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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척 당하신 예수

by 【고동엽】 2009. 8. 28.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눅4: 24-27)

예수께서 고향 동네에서 가르치심에 많은 고향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요셉의 아들이며 목수인 그가 어찌 저런 말들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 놀라움의 이유였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의 아비와 어미가 누구인지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어려서 예수가 자라는 모습도 지켜보았고 예수의 형제와 자매들도 모두 그들이 일상적으로 같이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예수.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잘 알지 못했다. 그들이 알고 있다고 확신해 마지않았던 예수의 모습이 오히려 문제였습니다. 예수의 입술을 통해 나오는 말씀이 그들에게는 놀라움의 동기가 되었지마는 진실한 예수의 실체는 그들의 눈에 비늘이 끼여 있었다.

종종 우리가 가진지식이 실체를 깨닫는데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지식(선입견)의 영향으로 우리의 관찰에는 특징적인 시간의 선후관계와 사물적인 병존관계 의 프리즘안에서 굴절되고 채색이 발생하게 된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관찰은 이미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에 따라 편향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의도하는 바대로 관찰 내용을 분석하려는 심리적 경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제 입맛에 맞는 사실은 과장되게 강조하고, 자신의 의도와 일치하지 않는 사실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간과해 버리게 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예수께서 보이신 가르침의 진수는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사건이다. 당시 상황으로 보면 손님의 발을 씻는 것은 그 집 종이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스승인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것은 바로 종으로서 섬기는 자세를 보여 주신 것이다.

- 내가 행한 것과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다.

예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난 후 제자들이 행하여야 할 삶의 전형이 무엇인지를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여 일깨우셨다. 오늘날 누구보다도 예수를 잘 알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 중 으뜸은 역시 목회자들이다. 대학에서 전문적인 학위 과정을 이수하고 각종 신학이론과 목회이론을 공부한 그들에게 예수는 너무도 친숙하고 잘 아는 인물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예수 따르기를 평생의 과업으로 알고 살겠다고 서원한 사람이니 오죽하겠습니까마는 실상은 그러한 이력이 도리어 예수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을 종종 본다.

남을 섬기고 대접하는 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손수 본을 보인 삶의 자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에서는 도리어 성도들이 목사 섬기기에 분주하고, 예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인 목사는 섬김 받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는 현실이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온갖 성경지식을 외우고 신학이론을 공부했지마는 정작 예수의 삶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예수는 입이 마르도록 설교해대지마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머리 둘 곳이 없었던 인자' 로서의 예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교회 돈까지 동원하여 부동산 투기에 개입하고, 넓은 아파트와 안락한 승용차 구입에 관심을 쏟는 것을 보면, 집 없는 떠돌이 예수는 이미 물 건너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의기 투합하는 교인들과 더불어 함께 돈 벌 거리를 찾기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점 집을 찾아다니면서 유망한 투기 지역을 찾는 복부인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진정 예수의 모습은 무엇인가. 누구보다도 예수를 잘 안다고 자부하는 내가, 예수께서 살아가신 삶의 흔적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돌이켜 볼 일이다. 누구보다도 예수를 잘 안다고 자부하던 고향 동리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했듯이, 우리도 예수를 배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반성해 봐야 한다. 섬기는 자로, 집 없는 떠돌이로,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사람의 친구로 살아가셨던 예수를, 성공과 출세와 화려한 영광을 꿈꾸는 우리의 욕망이 그를 배척하고 있다.

3년 6개월의 기근 동안에 이스라엘에도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방 땅에 있는 한 과부에게만 엘리야를 보내셨다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예수가 예수를 잘 알고 또 그에 대해서 가르친다는 교회 지도자들에게로부터 배척 당하질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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