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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기다리는 자(이사야 30장 15절~22절)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한고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한고로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니,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영(嶺) 위의 기호같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 그가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영국의 소설가 허버트 웰스(Herbert G.Wells) 의 단편소설「대주교의 죽음」을 읽어보신 분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대략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누구나 기도할 때에는 그 허두(虛頭)를 자기 나름의 독특한 언어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대주교는 아침저녁의 미사에서 날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렇게 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평생을 늘 기도해오던 중, 어느 날 저녁에도 예외 없이 기도를 드립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그때였습니다. 바로 하늘로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오냐, 왠일이냐? 무슨 일인지 이야기해보아라." 순간, 대주교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심장마비를 일으켜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주교는 늘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면서도 응답이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응답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실제로 응답을 듣게 되니 깜짝 놀라 죽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이 순간, 어떠한 자세로 기도하며 어떠한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들리우고 응답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습니까? 우리의 믿는 바로는,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십니다. 그는 창조주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는 능력이 많으십니다. 지혜로 충만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비밀을 알고, 우리 마음의 모든 은밀한 것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지극한 사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많은 문제들이 산적(山積)해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전쟁과 부조리와 모순과 혼란과 불안이 그치지 않습니다.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일들로 섬찍합니다. 파국으로 치닫는 것 같고 이대로 망해버리고 말 것만 같은 불안에 마음 편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위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애타게, 목마르게 기다립니다. 이 기다림, 대망(待望), 소망---이것이야말로 믿음의 뿌리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 심한 한발(旱魃)에 단비를 기다리듯, 주의 위로와 주의 공의와 주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되고 주의 능력이 속히 발현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림에 지쳐 때로 원망을 합니다. 도발적으로 시비도 벌입니다. 누구 탓이냐고 포악을 내뱉고, 정당한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편법(便法)을 취하기도 합니다. 마침내 더 지치고 절망하여 좌절합니다. 실의에 빠져 자학하며 세상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고 울부짖기도 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응답을 주십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18절)"---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기에 지쳐버린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고 말씀해줍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다 드러내어 심판하실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때가 너무 오래 지체되고 있다는 것을 안타까워할 뿐입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며 언제 이런 일이 있겠는가 답답한 것입니다. 우리는 확실한 심판을 믿습니다. 확실한 구원도 믿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지연(遲延)의 원인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사정을 모르시기 때문이 아니며, 구원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문제의 원인은 분명히 우리들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지연하심이 바로 사랑이요 긍휼이요 은혜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8-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하나님은 오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순간에 역사를 멈추시고 모든 불의를 다 드러내신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순간에 우리의 호흡이 멎고 우리의 임종이 닥친다고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서게 되겠습니까? 지금 이대로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까? 지금의 이 모습 이대로 설 수 있습니까? 그렇기에 주님은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할 말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나님, 더 오래 기다려주시옵소서." 누가복음 13장에 이런 우리의 상태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8-9절)." 제발 일년만 더 참아주세요, 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도록 힘쓰겠습니다, 일년만 기다려주세요, 이렇게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도 좋고 모순도 부조리도 모두 감당할 터이니 제발 나의 믿음이 바로 서고 내가 하나님의 일을 무엇인가 조금이나마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때까지 조금더 기다려주십시오---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어찌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할 수 있겠습니까? 구원과 심판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구원이 있을 때에 심판이 있고, 죄악을 심판하실 때에 의인에게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나가야 하겠습니까? 지연하심,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오래 기다려주심에 대하여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긍휼이 있고 용서가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밖에 서서 아들을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18절 말씀을 읽어보십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여호와의 기다리심의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해보면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육체의 정욕과 정열이 사라지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정욕에 마음을 비우게 하십니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욕심이란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지, 세상의 정욕이 얼마나 무상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장에는 옳다 그르다 아무리 변론을 해보아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던 일도 세월이 가고 시간이 흐르면 격한 마음이 가라앉게 되는 것을 경험해보지 않았습니까?
