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상당히 과격말이다. 부처를 죽일 정도라면 부처 밑에 있는 중들쯤이야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여길 수 있다. 그러니 불교에서는 사찰의 수장격인 스님에 대한 숭배가 있기 힘들뿐더러 또 고승이라고 하는 분들도 설법하면서 "나를 죽여라" 하고 종종 말하기도 한다니 과연 불교에서는 숭배하기가 어렵겠다하는 생각이 든다.
가톨릭의 경우에는 각 개교회의 신부에게 문제가 생기면 상위 조직인 교단에서 신도들이나 세상이 알기전에 신부를 처리한다. 교황청에서 알아서 처리해버린다는 것이다. 게다가 몇 년 단위로 신부들을 순회시키니, 신도들이 어떤 특정한 신부를 숭배할 일도 별로 없다.
그러나 개신교의 경우는 양상이 좀 달라서 각 교회의 목사가 다 교황이다. 그는 담임목사가 되면 평생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때문에 그 교회 신도들이 그 목사를 무슨 신성한 존재라도 되는 듯 여전히 떠받들고 '우리 목사님' 하면서 감싸고돌고 있다.
사울은 스데반이 돌 맞아 죽는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 스데반의 죽음을 옳게 여겼다. 왜냐하면 스데반은 대제사장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 스데반이 한 이 말은 결국 성전에서 제사를 맡고 있는 제사장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얘기이다. 더 이상 제사장 노릇하면서 사람들 앞에 군림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쓸데없이 제사장직 붙들고 성전에서 근엄한 척하지 말라. 성전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 요즘 식으로 하면 담임목사 보고 일개 신도가 “담임목사직 그만 두라. 하나님이 더 이상 당신과 함께 하지 않는다”고 꾸짖는 것과 비슷하다.
사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는데 감히 성전과 대제사장을 능멸하는 자들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예루살렘 성전과 대제사장이라는 교회 조직이 곧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요즈음의 mbc의 뉴스후라든지, 세상 법정을 향해, "사탄의 자식들아! 우리 목사님을 욕먹이지 말라"고 목청 높이것과 비슷하다.
인간이 만든 성전과 대제사장 편에 선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그대로 실천하고 따르는 예수믿는 성도들을 적으로 생각하고 잡아들이는 일들이 오희려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한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실천하는 삶의 편에 서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이다. 목사와 교회 조직의 편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에서 실행하지 아니하였을 경우에, 목사나 장로나 교회는 언제든지 하찮게 버려질 수 있고 문을 닫을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을 경우나 혹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적절하지도 않은 목사를 감싸고 도는 교인들 역시 목사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일 뿐이다.
오늘 현실의 교회는 부적절한 교회당과 목사라는 인간을 감싸고돌다 보니 어느새 하나님과 적이 되어 버렸다. 자기가 개척하여 성장시킨 교회에서 수십 년을 목회하다 보니 어느새 자신이 교황우상이 되어버린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적이 되었는지도 모르는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며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것이다.하나님의 말씀이 살기 위해서는 교회가 죽어야 하고 목사가 죽어야 하고 목사숭배가 죽어질때만이 비로소 하나님이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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