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은 교회의 유형적이 면과 무형적인 면을 똑 같이 강조한다.
1536년 기독교강요 초판에서는 교회의 무형적인 면 외에는 거의 다른 것을 생각지 못했으나, 그 후 부처(Bucer)와 접촉하면서부터 유형적 공동체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래서 칼빈은 1539년 기독교강요 제2판에서 유형교회의 개념을 발전시켰고, 1543년의 기독교강요 제3판에서는 부처의 이와 같은 사상적 영향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프랑수아 방델, 앞의 책, p357
사도 바울은 교회가 만일 주님께서 교회를 보존하기 위하여 제정하신 수단의 도움을 받 지 않는다면 스스로 완전성을 유지할 수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 물을 완성하고 충만케 하기 위하여 승천하셨다고 바울은 말한다. 이제, 그 수단이란 하나 님께서 그 직무를 위해 임명하신 자신의 종들에게 그것을 행할 능력을 주시고 자신의 교 회에 여러 은혜들을 부여하심을 의미한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노고가 헛되지 않도록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 사역에 효능을 부여해 주심으로써 교회에 자신을 임재하시도록 하신다. 그것이 바로 어떻게 성도를 회복시키며,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장성하여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게 하시며, 어떻게 우리를 서로 하나되게 하시고, 그리스도와의 연합되게 하시는가 하는 방법이다. 우리 들 중에 예언을 주실 때에, 우리가 사도들을 맞이할 때에, 우리가 주어진 교리를 중시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 기독교강요, 4권 3장2절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칼빈은 최상의 교회는 산 자든, 죽은 자든지 간에 모든 선택받은 자들로 구성된 불가시적(무형적) 교회지만, 이 외에도 교회는 우리들의 지상에서의 삶을 사는 동안 우리와 직접 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은 동일한 하나의 지역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형성하는 가시적(유형적)교회이다. 이것은 두 개의 별개의 교회가 있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한 교회에 두 면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것 뿐이었다. 교회가 무형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영적이어서 육신의 눈으로는 잘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선택받은 자들로만 이루어진 불가시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과 정확히 일치하지만, 이 불가시적 교회가 가시적 교회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으니, 이는 그 가운데 유기된 자들을 받아야만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교회가 이처럼 다른 두 가지 분명한 측면, 즉 하나는 믿음의 대상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의 대상으로, 혹은 우리가 구분하기를 하나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교회요,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보이는 교회로 구분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두 개의 교회가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칼빈은 오직 하나의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를 그 머리로 하고, 그분을 예배하는 것으로 구별되는 오직 하나만의 교회를 교회로 알고 있었다. 이러한 교회의 통일성이 우리로 하여금 불가시적 교회를 기준 삼아 가시적 교회를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믿는 자들과 위선자들을 구별하는 일은 우리들의 능력 밖의 일임은 누구나 인정한다.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비적 연합이며 성령께서 그들을 연합시킬 때 신비적인 유대관계를 갖게 만드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교회는 양자(養子)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의 성화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참된 지체가 된 자들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용납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강요, 4권 1장 7절
이것은 현재 지상에 살고 있는 성도 뿐 아니라, 세상이 시작된 이래 선택 받은 모든 사람들을 교회가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칼빈이 교회의 무형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무형교회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받은 피택자들의 단체, 곧 신자들의 공동체인 것이다. 모든 피택자들로 구성된다는 무형교회의 개념은 어거스틴의 사상이었으며, 위클리프는 이 사상을 항상 즐겨 인용하였다.(신복윤, 칼빈의 교회관, 신학정론, 제6권 1호, p14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Augsbug Confession)에서 루터와 멜란히톤이 한 것 같이, 칼빈도 참 교회를 구별하기 위하여 다음의 두 가지 객관적 기준을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전하여지고 또한 경청되어지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성례를 집행하는 곳은 어디든지 교회가 존재함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강요, 4권 1장9절
따라서 주관적인 근거가 될 수도 있는 구성원들의 자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정된 은혜의 수단의 존재여부에 따라서 교회가 구성되고 객관적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이다. 프랑수아 방델, 앞의 책, p 361
동시에 칼빈은 교회의 유형성을 강조하면서, 무형교회를 믿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인간적인 관점에서 교회라고 불리우는 유형교회를 존중히 여기며 이 교회와 계속 교통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기독교강요, 4권 1장 7정
무형교회는 당연히 유형교회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마치 사람의 영혼이 신체를 통하여 자체를 표현하는 것처럼, 무형교회는 반드시 자체를 나타내게 될 외형적인 조직체에서 유형적인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신앙고백과 행위, 말씀과 성례, 그리고 외형적인 조직과 정치에서 유형적으로 되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유형교회는, 온 지구상에 흩어져 살면서 한 분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사람들의 총수를 의미 한다. 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생활을시작하고, 성찬에 참여함으로 참 교리와 사랑에서 하나가 됨을 증명한다. 그들은 주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말씀의 전파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말씀의 사역을 보존한다. Ibid
그러나 이 유형교회에는 선택 받은 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자도 섞여 있다.
