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전통에서의 교회 음악
Dr. Arjan de Visser
trans. SeokJun Yun
비셔(Arjan de Visser) 박사는 온타리오주 해밀턴에 있는 캐나다 개혁교회 신학대학의 봉사신학과 교회론(Diaconiology and Ecclesiology) 교수입니다.
본 글은 클라리온 Volume 58, No.23 (November 6, 2009)에 실렸던 것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글은 2009년 11월 11일에 캐나다 개혁교회 신학대학의 저녁 집회 때 했던 강연에 내용을 덧붙여 정리한 것이다.
2009년은 존 칼빈의 탄생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칼빈의 중요성은 전 세계에 걸쳐 셀 수 없는 컴퍼런스들에서 집중되었고 평가되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오늘 저녁에 칼빈 유산의 한 측면에 초점을 맞추려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교회 음악의 영역에서의 칼빈 전통에 대해 토론하려고 한다.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배 시간 중의 악기사용에 대한 그의 관점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이런 기념적인 집회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또한 대단히 적실한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전히 악기 사용에 대한 토론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오르간은 개혁파 예배를 위해 선택한 도구인가 아니면 피아노나 기타, 플롯과 트럼펫과 같은 다른 악기를 위해서도 선택의 여지를 두어야 하는가?
우리의 주제는 이 사실이(오르간 사용의 전통-역자주) 해당 영역에서의 개혁파 전통이 칼빈에게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다. 개혁파 신자들로서 우리는 우리가 칼빈의 전통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 예에 있어서만큼은 제네바의 그 개혁자는 현재의 우리의 현실에 대해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칼빈은 회중찬송을 격려했지만 악기 사용은 허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오르간조차도 말이다.
심지어는 개혁파 진영 내에서도 예배에 악기를 도입한 것은 실수였다는 목소리들이 있다. 스콧 클락 박사(Dr. R. Scott Clark)는 최근에 악기 사용의 근거를 질문한 바가 있다: “누군가가 기독 예배에서 영감되지 않은 찬송과 악기를 사용하도록 성경이 요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방법이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개혁파 예배에의 악기 도입은 강제로 우리의 신앙고백적 토양을 후퇴시킨 것과 같다.1)
우리는 예배 시간에 어떻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교회 오르간에 집착해야 하는가? 다른 악기들을 추가해야 하는가? 아니면 예배에서 오르간을 포함하여 모든 악기들을 다 제거해 버려야 하는가? 칼빈이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고 있는 몇 가지 지침을 함께 살펴 보도록 하자.
칼빈의 원리들
교회 음악에 관한 칼빈의 관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그는 음악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데 사용될 필요가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었다. 그의 유명한 제네바 시편찬송(1543)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즐겁게 하고 그에게 기쁨을 주는 데 적절한 다른 것들 사이에서도 음악은 첫째이거나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음악은 하나님께서 그 사용을 위임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우리가 생각해야 한다는 점음 필수적이다.”2) 이 인용문은 칼빈이 음악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음악을 하나님의 피조물 중 가장 아름다운 측면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칼빈은 우리가 타락 이후에 살고 있으며, 하나님의 선물은 쉽게 오용될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음악은 책임있는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둘째, 칼빈은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의 음악의 역할과 예배에서의 음악의 역할 간에 구별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일상의 삶에서 음악은 즐거움과 기쁨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지만, 예배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신자들이 예배를 위해 모일 때, 그들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끌리며, 그들은 하나님의과 천사들의 임재 속으로 들어간다. 이 놀라운 사실이 찬송과 사용되는 멜로디의 성격을 결정해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멜로디는 천박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분명한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 칼빈은 예배 음악의 특성을 묘사하기 위하여 ‘poid et majeste’(무게와 위엄)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찬송은 가볍게도 천박하게도 되지 않도록, 오히려 (어거스틴이 말했던 것처럼) 무게와 위엄을 갖추도록 항상 주의가 기울여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식탁과 자신들의 집에서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음악과 교회가 하나님과 천사들의 임재 속에서 사용하는 시편찬송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셋째, 칼빈은 교회에서의 찬송은 기도의 한 유형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같은 서문에서 그는 말한다: “공적인 기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말로서만 행해지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노래로 행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찬송은 경외감을 가지고 불러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데 방해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록 주의가 기울여져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 음악이 쓰고 있는 멜로디조차도! 모든 것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간의 이 “언약적 대화”라는 경건한 특성에 공헌해야만 하는 것이다.
