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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왕국 바른이해

by 【고동엽】 2009. 10. 28.
 
 

 

천년왕국 바른이해

 

교리사적으로 볼 때, 종말론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학적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다. 종말론이 중요한 신학적 문제로 등장된 것은 19세기 이후였다. 종말을 현재적인 것으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미래적인 것으로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 현대 신학이 종말론과 관련하여 제기한 주 문제였다.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비롯하여 말세에 일어날 사건들의 시간적 순서에 관해서도 많은 신학적 토의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 왕국의 관계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를 의미하는 천년 왕국은 존재하는가 또는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한다면, 그리스도의 재림 이 전인가, 이 후인가?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 대답은 요한 계시록 20장 1 - 6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에 대한 중요한 해석 방법으로 문자적 해석과 비유적 또는 상징적 해석이 있다. 이 두 방법에 따라, 대략 세 가지 천년 왕국설이 제시되었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및 무천년설이 그것이다.

 

 

 


전천년설은 문자적 해석에 근거한 반면, 후천년설과 무천년설은 비유적 또는 상징적 해석에 근거한 것이다. 천년 왕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가 무천년설(amillennialism)이며, 존재한다는 견해가 전천년설(premillennialism)과 천년설(postmillennialism)이다. 그러나 전천년설은 천년 왕국 이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후천년설은 천년 왕국 이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천년왕국문제는 성서 예언연구의 중요한 부분이다. 현대에 와서 처음으로 천년왕국 문제가 제기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고대 교회에서도 논란이 된 문제였다. 전천년설적인 천년왕국설이 사도시대와 초기 교부시대를 지배했으나 4세기 말 경 티코니우스(Tyconius)와 어거스틴의 계시록 재해석에 의해 결정적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그 후 교회는 어거스틴의 천년왕국설을 널리 받아들였다. 천년왕국 문제가 다시 제기된 것은 17세기 이 후 전 천년설이 다시 부흥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20세기에 들어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후천년설, 무천년설 혹은 역사적 전천년설 지지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어떻게 올 것이며 그가 이 세상에 세울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방법과 천년왕국설의 문제는 성경 해석상의 문제이지, 성경관과 구원관의 문제는 아니다. 성경 해석의 차이로 여러 천년왕국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와 그 때에 일어날 사건의 순서에 관해서는 서로 의견을 달리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직접 가시적으로 그리고 큰 영광 중에 다시 오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 한다.

 

따라서 이 중에 어느 한 견해를 절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들 모두가 성경과 기독교 전통으로부터 이론의 여지없이 결정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 각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천년왕국설의 문제는 성경 해석이나 신앙 전통에 비추어 문제점이 적은 이론을 택해야 하는 선택의 문제로 이해된다.


I. 전천년설
전천년설은 요한 계시록 20장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근거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한 후에 천년 왕국이 이루어진다는 주장이다. 예수께서 천년 왕국을 이룩하기 위하여 인격적이며 육체적으로 재림할 것임을 믿는 것이다.


사도시대로부터 시작하여 3세기까지 초대 교회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였던 견해이다. 초대 교회는 보편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적 재림과 천년 동안 또는 천년 왕국 동안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인격적 통치에 대한 신앙을 고수했다. 이것은 사도적 교부들과 변증가들의 지배적인 신앙이었으며 단지 2세기초의 영지주의자들만이 예외일 뿐이었다.

 

이 교리는 [바나바의 편지]에 최초로 언급되었으며 헤르마스, 파피아스, 저스틴, 이레네우스, 터툴리안 등이 이를 지지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에 대한 강한 기대를 가졌으며,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의 나라가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격변적 사건에 의해 실현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견해를 천년 왕국설(chiliasm)이라 불렀다. 이것은 헬라어 1000 이라는 말 "킬리아스" (kilias)로부터 유래된 것이었다.

 


3세기 초 천년 왕국설에 대한 반대 이론이 동방교회에서 일어났다. 왜냐하면  천년왕국에 대한 몬타나스주의의 지나친 강조가 오히려 천년왕국에 대한 신뢰성을 손상시켰으며, 성경에 대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영적 해석이 문자적 해석에 근거한 전천년설의 성서적 토대에 큰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천년 왕국설이 서방교회에서 쇠퇴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어거스틴(353 - 430)의 요한 계시록 재해석이었다. 그는 한 때 천년 왕국설의 신봉자였으나, 아프리카의 도나투스주의자인 티코니우스(Tyconius)의 영향으로 그것을 포기했다.

