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설교만 남은 대형 교회

by 【고동엽】 2009. 8. 24.
 

                                         설교만 남은 대형 교회

종교개혁은 예배에서 설교의 위치를 회복시켰다. 그리고 점차 설교는 개신교회 예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대형교회에게 있어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그래서 메가처치는 설교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전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설교가 제대로 선포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다.

그런데 오늘날의 메가처치는 사실상 설교만 남았다. 물론 메가처치에는 많은 프로그램이 있고 다양한 활동이 있다. 그러나 메가처치 교인의 상당수는 설교 때문에 온다. 실제로 메가처치의 설교자들은 다들 설교를 잘한다. 메가처치 교인의 상당수는 재미와 감동, 유익한 설교를 부담 없이 듣고 은혜의 포만감으로 교회를 나선다. 이들을 소위 선데이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유난이 부담 없는, 쿨한 교회인 메가처치가 이들 선데이 크리스천의 온상이라는 것은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교회마다 이런 사람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다르겠지만, 대충 80%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 적지 않은 교회 성장학은 이 퍼센트에 근거하여 성장 전략을 짜고 있다.  메가처치 교인의 80%는 대부분 설교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메가처치에는 ‘오직 설교’만 있다.

초대교회는 설교주의를 따르지 않았다

먼저 지적할 것은 초대교회의 예배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오늘날과 같이 절대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초대교회는 설교보다는 성찬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보통 2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부는 말씀 중심의 예배가, 2부는 성찬 중심의 예배가 드려졌다. 불신자의 예배 참석은 엄격히 금지되었지만, 특별히 2부 성찬 중심의 예배는 더더욱 참석할 수 없었다. 성찬은 오로지 세례 신자들만 참석할 수 있었다. 반면에 1부의 예배는 조금 더 허용해서 입교 예비자들까지 참석이 가능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초대교회가 말씀 예배보다 성찬 예배를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초대교회도 말씀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말로 성서를 가르치는 것은 예배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 부분일지언정 전부라고 여기지 않았다. 앞글에서도 밝혔듯 기독교 진리의 핵심은 ‘독생자가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따라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몸을 입고 오신 주’를 기념하는 것을 단순히 설교나 가르침을 듣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요한이 생명의 말씀을 보고, 듣고, 손으로 만졌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초대교회 성도들도 성찬을 '보이는 말씀,' 곧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여기며 극도로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설교가 예배의 전부인양 여겨지는 개신교의 ‘설교주의’는 초대교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초대교회의 설교는 오늘날의 설교와 달랐다

초대교회의 설교는 오늘날과 어떻게 달랐느데 가장 중요한 차이는 당시의 설교가 오늘날과 같은 웅변조의 수사학적 설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처음 300년간 초대교회는 대부분 일반 가정에서 모였다. 뒤늦게 교회 건물로 추정되는 두라 유로포스나 도무스 에클레시아, 티툴루스 비잔티스 등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지만 이것들도 일반 가정집을 개조한 것에 불과했다. 가정집에서 20명 남짓의 인원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초대교회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예배 환경 때문에 초대교회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웅변조의 수사학적 설교가 어울리지 않았다. 고대의 수사학이 도입이 된 4~6세기까지 초대교회의 예배에서 웅변조의 수사학적 설교를 듣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는 어떤 설교였을까? 먼저 설교자의 설교 능력과 자질은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다. 설교자의 가장 큰 자질 중 하나는 성서를 길게 잘 읽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정 본문에 대한 강론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요즘처럼 성서를 쪼개고, 원어를 대조하고, 적절한 예화, 감동적인 표현, 천둥을 내리치는 열정, 풍부한 유머, 화려한 제스처 등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예수와 사도들이 어떻게 말했는지 성서를 찾아서 읽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러나 설교자들에게 다른 능력이 요구되었는데, 그것은 순교의 잔까지 마실 수 있는 불굴의 신앙과 자신의 가르침을 몸으로 보여줄 수 있는 모범이었다.

둘째로, 설교의 목적은 삶의 변화였다. 은혜를 끼치는 설교나 성서 지식의 전달, 교리 교육 등은 설교의 주목적이 아니었다. 설교의 주목적은 세상 속에서 ‘신자답게 사는 길’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이었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속성 등과 같은 정통 교리 교육은 별로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는,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에 대한 복음 설교가 교회 안에서 거의 선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복음 설교는 불신자들에게만 선포되었으며, 교회 안에서는 소위 디다케라고 해서, 신자다운 삶, 곧 ‘생명의 길’이라는 이름의 예수 닮는 길에 대해서 주로 가르쳤다.

신자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민 윤리적 가르침이 아니라 산상수훈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당시 설교는 성도들로 하여금 산상수훈을 실천하도록 부단히 촉구하는 시간이었다.

셋째로, 설교는 대화하는 방식이었다.  1세기의 예배의 모습을 보면 설교는 대화하는 시간이었다. 가령 가정에서의 문제라든지, 노예의 문제에 대해서 성도들이 물어오면 설교자는 그 문제에 대한 복음서나 사도의 글을 찾아 읽어준다. 그러면 성도들은 이에 대해 깨달음을 얻고, 그대로 순종할 것을 서약한다.

