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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듣는 사람(사도행전 10장 40절~48절)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인간은 구조적으로 세 요소로 되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몸과 혼과 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에게 생리학적 존재가 있습니다. 바이얼라지컬 비잉(biological being)입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에게 이성이 있고 이성의 능력에 따라서 비판도 하고 추리도 합니다. 바로 철학적 존재 ---- 필로소피컬 비잉(Philosophical being)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야 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가져야만 하는 영적 존재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존재'라고도 이름합니다. 시얼라지컬 비잉(theological being) 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 존재가 있어서 이것이 하나의 인격으로 종합된 구조를 가지고 인간은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쪽이 주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가 주도하는 삶을 삽니다. 자나깨나 육체적 욕망에 끌려 삽니다. 육체 혹은 육욕주도적인 인간이라 하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철저하게 이성주도적인 인간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먹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일로써 행복합니다. 즉 철학적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존재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될 때에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사랑을 느끼며,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참된 평화를 느끼고 힘을 얻습니다. 이런 사람은 영 주도적인 인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몸은 분명히 땅에서 나는 식물을 먹고 삽니다. 혼은 교육을 통해서 지식과 지혜를 먹고 삽니다. 계속 공부하지 않고 계속 지혜를 추구하지 않으면 어느 사이에 스스로가 동물적인 존재로 전락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많은 지식, 많은 교양을 얻어야 합니다.
영은 하나님께로서 오는 말씀을 먹고 삽니다. 예수님께서 광야로 나가 시험을 받으실 때에 마귀와의 대결에서 귀중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사람이 육체적인 존재가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영적 존재라고 하는 것을 단적으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먹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영양실조(營養失調)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양이 실조되면 여러 가지 병을 얻게 됩니다. 건강을 잃어버릴 때에 모든 것이 잘못되어 나가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영양실조, 참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영양 불균형도 또한 문제거리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보아도 몸이 약한 아이들은 하나같이 편식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1학년생일 때에 고아원에 가서 고아들과 몇 달 동안 살아본 일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영양 불균형으로 눈이 잘 안 보여 장님처럼 더듬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그 원인을 알아봐서 그에 따라 배급으로 주던 비타민이 있었습니다. 색깔이 빨간 비타민 정인데, 이것을 그 아이들에게 먹였더니 이틀이 지나자 눈을 번쩍 뜹니다. 비타민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무엇이건 먹게 됩니다. 허하게 되면 입맛이 더해져서 평소에 가리던 음식도 달아보이는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나라 대통령께서 영국을 여행하시다가 한국사람은 개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영국인들이 데모를 하는 바람에 난처했다고 합니다.
워낙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보니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만나면 기분이 나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남의 나라 습관이나 문화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비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월남전에서 포로된 미군들이 포로 교환 때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포로되어 있을 때에 견디기 어려우니까 쥐를 잡아 먹고, 뱀을 잡아 먹고, 고양이도 잡아 먹었다고 합니다. 구워 먹은 것도 아니고 날로 먹었답니다. 배가 고프고보면 이처럼 개고 고양이고 간에 닥치는대로 먹는 것입니다.
육신의 굶주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신적으로도 허하고, 영적으로 허한 사람이 되면 이 또한 마구잡이로 먹어치우게 됩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에 빠지고, 그릇된 사상에 빠지고,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이단 사상에까지도 천방지축 빠져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허해서 그렇습니다. 좋지 않은 음식이 아니라 독소(毒素)를 먹는 것입니다.
요새 사람들은 죽어도 시체가 썩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말까지 생겨났습니다. 방부제 섞인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렇다나요.
