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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말씀을 주소서(에베소서 6장 10절~20절)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을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火箭)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구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使臣)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유럽을 여행하면서 여러 대도시를 찾을 때에는 흔히들 그곳의 관광명소를 찾게 됩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간에 관광명소 중 가장 우선으로 손꼽는 곳이 바로 세운 지 수백 년된,아주 오래된 성당들입니다. 그곳에 가면 특별히 석상, 동상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옛 성자들과 믿음의 조상들에 대한 그림이 나 초상들도 있지마는 무엇보다 그들의 모습을 조각해놓은 석상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서 도대체 누가 누구인지 구별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 밑에 이름이 씌어 있는 것도 있지만 이름이 안씌어 있는 것도 많습니다. 우리가 그 옛날 어른들을 언제 보았다고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손에 커다란 열쇠를 들고 있는 양반은 베드로입니다. 그 열쇠는 천국열쇠입니다. 큰 열쇠를 하나 들고 있는 석상은 무조건 베드로입니다. 또 커다란 칼을 들고 있는 석상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칼을 손에 쥘 때에는, 밑을 향해 들고 있을 때도 있고, 위를 향해 들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군인처럼 칼을 번쩍 들고 있는 석상입니다. 그는 사도 바울입니다. 열쇠나 칼은 그들의 중요한 상징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의 사도였습니다. 소아시아, 로마, 그리고 서바나(스페인)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그 옛날, 교통도 불편하고 어려운 때에, 그 숱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 당시로 말하자면 온 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생각한 말씀, 이것은 곧 검입니다. 말씀을 검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전도여행도 하나의 싸움이었습니다. 이것은 세상 어떤 권력과 싸우는 것도 아니고, 세상정욕과 싸우는 것도 아니고, 흔히 그러하듯 자기와 더불어 싸우는 것도 아니고, 혹은 자기 욕심같은 것과 싸운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까짓 자기 욕심 하나 정복하자고 일생을 다 바치는 그런 유의 사도 바울도 아닙니다.
바울이 싸우는 대상이 무엇인지 오늘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12절)"---우리가 씨름하는 대상은 악의 영입니다. 악령과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세계에서 악한 세력이 세상을 향하여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고, 또 악한 세력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말씀의 검으로 다스려서, 그들로 하여금 자유케 하고 구원받게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이 싸움에서 절대적 무기는 오직 말씀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비유로써 말씀합니다. 악령의 지배 하에 있는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전신갑주를 입어라, 머리끝서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무장을 해야 한다,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도 이 본문을 다 읽으신바, 그 무장은 이렇습니다.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으로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를 쓰라'---온몸을 갑주로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방어적이고 소극적입니다. 공격적인 무기는 오직 하나입니다. 성령의 검--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고 하지요? 뒤로 물러서면서 방어하려고만 하다가는 끝내 못견딥니다. 결국은 공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무기는 오로지 말씀 하나뿐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생각한 신앙이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의 검이었습니다. 말씀의 검이 곧 사도 바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십 일 동안 금식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아주 어려운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전도여행 때에도 많은 시험이 있었고 많은 질문과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전부 말씀으로 이기십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많이 기억하셨던 것 같습니다. 요절을 많이 외셨던 것 같아요. 옛날에는 성경을 가지고 다녔던 것도 아닐 텐데,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많이 알고 계셔서 그 때마다 척척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성경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 : 4)"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마 4 : 4)"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 : 10)"----이렇게 전부 성경을 인용하시어 말씀으로 대답하심으로 승리하시는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말씀은 구원의 절대적 요소였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오직 말씀을 들음으로써만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듣지 못한다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괌 섬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지금은 거의 다 잊어버렸습니다마는 딱 한 가지만은 제 마음에 깊은 충격을 주었기에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괌의 중앙쯤에 보면 산언덕에 굴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을 보려고 일부러 가보았습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요꼬이라는 일본군인 한 면이 있었는데, 전투 중에 자기 부대의 사람들이 거의 죽고, 생존자는 적에게 항복을 했답니다.
그런데 요꼬이는 총 하나를 가지고 이 굴로 도망을 쳤습니다. 거기에 들어가서 무려 27년 동안을 혼자 살았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비행기가 오르락내리락하며 날아가니까 전쟁이 계속되는 줄로만 알고, 전시에 대비하여 군인들이 훈련하느라 빵빵 총을 쏘니까 그 소리를 듣고는 '이거, 전쟁이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구나'하고 나무열매를 따먹으면서 그렇게 27년을 살았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쟁이 끝났다"하는 한마디 소식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게 27년 동안을 짐승처럼 살다가 결국 요꼬이는 그 굴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세요.
