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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가 견고한 사람(이사야 26:1-21)

by 【고동엽】 2024.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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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가 견고한 사람(이사야 26:1-21)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위로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높은 데 거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이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나이다마는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을 사르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 모든 일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가 주만 의뢰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멸하사 그 모든 기억을 멸절하셨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 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나이다 여호와여 백성이 환난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구로하며 부르짖음같이 우리가 주의 앞에 이러하나이다 우리가 잉태하고 고통 하였을지라도 낳은 것은 바람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생산치 못하였나이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

 

지금은 벌써 옛 이야기가 되었지만 월남전은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전쟁이었다고 많은 사람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전방과 후방이 서로 뒤섞여 있었다는 점이요, 둘째는 아군과 적군이 뒤섞였다는 점입니다. 전쟁이란 전방과 후방이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얼마나 진격하고 후퇴하였는가를 알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이 싸움의 승패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월남전은 전혀 전․후방이 구별이 안 되었기 때문에 싸움의 진척상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미군으로 하여금 싸울 의욕을 잃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아군과 적군이 뒤섞여 있어 사람들이 낮에는 아군이요 밤에는 베트콩으로 돌변하였다고 합니다. 때문에 참전하는 미군들은 불안하여 잠을 잘 수 없었고 계속적인 긴장의 고통으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전방이고, 누가 적군인지 알아야 싸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여기 저기에서 총소리가 들려 전방인가 하면 돌연 피리소리가 들리니 이들은 그만 견딜 수 없어서 한 사람 두 사람씩 아편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통계에 의하면 미군 100명 중 28명이 아편 환자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총을 들이대면서 "손들어"하면 빙글빙글 웃으면서 두 손을 번쩍 든다고 하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웠던 전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과연 당면한 고통과 위험을 이런 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까?

타조 사냥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타조란 날지 못하는 대신에 힘이 세고 다리가 매우 길어 그 뛰는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고 합니다. 타조는 사냥꾼들이 말을 타고 쫓아가면 사력을 다하여 빠른 속도로 도망을 칩니다. 도망을 하다가 힘이 빠지고 지치면 머리를 모래 속에 묻고 꼼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을 탄 사냥꾼들이 가까이 가서 사로잡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답니다. 아마도 그 새는 보지 않으면 위험은 다가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이렇게 앞에 당면한 죽음을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습니까?

성경 본문에는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보통 강한 표현을 할 때에는 똑같은 단어를 두 번 반복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도 '평강의 평강, 평화의 평화(peace of peace;샬롬 샬롬)에로 그를 인도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평화가 없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분석하여 말합니다. 첫째는 원심(怨心), 복수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이 있는 한 절대로 평안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지나친 욕망(ambition) 때문이며, 셋째는 질투심 때문이라 합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재질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형편만을 보고 질투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마음에 분노가 있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교만 때문이라고 합니다.

평강할 수 없는 요인 중에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칼빈도 마음속에 평화가 없는 요인을 한 마디로 교만 때문이라고 만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신앙적 교만은 모든 번민과 고민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의 마음이 평화를 잃고 불안에 싸여 있다면 자신을 한 단계 낮추어서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그 불안과 고민은 절반으로 감소될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평화를 얻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 중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쟁을 통해 쟁취하는 방법입니다. 나의 평안을 해치고 있는 상대방을 죽이고 항복시킴으로써 얻는 이 방법은 너무나도 허무한 것입니다. 둘째는 타협입니다. 첫 번째의 싸움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해를 입을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싸움보다는 서로 타협함으로써 평화를 얻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타협이 얼마나 불안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인지 현대 정치에서 흔히 보지 않습니까? 타협이란 어느 편이든지 50%는 양보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망각입니다. 이 방법은 불교적인 처세로서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맨 처음에 예를 든 월남전의 미군 병사나 사냥꾼에 쫓긴 타조와 같이 망각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안을 해소시켜 주거나 평안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평강은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노력에 의하여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가끔 인간은 소유에 의하여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평강이란 많이 소유했다는 것에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소유는 불안과 근심만을 더하여 줄 뿐입니다. 어느 지역의 땅값이 오르고 내림에 대하여 혹은 증권시세가 내렸다던가 하는 것을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못 가진 자들이 아니라 가진 자들입니다.