정말 그렇습니다. 독소를 먹는다는 것은 예사로운 문제가 아닙니다. 배고프면 먹어야 하지만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풍부한 영양가요, 둘째는 적당해야 합니다.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먹지 말 것이며 내 몸에 꼭 필요한 만큼 섭취해야 합니다. 남이 좋아한다고 내 몸에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내게 필요한 것을 적당하게 먹는 것입니다. 셋째는 맛있게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맛을 내어야 합니다. 같은 음식이라도 맛을 내고 또 맛있게 먹고 감사함으로 먹는 데에 건강의 비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영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 보면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출생하는 것입니다. 듣지 않는 복음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반드시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옥토라 하더라도 씨가 뿌려지지 않고 자라는 법은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말씀 ---- 이 객관적 계시의 역사가 아니고는 결코 생명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 안에서 우리는 태어납니다. 그 다음에는 말씀을 먹고 성장합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양육됩니다.
학자들은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두고 '제2의 오순절'이라 별명을 붙여 일컫기도 합니다. 첫 번째 오순절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성령 강림사건이 있은 그 오순절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사람들에게 나타났던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것은 가이사랴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전적으로 이방인에게 나타난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유대 사람들이 보고 '이방사람들도 성령을 받는다'며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성령받는데 왜 놀랍니까? 저들의 생각에는 '이방사람들이 성령을 받다니' 뜻밖이어서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고넬료는 분명 이방사람입니다. 로마 군인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고넬료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로마 군인으로서 중동 지구 예루살렘 근방에 와서 식민지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로마군의 장교라면 당연히 저희 황제에게 충성할 것이 아닙니까? 로마 나름의 우상이 있고 로마의 문화가 있고 로마의 법이 있고 로마의 질서가 있습니다, 그 로마를 세계에서 제일 높이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긍지에 살아가는 이 로마 장교가 종교에 관한 한은 자기네의 속국이지마는 예루살렘 종교가 옳다고 믿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바른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서 자기네 속국의 종교인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갸륵하지 않습니까?
돈 몇푼 가졌다고 교만떠는 사람들을 흔히 봅니다. 어쩌다 인도 받아서 교회에 나갔다가 보아하니 워낙 가난한 사람들, 너저분한 사람들만 모였다나요? 그래서 못 나가겠다고 하더랍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에 비하면 이 고넬료는 얼마나 영적 인격이 훌륭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2절로 보면 온 집으로 더불어 기도하고 구제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사람입니다. 구약적인 신앙인으로서 거의 완벽하게 경건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서 천사를 만나게 해주십니다. 천사의 음성을 듣고 천사의 지시대로 그는 욥바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을 청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말할 수 없이 감격하곤 합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를 비교해봅시다.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입니다. 턱수염이 더부룩한 영감님이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습니다. 시쳇말로 볼품없는 인간이지요.
높은 자리에 있는 고넬료가 이 볼품없는 촌사람을 모셔옵니다.
모셔오되 예를 다합니다. 깍듯이 정중합니다. '나는 로마 황제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가. 하물며 하나님의 종을 영접하는 일임에랴. 더욱더 우러러 영접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온 집으로 더불어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들어설 때에 모두가 엎드려서 경배를 합니다. 절을 한 게 아니라 경배(프로스퀴네오)를 한 것입니다.