이 교회 안에는 이름과 겉모양뿐, 그리스도를 전혀 소유하지 못한 위선자들이 상당히 섞여 있다. 여기에는 야심만만한 자, 탐욕에 불타는 자, 시기하는 자들이 있으며, 불평과 불만에 쌓인 자, 아주 불결한 생활을 하는 자들이 수다하게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잠시나마 용납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세속법정에서 정죄를 받지 않았거나 엄격한 규율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Ibid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교회는 신비적인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그 실제적인 면에서 보면 교회는 눈에 보이는 종교단체이다. 이 한 교회의 두 가지 측면은 중심을 달리하는 두 원이 겹친 것과 같다. 선택받은 사람들의 일부는 눈에 보이는 공동체의 영역밖에 있는데, 그 까닭은 루터파나 로마파와 달리 칼빈은 세례마저도 구원에 본질적인 것으로는 보지 않기 때문이다. 도날드 매켐 편저, 이종태 역, 칼빈신학의 이해 ,p 288( G.S.M. Walker, , 칼빈과 교회)
또한 눈에 보이는 지체의 일부는 선택받은 자의 영역밖에 있는데 그 까닭은 쭉정이와 알곡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측면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도 뒤섞여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둘은 늘 한 점에 모이려고 애쓴다. 성도들의 영적인 교제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제도적 형태를 가져야 하며, 이 제도는 기도와 자기 훈련을 통해서 늘 자체의 이상에 일치하도록 애써야 한다. 이 단체가 몸과 동일시 될 수는 없지만 전자는 후자가 형체화 된 것이다.
Ⅳ. 교회의 표지(標識) -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
다이아몬드와 같이 진귀한 물건은 가짜가 있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서 어느 것이 진짜 다이아몬드인가를 알아내기 위하여는 일정한 표지가 있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엇이 참된 교회인가를 알 수 있는 일정한 기준이 있어야 된다. 칼빈은 교회의 표지에 대하여 말하기를 「어디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히 전파되고 청취됨을 보며 성례가 그리스도의 규례대로 시행됨을 보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신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6)고 한 그리스도의 약속이 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기독교강요, 4권1장9절
그는 권징의 필요를 역설하며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교리를 교회의 생명이라고 한다면 권징은 근육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권징을 교회의 표지로 보지는 않았다. 하문호, 교의신학, 교회론, p120
칼빈은 다소 도덕적인 결함이나 병이 있다 하더라도 이 두 사역(말씀의 신실한 전파와 성례의 참된 시행)이 존재하기만 하면, 거기에 교회가 있고 교회라는 명칭이 사용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주요교리나 모든 신자가 동일하게 승인해야 할 신조를 손상시키거나 파괴하지 않는 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의 합법적인 제도를 폐하거나 허물지 않는 한, 사소한 잘못들은 마땅히 용서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핵심 속에 거짓이 스며들거나, 필수적인 교리의 근간(根幹)이 붕괴되며, 성례가 파괴된다면, 목이나 심장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사람의 생명이 끝나듯이 교회는 즉시 파멸하게 될 것이다. 만일 신자들에게 자신의 구원을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맡길 것을 명령하는 사도와 선지자의 교훈이 교회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 교훈이 제거되었을 때 그 건물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교회를 지탱하는 그리스도교의 요강(要綱)이 무너지게 될 때, 교회는 필연적으로 붕괴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참된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한다면, 기만과 허위가 지배하고 있는 곳에 교회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기독교강요, 4권 2장1절