다음과 같은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큰 부잣집에 불이 났습니다. 재물이 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며 안타까워합니다. 그 때 멀리서 이 불을 구경하고 있던 거지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 사람들 참 안됐습니다"라고 하니까, 아버지 거지는 "그것 봐라, 우리들은 불 타 없어질 집이 없어 염려가 없으니 얼마나 좋으냐? 그게 다 이 애비 덕인 줄 알아라"라고 큰소리치더랍니다.

욕심은 욕심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소유한 자는 점점 더 많은 소유를 원합니다. 더 많은 욕심을 부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두 우리에게 걱정과 불안만을 더하여 줄뿐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지식으로 평화를 얻고자 합니다. 전도서 1:18에서는 지식을 더하면 근심을 더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도 "아는 것이 병이다"[識字憂患]라고 하였습니다. 알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필요 없는 지식만을 많이 알아서 근심을 더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어떤 사람은 명예를 자랑합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일이 높은 지위나 명예가 있는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되거나 복잡해지는 것을 우리가 경험해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소박하게 사는 것이 제일 평안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평강은 인간의 소유나 지식, 명예에 의해서 획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내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셔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에는 이것을 아주 시적으로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 하나님의 성문은 하나님이 열어 주셔야만 합니다. 옛날 성(城)을 생각해봅시다. 성 밖에는 도둑과 맹수들이 있는 아주 불안한 지역이었으나, 성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아주 평안하고 질서가 있었습니다. 이제 성 밖에 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주인이 그 문지기에게 명령을 내려 열어주라고 하여야만 그는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평안은 성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성문은 주인이 명령해야만 열립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샬롬'은 '화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힌 문이 열려야만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려야만 합니다. 사도행전 16:14에 '성령이 그 마음의 문을 열어 말씀을 듣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면 그 누구도 그 고통에서 구할 수가 없습니다.

간혹 우리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만사를 왜곡하여 보거나 해석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이미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은 절대로 평강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셔야만 그는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왕도 하나님이 강팍하게 하여 결국은 사망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강팍하게 된 심령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실 때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의 문이 열릴 때에 우리는 비로소 구원함을 받고 평강의 평강으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신(信)을 잘 지키는 사람, 믿음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충성을 다짐한 사람입니다. 믿음이란 정말로 귀한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다면 그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기록도 공약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는 이렇게 불신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금석(金石) 같은 맹약도, 두 원수가 함께 발표한 공동 성명도 어떤 때는 하루아침에 휴지가 되고 말기도 합니다. 그러니 누가 그 공약을 믿으며, 그 공동 성명을 믿을 수 있습니까? 온 세계가 이처럼 흔들리고 정부도 역시 이렇게 흔들입니다.

정말 현대는 스승도 제자도 믿을 수 없는 슬픈 시대입니다. 나라가 튼튼하기 위하여는 공신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가 평안하기 위해서는 서로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信)을 지키는 나라, 믿음을 지키는 사회와 개인에게는 평안이 있습니다.

둘째는 의(義)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이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의(義)보다도 더 강한 것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이 의를 마치 공로처럼 내세우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언젠가 신문에 택시 기사가 손님이 택시에 놓고 간 몇십만 원을 파출소에 갖다 주었다는 기사가 큼직하게 실려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했다고 실려있는 그 기사를 보고 어쩐지 제 마음이 서글퍼지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돌려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결코 신문에 날 만큼 선한 일은 아닙니다. 자기 돈을 남에게 내놓았다면 마땅히 선행이 되겠지만 자기 돈이 아닌 남의 것을 돌려주었다는 것이 어찌 선행이 되겠습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선행이라고 불러야 하는 현대 사회의 풍조가 심히 가슴 아플 뿐입니다. 또 요즈음 한창 거리 질서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새치기하지 않기, 줄 똑바로 서기 운동 등은 사실 우리가 당연히 하여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일, 법적인 제재가 없어도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 이것이 바로 의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세계의 4대 성현 중의 한사람입니다. 저는 그 분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 중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장 소중히 여깁니다. 그 분은 아무 죄도 없이 붙잡혀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백방으로 손을 썼으나 석방이 되지 않게 되자 소크라테스에게 탈옥할 것을 권고합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악법(惡法)도 법이다"라고 말하면서 사약을 마시고 죽습니다.

