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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 여호와를 알자(호세아 6장 1~6절)

by 【고동엽】 2024.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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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 여호와를 알자(호세아 6장 1~6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내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나는 인내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호화스러운 요트 한 척이 침몰했습니다. 침몰 직전, 해안 구조대에 SOS신호가 왔습니다. 구조대 통신원이 회신을 했습니다. "알았다, 곧 구하러 가겠다. 현재의 당신 위치를 알려라." 이 때에 대답이 왔습니다. "나는 한국에 있는 모 은행의 은행장이다." 그리고 회신이 뚝 끊어졌습니다. 결국 이 배는 구조되지 못했습니다. "What is your position?"---이 말을 잘못 알아들은 탓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지금 내가 어디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은행장이라는 지위가 중요한 것입니까? 그의 지위가 무슨 상관이 있고, 그의 명예가 무슨 상관이 있고, 그의 재산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는 지금 구조가 필요합니다, 여기는 어디입니다---바로 이것을 말해야 했습니다. 난센스지만 이것은 정말로 기막힌 사건이었습니다. 현 시점에서 내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이 시점에서 나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그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범죄한 아담이 에덴동산에 숨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은 대답했습니다. "나 여기 숨었습니다." 꼭 어린아이들 숨바꼭질하는 것 같아요. 어디 있니? 나 여기 있다---숨지 말아야 되지요. 상태를 묻고 계심입니다. 그런데 '내가 여기 숨었다'---이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대답이 무엇입니까?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이 대답을 듣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내가 여기 숨었습니다"---이것으로 끝났습니다. 여기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정신병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정신과 전문의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상하게도 정신병자들은 하나같이 교만하다고 합니다. 제정신이 들었건 정신이 없건 간에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전혀 없다고 합니다. 다 많이 알고, 잘났고, 똑똑하다고 한답니다. 그래,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정신병자가 "나는 나폴레옹이다"라고 소리질렀습니다. 그러니까 뒤에 있던 정신병자가 "네가 어째서 나폴레옹이냐?"하고 따집니다. 또 다른 정신병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언제 너를 나폴레옹으로 임명했느냐?"---저마다 잘난 것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교만한 자가 정신병자 된다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보면 도리가 없습니다. 들려지는 것도 없습니다. 가장 어리석고, 가장 우둔하고, 가장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꽉 막힌 것입니다.
호세아 4장 6절은 말씀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자본이 없는 게 아니요, 기술이 없는 게 아닙니다. 지식이 없어서 망합니다. 알고 보면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생각이 부족해서 망하고, 정치적으로도 무식해서 그렇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죄는 한 가지뿐인데 그것이 무식이다." 알아야 될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련의 모든 도덕적인 패륜행위도 알고보면 바로 알아야 될 것을 모르는 데서부터 비롯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면서 당신에게 못을 박고 십자가를 지우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 : 34)"---그렇습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식의 소치입니다. 그런고로 꼭 알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합니다.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그노티 세 아우톤"---"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습니다. 우주의 이치, 우주의 원리, 만물의 아르케…… 사람들은 스스로 안다고 자랑하는 게 많았어요.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볼 때에는 정말 알아야 될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너 자신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는데 그 외의 아는 것이 무슨 소용 있느냐 함입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교육 방면의 어느 전문가가 얘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회자가 "며칠 있으면 수험생들이 시험을 치르는데 남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으면 좋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제 다른 책을 보지 말고, 사람들을 만나지도 말고, 이미 보았던 책과 노트를 보면서 중요한 점만 체크하십시오." 대단히 중요한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나이 쉰 살 넘었거든 딴 생각하지 마세요. 이제는 하던 일만 하세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만 골라서 하세요. 가능한 한 머리고 깨끗이 비우고, 집중적으로 알아야 될 것만을 아십시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자신에 대한 장례식 조사(弔詞)를 생각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도 자신의 장례식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프로그램을 자신이 만들어보세요. 여러분에 대한 조사를 여러분 자신이 한번 써보세요. 누구는 이런 사람이었노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로 결론을 내려야 합니까? 이제는 알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합니다.
꼭 알아야 할 것만 알아야 합니다. 쓸데없는 것을 많이 알면 머리만 복잡해지고 실제로 알아야 될 것을 모르게 됩니다. 내 본래성을 알고, 내 마지막 운명을 알고, 그리고 나 자신의 근본 본체에 비추어 오늘 내가 무엇을 해야 될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아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나를 들여다본다고 압니까, 거울을 본다고 압니까? 일평생 자성(自省)하고 반성해도 자신을 모릅니다. 적어도 성경이 증거하고 또 우리가 신앙인으로 간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 때에 나 자신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 없이는 내 지식이 절대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마치 자식된 나 자신을 아는 것이 부모를 아는 길인 것처럼 말입니다. 무릇 부모님의 사랑과 부모님의 은총을 알고야 나 자신을 알게 됩니다.