넷째, 칼빈은 찬송이 회중들에 의해-성직자들이나 성가대가 아니라- 행해져야만 한다고 강하게 믿었다. 칼빈은 다른 경우에서는 성가대의 찬송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가 저녁에 드려지는 어린이 성가대의 찬송을 즐기곤 했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주일에는 이것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만남이다. 그러므로 찬송은 반드시 전 회중에 의해서 불러져야만 하는 것이다.
다섯째, 칼빈은 찬송 본문의 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한 하나님께 노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와 음악에 대한 사도 바울의 말씀(엡5:19)을 인용하면서, 칼빈은 “영적인 노래들은 마음을 떠나서는 잘 노래될 수가 없고, 오히려 마음은 지성을 요구한다”고 하였다(여기에서 ‘지성’의 좀 더 좋은 번역은 ‘이해’이다). 이해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칼빈은 회중찬송에서 라틴어의 사용을 폐지했고 찬송은 회중들의 공통적 언어로 불러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섯째, 칼빈은 찬송의 본문은 성경적이어야 하고, 가능한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직접 취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시편찬송을 선호했다: “우리가 사방을 둘러보고 여기 저기를 살필 때, 성령께서 말씀하시고 다윗을 통해 지으신 다윗의 시편보다 더 좋고 우리의 목적에 더 적합한 찬송은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말들을 통해서 칼빈은 찬송가를 노래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하게 그는 구약의 시편을 노래하는 것을 선호했다.
끝으로, 칼빈은 절제(moderation)가 예배 동안의 찬송을 위한 지도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만약 음악이 너무 부요하고 아름답게 되면, 그 자체가 주목을 끌고 마음을 말씀의 본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을 막는다. 따라서 칼빈은 시편이 악기반주 없이 불려지도록 정리했다. 그는 또한 회중이 제창으로(모든 사람들이 같은 곡조로 부르는 것) 찬송하도록 결정했다. 칼빈은 화음으로 부르는 찬송이 마음을 방해하고 시편 가사에 집중하기 더 어렵게 만들 것을 우려했다.
회중 예배라는 정황 밖에서 노래하는 것에 대해서는 칼빈은 더 정교한 음악양식들을 허용했다. 그러한 정황 하에 그는 악기를 사용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며, 시편의 4부 화음을 작곡하기 위한 클라우드 구디멜(Claude Goudimel)의 발의를 승인했던 것이다.
제네바 시편
이러한 원리들을 염두에 두고 칼빈은 찬양 직무에 있어 새로운 전통을 세웠다. 그는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무르는 동안 독일어를 말하는 회중들이 운율화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들었다. 칼빈은 감명을 받았고 이러한 접근법을 자신의 교회에도 적용하기를 소망했다. 그는 지역 회중들이 자신의 언어로 된 시편을 부를 수 있기를 원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시편 본문은 의역되어야만 했고 운율화된 버전으로의 재작업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새로운 멜로디가 작곡되었다 - 멜로디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전체 회중이 부를 수 있을 만큼 쉬운 것이어야 했다. 시인 클라우드 마롯(Claude Marot)과 루이스 부르게이오스(Louis Bourgeois)와 같은 숙련된 예술가들을 영입함으로써, 칼빈은 124개의 새로 작곡한 멜로디를 사용한 시편 전체(150편 모두)의 완성을 감독할 수 있었다. 인상적인 노력과 지속적인 영향력의 산물이었다!