아무리 잘못된 법이라도 법이다라고 말하며 죽어간 그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입니다.

우리는 요즈음 너무나 실리적이고 또한 의를 떠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의가 부족하고 의가 없기 때문에 현대인은 평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의는 매우 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사는 사람은 어떠한 일이 닥쳐와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심지(心志)가 견고한 사람이 평강의 평강으로 지킴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심지가 굳은 사람이란 마음이 한결같은 사람으로서 변덕이 없는 사람입니다. 변덕스러운 사람은 가장 다루기 어려운 상대입니다. 그래서 공자님은 여자와 소인은 가장 다루기 어렵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여자와 소인은 변덕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변덕스러움이란 아직도 마음에 믿음이 없어 스스로 불안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침에는 이렇게 말하고 저녁에는 저렇게 말하는 변덕은 다른 사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요즈음 결혼 서약서에서 "부부의 대의를 지키겠느뇨?"라고 합니다만 20년 전에 사용했던 결혼 서약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이 모든 경우에도 아내를 사랑하겠느뇨?" 이 얼마나 귀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떠한 경우에 처할지라도 한결같이 사랑할 수 있는 견고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러한 변덕스러운 인간이 되지 않기 바랍니다.

신앙 생활도 역시 그렇습니다. 일단 믿겠다고 결심했으면 믿는 것이고 또 일단 교회 나오겠다고 작정했으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와야 합니다. 제가 주일날마다 하는 고민이 바로 그것입니다. 날씨가 어둠침침하거나 비라도 와서 땅이 질면 "오늘 교인이 얼마나 교회에 나올까?"하고 고민합니다. 지난주에도 시작할 때 교인들 수를 헤어보니 별로 많지 않아 "역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후 그런 대로 자리가 차츰 채워지기는 했습니다만 이래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가 나오겠다고 결심한 이상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아져야 하겠습니다.

한국 교회의 비참한 현실 중에 하나가 '학습'이란 제도입니다. 세례 받기 6개월 전에 행하는 이 제도는 세계에서 오직 한국에만 있습니다. 어느 나라이든지 오늘 예수를 믿겠다면 그날 즉시 세례를 줍니다. 그런데 왜 이런 제도가 한국 교회에서만은 필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한국 교인들이 너무나 변덕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믿겠다고 해놓고는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정말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 토인들을 예로 들어봅시다. 그들은 예수를 믿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들의 씨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몸담고 있던 사회와의 결별을 뜻하며 심지어는 자기 가족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새로운 사람이 처음 교회에 나왔을 때에는 소개하는 정도로 끝내지 않고 예배가 다 끝난 다음에 그를 중심에 놓고 빙빙 돌아가며 환영의 춤을 춥니다. 굉장히 성대하게 환영을 합니다. 그들은 일단 믿었다 하면 절대로 죽을 때까지 변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평강으로 인도되는 길입니다.

숙주나물의 명칭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옛날 이조 시대에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대신 왕위에 오를 때였습니다. 이 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성삼문(成三問) 이하 여러 집현전 학사들이 죽음으로써 항거하였지만 그들과 함께 동문 수학한 신숙주(申淑舟)만은 변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여름에 하루만 지나면 쉬어 못 먹게 되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지가 견고한 사람, 변절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평강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한 번 마음 먹은 것을 끝까지 지키는 그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은 평안을 허락하십니다.

평강은 승리의 열매입니다. 죄를 이기고 나약함을 이기고 교만과 게으름을 극복하고 변절을 이겨서 얻어지는 평강입니다. 이 평안은 이제 아무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주님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의 평강으로 지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한결같고 변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평강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기도:신(信)을 지키며 의(義)를 지키며 심지가 견고하여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자를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의 불신과 변절과 나약함을 용서하여 주옵시고, 새로운 은총을 더하여 굳게 믿음을 지킬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어떠한 손해를 지불하고라도 의에 서게 하시고, 심지가 견고해서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생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주시는 평안을 체험하고 주의 평안 안에 살고 주의 평강을 축복으로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평안과 위로가 없는 이 세대에서 주의 평강 안에 사는 축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사야 26:1-21)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위로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높은 데 거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이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나이다마는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을 사르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 모든 일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가 주만 의뢰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멸하사 그 모든 기억을 멸절하셨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 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나이다 여호와여 백성이 환난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구로하며 부르짖음같이 우리가 주의 앞에 이러하나이다 우리가 잉태하고 고통 하였을지라도 낳은 것은 바람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생산치 못하였나이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