 

그는 교회가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 라고 선언했으며 계시록에 언급된 천년은 일정한 기간이 아닌 세계 역사의 마지막 천년, 또는 세계의 전체 지속 기간을 가리킨다고 했다. 이것이 중세기 종말론을 주도하게 됨에 따라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부 신비주의적 종파를 제외하고 교회는 미래적 천년 왕국설을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

 

 

 

종교 개혁자들 역시 대부분 어거스틴의 견해를 따랐다. 따라서 전 천년설은 개신교의 주요한 신앙 고백서에 반영되지 못했다. 단지 재세례파와 같은 종교개혁의 급진적인 그룹이 전천년설적인 신앙을 주장했을 뿐이다.


천년 왕국설은 17세기 독일에서의 종교전쟁, 프랑스에서의 위그노 교도들에 대한 박해 그리고 영국에서의 청교도 혁명에 힘 입어 다시 명성을 얻게 되었다. 특히 칼빈주의 신학자 요한 알스테드(Johann H. Alsted)는 그의 저서 [사랑받는 도시]를 통해 전천년설을 부흥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18세기 중엽 벵겔의 [계시록 주석](1740)과 [백성에 대한 설교](1748)는 천년왕국설의 발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를 통해 예언과 계시에 대한 연구에 관심이 집중되고 많은 학자들이 전천년설을 수용하게 되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천년설이 보수주의 신학 영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이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후천년설을 주장한 것에 기인된 바도 없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세대주의적 성서 해석과 종말론이 전천년설의 확산을 촉진시켰다. 따라서 전천년설은 보수적인 침례교회와 오순절과 성결파 계통의 교회를 비롯하여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입장의 교회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으며 유명한 부흥사들과 설교가들이 이를 널리 전파했다.

 


전 천년설의 특징은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전천년설은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미래주의적 해석에 근거하고 있다. 이 해석방법에 따라, 요한 계시록 20장 1 - 6절에 기록된 천년이란 기간과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에 대한 증거를 마지막 때에 일어날 사건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성경 해석방법이 전천년설과 다른 천년설을 갈라놓는 분깃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둘째, 전천년설의 핵심은 1000년간에 걸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의 개념이다. 천년왕국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완전한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는 그리스도의 지상통치 기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천년왕국의 기간에 대해서는 전천년설자 가운데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그것을 정확히 문자적으로 1000년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그것을 단순히 긴 기간으로 이해한다.

 


셋째, 전천년설은 천년왕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이며 가시적 재림에 의해 격변적으로 시작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점진적인 성장이나 발전의 과정을 통해 완성되거나 인간의 노력이나 사회적 개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울 수록 도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더욱 악화된다. 따라서 천년왕국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에 의해 극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넷째, 전천년설은 계시록 20장의 두 부활은 동일한 유형의 부활, 즉 육체적 부활로 해석한다. 그것은 천년 기간에 일어날 두 다른 집단의 부활, 즉 성도와 악인의 부활을 의미한다. 성도들은 첫 부활에 참여하여 천년왕국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는 반면, 악인들은 천년왕국이 끝난 후 부활한다. 래드는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모두 육체적 부활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육체적 부활을 의미하는 동사 '에제산'(ezesan)이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모두에 똑 같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전 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사건들의 순서에 대한 견해 차이로 말미암아 여러 형태로 나뉘어진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역사적 전천년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 그리고 세상의 종말 이전에 이 땅 위에 천년왕국이 있으리라는 주장"에는 전적으로 일치하지만, 교회의 대환란 통과와 휴거의 시기문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입장을 달리한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휴거가 대 환난 전에 있으며, 교회는 대 환난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반해, 역사적 전천년설은 휴거는 대 환난 끝에 있으며 교회는 환난을 통과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전자는 천년왕국의 성서적 근거를 주로 구약성서에 두는데 비해, 후자는 그것을 오직 신약성서에만 둔다.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에 따르면, 마지막 때에 세계적인 7년 대 환난이 있게 되고 그 직전에 그리스도께서 공중 재림하신다. 이 때 죽은 성도가 부활하여 살아있는 성도와 함께 공중으로 휴거되여 강림하시는 그리스도를 공중에서 영접하며 대 환난을 피하게 된다(살전 4:16).