둘째,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 자신만을 생각하고 세상에만 가치를 두고 현재에 집착하고 자기 명예에 착념(着念)하는 태도에서부터 돌이켜,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생각의 촛점을 옮길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고 있을 때에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있을 때에는 나 자신을 성찰할 여유가 없습니다. 나의 모습이 얼마나 완악해지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볼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셋째, 경솔함에서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서두르는 일에는 언제나 실수가 따릅니다. 마르틴 루터가 말했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두 시간씩 기도한다. 바쁘고 급한 날에는 더 오래 기도한다." 그렇습니다. 바쁜 일, 급한 일에는 실수하기 쉬우니 더 오래 기도해야 합니다. 서두를 것 하나도 없습니다. 말하는 것을 더디 합시다. 대답에 너무 성급하지 맙시다. 급한 대화 치고 경솔하지 않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격해지기 십상입니다. 경솔한 말은 분노를 사고 경솔한 대답은 불화를 일으킵니다. 가슴을 치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조용히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경거망동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다리십니다. 기다리시되 언제까지 기다리십니까? '우리가 어떠한 수준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시는가? 언제 은혜를 주시며 언제 구원하시는가?'---이러한 초조와 불안과 시비와 원망마저 다 사라져버릴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의미심장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한 고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16절)"---도망하는 마음, 기피하는 마음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입니다. 앞뒤 분별이 없습니다. 내가 지금 당장 이렇게 하면 내 후손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 다음에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라도, 교회도, 세상도, 관심 밖의 문제입니다. 오로지 나 하나만 살아보겠다고, 오로지 나 하나만 어려움을 모면해보겠다고, 우선 당장에 이 사건 하나만을 피해보겠다고 도망합니다. 미래가 없는 답답한 이기적 생각, 자기만을 구원해보겠다는 자구책, 이기적인 모면책, 피해 의식, 도피 의식, 궁여지책에서 문제가 생겨납니다. 이렇게 되고 보면 그는 비겁해지고 무능해지고 한심스런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람을 무엇이라고 평합니까?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17절)." 이처럼 힘이 없고 무능한 인간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정녕 구원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시기와 조건은 어떠합니까? 성경은 명명백백히 구원의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돌이켜 안연히 처(處)하라'고 합니다(15절). 그리하여야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돌이킨다는 말은 하나님께로 향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영역본 성경에는 '회개하라'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회개하라, 그리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라, 주님을 기다리라, 그리할 때에 구원이 있으리라고 말씀함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공동번역성서」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돌려 진정하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다."
큰일났다고 법석대지 마십시다. 위기가 왔다느니, 세상이 다되었다느니, 망했다느니 하면 정말 망하게 됩니다. 안연히 거하십시다. 놀라지 맙시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의 할 일은 다만 회개하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진정하는 것입니다. 격동하는 마음, 격한 마음을 누릅시다. 그리고 평화로운 마음, 고요한 마음을 가지십시다. 그리할 때에 주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또한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15절).「공동번역성서」를 다시 한번 인용해봅시다. "고요히 믿고 의지하는 것이 힘을 얻는 길이다." 우리가 무기력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번뇌에 차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항상 요동하고 두려움에 가득차 있는데 거기에서 무슨 힘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불신 또한 아주 큰 문제입니다. 믿지 못하고야 더는 어찌해볼 여지가 없습니다. 서로를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어떤 영역본은 이 구절을 'calm and trust'로 번역합니다.
'고요하라. 그리고 의지하라.'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이렇게 될 때에 다시 힘을 얻게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구원과 힘을 얻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길이 비록 답답하고 괴로우며 초조하고 불안해도, 길은 정도(正道)를 걸어야 합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하나님 됨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살피며 회개하고 고요함과 평화를 찾아야 합니다. 비판이나 시비나 변론이나 변명은 이제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다만 나 자신을 살피며 회개하는 일, 진정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일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경륜과 뜻과 심판과 사랑을 믿을 뿐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그 뜻을 기다리며, 그의 능력과 그의 지혜를 의지합니다.
아홉 살짜리 어린이가 중대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의 중대성을 아는 어른들은 몹시도 불안했습니다. 아이는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진하기만 합니다. 수술대에 아이를 뉘어놓고 아버지가 아이를 위로합니다. "얘야, 네가 이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잠깐동안 깊은 잠을 자야 한단다. 아무 걱정 말고 푹 자거라." 마취하기 전에 이렇게 타일렀더니 아이가 대답을 합니다.