 

지금은 벌써 옛 이야기가 되었지만 월남전은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전쟁이었다고 많은 사람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전방과 후방이 서로 뒤섞여 있었다는 점이요, 둘째는 아군과 적군이 뒤섞였다는 점입니다. 전쟁이란 전방과 후방이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얼마나 진격하고 후퇴하였는가를 알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이 싸움의 승패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월남전은 전혀 전․후방이 구별이 안 되었기 때문에 싸움의 진척상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미군으로 하여금 싸울 의욕을 잃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아군과 적군이 뒤섞여 있어 사람들이 낮에는 아군이요 밤에는 베트콩으로 돌변하였다고 합니다. 때문에 참전하는 미군들은 불안하여 잠을 잘 수 없었고 계속적인 긴장의 고통으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전방이고, 누가 적군인지 알아야 싸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여기 저기에서 총소리가 들려 전방인가 하면 돌연 피리소리가 들리니 이들은 그만 견딜 수 없어서 한 사람 두 사람씩 아편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통계에 의하면 미군 100명 중 28명이 아편 환자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총을 들이대면서 "손들어"하면 빙글빙글 웃으면서 두 손을 번쩍 든다고 하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웠던 전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과연 당면한 고통과 위험을 이런 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까?

타조 사냥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타조란 날지 못하는 대신에 힘이 세고 다리가 매우 길어 그 뛰는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고 합니다. 타조는 사냥꾼들이 말을 타고 쫓아가면 사력을 다하여 빠른 속도로 도망을 칩니다. 도망을 하다가 힘이 빠지고 지치면 머리를 모래 속에 묻고 꼼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을 탄 사냥꾼들이 가까이 가서 사로잡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답니다. 아마도 그 새는 보지 않으면 위험은 다가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이렇게 앞에 당면한 죽음을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습니까?

성경 본문에는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보통 강한 표현을 할 때에는 똑같은 단어를 두 번 반복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도 '평강의 평강, 평화의 평화(peace of peace;샬롬 샬롬)에로 그를 인도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평화가 없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분석하여 말합니다. 첫째는 원심(怨心), 복수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이 있는 한 절대로 평안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지나친 욕망(ambition) 때문이며, 셋째는 질투심 때문이라 합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재질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형편만을 보고 질투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마음에 분노가 있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교만 때문이라고 합니다.

평강할 수 없는 요인 중에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칼빈도 마음속에 평화가 없는 요인을 한 마디로 교만 때문이라고 만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신앙적 교만은 모든 번민과 고민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의 마음이 평화를 잃고 불안에 싸여 있다면 자신을 한 단계 낮추어서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그 불안과 고민은 절반으로 감소될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평화를 얻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 중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쟁을 통해 쟁취하는 방법입니다. 나의 평안을 해치고 있는 상대방을 죽이고 항복시킴으로써 얻는 이 방법은 너무나도 허무한 것입니다. 둘째는 타협입니다. 첫 번째의 싸움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해를 입을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싸움보다는 서로 타협함으로써 평화를 얻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타협이 얼마나 불안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인지 현대 정치에서 흔히 보지 않습니까? 타협이란 어느 편이든지 50%는 양보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망각입니다. 이 방법은 불교적인 처세로서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맨 처음에 예를 든 월남전의 미군 병사나 사냥꾼에 쫓긴 타조와 같이 망각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안을 해소시켜 주거나 평안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평강은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노력에 의하여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가끔 인간은 소유에 의하여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평강이란 많이 소유했다는 것에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소유는 불안과 근심만을 더하여 줄 뿐입니다. 어느 지역의 땅값이 오르고 내림에 대하여 혹은 증권시세가 내렸다던가 하는 것을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못 가진 자들이 아니라 가진 자들입니다.