우리는 이로 인해 우리 자신의 언어로 운율화된, 노래할 수 있는 멜로디를 가진 시편을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에게 미친 제네바 시편의 이 막대한 영향력이란 평가 자체가 어려운 것이다. 당시에 그것은 예배에 있어 혁명적인 발전이었다. 그때까지만해도 찬송이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고, 라틴어로 불려졌으며, 아름답지만 평신도인 사람들이 부르기에는 너무 난해한 멜로디를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최초로 회중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시편을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시편 150편이 프랑스에서는 위그노들에게 유행하게 되었다. 제네바 시편의 명성은 또한 다른 나라들에게도 퍼져나갔다. 페트루스 다떼누스(Petrus Dathenus)는 화란어로 시편을 완성하는데 제네바 멜로디를 사용했다. 우리가 그 때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400년 전의 화란에서 개혁교회의 예배에 참석할 수 있다면, 회중들이 제네바 멜로디를 가진 화란어 시편을 노래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선창자(voorzangers)가 찬송시에 회중들을 이끌곤 했다. 시편찬송은 느린 템포에서3) 아이소 리듬 스타일(iso-rhythmic fashion : 같은 길이를 가진 긴 음표들로 되어 있는 스타일, hele noten)로 불려졌다.
화란에서의 종교개혁 시작때부터 예배시간 동안 교회 오르간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초기의 총회들(도르트레흐트 1574, 미델부르그 1581)은 오르간 사용을 금하도록 조언했다.4)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변화되었다. 오르간은 회중 찬양을 돕기 위한 가치있는 악기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개혁교회 사람들이 오르간의 도움 없이 노래했던 때를 상상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17세기 초에는 그것이 상례였다!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 악기의 도움 없이 시편을 노래하는 것이 여전히 인상적일 수 있다. 몇 달 전에 나는 온타리오주 그랜드 밸리에서 예배를 인도할 때 “제네바 체험”을 한 적이 있다. 다람쥐가 전력선을 갉아먹는 바람에 건물 전체가 전원이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다람쥐는 감전사로 건물 바깥에 뻗어 있었고 회중들은 어둠 속에서 북적대면서 아카펠라로 노래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계몽적인 경험이었다. 회중의 찬송은 신선하고 강력하게 울려 퍼졌다! 실로 많은 수의 제네바 멜로디들이 도움 없이도 꽤 잘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예배에서의 악기 사용(과 비사용)에 대한 칼빈의 접근법을 평가해 보려고 한다.
많은 개혁교회의 성도들이 존 칼빈이 예배 시간에 악기를 사용하는 것을 반대했다는 사실을 듣고서는 놀란다. 우리 모두가 시편들이 신자들에게 수금과 비파와 다른 악기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요청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이 제네바의 개혁자는 그것에 대해 반대했을까?
우선적으로 우리는 악기 사용에 대한 반대가 칼빈 혼자만의 의견이 아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이는 기독교 역사 초기 천년 동안의 압도적인 견해였다. 교부들은 악기사용이 옛 언약 하에서의 성전예배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성전 예배가 새 언약 하에서는 폐지되었기 때문에 교부들은 악기의 역할 역시 끝났다고 생각했다. 초창기 기독교회는 아무런 악기도 사용하지 않았던 회당의 선례를 따랐다.
또한 여기에는 또 다른 요인들도 있었다: 교부들은 음악이 이교도의 예배에서 어떻게 황홀경의 행동이나, 예언적 무아지경상태, 주신제의 댄스들을 위한 도구로써 기능하는지를 잘 알았던 것이다.1)
교부들은 악기 사용에 대해 거의 고려하지조차 않았다. 그들은 심지어 찬송과 같은 것이 예배를 방해하게 될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제10권, 33장)에서 찬송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씨름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멜로디로 노래하는 것이 찬송 가사보다도 때때로 얼마나 더 감동적이며 얼마나 더 죄를 깨닫게 해주는지에 대해 입증하고 있다.2)
일반적으로 교부들의 본을 따르고자 했던 칼빈이 음악사용에 있어서도 그들의 주의 깊은 접근을 따랐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는 예배 시에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단지 사람의 기쁨과 즐거움에 봉사하게 되고, 따라서 참예배의 길을 얻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했다.