 

 칠년 동안 진행되는 어린양의 잔치에 휴거된 자들이 참여하여 기쁨을 나누는 동안 지상에서는 7년 대 환난과 적 그리스도의 통치가 전개된다(단 9:24 -27). 대 환난의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재림하여 아마겟돈 전쟁을 통해 악의 세력을 정복하고 사단을 결박하여 무저갱에 가둔다.

 

그리고 천년 왕국을 건설하여 성도들과 함께 왕 노릇 하신다. 천년 왕국이 끝나면 사단이 일시 풀려나고 곡과 마곡의 반란이 일어난다. 그러나 사단의 세력은 불로 섬멸되고 사단은 불 못에 던져진다.

 

그 후 악인들이 부활하여 최후 심판(백보좌 심판)을 받아 지옥으로 가고, 성도들은 영원한 천국(신천신지)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요한 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 내용을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다. 이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미국의 침례파, 성결파, 오순절파 교회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로는 다비(John N. Darby), 어빙(Edward Irving), 블렉스톤(William E. Blackstone), 스코필드(Cyrus I. Scofield), 왈부드(J. F. Walvoord) 등을 들 수 있다.

 


역사적 전 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두 단계, 즉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으로 나누지 않고 지상 재림 한번이라고 주장하며 성도의 공중 휴거 교리 또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7년 대 환난, 아마겟돈 전쟁, 천년 왕국의 기대는 세대주의적 종말론과 동일하다. 역사적 전천년설에 따른 역사의 마지막 때에 일어날 사건들은 대 환난 - 그리스도의 재림 - 성도들의 부활 - 적 그리스도의 멸망 - 천년왕국 - 곡과 마곡의 반란 - 악인의 부활 - 백보좌 심판- 신천 신지의 순서로 진행된다. 래드(G. Ladd)가 이 학설의 대표적인 지지자이다.


마지막으로, 전천년설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천년왕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세대주의자들은 천년왕국의 목적이 천년간에 걸친 그리스도의 지상통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성취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에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제안했으나 그들의 거부로 연기되었던 유대왕국의 회복으로 천년왕국을 이해한다. 한편, 역사적 전천년설 역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하고 있으나 세대주의자들처럼 천년왕국을 유대적 왕국으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교회를 영적 이스라엘로 간주하고 이스라엘과 관련된 구약의 예언과 약속 가운데 많은 것이 교회 안에서 성취되고 있다고 믿는다.

II. 후 천년설
후 천년설은 성공적인 복음전파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평화가 널리 확산되며 악이 추방됨으로써 세계가 점진적으로 천년왕국으로 전환되며,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 천년왕국 시대의 말기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종말론이다.


후 천년설은 사도들의 견해는 아니었다. 후 천년설의 선구자는 4세기의 티코니우스였다. 그는 천년왕국을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로 이해하는 계시록 20장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거부하고 천년왕국을 현 시대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그는 세계의 종말이 380년에 오리라 기대하고, 천년왕국은 그것 보다 앞서 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적이다. 그는 교회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또한 티코니우스는 계시록 20장의 첫 부활을 영적인 부활, 곧 중생으로 해석했으며, 천년왕국의 기간도 문자적인 천년이 아니라 시간의 확장된 기간으로 생각했다. 교회의 천년기적 통치가 그 시대의 끝까지 또는 380년까지 지속되리라 본 것이다.

 


어거스틴은 티코니우스의 견해를 받아들여 이를 널리 확산시켰다. 어거스틴은 천년왕국이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으며 우리는 천년 왕국 안에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천년왕국은 현 시대 전체를 포함한다. 또한 그는 마가복음 3장 27절에 근거하여, 사단은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결박되어 재림 때까지 묶여 있을 것이므로 사람들을 속일 수 없다는 것, 따라서 복음은 성공적으로 전파된다는 것,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통치하신다는 것 등을 가르쳤다.