순간, 본디 남 앞서기를 좋아하고 우쭐대기 잘하는 베드로가 황송해합니다. 고넬료의 경배하는 자세가 너무도 경건해서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10:26)" ---- 보십시오. 이 고넬료가 지금 베드로를 보고 있는 것입니까? 눈으로는 갈릴리의 어부 베드로를 보지마는 그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베드로를 맞아들이는 자세가 그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넬료는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10:33)." 그지없이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바라건대 우리 소망교회 교인들이 다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예배하는 시간은 바로 그와 같은 시간이어야 합니다. '저 목사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나는 여기 하나님 앞에 있다.' 그리고, 쳐다보고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한 시간에도 멍청하게 딴 생각을 하거나 졸거나 해서야 되겠습니까?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취한 자세,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자세입니다. 베드로가 생전처음 보는 이방사람의 집, 관습상 들어가서는 안될 그런 집에 들어가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는다 ----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성경의 중심입니다. 이 케리그마적 복음, 이 복음을 전하는 순간, 오늘 성경에 보니 '이 말을 할 때에'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 다음'이 아닙니다. 하는 중입니다. 헬라어 원문대로는 이 '에티'라고 하는 말이 '하는 중에'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하는 중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4절)" 실로 굉장한 말씀입니다. 성령이 바로 이 시간에 임했습니다. 고넬료의 자세는 모범적이요 대표적인 자세입니다. 높이 평가해야 됩니다. 그러한 자세에, 그러한 순간에 성령이 임합니다. 말씀이 전해지고. 성령이 임하고, 그 순간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편견도 아집도 문화적 장벽도, 심지어는 언어적인 장벽까지도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마음속에 쏙 들어옵니다. 그 말씀에 전인적으로 응답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두고 누가는 저들이 방언을 했다고 말합니다. 방언이 무엇입니까?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무너뜨리면서 복음이 소통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이 다 깨닫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고 믿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아람 말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사람으로 자기 말을 하는데, 듣는 사람은 로마사람입니다. 알아들을 턱이 없습니다. 그런데요, 말씀하면서 보니 전부 알아들어요. 믿고 받아들입니다. 순종합니다. 성령이 임하여 방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방언은 '듣는 방언'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는 방언이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타난 방언은 듣는 방언입니다. 오순절에도 베드로가 설교를 했고 각 나라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나라 말로 들었습니다. 그 많은 언어의 장벽이 다 헐렸고 마음과 뜻이 다 통해버렸습니다. 방언 했다는 장면은 바로 그런 장면입니다.
때로 외국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왔다가 나갈 때에 제가 물어보는 일이 있습니다. 말씀을 영어로 얼마나 들으셨느냐고요. 그러면 대답합니다. "아,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한마디 우스갯소리 삼아 덧붙입니다. "당신이 방언을 한다면 내가 하는 설교를 다 알아들었을 거요."
옛날에는 언어가 안 통해도 성령의 역사로 통하여 방언이라고 했는데, 요사이는 어찌된 셈인지 못 알아듣는 말하는 것이 방언이라고 해요. 무엇인가 잘못되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통하는 것입니다. 아집이나 인간적인 생각이나 언어적인 교만, 문화적인 교만, 우쭐대는 선민 사상 따위는 없습니다. 완전히 통해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의 어느 교회에 갔을 때입니다. 가만히 보니 교포 2세들이 와 앉아 있어요. 설교할 때에 우스갯소리를 하면 교인들이 웃고 슬픈 소리하면 슬퍼합니다. 그런데 앞자리에 앉아 있는 대학생들을 보니 2세들인데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아요. 그래서 설교를 마치고 물어봅니다. 얼마나 알아들었느냐고요.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대요. 그렇다면 무엇하러 왔느냐, 미국인 교회에 가면 잘 알아들을 게 아니냐고 반문했더니 대답을 합니다. 미국인 교회에 가면 알아듣기는 알아듣는데 가슴이 싸늘하다, 그러나 여기에 와 앉아 있으면 알아듣는 것은 없는데 가슴은 뜨겁다고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네가 방언을 했다."
여러분, 설교란 무슨 문자를 따지고 무슨 이치를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논리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오는 감격입니다. 그 마음에 오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내 생명을 걸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방언을 했다, 알아듣게 되었다고 말씀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성경중심적인 신학을 전개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권위의 기초요 중심입니다. 그리고,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이 성경입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성경의 해석자는 성경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 자체가 성경 해석자다 ---- 이것이 신교(新敎)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소중히 여깁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이 기록되었고 성령의 조명이 있을 때에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며, 성령이 빛을 비추어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킬 때에 우리는 성경을 깨닫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해서 성경을 읽을 때에 빨리 알아들으려고 애를 씁니다마는 여러분, 성경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마치 여자가 생선을 졸이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예쁘게 생긴 생선을 놓고 졸일 때에, 저는 음식 만들 줄을 잘 모릅니다마는, 다 양념을 한 다음에 천천히 불을 때야 된다고 합니다. 약하게, 불을 약하게 하여 느긋이 익혀야 되는데, 성질 급한 여자는 불을 세게 해 놓고는 이리 뒤지고 저리 뒤지고 휘적거리다가 모양을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 절대로 조급해서는 안됩니다. 내 생각이 미치지 못했고 내 인격이, 내 지식이, 내 영적인 성장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 줄 아시고 겸손한 마음으로 읽으십시오. 원형(原型)을 그르치지 마십시오. 이리 뜯어 맞추고 저리 뜯어 맞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대로 읽으십시오. 그렇게 읽어나가노라면 성령이 감동하는 중에 성경이 내게 말씀합니다.