“우스꽝스런” 오르간
칼빈의 경우에는 다른 측면 역시 언급됨이 필요하다. 그는 자신이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 보았던 내용에 의해 경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복음 설교가 얼마나 가리워졌으며, 넘쳐나는 제의들과 의식들에 의해서 압사당하고 있는지를 증언했다. 칼빈이 교회에서 오르간이 연주되는 것을 들었는지 아닌지를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는 몇 군데의 글에서 오르간 연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무엘상 18장 6절 설교에서(여인들이 승리한 다윗에게 노래와 음악으로 맞으러 나왔을 때에) 칼빈은 옛 언약 제의들을 “우스꽝스럽고 어리석게 모방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비판했다. 로마 가톨릭은 “오르간과 다른 많은 유사한 웃기는 것들을 더하기만 한다면”3) 예배의 축제적 성격이 더해지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보았던 예배의 개악에 대해 반응하면서 칼빈은 복음 설교가 완전한 주목을 받도록 하는 예배 접근법을 고안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읽을 때에 우리는 칼빈이 나님의 백성들이 수금과 비파와 다른 모든 악기들로 하나님의 찬양을 노래하라고 요청된 모든 구약 본문들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질문하고 싶어진다. 무엇보다도 심지어 안식일 시편조차(시편 92편) 수금과 비파의 사용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칼빈은 그러한 본문들을 숙고했고, 또한 예배 시의 악기 사용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위한 신학적 설명까지 제공했다. 전형적인 예는 시편33편 2절(“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에 대한 그의 주해에서 발견된다. 칼빈은 성전 예배에서 악기가 사용되었고 그것들이 신자가 하나님께 활기찬 찬송을 드리도록 고무시키는 것을 도왔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은 악기가 예배에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유지한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칼빈은 악기가 옛 언약의 그림자에 속하였으며, 이후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전에 유대인들에게 부과되었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적용가능한 것으로 무차별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심벌을 연주하고, 비파와 비올(바이얼린의 전신-역자주)과 모든 종류의 악기들을 연주하는 일이 시편에 대단히 자주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교육의 한 부분이었다. 말하자면 율법의 유아기적 교재인 것이다. 이는 성전예배를 말한다.”4)
이 본문은 칼빈이 악기를 옛 체제에 속한 것으로, 즉 언약의 “미숙한” 단계에 속한 것으로 보았다는 것을 그려주고 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악기의 사용은 향을 태우고, 촛불을 밝히는 것, 그리고 다른 율법의 그림자들과 비유되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기독교회에 의해 폐지되어야만 한다.
둘째, 칼빈은 악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근엄한 예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시편 33편의 주석에서 그는, 사람들은 “외적인 허영”과 악기의 소음을 좋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단순성(simplicity)”을 기뻐하신다고 쓰고 있다. 이 ‘단순성’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칼빈의 생각에서 단순성이란 “이해가능함(intelligibility)”과 함께 가는 말이다. 예배에서는 무엇이건 단순하고 이해가능하여야 전 회중이 교화될 것이다. 이 본문에서 칼빈은 사도바울이 방언을 말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는 점을 언급한다(고전14장). 왜 바울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가? 그것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면 아무도 교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악기 역시 동일한 적용이지 않은가? 악기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이해가능한 메시지를 갖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그것은 회중의 교화에 봉사하지 못한다. 칼빈의 견해에 의하면 예배 시에 악기를 사용하는 것은 “경솔한 열정일 뿐만 아니라 사악하고 왜곡된 완고함”이다.
칼빈의 접근에 대한 평가
이제 악기 사용을 반대하는 칼빈의 견해를 간단히 평가해 보자. 칼빈의 첫 번째 주장은 악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옛 언약의 성취와 함께 폐지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악기가 어떤 점에서 성취되었는지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희생제사와 의식과 율법의 상징들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중지되었고, 모든 그림자들은 성취되었다고 고백한다(벨직, 25장). 동시에 우리는 가르침과 찬송과 옛 언약 예배의 다른 요소들이 폐지되지 않았고, 그 중요한 역할들을 신약 예배 속에서도 여전히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다. 찬송은 심지어 천상의 예배에서조차 한 부분이다(계시록을 보라).