"아빠, 그러면 잠들기 전에 잠자리 기도드려야지요." 아이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이제 잠잘 시간이에요. 제가 자는 동안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해주시고, 나를 위해 수고하시는 이 의사선생님도 사랑해주세요. 그리고 평안히 잘 잤다가 잘 깨게 해주세요." 고요하게 아주 평화로운 얼굴로 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몹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수술이 진행될 동안 아버지는 내내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아이의 수술을 집도(執刀)한 의사 역시 교인이었답니다. 삼십 년 의사 생활을 하는 동안 이처럼 고요하게 기도 드려본 일이 없었는데, 그후 그 역시 하나님 앞에 고요히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격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의 마음을 낮추십시다. 고요하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입니다. 군인 하나가 중상을 입고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군목을 불러 마지막 부탁을 합니다. 이름과 주소가 적힌 종이 한 장을 쥐어줍니다. "내가 죽거든 꼭 이분께 편지해주세요. '아무개는 그리스도인으로 죽었다,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써주세요." 이윽고 편지의 답장이 도착하였습니다. 그분은 죽은 군인의 주일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는 그 동안 교회를 떠나 생활했다가 죽음에 이르러서 선생님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이 선생님의 답장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쳐왔지만 도무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제 말을 하나도 듣지 않고, 그저 어린 날에 한번쯤 겪는 일의 하나로 교회에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도중에 믿지 않는 아이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저는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도무지 가르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어 한달 전에 주일학교 교사직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편지를 받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절대로 헛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시 이 교사직을 맡겠습니다. 그 동안의 제 잘못을 회개합니다."
지금 뿌리는 이 씨앗이 당장에는 열매로 눈앞에 드러나지 않지만, 어디에선가 자라고 반드시 거두게 됩니다. 내가 수고한 일이 어디에선가 열매를 맺습니다. 내 눈앞에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 앞에 숨겨졌다고 해서 그 죄가 가리워진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선가 하나님은 심판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이것을 감사하며 우리도 또한 열심히 그분을 기다리십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를 기다리는 자세가 바르게 될 때까지, 성경적이요 말씀적이요 겸손하고 고요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시며 은혜는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는 아주 귀한 종말론적 은혜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는 다시 통곡하는 일이 없으리라, 기도가 응답되리라, 하나님께서 친히 스승이 되어주시리라, 말씀이 들리리라, 좌로 치우치든지 우로 치우칠 때에 '이것이 정도(正道)이다'하는 음성이 귀에 쟁쟁하게 들려지리라---들리지 않는다면 내 마음에 고요함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고요함이 없을 때에 내게 들리는 말씀은 없습니다. 내 마음이 증오심으로 격동할 때에 들리는 음성이 있다면 그것은 사단의 음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고요함을 찾고 주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주님은 분명하게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에게 약속해주십니다---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무릇 기다리는 자(이사야 30장 15절~22절)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한고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한고로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니,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영(嶺) 위의 기호같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 그가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영국의 소설가 허버트 웰스(Herbert G.Wells) 의 단편소설「대주교의 죽음」을 읽어보신 분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대략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누구나 기도할 때에는 그 허두(虛頭)를 자기 나름의 독특한 언어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대주교는 아침저녁의 미사에서 날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렇게 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평생을 늘 기도해오던 중, 어느 날 저녁에도 예외 없이 기도를 드립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그때였습니다. 바로 하늘로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오냐, 왠일이냐? 무슨 일인지 이야기해보아라." 순간, 대주교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심장마비를 일으켜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주교는 늘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면서도 응답이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응답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실제로 응답을 듣게 되니 깜짝 놀라 죽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이 순간, 어떠한 자세로 기도하며 어떠한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들리우고 응답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습니까? 우리의 믿는 바로는,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십니다. 그는 창조주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는 능력이 많으십니다. 지혜로 충만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비밀을 알고, 우리 마음의 모든 은밀한 것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지극한 사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많은 문제들이 산적(山積)해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전쟁과 부조리와 모순과 혼란과 불안이 그치지 않습니다.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일들로 섬찍합니다. 파국으로 치닫는 것 같고 이대로 망해버리고 말 것만 같은 불안에 마음 편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위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애타게, 목마르게 기다립니다. 이 기다림, 대망(待望), 소망---이것이야말로 믿음의 뿌리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 심한 한발(旱魃)에 단비를 기다리듯, 주의 위로와 주의 공의와 주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되고 주의 능력이 속히 발현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림에 지쳐 때로 원망을 합니다. 도발적으로 시비도 벌입니다. 누구 탓이냐고 포악을 내뱉고, 정당한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편법(便法)을 취하기도 합니다. 마침내 더 지치고 절망하여 좌절합니다. 