 


최초의 후천년설주의자로 간주되는 이는 12세기의 가톨릭 승려인 플로리스의 요아킴(Joachim of Floris)이며, 이를 현대적인 형태로 체계화한 사람은 18세기 영국의 국교회 목사 다니엘 휘트비(Daniel Whitby, 1638 - 1726)이다.

 

그는 세계가 예수를 믿게 될 것이며, 천년왕국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교회의 시작과 발전에 관계된 것이며, 천년 왕국이 끝난 후 세계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와 심판을 위해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것으로 보았다. 일반적으로 현대 후천년설의 창시자로서 간주되고 있는 휘트비의 영향으로 후천년설은 크게 부흥되었다.

 


후천년설은 교회의 외적 상황이 유리할 때 인기가 있었다. 고대에 기독교가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공인되고 로마 제국의 국가 종교가 되는 등 전례 없이 정치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때, 후 천년설적인 견해가 각광을 받았다. 현대에는 18, 19세기에 영국과 미국에서 유행했다. 특히 19세기 후반에 성공적인 세계 선교와 역사의 진보에 대한 기대에 힘입어 인기가 있었다.

 


후천년설은 복음적인 주석가와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감리교 계통의 알미니안 신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후 천년주의자였다. 왓슨(Richard Watson), 포프(Pope), 레이몬드(Raymond), 웨이크필드(Wakefield), 마일리(Miley)등이 그들이다.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 신학자로는 찰스 하지(Charles Hodge)와 그의 아들 하지(A. A. Hodge), 워필드(B. A. Warfield), 스트롱(A. H. Strong), 쉐드(Shedd), 보이스(Boyce) 등이 이를 지지했다.

 

천년 왕국설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후천년설주의자였다.
후천년설은 20세기 들어와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쇠퇴 원인은 성경 주석상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역사적 상황에 있었다. 세계 대전과 경제 공황 등 비참한 현실을 겪으면서 후 천년설의 사상적 토대가 되는 낙관주의적 사고가 무너지게 된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후천년설의 특징은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후천년설의 근본적인 전제는 복음의 성공적인 전파다. 후천년설은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는 구약성서의 말씀(시47:2, 72:17-19, 100:1-3, 사 45:22-25, 호2:23)과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복음이 보편적으로 전파되어 복음화될 것이라는 신약성서의 말씀(마24:14, 계7:9 -10)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에 선행하여 모든 민족의 개종과 세계의 기독교화를 기대한다.

 


둘째, 후천년설은 낙관주의적 세계관과 역사관에 사상적 토대를 두고 있다. 후천년설은 세계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 세계가 개선되었고 도덕적인 면과 영적인 면에서 큰 진전이 있었다.

 

뵈트너는 노예제도와 일부다처제의 폐지, 여자와 어린의 지위 향상, 무지와 빈곤의 타파, 의료시설의 개선, 성경번역과 반포의 확산 등을 그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후천년설은 현재의 세계와 역사가 천년왕국과 연결된다고 보았다.

 

 

셋째, 후천년설은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 지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영역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있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의미한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자신을 그에게 맡기고 복종하면,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 천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점진적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후천년설은 이에 대한 성서적인 근거로 천국은 누룩과 같다는 예수의 비유(마13:33)를 제시한다. 왜냐하면 누룩은 하나님 나라의 점진적인 도래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되기 때문이다.


넷째, 후천년설은 천년왕국이라고 불리는 긴 지상 평화 기간이 있으리라 믿는다. "천년왕국은 현 세대, 즉 교회시대 동안 누릴 영적으로 번영된 황금시대다." 그것은 복음전파의 확산에 의해 지각될 수 없을 정도로 점진적으로 실현된다. 천년왕국은 말기에 적 그리스도의 출현과 배교의 시기가 있은 후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과 더불어 종료된다.

 


다섯째, 후천년설은 성경을 상징적 또는 영적으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성경 대부분이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된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년왕국의 성서적 근거를 계시록 20장이 아니라 평화에 대한 구약성서의 예언과 예수의 약속에서 찾는다.

 

예를 들어, 이사야 11장 6 -9절이나 요한복음 14장 27절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의 기간도 문자적 천년이 아닌 무한히 긴 기간으로 이해한다. 천년왕국은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나는 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 길이를 계산하기가 어렵다.