희생제사에 관하여는, 왜 그것이 폐지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희생제사는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희생에 대한 그림자였다. 궁극적인 희생제사가 드려지자 옛 언약의 희생제사는 쓸모없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의 성전예배에서도 적합했지만 (성령의 전인) 그리스도의 회중의 예배에서도 여전히 적합하다. 만약 찬송이 양쪽 언약들 모두에 적합하다면 왜 악기가 돕는 것이 불가능한가? 이 질문은 대답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악기가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유사하고 따라서 고린도전서 14장에 따르면 이는 피해야 할 것이라고 하는 칼빈의 주장에 대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클라스 스킬더 박사는 말한다. “성경으로부터 이러한 주장을 편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이다.”5) 실로 여기에서는 주제들을 뒤섞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일종의 회중에게 이해되지 않는 말이며, 이는 예언과 설교의 자리를 빼앗아갈 위험이 있었다. 사도 바울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방문한 불신자들로 하여금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고 결론짓도록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고 쓰고 있다(고전12:23). 악기는 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악기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지지하고 강화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그것은 “이해가능한” 말이나 기도의 자리를 빼앗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지지한다.
요약하자면, 칼빈의 악기사용 반대에 대한 신학적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이는 그가 예배 안에서 악기를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발생할지도 모를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논증점을 찾으려고 시도한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생각은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칼빈의 엄정한 입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음악이 매우 강력한 도구이기 때문에 손상을 줄 수 있다는 그의 의견에 대해서는 인식해야만 한다. 결국 음악이 예배를 강화하고 지지하는 힘을 가졌을 뿐 아니라, 에배를 방해할 힘 역시 가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오르간 주자나 피아니스트가 너무 주도적이거나, 열광적이거나, 경박하거나, 심지어는 아름다워서 우리가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를 잊어버리고 악기에 관심이 기울어진 경험을 누구나 갖고 있지 않은가?
칼빈의 악기에 대한 접근법을 되돌아볼 때 우리는 그가 특정 역사적 정황 속에서 사역했다는 것을 감안해야만 한다. 450년이 넘게 지나면서 악기와 반주의 영역에서는 막대한 발전이 있어왔다. 우리는 좋은 반주가 살아있고 원기왕성한 회중 찬송을 자극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칼빈이 결코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이며, 예배에서 악기를 허용하는데 대한 그의 주저함을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칼빈은 오르간을 들어 본적이 있을 수도 있지만 결코 회중 찬송을 반주하는데 사용된 오르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칼빈에 대해 생각하기로는, 그가 어떻게 악기가 회중에 회중찬송을 고무시킬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만 있었다면, 우리의 주제에 대해서 다른 접근을 보였을 것이라고 본다.
