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과 청교도들의 주일성수 개념
주일성수 운동을 일으켜야할 만큼 한국 교회는 신앙의 정통적인 가치관마저 흔들리는 실정이다. 세속주의의 급류에 직면해있는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이라는 이름 아래성도들을 대량생산하는 일에 주력해 왔다. 이로 인해 기독교인에게 구분된 외형적인 생활양상으로 자리잡혀 있던 주일성수 문제가 신자들의 편리위주로 변모해 급기야는 바른 주일성수 개념이 어떤 것인지를 다루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필자는 본 논고에서 특히 개신교 신앙의 토대를 이룬 종교개혁자 칼빈의 사상과 그의 가르침을 근거로 주일성수를 기독교 신앙의 독특한 본질로 생각한 청교도들의 주일성수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주일성수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를 제시함으로써 이 글이 저마다 자기의 소견대로 행하는 성도들에게 큰 지표가 되었으면 한다.
1. 칼빈의 주일관
칼빈은 십계명을 강해하면서 안식일에 대한 교회의 바른 이해와 신약시대의 주일개념의 원리를 두 가지로 집약하여 설명한다. 첫째는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는 형식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로서의 안식일 개념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성도들이 만나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는 것을 도와주는 의식일로 여기는 것이다.
1) 모세의 율법이 보여주는 안식일 개념
율법이 보여주는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진 영원한 안식을 상징하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안식의 방편으로 안식일을 지킨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안식일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출애굽기 20장 10절에서 이야기하시며 그 날을 "내가 너희 가운데 정해놓은 바 내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징표니라" 고 하셨다. 따라서 구약의 성도들에게 안식일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기 위하여 그 일을 방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들의 모든 일을 접어두어야 하는 휴식의 개념이었다.
그러므로 안식일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올바르게 경배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가 안식일에 오락을 금하고 이 날을 거룩히 지켜야한다고 말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물론 유대인들도 안식일의 상징적인 의미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상징의 진실, 곧 '하나님에 대한 영적 경배'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규정된 의식을 지키는 것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규칙적으로 지키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같은 의식적인 개념에서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는 원리를 이야기하였다. 안식일 계명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의지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의 모든 생각과 감정에 대하여 자신을 겸허히 비우는 법' 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율법에 대하여 노예와 같은 복종의 의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며 그를 경배하기 위하여 모든 세속적인 일을 금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칼빈은 이렇게 설교하였다.
"사실 안식일에 관하여 명령되어진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 그 자체를 취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의의 규범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십계명을 통해 우리들에게 영원히 지속될 규범을 주시고자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식일에 관하여 모세가 자세히 말한 그 내용이 우리에게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비록 그 상징은 아직껏 지속되지 않을지라도 그 진수는 계속해서 적용되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것의 의무이자 첫걸음이었다. 팔리 교수가 인용한 칼빈의 주석(Four Last Books of Moses)을 보면 안식일이 단순히 게으름과 나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에 우리의 몸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일에서 손을 떼는 자발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것으로 말하였다.
칼빈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아울러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제 칠일을 택하시고 이 날을 거룩하게 하셨던 바, 이것은 그가 세상을 창조하시는 일을 마치시고 그의 종들로 자신이 이루어 놓으신 창조사역의 아름다움과 뛰어난 솜씨와 적합함을 생각하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로 일체의 세상 염려로부터 쉬게 하신 날이다.
따라서 정녕 이 날에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우주 창조와 그것에 대한 통치하심에 있어서 나타나는 그의 지혜와 권능과 선하심과 공의로우심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로부터 주의를 빼앗기며 보낼 수 있도록 허용된 시간이란 단 한 순간도 없다.
그러나 인간이란 변화무쌍하여 이 날을 잊어버리거나 곁길로 나갈 소지가 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같은 연약함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셨다. 곧 이레 가운데 하루를 다른 날들과 구별하시고, 우리들이 반드시 일체의 세상일과 근심을 잊은 채로 이 날을 보내도록 명령하심으로써, 아무것도 그 거룩한 시간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이 날에 사람들이 단지 그들의 가정에서 쉬는 것을 원하신 것이 아니고 그들이 반드시 성소에 모여 기도와 제사에 참여하며 함께 율법을 해석하는 가운데 그들의 신앙적 지식에 진보가 있기를 바라셨다. 이 점에서 볼 때 우리에게도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에 관한 한 동일한 필요성이 있다고 하겠다. 이로써 우리는 이 한 날에 모든 일에서 해방되어 그만큼 더 그의 말씀을 배울 수 있는 준비를 함과 동시에, 각자의 믿음을 입증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 교회의 성도들도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과 함께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하나님만이 우리를 다스리시고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기만을 바라는 우리의 의식적인 단호한 행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우리들의 선호하는 일에 열중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맺어진 줄이 끊기며 최대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단 하루를 정하신 목적을 "비록 인간들이 그들의 악한 욕심과 여러 가지 위선들과 그들의 본성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리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을지라도 그들 자신들의 육신을 벗기 이전에는 그 원하는 목표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다"라고 말하였다.