 


마지막으로, 후천년설은 천년왕국 시대가 현재의 시대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양자의 차이는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양적인 차이다. 결혼, 출산과 같은 일상적인 가정생활이 지속되며, 경제, 사회, 교육문제도 남아있으나, 모든 형태의 악과 불쾌한 것들이 무시해도 좋을 만큼 축소되거나 제거된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이 "완전한 또는 죄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III. 무천년설
무천년설은 "성경이 세상의 종말 전에 이 지상에 천년왕국 또는 세계적인 평화와 공의의 기간이 있으리라 예고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종말론이다. 더 정확하게 정의한다면, 무 천년설은 천년 왕국이 없다는 주장이라기 보다는 문자적이고 가시적인 천년 왕국, 즉 1000년 동안의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가 없다고 보는 주장이다.

 

그것은 실현된 천년 왕국설(realized millennium)로 불리우기도 한다. 왜냐하면 천년왕국을 미래적인 것이 아닌 지금 실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거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까지의 교회 시대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무천년설과 후천년설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양 진영에서 어거스틴, 칼빈, 워필드 등을 자신들의 선구자로 취급하는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이러한 혼선은 이 두 이론이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후 천년설과 무 천년설 모두 계시록 20장의 "천년"이란 숫자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천년 왕국을 교회 시대라고 주장한다.

 

또한 대개의 무천년설주의자들은 그들의 입장을 전천년설과 예리하게 구별하는 반면, 후천년설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무천년설과 후천년설의 차이를 모호하게 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무천년설이 언제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는지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바나바의 편지에서 그 기원을 찾는 이도 있고 오리겐이나 어거스틴에게서 찾는 이도 있다. 특히 어거스틴은 후천년설과 무천년설 어느 쪽으로 분류되든지 간에, 무 천년설의 형성에 크게 공헌했다.

 

왜냐하면 그의 계시록 해석이 무천년설의 근본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천년이란 숫자를 상징적인 것으로, 천년왕국을 교회시대로, 사단의 결박을 그리스도의 초림 때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했다.

 


무천년설은 19세기 까지 후천년설과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은 채로 존재했다. 20세기에 들어 후천년설이 인기를 상실하고 쇠퇴하게 됨으로써 양자가 보다 분명히 구별되기 시작했다. 양자 모두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교회시대를 천년왕국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를 인정하는데 비해, 무천년설은 그것을 부정하고 영적인 통치만을 인정한다. 따라서 대다수의 후천년설자들이 그들의 입장을 조정하여 무천년설을 수용하게 되었다.

 


개혁교회와 루터교회, 정통 장로교회 계통의 보수주의자들이 주로 무천년설을 지지하며, 미국의 칼빈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무천년설을 가르친다.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벌콥(L. Berkhof), 카이퍼(Abraham Kuyper), 바빙크(Herman Bavinck) 렌스키(Lenski), 영(E. J. Young), 보스(Geerhardus Vos)등이 있다.

 


무천년설은 흔히 부정적인 형식으로 제시된다. 특히 전천년설에 대한 비판의 형식을 취한다. 그것은 천년왕국에 대한 충분한 성서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며 현시대를 뒤이어 즉시 완전하고 영원한 형태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무천년설의 특징은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무천년설은 계시록에 대한 상징적인 해석에 근거하고 있다. 계시록의 대접, 인, 나팔 등을 상징으로 해석해야 하듯이, 1000년이란 숫자도 문자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적이며 비유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것은 완전 또는 완성, 완전한 기간을 의미한다. 천년 기간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에 이르는 교회의 전체 역사를 나타낸다. 따라서 무천년설은 계시록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 후로 한 역사의 마지막 기간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초림 이 후 전 교회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믿는다. 즉 그것을 미래적 의미가 아닌 과거나 현재적 의미로 해석한다.

 


둘째, 무 천년설은 계시록 20장 4-5절에 언급된 두 부활을 첫째 부활(20:4)은 영적 부활로, 둘째 부활(20:5)은 육체적 부활로 해석하여 양자를 동일한 종류가 아닌 다른 종류의 부활로 이해한다.