그리스도는 말씀의 전파와 성례의 시행을 명령하시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은사의 수단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이 수단들은 결코 공허하거나 무익한 것이 아니다. 말씀이 전파되고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성례가 시행될 때에는 언제든지 그는 살아서 우리와 만나시고 그가 계신 곳에는 또한 그의 백성도 거기 있게 된다. 그리스도가 임재하신다는 이와 같은 증거는 , 비록 거기에 위선자가 있다 할지라도 어떤 특수한 장소에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참된 교회의 표지, 곧 말씀의 전파와 성례의 시행은 보다 넓은 구조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한다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복윤, 앞의 책, p17
참된 교회는 종교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고, 성례를 자주 거행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주 부르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과 성례에서 그리스도가 인정되고, 주로 높이 들리움 받는 곳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의 표지를 구성하는 것은 어떤 제도가 아니며 상당한 종교단체의 존재 그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그 단체가 누구에게 예배하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모든 부패한 종파들과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주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고, 주의 명령에 의해서만 지도받기를 원할 때 그렇게 된다������고 칼빈은 강조하였다. 칼빈, 사도행전 주석 28:21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 권위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주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홀(笏)로 삼아 자기 교회를 다스리신다.������ 칼빈주석, 고전4:20
그는 우리의 유일한 교장선생님으로서 우리를 가르치시며 성령의 지도 아래 신구약성경은 교회의 유일한 최종 규범을 제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권위 있는 하나님 말씀은 설교의 도움을 받아 전달되고 있으며, 따라서 이 사역을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사람들은 그 사역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거역하는 것이다. 기독교강요, 4권3장2절, 칼빈주석, 엡4:11
하나님께서 연약하고 실수 많은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로 선택하신 것은 우리 인간의 허약성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역자는 자신의 직무상 하나님께서 몸소 말씀하시는 것 그 이상이나 이하로 말할 수 없다. 워커, 칼빈과 교회, 도날드매킴 편저, 이종태 역, 칼빈신학의 이해, p295
칼빈이 참된 교회의 표지로서 말씀과 성례만 인정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그의 교회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증거요,
결코 종교적 친교의 본질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Ⅴ. 교회의 직분(직원)
개신교역사에 있어서 칼빈만큼 교회의 직원에 대하여 중요성을 부여한 사람은 없다. 그는 교회가 직원들의 봉사를 통하여 존속하기 때문에, 주로 직원의 조직을 중심해서 교회를 보고 있다. 그래서 오토베버(Otto Weber)는 ������칼빈의 교회는 직원을 중심한 교회다������라고까지 말한다. 오토베버, 김영재역, 칼빈의 교회관, p65
교회의 직원이 하나님 자신의 인격을 대변하는 자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칼빈이 직원의 의미를 강조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하여 교회의 직원을 세우셨다. 왜 하나님은 인간의 봉사를 필요로 하시는가? 하나님만이 교회를 다스리시며 권능을 행사하시지만,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입을 통하여 자기 일을 성취하신다고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만이 교회를 지배하시며, 교회 안에서 권위, 또는 우월한 지위를 가지셔야 한다. 그리고 이 권위는 그의 말씀에 의해서만 행사된다. 그러나 그는 눈에 보이게 우리들 중에 계시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사람들의 봉사를 이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말로 명백하게 선포하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이 일을 위임하셨으나, 그것은 자신의 권리와 영광을 이양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일을 성취 하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을 할 때 연장을 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기독교강요, 4권3장1절
