러한 정황에서 -그리고 또한 찬송과 음악의 확실한 관점이 실제적인 결과물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나는 교창(antiphonal singing)의 실제를 지적하려고 한다. 교창은 명백히 우리가 서로를 다루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이 서로에 대해 말했을 때, 이는 회중을 세우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세움과 교화를 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교회 예배에서 우리는 서로를 다루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창은 단조로움을 깨는 멋진 예술적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또한 예배 안에서 찬양대에게 기능을 부여하는 적당한 가능성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찬양대를 거리낌없이 소개하고자 함은 아니다. 이는 회중집회나 콘서트에서 “시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토레이(Cantorei : 합창단의 일종-역자주)’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찬송으로 회중을 요청하거나 성경 본문으로부터 찬송하기 위한 것이지 청취자의 미적인 즐거움을 위한 콘서트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회중들이 찬양을 위해 요청받거나 격려받도록 관리되는 것이다. 칸토레이는 또한 회중을 이끌고 활기차게 할 수도 있다. 그러한 찬양대야말로 실로 회중의 건설에 분주한 것이다. 어떤 시편들은 그 구조를 보면 그것이 응창(responsorial : 선창자의 선창에 받아 노래하는 것-역자주)과 교창을 위해 씌어진 것이라는 점이 나타난다. 시편 136편이 잘 알려진 예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교창은 예술적 정교함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구약에서 가져온 찬송과 음악의 기능과 관련되어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을 노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가는 길을 여는 사람이다.

 

 그러나 저절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찬양으로의 나아옴이다. 우리는 이미 사람은 스스로가 하나님께 찬양 드리기 위해 나아오지 않는다는 점을 말한 바 있다. 나의 견해로서는 우리가 “우리는 스스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찬양을 노래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누구도,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따라서 부정확하다. 사람은 스스로는 어떠한 선으로도 기울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은 분명히 자기 스스로는 찬양에로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 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이 든 사람이라 할지라도 매일매일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찬양과 (노래하는) 기도는 위험지역에 있음이 발견될 것이다. 이 사실이야말로 사람이 스스로를 하나님을 찬송하는 직무에 스스로를 정립해야만 하는 이유이며, 그렇게 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이유이다. 성경이 그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요청하고 그분의 이름을 구하라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람은 찬양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이는 평생이 걸린다.

 

 

내 의견으로는 응창이나 교창으로 찬송할 때, 회중이 찬양대화 함께 찬송한다고 해서 회중에게서 말씀이 상실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 때 우리가 서로의 입에 말씀을 두고, 서로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그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결국 이것은 우리의 서로를 향한 돌봄이 형식으로, 그리고 노래로 표현된 것으로 주어진 것이다.

 

 

교대로 부르는 찬송은 단지 구약적 정서에서 만들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우리는 서로 위로와 격려를 주기 위해, 서로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칼빈은 교회의 책 La Forme des Prieres(제네바 시편찬송-역자주)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고 진실로 우리는 경험에 의해 찬송이 위대한 힘과 감화하는 활기와 사람의 마음을 불타오르도록 호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더 격렬하고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짤막하게, 그리고 간결하게나마 음악의 창조이유와 개혁파 찬양대의 존재 이유, 그리고 왜 믿음과 찬송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인지를 살펴보았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엡5: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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