옥타비아누스라고 인도네시아에서 활약한 유명한 부흥사가 있습니다. 그의 간증 가운데 이런 말하는 것을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부흥회를 하고 나니까 어느 교수님이 다가오더니 "당신은 자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데, 내가 읽어보니 그것은 역사서 입디다. 옛날 이야기이던데요?" "그래요? 몇 번이나 읽으셨습니까?" "열 번 읽었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오늘 저녁에는 이 성경을 머리 위에 얹어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하나님,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오늘 하나님이 내게 말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고 읽어보십시오." 그렇게 일러서 돌려보냈습니다. 그 다음에 오셨는데 보니 눈이 빨갛게 충혈 되었더랍니다. 정말로 기도하고 읽었더니, 열 번을 읽어도 옛날 이야기로만 들리던 말씀이 마침내 달리 들리더랍니다. 성경이 그대로 말씀해 주시는데 구구절절이 너무도 귀해서 밤새껏 읽었답니다.
여러분, 성경을 어떻게 보십니까? 신학적으로 이야기해보십시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Word of God waits for us in the Bible(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지금 내가 성경을 읽고 있지만 내가 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게 말씀해주실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지금 성경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제게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많이 읽어주셨습니다. 언제나 잘 때에는 성경을 읽어주셨습니다. 눈을 뜰 때에는 어머니가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떴습니다. 저는 제가 읽는 것보다 어머니가 들려주셔서 아는 성경이 더 많습니다. '성경 통독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일년 동안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에게 상을 주었는데, 언제나 저희 어머니가 상을 타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1년에 구약을 두 번, 신약을 세 번 읽으셨습니다. 상이라는 것이 별것 있습니까? 밥그릇과 숟가락이 상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밥그릇에 처음으로 밥을 담아서는 제게 주십니다. "이 밥 그릇, 내가 성경 읽고 상탄 것이다" 하시면서요.
제가 고향을 떠날 때에 어머니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꼭 내가 네게 전해준 말을 다 기억하면서 목사가 되어라.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이기 때문에 이 약속은 네가 꼭 지켜야 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성경은 너무 읽어 많이 낡고 닳아서 여기저기 꿰매고 다시 편집하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 제가 돌아오게 되면 어머니께 성경을 사다드리겠습니다." 낡은 어머니의 성경책을 어루만지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성경책이 너무 해졌어요. 글자도 큼직큼직하고 깨끗한 성경책을 한 권 사다드릴께요."
어머니의 돋보기 안경이 어머니께 잘 맞지 않아서 고생하시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좋은 돋보기 안경도 하나 사 가지고 오겠습니다." 이런 약속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며칠 전에 정확하게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3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그때의 연세 아흔 넷입니다.