 

첫째 부활은 죽은 영혼이 영적 생명에로 일어나는 것이며, 성도들의 승리를 상징한다. 즉 죽은 성도들이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둘째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살아나는 것, 즉 육체적 부활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천년설은 성도들의 부활은 천년왕국 전에 있고, 악인의 부활은 천년왕국 후에 있다는 해석을 거부한다.

 

 

셋째, 무천년설은 계시록 20장 2절의 사단의 결박을 그리스도의 초림 때,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사단에게 승리했을 때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한다. 십자가 승리로 사단은 결박 당하여 세상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이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마태복음 12장 29절이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따라서 무천년설은 천년 왕국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시작되어 재림 때까지 계속된다고 주장한다. 천년왕국은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실현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문자적이고 가시적인 지상 왕국이 아니라 영적인 왕국이다. 그것은 죽은 성도들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스리는 통치를 말한다.

 


넷째, 무천년설은 성도의 휴거를 그리스도의 재림시 교회가 지상에서 하늘로 옮겨지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재림 시 일어날 미래적 사건이 아니라 단순히 기독교인의 죽음으로 해석하거나 재림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하여 공중으로 올라갔다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해석한다.

 

또한 문자적 7년 대 환난을 부정하고 그것을 늘 환난을 당하며 사는 성도들의 지상 생활 자체로 이해한다. 따라서 이러한 종말론적 구조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단 한번의 최후 심판이 있게 되고, 그 결과 의인과 악인이 영원한 최종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불신자는 지옥으로, 성도는 신천 신지로 들어간다.


다섯째, 무천년설은 성서의 예언을 미래적인 것 보다 역사적인 것이나 상징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따라서 무천년설은 구약 성서 예언의 문자적 성취를 기대하지 않거나 무관심한 경향이 있다.

IV. 공통점과 차이점
천년 왕국에 대한 세 가지 학설들의 주요한 주장과 근거를 살펴보았다. 이들을 비교하면, 각각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후천년설과 무천년설은 서로 공통점이 많은데 반해, 전천년설과는 차이점이 많다.


후천년설과 무천년설은 계시록과 구약예언에 대한 상징적 해석이나 영적 해석에 근거하여 천년왕국을 천년 동안의 그리스도의 가시적 지상통치로 믿지 않는데 반해, 전천년설은 문자적 해석에 근거하여 그것을 그리스도의 가시적인 지상통치로 믿는다.

 

후천년설과 무천년설은 천년왕국 이후에 그리스도가 재림하며 그것과 더불어 현 시대가 종료되고 신자와 불신자 모두 마지막 상태에 이르게 되는 영원한 시대가 시작되는 것으로 본다. 반면, 전천년설은 천년왕국 이전에 그리스도가 재림하며 그 후 그의 과도기적 지상통치 기간인 천년왕국을 거처 현 시대가 종료되는 것으로 본다.

 


후천년설과 무천년설은 어떤 문제에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한다. 후천년설은 천년왕국이 지상에 존재한다고 믿는데 반해, 무천년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죽은 신자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무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교회시대 전체를 천년왕국으로 간주하는데 비해, 후천년설은 교회시대 말기인 의와 평화의 황금시대를 천년왕국으로 간주한다.


뿐만 아니라 후천년설과 무천년설은 어떤 문제에서는 각 각 전천년설과 입장을 같이한다. 후천년설과 전천년설은 천년왕국을 지상왕국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전천년설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격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해석하는 반면, 후천년설은 재림에 앞서 현 시대에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해석한다.

 

전천년설은 천년왕국을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지상통치로 주장하는데 비해, 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가시적인 임재 없이 이루어지는 지상통치로 주장한다. 그러나 전천년설과 후천년설은 예수가 직접적으로, 가시적으로 재림하리라는 점에 관해서는 의견이 동일하다.

 


한편 후천년설은 복음의 성공적인 전파로 세계가 점점 좋아져서 천년 왕국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세계관과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은 현 시대가 도덕적, 영적으로 점점 타락하여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는 배교가 성행하고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등 극도로 악화된다는 비관적 세계관과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후천년설은 세계가 복음화되고 평화의 황금기를 누릴 때까지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반면,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을 믿는다.