경건한 성도들이 하나님과 약속의 손을 잡으며 또한 그에게 순종하는 가운데서 화평을 누리기 위해서는 일생을 통하여 안식일을 지켜야 하며 그들의 뜻과 행동을 삼가고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노력하는 일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2) 경건훈련을 위한 공동체의 의식일로서의 안식일
안식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율법의 교훈을 듣고 희생제사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도 이같은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어느 정해진 날이 있어 그 날에 사람들이 모여 율법을 듣고 의식을 거행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들로 이 날의 시간을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에 대하여 묵상하는 일로 바치도록 함으로써 이러한 기억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건의 훈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이어서 칼빈은 바울이 골로새서 2장 16∼17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다시 한번 안식일의 상징적인 의미는 상실되었지만 여전히 그 원리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고 역설하였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공동체로서 경건훈련을 위하여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해진 날에 모이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의 성도들 역시 한 날을 정하여 하나님이 의도하신 안식의 본래 취지를 유지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열심이거나 마땅한 일로 간주하여 스스로 잘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며 우리의 악한 본성 때문에 성도들이 모여야 할 필요성은 절실한 것이다. 칼빈은 이것을 성도들의 시민 질서(Civil Order)로 간주한다.
안식일은 단순히 육체적인 활동의 휴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묵상하고 경배하는 일을 방해하는 온갖 일로부터 중지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만일 우리가 주일을 바꾸어 우리의 생계유지를 위한 날로 또는 우리의 오락과 즐거운 일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을 수 없으며 그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주일에 온갖 일에서 손을 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배우고 우리들의 신앙을 함께 고백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하고 성례에 동참하며 성도간의 교제를 이루는 일에 적극적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만을 배우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날들 동안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묵상하며 그를 영화롭게 하는 데 종사하기 위함인 것을 칼빈은 가르쳤다. 마치 이것은 구약시대의 안식일 성수가 나머지 날들에는 무슨 일을 해도 상관치 않고 오직 안식일에만 거룩히 보내야 할 것을 의미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더욱 돈독히 하고 경건의 능력을 쌓는 일이기 때문에 주중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거룩한 신앙생활이 되도록 이끄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주일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바람직한가? 칼빈은 우리가 몇 가지 훌륭한 교훈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하여, 그저 설교나 들어보려고 교회에 가는 것으로 족한 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또한 그것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의식을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와같은 방법을 통하여 우리들의 신앙이 요일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신앙으로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또 우리가 주일성수하는 것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는 이전에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얻어진 유익한 것들을 간직하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들의 신앙을 공동으로 고백하는 공동체 형성을 위해서도 주일에 모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이같은 일이 늘상 이루어져야 하지만 칼빈은 인간의 부족함과 연약함 때문에 특별히 한 날을 정하여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날이 꼭 일곱째 되는 날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모든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구속하여 주셨고 율법준수에 대한 책임을 면케 하여 주셨기 때문에 신약의 성도들은 주님의 부활의 날에 모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강제적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자율적인 자세에 의하여 지켜져야 한다. 이 날의 참된 의미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공동체를 형성하여 다른 지체들과 더불어 한 신앙을 고백하고 믿음의 일치를 나타내며 주님의 명하신 진리를 함께 나눈다는 데 있는 것이다.
칼빈은 이같은 주일성수에 대한 매우 긍정적이고 성도들의 자발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로마교회가 제정하여 미신적으로 지킨 여러 성일들은 과감하게 철폐하였다. 오히려 그러한 날들이 성도들을 큰 혼란에 빠뜨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주신 안식일의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를 기억해야 한다고 하였다.
