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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교회는 구제와 더불어

by 【고동엽】 2009. 9. 11.
 

교회는 구제와 더불어

 

어떤 여인이 예수를 찾아와서 매우 값진 나드 향유를 가져와 아낌 없이 예수께 부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제자들이 분이 나서 한마디씩 거들고 나섰다. 그걸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왔어야 했다며 그녀의 경솔함을 책망했던 것이다. 사실 그 향유의 값은 300데나리온에 해당했다. 그 돈은 노동자 한 사람의 1년치 임금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인을 변호하셨다.

-가난한 자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하리라

교회가 재정의 태반을 목사의 생활비와 교회 치장에 쏟아 붓는데 치중한 채 사회 구제는 소홀히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올 때면, 이에 맞서 대응하는 논리 중 하나가 '교회는 구제 기관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예수께서도 보여주셨다며 예수께 비싼 향유를 바친 여인의 일을 말한다.

결국 목사 섬김과 교회 치장을 위해 쓰여지는 돈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업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기여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교인들에게 은연중 심어주는 것이다. 물론 대놓고 구제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으나, 교회 치장과 목사 섬김을 방패막이로 구제에 소홀한 것에 대한 책임을 슬며시 회피하는 고도의 수법을 연출한다.

어떤 집단이든 집단의 건전한 생존을 위해서는 목적 설정이 중요하다.  교회의 목적 설정이 잘못되었을 때 교회는 몰락하게 된다. 오직 교인의 수적 성장이 목표인 교회는 결국 부패의 수렁에 함몰되고 만다. 교인 수의 축재가 헌금의 축재로 이어지고, 헌금의 축재는 부패의 축재로 나아간다. 교회 내에 넘쳐나는 자금이 교회를 부패시키는 원인 바이러스가 되는 것이다.

예배당 꽃꽂이에 수 백 만원을 쓰고, 억대의 조명 설비를 갖추고, 목사에게 고급 승용차를 사주고, 목사 자녀 사업 자금 대주면서도 뭐가 잘못되고 있는 지를 감지하지 못한다. 모든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종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스스로 변명한다.

과연 교회의 목적은 무엇일까. 교회의 목적은 선교 즉, 복음의 선포이지 구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제는 단지 선교를 위한 수단으로서 의미를 가질 뿐이며, 교회가 꼭 구제를 해야 한다거나 교회 재정을 구제에 퍼붓지 않음은 잘못이라거나 하는 주장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씀을 선포하고 전하는데 있어 핵심적 인물은 목사이다. 따라서 그를 위해 혹은 그의 주장에 따라 쓰여지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사업이요 하나님의 뜻이라는 기이한 풍조가 교회 내에 형성되기도 한다. 또한 말씀이 선포되는 장소는 예배당이다. 그러니 그 장소를 아름답게 꾸미고 돈을 들여 치장하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는 논리도 어렵지 않게 성립된다.

누구나 어느 정도의 교회 치장과 목사 섬김은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어느 정도라는 것이 한도가 없다는 점이다. 요리를 할 때 소금을 얼마나 넣어야 음식이 맛이 있을까. 답은 '적당히 넣어라' 이다. 하지만 그 '적당히' 라는 것이 문제다. 도대체 얼마만큼이 '적당히' 란 말인가. 이를 철학에서는 '애매어의 오류'라 한다.  

가난은 나랏님도 못 구한다는 말이 있다. 사실 가난을 해결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에 대한 회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사람이 남의 도움으로 살게 되면 나태해지는 성향도 있다. 그래서 자꾸 베풀면 상대를 게을러지게 만든다는 말도 성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구제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동체에 주어진 명령이며 존재 방식이기 때문이다.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구제는 나눔(사랑)의 행위이다. 가난을 없애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교회의 존립 목적 그 자체이기도 하다. 가난이 이 땅에서 사라지든 말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랏님도 어쩌지 못한다던 가난을 퇴치하는데 교회가 어느 정도 기여했느냐도 우리에겐 아무런 관심의 대상이 못 된다. 사회학적인 연구를 위한 통계 자료로서는 의미가 있을 지 모르지만 말이다. 오직 교회가 구제를 했느냐 안 했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자녀들과 나누어 먹었느냐가 관심의 촛점이다.

따라서 교회에서의 연보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다양한 경제적 수준에 있는 교인들이 내 놓는 연보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산이 없는 모든 자들과 경제적으로 약자인 사람들에게 나누어(사용)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길 잃은 하나님의 자녀인 이방인과 주변 사람들과 사회와 세계에도 나누어져야 한다.

교회가 그러한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잘 감당하지 못하고, 예배당 치장과 목사 생활 향상에 넋이 빠져 연보 사용을 그 쪽에만 치중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 개인은 직접 스스로 하나님의 부를 나누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며 존재 이유인 것이다.

예수께 값비싼 나드 향유를 부은 여인을 향해 제자들이, 그걸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며 책망했다는 사실은 바로, 그 당시 예수를 따르던 공동체 내에서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가 일상화되어 있었고, 당연시되고 있었음을 역설적으로 웅변해 주는 것이다. 이는 초대 교회에도 이어져 교인들은 심지어 자신의 재산 전부를 교회에 바치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쓰는 삶의 형태로도 나타났다.

영의 양식인 말씀의 나눔이, 육의 양식인 재물의 나눔과 괴리될 수는 없다. 교회가 영의 양식이라며, 영혼을 구원하는 진리라며, 말씀은 열심히 전하고 나누어 주면서도, 자신들의 물질적 부만은 움켜쥔 채 제 몸 치장만 생각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진노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급살하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하겠는가. 이 둘이 분리되어 따로 논다면, 그야말로 교회는 '그들만의 천국' 으로 전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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