앞서 지적한바와 같이,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사이에는 각각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차이점은 근본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성경해석상의 차이다. 천년왕국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유일한 성경구절인 요한 계시록 20:1-6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세 가지 다른 견해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스도가 어떻게 올 것이며 그가 세울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해석 차이로 많은 논쟁이 일어났으며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천년왕국설 논쟁에서 제기되는 주요한 쟁점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성서의 예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클라우스가 편집한 천년왕국설에 대한 논쟁집인 [천년왕국]에서도 요한 계시록의 해석법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문제로 취급되고 있다.

 

계시록을 역사적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아니면 미래적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아니면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역사적 해석은 계시록의 내용을 저술 당시에는 미래적이었으나 교회 역사를 통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미래적 해석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재림 전후에 일어날 미래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후천년설자와 무천년설자들은 일반적으로 역사적 방법을 사용하는 반면, 전천년설은 미래적 해석법을 사용하고 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철저한 미래 해석법을 취하는데 비해, 역사적 전천년설은 미래적 해석과 역사적 해석을 결합하는 온건한 미래 해석법을 취한다.


후천년설과 무천년설은 성경의 대부분이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로 기록되었다고 보고 그것을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전천년설이 상징적인 언어로 쓰여진 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고 비판한다.

 

전천년설은 상대적으로 문자적 해석법을 사용한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구약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기초하여 종말론을 구성하고 그것에 신약성경을 맞춘다. 역사적 전천년설은 구약성경의 예언들은 신약성경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하며 천년왕국의 교리는 구약성경이 아니라 오직 신약성경에 근거해야 한다고 믿는다.

 


둘째, 요한 계시록과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마지막 날에 있을 사건들을 단일 사건으로 보느냐, 아니면 복수사건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지상 천년왕국의 신학적 필요성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전자가 무천년설의 입장이라면, 후자는 전천년설의 입장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에 있을 사건들을 동시에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으로 본다면 천년왕국이 부인될 것이고,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로 본다면 천년왕국이 인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자를 취하는 대표적인 학자가 벌콥(L. Berkhof)인 반면, 후자를 취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조지 래드(George Ladd)다.

 

벌콥은 마지막에 일어날 사건을 재림 전에 일어날 예비적인 사건들과 재림 자체의 사건으로 나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크게 전파되며 이스라엘인들이 회개하고, 큰 배신과 대 환난이 일어나고, 적 그리스도가 출현하며, 많은 전쟁과 기근과 지진, 거짓 선지자가 곳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재림 전의 사건들이다.

 

한편 재림의 때는 알 수 없으나, 그리스도의 재림은 인격적, 육체적, 가시적일 뿐만 아니라 영광과 승리 가운데 갑자기 이루어진다. 따라서 예수의 재림과 함께 최후 심판이 있게 되어 구원받은 사람과 멸망 받을 사람이 구별되고 영원한 세계가 시작되기 때문에, 재림과 영원한 세계 사이에 중간기적 천년왕국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래드는 계시록 20장에 기록된 여러 사건들을 연속적으로 일어날 사건으로 해석한다. 성도들이 부활하여 재림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 노릇 한다. 그 후 다른 모든 사람이 부활하여 최후 심판을 받게 되고 영원한 나라가 시작된다. 래드는 이러한 해석의 근거로 고린도 전서 15장 22 -24절을 들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여기에서 바울은 동시적인 사건을 지시하는 부사 "토테"(tote)를 사용하지 않고 시간적 연속을 의미하는 부사 "에페이타"(epeita)(23)와 "에이타" (eita)(24)를 사용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부활이 별개의 분리된 사건인 것처럼, 재림과 악인의 부활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마지막에 일어날 사건들을 연속적으로 일어날 복수의 사건으로 간주한다면, 천년왕국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셋째, 계시록 20장의 두 부활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을 동일한 종류의 부활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다른 종류의 부활로 볼 것인가? 이것이 가장 논란이 되는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후천년설과 무천년설은 다른 종류의 부활로 보는데 반해, 전천년설은 같은 종류의 부활로 본다. 전천년설은 첫째 부활을 육체적 부활로 해석하여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20:4)를 그리스도가 재림 후 지상에 천년왕국을 건설하신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후천년설과 무천년설은 4절의 부활을 영적인 부활, 즉 신자의 중생, 순교자들의 완전한 승리 또는 죽은 신자들이 하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누리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5절의 부활은 육체적인 부활로 설명한다.