진전된 관찰
예배에서 악기를 사용할 것이냐 사용하지 않을 것이냐에 대해 좀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고려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두 가지 국면이 나타나게 된다. 한편에서 우리는 구약에서 악기 반주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는 데 대한 풍성한 요청들을 가지고 있다. 이는 우리가 기독교 예배에 이를 반영하는 것에 무게를 실어준다. 다른 측면에서는 신약성경에서는 악기 사용에 대한 아무런 금지명령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예배 중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명백한 요청이 있지만(엡5장, 골3장), 악기 사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권고도 없는 것이다(비록 계시록에서 악기 사용이 여전히 서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여기에는 실제적인 염려가 있었을 것이다: 모든 가정 교회들이 다 악기를 사용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관점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나는 성경으로부터 이끌어질 수 있는 두 가지 원리들을 제안하는 바이다. 첫째는 회중 찬송은 기독 예배의 본질이라는 점이며, 둘째는 악기 사용이 허용되느냐 하는 점은 아마도 심지어 추천할 수 있다 할지라도 본질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들 중에 다른 나라들을 여행하거나 세계의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악기의 반주가 없이도 회중이 얼마나 강력하게 찬송할 수 있는지를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 회중들의 4성부 찬송을 들어보라. 그러면 여러분은 그들의 예배 전통에 악기를 소개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들의 찬송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동시에 악기는 공동체적 찬송을 진정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구약의 예전적 발전을 살피는 것은 도움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예전적 발전을 위한 여지를 허용하셨다. 모세는 성막 안이나 주변에서의 예배를 위해 찬송이나 악기를 도입하지 않았다. 몇 세기가 지나서야 다윗왕이 성가대의 찬송과 악기를 도입함으로써 성전예배의 중대한 확장을 조직했으며, 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기독 교회 내에서의 예배 발전에 대해 이러한 추론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악기의 사용은 사도들에 의해 규정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 하에서 예배 음악의 진보를 허락하셨고 이로 인해 기쁨을 얻으시지 않았는가?
다음 글에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했던 점들로부터 결론과 적용들을 끌어내려고 한다.
우리의 교회들은 회중 예배의 도구로 교회 오르간을 대단히 존중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18세기 이후 개혁교회의 지도자들은 회중찬송에의 교회 오르간의 긍정적인 영향을 칭찬해왔다. 1911년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에 의해 출판된 예배에 관한 책에서 그는 “당회가 오르간주자들이 스스로 전면에 나서려고 하지 못하게 함만 확실하다면 오르간 음악에 대해 아무런 반대도 없다. 그들의 직무는 찬송을 인도하고, 보좌하고, 조절하고 증진시키는 것이다. 오르간에게는 결코 그 자체가 들려지도록 하는 권리가 주어져서는 안 된다. 오르간은 단지 회중 찬송을 섬겨야만 한다.”고 말했다(우리의 예배).
클라스 스킬더 박사는 스스로가 뛰어난 오르간 주자였다. 그는 오르간 주자가 잘 연주하고 예전적 원리들에 대한 좋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오르간이 실로 예배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들 중 더 나이가 많은 세대들은 스킬더가 얀 쯔바르트(Jan Zwart)같은 오르간 주자의 기술을 얼마나 존경했는지를 기억할 것이다. 스킬더는 쯔바르트의 연주를 “오르간석에서 나오는 예언”이라는 유명한 말로 묘사한 바 있다.
카이퍼와 스킬더가 기악음악에 단지 회중 찬송을 위한 반주 이상의 더 광범한 역할을 할애하도록 준비시켰다는 점을 지적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카이퍼는 이러한 관점에 아무런 성경적 규칙이 없으며, 교회는 독립된 기악음악과 성가대 찬송을 위한 여지가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영적인 재량권을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믿었다. 교회가 “영적인 동기”에 의해 그러한 결정들에 도달하는 한은 그것은 좋은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카이퍼와 스킬더는 회중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섬기고 증진시키는 한 예배 시에 악기연주의 독립된 역할을 장려했다. 실제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예배의 전후에, 헌금하는 동안, 그리고 주의 만찬이 시행되고 있는 동안의 오르간 연주를 말하는 것이다. 스킬더는 심지어 오르간이 설교후의 회중 묵상의 시간을 위해 사용이 허락될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나는 설교 후에 잠깐의 부드러운 오르간 연주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Om Woord en Ke가, Vol.2, p.36).
결론과 제안
이전의 글들에서 나는 예배에서의 음악에 대한 칼빈의 원리들을 기술하고 평가하였다. 나는 예배에서의 악기 사용에 대하여 몇 가지 결론들과 제안들로서 글을 맺으려고 한다.