오래오래 기다리며 계시다가, 조금만 더 기다리셨으면 하는데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제 어머니께 그 성경책과 그 안경을 드려서, 읽으시고 싶은 성경 많이 읽으시도록 해드리지 못한 불효의 자책이 있습니다. 아픈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무엇이 소중합니까?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자식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재산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옆에서 울고 있는 자녀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 누가 위로를 주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말씀뿐입니다. 이 말씀만이 내 생명을 보호하시고 나를 인도하십니다. 오직 이 말씀에 위탁하고 하나님 앞에 갑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부지런히 읽으십시다. 그 말씀이 나를 사로잡고 나를 붙들고 나를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에 내가 읽고 감동 받은, 내게 성령으로 말씀하시던 바로 그 말씀 그 구절이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사도행전 10장 40절~48절)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인간은 구조적으로 세 요소로 되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몸과 혼과 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에게 생리학적 존재가 있습니다. 바이얼라지컬 비잉(biological being)입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에게 이성이 있고 이성의 능력에 따라서 비판도 하고 추리도 합니다. 바로 철학적 존재 ---- 필로소피컬 비잉(Philosophical being)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야 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가져야만 하는 영적 존재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존재'라고도 이름합니다. 시얼라지컬 비잉(theological being) 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 존재가 있어서 이것이 하나의 인격으로 종합된 구조를 가지고 인간은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쪽이 주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가 주도하는 삶을 삽니다. 자나깨나 육체적 욕망에 끌려 삽니다. 육체 혹은 육욕주도적인 인간이라 하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철저하게 이성주도적인 인간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먹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일로써 행복합니다. 즉 철학적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존재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될 때에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사랑을 느끼며,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참된 평화를 느끼고 힘을 얻습니다. 이런 사람은 영 주도적인 인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몸은 분명히 땅에서 나는 식물을 먹고 삽니다. 혼은 교육을 통해서 지식과 지혜를 먹고 삽니다. 계속 공부하지 않고 계속 지혜를 추구하지 않으면 어느 사이에 스스로가 동물적인 존재로 전락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많은 지식, 많은 교양을 얻어야 합니다.
영은 하나님께로서 오는 말씀을 먹고 삽니다. 예수님께서 광야로 나가 시험을 받으실 때에 마귀와의 대결에서 귀중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사람이 육체적인 존재가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영적 존재라고 하는 것을 단적으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먹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영양실조(營養失調)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양이 실조되면 여러 가지 병을 얻게 됩니다. 건강을 잃어버릴 때에 모든 것이 잘못되어 나가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영양실조, 참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영양 불균형도 또한 문제거리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보아도 몸이 약한 아이들은 하나같이 편식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1학년생일 때에 고아원에 가서 고아들과 몇 달 동안 살아본 일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영양 불균형으로 눈이 잘 안 보여 장님처럼 더듬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그 원인을 알아봐서 그에 따라 배급으로 주던 비타민이 있었습니다. 색깔이 빨간 비타민 정인데, 이것을 그 아이들에게 먹였더니 이틀이 지나자 눈을 번쩍 뜹니다. 비타민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무엇이건 먹게 됩니다. 허하게 되면 입맛이 더해져서 평소에 가리던 음식도 달아보이는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나라 대통령께서 영국을 여행하시다가 한국사람은 개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영국인들이 데모를 하는 바람에 난처했다고 합니다.
워낙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보니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만나면 기분이 나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남의 나라 습관이나 문화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비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월남전에서 포로된 미군들이 포로 교환 때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포로되어 있을 때에 견디기 어려우니까 쥐를 잡아 먹고, 뱀을 잡아 먹고, 고양이도 잡아 먹었다고 합니다. 구워 먹은 것도 아니고 날로 먹었답니다. 배가 고프고보면 이처럼 개고 고양이고 간에 닥치는대로 먹는 것입니다.
육신의 굶주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신적으로도 허하고, 영적으로 허한 사람이 되면 이 또한 마구잡이로 먹어치우게 됩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에 빠지고, 그릇된 사상에 빠지고,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이단 사상에까지도 천방지축 빠져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허해서 그렇습니다. 좋지 않은 음식이 아니라 독소(毒素)를 먹는 것입니다.
요새 사람들은 죽어도 시체가 썩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말까지 생겨났습니다. 방부제 섞인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렇다나요.