그러므로 교회란 건전한 직분적 체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칼빈은 말하기를 ������교회는 주님께서 교회보존을 위해 제정하신 이 방법들의 도움을 받는 일 외에 달리 온전히 유지될 수 없다.������ 기독교강요, 4권3장2절
고 한다. 주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후 그의 일을 사람들에게 위임하셨다. ������방법은 그가 자기 교회에 그의 종들을 통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인데, 그가 그 종들에게 이 직무를 위임하셨고 또 그들에게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임재하시는 것은 바로 그의 사역자(직분자)들을 통해서이다. 또한 그가 그의 성령의 능력을 펼치는 것이 바로 이 기구를 통해서이다. 따라서 인간들의 사역이 헛되지도, 비효력적이지도 않다. 칼빈의 말대로 주님은������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성령의 힘으로 그들의 사역에 효과를 주시면서 그들을 통해 자신의 교회에 임하시는 것이다.������ Ibid
한 걸음 더 나가서 칼빈은 이 교회직분의 위대성에 대해 말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직분의 위대함을 할 수 있는 모든 찬양으로 높이셨다. 이는 우리가 모든 다른 것보다 이것을 탁월한 것으로 여기게 하기 위함이다.������그의 격조는 더욱 높아진다. 교회에 있는 복음의 직분보다 더 탁월하고 더 위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는 그 직분이 성령과 구원과 영생의 직분이기 때문이다. 박건택, 칼빈의 교회관을 통해 본 한국교회, 신학정론, 제4권2호, p422
마지막으로 칼빈은 이 직분이 매우 귀하게 간직 되어야할 것을 천명한다. ������이 모든 말들은 다음 목적으로 귀환된다. 곧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존속케 하기 위하여 제정하신 인간들의 직분으로 교회를 통치하는 방법을 우리가 미지근한 태도로 경멸하고 질식시켜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Ibid
칼빈은 목사가 신자들을 양육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았다. 이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목사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정신을 갖도록 한다.������교회에 의해 양육 받는 것을 거절하거나 교회가 제공하는 영적 음식을 거부하는 자들은 굶어 죽어 마땅하다������라고 칼빈은 쓰고 있다. 칼빈은 목회사역을 대단히 높게 위치시킨다. 천사의 직분이나 레위인들의 제사장 직분과 같이 연결시킨다. 이렇게 교회의 권위는 구약과 신약을 잇고 로마 카톨릭의 극우파와 재세례파의 극좌를 밀어 제치면서 개혁파교회로 이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회의 권위는 유용성이 있다. 첫째는 우리 신앙의 복종여부를 시험하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이 직접 위엄 가운데서 말씀하시므로 우리를 겁나게 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음성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이다. 박건택, 앞의 책, p424
따라서 칼빈에 있어서 성경의 올바른 해석은 목사에게 주어져 있다. 칼빈의 의도는 교회를 세우는데 있었다.
그에 의하면 교회는 오직 외적 설교를 통해서만 세워지고 이것만이 성도를 묶는 유일한 끈인 것이다.
칼빈은 목사, 교사, 장로, 그리고 집사 등 네 가지 형태의 직원을 말한다. 1541년과 1561년의 교회헌법(신복윤, 앞의 책, p23)
그가 이와 같은 네 직분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된 것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부처의 영향을 받은 데서 기인한다. 물론 그는 네 직분론을 제일 먼저 말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1543년판 기독교강요에서 이 교리를 제일 처음으로 활자화하였다. 칼빈은 이 교리를 기독교강요 보다는 교회헌법에서 더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 모든 직이 그리스도와 그의 통치를 선포한다는 한 가지 목적을 가진다는 점에서 다 같이 중요하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직원은 목사라고 칼빈은 말한다.목사직이 우위에 있다는 것은 물론 교회의 지배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목사가 중요하다는 것은 말씀을 선포하며 성례를 집행하는 직분을 맡은 직원이기 때문이다. 목사는 모든 일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일정한 임지나 목적 없이 떠돌아 다니며,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보다는 목사 자신의 이익을 생각해서 마음대로 교회를 버리고, 함부로 한 곳에만 모이는 것은 혼란을 일으킨다. 따라서 목사는 각각 자기의 한계로 만족하며, 다른 사람의 영역에 침입해서는 안된다. 기독교강요, 4권 3장 7절
목사는 자기 교회에 매여 있는 사람이다.