유명한 철학자 파스칼은 그의 저서「팡세」에서 말하기를, 정신적 상태로 볼 때에 인간은 세 종류로 나뉜다고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무관심하게 사는 방임된 인간입니다. 자기를 내버린 인간입니다. 되는대로 살다가 말자, 하나님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이렇게 관심 없이 살다보니 자기 자신도 잃어버리고, 내가 누구냐 하는 것조차 물어보지 못하고 사는, 버려진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아직 하나님을 발견 못했으나 찾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사는 철학적 인간입니다. 무지개를 좇아가는 어린아이처럼'어디엔가 있겠지'하고 하나님의 세계를 찾아 헤맵니다. 그저 헤매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이렇듯 종교적이요 철학적인 인간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섬기며 하나님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는 줄 알았는데 이미 나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그실 하나님께서 벌써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고 그 사랑을 매일매일 확증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을 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6절)"---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이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감상이 아닙니다. 지식이 아닙니다. 생각을 바꾼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몸을 움직여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본문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우체국에 편지 부칠 일이 있어서 갔는데, 한 아주머니가 전보문을 쓰지 못하고 울며 손을 떨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그녀에게 말을 건네었습니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예, 내가 손이 떨려서 쓸 수가 없습니다. 좀 대신 써주세요." "왜 그러십니까?" "내 딸이 나하고 의견이 맞지 않는다면서 집을 나갔습니다. 1년 동안 종적을 알 수 없었는데 이제야 딸이 있는 곳의 주소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전보를 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 뭐라고 쓸까요?" "딱 한마디만 써주세요. 그냥 '집으로 돌아오너라, 어머니'라고요." 그렇습니다. 더는 아무 말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돌아 오라'---여기에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이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과거, 미래…… 전혀 묻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그것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응답은 돌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저 앉아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아느니 모르느니, 이렇게 될 것이냐 저렇게 될 것이냐---상관할 것 없습니다. 그냥 돌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이요, 진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2절)"---이제는 그 안에서, 믿음 안에서, 경건한 자세로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 것이라 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3절)." 여러분,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속 알면서 그 깊은 세계, 그 높은 세계의 엄청난 능력을 순간순간 확인하면서 여호와를 알아야 더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흔히 이런 일이 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서 반항할 때가 있어요. 부모가 아무리 설명해도 자녀가 못 알아듣습니다. 이 때 마지막으로 부모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너도 앞으로 결혼해서 자식을 키워봐라. 내 마음을 알 것이다." 정말이지 그 때가 될 때까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지금은 무엇을 아느니 모르느니 해보았자 다 피상적입니다. 아이들이 부모님 은혜에 관하여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 중에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고"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참, 말은 잘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뭘 안다는 얘기입니까? 정말 내가 부모 되어봐야 압니다. 저는 어느 겨울날, 대문간에 서 있는 한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아, 이 추운데 왜 나와 서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았더니 그 어머니는 딸이 아직 안 돌아와서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집안에서 기다리시지 이런다고 빨리 돌아옵니까?"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내 딸만했을 때에 집에 늦게 돌아오면 어머니가 문밖에 서 있다가 울면서 나를 맞이했었습니다. 그 때에 나는 무엇 때문에 밖에 서서 우느냐고 그랬지요. 지금 그 때를 생각하고 있어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호와를 알자"---여기서 안다는 것은 히브리말로 '디아트'라고 하는데 이 말은 '야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는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결혼생활이나 부부관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생각으로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성적 능력을 다해서, 이성적 기능을 발동하여 비판하고, 판단하고, 종합분석 하고, 논리적으로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추상적 지식입니다.