첫째, 예배음악과 다른 용례에서의 음악에 대한 칼빈의 구분을 기억하는 것은 유익하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만남이라는 예배의 독특한 성격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회중찬송의 강조점을 이끈다. 이는 사도바울에 의해 주어진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라”(엡5:19; 골3:16)와 같은 성경적 가이드라인에 기초하고 있다. 히브리서에서 전체 회중은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라고 격려를 받았다. 예배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건간에 우리는 칼빈의 지도를 따라 회중 찬송의 우선순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예배 안에서의 악기와 성가대 사용에 분명한 제약을 준다. 그러나 콘서트나 다른 모임들에서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우리가 성가대 찬송의 부요한 전통들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들 중에 잘 훈련된 음악가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이러한 전통을 계속해서 개발해 나가도록 하자. 이는 우리의 주일예배를 위한 강력한 원군들이다.
둘째, 칼빈은 예배로부터 성가대와 악기들을 폐지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그의 시대의 교회 속에서의 정황에서 주어졌다는 점에서 이해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적 원리로부터 온 필연적인 어떤 것은 아니다. 우리는 카이퍼나 스킬더와 같은 사람들에게 동의한다. 악기는 회중찬송을 고양시키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연주의 질을 위해서도 분투해야 한다. 반주자들이 충분히 익힘으로써 그들의 연주가 회중 찬송을 (꺾는 것이 아니라) 용이하게 할 것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회중 찬송을 반주할 수 있게 그러한 악기들을 연주하는 것을 배우도록 권장할 것이다!
셋째, 만약 교회가 음악가들이 회중 찬송을 반주해 줄 것을 기대한다면, 교회는 반주자들을 위해 예전 훈련 역시 제공해야만 한다. 누구든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연주와 반주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회중 찬송을 반주하기 위해서는 음악가도 예전의 원리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예배가 무엇인지, 예배 안에 있는 회중 찬송의 기능이 무엇인지, 여는 시편, 율법 낭독 이후에 불려지는 시편, 그리고 기타 다른 찬송의 특별한 기능이 무엇인지 등). 화란에 있는 우리의 자매교회들은 반주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코스를 제공하는 교회 음악가 연합회를 가지고 있다(개혁교회 음악가 협회 : http://www.eredienst.com/de-vereniging.html). 여기 캐나다에서도 그러한 과정을 가질 수 있다면 유익할 것이다.
넷째, 우리는 복음 설교가 은혜의 가장 중요한 방편이라고 하는 칼빈의 관점을 마음에 새겨야만 한다. 성령께서는 우선적으로 하나님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믿음을 일으키신다. 강단이 중앙을 차지하는 것이 언제나 개혁교회 건물들의 특징이었다. 내가 이를 특별히 거론하는 것은 우리 주변의 많은 교회들이 “예배의 음악화”를 향해 가는 추세에 있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에서 커다란 부분이 워십 밴드와 리더들에 의해서 이끌려진다. 때로는 찬양 사역이 믿음을 창조하는 성령님의 손에 있는 도구인 것처럼 보인다. 한 호주 신학자는 음악이 거의 “새로운 은혜의 방편”이 되었다고 기술했다(Dr. Barry Chant, "Retuning the Church“). 이 말은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묘사해 준다: 무대 위에 강대상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드럼세트와 워십 밴드의 다른 기구들에 의해 떠밀려진 강의대에 불과하다.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자.
다섯째, 우리는 예배 안에서 적절한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데에 문화적 측면들이 제 역할을 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칼빈은 다른 시대와 다른 문화들이 예배의 다른 전통들을 이끌 것이라는 점을 인식했다. 기독교 강요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합당한 예배와 관련하여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하셨지만 “그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의 세부를 규정하지는 않으셨다”고 쓰고 있다. 칼빈의 견해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대에 적합한 한 가지 유형을 염두하신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게는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들이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교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각 나라와 시대의 풍습에 따라 다양하게 수용되어야만 한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 때에는) 전통적인 행습들을 바꾸거나 폐지하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칼빈은 예배에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네바 시편은 새로운 것이었다. 심지어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칼빈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옳은 것이라고 대단히 확신했음에도 제네바의 방식이 유일한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시대들과 다른 문화적인 환경들이 다른 예전적 형태의 발전을 이끌 것이라고 기대했다.
