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 전통이 가짜라면
모파상이 쓴 '목걸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친구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빌려서 연회에 참석했다가 잃어버리고는 큰 빚을 내어 비슷한 목걸이를 사서 대신 돌려준다. 그 빚을 갚느라 십 년 동안 생고생을 한 후 우연히 그 친구를 거리에서 만난다. 그간 목걸이 때문에 고생한 얘기를 털어놓자 친구가 놀라서 대답한다. 그 목걸이는 가짜였어.
우리의 교회는 어떤가. 우리가 애지중지 떠받드는 교회의 전통이 만일 가짜라면. 초대교회의 모습과 너무도 다른 지금의 교회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오늘날 개신교의 예배 순서는 카톨릭 미사에서 유래하였다. 그렇다면 미사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미안스럽게도 미사는 신약 성경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고 <교회가 없다>의 저자 프랭크 바이올라는 밝히고 있다. 그것은 고대 유대교와 이교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새로 마련한 예배 의식은 카톨릭 미사의 절차를 좀 생략한 축소판이었다. 예배의 중심을 유카리스트(성찬)에서 말씀으로 이동시킨 것을 제외하고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더구나 여전히 그는 예배 의식 전체가 안수 받은 성직자에 의해 진행되도록 하였고, 회중은 그냥 수동적인 구경꾼으로 남아있게 하였다. 이는 초대 교회의 모임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초대 교회의 예배 모임은 한 사람이 주도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쌍방향 설교에서 일방적인 설교로
개신교 예배의 핵심은 설교다. 우리에게 익숙한 설교 방식은 담임 목사 한 사람이 도맡아서 외치고 교인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열심히 경청하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설교도 그러했을까.
구약(선지자)과 신약(사도)에 나오는 설교는 일방적 외침이 아니었다. 청중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형태였다. 설교 중에 청중이 의견을 개진하여, 설교가 청중에 의해 중단되기도 했다. 1세기의 설교와 가르침을 표현했던 그리스 단어는 dialegomai였다(행17:2,17;18:4). 이 단어는 대화의 쌍방 통행(영어의 dialogue)을 뜻한다. 사도들의 사역은 일방적인 주입이 아니라 대화 형식이었다. 오늘날의 설교 형식은 그리스 문화에 근거한 것이다.
유대교의 중심은 성전, 제사장, 희생제사였다. 그리스 로마식 이교주의에서도 신전, 제사장, 희생제사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런 요소들을 모두 폐기 처분해 버리셨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역사상 최초로 출현한 성전 없는 종교라 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 생각에는 건물이 신성한 것이 아니었다.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교회나 성전이나 하나님의 집이라는 단어가 건물을 지칭한 적이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항상 사람의 모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들로서는 건물을 보고 '교회, 하나님의 집'이라 부르는 것이 아주 낯설고 이상한 일이었다.
목사는 오늘날 개신교의 핵심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오늘날 목사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단 한 개의 구절도 없다. 물론 '목사들'이란 말은 신약 성경에 등장한다(엡4:11). 이 단어는 복수다. 그들이 여러 명이라는 얘기다. 즉 오늘날 담임 목사 제도는 성경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목사로 번역된 그리스 원어는 poimen이다. 목자들이라는 뜻이다. 이는 '목사'라는 명칭이 그 당시 교회 내의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의 특정한 역할을 의미하는 은유적인 표현이었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교회당에 갈 때 치장하는 관습은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예전에는 부유한 귀족들만이 사교 모임에 치장하고 갈 뿐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중산층이 자신들의 지위 상승을 과시하기 위해, 부유층처럼 치장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래서 웨슬리는 교회당에 비싼 옷을 입고 오는 것을 비난하는 글을 썼다.
1세기 크리스천들은 예배 모임에 치장하고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정집에서 단순하게 모였고,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밝히기 위해 특별히 옷을 차려 입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은 주일 아침 교회 예배에 격식 없는 옷을 입고 가는 게 '불경한 행동'이라는 거짓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함께 부르던 노래가 성가대의 전유뮬로
성가대의 기원은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콘스탄틴의 통치 아래서 유카리스트를 돕기 위한 들러리로 성가대가 생겨났다. 이것은 황제의 의식을 행진 음악으로 시작하는 로마의 관습으로부터 따온 것이다.
교회 안에 성가대가 등장하면서 찬양을 부르는 일이 하나님의 사람들(교인들)의 손에서 훈련된 성가대로 옮겨져 갔다. 그러다가 A.D.367년에는 회중 찬송이 전면 금지되었다. 훈련된 성가대가 찬양을 독점하게 된 것이다. 이것도 그리스적 방식이다. 하나님의 사람들(교인)은 말씀뿐만 아니라 찬송을 부르는데 있어서도 구경꾼이 되어 버렸다.
십일조는 고대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매년 바치는 십일조로 그들의 국가관리들(제사장), 그들의 공휴일(절기),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나그네, 과부, 고아)을 책임질 의무가 있었다. 대부분 현대의 세금 제도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신약 성경에 1세기 크리스천들이 십일조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물질의 청지기로서 1세기 성도들이 형편에 따라 자발적으로(의무가 아니라) 물질을 드린 것은 볼 수 있다.
성직자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관습은 씨프리안(200-258)이 처음 언급했다. 레위인들이 십일조에 의해 지원 받았던 것처럼 기독교 성직자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교회에 아주 보기드문 주장이었다. 4세기에 가서 몇몇 지도자들이 성직자를 위한 기독교인의 관습으로 십일조를 주장하였으나 8세기까지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널리 퍼지지 않았었다.
초대 교회에서 회심한 사람들은 믿는 즉시로 세례를 받았다. 1세기에는 세례가 한 개인의 믿음을 밖으로 드러내는 고백이었다. 말씀을 믿고 그리스도께로 인도되는 자는 누구나 그 믿음의 표현으로서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2세기 초가 되면서 몇몇 영향력 있는 기독교인들이 세례를 받기 전에 학습의 기간과 기도와 금식이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3세기에 이르면서 세례 받기에 앞서, 삶의 행동으로 세례 받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하게 되었고, 세례에는 여러 가지 이교적인 절차들이 삽입되었다. 세례가 믿음이 아닌 행위로 구원 받는 표시로 바뀌게 된 것이다.
사랑의 향연이 종교 의식으로
주의 성찬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잔칫상이었다. 공동체적인 식사로서 축제와 같았고 기쁨이 넘쳤다. 그것을 주관하는 성직자도 없었고 본질적으로 기독교인의 연회였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주의 성찬을 '사랑의 향연'이라 불렀다. 그들은 잔칫상과 함께 떡과 잔에 참예했다.
그러나 2세기쯤 되면서 떡과 잔이 식사에서 분리되기 시작하더니 2세기말쯤에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점점 더 강해지는 이교의식의 영향으로 개인 집에서 즐겼던 식사로서의 주의 성찬이 없어져 갔다. 4세기에 이르러서는 아예 금지되었다.
대신 간소화된 의식으로서 유카리스트만이 행해졌다. 주의 성찬은 더 이상 공동체의 행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멀리서 바라보아야 하는 사제의 의식이었다. 유카리스트에 가미된 신비적인 분위기는 이교의 신비주의 영향 때문이다. 이런 영향하에 기독교인들은 떡과 잔에 신비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고, 떡과 잔이 주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설도 등장했다.(유성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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