정말 그렇습니다. 독소를 먹는다는 것은 예사로운 문제가 아닙니다. 배고프면 먹어야 하지만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풍부한 영양가요, 둘째는 적당해야 합니다.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먹지 말 것이며 내 몸에 꼭 필요한 만큼 섭취해야 합니다. 남이 좋아한다고 내 몸에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내게 필요한 것을 적당하게 먹는 것입니다. 셋째는 맛있게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맛을 내어야 합니다. 같은 음식이라도 맛을 내고 또 맛있게 먹고 감사함으로 먹는 데에 건강의 비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영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 보면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출생하는 것입니다. 듣지 않는 복음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반드시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옥토라 하더라도 씨가 뿌려지지 않고 자라는 법은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말씀 ---- 이 객관적 계시의 역사가 아니고는 결코 생명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 안에서 우리는 태어납니다. 그 다음에는 말씀을 먹고 성장합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양육됩니다.
학자들은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두고 '제2의 오순절'이라 별명을 붙여 일컫기도 합니다. 첫 번째 오순절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성령 강림사건이 있은 그 오순절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사람들에게 나타났던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것은 가이사랴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전적으로 이방인에게 나타난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유대 사람들이 보고 '이방사람들도 성령을 받는다'며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성령받는데 왜 놀랍니까? 저들의 생각에는 '이방사람들이 성령을 받다니' 뜻밖이어서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고넬료는 분명 이방사람입니다. 로마 군인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고넬료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로마 군인으로서 중동 지구 예루살렘 근방에 와서 식민지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로마군의 장교라면 당연히 저희 황제에게 충성할 것이 아닙니까? 로마 나름의 우상이 있고 로마의 문화가 있고 로마의 법이 있고 로마의 질서가 있습니다, 그 로마를 세계에서 제일 높이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긍지에 살아가는 이 로마 장교가 종교에 관한 한은 자기네의 속국이지마는 예루살렘 종교가 옳다고 믿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바른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서 자기네 속국의 종교인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갸륵하지 않습니까?
돈 몇푼 가졌다고 교만떠는 사람들을 흔히 봅니다. 어쩌다 인도 받아서 교회에 나갔다가 보아하니 워낙 가난한 사람들, 너저분한 사람들만 모였다나요? 그래서 못 나가겠다고 하더랍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에 비하면 이 고넬료는 얼마나 영적 인격이 훌륭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2절로 보면 온 집으로 더불어 기도하고 구제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사람입니다. 구약적인 신앙인으로서 거의 완벽하게 경건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서 천사를 만나게 해주십니다. 천사의 음성을 듣고 천사의 지시대로 그는 욥바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을 청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말할 수 없이 감격하곤 합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를 비교해봅시다.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입니다. 턱수염이 더부룩한 영감님이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습니다. 시쳇말로 볼품없는 인간이지요.
높은 자리에 있는 고넬료가 이 볼품없는 촌사람을 모셔옵니다.
모셔오되 예를 다합니다. 깍듯이 정중합니다. '나는 로마 황제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가. 하물며 하나님의 종을 영접하는 일임에랴. 더욱더 우러러 영접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온 집으로 더불어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들어설 때에 모두가 엎드려서 경배를 합니다. 절을 한 게 아니라 경배(프로스퀴네오)를 한 것입니다.