다시 세상에 나온 그가 얼마나 후회하였겠습니까? 어쨌든 그가 가지고 있던 유품이 그곳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복음을 듣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쌍한 일입니까? 복음 한마디를 제때에 듣지 못함으로 그는 차차 죽어갑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결정적인 말씀입니다. 다시 로마서 10장 14절을 보세요.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들음이 중요하고 들려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은 절대 우선 입니다.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대결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빵과 말씀의 대결입니다. 마르크스는 '먹는다고 하는 문제, 경제 문제만 해결 다른 모든 문제는 절로 해결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모든 문제의 근본은 경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공산주의가 끝났습니다. 이에 반하여 기독교는 이렇습니다. 사십 일 굶어서 지금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놓고도 그래도 말씀이 먼저입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빵을 주자는 것이 아닙니다. 빵이 먼저가 아닙니다. 아직도 말씀이 먼저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십 일을 금식하신 바로 그 처지에서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급하고 아무리 절박해도 말씀이 먼저라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저는 어느 부활절 때에 모라비안 교파의 목사님 댁에 가서 한 일주일 있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거기서 중요한 것을 하나 보았습니다. 그 목사님 댁의 어린 자녀들이 아침에 식사하고 학교 가고, 저녁에 들어와서 또 식사하고 놀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바빠서 막 뛰어들어와 허겁지겁 밥을 먹으려고 해도, 거기에 놓은 성경책의 말씀 한 절을 어디든 딱 보고 난 다음에야 부모님들이 식사를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 절이라도 먹지 않고는 절대 육신의 양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꼭 성경을 한 절 읽고, 그리고야 기도하고 식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말씀이 모든 것보다 최우선이라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말씀을 전해야 했고, 말씀을 들려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씀의 삼중형태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선포된 말씀, 기록된 말씀, 그리고 성육신된 계시된 말씀"--'초대교회에서 선포된 말씀, 그것이 기록된 것이 성경말씀, 그 본질은 하나님의 계시로 오신 인격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말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그 인격적인 말씀이 어디서 역사하고 있느냐-칼 바르트는 유명한 격언을 남겼습니다. "Would of God waits for us in the Bible"--"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여러분, 내가 성경을 읽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말씀하시는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이 바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성경 안에서 성경 자신이 친히 내게 말씀합니다. 내가 성경을 읽어 가는 동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나와 함께 하십니다. 늘 읽던 성경입니다. 늘 알던 성경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 성령 안에서 강하게 역사하사 생명력으로 나에게 다가옵니다. 바로 그것이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장 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서 살았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도 바울을 고용하신 것입니다. 강권으로 말입니다. 말씀을 읽고 말씀 안에서 말씀의 능력에 붙들릴 때에,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어요. 결국은 말씀을 온천하에 전하고 다닙니다. 이것이 바울입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말씀에 붙들리어 사는 그 모습을 다시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바울에 있어서는 소위 exalted Christ--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 그리고 전파되는 케리그마(복음서의 좋은 소식)를 동격시하고 함께 생각한다는 신비가 있습니다. 바울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에 보면, 성령의 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동격시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렇게 자기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 그 속에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성령 안에서 친히 역사 하시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놀라운 신비, 말씀의 능력을 그는 매일매일 체험하면서 그 말씀에 붙들리어 살아갔던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살아 있다(The Bible is alive). 그래서 성경은 나에게 말씀하신다. 말씀은 발이 있다. 그래서 나를 따르신다. 말씀은 손이 있다. 그래서 나를 붙드신다. 말씀은 살아 역사 한다." 말씀이 나를 붙들고, 말씀이 나를 보호하고, 말씀이 나를 인도한다---이것을 피부로, 몸으로 항상 체험하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묘한 말씀입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19절)"---나에게 말씀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번 더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기도 제목이 되는 것입니까? 바울은 이미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줄줄이 외고 있습니다. 말씀을 수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바울이니 지식을 도와달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말씀을 주사"---무슨 뜻입니까? 무엇을 더 알고, 무엇을 더 깨닫게 해주십사 하는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되게,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역사가 바울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신비스러운 말씀이자 현실적인 말씀입니다.
곧이어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19절)." 복음의 비밀, 복음의 mystery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의 비밀이란 무엇입니까? 곧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로마서 1장 2절부터 보면 "이 복음은……"하고 줄줄이 설명을 합니다.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복음이요, 복음의 비밀이요, 복음의 중심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그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그는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신비로운 말씀을 합니다. 그런고로 복음의 비밀이란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그리스도 안에 역사 하시는 놀라운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진노가 그 안에 나타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완성되는 그 오묘한 비밀을 그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비밀과 그 핵심은 십자가입니다'---오직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에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어느 각도에서 읽어야 합니까? 예를 들어 전도서에 보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맞아, 헛될 뿐이야'라고만 생각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것이 헛될 수밖에요. 그런고로 주 예수를 믿으라---이렇게 생각해야 성경을 바로 읽는 것입니다. 헛되다---그렇게만 생각하고 만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입니까? 성경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어야 하고 십자가 중심으로 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복음의 비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비밀을 말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의 본문은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합니다. 담대히--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뭐 죽을 것이 겁이 나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군인이 무섭고, 죽음이 무섭고, 죄가 무섭고, 그래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두려움이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2장 3절에 있는 말씀을 읽고 잘 생각해보세요. 바울이 과연 무엇을 두려워했습니까?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사도 바울이 그렇게 벌벌 떨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핍박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 : 4, 5)." 복음을 전하면서 어느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지식을 의지하게 되고, 철학을 의지하게 되고, 인간을 의지하게 된다면, 그 때에 벌써 영력은 떠나고 그는 벌벌 떠는 인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를 버리고 오직 십자가의 능력만을, 인간의 말재주를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할 때에 담대해지고,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부탁합니다. '너희가 나를 위하여 기도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소서 할 것이요,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을 말하게 해달라고 할 것이요, 인간의 지혜나 인간의 철학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여 용기있게,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끗하게 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그렇게 기도하기를 에베소교회에 부탁합니다.
사도행전 1장, 2장에 있는바 오순절에 성령이 충만했던 초대교회를 보세요. 충만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함으로써 모르던 것을 알게 됩니까? 모르던 것을 깨닫게 됩니까? 깨끗하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신앙적 용기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은 이미 다 들었던 것이요, 부활하신 예수도 만나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벌벌 떨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성령이 임하실 때에 말씀이 말씀되고,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말씀과 함께 적용될 때에 용기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두려울 것이 없어요. 그래서 담대하게 기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말씀은 곧 생명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말씀을 들으면서 생명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그런고로 말씀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우리도 같은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제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옵소서. 그 생명력을 제게 주시옵소서.
그래서 말씀으로 말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말씀 안에 있는 그 복음의 비밀을 알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고 아주 담대하게 십자가만을 전할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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