실의에 빠져 자학하며 세상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고 울부짖기도 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응답을 주십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18절)"---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기에 지쳐버린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고 말씀해줍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다 드러내어 심판하실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때가 너무 오래 지체되고 있다는 것을 안타까워할 뿐입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며 언제 이런 일이 있겠는가 답답한 것입니다. 우리는 확실한 심판을 믿습니다. 확실한 구원도 믿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지연(遲延)의 원인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사정을 모르시기 때문이 아니며, 구원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문제의 원인은 분명히 우리들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지연하심이 바로 사랑이요 긍휼이요 은혜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8-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하나님은 오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순간에 역사를 멈추시고 모든 불의를 다 드러내신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순간에 우리의 호흡이 멎고 우리의 임종이 닥친다고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서게 되겠습니까? 지금 이대로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까? 지금의 이 모습 이대로 설 수 있습니까? 그렇기에 주님은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할 말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나님, 더 오래 기다려주시옵소서." 누가복음 13장에 이런 우리의 상태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8-9절)." 제발 일년만 더 참아주세요, 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도록 힘쓰겠습니다, 일년만 기다려주세요, 이렇게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도 좋고 모순도 부조리도 모두 감당할 터이니 제발 나의 믿음이 바로 서고 내가 하나님의 일을 무엇인가 조금이나마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때까지 조금더 기다려주십시오---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어찌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할 수 있겠습니까? 구원과 심판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구원이 있을 때에 심판이 있고, 죄악을 심판하실 때에 의인에게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나가야 하겠습니까? 지연하심,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오래 기다려주심에 대하여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긍휼이 있고 용서가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밖에 서서 아들을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18절 말씀을 읽어보십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여호와의 기다리심의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해보면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육체의 정욕과 정열이 사라지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정욕에 마음을 비우게 하십니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욕심이란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지, 세상의 정욕이 얼마나 무상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장에는 옳다 그르다 아무리 변론을 해보아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던 일도 세월이 가고 시간이 흐르면 격한 마음이 가라앉게 되는 것을 경험해보지 않았습니까?
둘째,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 자신만을 생각하고 세상에만 가치를 두고 현재에 집착하고 자기 명예에 착념(着念)하는 태도에서부터 돌이켜,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생각의 촛점을 옮길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고 있을 때에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있을 때에는 나 자신을 성찰할 여유가 없습니다. 나의 모습이 얼마나 완악해지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볼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셋째, 경솔함에서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서두르는 일에는 언제나 실수가 따릅니다. 마르틴 루터가 말했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두 시간씩 기도한다. 바쁘고 급한 날에는 더 오래 기도한다." 그렇습니다. 바쁜 일, 급한 일에는 실수하기 쉬우니 더 오래 기도해야 합니다. 서두를 것 하나도 없습니다. 말하는 것을 더디 합시다. 대답에 너무 성급하지 맙시다. 급한 대화 치고 경솔하지 않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격해지기 십상입니다. 경솔한 말은 분노를 사고 경솔한 대답은 불화를 일으킵니다. 가슴을 치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조용히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경거망동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다리십니다. 기다리시되 언제까지 기다리십니까? '우리가 어떠한 수준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시는가? 언제 은혜를 주시며 언제 구원하시는가?'---이러한 초조와 불안과 시비와 원망마저 다 사라져버릴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의미심장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한 고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16절)"---도망하는 마음, 기피하는 마음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입니다. 앞뒤 분별이 없습니다. 내가 지금 당장 이렇게 하면 내 후손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 다음에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라도, 교회도, 세상도, 관심 밖의 문제입니다. 오로지 나 하나만 살아보겠다고, 오로지 나 하나만 어려움을 모면해보겠다고, 우선 당장에 이 사건 하나만을 피해보겠다고 도망합니다. 미래가 없는 답답한 이기적 생각, 자기만을 구원해보겠다는 자구책, 이기적인 모면책, 피해 의식, 도피 의식, 궁여지책에서 문제가 생겨납니다. 이렇게 되고 보면 그는 비겁해지고 무능해지고 한심스런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람을 무엇이라고 평합니까?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17절)." 이처럼 힘이 없고 무능한 인간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정녕 구원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시기와 조건은 어떠합니까? 성경은 명명백백히 구원의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돌이켜 안연히 처(處)하라'고 합니다(15절). 그리하여야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돌이킨다는 말은 하나님께로 향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영역본 성경에는 '회개하라'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회개하라, 그리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라, 주님을 기다리라, 그리할 때에 구원이 있으리라고 말씀함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공동번역성서」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돌려 진정하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다."