외형적인 질서를 위하여 성도들은 자신의 일과 세상적인 모든 업무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사역에 관하여 묵상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전념하면서 충분한 영적 휴식을 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주중에도 신앙인으로서 살도록 이끄는 신앙의 활력이 되는 것이다.
2. 청교도들의 주일 개념
청교도들은 단순히 영국 기독교의 성수주일개념을 창출했을 뿐 아니라 이후 개신교의 주일 개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주일은 구약의 안식일 원리를 철저하게 적용한 그 자체였고 안식일 엄수주의(Sabbaterianism)를 유출시켰다. 이들이 철저하게 오락을 금하고 장사나 자신을 위한 그 어떤 행위도 배격하고 주일 전체를 예배와 교제 및 선행하는 일에 아낌없이 바친 엄격한 주일성수사상을 고집한 데는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 청교도들의 가르침을 몹시 못마땅해한 제임스 1세 왕은 오락포고령(Declara-tion of Sports,1618)을 발표하면서 당시의 모든 대중오락을 교회 주일예배 후에 즐겨도 된다고 하였으며 제임스의 아들 찰스1세는 1633년에 이 포고령을 다시 선언하여 모든 성직자가 강단에서 이 포고령을 낭독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들의 조치는 정치적인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실제로 당시의 영국성도들은 예배시간만 지나면 남은 시간에는 항상 음탕한 연극과 흥겨운 놀이 및 교회명절과 축제와 철야제로 모였으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주사위놀음과 카드놀이, 볼링, 테니스, 곰 놀리기, 투계, 매사냥, 여우사냥 등을 즐겼으며, 주일에도 장(場)이 서고 온갖 오락들을 즐겼던 것이다. 이같은 현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청교도들에게는 매우 거슬리는 것들이었다.
리차드 박스터는 당시의 세속적인 현상들에 대하여 그의 "주의 날에 대한 신적 제정" 이라는 논고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우리는 주일날에 시편 한 장도 읽을 수 없었고 기도나 찬송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귓가에는 계속하여 길가에서 나오는 피리소리, 북소리, 고함소리만 시끄럽게 들려왔다‥‥ 오락 포고령이 선포된 이후 사람들은 오락을 그칠 수 없었기 때문에 성경낭독자는 그들의 피리소리나 놀이가 중단될 때까지 가만히 서서 기다려야 했다."
이와같은 상황을 극복하는 길은 적어도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신실한 하나님의 말씀 선포사역이었다. 이들의 노력은 결국 큰 성공을 거두어 기독교 역사상 '신구약성경 밖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성경적인 사람들'을 창출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1677년 청교도들의 가르침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의회로 주일성수 법령을 통과시키게 만들었다.
이후부터 성도들은 '세상적인 노동과 사무, 또는 자신들을 위한 정규적인 직업업무'로 주일을 보내서는 안되며 장사와 여행도 금하였고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경건하고 참된 신앙의 의무를 준행' 하는 일에 주일을 보내도록 격려받았으며, 실제로 성도들은 이에 잘 따라주었다. 파커 (J.1.Packer)가 지적한 대로 이 문제에 있어서 천교도 교육은 '국가적 양심을 창조하였다.'
청교도들은 칼빈이 주장한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 구약의 안식일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은혜와 신앙의 교제 가운데서 누리는, 안식을 예표한 이스라엘의 상징적인 의식으로 간주하였다. 여기에 한가지 더 첨부시킨 것은 한 날을 정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대한 강력한 구속력을 언급한 것이다.
사실 개혁자들은 칼빈을 비롯하여 대부분이 중세시대 로마교회가 '날'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게다가 미신적으로 숭배하여 복음의 본질에서 떠나있었기 때문에 주일성수에 대한 구속력을 천명하기 꺼려했다. 반면에 개혁자들과는 다른 교회사적 상황에 있었던 청교도들은 십계명 자체가 단순히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구속력이 있는 것처럼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한 주일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내세운 것이다.