또 하나, 경험으로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경험에 부딪쳐서 알고, 눈으로 보고 알고, 손으로 만져서 아는 체험적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만큼 봅니다. 본다고 다 보는 게 아닙니다. 생각이 있어야 보여집니다. 나아가서는 사랑한 만큼만 깨닫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지 않습니까? 이상하게도 사랑이 식어지면 보이는 게 없어요. 들려지지도 않아요. 아무 것도 모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만큼만 알 수 있고, 알게 되어 있습니다. 오묘한 이치입니다. 그런고로 사랑으로 알고, 인격으로 알고, 믿음으로 아는 이 지식을 연구하는 것---이것이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의 해결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나를 아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해서 많이 압니다. 하나님의 주변적 이야기에 대해서 많이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을 모릅니다. 칼 바르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알 수는 없으나 만날 수는 있다." 이 만난다고 하는 종합적 인식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압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중세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안셈은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믿는다. 믿음이 없이는 알 수 없기 때문에"---그렇습니다. 믿고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무엇을 알아야 하겠습니까? 어느 측면을 알아야 하겠습니까? 나와의 관계에서 무엇을 알아야 할 것입니까? 오늘의 성경은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6절)." 여러분, 하나님의 진노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길,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분을 진정으로 아는 길입니다.
우리는 지진이나 전염병, 홍수, 그리고 갖가지 도덕적 타락 등에 대하여 날마다 끔찍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습니다. 많은 사건들을 접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됩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노 속에 말씀이 있고, 진노 속에 경고가 있고, 진노 속에 예언이 있고, 진노 속에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많은 시련을 겪는다고 해서, 혹은 내가 고통을 겪는다고 해서 내 죄가 다 사해진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죄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다음에 있을 무서운 심판에 대한 예고입니다. 예언적 사건들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일련의 어떤 고통을 당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처럼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이 시작입니다. 회개를 촉구하시는 주님의 무서운 경고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치시는 매를 맞으면서 구체적으로 당신의 사랑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때때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나무라기도 하고, 혹은 매질을 합니다. 이것을 사랑으로 알고 고맙게 받아들이는 자가 있다면 그는 훌륭한 자녀입니다.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픔으로만 생각하고, 심지어는 조금만 크면 집을 나가겠다고 반감이나 악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일은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특징이 여기 있습니다. 그 치시는 매로써 사랑을 느낍니다. 그 진노에서 하나님의 구체적이고 선택적인 사랑을 체험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길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건, 많은 진노적 사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역력하게, 강하게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그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됩니다.
동시에 성경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그렇습니다. 치시고 싸매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회개만 하면 곧 싸매어 주십니다. 치유하시는 하나님---때때로 우리는 그러한 아버지나 어머니를 봅니다. 만부득이 자녀를 때려놓고, 자녀가 잠이 들었을 때에 그 상처란 것을 어루만지면서 홀로 웁니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곧 싸매어 줍니다. 그런데 가끔 이런 경우가 있어요.
아이들을 키워보면 다 같은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어떤 아이는 때리려고 시늉만 해도 벌써 곧 잘못했다고 하는데, 어떤 아이는 고집이 세어 가지고 끝까지 잘못했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리다가 지친 나머지 부모가 이렇게까지 말하지 않습니까? "제발 잘못했다고 해다오. 부탁이다." 그래야 매를 멈추지 않겠습니까? "잘못했다고 해다오"---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이 불붙는 마음, 이 귀한 사랑이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사야 1장 5, 6절을 그대로 들으세요.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 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아무리 때려도 돌아오지 않아요. 아무리 매를 맞고도 정신을 못 차려요. 그래서 지금 때리시는 아버지께서 지치셨어요.
그래서 어찌하여 더 맞으려고 하느냐 하심입니다. 이 얼마나 불붙는 사랑입니까? 이러하신 하나님을 알아달라 하심입니다. 특별히 곧 치유하시리라는 오늘의 본문말씀을「공동번역성서」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틀이 멀다하고 다시 살려주시며 사흘이 멀다하고 다시 일으켜주시리니'---'당장에 그저 회개만 하면 즉각적으로 바로 영접하시고 치유해주실 것이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다오'하심입니다.
이 세대를 '지식의 홍수' 세대라고 합니다. 5년마다 지식이 배로 증가한다고 합니다.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이치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어쩌면 그렇게도 무식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점점 더 어두워가기에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작 뉴턴은 자신의 일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세상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여지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나 자신은 해변에서 노는 소년과 같이 예쁜 조개껍질을 들고 즐거워하는 것과 같은 생을 살고 있다"---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다 몰라도 괜찮습니다. 사실 아이작 뉴턴은 말년에 기억상실증에 빠져서 모든 것을 다 망각해버렸습니다. 자기 이름도 나이마저도 잊었습니다. 답답해하던 제자들이 그런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선생님이 알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내가 아는 것은 두 가지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께서 내 구주라는 것"---여러분, 이 두 가지면 충분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괜찮습니다. 유․무식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하나님만을 똑바로 알고, 일대일로 하나님의 그 놀랍고 구체적인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에 나 자신을 알고, 내 운명도 함께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힘써 여호와를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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