목사와 교사의 권위는 자신들의 사명에 대한 충성도에 달려 있으며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 행사되는 권위는 모두 이 원칙…사람은 자신의 것을 섞지 말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따라 옳은 것을 판단할 뿐이라는 원칙에 굴복해야 한다. 이 단서에 굴복한 신실한 사역자들은 이 세상의 영광, 자랑, 명예를 삼가고 말씀의 위엄에 순종하고, 그 말씀의 명령을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전하며, 그리스도의 가정을 세우고 사탄의 통치를 무너뜨리며,양을 먹이고, 이리 떼들을 죽이며, 순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거역하는 자들을 반박하고 제지하고 정복하되 ,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실천하도록 위임받고 있다. 이 문단은 제네바 강요와(1536년) 제네바 요리문답(1537년)에 나오고 있음. G. S. M. Walker, 앞의 책, p295
칼빈은 설교 사역을 이처럼 높이 신뢰했다. 설교는 ������사람들의 양심을 꿰뚫으며������,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실제 모습을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그리스도를 보게������ 한다. 설교는 성찬용 빵을 들어 올리는 것을 대신하므로, 설교를 듣는 것이 미사에 참여해서 성찬에 참예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유익하다. 그러나 칼빈은 설교는 무엇이든지 다 이룰 수 있다는 루터의 고지식한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워커, 앞의 책, p296
이러한 직분제도의 유효성 문제에 있어서 칼빈은 다른 대부분에서의 경우에서처럼 중간입장을 취한다. 로마 카톨릭의 정도 지나친 교회직분 위엄에 대한 강조도 배격하고 또 재세례파의 경우처럼 성령에 속한 것을 죽을 인간에게 맡기는 경향에 반대하는 것도 배격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설교권을 주셨고 그 설교를 통해 듣는 이들에게 신앙이 창조되도록 하셨다. 그러나 효과는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성령께서 활동하시지 않으시면 설교는 헛된 일이고 열매가 없는 것이다.
목사 다음가는 직책은 교사이다. 교사는 성경해석의 책임을 맡아 건전하고 순수한 교리를 유지하며 자격 있는 목사를 양성하며 신앙교육의 의무를 지닌다.
이상규, 개혁주의 사상, 교신대학교 개혁주의 사상 강의안, p 37
목사와 교사의 기능은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그리스도는 그들의 입을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칼빈은 이 두 직분을 하나로 보고,
기독교강요 결정판에서는 교회의 직원을 네 가지로 보지 않고 세 가지로 보기도 하였다. 신복윤, 앞의 책, p24 (목사=교사,장로,집사)
장로의 직분은 목사와 함께 교회의 치리를 맡는다. 칼빈은 장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다스리는 사람들������(고전12:28)은 신자들 사이에서
선택된 장로들이었으며, 감독들과 함께 도덕적인 견책과 권징을 시행하는 일을 맡았다고 나는 믿는다. 기독교강요, 4권 3장8절
이 말에서 우리는 칼빈이 여기서 말하는 장로는 설교권을 가진 장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스리는 직책을 맡은 장로는 부지런하고, 경건하며, 근엄하고 거룩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집사직이다. 집사는 교회를 위해서 구제사업을 관리하며 직접 빈민들을 돌보는 직책을 맡은 사람이다. 칼빈은 사도시대 교회의 집사 제도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제네바 교회에는 집사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구제품을 분배하는 집사와 병자를 돌보는 집사였다. 성경에서 집사는 구제물자를 분배하며, 빈민을 돌보고 빈민 구제금을 관리하는 일을 하도록 교회가 위임한 사람들이었다.
칼빈은 직분을 말할 때 임시직(어느 특정한 시대에 필요한 직분)과 항존직(시대를 초월하여 항상 있어야 할 직분)을 구별하였다. 사도, 선지자, 전도자를 임시직으로 보았고, 목사, 교사, 장로와 집사를 항존직으로 보고, 이런 직분들은 교회 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직분이라고 칼빈은 생각하였다.
칼빈은 직원의 소명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진정한 사역자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먼저 합당한 방법으로 소명을 받아야 하고, 다음에 이 소명에 응해야 한다. 즉 명령을 받은 일은 책임을 지고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강요, 4권 3장10절
그러면 어떤 사람이 교회의 사역자가 될 수 있는가? 칼빈은������건전한 교리를 믿으며, 생활이 거룩하고, 그들의 권위를 빼앗기거나 그들의 사역에 수치가 될만한 허물이 없는 사람이라야 한다������고 하였다. 앞의책, 4권3장12절
그러면 누가 사역자들을 택할 것인가? 물론 선거는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아무 것도 결정 지을 수 없다. 결정은 모든 직분에 필요한 은사를 분배해 주시는 교회의 주인이신 우리 주님께서 친히 내리신다.