실제로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십계명의 첫 네 계명들이 예배의 대상과 방법 및 태도와 시기를 정해준 중요한 계명으로 간주한 영원한 명령으로 보았다. 이들의 태도를 명확하게 표명한 것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이다.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위하여 적당한 분량의 시간을 구별해 바치는 것은 자연법칙에 합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적극적이고 도덕적인 영구한 명령으로 요구하신 것이 있으니, 곧 모든 시대의 인류로 하여금 이레 중 한 날을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히 지키도록 한 것이다. 이 안식일이 창세 이후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는 이레 중 마지막 날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활 이후부터는 이레 중 첫날로 바뀌었다. 이 날을 주일이라고 하며 이 날은 그리스도 교회의 안식일로서 세상 끝날까지 계속 지켜져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을 위하여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하리니 그들은 마음을 준비하고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데 지장이 없도록 일반적 사업을 미리 정돈해 놓고, 세상 사업과 오락에 관한 말과 생각과 행위를 일체 중단하고 안식할 것이며, 그 날의 모든 시간은 공 예배와 사적예배를 위하여 또는 부득이한 책임과 자비시행을 위하여 사용해야 된다"(21장 7,8항).
여기에서 대체로 주일성수 개념을 모세의 율법 범주에서 이해하면서 주일성수의 개념을 완화시키려는 것에 비하여, 청교도들은 안식일 개념은 모세의 법에 의거한 것이 아니고 이미 창조 때에 하나님이 친히 모범을 보이신 안식임을 내세워 설명하였다.
십계명에 있는 안식일 개념은 하나님의 창조사역 때에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것을 회고하며 한 주간 가운데 창조를 기억하는 날로 묘사하였다. 곧 이 날은 "창조주의 영광을 기억하며 스스로에게 그분을 섬기겠다고 약속시키며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을 의뢰하라고 자신을 격려하며 지내는 날인 것이다. 안식일의 봉헌에 의하여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 땅을 만드신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선언하였다"
메튜 헨리 목사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은 이 날을 우리가 경건하게 보냄으로써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받아 누리게 된다고 하였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계명을 재해석하시기는 하였어도 폐지하신 것이 아니요 오히려 스스로 안식일을 지킬 것을 기대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청교도들이 안식일주의자들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안식일을 크게 강조한 것은 안식일이 창조의 기념물이며 도덕률의 한 부분이므로 모든 인간에게 영구히 의무되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신약의 성도들이 안식 후 첫날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이 날을 '주의 날' (계1:10)로 명하였고, 또 사도들의 가르침과 부활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였다. 즉, 옛창조의 종결을 나타내는 제 칠일에서 새창조를 알리는 부활의 날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제 4계명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3. 청교도들의 주일성수에 대한 실제적인 원리
하늘의 소명을 위하여 이 땅의 소명은 쉬면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것을 가르친 청교도들은 이것을 부담으로 여긴 것이 아니고 즐거운 특권으로 여겼다. 그래서 금식일이 아니라 축제일로 간주하였다.
조지 스윈녹(George Swinnock)목사는 '성도만큼 기쁨과 어울리는 사람이 없고 안식일만큼 기쁨과 어울리는 날이 없다' 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주님의 날을 영적 박람회장으로 생각하고 한 주간 동안 필요한 모든 영적 양식을 충분히 비축하는 즐거운 날이었다.
리차드 그린함이 지적한 것처럼 청교도들은 "주일은 공부하는 날이요 영적 박람회의 날이요 장날이며 영혼의 양식을 공급받는 날이며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하는지를 배우는 날"이라고 믿었다.
존 웨스 목사 역시 같은 내용을 지적하였는데, "공 예배의식은 우리의 영적 교화소요 거룩한 장터요 천국 박람회와 같아서 그곳에서 우리는 물건을 사며 우리들을 위한 하늘에 속한 모든 용품을 구입한다"고 하였다. 때문에 이들은 주일을 사모하였고 영적 축제일로 즐거워하였다. 즐거움이 있는 곳에 기대감이 넘치듯이 영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구입한다는 만족감이 있는데 어찌 주일을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청교도들은 이 날을 위한 실제적인 준비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무엇보다도 선포되는 말씀을 듣기 위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즉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들으려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청교도들은 주로 토요일 저녁시간에 모여 기도로 준비하는 일을 하였다.