그러니까 설교 시간에는 대충 이런 식의 대화가 오고 갔다. “목사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 사도들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합시다.” “아멘!” 이러한 대화식 설교는 오늘날과 같이 30분 동안 쉬지 않고 목사 혼자서만 말하는 그런 설교와는 크게 달랐다.

넷째로, 초대교회의 설교는 실천을 통하여 선포되었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두려운 경고,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가 설교자와 성도들을 늘 두렵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말과 행동의 일치를 진리 선포의 중요한 조건으로 삼았다.

클레멘트 2서>의 저자가 강조하는 것도 행위를 통한 진리의 선포였다. 친밀한 작은 공동체로서의 초대교회 안에서 설교자의 삶은 오늘날 메가처치와 같이 은폐되거나 가려질 수 없었으며, 그대로 노출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몸, 삶, 말은 합쳐져서 설교가 되었다.

수사학의 도입과 설교의 황금기

그런데 4~6세기에 수사학이 도입되었다. 수사학이란 한 마디로 ‘설득의 과학과 기술’이다. 이것은 논란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수사학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정의일 듯싶다. 초대교회 지도자들도 수사학에 능통한 이들이 몇몇 있었다.

그러나 교회가 수사학을 설교의 방법론으로 받아들인 것은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늘어난 군중들에게 성서를 가르치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어거스틴은 수사학과 성서의 메시지를 훌륭하게 결합시킨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그때 교회의 설교가 웅변조의 수사학적 설교로 바뀐 것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설교 = 메시지+설득의 기술

웅변조의 수사학적 설교가 도입되면서 설교는 한 사람의 퍼포먼스로 바뀌었다. 다들 자기를 쳐다보는 강단에서 대화도 없이 혼자서 장시간동안 말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수사학의 기술이 필요하게 되었다. 때문에 수사학적 설교를 하는 사람은 진리를 전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그것은 사람들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지루하지 않게 하면서 장시간의 설교에 청중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예화의 활용이나 목소리, 제스처, 표정 등이 고안되었다.

또 엄청난 지식과 정보를 혼란스럽지 않도록 이해시키기 위해서 설교는 서론, 본론, 결론의 구조를 띠게 되고, 본론은 몇 가지 간단한 대지와 소지로 배열되어야 했다. 일관성 있는 사고를 위해서 발상부터 배열, 표현, 발표까지 일련의 설교 작성 프로세스가 중요해졌다. 그리고 이런 원리는 오늘날까지 설교학의 원리로 자리 잡고 있다.

교회의 설교는 바로 이러한 테크닉을 활용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전하는 것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4세기 이후, 설교는 ‘메시지+설득의 기술’이 된 것이다. 관건이 되는 것은 과연 기독교 진리가 설득의 기술을 통하여서 전달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기독교 진리는 인격을 통해서 전달된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 기독교의 진리와 그리스 진리 사이의 차이점을 지적한 앞글을 기억할 필요를 느낀다. 만일 기독교 진리가 명제나 공식과 같이 그리스적 진리와 같은 성격의 것이라면 기독교 진리는 수사학 기술을 통해서도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기독교 진리가 인격이라면 기독교 진리는 인격을 통해서만 올바르게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지나치게 극단적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 진리에 지적인 측면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바울의 말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고, 알고, 지식을 얻어야만 믿음이 생겨날 수 있다. 때문에 수사학 기술이 악마라도 되는 양 여길 필요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 절대로 본질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설교는 반드시 ‘인격을 통과한 진리’라야 한다. 이것이 본질이다.

그러나 문제는 수사학에서 진리나 인격은 본질이 아니라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라는 것이며, 동시에 설득하는 기술이 수사학의 핵심이라는 사실이다. 종종 수사학자들 중에는 키케로와 같이 진리를 강조하는 사람도 있었고, 플라톤이나 퀸틸리안처럼 인격을 강조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수사학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기술일 뿐이었다.

진리나 인격이 없이도 잘 작동되는 것이 수사학 기술이다. 이것은 기독교 진리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참으로 치명적인 결함이다. 인격 부재의 상황에서도 수사학적 설교는 설득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메가처치와 같은 인격 부재의 상황에서도 설교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기독교 진리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설득의 기술로서의 수사학의 힘이다.

설교의 위기란 무엇인가

오늘날 많은 설교학자들은 ‘설교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도대체 설교의 위기란 무엇인가? 설교의 위기란 한마디로 설교한 대로 교회와 신자의 삶이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설교 따로, 삶 따로. 이것이 설교의 위기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설교의 위기는 수사학이 도입되었던 4-6세기부터 벌써 나타났던 현상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수사학이 도입되면서 설교는 황금기를 맞는다. ‘기독교의 진리’가 ‘설득의 기술’을 만났을 때 확실히 강력한 영향력이 나타났다. 암브로스,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제롬 등은 위대한 설교가들로서, 황제조차 그들의 말 한마디에 두려워 떨었다. 어떤 경우는 설교 때문에 폭동까지 일어났다. 당시 설교는 분명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슈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설교자들이 수사학을 배우면서, 초대교회의 능력은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설교의 황금기 때 교회의 능력은 형편없이 추락했다. 그 단적인 예가 수도원의 설립이다. 신자들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수도원에 진리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사막과 광야로 길을 나섰다. 그래서였는지 제롬은 꿈에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키케로의 사람이구나’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음성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적용된다(신광은)

 


click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