큰일났다고 법석대지 마십시다. 위기가 왔다느니, 세상이 다되었다느니, 망했다느니 하면 정말 망하게 됩니다. 안연히 거하십시다. 놀라지 맙시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의 할 일은 다만 회개하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진정하는 것입니다. 격동하는 마음, 격한 마음을 누릅시다. 그리고 평화로운 마음, 고요한 마음을 가지십시다. 그리할 때에 주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또한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15절).「공동번역성서」를 다시 한번 인용해봅시다. "고요히 믿고 의지하는 것이 힘을 얻는 길이다." 우리가 무기력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번뇌에 차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항상 요동하고 두려움에 가득차 있는데 거기에서 무슨 힘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불신 또한 아주 큰 문제입니다. 믿지 못하고야 더는 어찌해볼 여지가 없습니다. 서로를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어떤 영역본은 이 구절을 'calm and trust'로 번역합니다.
'고요하라. 그리고 의지하라.'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이렇게 될 때에 다시 힘을 얻게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구원과 힘을 얻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길이 비록 답답하고 괴로우며 초조하고 불안해도, 길은 정도(正道)를 걸어야 합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하나님 됨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살피며 회개하고 고요함과 평화를 찾아야 합니다. 비판이나 시비나 변론이나 변명은 이제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다만 나 자신을 살피며 회개하는 일, 진정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일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경륜과 뜻과 심판과 사랑을 믿을 뿐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그 뜻을 기다리며, 그의 능력과 그의 지혜를 의지합니다.
아홉 살짜리 어린이가 중대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의 중대성을 아는 어른들은 몹시도 불안했습니다. 아이는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진하기만 합니다. 수술대에 아이를 뉘어놓고 아버지가 아이를 위로합니다. "얘야, 네가 이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잠깐동안 깊은 잠을 자야 한단다. 아무 걱정 말고 푹 자거라." 마취하기 전에 이렇게 타일렀더니 아이가 대답을 합니다.
"아빠, 그러면 잠들기 전에 잠자리 기도드려야지요." 아이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이제 잠잘 시간이에요. 제가 자는 동안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해주시고, 나를 위해 수고하시는 이 의사선생님도 사랑해주세요. 그리고 평안히 잘 잤다가 잘 깨게 해주세요." 고요하게 아주 평화로운 얼굴로 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몹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수술이 진행될 동안 아버지는 내내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아이의 수술을 집도(執刀)한 의사 역시 교인이었답니다. 삼십 년 의사 생활을 하는 동안 이처럼 고요하게 기도 드려본 일이 없었는데, 그후 그 역시 하나님 앞에 고요히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격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의 마음을 낮추십시다. 고요하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입니다. 군인 하나가 중상을 입고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군목을 불러 마지막 부탁을 합니다. 이름과 주소가 적힌 종이 한 장을 쥐어줍니다. "내가 죽거든 꼭 이분께 편지해주세요. '아무개는 그리스도인으로 죽었다,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써주세요." 이윽고 편지의 답장이 도착하였습니다. 그분은 죽은 군인의 주일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는 그 동안 교회를 떠나 생활했다가 죽음에 이르러서 선생님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이 선생님의 답장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쳐왔지만 도무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제 말을 하나도 듣지 않고, 그저 어린 날에 한번쯤 겪는 일의 하나로 교회에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도중에 믿지 않는 아이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저는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도무지 가르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어 한달 전에 주일학교 교사직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편지를 받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절대로 헛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시 이 교사직을 맡겠습니다. 그 동안의 제 잘못을 회개합니다."
지금 뿌리는 이 씨앗이 당장에는 열매로 눈앞에 드러나지 않지만, 어디에선가 자라고 반드시 거두게 됩니다. 내가 수고한 일이 어디에선가 열매를 맺습니다. 내 눈앞에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 앞에 숨겨졌다고 해서 그 죄가 가리워진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선가 하나님은 심판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이것을 감사하며 우리도 또한 열심히 그분을 기다리십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를 기다리는 자세가 바르게 될 때까지, 성경적이요 말씀적이요 겸손하고 고요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시며 은혜는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는 아주 귀한 종말론적 은혜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는 다시 통곡하는 일이 없으리라, 기도가 응답되리라, 하나님께서 친히 스승이 되어주시리라, 말씀이 들리리라, 좌로 치우치든지 우로 치우칠 때에 '이것이 정도(正道)이다'하는 음성이 귀에 쟁쟁하게 들려지리라---들리지 않는다면 내 마음에 고요함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고요함이 없을 때에 내게 들리는 말씀은 없습니다. 내 마음이 증오심으로 격동할 때에 들리는 음성이 있다면 그것은 사단의 음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고요함을 찾고 주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주님은 분명하게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에게 약속해주십니다---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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