순간, 본디 남 앞서기를 좋아하고 우쭐대기 잘하는 베드로가 황송해합니다. 고넬료의 경배하는 자세가 너무도 경건해서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10:26)" ---- 보십시오. 이 고넬료가 지금 베드로를 보고 있는 것입니까? 눈으로는 갈릴리의 어부 베드로를 보지마는 그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베드로를 맞아들이는 자세가 그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넬료는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10:33)." 그지없이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바라건대 우리 소망교회 교인들이 다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예배하는 시간은 바로 그와 같은 시간이어야 합니다. '저 목사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나는 여기 하나님 앞에 있다.' 그리고, 쳐다보고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한 시간에도 멍청하게 딴 생각을 하거나 졸거나 해서야 되겠습니까?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취한 자세,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자세입니다. 베드로가 생전처음 보는 이방사람의 집, 관습상 들어가서는 안될 그런 집에 들어가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는다 ----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성경의 중심입니다. 이 케리그마적 복음, 이 복음을 전하는 순간, 오늘 성경에 보니 '이 말을 할 때에'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 다음'이 아닙니다. 하는 중입니다. 헬라어 원문대로는 이 '에티'라고 하는 말이 '하는 중에'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하는 중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4절)" 실로 굉장한 말씀입니다. 성령이 바로 이 시간에 임했습니다. 고넬료의 자세는 모범적이요 대표적인 자세입니다. 높이 평가해야 됩니다. 그러한 자세에, 그러한 순간에 성령이 임합니다. 말씀이 전해지고. 성령이 임하고, 그 순간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편견도 아집도 문화적 장벽도, 심지어는 언어적인 장벽까지도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마음속에 쏙 들어옵니다. 그 말씀에 전인적으로 응답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두고 누가는 저들이 방언을 했다고 말합니다. 방언이 무엇입니까?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무너뜨리면서 복음이 소통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이 다 깨닫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고 믿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아람 말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사람으로 자기 말을 하는데, 듣는 사람은 로마사람입니다. 알아들을 턱이 없습니다. 그런데요, 말씀하면서 보니 전부 알아들어요. 믿고 받아들입니다. 순종합니다. 성령이 임하여 방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방언은 '듣는 방언'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는 방언이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타난 방언은 듣는 방언입니다. 오순절에도 베드로가 설교를 했고 각 나라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나라 말로 들었습니다. 그 많은 언어의 장벽이 다 헐렸고 마음과 뜻이 다 통해버렸습니다. 방언 했다는 장면은 바로 그런 장면입니다.
때로 외국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왔다가 나갈 때에 제가 물어보는 일이 있습니다. 말씀을 영어로 얼마나 들으셨느냐고요. 그러면 대답합니다. "아,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한마디 우스갯소리 삼아 덧붙입니다. "당신이 방언을 한다면 내가 하는 설교를 다 알아들었을 거요."
옛날에는 언어가 안 통해도 성령의 역사로 통하여 방언이라고 했는데, 요사이는 어찌된 셈인지 못 알아듣는 말하는 것이 방언이라고 해요. 무엇인가 잘못되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통하는 것입니다. 아집이나 인간적인 생각이나 언어적인 교만, 문화적인 교만, 우쭐대는 선민 사상 따위는 없습니다. 완전히 통해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의 어느 교회에 갔을 때입니다. 가만히 보니 교포 2세들이 와 앉아 있어요. 설교할 때에 우스갯소리를 하면 교인들이 웃고 슬픈 소리하면 슬퍼합니다. 그런데 앞자리에 앉아 있는 대학생들을 보니 2세들인데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아요. 그래서 설교를 마치고 물어봅니다. 얼마나 알아들었느냐고요.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대요. 그렇다면 무엇하러 왔느냐, 미국인 교회에 가면 잘 알아들을 게 아니냐고 반문했더니 대답을 합니다. 미국인 교회에 가면 알아듣기는 알아듣는데 가슴이 싸늘하다, 그러나 여기에 와 앉아 있으면 알아듣는 것은 없는데 가슴은 뜨겁다고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네가 방언을 했다."
여러분, 설교란 무슨 문자를 따지고 무슨 이치를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논리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오는 감격입니다. 그 마음에 오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내 생명을 걸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방언을 했다, 알아듣게 되었다고 말씀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성경중심적인 신학을 전개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권위의 기초요 중심입니다. 그리고,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이 성경입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성경의 해석자는 성경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 자체가 성경 해석자다 ---- 이것이 신교(新敎)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소중히 여깁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이 기록되었고 성령의 조명이 있을 때에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며, 성령이 빛을 비추어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킬 때에 우리는 성경을 깨닫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해서 성경을 읽을 때에 빨리 알아들으려고 애를 씁니다마는 여러분, 성경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마치 여자가 생선을 졸이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예쁘게 생긴 생선을 놓고 졸일 때에, 저는 음식 만들 줄을 잘 모릅니다마는, 다 양념을 한 다음에 천천히 불을 때야 된다고 합니다. 약하게, 불을 약하게 하여 느긋이 익혀야 되는데, 성질 급한 여자는 불을 세게 해 놓고는 이리 뒤지고 저리 뒤지고 휘적거리다가 모양을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 절대로 조급해서는 안됩니다. 내 생각이 미치지 못했고 내 인격이, 내 지식이, 내 영적인 성장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 줄 아시고 겸손한 마음으로 읽으십시오. 원형(原型)을 그르치지 마십시오. 이리 뜯어 맞추고 저리 뜯어 맞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대로 읽으십시오. 그렇게 읽어나가노라면 성령이 감동하는 중에 성경이 내게 말씀합니다.