다음과 같은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큰 부잣집에 불이 났습니다. 재물이 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며 안타까워합니다. 그 때 멀리서 이 불을 구경하고 있던 거지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 사람들 참 안됐습니다"라고 하니까, 아버지 거지는 "그것 봐라, 우리들은 불 타 없어질 집이 없어 염려가 없으니 얼마나 좋으냐? 그게 다 이 애비 덕인 줄 알아라"라고 큰소리치더랍니다.

욕심은 욕심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소유한 자는 점점 더 많은 소유를 원합니다. 더 많은 욕심을 부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두 우리에게 걱정과 불안만을 더하여 줄뿐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지식으로 평화를 얻고자 합니다. 전도서 1:18에서는 지식을 더하면 근심을 더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도 "아는 것이 병이다"[識字憂患]라고 하였습니다. 알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필요 없는 지식만을 많이 알아서 근심을 더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어떤 사람은 명예를 자랑합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일이 높은 지위나 명예가 있는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되거나 복잡해지는 것을 우리가 경험해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소박하게 사는 것이 제일 평안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평강은 인간의 소유나 지식, 명예에 의해서 획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내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셔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에는 이것을 아주 시적으로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 하나님의 성문은 하나님이 열어 주셔야만 합니다. 옛날 성(城)을 생각해봅시다. 성 밖에는 도둑과 맹수들이 있는 아주 불안한 지역이었으나, 성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아주 평안하고 질서가 있었습니다. 이제 성 밖에 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주인이 그 문지기에게 명령을 내려 열어주라고 하여야만 그는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평안은 성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성문은 주인이 명령해야만 열립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샬롬'은 '화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힌 문이 열려야만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려야만 합니다. 사도행전 16:14에 '성령이 그 마음의 문을 열어 말씀을 듣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면 그 누구도 그 고통에서 구할 수가 없습니다.

간혹 우리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만사를 왜곡하여 보거나 해석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이미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은 절대로 평강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셔야만 그는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왕도 하나님이 강팍하게 하여 결국은 사망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강팍하게 된 심령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실 때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의 문이 열릴 때에 우리는 비로소 구원함을 받고 평강의 평강으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신(信)을 잘 지키는 사람, 믿음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충성을 다짐한 사람입니다. 믿음이란 정말로 귀한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다면 그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기록도 공약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는 이렇게 불신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금석(金石) 같은 맹약도, 두 원수가 함께 발표한 공동 성명도 어떤 때는 하루아침에 휴지가 되고 말기도 합니다. 그러니 누가 그 공약을 믿으며, 그 공동 성명을 믿을 수 있습니까? 온 세계가 이처럼 흔들리고 정부도 역시 이렇게 흔들입니다.

정말 현대는 스승도 제자도 믿을 수 없는 슬픈 시대입니다. 나라가 튼튼하기 위하여는 공신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가 평안하기 위해서는 서로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信)을 지키는 나라, 믿음을 지키는 사회와 개인에게는 평안이 있습니다.

둘째는 의(義)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이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의(義)보다도 더 강한 것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이 의를 마치 공로처럼 내세우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언젠가 신문에 택시 기사가 손님이 택시에 놓고 간 몇십만 원을 파출소에 갖다 주었다는 기사가 큼직하게 실려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했다고 실려있는 그 기사를 보고 어쩐지 제 마음이 서글퍼지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돌려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결코 신문에 날 만큼 선한 일은 아닙니다. 자기 돈을 남에게 내놓았다면 마땅히 선행이 되겠지만 자기 돈이 아닌 남의 것을 돌려주었다는 것이 어찌 선행이 되겠습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선행이라고 불러야 하는 현대 사회의 풍조가 심히 가슴 아플 뿐입니다. 또 요즈음 한창 거리 질서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새치기하지 않기, 줄 똑바로 서기 운동 등은 사실 우리가 당연히 하여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일, 법적인 제재가 없어도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 이것이 바로 의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세계의 4대 성현 중의 한사람입니다. 저는 그 분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 중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장 소중히 여깁니다. 그 분은 아무 죄도 없이 붙잡혀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백방으로 손을 썼으나 석방이 되지 않게 되자 소크라테스에게 탈옥할 것을 권고합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악법(惡法)도 법이다"라고 말하면서 사약을 마시고 죽습니다.