특히 박스터 목사는 토요일 저녁에 세 시간동안 주일을 준비하는 일을 성도들과 함께 하였다. 이것은 금요철야기도회를 가지고 있는 한국교회가 한번쯤 고려해볼 만한 내용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영국교회는 대개 토요일 저녁시간에 기도회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토요일이 쉬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금요일 모이지 않는 것은 청교도들의 전통에 근거한 것이라고 본다. 우리의 경우는 금요일에 기도회가 있기 때문에 토요일 직장생활에 방해가 되기도 하고 생활 리듬을 깨는 일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금요일은 예수님의 수난일이지만이 날을 울며 금식할 날로 보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날(Good Friday)'로 말하는 영어 표현이 의미하는 것처럼 좋은 날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스윈녹 목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당신이 토요일 밤에 당신의 심령을 하나님께 맡긴다면 당신은 주일 아침에 당신의 심령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주일 예배에서 졸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시간에 자라고 권면하였다. "말씀 듣는 것을 소홀히 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친히 피흘려 사주신 복된 진리의 말씀을 상실하지 않게 하라."
이것을 강조한 사무엘 애니슬리 목사는 설교자의 약점 때문에 설교가 은혜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효과적인 조언을 주었다. "망가진 트럼펫을 통해서도 소리가 나듯이 그리스도는 비록 우리가 우리의 약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약한 우리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약점 많은 우리가 설교 전반에 걸쳐서 감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라고 선포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증거이다(고후 13:3)."
이들은 모든 공적인 예배는 주일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모든 신앙생활의 활력을 얻는 날이 이 날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주일에 선포되는 말씀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그리하여 말씀을 듣는 준비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이들의 예배는 보통 세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불평을 터뜨리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설교가 짧은 것에 더 불안해하였고 더 길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주일을 지킴에 있어 이들은 모두가 가족 중심 단위의 신앙생활을 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청교도들을 청교도가 되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이들은 가정에서 적어도 하루에 두 번씩 가정예배를 하였고 아이들에게 신앙문답과 주일에 들은 말씀에 대한 질의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에 깊이 새겨지도록 하였다.
그렇다고 이들이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처럼 율법주의자들인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에 헌신한 자들이다.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것보다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행할 것인가에 주력하였다. 파커 박사가 인용한 박스터 목사의 글을 보자.
"나는 첫째로 주일에 대한 사람의 긍정적인 의무들을 살펴볼 것이다. 곧 그가 어떻게 듣고 읽고 기도하며 자신의 시간을 보냈는가 하는 것과 그가 어떻게 자신의 가족을 가르치고 도왔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하나님을 찾는데 근면하고 자신의 천국·과업에 열심히 일한다면 나는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한 그의 세상적인 일과 관련된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하겠다 ‥‥."
글을 맺으며
이상과 같이 살펴본 칼빈과 청교도들의 주일성수 문제는 비록 지키는 날이 신약시대에 와서 주의 날로 변하기는 하였지만 안식일을 지키는 원리는 여전히 변함없이 강화되어 지켜졌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오히려 이들의 신앙생활에 더 활력을 불어넣었고 영국교회를 변혁시킨 한 원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마스 부룩스 목사는 영국교회에 경건의 능력이 쇠퇴하고 있는 원인으로 주일이 엄숙히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일찍이 지적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과는 달리 교회의 힘이 바닥에서 기고 있는 현상은 부룩스목사의 지적과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주일성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의 편의주의적인 상황에 끼워 맞춰 주일문제를 다루려고 하기보다는 창조원리에서부터 주어진 안식일 의무사항을 인간의 범죄와 타락과는 상관없이 주어진 영원한 계율임을, 즉 시내산에서 주어진 계명이기 이전에 창조 때 주어진 원리임을 인식하는 것이 주일성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할 것이다.
모든 날이 주의 날이지만 특별히 우리의 악한본성 때문에 한날을 정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이 날을 엄숙히 지키는 것이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다시 소생하는 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혹자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주일을 성수하려는 자들을 바리새적이라고 몰아부치지만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주일을 잘 지키는 자들은 주중에도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자들이지 방종하는 자들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위선자들일 것이다. 신앙생활은 무엇보다도 구별된 의식이 요구된다. 하나님을 위하여 한 날을 다른 날과 구별하여 사용하는 것은 의인된 죄인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독자 제위들은 존 머레이 교수가 쓴 "안식일 교훈에 대한 성경적인 고찰"이라는 글을 꼭 참고하기 바라며 본 논고를 맺고자 한다.
서창원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빈주의 5대교리와 알미니우스 (0) | 2010.01.31 |
---|---|
칼빈 신학과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공통점과 차이점 (0) | 2010.01.30 |
칼빈과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의 율법관 비교 (0) | 2010.01.23 |
티첼]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 (0) | 2010.01.23 |
칼빈주의와 한국교회 (0) | 2010.01.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