옥타비아누스라고 인도네시아에서 활약한 유명한 부흥사가 있습니다. 그의 간증 가운데 이런 말하는 것을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부흥회를 하고 나니까 어느 교수님이 다가오더니 "당신은 자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데, 내가 읽어보니 그것은 역사서 입디다. 옛날 이야기이던데요?" "그래요? 몇 번이나 읽으셨습니까?" "열 번 읽었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오늘 저녁에는 이 성경을 머리 위에 얹어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하나님,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오늘 하나님이 내게 말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고 읽어보십시오." 그렇게 일러서 돌려보냈습니다. 그 다음에 오셨는데 보니 눈이 빨갛게 충혈 되었더랍니다. 정말로 기도하고 읽었더니, 열 번을 읽어도 옛날 이야기로만 들리던 말씀이 마침내 달리 들리더랍니다. 성경이 그대로 말씀해 주시는데 구구절절이 너무도 귀해서 밤새껏 읽었답니다.
여러분, 성경을 어떻게 보십니까? 신학적으로 이야기해보십시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Word of God waits for us in the Bible(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지금 내가 성경을 읽고 있지만 내가 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게 말씀해주실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지금 성경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제게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많이 읽어주셨습니다. 언제나 잘 때에는 성경을 읽어주셨습니다. 눈을 뜰 때에는 어머니가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떴습니다. 저는 제가 읽는 것보다 어머니가 들려주셔서 아는 성경이 더 많습니다. '성경 통독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일년 동안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에게 상을 주었는데, 언제나 저희 어머니가 상을 타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1년에 구약을 두 번, 신약을 세 번 읽으셨습니다. 상이라는 것이 별것 있습니까? 밥그릇과 숟가락이 상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밥그릇에 처음으로 밥을 담아서는 제게 주십니다. "이 밥 그릇, 내가 성경 읽고 상탄 것이다" 하시면서요.
제가 고향을 떠날 때에 어머니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꼭 내가 네게 전해준 말을 다 기억하면서 목사가 되어라.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이기 때문에 이 약속은 네가 꼭 지켜야 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성경은 너무 읽어 많이 낡고 닳아서 여기저기 꿰매고 다시 편집하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 제가 돌아오게 되면 어머니께 성경을 사다드리겠습니다." 낡은 어머니의 성경책을 어루만지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성경책이 너무 해졌어요. 글자도 큼직큼직하고 깨끗한 성경책을 한 권 사다드릴께요."
어머니의 돋보기 안경이 어머니께 잘 맞지 않아서 고생하시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좋은 돋보기 안경도 하나 사 가지고 오겠습니다." 이런 약속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며칠 전에 정확하게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3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그때의 연세 아흔 넷입니다.
오래오래 기다리며 계시다가, 조금만 더 기다리셨으면 하는데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제 어머니께 그 성경책과 그 안경을 드려서, 읽으시고 싶은 성경 많이 읽으시도록 해드리지 못한 불효의 자책이 있습니다. 아픈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무엇이 소중합니까?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자식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재산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옆에서 울고 있는 자녀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 누가 위로를 주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말씀뿐입니다. 이 말씀만이 내 생명을 보호하시고 나를 인도하십니다. 오직 이 말씀에 위탁하고 하나님 앞에 갑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부지런히 읽으십시다. 그 말씀이 나를 사로잡고 나를 붙들고 나를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에 내가 읽고 감동 받은, 내게 성령으로 말씀하시던 바로 그 말씀 그 구절이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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