아무리 잘못된 법이라도 법이다라고 말하며 죽어간 그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입니다.

우리는 요즈음 너무나 실리적이고 또한 의를 떠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의가 부족하고 의가 없기 때문에 현대인은 평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의는 매우 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사는 사람은 어떠한 일이 닥쳐와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심지(心志)가 견고한 사람이 평강의 평강으로 지킴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심지가 굳은 사람이란 마음이 한결같은 사람으로서 변덕이 없는 사람입니다. 변덕스러운 사람은 가장 다루기 어려운 상대입니다. 그래서 공자님은 여자와 소인은 가장 다루기 어렵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여자와 소인은 변덕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변덕스러움이란 아직도 마음에 믿음이 없어 스스로 불안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침에는 이렇게 말하고 저녁에는 저렇게 말하는 변덕은 다른 사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요즈음 결혼 서약서에서 "부부의 대의를 지키겠느뇨?"라고 합니다만 20년 전에 사용했던 결혼 서약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이 모든 경우에도 아내를 사랑하겠느뇨?" 이 얼마나 귀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떠한 경우에 처할지라도 한결같이 사랑할 수 있는 견고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러한 변덕스러운 인간이 되지 않기 바랍니다.

신앙 생활도 역시 그렇습니다. 일단 믿겠다고 결심했으면 믿는 것이고 또 일단 교회 나오겠다고 작정했으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와야 합니다. 제가 주일날마다 하는 고민이 바로 그것입니다. 날씨가 어둠침침하거나 비라도 와서 땅이 질면 "오늘 교인이 얼마나 교회에 나올까?"하고 고민합니다. 지난주에도 시작할 때 교인들 수를 헤어보니 별로 많지 않아 "역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후 그런 대로 자리가 차츰 채워지기는 했습니다만 이래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가 나오겠다고 결심한 이상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아져야 하겠습니다.

한국 교회의 비참한 현실 중에 하나가 '학습'이란 제도입니다. 세례 받기 6개월 전에 행하는 이 제도는 세계에서 오직 한국에만 있습니다. 어느 나라이든지 오늘 예수를 믿겠다면 그날 즉시 세례를 줍니다. 그런데 왜 이런 제도가 한국 교회에서만은 필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한국 교인들이 너무나 변덕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믿겠다고 해놓고는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정말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 토인들을 예로 들어봅시다. 그들은 예수를 믿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들의 씨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몸담고 있던 사회와의 결별을 뜻하며 심지어는 자기 가족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새로운 사람이 처음 교회에 나왔을 때에는 소개하는 정도로 끝내지 않고 예배가 다 끝난 다음에 그를 중심에 놓고 빙빙 돌아가며 환영의 춤을 춥니다. 굉장히 성대하게 환영을 합니다. 그들은 일단 믿었다 하면 절대로 죽을 때까지 변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평강으로 인도되는 길입니다.

숙주나물의 명칭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옛날 이조 시대에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대신 왕위에 오를 때였습니다. 이 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성삼문(成三問) 이하 여러 집현전 학사들이 죽음으로써 항거하였지만 그들과 함께 동문 수학한 신숙주(申淑舟)만은 변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여름에 하루만 지나면 쉬어 못 먹게 되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지가 견고한 사람, 변절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평강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한 번 마음 먹은 것을 끝까지 지키는 그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은 평안을 허락하십니다.

평강은 승리의 열매입니다. 죄를 이기고 나약함을 이기고 교만과 게으름을 극복하고 변절을 이겨서 얻어지는 평강입니다. 이 평안은 이제 아무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주님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의 평강으로 지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한결같고 변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평강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기도:신(信)을 지키며 의(義)를 지키며 심지가 견고하여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자를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의 불신과 변절과 나약함을 용서하여 주옵시고, 새로운 은총을 더하여 굳게 믿음을 지킬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어떠한 손해를 지불하고라도 의에 서게 하시고, 심지가 견고해서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생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주시는 평안을 체험하고 주의 평안 안에 살고 주의 평강을 축복으로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평안과 위로가 없는 이 세대에서 주의 평강 안에 사는 축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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