따라서 다른 문화들 속에 있는 교회들이 다른 실제를 가진다는 것은 정황상 아무런 잘못된 것이 없다. 우리가 북미에서 오르간과 피아노에 익숙한데 반해 남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들이 기타를 선호한다고 해서 염려할 필요는 없다. 또한 우리는 제네바 멜로디에도 문화적인 국면이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한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이 멜로디로 노래하도록 한 번 가르쳐 보라.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멜로디는 그들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예배에 적합한 아프리칸 멜로디를 사용하는 한에서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아마도 칼빈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예배를 특성짓는 근엄함을 전달하는 데 합당한 멜로디를 사용하기만 한다면 여러분이 무슨 멜로디를 사용하든 개의치 않는다.”
여섯째, 노래가 회중적인 활동이라는 원리는 예배에 적합한 악기가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에 우리가 대답하는 데 방향을 찾도록 도울 수 있다. 이 사실은 이러한 정황에서 교회 오르간이 회중 찬송을 반주하기 위한 최고의 악기라는 점을 재확인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개혁주의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이렇게 말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주의 신학자요, 음악학자인 해롤드 베스트(Harold M. Best) 교수는 최근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오르간은 서구 문화가 아는 한 찬송을 위한 가장 자연스러운 악기이다. 오르간의 디자인과 찬송가를 노래하는데 대한 현명한 사용에서 그것은 한 가지 목적을 이루는 도구이다. 즉 틈을 메우는 것, 곧 회중의 목소리를 지탱하는 것과 꽃피우는 것 모두를 제공하기 위하여 현명하게 사용됨으로써 찬송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동반상승 효과를 낸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큰 것이다. 사람들은 압도되지 아니하고 대치되지 아니한 더 마음에서 우러나온 노래에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그들의 자연스런 훈련되지 않은 목소리는 의미있게 실증되고, 증진된다.”("Traditional Hymn-Based Worship" in Exploring the Worship Spectrum, Six Views)
우리가 가진 오르간 전통에 대해 책임있게 행하도록 하자. 오르간을 우상화할 필요는 없지만 또한 오르간이 시대에 뒤떨어졌고 다른 악기로 대치되어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 역시 근시안적이다. 오르간의 지속음(sustained sound)은 회중 찬송을 위한 강력한 기초를 제공한다.
이 말은 오르간이 회중 찬송을 반주하는데 사용될 수 있는 유일한 악기라는 말은 아니다. 피아노나 기타 역시 적절히 잘 사용될 수 있고, 특히 오늘날 우리들은 그러한 악기들의 소리를 증폭시켜 줄 수 있는 기술적인 도구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다른 악기들은 그 악기들만의 제약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플룻과 트럼펫은 노래의 멜로디는 연주할 수 있지만 회중 찬송이 의지할 수 있는 화음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타악기는 리듬을 고조시키고 흥분케 하지만 멜로디와 하모니를 제공할 수는 없다.
결국 오르간이나 피아노 대신 다른 악기들을 사용할 때는 부수적인 문제점들이 발생한다. 같은 효과를 얻기 위해 더 많은 악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연주자들의 앙상블이나 워십 밴드가 필요할 것이다. 무대에 사람들의 그룹이 들어서자마자-거의 필연적으로- 회중 찬송에 두어졌던 강조점이 앙상블이나 밴드의 공연에 대한 강조점으로 옮겨갈 위험이 발생하는 것이다.
일곱째, 우리는 찬송이 기도의 한 형태라고 한 칼빈의 원리를 잘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찬송하는 회중은 자신의 생각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그 우편에 앉아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린다. 이러한 활동을 방해할 수 있는 어떠한 것이라도 피해야먄 하고 막아야만 한다. 심지어 이것이 악기 사용에의 제한을 의미한다고 해도 말이다.
회중에게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라는 성경적 권면이 주어졌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칼빈의 견해를 최고로 존중하게 될 것이다. 전 회중이 찬미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만약 악기가 이 찬미의 사역에 있어 회중을 돕고 증진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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