사람의 선거는 이 결정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앞의 책, 4권 3장 11절
이렇게 세워진 교회에 칼빈은 다음 여섯 가지를 첨가했다.
첫째 ������세워진 교회������는 하나의 예배 모범이 필요했다. 대부분 독일교회의 형식을 취했는데 부처의 영향이 컸다.
둘째 ������세워진 교회������는 찬송가가 필요했다.
셋째 ������세워진 교회������는 하나의 신앙고백이 필요했다. 칼빈은 자신이 만든 1537년의 제네바형을 버리고(율법-신앙-기도의 순서로 되어 있다) 스트라스부르그 교회의 것을 사용했다. 후에 제네바에 돌아가서 만들게 되는 1542년 교리문답은 후자의 순서로 이루어진다(신앙-율법-기도).
넷째 ������세워진 교회������는 권징의 행사가 필요했다. 1531년에 만들어진 교회의 감독자 제도를 채택했다.
다섯째 ������세워진 교회������는 평신도의 참여가 필요했다. 네 가지 직분은 부처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칼빈은 이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 부처가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못한 것을 제네바 교회에 적용하게 된 것이다.
여섯째 ������세워진 교회������는 세워진 학교를 필요로 했다. 앞으로의 시대를 위해 씨를 뿌릴 필요가 있고, 우리 자녀들에게 황폐한 교회를 남겨두지 않도록 마땅히 어린이들을 교육할 학교가 세워져야 한다. 이는 그들을 교회사역과 시정부를 위해 준비시키기 위함이다 라고 칼빈은 말하였다. 박건택, 앞의 책, pp 418-419
Ⅵ. 결론
현대교회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천주교와 개신교, 그리고 개신교 여러 교파들 간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대화를 강조하는 일련의 초 교파적 연합운동이다.
그러나 혹간에는 성경적인 교회연합을 잘못 이해하여 무조건 합하는 것을 연합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목적을 향한 가능성이나 봉사를 위한 기능은 잃은 채
뼈만 남은 본질론에 매달린 죽은 교회도 개혁되어야 하고, 교회가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교회의 사명만을 외치는 오류도 한 쪽에서는 범하고 있다.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교회로 하여금 하나의 ������새 인간사회������를 지향하는 하나의 행동매개체로 전락시켜 나가고 있다. 그래서 사회구조의 개조를 인간영혼의
개조보다 중시하고 있으며 교회와 사회의 질적 구별을 부인하는 소위 신만인구원론(新萬人球援論) - 이 선언은 WCC가 선언한 바와 일치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는 새로운 인간 가족으로 되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은 누구나 반드시 교회에 다 나오도록 하실 필요는 없다
교회란 다만 새로운 인간가족으로 개인과 사회를 취급하는 새 계약의 봉사자로만 알아야 할 것이다.������-을 내세운다.
이런 일련의 현상들은 교회론의 잘못된 이해 때문이라고 사려된다. 칼빈은 교회의 하나됨을 추구했으나 무조건적인 연합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진리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참된 교회들의 연합을 추구했을 분이다. 그것 없이는 진정한 하나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대 신학자들 중에 전통적인 교회론을 향해 비판의 소리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주장하기를 ������종교개혁 당시와 지금의 세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사회가 대부분 정적이고 교착되어 있다. 반면에 오늘은 그 구조가 유동적이고 동적이다. 문제는 이전 시대의 산물인 정적인 사고가
우리가 사는 현대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는 본래부터 칼빈주의적 전통에 서 있었다. 그것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지 우리들은 칼빈의 영적 유산을 물려받은 장로교인들이다.
칼빈은 16세기 종교개혁을 대표하는 최고의 신학자이며 종교개혁 사상의 진정한 완성자인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제 그 양과 질에 있어서 괄목할 만큼 성장하였다.
우리는 오늘의 신학적 풍토와 목회현상을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비판하면서,
교회의 밝은 미래를 개척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운동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인의 칼빈의 교회론 연구가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내용출처 : 장지문 | 200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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