전천년설은 동일한 문맥에서 동일한 용어 "에제산" (ezesan)으로 표현된 것을 전혀 다른 두 종류의 부활로 해석하는 것은 정당한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일관성의 원리에 어긋난다 주장한다.

 

5절의 부활을 육체적인 부활로 해석한다면, 4절의 부활 또한 육체적인 부활로 해석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천년간의 간격을 두고 신자의 부활과 불신자의 부활이 있다고 믿는다. 반면, 무천년설은 성경은 단 한번의 육체적 부활만을 가르친다고 믿고 전천년설이 여러 번의 부활을 주장한다고 비판한다.

 


이 외에도, 계시록 20장의 사단의 결박 시기도 논란이 되는 문제 중 하나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초림 때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재림 때 이루어질 것인가? 후천년설과 무천년설은 초림 때로 해석하는데 반해, 전천년설은 재림 때로 해석한다.

결 론: 왜 전 천년설인가 ?

후천년설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지지를 상실하고 쇠퇴하고 있다. 이것은 후천년설의 토대가 되는 낙관주의적 사고의 부당성과 성서적 근거의 취약성에 기인된바 크다. 복음의 성공적인 전파로 세계가 점점 좋아져서 천년 왕국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후천년설의 주장은 말세의 현상에 대한 예수의 교훈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할 수록 불법과 악이 더 성행하고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마24: 9 -14). 특히 가시적이며 육체적인 임재 없는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와 천년 왕국설은 전혀 성서적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따라서 후천년설은 선택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렇다면 무천년설과 전천년설이 남게 된다.

 


무천년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계시록 20장 4절의 부활을 영적인 부활로, 5절의 부활을 육체적인 부활로 해석하는 것이다. 동일한 문맥에서 동일한 용어 "에제산"으로 표현된 것을 전혀 다른 두 종류의 부활로 해석하는 것은 일관성의 원리에 어긋난다.

 


무천년설은 천년 동안의 사단의 결박(계 20:2 - 3절)을 그리스도의 초림 때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초림 이후 사단의 활동이 중단된 것으로 봐야 야 하는데, 이것은 현실적으로나 성경적으로나 타당하지 않다. 사단이 지금도 이곳 저곳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단의 결박은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해석해야 마땅하다.

 


무천년설은 휴거를 현재 일어나는 사건으로 이해하여 성도들이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3 - 18절은 성도의 휴거가 현재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적인 것이며 죽은 성도는 물론 살아 있는 성도도 포함되는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무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악인의 부활 사이에 천년이란 간격이 있다는 전 천년설이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며 전천년설은 단 하나의 성경 구절(계20:1-6)에 의존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전천년설은 단지 한 성경 구절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암시하는 다수의 성경 구절이 있다. 고린도 전서 15장 22 -24절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동시적인 사건을 지시하는 부사 "토테" 를 사용하지 않고 시간적 연속을 의미하는 부사 "에페이타"(23)와 "에이타"(24)를 사용했다.

 

따라서 양자 사이에 간격이 없다고 하는 무천년설의 주장은 문제가 있다.
무천년설은 전천년설이 계시록 20장을 상징적으로나 우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문자적으로 해석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전천년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뿐 아니라 문자적으로 믿는 것이다. 계시록 20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전천년설이 된다. 또한 이것은 사도들의 신앙이었을 뿐만 아니라 초기 교부들의 입장이었다. 따라서 문자적인 해석은 사도적인 신앙에 의해서도 그 정당성이 입증된다.

 


무천년설은 여러 번의 부활이 성서적 근거가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계시록 20장은 두 부활에 대해 분명히 언급하고 있으며 선택된 집단의 부활(눅 14:14, 20:35, 고전 15:23, 빌 3:11, 살전 4:16) 또는 두 단계의 부활(단12:2, 요5:29)을 암시하는 성경 구절들이 많이 있다. 특히 빌립보 3장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에 이르려는 그의 소망을 간절히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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